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高麗
1기자의 남긴 풍교
高麗者,出自扶餘之別種也。其國都於平壤城,即漢樂浪郡之故地,在京師東五千一百里。東渡海至於新羅,西北渡遼水至於營州,南渡海至於百濟,北至靺鞨。東西三千一百里,南北二千里。其官大者號大對盧,比一品,總知國事,三年一代,若稱職者,不拘年限。交替之日,或不相祗服,皆勒兵相攻,勝者爲之。其王但閉宮自守,不能制禦。次曰太大兄,比正二品。對盧以下官,總十二級。外置州縣六十餘城。大城置傉薩一,比都督。諸城置道使,比刺史。其下各有僚佐,分掌曹事。衣裳服飾,唯王五彩,以白羅爲冠,白皮小帶,其冠及帶,咸以金飾。官之貴者,則青羅爲冠,次以緋羅,插二鳥羽,及金銀爲飾,衫筒袖,褲大口,白韋帶,黃韋履。國人衣褐戴弁,婦人首加巾幗。好圍棋投壺之戲,人能蹴鞠。食用籩豆、簠簋、尊俎、罍洗,頗有箕子之遺風。
고려는 부여의 별종에서 나왔다. 그 나라는 평양성에 도읍하니 곧 한나라 낙랑군의 옛 땅으로, 서울(장안)에서 동으로 오천백 리다. 동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며, 남으로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으로 말갈에 이른다. 동서 삼천백 리, 남북 이천 리다.
벼슬의 으뜸을 대대로(大對盧)라 부르니 1품에 비기며 나랏일을 도맡고 세 해에 한 번 갈되, 직에 맞는 자면 햇수에 매이지 않는다. 교체하는 날 혹 서로 승복하지 않으면 다 군사를 몰아 서로 치고 이긴 자가 된다. 왕은 다만 궁문을 닫고 스스로 지킬 뿐 막지 못한다. 다음은 태대형이라 하니 정2품에 비긴다. 대로 이하 벼슬이 모두 열두 급이다. 밖으로는 주현 육십여 성을 두는데, 큰 성에는 욕살 하나를 두니 도독에 비기고, 여러 성에는 도사를 두니 자사에 비기며, 그 아래 저마다 요좌가 있어 사무를 나누어 맡는다.
의복 차림은 오직 왕만 다섯 빛깔이며, 흰 깁으로 관을 만들고 흰 가죽 좁은 띠를 두르는데 관과 띠를 다 금으로 꾸민다. 벼슬이 귀한 자는 푸른 깁으로 관을 만들고 다음은 붉은 깁으로 하는데, 새 깃 둘을 꽂고 금은으로 꾸민다. 적삼은 통소매요 바지는 통이 크며, 흰 가죽 띠에 누런 가죽신이다. 나라 사람들은 거친 베옷에 고깔을 쓰고, 부인은 머리에 건귁을 쓴다. 바둑과 투호 놀이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축국을 잘한다. 먹을 때 변두·보궤·준조·뇌세를 쓰니, 자못 기자의 남긴 풍교가 있다.
2온돌과 엄한 법
其所居必依山谷,皆以茅草葺舍,唯佛寺、神廟及王宮、官府乃用瓦。其俗貧窶者多,冬月皆作長坑,下燃;煴火以取暖。種田養蠶,略同中國。其法:有謀反叛者,則集衆持火炬競燒灼之,燋爛備體,然後斬首,家悉籍沒;守城降敵,臨陣敗北,殺人行劫者,斬;盜物者,十二倍酬贓;殺牛馬者,沒身爲奴婢。大體用法嚴峻,少有犯者,乃至路不拾遺。其俗多淫祀,事靈星神、日神、可汗神、箕子神。國城東有大穴,名神隧,皆以十月,王自祭之。
사는 곳은 반드시 산골에 의지하며 다 띠풀로 지붕을 이고, 오직 절과 신묘와 왕궁과 관부만 기와를 쓴다. 그 풍속에 가난한 이가 많아, 겨울이면 다 긴 구들을 만들고 밑에 불을 때어 덥힌다. 밭갈이와 누에치기는 중국과 대략 같다.
그 법은, 모반하거나 배반한 자는 무리를 모아 횃불을 들고 다투어 지지게 하여 온몸이 문드러진 뒤에 목을 베고 집안을 다 적몰한다. 성을 지키다 적에게 항복한 자, 싸움에 임해 패해 달아난 자, 사람을 죽이거나 겁탈한 자는 목을 벤다. 물건을 훔친 자는 열두 배로 갚게 한다. 소나 말을 죽인 자는 몸을 몰수해 노비로 삼는다. 대체로 법 씀이 엄준하여 범하는 자가 적으니,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 데까지 이르렀다.
풍속에 음사(淫祀)가 많아 영성신·일신·가한신·기자신을 섬긴다. 나라 성 동쪽에 큰 굴이 있어 신수(神隧)라 이름하는데, 다 시월에 왕이 몸소 제사한다.
3경당에서 책을 읽다
俗愛書籍,至於衡門廝養之家,各於街衢造大屋,謂之扃堂,子弟未婚之前,晝夜于此讀書習射。其書有《五經》及《史記》、《漢書》、范曄《後漢書》、《三國志》、孫盛《晉春秋》、《玉篇》、《字統》、《字林》;又有《文選》,尤愛重之。
풍속이 서적을 사랑하여, 미천한 문지기와 말먹이 집까지 저마다 거리에 큰 집을 지어 경당(扃堂)이라 부르니, 자제들이 혼인하기 전까지 밤낮으로 여기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힌다. 책으로는 오경과 사기·한서·범엽의 후한서·삼국지·손성의 진춘추와 옥편·자통·자림이 있고, 또 문선이 있어 더욱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
4영류왕의 조공
其王高建武,即前王高元異母弟也。武德二年,遣使來朝。四年,又遣使朝貢。高祖感隋末戰士多陷其地,五年,賜建武書曰:
왕 고건무(영류왕)는 곧 앞 임금 고원(영양왕)의 배다른 아우다. 무덕 이년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4년에 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고조는 수나라 말 싸움한 군사들이 그 땅에 많이 넘어가 있음을 마음 아파하여, 5년에 건무에게 글을 내렸다.
