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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

구당서 동이전 舊唐書 東夷傳 · 유후(劉昫) 등 · 945년 (후진 개운 2) · 단락 21 · 한자 2,603자 · 낭독 10.4분

「구당서 동이전」 한 권 「신라」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당나라가 본 삼국의 마지막 세기. 경당에서 책 읽는 고려 젊은이들, 연개소문의 정변, 안시성의 흙산, 백강 어귀의 네 싸움과 웅진의 흰 말 맹세, 진덕여왕의 태평송, 그리고 고씨·부여씨의 대가 끊기는 순간까지.

1금성과 열일곱 관등

新羅國,本弁韓之苗裔也。其國在漢時樂浪之地,東及南方俱限大海,西接百濟,北鄰高麗。東西千里,南北二千里。有城邑村落。王之所居曰金城,周七八里。衛兵三千人,設獅子隊。文武官凡有十七等。其王金真平,隋文帝時授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武德四年,遣使朝貢。高祖親勞問之,遣通直散騎侍郎庾文素往使焉,賜以璽書及畫屏風、錦彩三百段,自此朝貢不絕。其風俗、刑法、衣服,與高麗、百濟略同,而朝服尚白。好祭山神。其食器作柳杯,亦以銅及瓦。國人多金、樸兩姓,異姓不爲婚。重元日,相慶賀燕饗,每以其日拜日月神。又重八月十五日,設樂飲宴,賚群臣,射其庭。婦人發繞頭,以彩及珠爲飾,發甚長美。

신라국은 본디 변한의 후예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 낙랑 땅에 있으니, 동과 남은 다 큰 바다로 한계 지고 서는 백제에 접하고 북은 고려와 이웃한다. 동서 천 리, 남북 이천 리다. 성읍과 촌락이 있다. 왕이 사는 곳은 금성이라 하니 둘레가 칠팔 리요, 위병이 삼천 명으로 사자대를 둔다. 문무관은 무릇 열일곱 등급이 있다. 왕 김진평은 수 문제 때 상개부·낙랑군공·신라왕을 제수받았다.

무덕 사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고조가 친히 위로해 묻고 통직산기시랑 유문소를 사신으로 보내 새서와 그림 병풍과 채색 비단 삼백 단을 내리니, 이로부터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풍속과 형법과 의복은 고려·백제와 대략 같은데 조복은 흰빛을 숭상한다. 산신에게 제사하기를 좋아한다. 식기는 버들 잔을 만들고 구리와 질그릇도 쓴다. 나라 사람에 김·박 두 성이 많고 다른 성과는 혼인하지 않는다. 설날을 소중히 여겨 서로 하례하고 잔치하며, 그날마다 해와 달의 신에게 절한다. 또 팔월 보름을 소중히 여겨 풍악을 벌이고 잔치하며 뭇 신하에게 상 주고 그 뜰에서 활을 쏜다. 부인은 머리를 감아 올려 채색 비단과 구슬로 꾸미는데 머리털이 몹시 길고 아름답다.

2원한의 시작

高祖既聞海東三國舊結怨隙,遞相攻伐,以其俱爲蕃附,務在和睦,乃問其使爲怨所由。對曰:「先是百濟往伐高麗,詣新羅請救,新羅發兵大破百濟國,因此爲怨,每相攻伐。新羅得百濟王,殺之,怨由此始。」七年,遣使冊拜金真平爲柱國,封樂浪郡王、新羅王。

고조는 해동 세 나라가 오래 원한을 맺어 번갈아 서로 친다는 말을 듣고, 다 번국으로 붙었으므로 화목하기를 힘쓰게 하려고 그 사신에게 원한의 까닭을 물었다. 사신이 답하였다. 「지난날 백제가 고려를 치러 가면서 신라에 구원을 청했는데, 신라가 군사를 내어 백제국을 크게 깨뜨렸습니다. 이 일로 원한이 되어 늘 서로 칩니다. 신라가 백제왕을 잡아 죽이니 원한이 여기서 비롯했습니다.」 7년에 사신을 보내 김진평을 주국으로 책배하고 낙랑군왕·신라왕에 봉하였다.

