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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高麗

북사 사이전 北史 四夷傳 · 이연수(李延壽) · 659년 (당 현경 4) · 단락 23 · 한자 3,818자 · 낭독 15.3분

「북사 사이전」 한 권 「고구려」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북조 네 왕조가 본 동방. 알에서 난 주몽 신화의 온전한 꼴, 장수왕 백 년의 외교(혼삿말과 딸의 죽음), 개로왕의 표문, 그리고 물길·거란·실위·유구·왜까지 열네 갈래 — 수 양제의 패망을 「덕을 넓히는 자는 창성하고 땅을 넓히는 자는 망한다」로 맺는다.

1알에서 난 주몽

高句麗,其先出夫餘。王嘗得河伯女,因閉於室內,爲日所照,引身避之,日影又逐,既而有孕,生一卵,大如五升。夫餘王棄之與犬,犬不食;與豕,豕不食;棄于路,牛馬避之;棄於野,衆鳥以毛茹之。王剖之不能破,遂還其母。母以物裹置暖處,有一男破而出。及長,字之曰朱蒙。其俗言「朱蒙」者,善射也。夫餘人以朱蒙非人所生,請除之。王不聽,命之養馬。朱蒙私試,知有善惡,駿者減食令瘦,駑者善養令肥。夫餘王以肥者自乘,以瘦者給朱蒙。後狩于田,以朱蒙善射,給之一矢。朱蒙雖一矢,殪獸甚多。夫餘之臣,又謀殺之,其母以告朱蒙,朱蒙乃與焉違等二人東南走。中道遇一大水,欲濟無樑。夫餘人追之甚急,朱蒙告水曰:「我是日子,河伯外孫,今追兵垂及,如何得濟?」於是魚鱉爲之成橋,朱蒙得度。魚鱉乃解,追騎不度。朱蒙遂至普述水,遇見三人,一著麻衣,一著衲衣,一著水藻衣,與朱蒙至紇升骨城,遂居焉。號曰高句麗,因以高爲氏。其在夫餘妻懷孕,朱蒙逃後,生子始閭諧。及長,知朱蒙爲國王,即與母亡歸之。名曰閭達,委之國事。

고구려는 그 선조가 부여에서 나왔다. 부여왕이 일찍이 하백의 딸을 얻어 방 안에 가두었는데, 햇빛이 비추므로 몸을 이끌어 피하니 해 그림자가 또 따라와, 이윽고 아기를 배어 알 하나를 낳으니 크기가 닷 되들이만 하였다. 부여왕이 개에게 버렸으나 개가 먹지 않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도 먹지 않고, 길에 버리니 소와 말이 피하고, 들에 버리니 뭇 새가 깃털로 덮어 주었다. 왕이 쪼개려 했으나 깨지 못하여 드디어 그 어미에게 돌려주었다.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사내아이 하나가 껍질을 깨고 나왔다. 자라매 자(字)를 주몽이라 하니, 그 나라 말에 「주몽」은 활 잘 쏜다는 뜻이다. 부여 사람들이 주몽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여 없애기를 청했으나 왕이 듣지 않고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이 몰래 시험하여 좋고 나쁨을 알고서, 준마는 먹이를 줄여 여위게 하고 둔한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니, 부여왕이 살찐 것은 제가 타고 여윈 것을 주몽에게 주었다. 뒤에 들에서 사냥할 때 주몽이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 하나만 주었는데, 주몽은 화살 하나로도 잡은 짐승이 몹시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 죽이기를 꾀하니 그 어미가 주몽에게 알리매, 주몽이 이에 언위 등 두 사람과 동남으로 달아났다. 중도에 큰 물을 만났는데 건너려 해도 다리가 없고 부여 사람의 추격은 몹시 급하였다. 주몽이 물에 고하기를 「나는 해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지금 쫓는 군사가 다가오니 어찌해야 건너랴」 하니,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이루어 주몽이 건넜고,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지니 뒤쫓던 기병은 건너지 못했다. 주몽이 드디어 보술수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나니, 하나는 삼베옷, 하나는 기운 옷, 하나는 마름옷을 입었는데,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에 이르러 드디어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그로써 고(高)를 성씨로 삼았다. 부여에 있던 아내가 아기를 배었다가 주몽이 도망한 뒤에 아들 시려해를 낳으니, 자라서 주몽이 나라 임금이 된 것을 알고 곧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 돌아왔다. 이름을 여달이라 하고 나랏일을 맡겼다.

2부여를 아우르다

朱蒙死,子如栗立。如栗死,子莫來立,乃併夫餘。

주몽이 죽고 아들 여률이 서고, 여률이 죽고 아들 막래가 서서 이에 부여를 아울렀다.