5포로를 서로 돌려보내자는 글
朕恭膺寶命,君臨率士,祗順三靈,綏柔萬國。普天之下,情均撫字,日月所照,咸使乂安。王既統攝遼左,世居籓服,思稟正朔,遠循職貢。故遣使者,跋涉山川,申布誠懇,朕甚嘉焉。方今六合甯晏,四海清平,玉帛既通,道路無壅。方申輯睦,永敦聘好,各保疆蕣,豈非盛美。但隋氏季年,連兵構難,攻戰之所,各失其民。遂使骨肉乖離,室家分析,多歷年歲,怨曠不申。今二國通和,義無阻異,在此所有高麗人等,已令追括,尋即遣送;彼處有此國人者,王可放還,務盡撫育之方,共弘仁恕之道。
「짐은 공손히 보명을 받아 온 천하에 군림하며 삼령을 받들어 따르고 만국을 어루만진다. 온 하늘 아래 사랑으로 어루만짐이 고르니, 해와 달이 비추는 곳을 다 편안케 하려 한다. 왕은 요동을 통솔하며 대대로 번국에 살면서, 정삭 받들기를 생각하고 멀리서 직공을 좇았다. 그리하여 사자를 보내 산 넘고 물 건너 정성을 폈으니 짐이 매우 가상히 여긴다. 바야흐로 이제 천지가 편안하고 사해가 맑고 평온하니, 옥과 비단이 이미 통하고 길이 막힘없다. 화목을 펴서 길이 빙문의 우호를 도탑게 하고 저마다 강토를 보전하면 어찌 성대한 아름다움이 아니랴.
다만 수씨 말년에 잇달아 군사로 난을 얽어, 싸움하던 곳에서 저마다 백성을 잃었다. 드디어 골육이 흩어지고 집안이 갈라져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리움을 펴지 못하게 하였다. 이제 두 나라가 화친을 통하니 의리에 막힐 것이 없다. 여기 있는 고려 사람들은 이미 찾아 모으게 하였으니 곧 돌려보내려니와, 그곳에 있는 이 나라 사람들도 왕은 돌려보내어, 어루만져 기르는 방도를 다하고 함께 어질고 너그러운 도를 넓히자.」
6만 명이 돌아오다
於是建武悉搜括華人,以禮賓送,前後至者萬數,高祖大喜。
이에 건무가 화인(華人)을 다 찾아 모아 예를 갖추어 호송해 보내니, 앞뒤로 이른 자가 만으로 헤아려져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7어찌 신하라 부르랴
七年,遣前刑部尚書沈叔安往冊建武爲上柱國、遼東郡王、高麗王,仍將天尊像及道士往彼,爲之講《老子》,其王及道俗等觀聽者數千人。高祖嘗謂侍臣曰:「名實之間,理須相副。高麗稱臣于隋,終拒煬帝,此亦何臣之有!朕敬於萬物,不欲驕貴,但據有土宇,務共安人,何必令其稱臣,以自尊大。即爲詔述朕此懷也。」侍中裴矩、中書侍郎溫彥博曰:「遼東之地,周爲箕子之國,漢家玄菟郡耳!魏、晉已前,近在提封之內,不可許以不臣。且中國之于夷狄,猶太陽之對列星,理無降尊,俯同籓服。」高祖乃止。
7년에 전 형부상서 심숙안을 보내 건무를 상주국·요동군왕·고려왕으로 책봉하고, 아울러 천존상과 도사를 데리고 가서 노자를 강론하게 하니, 왕과 도속(道俗)으로 보고 들은 자가 수천 명이었다. 고조가 일찍이 시신들에게 말하였다. 「이름과 실상은 이치가 서로 맞아야 한다. 고려가 수나라에 신하를 일컬었으나 끝내 양제를 막았으니 이 무슨 신하이겠는가! 짐은 만물을 공경하여 교만하게 높이려 하지 않는다. 다만 땅을 차지했으면 함께 사람을 편안케 하기를 힘쓸 뿐이니, 하필 신하라 일컫게 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랴. 곧 조서를 지어 짐의 이 뜻을 밝히라.」 시중 배구와 중서시랑 온언박이 말하였다. 「요동 땅은 주나라 때 기자의 나라요 한나라의 현도군일 뿐입니다! 위·진 이전에는 봉역 안에 가까이 있었으니 신하 아님을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또 중국이 이적에 대함은 태양이 뭇별을 대함과 같으니, 존귀함을 낮추어 번국과 나란해질 이치가 없습니다.」 고조가 이에 그만두었다.
8주자사의 화해
九年,新羅、百濟遣使訟建武,云閉其道路,不得入朝。又相與有隙,屢相侵掠。詔員外散騎侍郎硃子奢往和解之。建武奉表謝罪,請與新羅對使會盟。
9년에 신라와 백제가 사신을 보내 건무를 하소연하기를, 길을 막아 조회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또 서로 틈이 있어 여러 번 침노한다 하였다. 조서로 원외산기시랑 주자사를 보내 화해시키니, 건무가 표를 받들어 사죄하고 신라 사신과 마주하여 회맹하기를 청하였다.
