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百濟
1여섯 좌평의 나라
百濟國,本亦扶餘之別種,嘗爲馬韓故地,在京師東六千二百里,處大海之北,小海之南。東北至新羅,西渡海至越州,南渡海至倭國,北渡海至高麗。其王所居有東西兩城。所置內官曰內臣佐平,掌宣納事;內頭佐平,掌庫藏事;內法佐平,掌禮儀事;衛士佐平,掌宿衛兵事;朝廷佐平,掌刑獄事;兵官佐平,掌在外兵馬事。又外置六帶方,管十郡,其用法:叛逆者死,籍沒其家;殺人者,以奴婢三贖罪;官人受財及盜者,三倍追贓,仍終身禁錮。凡諸賦稅及風土所產,多與高麗同。其王服大袖紫袍,青錦褲,烏羅冠,金花爲飾,素皮帶,烏革履。官人盡緋爲衣,銀花飾冠。庶人不得衣緋紫。歲時伏臘,同於中國。其書籍有《五經》、子、史,又表疏並依中華之法。
백제국은 본디 부여의 별종으로 일찍이 마한의 옛 땅이었으니, 서울에서 동으로 육천이백 리, 큰 바다 북쪽 작은 바다 남쪽에 자리한다. 동북은 신라에 이르고, 서로 바다를 건너면 월주에 이르고, 남으로 바다를 건너면 왜국에 이르고, 북으로 바다를 건너면 고려에 이른다. 왕이 사는 곳에 동서 두 성이 있다.
두는 내관은, 내신좌평은 왕명 출납을 맡고, 내두좌평은 창고를 맡고, 내법좌평은 예의를 맡고, 위사좌평은 숙위 군사를 맡고, 조정좌평은 형벌과 옥사를 맡고, 병관좌평은 바깥 군사를 맡는다. 또 밖으로 여섯 대방(帶方)을 두어 열 군씩 관할한다. 그 법 씀은, 반역한 자는 죽이고 그 집안을 적몰하며, 사람을 죽인 자는 노비 셋으로 속죄하고, 관인으로 뇌물 받거나 도둑질한 자는 세 배로 물리고 종신토록 금고한다. 온갖 조세와 풍토의 산물은 고려와 같은 것이 많다.
왕은 소매 큰 자주 도포와 푸른 비단 바지를 입고 검은 깁 관에 금꽃을 꾸미며, 흰 가죽 띠에 검은 가죽신을 신는다. 관인은 다 붉은 옷에 은꽃으로 관을 꾸민다. 서민은 붉은빛과 자주빛을 입지 못한다. 철따라 복날과 납일을 쇠는 것이 중국과 같다. 서적으로 오경과 제자서와 사서가 있고, 표와 소도 다 중화의 법식을 따른다.
2과하마를 바치다
武德四年,其王扶餘璋遣使來獻果下馬。七年,又遣大臣奉表朝貢。高祖嘉其誠款,遣使就冊爲帶方郡王、百濟王。自是歲遣朝貢,高祖撫勞甚厚。因訟高麗閉其道路,不許來通中國,詔遣硃子奢往和之。又相與新羅世爲仇敵,數相侵伐。
무덕 사년에 왕 부여장(무왕)이 사신을 보내 과하마(果下馬)를 바쳤다. 7년에 또 대신을 보내 표를 받들어 조공하니, 고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사신을 보내 대방군왕·백제왕으로 책봉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고조가 어루만지고 위로함이 몹시 두터웠다. 그 김에 고려가 길을 막아 중국과 통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소연하니, 조서로 주자사를 보내 화해시켰다. 또 신라와 대대로 원수가 되어 자주 서로 침벌하였다.