3고구려현과 왕망

漢武帝元封四年,滅朝鮮,置玄菟郡,以高句麗爲縣以屬之。漢時賜衣幘朝服鼓吹,常從玄菟郡受之。後稍驕,不復詣郡,但於東界築小城受之,遂名此城爲幟溝漊。「溝漊婁」者,句麗「城」名也。王莽初,發高句麗兵以伐胡,而不欲行,莽強迫遣之,皆出塞爲寇盜。州郡歸咎于句麗侯騶,嚴尤誘而斬之。莽大悅,更名高句麗,高句麗侯。光武建武八年,高句麗遣使朝貢。

한 무제 원봉 사년에 조선을 멸하고 현도군을 두어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붙였다. 한나라 때 옷과 두건과 조복과 고취를 내리면 늘 현도군에서 받았는데, 뒤에 차츰 교만해져 다시 군에 가지 않고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쌓아 받으니, 드디어 이 성을 책구루라 이름하였다. 「구루」란 구려 말로 성(城)이다. 왕망 초에 고구려 군사를 내어 호(胡)를 치게 했는데 가려 하지 않으니, 망이 억지로 보내매 다 새외로 나가 도적이 되었다. 주군이 허물을 구려후 추(騶)에게 돌리니 엄우가 꾀어 목을 베었다. 망이 크게 기뻐하며 고구려를 하구려라 이름을 고치고 하구려후라 하였다. 광무제 건무 팔년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4궁이 요동을 치다

至殤、安之間,莫來裔孫宮,建寇遼東。玄菟太守蔡風討之,不能禁。

상제·안제 즈음에 막래의 후손 궁(태조왕)이 잇달아 요동을 노략하니, 현도태수 채풍이 쳤으나 막지 못했다.

5백고

宮死,子伯固立。順、和之間,復數犯遼東,寇抄。靈帝建寧二年,玄菟太守耿臨討之,斬首虜數百級,伯固乃降,屬遼東。公孫度之雄海東也,伯固與之通好。

궁이 죽고 아들 백고가 즉위하였다. 순제·환제 사이에 다시 자주 요동을 범해 노략하였다. 영제 건녕 이년에 현도태수 경림이 쳐서 수백 급을 베니 백고가 이에 항복하여 요동에 붙었다. 공손탁이 해동에서 웅거하자 백고가 그와 통호하였다.

6이이모의 새 나라

伯固死,子伊夷摸立。伊夷摸自伯固時,已數寇遼東,又受亡胡五百餘戶。建安中,公孫康出軍擊之,破其國,焚燒邑落,降胡亦叛。伊夷摸更作新國。其後伊夷摸復擊玄菟,玄菟與遼東合擊,大破之。

백고가 죽고 아들 이이모가 즉위하였다. 이이모는 백고 때부터 이미 자주 요동을 노략했고 또 도망한 호(胡) 오백여 호를 받아들였다.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군사를 내어 쳐서 그 나라를 깨뜨리고 읍락을 불사르니 항복했던 호도 배반하였다. 이이모가 새 나라를 다시 세웠다. 그 뒤 이이모가 다시 현도를 치니, 현도가 요동과 힘을 합쳐 쳐서 크게 깨뜨렸다.

7관구검이 환도를 도륙하다

伊夷摸死,子位宮立。始位宮曾祖宮,生而目開能視,國人惡之。及長凶虐,國以殘破。及位宮亦生而視人,高麗呼相似爲“位”,以爲似其曾祖宮,故名位宮。位宮亦有勇力,便鞍馬,善射獵。魏景初二年,遣太傅、司馬宣王率衆討公孫文懿,位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正始三年,位宮寇遼西安平。五年,幽州刺史毌丘儉將萬人出玄菟,討位宮,大戰於沸流。敗走,儉追至赬峴,懸車束馬登丸都山,屠其所都。位宮單將妻息遠竄。六年,儉復討之,位宮輕將諸加奔沃沮。儉使將軍王頎追之,絕沃沮千餘里,到肅慎南,刻石紀功。又刊丸都山、銘不耐城而還。其後,復通中夏。

이이모가 죽고 아들 위궁(동천왕)이 즉위하였다. 처음 위궁의 증조 궁이 나면서 눈을 뜨고 볼 수 있어 나라 사람들이 미워했는데, 자라서 흉포하니 나라가 잔파되었다. 위궁도 나면서 사람을 보니, 고구려에서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 부르므로, 증조 궁을 닮았다 하여 위궁이라 이름한 것이다. 위궁도 용력이 있고 말타기에 익숙하며 사냥을 잘하였다. 위 경초 이년에 태부 사마선왕(사마의)이 무리를 거느리고 공손문의를 치니, 위궁이 주부와 대가에게 수천 명을 거느리고 군사를 돕게 하였다. 정시 삼년에 위궁이 요서 안평을 노략하고, 5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로 나와 위궁을 치니 비류에서 크게 싸웠다. 위궁이 패해 달아나니 검이 정현까지 쫓아가, 수레를 매달고 말을 묶어 환도산에 올라 그 도읍을 도륙하였다. 위궁이 홀로 처자를 데리고 멀리 달아났다. 6년에 검이 다시 치니 위궁이 가벼운 차림으로 제가(諸加)를 거느리고 옥저로 달아났다. 검이 장군 왕기를 시켜 쫓아 옥저를 천여 리 지나 숙신 남쪽 지경에 이르러 돌에 공을 새기고, 또 환도산에 새기고 불내성에 명(銘)하고 돌아왔다. 그 뒤 다시 중하(中夏)와 통했다.