9천리장성을 쌓다
貞觀二年,破突厥頡利可汗,建武遣使奉賀,並上封域圖。五年,詔遣廣州都督府司馬長孫師往收瘞隋時戰亡骸骨,毀高麗所立京觀。建武懼伐其國,乃築長城,東北自扶餘城,西南至海,千有餘里。十四年,遣其太子桓權來朝,並貢方物,太宗優勞甚至。
정관 이년에 돌궐 힐리가한을 깨뜨리니, 건무가 사신을 보내 하례를 받들고 아울러 봉역도(封域圖)를 올렸다. 5년에 조서로 광주도독부사마 장손사를 보내, 수나라 때 싸우다 죽은 해골을 거두어 묻고 고려가 세운 경관(京觀)을 허물게 하였다. 건무는 제 나라를 칠까 두려워 이에 장성을 쌓으니, 동북은 부여성에서 서남은 바다까지 천여 리였다. 14년에 태자 환권을 보내 조회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치니, 태종이 지극히 두터이 위로하였다.
10연개소문의 정변
十六年,西部大人蓋蘇文攝職有犯,諸大臣與建武議欲誅之。事泄,蘇文乃悉召部兵,云將校閱,並盛陳酒饌于城南,諸大臣皆來臨視。蘇文勒兵盡殺之,死者百余人。焚倉庫,因馳入王宮,殺建武,立建武弟大陽子藏爲王。自立爲莫離支,猶中國兵部尚書兼中書令職也,自是專國政。蘇文姓錢氏,須貌甚偉,形體魁傑,身佩五刀,左右莫敢仰視。恆令其屬官俯伏於地,踐之上馬,及下馬,亦如之。出必先布隊仗,導者長呼以辟行人,百姓畏避,皆自投坑穀。
16년에 서부대인 개소문이 직무를 살피다 죄지은 일이 있어, 여러 대신이 건무와 의논하여 죽이려 하였다. 일이 새자 소문이 이에 부의 군사를 다 불러 사열한다 하고,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리니 여러 대신이 다 와서 보았다. 소문이 군사를 몰아 다 죽이니 죽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 창고를 불사르고 그길로 왕궁에 달려들어 건무를 죽이고, 건무의 아우 대양의 아들 장(보장왕)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스스로 막리지가 되니 중국의 병부상서와 중서령을 겸한 직책 같은 것으로, 이로부터 국정을 오로지하였다.
소문은 성이 천씨(泉氏)니, 수염과 얼굴이 매우 위엄 있고 몸집이 크고 걸출하며 몸에 칼 다섯을 차니 좌우가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늘 속관을 땅에 엎드리게 하고 밟고서 말에 오르며 말에서 내릴 때도 그렇게 하였다. 나갈 때는 반드시 먼저 대오와 의장을 벌이고, 인도하는 자가 길게 소리쳐 행인을 물리치니, 백성이 두려워 피하여 다 구덩이와 골짜기에 몸을 던졌다.
11칠 명분을 얻다
太宗聞建武死,爲之舉哀,使持節弔祭。十七年,封其嗣王藏爲遼東郡王、高麗王。又遣司農丞相里玄獎齎璽書往說諭高麗,令勿攻新羅。蓋蘇文謂玄獎曰:「高麗、新羅,怨隙已久。往者隋室相侵,新羅乘釁奪高麗五百里之地,城邑新羅皆據有之。自非反地還城,此兵恐未能已。」玄奘曰:「既往之事,焉可追論?」蘇文竟不從。太宗顧謂侍臣曰:「莫離支賊弑其主,盡殺大臣,用刑有同坑阱。百姓轉動輒死,怨痛在心,道路以目。夫出師吊伐,須有其名,因其弑君虐下,敗之甚易也。」
태종이 건무의 죽음을 듣고 그를 위해 애도를 표하고 지절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였다. 17년에 이은 왕 장을 요동군왕·고려왕에 봉하였다. 또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 새서를 지니고 가서 고려를 타일러 신라를 치지 말게 하였다. 개소문이 현장에게 말하였다. 「고려와 신라는 원한의 틈이 이미 오래요. 지난날 수나라가 침노할 때 신라가 틈을 타서 고려 오백 리 땅을 빼앗아 성읍을 다 차지했으니, 땅을 되돌리고 성을 돌려주지 않는 한 이 싸움은 그칠 수 없을 듯하오.」 현장이 「지난 일을 어찌 소급해 따지겠는가」 하였으나 소문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태종이 시신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막리지가 제 임금을 시해하고 대신을 다 죽였으며 형벌 쓰기를 구덩이와 함정같이 하여, 백성이 몸만 움직여도 문득 죽으니 원통함이 마음에 맺혀 길에서 눈짓만 한다. 무릇 군사를 내어 조문하고 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니, 임금을 시해하고 아래를 학대한 것을 명분 삼으면 깨뜨리기가 몹시 쉽다.」
12두 길로 나아가다
十九年,命刑部尚書張亮爲平壤道行軍大總管,領將軍常何等率江、淮、嶺、硤勁卒四萬,戰船五百艘,自萊州汎海趨平壤。又以特進英國公李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禮部尚書江夏王道宗爲副,領將軍張士貴等率步騎六萬趨遼東。兩軍合勢,太宗親御六軍以會之。
19년에 형부상서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명해 장군 상하 등을 거느리고 강·회·영·협의 굳센 군사 사만과 싸움배 오백 척으로 내주에서 바다에 떠서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고, 또 특진 영국공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예부상서 강하왕 도종을 부로 삼아 장군 장사귀 등을 거느리고 보병과 기병 육만으로 요동에 나아가게 하였다. 두 군이 세력을 합치고, 태종이 친히 육군을 거느리고 모였다.