3태종의 새서
貞觀元年,太宗賜其王璽書曰:「王世爲君長,撫有東蕃。海隅遐曠,風濤艱阻,忠款之至,職貢相尋,尚想徽猷,甚以嘉慰!朕自祗承寵命,君臨區宇,思弘王道,愛育黎元。舟車所通,風雨所及,期之遂性,咸使乂安。新羅王金真平,朕之籓臣,王之鄰國。每聞遣師,征討不息,阻兵安忍,殊乖所望。朕已對王侄信福及高麗、新羅使人,具敕通和,咸許輯睦。王必須忘彼前怨,識朕本懷,共篤鄰情,即停兵革。」璋因遣使奉表陳謝,雖外稱順命,內實相仇如故。十一年,遣使來朝,獻鐵甲雕斧。太宗優勞之,賜彩帛三千段並錦袍等。
정관 원년에 태종이 그 왕에게 새서를 내렸다. 「왕은 대대로 군장이 되어 동번을 어루만져 왔다. 바다 모퉁이 아득히 멀고 풍파가 험한데도 충성이 지극하여 조공이 잇달으니, 그 아름다운 뜻을 생각하면 매우 가상하고 위로가 된다. 짐은 총명(寵命)을 공손히 이어 천하에 군림하면서, 왕도를 넓히고 백성을 사랑으로 기르기를 생각하여, 배와 수레가 통하고 바람과 비가 미치는 곳마다 저마다 살 길을 이루어 다 편안하기를 바란다. 신라왕 김진평은 짐의 번신이요 왕의 이웃 나라인데, 매번 들으니 군사를 보내 정벌이 그치지 않는다 한다. 군사를 믿고 잔인함을 편안히 여기니 바라던 바에 몹시 어긋난다. 짐이 이미 왕의 조카 신복과 고려·신라 사인들에게 화해를 명하여 다 화목하기로 하였다. 왕은 반드시 지난 원한을 잊고 짐의 본뜻을 알아, 함께 이웃의 정을 도탑게 하고 곧 싸움을 그치라.」 장이 이에 사신을 보내 표를 받들어 사죄했는데, 겉으로는 명을 따른다 하면서 속으로는 실상 여전히 서로 원수졌다. 11년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철갑옷과 아로새긴 도끼를 바치니, 태종이 두터이 위로하고 채색 비단 삼천 단과 비단 도포 등을 내렸다.
4의자왕의 책봉
十五年,璋卒,其子義慈遣使奉表告哀。太宗素服哭之,贈光祿大夫,賻物二百段,遣使冊命義慈爲柱國,封帶方郡王、百濟王。
15년에 장이 죽으니 아들 의자가 사신을 보내 표를 받들어 상을 알렸다. 태종이 소복하고 곡하며 광록대부를 추증하고 부의 이백 단을 내렸으며, 사신을 보내 의자를 주국으로 책명하고 대방군왕·백제왕에 봉하였다.
5마흔 성을 빼앗다
十六年,義慈興兵伐新羅四十餘城,又發兵以守之,與高麗和親通好,謀欲取党項城以絕新羅入朝之路。新羅遣使告急請救。太宗遣司農丞相里玄獎齎書告諭兩蕃,示以禍福。及太宗親征高麗,百濟懷二,乘虛襲破新羅十城。二十二年,又破其十餘城。數年之中,朝貢遂絕。
16년에 의자가 군사를 일으켜 신라의 마흔여 성을 치고 또 군사를 내어 지키며, 고려와 화친 통호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의 입조 길을 끊으려 꾀하였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위급을 알리고 구원을 청하니, 태종이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 글을 지니고 두 번국을 타이르며 화복을 보였다. 태종이 고려를 친정하자 백제는 두 마음을 품고 빈틈을 타서 신라 열 성을 습격해 깨뜨렸다. 22년에 또 그 십여 성을 깨뜨렸다. 몇 해 사이에 조공이 드디어 끊겼다.
6다시 조공하다
高宗嗣位,永徽二年,始又遣使朝貢。使還,降璽書與義慈曰:
고종이 자리를 잇자 영휘 이년에 비로소 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갈 때 의자에게 새서를 내렸다.