8을불리의 침입

晉永嘉之亂,鮮卑慕容廆據昌黎大棘城,元帝授平州刺史。位宮玄孫乙弗利頻寇遼東,廆不能制。

진(晉) 영가의 난에 선비 모용외가 창려 대극성에 웅거하니 원제가 평주자사를 주었다. 위궁의 현손 을불리(미천왕)가 자주 요동을 노략했으나 외가 제어하지 못했다.

9고국원왕의 수난

弗利死,子釗代立。魏建國四年,慕容廆子晃伐之,入自南陝,戰於木底,大破釗軍。追至丸都。釗單馬奔竄,晃掘釗父墓,掠其母妻、珍寶、男女五萬餘口,焚其室,毀丸都城而還。釗後爲百濟所殺。

을불리가 죽고 아들 쇠(고국원왕)가 대신 즉위하였다. 위(북위) 건국 사년에 모용외의 아들 황(모용황)이 치는데, 남협으로 들어와 목저에서 싸워 쇠의 군사를 크게 깨뜨리고 환도까지 쫓아갔다. 쇠가 홑말로 달아나니, 황이 쇠 아버지의 무덤을 파고 그 어머니와 아내와 진보와 남녀 오만여 명을 노략하고 그 집을 불사르고 환도성을 헐고 돌아갔다. 쇠는 뒤에 백제에게 살해되었다.

10후연과 겨루다

及晉孝武太元十年,句麗攻遼東、玄菟郡。後燕慕容垂遣其弟農伐句麗,復二郡。垂子寶以句麗王安爲平州牧,封遼東、帶方二國王,始置長史、司馬、參軍官。後略有遼東郡。

진 효무제 태원 십년에 이르러 구려가 요동·현도군을 치니, 후연 모용수가 아우 농을 보내 구려를 쳐서 두 군을 회복하였다. 수의 아들 보(모용보)가 구려왕 안(광개토왕)을 평주목으로 삼고 요동·대방 두 나라 왕에 봉하니, 처음으로 장사·사마·참군 벼슬을 두었고, 뒤에 요동군을 차지하였다.

11장수왕과 북위

太武時,釗曾孫璉始遣使者詣安東,奉表貢方物,並請國諱。太武嘉其誠款,詔下帝系名諱于其國。使員外散騎侍郎李敖拜璉爲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東夷中郎將、遼東郡公、高句麗王。敖至其所,居平壤城,訪其方事,云:去遼東南一千餘里,東至柵城,南至小海,北至舊夫餘,人戶參倍于前魏時。後貢使相尋。歲致黃金二百斤、白銀四百斤。時馮弘率衆奔之,太武遣散騎常侍封撥詔璉,令送弘。璉上書稱當與弘俱奉王化,竟不遣。太武怒,將往討之。樂平王丕等議等後舉,太武乃止。而弘亦壽爲璉所殺。

태무제 때 쇠의 증손 련(장수왕)이 처음 사자를 안동에 보내 표를 받들고 방물을 바치며 아울러 나라의 피휘를 청하였다. 태무제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황실의 계보와 이름을 그 나라에 내리게 하고, 원외산기시랑 이오를 시켜 련을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동이중랑장·요동군공·고구려왕에 제수하였다. 오가 그 사는 평양성에 이르러 그 나라 형편을 살피니, 요동에서 남으로 천여 리요, 동은 책성에 이르고 남은 소해에 이르며 북은 옛 부여에 이르고, 민호는 앞선 위(조위) 시대의 세 배라 하였다. 그 뒤 공물 사신이 잇달아 해마다 황금 이백 근과 백은 사백 근을 바쳤다. 그때 풍홍이 무리를 거느리고 달아나 붙으니, 태무제가 산기상시 봉발을 보내 련에게 조서하여 홍을 보내게 하였다. 련이 글을 올려 홍과 함께 왕화를 받들겠다 하고 끝내 보내지 않았다. 태무제가 노하여 치러 가려 했는데, 낙평왕 비 등이 뒷날을 기다리자 의논하니 이에 그만두었다. 홍도 마침내 련에게 살해되었다.