13요동성이 떨어지다
夏四月,李勣軍渡遼,進攻蓋牟城,拔之。獲生口二萬,以其城置蓋州。五月,張亮副將程名振攻沙卑城,拔之,虜其男女八千口。是日,李勣進軍於遼東城。帝次遼澤,詔曰:「頃者隋師渡遼,時非天贊,從軍士卒,骸骨相望,遍于原野,良可哀歎。掩骼之義,誠爲先典,其令並收瘞之。」國內及新城步騎四萬來援遼東,江夏王道宗率騎四千逆擊,大破之,斬首千餘級。帝渡遼水,詔撤橋樑,以堅士卒志。帝至遼東城下。見士卒負擔以填塹者,帝分其尤重者,親於馬上持之。從官悚動,爭齎以送城下。時李勣已率兵攻遼東城。高麗聞我有拋車,飛三百斤石於一里之外者,甚懼之。乃于城上積木爲戰樓以拒飛石。勣列車發石以擊其城,所遇盡潰。又推撞車撞其樓閣,無不傾倒。帝親率甲騎萬余與李勣會。圍其城。俄而南風甚勁,命縱火焚其西南樓,延燒城中,屋宇皆盡。戰士登城,賊乃大潰,燒死者萬余人,俘其勝兵萬餘口,以其城爲遼州。初,帝自定州命每數十里置一烽,屬於遼城,與太子約,克遼東,當舉烽。是日,帝命舉烽,傳入塞。
여름 4월에 이적의 군사가 요수를 건너 개모성을 쳐서 빼앗아 생구 이만을 얻고 그 성으로 개주를 두었다. 5월에 장량의 부장 정명진이 사비성을 쳐서 빼앗고 남녀 팔천 명을 사로잡았다. 이날 이적이 요동성으로 진군하였다. 황제가 요택에 머물며 조서를 내렸다. 「지난날 수나라 군사가 요수를 건널 때 하늘이 돕지 않아, 종군한 사졸들의 해골이 서로 바라보며 들판에 널렸으니 참으로 슬프다. 뼈를 덮어 주는 의리는 실로 옛 법이니 다 거두어 묻으라.」 국내성과 신성의 보병·기병 사만이 요동을 구원하러 오니, 강하왕 도종이 기병 사천을 거느리고 맞받아 크게 깨뜨려 천여 급을 베었다. 황제가 요수를 건너자 조서로 다리를 걷어 사졸의 마음을 굳혔다.
황제가 요동성 아래 이르러, 사졸이 짐을 지고 해자를 메우는 것을 보고 그중 가장 무거운 것을 나누어 몸소 말 위에서 들었다. 따르는 관원이 놀라 움직여 다투어 지고 성 아래로 날랐다. 그때 이적이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성을 치고 있었다. 고려는 우리에게 포차가 있어 삼백 근 돌을 일 리 밖으로 날린다는 말을 듣고 몹시 두려워하여, 성 위에 나무를 쌓아 싸움 다락을 만들어 나는 돌을 막았다. 이적이 수레를 벌여 돌을 쏘아 성을 치니 맞는 곳마다 다 무너졌고, 또 충차를 밀어 그 누각을 들이받으니 쓰러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황제가 친히 갑옷 기병 만여를 거느리고 이적과 만나 성을 에워쌌다. 이윽고 남풍이 몹시 세차자 서남 다락에 불을 놓게 하니 성안까지 번져 집이 다 탔다. 군사들이 성에 오르자 적이 크게 무너지니, 타 죽은 자가 만여요 씩씩한 군사 만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그 성을 요주로 삼았다. 처음 황제가 정주에서부터 수십 리마다 봉화 하나를 두어 요동성까지 잇고, 태자와 요동을 이기면 봉화를 올리기로 약속했는데, 이날 봉화를 올리게 하여 변방 안으로 전하였다.
14백암성의 항복
師次白崖城,命攻之,右衛大將軍李思摩中弩矢,帝親爲吮血,將士聞之,莫不感勵。其城因山臨水,四面險絕。李勣以撞車撞之,飛石流矢,雨集城中。六月,帝臨其西北,城主孫伐音潛遣使請降,曰:「臣已願降,其中有貳者。」詔賜以旗幟,曰:「必降,建之城上。」伐音舉幟於城上,高麗以爲唐兵登也,乃悉降。初,遼東之陷也,伐音乞降,既而中悔,帝怒其反覆,許以城中人物分賜戰士。及是,李勣言於帝曰:「戰士奮厲爭先,不顧矢石者,貪虜獲耳。今城垂拔,奈何更許其降,無乃辜將士之心乎?」帝曰:「將軍言是也。然縱兵殺戮,虜其妻孥,朕所不忍也。將軍麾下有功者,朕以庫物賞之,庶因將軍贖此一城。」遂受降,獲士女一萬,勝兵二千四百,以其城置岩州,授孫伐音爲岩州刺史。我軍之渡遼也,莫離支遣加屍城七百人戍蓋牟城,李勣盡虜之,其人並請隨軍自效。太宗謂曰:「誰不欲爾之力,爾家悉在加屍,爾爲吾戰,彼將爲戮矣!破一家之妻子,求一人之力用,吾不忍也!」悉令放還。
군사가 백암성에 이르러 치게 하니, 우위대장군 이사마가 쇠뇌 화살에 맞자 황제가 친히 피를 빨아 주니, 장사들이 듣고 감격하여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성은 산을 의지하고 물에 임하여 사면이 험하고 가팔랐다. 이적이 충차로 들이받고 나는 돌과 화살이 성안에 비처럼 모였다. 6월에 황제가 그 서북에 임하니, 성주 손벌음이 몰래 사람을 보내 항복을 청하며 「신은 이미 항복하기를 원하나 그 안에 두 마음 가진 자가 있습니다」 하였다. 조서로 깃발을 내리며 「항복하겠거든 성 위에 세우라」 하였다. 벌음이 성 위에 깃발을 올리니, 고려 사람들은 당나라 군사가 오른 줄 알고 이에 다 항복하였다.