3여악사를 돌려보내다

貞觀五年,遣使獻女樂二人,皆鬒發美色。太宗謂侍臣曰:「朕聞聲色之娛,不如好德。且山川阻遠,懷土可知。近日林邑獻白鸚鵡,尚解思鄉,訴請還國。鳥猶如此,況人情乎!朕湣其遠來,必思親戚,宜付使者,聽遣還家。」

정관 오년에 사신을 보내 여악사 둘을 바치니 다 머리숱 짙고 아름다웠다. 태종이 시신에게 말하였다. 「짐이 들으니 소리와 색의 즐거움은 덕을 좋아함만 못하다 한다. 또 산천이 막히고 머니 고향 그리워할 것을 알 만하다. 요사이 임읍이 흰 앵무새를 바쳤는데 그마저 고향 생각을 알아 돌아가기를 하소연하였다. 새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의 정이랴! 짐은 멀리서 온 것을 가엾이 여기니, 반드시 친척을 그리워할 터라 사자에게 딸려 집에 돌려보내게 하라.」

4선덕여왕과 구원 요청

是歲,真平卒,無子,立其女善德爲王,宗室大臣乙祭總知國政。詔贈真平左光祿大夫,賻物二百段。九年,遣使持節冊命善德柱國,封樂浪郡王、新羅王。十七年,遣使上言:「高麗、百濟,累相攻襲,亡失數十城,兩國連兵,意在滅臣社稷。謹遣陪臣,歸命大國,乞偏師救助。」太宗遣相里玄獎齎璽書賜高麗曰:「新羅委命國家,不闕朝獻。爾與百濟,宜即戢兵。若更攻之,明年當出師擊爾國矣!」太宗將親伐高麗,詔新羅纂集士馬,應接大軍。新羅遣大臣領兵五萬人,入高麗南界,攻水口城,降之。

이해에 진평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그 딸 선덕을 세워 왕으로 삼고, 종실 대신 을제가 국정을 도맡았다. 조서로 진평에게 좌광록대부를 추증하고 부의 이백 단을 내렸다. 9년에 지절 사신을 보내 선덕을 주국으로 책명하고 낙랑군왕·신라왕에 봉하였다. 17년에 사신을 보내 아뢰었다. 「고려와 백제가 여러 번 서로 쳐서 수십 성을 잃었고, 두 나라가 군사를 이어 신의 사직을 없애려 합니다. 삼가 배신을 보내 대국에 목숨을 맡기니, 한 갈래 군사라도 구원해 주시기를 빕니다.」 태종이 상리현장을 보내 새서를 지니고 고려에 내렸다. 「신라는 국가에 목숨을 맡기고 조공을 거르지 않는다. 너와 백제는 곧 군사를 거두라. 다시 치면 명년에 군사를 내어 네 나라를 치리라!」 태종이 친히 고려를 치려 할 때 조서로 신라에 군사와 말을 모아 대군을 접응하게 하니, 신라가 대신을 보내 군사 오만을 거느리고 고려 남쪽 지경에 들어가 수구성을 쳐서 항복시켰다.

5진덕여왕

二十一年,善德卒,贈光祿大夫,余官封並如故。因立其妹真德爲王,加授柱國,封樂浪郡王。

21년에 선덕이 죽으니 광록대부를 추증하고 나머지 관작은 다 예전대로 하였다. 이어 그 아우(여동생) 진덕을 세워 왕으로 삼으니, 주국을 더해 제수하고 낙랑군왕에 봉하였다.

6김춘추의 입조

二十二年,真德遣其弟國相、伊贊子金春秋及其子文正來朝。詔授春秋爲特進,文正爲左武衛將軍。春秋請詣國學觀釋奠及講論,太宗因賜以所制《溫湯》及《晉祠碑》並新撰《晉書》。將歸國,令三品以上宴餞之,優禮甚稱。

22년에 진덕이 그 아우 국상 이찬간 김춘추와 그 아들 문정을 보내 조회하였다. 조서로 춘추에게 특진을, 문정에게 좌무위장군을 제수하였다. 춘추가 국학에 나아가 석전과 강론 보기를 청하니, 태종이 이에 지은 온탕비·진사비와 새로 엮은 진서를 내렸다. 귀국할 때 삼품 이상에게 명해 잔치로 전송하니 예우가 몹시 극진하였다.