12혼삿말과 딸의 죽음

後文明太后以獻文六宮未備,敕璉令薦其女。璉奉表云:女已出,求以弟女應旨。朝廷許焉,乃遣安樂王真、尚書李敷等至境送幣。璉惑其左右之說,云朝廷昔與馮氏婚姻,未幾而滅其國。殷鑒不遠,宜以方便辭之。璉遂上書,妄稱女死。朝廷疑其矯拒,又遣假散騎常侍程駿切責之,若女審死,聽更選宗淑。璉云:「若天子恕其前愆,謹當奉詔。」會獻文崩,乃止。至孝文時,璉貢獻倍前,其報賜亦稍加焉。時光州於海中得璉遣詣齊使餘奴等,送闕。孝文詔責曰:「道成親殺其君,竊號江左,朕方欲興滅國於舊邦,繼絕世于劉氏。而卿越境外鄉,交通篡賊,豈是籓臣守節之義?今不以一過掩舊款,即送還籓。其感恕思愆,祗承明憲,輯寧所部,動靜以聞。」

뒤에 문명태후가 헌문제의 육궁(六宮)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하여 련에게 칙해 딸을 바치게 하였다. 련이 표를 받들어 딸은 이미 출가했으니 아우의 딸로 명에 응하겠다 하니 조정이 허락하고, 안락왕 진과 상서 이부 등을 지경에 보내 폐백을 전하게 하였다. 련이 좌우의 말에 홀렸으니, 「조정이 옛날 풍씨와 혼인하고 얼마 안 되어 그 나라를 멸했으니 은감이 멀지 않다, 마땅히 방편으로 사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련이 드디어 글을 올려 딸이 죽었다고 거짓말하였다. 조정이 그 속임수를 의심하여 다시 가산기상시 정준을 보내 절실히 꾸짖고, 딸이 정말 죽었거든 종실의 다른 딸을 다시 고르게 하였다. 련이 「천자께서 지난 허물을 용서하시면 삼가 조서를 받들겠습니다」 했는데, 마침 헌문제가 붕어하여 이에 그만두었다. 효문제 때에 이르러 련의 조공이 앞의 배가 되니 그 답례도 차츰 더해졌다. 그때 광주(光州)가 바다에서 련이 남제로 보낸 사신 여노 등을 잡아 대궐로 보냈다. 효문제가 조서로 꾸짖었다. 「소도성이 제 임금을 죽이고 강남에서 참호를 훔쳤다. 짐이 바야흐로 옛 나라를 망한 데서 일으켜 유씨(송)의 끊어진 대를 이으려 하는데, 경은 지경을 넘어 바깥과 사귀며 찬탈한 도적과 교통하니, 이것이 어찌 번신이 절개를 지키는 의리인가! 이제 한 가지 허물로 옛 정성을 덮지 않고 곧 번국으로 돌려보내니, 용서에 감복하여 허물을 생각하고 밝은 법을 받들어 다스리는 곳을 평안케 하며, 움직임과 고요함을 아뢰라.」

13백 살의 임금이 죽다

太和十五年,璉死,年百餘歲。孝文舉哀於東郊,遣謁者僕射李安上策贈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公、高句麗王,諡曰康。又遣大鴻臚拜璉孫雲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郎將、遼東郡公、高句麗王。賜衣冠服物車旗之飾。又詔雲遣世子入朝,令及郊丘之禮。雲上書辭疾,遣其從叔升于隨使詣闕嚴責之,自此,歲常貢獻。正始中,宣武於東堂引見其使芮悉弗,進曰:「高麗系誠天極,累葉純誠,地產土毛,無愆王貢。但黃金出夫餘,珂則涉羅所產。今夫餘爲勿吉所逐,涉羅爲百濟所並。國王臣雲惟繼絕之義,悉遷於境內。二品所以不登王府,實兩賊之爲。」宣武曰:「高麗世荷上將,專制海外,九夷黠虜,實得征之。昔方貢之愆,責在連率。宜宣朕旨於卿主,務盡威懷之略,使二邑還復舊墟,土毛無失常貢也。」

태화 십오년에 련이 죽으니 나이 백여 살이었다. 효문제가 동교에서 애도를 표하고, 알자복야 이안상을 보내 책서로 거기대장군·태부·요동군공·고구려왕을 추증하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였다. 또 대홍려를 보내 련의 손자 운(문자명왕)을 사지절·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공·고구려왕에 제수하고, 의관과 옷과 수레와 깃발 장식을 내렸다. 또 조서로 운에게 세자를 입조시켜 교구(郊丘)의 예에 참여하게 했는데, 운이 글을 올려 병을 칭하고 종숙 승우를 사신에 딸려 대궐에 보내니 엄히 꾸짖었다. 이로부터 해마다 늘 공물을 바쳤다. 정시 연간에 선무제가 동당에서 그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실불이 나아가 말하였다. 「고려는 정성이 하늘 끝에 매여 여러 대를 순수한 정성으로, 땅에서 나는 토산물로 왕공(王貢)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옥돌은 섭라에서 나는 것인데, 이제 부여는 물길에게 쫓기고 섭라는 백제에게 아울려졌습니다. 국왕인 신하 운은 끊어진 것을 잇는 의리를 생각하여 다 지경 안으로 옮겼습니다. 두 물품이 왕부에 오르지 못함은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 선무제가 말하였다. 「고려는 대대로 상장(上將)의 소임을 지고 해외를 오로지 다스려, 구이의 교활한 무리를 실로 정벌해 왔다. 지난 조공의 어그러짐은 책임이 연솔(連率)에 있다. 마땅히 짐의 뜻을 경의 임금에게 펴서, 위엄과 품음의 계략을 다해 두 고을이 옛터를 회복하고 토산물이 상공(常貢)을 잃지 않게 하라.」