처음 요동이 함락될 때 벌음이 항복을 빌다가 이윽고 중도에 뉘우치니, 황제가 그 반복에 노하여 성안 사람과 재물을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기로 허락했었다. 이에 이르러 이적이 황제께 말하였다. 「사졸이 떨쳐 다투어 앞서며 화살과 돌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노획을 탐해서일 뿐입니다. 이제 성이 함락되려 하는데 어찌 다시 항복을 받아 장사들의 마음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황제가 「장군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놓아 죽이고 처자를 사로잡는 일은 짐이 차마 못 하겠다. 장군 휘하의 공 있는 자에게는 짐이 창고 물건으로 상 주리니, 장군에게서 이 한 성을 사서 대속하려 한다」 하고 드디어 항복을 받았다. 남녀 일만과 씩씩한 군사 이천사백을 얻어 그 성으로 암주를 두고 손벌음을 암주자사로 삼았다.
우리 군사가 요수를 건널 때 막리지가 가시성 군사 칠백을 보내 개모성을 지키게 했는데, 이적이 다 사로잡으니 그 사람들이 아울러 종군해 공을 세우겠다 청하였다. 태종이 말하였다. 「누가 너희 힘을 바라지 않으랴만, 너희 집이 다 가시에 있으니 너희가 나를 위해 싸우면 저들이 도륙당할 것이다! 한 집안의 처자를 부수어 한 사람의 힘을 얻는 일은 내가 차마 못 하겠다!」 다 놓아 돌려보냈다.
15주필산 싸움의 전야
車駕進次安市城北,列營進兵以攻之。高麗北部傉薩高延壽、南部耨薩高惠貞率高麗、靺鞨之衆十五萬來援安市城。賊中有對盧,年老習事,謂延壽曰:「吾聞中國大亂,英雄並起。秦王神武,所向無敵,遂平天下,南面爲帝,北夷請服,西戎獻款。今者傾國而至,猛將銳卒,悉萃於此,其鋒不可當也。今爲計者,莫若頓兵不戰,曠日持久,分遣驍雄,斷其饋運,不過旬日,軍糧必盡,求戰不得,欲歸無路,此不戰而取勝也。」延壽不從,引軍直進。太宗夜召諸將,躬自指麾。遣李勣率步騎一萬五千於城西嶺爲陣;長孫無忌率牛進達等精兵一萬一千以爲奇兵,自山北于狹穀出,以沖其後;太宗自將步騎四千,潛鼓角,偃旌幟,趨賊營北高峰之上;令諸軍聞鼓角聲而齊縱。因令所司張受降幕於朝堂之側,曰:「明日午時,納降虜於此矣!」遂率軍而進。
거가가 나아가 안시성 북쪽에 머물러 진영을 벌이고 군사를 내어 쳤다. 고려 북부 욕살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이 고려·말갈의 무리 십오만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러 왔다. 적 가운데 나이 많고 일에 익은 대로(對盧)가 연수에게 말하였다. 「내 들으니 중국이 크게 어지러워 영웅이 나란히 일어났는데, 진왕(태종)은 신령한 무용으로 가는 곳마다 대적이 없어 드디어 천하를 평정하고 남면하여 황제가 되니, 북쪽 오랑캐가 복종을 청하고 서융이 정성을 바쳤다 하오. 이제 온 나라를 기울여 이르러 맹장과 정예가 다 여기 모였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소. 지금 계책으로는 군사를 눌러 싸우지 않고 날을 끌며 오래 버티면서, 날랜 용사를 나누어 보내 그 군량 길을 끊는 것만 한 것이 없소. 열흘이 못 되어 군량이 반드시 다하여 싸우려도 못 하고 돌아가려도 길이 없으리니, 이것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길이오.」 연수가 따르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곧장 나아갔다.
태종이 밤에 여러 장수를 불러 몸소 지휘하였다. 이적을 보내 보병·기병 만 오천으로 성 서쪽 고개에 진 치게 하고, 장손무기는 우진달 등 정병 만 천을 거느려 기병(奇兵)으로 삼아 산 북쪽 좁은 골에서 나와 그 뒤를 찌르게 하고, 태종은 스스로 보병·기병 사천을 거느리고 북과 나팔을 감추고 깃발을 뉘어 적 진영 북쪽 높은 봉우리로 나아가서, 여러 군에 북과 나팔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나서라 명하였다. 그리고 담당 관사에 명해 조당 곁에 항복받을 장막을 치게 하고 「내일 낮이면 여기서 항복한 오랑캐를 받으리라!」 하고 드디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갔다.
16고연수의 항복
明日,延壽獨見李勣兵,欲與戰。太宗遙望無忌軍塵起,令鼓角並作,旗幟齊舉。賊衆大懼,將分兵禦之,而其陣已亂。李勣以步卒長槍一萬擊之,延壽衆敗。無忌縱兵乘其後,太宗又自山而下,引軍臨之,賊因大潰,斬首萬餘級。延壽等率其餘寇,依山自保。於是命無忌、勣等引兵圍之,撤東川梁以斷歸路。太宗按轡徐行,觀賊營壘,謂侍臣曰:「高麗傾國而來,存亡所系,一麾而敗,天佑我也!」因下馬再拜以謝天。延壽等膝行而前,拜手請命。太宗簡傉薩以下酋長三千五百人,授以戎秩,遷之內地。收靺鞨三千三百,盡坑之,餘衆放還平壤。獲馬三萬疋、牛五萬頭、明光甲五千領,他器械稱是。高麗國振駭,後黃城及銀城並自拔,數百里無復人煙。因名所幸山爲駐蹕山,令將作造《破陣圖》,命中書侍郎許敬宗爲文勒石以紀其功。授高延壽鴻臚卿,高惠真司農卿。張亮又與高麗再戰于建安城下,皆破之,於是列長圍以攻焉。
이튿날 연수는 이적의 군사만 보고 싸우려 하였다. 태종이 멀리 무기의 군사 먼지가 이는 것을 바라보고 북과 나팔을 함께 울리고 깃발을 일제히 들게 하니, 적의 무리가 크게 두려워 군사를 나누어 막으려 했으나 그 진이 이미 어지러웠다. 이적이 긴 창 보졸 일만으로 치니 연수의 무리가 패하고, 무기가 군사를 놓아 그 뒤를 타고 태종이 또 산에서 내려와 군사를 이끌고 임하니, 적이 크게 무너져 만여 급을 베었다. 연수 등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해 스스로 지키니, 이에 무기와 이적 등에게 명해 에워싸고 동천의 다리를 걷어 돌아갈 길을 끊었다.