7태평송

永徽元年,真德大破百濟之衆,遣其弟法敏以聞。真德乃織錦作五言《太平頌》以獻之,其詞曰:「大唐開洪業,巍巍皇猷昌。止戈戎衣定,修文繼百王。統天崇雨施,理物體含章。深仁偕日月,撫運邁陶唐。幡旗既赫赫,鉦鼓何鍠鍠。外夷違命者,翦覆被天殃。淳風凝幽顯,遐邇競呈祥。四時和玉燭,七曜巡萬方。維嶽降宰輔,維帝任忠良。五三成一德,昭我唐家光。」帝嘉之,拜法敏爲太府卿。

영휘 원년에 진덕이 백제의 무리를 크게 깨뜨리고 그 아우 법민을 보내 아뢰었다. 진덕이 이에 비단을 짜서 오언 태평송을 지어 바치니 그 가사는 이러하다. 「대당이 큰 왕업을 여니, 높고 높은 황제의 계책 창성하도다. 싸움을 그쳐 융의(戎衣)로 평정하고, 문을 닦아 백왕을 이었도다. 하늘을 거느려 비 내리는 은혜 숭상하고, 만물을 다스려 머금은 빛을 몸소 하시도다. 깊은 어짊은 해와 달과 나란하고, 시운을 어루만짐은 도당(요임금)을 넘어서도다. 깃발은 저리도 빛나며, 징과 북은 어찌 그리 우렁찬가. 명을 어기는 바깥 오랑캐는, 잘리고 엎어져 하늘 재앙을 입으리라. 순한 풍속이 그윽한 데나 드러난 데나 엉기고, 멀고 가까운 데서 다투어 상서를 바치도다. 사철은 옥촉처럼 고르고, 해와 달과 뭇별은 만방을 도는도다. 산악의 정기는 재보를 내리시고, 황제는 충량한 이를 쓰시도다. 삼황오제의 덕이 하나 되어, 우리 당나라 황가를 밝히리로다.」 황제가 가상히 여겨 법민을 태부경에 제수하였다.

8백제를 평정하다

三年,真德卒,爲舉哀。詔以春秋嗣,立爲新羅王。加授開府儀同三司,封樂浪郡王。六年,百濟與高麗、靺鞨率兵侵其北界,攻陷三十餘城,春秋遣使上表求救。顯慶五年,命左武衛大將軍蘇定方爲熊津道大總管,統水陸十萬。仍令春秋爲嵎夷道行軍總管,與定方討平百濟,俘其王扶餘義慈,獻于闕下。自是新羅漸有高麗、百濟之地。其界益大,西至於海。

3년에 진덕이 죽으니 애도를 표하였다. 조서로 춘추가 이어 신라왕으로 서게 하고 개부의동삼사를 더해 제수하며 낙랑군왕에 봉하였다. 6년에 백제가 고려·말갈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그 북쪽 지경을 침노해 삼십여 성을 쳐서 함락시키니, 춘추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구원을 청하였다. 현경 오년에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웅진도대총관으로 명해 수군과 육군 십만을 거느리게 하고, 아울러 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정방과 함께 백제를 쳐서 평정하고, 그 왕 부여의자를 사로잡아 대궐 아래 바쳤다. 이로부터 신라가 차츰 고려·백제의 땅을 차지하여 그 지경이 더욱 커져 서쪽으로 바다에 이르렀다.