14문자명왕과 안장왕

神龜中,雲死,靈太后爲舉哀於東堂。遣使策贈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又拜其世子安爲鎮東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正光初,光州又於海中執得梁所授安寧東將軍衣冠劍珮,及使人江法盛等,送京師。

신귀 연간에 운이 죽으니 영태후가 동당에서 애도를 표하고, 사신을 보내 거기대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공·고려왕을 책증하였다. 또 그 세자 안(안장왕)을 진동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공·고려왕에 제수하였다. 정광 초에 광주가 또 바다에서, 양나라가 안에게 준 영동장군의 의관과 칼과 패물과 사인 강법성 등을 잡아 서울로 보냈다.

15안원왕

安死,子延立。孝武帝初,詔加延使持節、散騎常侍、車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公、高句麗王。天平中,詔加延侍中、驃騎大將軍,余悉如故。

안이 죽고 아들 연(안원왕)이 즉위하였다. 효무제 초에 조서로 연에게 사지절·산기상시·거기대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공·고구려왕을 더하고, 천평 연간에 조서로 연에게 시중·표기대장군을 더하며 나머지는 다 예전대로 하였다.

16최유가 임금을 치다

延死,子成立。訖于武定已來,其貢使無歲不至。大統十二年,遣使至西魏朝貢。及齊受東魏禪之歲,遣使朝貢于齊。齊文宣加成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如故。天保三年,文宣至營州,使博陵崔柳使於高麗,求魏末流人。敕柳曰:「若不從者,以便宜從事。」及至,不見許。柳張目叱之,拳擊成墜於床下,成左右雀息不敢動,乃謝服,柳以五千戶反命。

연이 죽고 아들 성(양원왕)이 즉위하였다. 무정 연간이 끝나도록 그 공물 사신이 이르지 않는 해가 없었다. 대통 십이년에는 사신을 서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제(북제)가 동위의 선양을 받은 해에 사신을 보내 제에 조공하니, 제 문선제가 성에게 사지절·시중·표기대장군을 더하고 영동이교위·요동군공·고려왕은 예전대로 하였다. 천보 삼년에 문선제가 영주에 이르러 박릉 사람 최유를 고려에 사신 보내 위나라 말의 유민을 찾으며, 유에게 칙하기를 「따르지 않거든 편의대로 하라」 하였다. 이르러 허락받지 못하자 유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며 주먹으로 성을 쳐서 평상 아래로 떨어뜨리니, 성의 좌우가 숨을 죽이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매 이에 사죄하고 복종하였다. 유가 오천 호를 데리고 복명하였다.

17평원왕의 책봉

成死,子湯立。乾明元年,齊廢帝以湯爲使持節、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麗王。周建德六年,湯遣使至周,武帝以湯爲上開府儀同大將軍、遼東郡公、遼東王。隋文帝受禪,湯遣使詣闕,進授大將軍,改封高麗王。自是,歲遣使朝貢不絕。

성이 죽고 아들 탕(평원왕)이 즉위하였다. 건명 원년에 제 폐제가 탕을 사지절·영동이교위·요동군공·고려왕으로 삼았다. 주(북주) 건덕 육년에 탕이 사신을 주에 보내니, 무제가 탕을 상개부의동대장군·요동군공·요동왕으로 삼았다. 수 문제가 선양을 받자 탕이 사신을 대궐에 보내니 대장군으로 올려 제수하고 고려왕으로 고쳐 봉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18세 서울과 여러 성

其國,東至新羅,西度遼,二千里;南接百濟,北鄰靺鞨,一千餘里。人皆士著,隨山谷而居,衣布帛及皮。土田薄瘠,蠶農不足以自供,故其人節飲食。其王好修宮室,都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城內唯積倉儲器備,寇賊至日,方入固守。王別爲宅於其側,不常居之。其外復有國內城及漢城,亦別都也。其國中呼爲三京。復有遼東、玄菟等數十城,皆置官司以統攝。與新羅每相侵奪,戰爭不息。