태종이 고삐를 당겨 천천히 가며 적의 진영과 보루를 살펴보고 시신들에게 「고려가 온 나라를 기울여 왔으니 존망이 달린 일인데, 한 번 깃발을 휘둘러 패하니 하늘이 나를 도움이라!」 하고, 말에서 내려 두 번 절하여 하늘에 사례하였다. 연수 등이 무릎걸음으로 나아와 절하며 명을 청하였다. 태종이 욕살 이하 추장 삼천오백 명을 가려 군직을 주어 내지로 옮기고, 말갈 삼천삼백을 거두어 다 구덩이에 묻었으며, 남은 무리는 평양으로 놓아 보냈다. 말 삼만 필, 소 오만 마리, 명광개 오천 벌을 얻고 다른 기계도 그에 맞먹었다. 고려 온 나라가 놀라 떨어, 뒤에 황성과 은성이 다 스스로 성을 비우니 수백 리에 다시 인기척이 없었다. 이에 머물던 산을 주필산이라 이름하고, 장작에게 파진도(破陣圖)를 그리게 하고 중서시랑 허경종에게 글을 지어 돌에 새겨 그 공을 기록하게 하였다. 고연수에게 홍려경을, 고혜진에게 사농경을 제수하였다. 장량이 또 고려와 건안성 아래서 두 번 싸워 다 깨뜨리니, 이에 긴 포위를 벌여 쳤다.
17안시성의 흙산
八月,移營安市城東,李勣遂攻安市,擁延壽等降衆營其城下以招之。城中人堅守不動,每見太宗旄麾,必乘城鼓噪以拒焉。帝甚怒。李勣曰:「請破之日,男子盡誅。」城中聞之,人皆死戰。乃令江夏王道宗築土山,攻其城東南隅;高麗亦埤城增雉以相抗。李勣攻其西面,令拋石撞車壞其樓雉;城中隨其崩壞,即立木爲柵。道宗以樹條苞壤爲土,屯積以爲山,其中間五道加木,被土於其上,不舍晝夜,漸以逼城。道宗遣果毅都尉傅伏愛領隊兵于山頂以防敵,土山自高而陟,排其城,城崩。會伏愛私離所部,高麗百人自頹城而戰,遂據有土山而塹斷之,積火縈盾以自固。太宗大怒,斬伏愛以徇。命諸將擊之,三日不能克。
8월에 진영을 안시성 동쪽으로 옮기고, 이적이 드디어 안시를 치며 연수 등 항복한 무리를 성 아래 진 치게 하여 불렀다. 성안 사람들은 굳게 지켜 움직이지 않았고, 태종의 깃발을 볼 때마다 반드시 성에 올라 북 치고 소리 지르며 막으니 황제가 몹시 노하였다. 이적이 「깨뜨리는 날 남자를 다 죽이기를 청합니다」 하니, 성안이 듣고 사람마다 죽기로 싸웠다. 이에 강하왕 도종에게 명해 흙산을 쌓아 성 동남 모퉁이를 치게 하니, 고려도 성을 돋우고 성가퀴를 더해 맞섰다. 이적이 서면을 치며 포석과 충차로 다락과 성가퀴를 부수니, 성안은 무너지는 대로 곧 나무를 세워 목책을 만들었다. 도종이 나뭇가지에 흙을 싸서 쌓아 산을 만들고 그 가운데 다섯 길에 나무를 걸치고 위에 흙을 덮어, 밤낮을 쉬지 않고 차츰 성에 다가갔다. 도종이 과의도위 부복애를 보내 대병(隊兵)을 거느리고 산꼭대기에서 적을 막게 했는데, 흙산이 절로 높아지며 성을 밀어 성이 무너졌다. 마침 복애가 사사로이 부서를 떠난 참에, 고려 군사 백 명이 무너진 성에서 나와 싸워 드디어 흙산을 차지하고 참호를 끊고 불을 쌓고 방패를 둘러 굳혔다. 태종이 크게 노하여 복애를 베어 조리돌리고, 여러 장수에게 명해 쳤으나 사흘이 되도록 이기지 못했다.
18성주에게 비단을 내리다
太宗以遼東倉儲無幾,士卒寒凍,乃詔班師。曆其城,城中皆屏聲偃幟,城主登城拜手奉辭。太宗嘉其堅守,賜絹百匹,以勵事君之節。
태종은 요동의 곡식 쌓인 것이 얼마 없고 사졸이 추위에 얼므로 이에 조서로 군사를 돌렸다. 그 성을 지나는데 성안이 다 소리를 죽이고 깃발을 뉘었으며, 성주가 성에 올라 절하며 하직을 받들었다. 태종은 그 굳게 지킴을 가상히 여겨 비단 백 필을 내려 임금 섬기는 절개를 격려하였다.
