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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契丹

북사 사이전 北史 四夷傳 · 이연수(李延壽) · 659년 (당 현경 4) · 단락 4 · 한자 765자 · 낭독 3.1분

「북사 사이전」 한 권 「거란」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북조 네 왕조가 본 동방. 알에서 난 주몽 신화의 온전한 꼴, 장수왕 백 년의 외교(혼삿말과 딸의 죽음), 개로왕의 표문, 그리고 물길·거란·실위·유구·왜까지 열네 갈래 — 수 양제의 패망을 「덕을 넓히는 자는 창성하고 땅을 넓히는 자는 망한다」로 맺는다.

1거란의 귀부

契丹國,在庫莫奚東,與庫莫奚異種同類。並爲慕容晃所破,俱竄於松漠之間。登國中,魏大破之,遂逃迸,與庫莫奚分住。經數十年,稍滋蔓,有部落,于和龍之北數百里爲寇盜。真君以來,歲貢名馬。獻文時,使莫弗紇何辰來獻,得班饗于諸國之末。歸而相謂,言國家之美,心皆忻慕,於是東北群狄聞之,莫不思服。悉萬丹部、何大何部、伏弗鬱部、羽陵部、日連部、匹潔部、黎部、吐六幹部等各以其名馬、文皮獻天府。遂求爲常,皆得交市于和龍、密雲之間,貢獻不絕。太和三年,高句麗竊與蠕蠕謀,欲取地豆幹以分之。契丹舊怨其侵軼,其莫賀弗勿幹率其部落,車三千乘、衆萬餘口,驅徙雜畜求內附,止于白狼水東。自此歲常朝貢。後告饑,孝文聽其入關市糴。及宣武、孝明時,恆遣使貢方物。熙平中,契丹使人初真等三十人還,靈太后以其俗嫁娶之際以青𧦬爲上服,人給青𧦬兩匹,賞其誠款之心,餘依舊式朝貢。及齊受東魏禪,常不斷絕。

거란국은 고막해 동쪽에 있으니 고막해와 씨는 달라도 같은 부류다. 함께 모용황에게 깨져 다 송막 사이로 달아났다. 등국 연간에 위나라가 크게 깨뜨리니 드디어 도망쳐 고막해와 나뉘어 살았다. 수십 년이 지나며 차츰 불어나 부락을 이루고, 화룡 북쪽 수백 리에서 도적질하였다. 진군 이래 해마다 이름난 말을 바쳤다. 헌문제 때 막불흘하진을 시켜 와서 바치니 여러 나라 맨 끝자리에서 잔치 반열에 들었는데, 돌아가 서로 나라의 아름다움을 말하며 마음으로 다 기뻐 사모하니, 이에 동북의 뭇 오랑캐가 듣고 복종을 생각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실만단부·하대하부·복불욱부·우릉부·일련부·필혈부·여부·토륙간부 등이 저마다 이름난 말과 무늬 가죽을 천부(天府)에 바치고 드디어 상례가 되기를 구하니, 다 화룡과 밀운 사이에서 교역을 허락받아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태화 삼년에 고구려가 몰래 유연과 꾀하여 지두간을 취해 나누려 하였다. 거란은 예부터 그 침노를 원망하던 터라, 막하불 물간이 부락 수레 삼천 승과 무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온갖 가축을 몰고 내부하기를 구하여 백랑수 동쪽에 머물렀다. 이로부터 해마다 조공하였다. 뒤에 기근을 알리니 효문제가 관시에 들어와 곡식 사기를 들어주었다. 선무제·효명제 때 늘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희평 연간에 거란 사인 초진 등 서른 명이 돌아갈 때, 영태후가 그 풍속에 혼인할 때 청저(靑氈)를 웃옷으로 삼는다 하여 사람마다 청저 두 필씩을 주어 그 정성을 상 주고, 나머지는 옛 법식대로 조공하게 하였다. 제가 동위의 선양을 받자 늘 끊이지 않았다.

협주 2

上「工几」,下「言」

위는 「工几」, 아래는 「言」으로 이루어진 글자다.

上「工几」,下「言」

위는 「工几」, 아래는 「言」으로 이루어진 글자다.