9계림주도독

龍朔元年,春秋卒,詔其子太府卿法敏嗣位,爲開府儀同三司、上柱國、樂浪郡王、新羅王。三年,詔以其國爲雞林州都督府,授法敏爲雞林州都督。法敏以開耀元年卒,其子政明嗣位。垂拱二年,政明遣使來朝,因上表請唐禮一部並雜文章,則天令所司寫《吉凶要禮》,並于《文館詞林》采其詞涉規誡者,勒成五十卷以賜之。

용삭 원년에 춘추가 죽으니, 조서로 그 아들 태부경 법민이 자리를 이어 개부의동삼사·상주국·낙랑군왕·신라왕이 되게 하였다. 3년에 조서로 그 나라를 계림주도독부로 삼고 법민에게 계림주도독을 제수하였다. 법민이 개요 원년에 죽고 그 아들 정명(신문왕)이 자리를 이었다. 수공 이년에 정명이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표를 올려 당례(唐禮) 한 벌과 여러 문장을 청하니, 측천이 담당 관사에 명해 길흉요례를 베끼고 문관사림 가운데 규범과 경계에 관계되는 글을 골라 오십 권을 엮어 내렸다.

10효소왕과 성덕왕

天授三年,政明卒,則天爲之舉哀,遣使弔祭,冊立其子理洪爲新羅王。仍令襲父輔國大將軍,行豹韜衛大將軍、雞林州都督。理洪以長安二年卒。則天爲之舉哀,輟朝二日。遣立其弟興光爲新羅王,仍襲兄將軍、都督之號。興光本名與太宗同,先天中則天改焉。

천수 삼년에 정명이 죽으니 측천이 애도를 표하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였으며, 그 아들 이홍(효소왕)을 신라왕으로 책립하고 아버지의 보국대장군을 이어 행표도위대장군·계림주도독이 되게 하였다. 이홍이 장안 이년에 죽으니 측천이 애도를 표하고 이틀 조회를 거두었다. 사신을 보내 그 아우 흥광(성덕왕)을 신라왕으로 세우고 형의 장군·도독 칭호를 잇게 하였다. 흥광의 본명은 태종과 같았으므로 선천 연간에 측천이 고친 것이다.

11발해를 치게 하다

開元十六年,遣使來獻方物,又上表請令人就中國學問經教,上許之。二十一年,渤海靺鞨越海入寇登州。時興光族人金思蘭先因入朝留京師,拜爲太僕員外卿,至是遣歸國發兵以討靺鞨。仍加授興光爲開府儀同三司、甯海軍使。

개원 십육년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또 표를 올려 사람을 보내 중국에서 경전의 가르침을 배우게 해 달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21년에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등주를 침노하였다. 그때 흥광의 족인 김사란이 앞서 입조하여 서울에 머물며 태복원외경을 제수받았는데, 이에 귀국시켜 군사를 내어 말갈을 치게 하고, 아울러 흥광에게 개부의동삼사·영해군사를 더해 제수하였다.

12군자의 나라

二十五年,興光卒,詔贈太子太保。仍遣左贊善大夫邢璹攝鴻臚少卿,往新羅弔祭,並冊立其子承慶襲父開府儀同三司、新羅王。璹將進發,上制詩序,太子以下及百僚鹹賦詩以送之。上謂璹曰:「新羅號爲君子之國,頗知書記,有類中華。以卿學術,善與講論,故選使充此。到彼宜闡揚經典,使知大國儒教之盛」。又聞其人多善奕棋,因令善棋人率府兵曹楊季鷹爲璹之副。璹等至彼,大爲蕃人所敬。其國棋者皆在季鷹之下,於是厚賂璹等金寶及藥物等。

25년에 흥광이 죽으니 조서로 태자태보를 추증하였다. 이어 좌찬선대부 형숙에게 홍려소경을 대리시켜 신라에 가서 조문하고 제사하게 하고, 아울러 그 아들 승경(효성왕)을 책립하여 아버지의 개부의동삼사·신라왕을 잇게 하였다. 숙이 떠나려 할 때 임금이 시의 서문을 짓고 태자 이하 백료가 다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임금이 숙에게 말하였다. 「신라는 군자의 나라라 불려 서책을 잘 알아 중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경의 학술로 강론을 잘하겠기에 골라 이 사행에 충임하니, 그곳에 이르거든 경전을 천양하여 대국 유교의 성함을 알게 하라.」 또 그 나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는 말을 듣고, 바둑 잘 두는 솔부병조 양계응을 숙의 부사로 삼았다. 숙 등이 그곳에 이르니 번인들이 크게 공경하였다. 그 나라 바둑 두는 이가 다 계응 아래인지라, 이에 숙 등에게 금은 보물과 약물 등을 두터이 주었다.