그 나라는 동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로 요수를 건너기 이천 리요, 남은 백제에 접하고 북은 말갈과 이웃하기 천여 리다. 사람들은 다 토착하여 산골을 따라 살며 베·비단과 가죽을 입는다. 땅이 메마르고 얇아 누에치기와 농사가 자급하기에 모자라므로 그 사람들은 먹고 마시기를 아낀다. 그 왕은 궁실 꾸미기를 좋아한다. 도읍인 평양성은 장안성이라고도 하니 동서 육 리로 산을 따라 굽이지고 남으로 패수에 임한다. 성안에는 오직 곡식과 기물을 쌓아 두어, 도적이 이르는 날에야 들어가 굳게 지킨다. 왕은 그 곁에 따로 집을 지었으나 늘 살지는 않는다. 그 밖에 다시 국내성과 한성이 있어 역시 별도(別都)니, 나라 안에서 삼경(三京)이라 부른다. 또 요동·현도 등 수십 성이 있어 다 관사를 두어 통솔한다. 신라와 늘 서로 침탈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

19벼슬과 세금과 놀이

官有大對盧、太大兄、大兄、小兄、竟侯奢、鳥拙、太大使者、大使者、小使者、褥奢、翳屬、仙人,凡十二等,分掌內外事。其大對盧則以強弱相陵奪而自爲之,不由王署置。復有內評、五部褥薩。人皆頭著折風,形如弁,士人加插二鳥羽。貴者,其冠曰蘇骨,多用紫羅爲之,飾以金銀。服大袖衫、大口袴、素皮帶、黃革履。婦人裙襦加襈。書有《五經》、《三史》、《三國志》、《晉陽秋》。兵器與中國略同。及春秋校獵,王親臨之。稅,布五疋、谷五石;遊人則三年一稅,十人共細布一疋。租,戶一石,次七斗,下五斗。其刑法,叛及謀逆者,縛之柱,爇而斬之,籍沒其家;盜則償十倍,若貧不能償者樂及公私債負,皆聽評其子女爲奴婢以償之。用刑既峻,罕有犯者。樂有五弦、琴、箏、篳篥、橫吹、簫、鼓之屬,吹蘆以和曲。每年初,聚戲浿水上,王乘腰輦、列羽儀觀之。事畢,王以衣入水,分爲左右二部,以水石相濺擲,喧呼馳逐,再三而止。

벼슬에 대대로·태대형·대형·소형·경후사·오졸·태대사자·대사자·소사자·욕사·예속·선인이 있어 무릇 열두 등급으로 안팎의 일을 나누어 맡는다. 대대로는 강하고 약함으로 서로 눌러 빼앗아 스스로 되는 것이요 왕이 임명하지 않는다. 또 내평과 오부 욕살이 있다. 사람들은 다 머리에 절풍(折風)을 쓰니 모양이 고깔 같고, 사인(士人)은 두 새 깃을 더 꽂는다. 귀한 자의 관은 소골(蘇骨)이라 하니 대개 자줏빛 깁으로 만들고 금은으로 꾸민다. 소매 큰 적삼과 통 큰 바지, 흰 가죽 띠와 누런 가죽신을 신는다. 부인은 치마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책으로 오경·삼사·삼국지·진양추가 있다. 병기는 중국과 대략 같다. 봄가을 사냥 대회에는 왕이 친히 임한다. 세(稅)는 베 다섯 필에 곡식 다섯 섬이요, 유인(遊人)은 세 해에 한 번 세를 내되 열 사람이 함께 가는 베 한 필을 낸다. 조(租)는 호마다 한 섬, 다음은 일곱 말, 아래는 닷 말이다. 형법은, 배반하거나 반역을 꾀한 자는 기둥에 묶어 지진 뒤에 목을 베고 집안을 적몰한다. 도둑질하면 열 배로 갚게 하고, 가난하여 갚지 못하는 자와 공사의 빚을 진 자는 다 그 자녀를 종으로 쳐서 갚기를 들어준다. 형벌 씀이 준엄하여 범하는 자가 드물다. 음악에 오현·거문고·쟁·필률·횡취·소·북 따위가 있고 갈대를 불어 곡을 맞춘다. 해마다 연초에 패수 가에 모여 노니, 왕은 요여를 타고 우의(羽儀)를 벌여 놓고 구경한다. 일이 끝나면 왕이 옷을 입은 채 물에 들어가고, 좌우 두 편으로 나뉘어 물과 돌을 서로 뿌리고 던지며 소리치고 쫓고 쫓기기를 두세 번 하고 그친다.