7빼앗은 성을 돌려주라
至如海東三國,開基自久,並列疆界,地實犬牙。近代已來,遂構嫌隙。戰爭交起,略無寧歲。遂令三韓之氓,命懸刀俎,尋戈肆憤,朝夕相仍。朕代天理物,載深矜湣。去歲王及高麗、新羅等使並來入朝,朕命釋茲讎怨,更敦款穆。新羅使金法敏奏書:「高麗、百濟,脣齒相依,競舉兵戈,侵逼交至。大城重鎮,並爲百濟所並;疆宇日蹙,威力並謝。乞詔百濟,令歸所侵之城。若不奉詔,即自興兵打取。但得故地,即請交和。」朕以其言既順,不可不許。昔齊桓列土諸侯,尚存亡國;況朕萬國之主,豈可不恤危籓!王所兼新羅之城,並宜還其本國;新羅所獲百濟俘虜,亦遣還王。然後解患釋紛,韜戈偃革,百姓獲息肩之願,三蕃無戰爭之勞。比夫流血邊亭,積屍疆場,耕織並廢,士女無聊,豈可同年而語矣!王若不從進止,朕已依法敏所請,任其與王決戰;亦令約束高麗,不許遠相救恤。高麗若不承命,即令契丹諸蕃渡遼澤入抄掠。王可深思朕言,自求多福,審圖良策,無貽後悔。
「해동 세 나라로 말하면 나라 연 지 오래고 강계가 나란히 벌어져 땅이 실로 개 이빨처럼 맞물렸다. 근래에 드디어 혐극을 얽어 전쟁이 번갈아 일어나 거의 편안한 해가 없으니, 마침내 삼한의 백성이 목숨을 도마 위에 매달고 창을 찾아 분을 부리기를 아침저녁으로 잇게 하였다. 짐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리매 깊이 가엾이 여긴다. 지난해 왕과 고려·신라의 사신이 함께 입조했을 때, 짐은 이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을 도탑게 하라 명하였다. 신라 사신 김법민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고려와 백제는 입술과 이처럼 서로 기대어 다투어 무기를 들고 번갈아 침노해 오니, 큰 성과 중요한 진이 다 백제에게 아울려져 강토는 날로 줄고 위력도 함께 시들었습니다. 바라건대 백제에 조서를 내려 침노한 성을 돌려주게 하시고, 조서를 받들지 않거든 곧 저희가 군사를 일으켜 쳐서 되찾게 하소서. 옛 땅만 얻으면 곧 화해를 청하겠습니다〉 하였다. 짐은 그 말이 도리에 맞으므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 환공은 열토의 제후로도 망하는 나라를 보존시켰는데, 하물며 짐은 만국의 임금이니 어찌 위태로운 번국을 돌보지 않으랴. 왕이 겸병한 신라의 성은 다 그 본국에 돌려주고, 신라가 사로잡은 백제 포로도 왕에게 돌려보내게 하라. 그런 뒤에야 근심을 풀고 분규를 놓아 창을 거두고 갑옷을 뉘면, 백성은 어깨 쉴 소원을 얻고 세 번국에 전쟁의 수고가 없으리라. 저 변방 정자에 피 흘리고 싸움터에 주검을 쌓으며 밭갈이와 길쌈이 함께 폐하여 사녀가 살 길 없는 것과 어찌 같은 해에 두고 말하랴! 왕이 짐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짐은 이미 법민의 청대로 왕과 결전하도록 맡길 것이요, 또한 고려를 단속하여 멀리서 서로 구원하지 못하게 하리라. 고려가 명을 받들지 않으면 곧 거란 등 여러 번국에 명해 요택을 건너 들어가 노략하게 하리라.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고 좋은 계책을 살펴 도모하여 뒷날 뉘우침을 남기지 말라.」
8해동증민의 최후
六年,新羅王金春秋又表稱百濟與高麗、靺鞨侵其北界,已沒三十餘城。顯慶五年,命左衛大將軍蘇定方統兵討之,大破其國。虜義慈及太子隆、小王孝演、偽將五十八人等送于京師,上責而宥之。其國舊分爲五部,統郡三十七,城二百,戶七十六萬。至是乃以其地分置熊津、馬韓、東明等五都督府,各統州縣,立其酋渠爲都督、刺史及縣令。命右衛郎將王文度爲熊津都督,總兵以鎮之。義慈事親以孝行聞,友于兄弟,時人號「海東曾、閔」。及至京,數日而卒。贈金紫光祿大夫、衛尉卿,特許其舊臣赴哭。送就孫皓、陳叔寶墓側葬之,並爲豎碑。
6년에 신라왕 김춘추가 또 표를 올려, 백제가 고려·말갈과 함께 그 북쪽 지경을 침노해 이미 삼십여 성이 함락되었다 하였다. 현경 오년에 좌위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해 군사를 거느리고 치게 하여 그 나라를 크게 깨뜨리고, 의자와 태자 융과 소왕 효연과 장수 쉰여덟 명 등을 사로잡아 서울로 보내니, 임금이 꾸짖고 용서하였다. 그 나라는 본디 다섯 부로 나뉘어 군 서른일곱과 성 이백을 통솔하고 호수가 칠십육만이었는데, 이에 그 땅을 나누어 웅진·마한·동명 등 다섯 도독부를 두어 저마다 주현을 통솔하게 하고, 추장을 세워 도독·자사와 현령으로 삼았다. 우위낭장 왕문도에게 명해 웅진도독으로 삼아 군사를 총괄해 진수하게 하였다. 의자는 어버이 섬김이 효행으로 알려지고 형제와 우애로워 당시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민자건」이라 불렀는데, 서울에 이르러 며칠 만에 죽었다. 금자광록대부·위위경을 추증하고 특별히 옛 신하들의 곡을 허락했으며, 손호·진숙보의 무덤 곁에 보내 장사하고 아울러 비를 세웠다.