13경덕왕

天寶二年,承慶卒,詔遣贊善大夫魏曜往弔祭之。冊立其弟憲英爲新羅王,並襲其兄官爵。

천보 이년에 승경이 죽으니 조서로 찬선대부 위요를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게 하였다. 그 아우 헌영(경덕왕)을 신라왕으로 책립하고 아울러 형의 관작을 잇게 하였다.

14혜공왕

大曆二年,憲英卒,國人立其子乾運爲王,仍遣其大臣金隱居奉表入朝,貢方物,請加冊命。三年,上遣倉部郎中、兼御史中丞、賜紫金魚袋歸崇敬持節齎冊書往吊冊之。以乾運爲開府儀同三司、新羅王、仍冊乾運母爲太妃。七年,遣使金標石來賀正,授衛尉員外少卿,放還。八年,遣使來朝,並獻金、銀、牛黃、魚牙納朝霞紬等。九年至十二年,比歲遣使來朝,或一歲再至。

대력 이년에 헌영이 죽고 나라 사람들이 그 아들 건운(혜공왕)을 세워 왕으로 삼고, 대신 김은거를 보내 표를 받들어 입조하여 방물을 바치고 책명을 더해 주기를 청하였다. 3년에 임금이 창부낭중 겸 어사중승 사자금어대 귀숭경을 보내 지절로 책서를 지니고 가서 조문하고 책봉하게 하여, 건운을 개부의동삼사·신라왕으로 삼고 아울러 건운의 어머니를 태비로 책봉하였다. 7년에 사신 김표석을 보내 신년 하례하니 위위원외소경을 제수해 돌려보냈다. 8년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금·은·우황·어아주·조하주 등을 바쳤다. 9년부터 12년까지 해마다 사신이 와 조회하고 혹 한 해 두 번 이르렀다.

15선덕왕과 원성왕

建中四年,乾運卒,無子,國人立其上相金良相爲王。貞元元年,授良相檢校太尉、都督雞林州刺史、甯海軍使、新羅王。仍令戶部郎中蓋塤持節冊命。其年,良相卒,立上相敬信爲王,令襲其官爵。敬信即從兄弟也。

건중 사년에 건운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상상(上相) 김양상(선덕왕)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정원 원년에 양상에게 검교태위·도독계림주자사·영해군사·신라왕을 제수하고, 호부낭중 개훈에게 지절로 책명하게 하였다. 그해에 양상이 죽으니 상상 경신(원성왕)을 세워 왕으로 삼고 그 관작을 잇게 하였다. 경신은 곧 사촌 형제다.

16소성왕

十四年,敬信卒,其子先敬信亡,國人立敬信嫡孫俊邕爲王。

14년에 경신이 죽었는데 그 아들이 경신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경신의 적손 준옹(소성왕)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17책봉 사신이 길을 돌리다

十六年,授俊邕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新羅王。令司封郎中、兼御史中丞韋丹持節冊命。丹至鄆州,聞俊邕卒,其子重興立,詔丹還。永貞元年,詔遣兵部郎中元季方持節冊重興爲王。

16년에 준옹에게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신라왕을 제수하고, 사봉낭중 겸 어사중승 위단에게 지절로 책명하게 하였다. 단이 운주에 이르러 준옹이 죽었다는 말을 들으니, 그 아들 중흥(애장왕)이 즉위하였으므로 조서로 단을 돌아오게 하였다. 영정 원년에 조서로 병부낭중 원계방을 보내 지절로 중흥을 왕으로 책봉하였다.