20풍속

俗潔淨自喜,尚容止,以趨走爲敬。拜則曳一腳,立多反拱,行必插手。性多詭伏,言辭鄙穢,不簡親疏。父子同川而浴,共室而寢。好歌舞,常以十月祭天,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爲飾。好蹲踞,食用俎機。出三尺馬,云本朱蒙所乘馬種,即果下也。風俗尚淫,不以爲愧,俗多遊女,夫無常人,夜則男女群聚而戲,無有貴賤之節。有婚嫁,取男女相悅即爲之。男家送豬酒而已,無財聘之禮;或有受財者,人共恥之,以爲賣婢。死者,殯在屋內,經三年,擇吉日而葬。居父母及夫喪,服皆三年,兄弟三月。初終哭泣,葬則鼓舞作樂以送之。埋訖,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墓側,會葬者爭取而去。信佛法,敬鬼神,多淫祠。有神廟二所:一曰夫餘神,刻木作婦人像;一曰高登神,云是其始祖夫餘神之子。並置官司,遣人守護,蓋河伯女、朱蒙云。

풍속은 깨끗함을 스스로 즐기고 몸가짐을 숭상하며, 종종걸음을 공경으로 삼는다. 절할 때는 한 다리를 끌고, 설 때는 대개 두 손을 뒤로 마주 잡으며, 걸을 때는 반드시 손을 소매에 꽂는다. 성질에 속임이 많고 말씨가 비루하며 친하고 성김을 가리지 않아, 아비와 아들이 같은 내에서 목욕하고 한 방에서 잔다. 노래와 춤을 좋아하며 늘 시월에 하늘에 제사하는데, 그 공적인 모임의 의복은 다 비단에 수와 금은으로 꾸민다. 쭈그려 앉기를 좋아하고 밥은 조궤(俎机)를 쓴다. 석 자짜리 말이 나니 본디 주몽이 타던 말의 종자라 하며 곧 과하마다. 풍속이 음란함을 숭상하되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노는 여자가 많고 지아비가 일정치 않으며, 밤이면 남녀가 떼 지어 모여 놀아 귀천의 분별이 없다. 혼인은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곧 이루니, 남자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재물로 맞는 예가 없다. 혹 재물을 받는 이가 있으면 사람들이 다 계집종을 팔았다고 부끄럽게 여긴다. 죽은 이는 집 안에 빈소를 차렸다가 세 해가 지나 길일을 가려 장사한다. 부모와 지아비 상에는 다 세 해 복을 입고 형제는 석 달이다. 처음에는 곡하고 울지만 장사할 때는 북 치고 춤추며 풍악을 울려 보낸다. 묻기를 마치면 죽은 이가 살았을 때 쓰던 옷가지와 노리개와 수레와 말을 무덤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 사람들이 다투어 가져간다. 불법을 믿고 귀신을 공경하여 음사가 많다. 신묘가 두 곳 있으니, 하나는 부여신이라 하여 나무를 깎아 부인상을 만들었고, 하나는 고등신이라 하니 그 시조 부여신의 아들이라 한다. 다 관사를 두고 사람을 보내 지키니, 대개 하백의 딸과 주몽이라 한다.

21수 문제의 새서

及隋平陳後,湯大懼,陳兵積穀,爲守拒之策。開皇十七年,上賜璽書,責以每遣使人,歲常朝貢,雖稱籓附,誠節未盡。驅逼靺鞨,禁固契丹。昔年潛行貨利,招動群小,私將弩手,巡竄下國,豈非意欲不臧,故爲竊盜?坐使空館,嚴加防守;又數遣馬騎,殺害邊人。恆自猜疑,密覘消息,殷勤曉示,許其自新。湯得書惶恐,將表陳謝。會病卒。

수나라가 진(陳)을 평정하자 탕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벌이고 곡식을 쌓아 막아 지킬 계책을 세웠다. 개황 십칠년에 임금이 새서를 내려 꾸짖었다. 사신을 보내 해마다 조공한다 하나 번국이라 일컬으면서도 성절(誠節)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과, 말갈을 몰아붙이고 거란을 금고한 일과, 지난해 몰래 재리를 행하여 소인들을 움직여 사사로이 쇠뇌 기술자를 데리고 하국(下國)으로 숨어들었으니 이 어찌 좋지 못한 뜻으로 도둑질한 것이 아니냐는 것과, 사신을 빈 객관에 앉혀 놓고 엄히 지키며 또 자주 기병을 보내 변경 사람을 죽이고 늘 의심을 품어 소식을 몰래 엿본다는 것들을 간곡히 타이르고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허락하였다. 탕이 글을 받고 황공하여 표를 올려 사죄하려다가 마침 병으로 죽었다.