9주류성의 부흥군
文度濟海而卒。百濟僧道琛、舊將福信率衆據周留城以叛。遣使往倭國,迎故王子扶余豐,立爲王。其西部、北部並翻城應之。時郎將劉仁願留鎮於百濟府城,道琛等引兵圍之。帶方州刺史劉仁軌代文度統衆,便道發新羅兵合契以救仁願,轉鬥而前,所向皆下。道琛等於熊津江口立兩柵以拒官軍,仁軌與新羅兵四面夾擊之,賊衆退走入柵,阻水橋狹,墮水及戰死萬餘人。道琛等乃釋仁願之圍,退保任存城。新羅兵士以糧盡引還,時龍朔元年三月也。
문도는 바다를 건너다 죽었다. 백제 승려 도침과 옛 장수 복신이 무리를 거느리고 주류성에 웅거해 배반하고, 왜국에 사신을 보내 옛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세우니, 서부와 북부가 다 성을 뒤집어 호응하였다. 그때 낭장 유인원이 백제부성에 머물러 지키고 있었는데 도침 등이 군사를 이끌고 에워쌌다. 대방주자사 유인궤가 문도를 대신해 무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 군사를 내어 합세하여 인원을 구원하며 싸우면서 나아가니 가는 곳마다 다 항복하였다. 도침 등이 웅진강 어귀에 두 목책을 세워 관군을 막으니, 인궤가 신라 군사와 사면에서 끼고 치자 적의 무리가 물러나 목책으로 달아나다가, 물에 막히고 다리가 좁아 물에 빠지거나 싸우다 죽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 도침 등이 이에 인원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 임존성을 지켰다. 신라 군사는 군량이 다해 돌아가니, 때는 용삭 원년 3월이었다.
10도침과 복신
於是道琛自稱領軍將軍,福信自稱霜岑將軍,招誘叛亡,其勢益張。使告仁軌曰:「聞大唐與新羅約誓,百濟無問老少,一切殺之。然後以國府新羅。與其受死,豈若戰亡!所以聚結自固守耳!」仁軌作書,具陳禍福,遣使諭之。道琛等恃衆驕倨,置仁軌之使於外館。傳語謂曰:「使人官職小,我是一國大將,不合自參。」不答書遣之。尋而福信殺道琛,並其兵衆,扶余豐但主祭而已。
이에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이라 일컫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이라 일컬으며, 배반해 도망한 무리를 불러 모으니 그 형세가 더욱 커졌다. 사람을 시켜 인궤에게 말하였다. 「들으니 대당이 신라와 맹세하기를, 백제 사람은 늙고 젊고 없이 다 죽이고 그런 뒤에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기로 했다 하오. 죽음을 받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것이 낫지 않겠소. 그래서 모여 스스로 지킬 뿐이오!」 인궤가 글을 지어 화복을 갖추어 말하고 사람을 보내 타일렀다. 도침 등은 무리를 믿고 교만하여 인궤의 사자를 바깥 객관에 두고 말을 전하기를 「사인의 벼슬이 낮다. 나는 한 나라의 대장이니 스스로 만나기에 맞지 않다」 하고, 답서 없이 돌려보냈다. 이윽고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군사를 아우르니, 부여풍은 다만 제사를 주관할 뿐이었다.