19만 사천 명을 사서 놓아주다
初。攻陷遼東城,其中抗拒王師,應沒爲奴婢者一萬四千人,並遣先集幽州,將分賞將士。太宗湣其父母妻子一朝分散,令有司准其直,以布帛贖之,赦爲百姓。其衆歡呼之聲,三日不息。高延壽自降後,常積歎,尋以憂死。惠真竟至長安。
처음 요동성을 함락시켰을 때 그 안에서 왕사(王師)에 항거하여 노비로 몰수되어야 할 자가 만 사천 명이라, 먼저 유주에 모아 두고 장사들에게 나누어 주려 하였다. 태종은 그 부모 처자가 하루아침에 흩어짐을 가엾이 여겨, 담당 관사에 값을 쳐서 베와 비단으로 대속하게 하고 사면하여 백성으로 삼았다. 그 무리의 환호 소리가 사흘을 그치지 않았다. 고연수는 항복한 뒤로 늘 탄식을 쌓다가 이윽고 근심으로 죽었다. 혜진은 마침내 장안에 이르렀다.
20두 미녀를 돌려보내다
二十年,高麗遣使來謝罪,並獻二美女。太宗謂其使曰:「歸謂爾主,美色者,人之所重。爾之所獻,信爲美麗。憫其離父母兄弟于本國,留其身而忘其親,愛其色而傷其心,我不取也。」並還之。
20년에 고려가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아울러 두 미녀를 바쳤다. 태종이 그 사신에게 말하였다. 「돌아가 네 임금에게 이르라. 아름다운 얼굴은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바요, 너희가 바친 이도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본국의 부모 형제와 헤어짐을 가엾이 여기니, 그 몸을 붙들고 그 어버이를 잊게 하며 그 얼굴을 사랑하고 그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내가 취하지 않는다.」 아울러 돌려보냈다.
21미완의 재정벌
二十二年,又遣右武衛將軍薛萬徹等往青丘道伐之,萬徹渡海入鴨綠水,進破其泊灼城,俘獲甚衆。太宗又命江南造大船,遣陝州刺史孫伏伽召募勇敢之士,萊州刺史李道裕運糧及器械,貯于烏胡島,將欲大舉以伐高麗。未行而帝崩。高宗嗣位,又命兵部尚書任雅相、左武衛大將軍蘇定方、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等前後討之,皆無大功而還。
22년에 또 우무위장군 설만철 등을 보내 청구도로 가서 치게 하니, 만철이 바다를 건너 압록수에 들어가 박작성을 나아가 깨뜨리고 사로잡은 것이 몹시 많았다. 태종이 또 강남에 명해 큰 배를 짓고, 섬주자사 손복가를 보내 용감한 군사를 모집하고 내주자사 이도유에게 군량과 기계를 날라 오호도에 쌓게 하여, 장차 크게 일으켜 고려를 치려 하였다. 떠나기 전에 황제가 붕어하였다. 고종이 자리를 이어 또 병부상서 임아상, 좌무위대장군 소정방,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 등에게 명해 앞뒤로 쳤으나 다 큰 공 없이 돌아왔다.
22남생이 당에 달아나다
乾封元年,高藏遣其子入朝,陪位於太山之下。其年,蓋蘇文死,其子男生代爲莫離支,與其弟男建、男產不睦,各樹朋黨,以相攻擊。男生爲二弟所逐,走據國內城死守,其子獻誠詣闕求哀。詔令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率兵應接之。男生脫身來奔,詔授特進、遼東大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封玄菟郡公。十一月,命司空、英國公李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率裨將郭待封等以征高麗。
건봉 원년에 고장(보장왕)이 아들을 보내 조회하고 태산 아래서 배위(陪位)하였다. 그해에 개소문이 죽고 아들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었는데, 아우 남건·남산과 화목하지 못하여 저마다 붕당을 세워 서로 쳤다. 남생이 두 아우에게 쫓겨 국내성에 웅거해 죽기로 지키며, 아들 헌성을 대궐에 보내 애걸하였다. 조서로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맞아 접응하게 하니, 남생이 몸을 빼어 도망해 왔다. 조서로 특진·요동대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를 제수하고 현도군공에 봉하였다. 11월에 사공 영국공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명해 비장 곽대봉 등을 거느리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23이적이 신성을 얻다
二年二月,勣度遼至新城,謂諸將曰:「新城是高麗西境鎮城,最爲要害。若不先圖,余城未易可下。」遂引兵於新城西南,據山築柵,且攻且守,城中窘迫,數有降者,自此所向克捷。高藏及男建遣太大兄男產將首領九十八人,持帛幡出降,且請入朝。勣以禮延接。男建猶閉門固守。
2년 2월에 이적이 요수를 건너 신성에 이르러 여러 장수에게 「신성은 고려 서쪽 지경의 진성(鎭城)으로 가장 요해다. 먼저 도모하지 않으면 남은 성을 쉽게 떨어뜨릴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신성 서남에서 산에 의지해 목책을 쌓고 치며 지키니, 성안이 군색하여 항복하는 자가 잇달았고 이로부터 가는 곳마다 이겼다. 고장과 남건이 태대형 남산을 보내 우두머리 아흔여덟 명을 거느리고 흰 기를 들고 나와 항복하고 아울러 입조를 청하니, 이적이 예로 맞았다. 남건은 오히려 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24평양성이 무너지다
總章元年九月,勣又移營于平壤城南,男建頻遣兵出戰,皆大敗。男建下捉兵總管僧信誠密遣人詣軍中,許開城門爲內應。經五日,信誠果開門,勣從兵入,登城鼓噪,燒城門樓,四面火起。男建窘急自刺,不死。十一月,拔平壤城,虜高藏、男建等。十二月,至京師,獻俘于含元宮。詔以高藏政不由己,授司平太常伯;男產先降,授司宰少卿;男建配流黔州;男生以鄉導有功,授右衛大將軍,封汴國公,特進如故。
총장 원년 9월에 이적이 또 진영을 평양성 남쪽으로 옮기니, 남건이 자주 군사를 내어 싸웠으나 다 크게 패했다. 남건 밑에서 군사를 잡은 총관인 승려 신성이 몰래 사람을 군중에 보내 성문을 열어 내응하겠다 하였다. 닷새가 지나 신성이 과연 문을 여니, 이적의 군사가 따라 들어가 성에 올라 북 치고 소리 지르며 성문 다락을 불사르니 사면에 불이 일었다. 남건이 다급하여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11월에 평양성을 빼앗고 고장과 남건 등을 사로잡았다. 12월에 서울에 이르러 함원궁에서 포로를 바쳤다. 조서로, 고장은 정사가 제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여 사평태상백을 제수하고, 남산은 먼저 항복했으므로 사재소경을 제수하고, 남건은 검주로 유배하고, 남생은 길잡이한 공이 있으므로 우위대장군을 제수하고 변국공에 봉하며 특진은 그대로 두었다.