2문선제의 북벌

天保四年九月,契丹犯塞,文宣帝親戎北討。至平州,遂西趣長塹。詔司徒潘相樂帥精騎五千,自東道趣青山;復詔安德王韓軌帥精騎四千東趣,斷契丹走路。帝親逾山嶺,奮擊大破之,虜十餘萬口、雜畜數十萬頭。相樂又于青山大破契丹別部。所虜生口,皆分置諸州。其後復爲突厥所逼,又以萬家寄於高麗。

천보 사년 9월에 거란이 변방을 범하니 문선제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쳤다. 평주에 이르러 드디어 서쪽으로 장참을 향하며, 조서로 사도 반상락에게 정예 기병 오천을 거느리고 동쪽 길로 청산을 향하게 하고, 다시 안덕왕 한궤에게 정예 기병 사천을 거느리고 동으로 나아가 거란의 달아날 길을 끊게 하였다. 황제가 몸소 산고개를 넘어 떨쳐 쳐서 크게 깨뜨리니, 사로잡은 것이 십여만 명에 온갖 가축이 수십만 마리였다. 상락이 또 청산에서 거란 별부를 크게 깨뜨렸다. 사로잡은 생구는 다 여러 주에 나누어 두었다. 그 뒤 다시 돌궐에게 몰려 또 만 집을 고려에 붙였다.

3거란의 풍속

其俗與靺鞨同,好爲寇盜。父母死而悲哭者,以爲不壯。但以其屍置於山樹之上,經三年後,乃收其骨而焚之。因酌酒而祝曰:「冬月時,向陽食。若我射獵時,使我多得豬、鹿。」其無禮頑囂,于諸夷最甚。

그 풍속은 말갈과 같으며 도적질을 좋아한다. 부모가 죽었는데 슬피 우는 자를 씩씩하지 못하다 여긴다. 다만 그 주검을 산의 나무 위에 두었다가 세 해가 지난 뒤에 뼈를 거두어 태우며, 술을 부어 빌기를 「겨울철에는 볕을 향해 먹으리라. 내가 사냥할 때면 돼지와 사슴을 많이 얻게 하라」 한다. 그 무례하고 완악함이 여러 이 가운데 가장 심하다.

4수나라와 거란

隋開皇四年,率莫賀弗來謁。五年,悉其衆款塞,文帝納之,聽居其故地。責讓之,其國遣使詣闕,頓顙謝罪。其後,契丹別部出伏等背高麗,率衆內附。文帝見來,憐之。上方與突厥和好,重失遠人之心,悉令給糧還本部,敕突厥撫納之。固辭不去。部落漸衆,遂北徙,逐水草,當遼西正北二百里,依託紇臣水而居,東西亙三百里,分爲十部。兵多者三千,少者千餘。逐寒暑,隨水草畜牧。有征伐,則曾帥相與議之,興兵動衆,合如符契。突厥沙缽略可汗遣吐屯潘垤統之,契丹殺吐屯而遁。大業七年,遣使朝,貢方物。

수 개황 사년에 막하불을 거느리고 와서 뵈었다. 5년에 온 무리를 들어 변방에 정성을 바치니 문제가 받아들여 그 옛 땅에 살기를 들어주었다. 꾸짖어 나무라니 그 나라가 사신을 대궐에 보내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였다. 그 뒤 거란 별부 출복 등이 고려를 등지고 무리를 거느리고 내부하니, 문제가 가엾이 여겼으나 바야흐로 돌궐과 화친하던 터라 먼 사람의 마음을 잃음을 무겁게 여겨, 다 양식을 주어 본부로 돌려보내고 돌궐에 칙해 어루만져 거두게 했는데, 굳이 사양하며 떠나지 않았다. 부락이 차츰 불어나 드디어 북으로 옮겨 물과 풀을 따르니, 요서 정북 이백 리에서 탁흘신수에 의지해 살며 동서로 삼백 리에 뻗쳐 열 부로 나뉘었다. 군사가 많은 데는 삼천, 적은 데는 천여였다. 추위와 더위를 좇아 물과 풀 따라 목축하고, 정벌이 있으면 우두머리들이 서로 모여 의논하니, 군사를 일으켜 움직임이 부절을 맞춘 듯하였다. 돌궐 사발략가한이 토둔 반질을 보내 다스리게 했는데 거란이 토둔을 죽이고 달아났다. 대업 칠년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방물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