11백강 어귀의 네 싸움
二年七月,仁願、仁軌等率留鎮之兵,大破福信余衆于熊津之東,拔其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殺獲甚衆。仍令分兵以鎮守之。福信等以真峴城臨江高險,又當沖要,加兵守之。仁軌引新羅之兵乘夜薄城,四面攀堞而上,比明而入據其城,斬首八百級,遂通新羅運糧之路。仁願乃奏請益兵,詔發淄、青、萊、海之兵七千人,遣左威衛將軍孫仁師統衆浮海赴熊津,以益仁願之衆。時福信既專其兵權,與撫余豐漸相猜貳。福信稱疾,臥於窟室,將候扶余豐問疾,謀襲殺之。扶余豐覺而率其親信掩殺福信,又遣使往高麗及倭國請兵以拒官軍。孫仁師中路迎擊,破之。遂與仁願之衆相合,兵勢大振。於是仁師、仁願及新羅王金法敏帥陸軍進,劉仁軌及別帥杜爽、扶余隆率水軍及糧船,自熊津江往白江以會陸軍,同趨周留城。仁軌遇扶余豐之衆于白江之口,四戰皆捷。焚其舟四百艘,賊衆大潰,扶余豐脫身而走。偽王子扶余忠勝、忠志等率士女及倭衆並降。百濟諸城皆復歸順。孫仁師與劉仁願等振旅而還。詔劉仁軌代仁願率兵鎮守。乃授扶余隆熊津都督,遣還本國,共新羅和親,以招輯其餘衆。
2년 7월에 인원·인궤 등이 머물러 지키던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무리를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과 윤성·대산·사정 등 목책을 빼앗아 죽이고 사로잡음이 몹시 많았으며,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에 임해 높고 험하며 요충에 해당하므로 군사를 더해 지켰다. 인궤가 신라 군사를 이끌고 밤을 타 성에 다가가 사면에서 성가퀴를 붙잡고 올라, 날 밝을 무렵 성에 들어가 차지하고 팔백 급을 베니, 드디어 신라의 군량 나르는 길이 통했다. 인원이 이에 군사를 더해 달라 아뢰니, 조서로 치·청·내·해의 군사 칠천을 내어 좌위위장군 손인사를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웅진에 이르러 인원의 군사를 보태게 하였다.
그때 복신이 이미 병권을 오로지하여 부여풍과 차츰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였다. 복신이 병을 핑계하고 굴방에 누워 부여풍이 문병 오기를 기다려 습격해 죽이려 꾀했는데, 부여풍이 알아차리고 친신을 거느리고 복신을 덮쳐 죽이고, 또 고려와 왜국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청해 관군을 막았다. 손인사가 중로에서 맞아 쳐 깨뜨리고 드디어 인원의 무리와 합치니 군세가 크게 떨쳤다. 이에 인사·인원과 신라왕 김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 두상과 부여륭은 수군과 군량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나아갔다. 인궤가 백강 어귀에서 부여풍의 무리를 만나 네 번 싸워 다 이기고 그 배 사백 척을 불사르니, 적의 무리가 크게 무너지고 부여풍은 몸을 빼어 달아났다. 거짓 왕자 부여충승·충지 등이 사녀와 왜의 무리를 거느리고 다 항복하니, 백제의 여러 성이 다 귀순하였다. 손인사와 유인원 등이 군사를 정돈해 돌아가고, 조서로 유인궤가 인원을 대신해 군사를 거느리고 진수하게 하였다. 이에 부여륭에게 웅진도독을 제수해 본국으로 돌려보내, 신라와 화친하고 그 남은 무리를 불러 모으게 하였다.
12웅진의 흰 말 맹세
麟德二年八月,隆到熊津城,與新羅王法敏刑白馬而盟。先祀神祇及川穀之神,而後歃血。其盟文曰:
인덕 이년 8월에 융이 웅진성에 이르러 신라왕 법민과 흰 말을 잡아 맹세하였다. 먼저 신령과 내와 골짜기의 신에게 제사한 뒤에 피를 마셨다. 그 맹세하는 글은 이러하다.