25안동도호부
高麗國舊分爲五部,有城百七十六,戶六十九萬七千;乃分其地置都督府九、州四十一、縣一百,又置安東都護府以統之。擢其酋渠有功者授都督、刺史及縣令,與華人參理百姓。乃遣左武衛將軍薛仁貴總兵鎮之,其後頗有逃散。
고려국은 본디 다섯 부로 나뉘어 성이 백칠십육이요 호수가 육십구만 칠천이었다. 이에 그 땅을 나누어 도독부 아홉과 주 마흔하나와 현 백을 두고, 또 안동도호부를 두어 통솔하게 하였다. 추장 가운데 공 있는 자를 뽑아 도독·자사와 현령을 주어 화인(華人)과 함께 백성을 다스리게 하고, 좌무위장군 설인귀를 보내 군사를 총괄해 진수하게 했는데, 그 뒤 도망해 흩어진 자가 자못 많았다.
26보장왕의 유배
儀鳳中,高宗授高藏開府儀同三司、遼東都督,封朝鮮王,居安東,鎮本蕃爲主。高藏至安東,潛與靺鞨相通謀叛。事覺,召還,配流邛州,並分徙其人,散向河南、隴右諸州,其貧弱者留在安東城傍。
의봉 연간에 고종이 고장에게 개부의동삼사·요동도독을 제수하고 조선왕에 봉하여, 안동에 살며 본번을 진무하는 주인이 되게 하였다. 고장이 안동에 이르러 몰래 말갈과 서로 통하며 배반을 꾀하다가 일이 드러나 불려 돌아와 공주로 유배되고, 아울러 그 사람들을 나누어 하남·농우 여러 주로 흩어 옮기고 가난하고 약한 자만 안동성 곁에 남겼다.
27고씨의 대가 끊기다
高藏以永淳初卒,贈衛尉卿,詔送至京師,於頡利墓左賜以葬地,兼爲樹碑。垂拱二年,又封高藏孫寶元爲朝鮮郡王。聖曆元年,進授左鷹揚衛大將軍,封爲忠誠國王,委其統攝安東舊戶,事竟不行。二年,又授高藏男德武爲安東都督,以領本蕃。自是高麗舊戶在安東者漸寡少。分投突厥及靺鞨等,高氏君長遂絕矣!
고장이 영순 초에 죽으니 위위경을 추증하고, 조서로 서울까지 호송해 힐리의 무덤 왼쪽에 장지를 내리고 아울러 비를 세웠다. 수공 이년에 또 고장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에 봉하고, 성력 원년에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올려 제수하며 충성국왕에 봉해 안동의 옛 호구를 통솔하게 하였으나 일이 끝내 행해지지 않았다. 2년에 또 고장의 아들 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제수해 본번을 거느리게 하였다. 이로부터 안동에 있던 고려 옛 호구가 차츰 줄어 돌궐과 말갈 등으로 흩어져 드니, 고씨 군장의 대가 드디어 끊겼다!
28헌성의 사양
男生以儀鳳初卒于長安,贈并州大都督。子獻誠,授右衛大將軍,兼令羽林衛上下。天授中,則天嘗內出金銀實物,令宰相及南北衙文武官內擇善射者五人共賭之。內史張光輔先讓獻誠爲第一,獻誠復讓右玉鈐衛大將軍薛吐摩支,摩支又讓獻誠。既而獻誠奏曰:「陛下令簡能射者五人,所得者多非漢官。臣恐自此已後,無漢官工射之名,伏望停寢此射。」則天嘉而從之。
남생은 의봉 초에 장안에서 죽으니 병주대도독을 추증하였다. 아들 헌성은 우위대장군을 제수받고 우림위를 겸해 거느렸다. 천수 연간에 측천이 일찍이 궁중에서 금은 보물을 내어, 재상과 남북아 문무관 가운데 활 잘 쏘는 자 다섯을 골라 함께 걸고 쏘게 하였다. 내사 장광보가 먼저 헌성에게 첫째를 사양하니, 헌성은 다시 우옥검위대장군 설토마지에게 사양하고 마지는 또 헌성에게 사양하였다. 이윽고 헌성이 아뢰었다. 「폐하께서 활 잘 쏘는 자 다섯을 고르게 하셨는데 뽑힌 자가 대개 한관(漢官)이 아닙니다. 신은 이 뒤로 한관 가운데 활 잘 쏜다는 이름이 없어질까 두려우니, 엎드려 바라건대 이 활쏘기를 그만두소서.」 측천이 가상히 여겨 따랐다.
29내준신의 모함
時酷吏來俊臣嘗求貨於獻誠,獻誠拒而不答,遂爲俊臣所構,誣其謀反,縊殺之。則天后知其冤,贈右羽林衛大將軍,以禮改葬。
그때 혹리 내준신이 일찍이 헌성에게 뇌물을 요구했는데 헌성이 물리치고 답하지 않으니, 드디어 준신에게 얽혀 모반으로 무고되어 목 졸려 죽었다. 측천후가 그 원통함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을 추증하고 예로 다시 장사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