22요서를 친 영양왕

子元嗣。文帝使拜元爲上開府儀同三司,襲爵遼東公,賜服一襲。元奉表謝恩,並賀祥瑞,因請封王。文帝優冊爲王。明年,率靺鞨萬餘騎寇遼西,營州總管韋世衝擊走之。帝大怒,命漢王諒爲元帥,總水陸討之,下詔黜其爵位。時饋運不繼,六軍乏食,師出臨渝關,復遇疾疫,王師不振。及次遼水,元亦惶懼,遣使謝罪,上表稱「遼東糞土臣元」云云。上於是罷兵,待之如初。元亦歲遣朝貢。

아들 원(영양왕)이 이었다. 문제가 사신을 시켜 원을 상개부의동삼사로 제수하고 요동공 작위를 잇게 하며 옷 한 벌을 내렸다. 원이 표를 받들어 은혜에 사례하고 상서를 하례하며 왕 봉하기를 청하니, 문제가 우대하여 왕으로 책봉하였다. 이듬해 원이 말갈 기병 만여를 거느리고 요서를 노략하니 영주총관 위세충이 쳐서 쫓았다. 문제가 크게 노하여 한왕 량을 원수로 명해 수군과 육군을 총괄해 치게 하고 조서를 내려 그 작위를 깎았다. 그때 군량 나름이 잇대지 못해 육군(六軍)이 먹을 것이 모자랐고, 군사가 임유관을 나서자 다시 돌림병을 만나 왕사가 떨치지 못했다. 요수에 다다르자 원도 두려워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표를 올려 「요동 분토(糞土)의 신하 원」 운운하니, 임금이 이에 군사를 거두고 처음처럼 대하였다. 원도 해마다 조공을 보냈다.

23양제의 세 차례 친정

煬帝嗣位,天下全盛,高昌王、突厥啟人可汗並親詣闕貢獻,於是征元入朝。元懼,蕃禮頗闕。大業七年,帝將討元罪,車駕度遼水,止營於遼東地,分道出師,各頓兵於其城下。高麗出戰多不利,皆嬰城固守。帝令諸軍攻之,又敕諸將,高麗若降,即宜撫納,不得縱兵入。城將陷,賊輒言降,諸將奉旨,不敢赴機。先馳奏,比報,賊守禦亦備,復出拒戰。如此者三,帝不悟。由是食盡師老,轉輸不繼,諸軍多敗績,於是班師。是行也,唯于遼水西拔賊武厲邏,置遼東郡及通定鎮而還。九年,帝復親征,敕諸軍以便宜從事。諸將分道攻城,賊勢日蹙。會楊玄感作亂,帝大懼,即日六軍並還。兵部侍郎斛斯政亡入高麗,高麗具知事實,盡銳來追,殿軍多敗。十年,又發天下兵,會盜賊蜂起,所在阻絕,軍多失期。至遼水,高麗亦困弊,遣使乞降,因送斛斯政贖罪。帝許之,頓懷遠鎮受其降,仍以俘囚軍實歸。至京師,以高麗使親告太廟,因拘留之。仍徵元入朝,元竟不至。帝更圖後舉,會天下喪亂,遂不復行。

양제가 자리를 이으니 천하가 온전히 성하여, 고창왕과 돌궐 계민가한이 다 친히 대궐에 나아와 공물을 바쳤다. 이에 원을 불러 입조하게 하니 원이 두려워하며 번국의 예를 자못 빠뜨렸다. 대업 칠년에 황제가 원의 죄를 치려고 거가로 요수를 건너 요동 땅에 진영을 두고, 길을 나누어 군사를 내어 저마다 그 성 아래 주둔시켰다. 고려가 나가 싸우면 대개 불리하니 다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황제가 여러 군에 명해 치게 하고, 또 여러 장수에게 칙하기를 고려가 항복하거든 곧 어루만져 받아들이고 군사를 놓아 들어가지 말라 하였다. 성이 떨어지려 하면 적이 문득 항복한다 말하고, 여러 장수는 지시 때문에 감히 기회를 타지 못하고 먼저 달려 아뢰니, 회보가 올 즈음이면 적의 수비가 다시 갖추어져 도로 나와 막아 싸웠다. 이러기를 세 번 하였으나 황제는 깨닫지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양식이 다하고 군사가 지치고 군량 수송이 잇대지 못하니 여러 군이 패전이 많아 이에 군사를 돌렸다. 이 걸음에는 오직 요수 서쪽에서 적의 무려라를 빼앗아 요동군과 통정진을 두고 돌아왔을 뿐이다. 9년에 황제가 다시 친정하여 여러 군에 편의대로 하라 칙하였다. 여러 장수가 길을 나누어 성을 치니 적의 형세가 날로 위축되었다. 마침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여 그날로 육군을 다 돌렸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려로 도망해 들어가니 고려가 사정을 다 알고 정예를 다해 뒤쫓으매 후군이 많이 패했다. 10년에 또 천하의 군사를 내었는데, 마침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나 곳곳이 막혀 군사가 많이 기한을 어겼다. 요수에 이르니 고려도 곤폐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을 빌고 곡사정을 보내 속죄하였다. 황제가 허락하고 회원진에 머물러 항복을 받고 포로와 군실을 거두어 돌아갔다. 서울에 이르러 고려 사신에게 친히 태묘에 고하게 하고 그대로 붙들어 두었다. 이어 원을 불러 입조하게 했으나 원이 끝내 오지 않았다. 황제가 다시 뒷날의 거사를 꾀했으나 마침 천하가 상란하여 드디어 다시 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