13맹세하는 글
往者百濟先王,迷於逆順,不敦鄰好,不睦親姻。結托高麗,交通倭國,共爲殘暴,侵削新羅,破邑屠城,略無寧歲。天子憫一物之失所,憐百姓之無辜,頻命行人,遣其和好。負險恃遠,侮慢天經。皇赫斯怒,恭行吊伐,旌旗所指,一戎大定。固可瀦宮汙宅,作誡來裔,塞源拔本,垂訓後昆。然懷柔伐叛,前王之令典;興亡繼絕,往哲之通規。事必師古,傳諸曩冊。故立前百濟太子司稼正卿扶余隆爲熊津都督,守其祭祀,保其桑梓。依倚新羅,長爲與國,各除宿憾,結好和親。恭承詔命,永爲籓服。仍遣使人右威衛將軍魯城縣公劉仁願親臨勸諭,具宣成旨,約之以婚姻,申之以盟誓。刑牲歃血,共敦終始;分災恤患,恩若弟兄。祗奉綸言,不敢失墜,既盟之後,共保歲寒。若有棄信不恆,二三其德,興兵動衆,侵犯邊陲,明神鑒之,百殃是降,子孫不昌,社稷無守,禋祀磨滅,罔有遺餘。故作金書鐵契,藏之宗廟,子孫萬代,無或敢犯。神之聽之,是饗是福。
「지난날 백제의 앞 임금은 거스름과 따름에 어두워, 이웃과 우호를 도탑게 하지 않고 인척과 화목하지 않았다. 고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포한 짓을 하며 신라를 침노해 깎아, 고을을 부수고 성을 도륙하여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천자는 물건 하나라도 제자리를 잃음을 딱하게 여기고 죄 없는 백성을 가엾이 여겨, 자주 행인(사신)에게 명해 화호를 권하였다. 그러나 험함을 지고 멂을 믿고 하늘의 법도를 업신여기니, 황제께서 이에 크게 노하시어 삼가 조문하고 치는 일을 행하시매, 깃발이 가리키는 곳에 한 번 싸움으로 크게 평정되었다. 진실로 궁궐을 웅덩이로 만들고 집터를 못으로 만들어 오는 세대의 경계로 삼고, 근원을 막고 뿌리를 뽑아 후손에게 교훈을 드리울 만도 하였다. 그러나 유순한 이를 품고 배반한 자를 침은 앞선 임금들의 아름다운 법이요, 망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이음은 옛 성현의 공통된 규범이라.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함이 지난 서책에 전한다. 그러므로 앞 백제 태자 사가정경 부여륭을 세워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제사를 지키고 그 고향을 보전하게 한다.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이 되어, 저마다 묵은 감정을 풀고 우호를 맺어 화친하라. 삼가 조명을 받들어 길이 번국이 될지어다. 이에 사인 우위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을 보내 친히 나아가 권유하여 황제의 뜻을 갖추 펴게 하니, 혼인으로 약속하고 맹세로 거듭하여, 짐승을 잡아 피를 마시며 함께 처음과 끝을 도탑게 하고, 재앙을 나누고 환난을 구휼하여 은혜가 형제 같게 하라. 윤음을 공손히 받들어 감히 잃지 말며, 맹세한 뒤에는 함께 한겨울 소나무 같은 지조를 지키라. 만일 신의를 버리고 한결같지 않아 그 덕을 이랬다저랬다 하며,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 변경을 침범하면, 밝은 신이 굽어보아 온갖 재앙을 내리리니, 자손이 창성하지 못하고 사직을 지킬 이 없어 제사가 닳아 없어져 남는 것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금서철계(金書鐵契)를 만들어 종묘에 간직하니, 자손 만대에 혹시라도 감히 범하지 말라. 신이여 들으소서. 흠향하시고 복 주소서.」
14유인궤의 글이다
劉仁軌之辭也。歃訖,埋幣帛於壇下之吉地,藏其盟書于新羅之廟。仁願、仁軌等既還,隆懼新羅,尋歸京師。
유인궤가 지은 글이다. 피 마시기를 마치고 폐백을 단 아래 길지에 묻고, 그 맹세 글은 신라의 종묘에 간직하였다. 인원·인궤 등이 돌아가자 융은 신라가 두려워 이윽고 서울로 돌아갔다.
15돌아가지 못한 부여륭
儀鳳二年,拜光祿大夫、太常員外卿、兼熊津都督、帶方郡王,令歸本蕃,安輯餘衆。時百濟本地荒毀,漸爲新羅所據,隆竟不敢還舊國而卒。
의봉 이년에 광록대부·태상원외경 겸 웅진도독·대방군왕에 제수하고 본번으로 돌아가 남은 무리를 안정시키게 하였다. 그때 백제 본토는 황폐해져 차츰 신라의 차지가 되었으므로, 융은 끝내 감히 옛 나라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다.
16백제의 대가 끊기다
其孫敬,則天朝襲封帶方郡王、授衛尉卿。其地自此爲新羅及渤海靺鞨所分,百濟之種遂絕。
그 손자 경이 측천 조정에서 대방군왕을 이어 봉해지고 위위경을 제수받았다. 그 땅은 이로부터 신라와 발해말갈에게 나뉘니, 백제의 대가 드디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