18돌아온 책문

元和元年十一月,放宿衛王子金獻忠歸本國,仍加試秘書監。三年,遣使金力奇來朝。其年七月,力奇上言:「貞元十六年,奉詔冊臣故主金俊邕爲新羅王,母申氏爲太妃,妻叔氏爲王妃。冊使韋丹至中路,知俊邕薨,其冊卻回,在中書省。今臣還國,伏請授臣以歸。」敕:「金俊邕等冊,宜令鴻臚寺於中書省受領,至寺宣授與金力奇,令奉歸國。仍賜其叔彥升門戟,令本國准例給。」四年,遣使金陸珍等來朝貢。五年,王子金憲章來朝貢。

원화 원년 11월에 숙위하던 왕자 김헌충을 본국에 돌려보내며 시비서감을 더하였다. 3년에 사신 김력기가 와서 조회하였다. 그해 7월에 역기가 아뢰었다. 「정원 십육년에 조서를 받들어 신의 옛 임금 김준옹을 신라왕으로, 어머니 신씨를 태비로, 아내 숙씨를 왕비로 책봉하셨는데, 책사 위단이 중로에서 준옹의 죽음을 알고 그 책문을 도로 가져와 중서성에 있습니다. 이제 신이 귀국하니 엎드려 청컨대 신에게 주어 가져가게 하소서.」 칙을 내렸다. 「김준옹 등의 책문은 홍려시가 중서성에서 받아 시(寺)에 이르러 김력기에게 선수(宣授)하여 받들고 귀국하게 하라. 아울러 그 숙부 언승에게 문극(門戟)을 내리니 본국에서 전례에 따라 지급하게 하라.」 4년에 사신 김륙진 등을 보내 조공하고, 5년에 왕자 김헌장이 와서 조공하였다.

19헌덕왕

七年,重興卒,立其相金彥升爲王,遣使金昌南等來告哀。其年七月,授彥升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持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兼持節充甯海軍使、上柱國、新羅國王,彥升妻貞氏冊爲妃,仍賜其宰相金崇斌等三人戟,亦令本國准例給。兼命職方員外郎、攝御史中丞崔廷侍節弔祭冊立,以其質子金士信副之。

7년에 중흥이 죽고 그 재상 김언승(헌덕왕)이 서서 사신 김창남 등을 보내 상을 알렸다. 그해 7월에 언승에게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 겸 지절충영해군사·상주국·신라국왕을 제수하고, 언승의 아내 정씨를 비로 책봉했으며, 그 재상 김숭빈 등 세 사람에게 극(戟)을 내려 역시 본국에서 전례에 따라 지급하게 하였다. 아울러 직방원외랑 섭어사중승 최정에게 명해 부절을 가지고 조문·제사·책립하게 하고 볼모 김사신을 부사로 삼았다.

20바람에 밀린 왕자

十一年十一月,其入朝王子金士信等遇惡風,飄至楚州鹽城縣界,淮南節度使李鄘以聞。是歲,新羅饑,其衆一百七十人求食於浙東。十五年十一月,遣使朝貢。

11년 11월에 입조하던 왕자 김사신 등이 사나운 바람을 만나 초주 염성현 지경에 떠밀려 닿으니, 회남절도사 이용이 아뢰었다. 이해에 신라에 기근이 들어 그 무리 백칠십 명이 절동에서 먹을 것을 구하였다. 15년 11월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1흥덕왕과 그 뒤

長慶二年十二月,遣使金柱弼朝貢。寶曆元年,其王子金昕來朝。太和元年四月,皆遣使朝貢。五年,金彥升卒,以嗣子金景徽爲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使侍節大都督雞林州諸軍事,兼持節充甯海軍使、新羅王;景徽母樸氏爲太妃,妻朴氏爲妃。命太子左諭德、兼御史中丞源寂持節弔祭冊立。開成元年,王子金義琮來謝恩,兼宿衛。二年四月,放還籓,賜物遣之。五年四月,鴻臚寺奏:新羅國告哀,質子及年滿合歸國學生等共一百五人,並放還。會昌元年七月,敕:「歸國新羅官、前入新羅宣慰副使、前充兗州都督府司馬、賜緋魚袋金雲卿,可淄州長史。」

장경 이년 12월에 사신 김주필을 보내 조공하고, 보력 원년에 왕자 김흔이 와서 조회하였다. 태화 원년 4월에 다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년에 김언승이 죽으니, 이은 아들 김경휘(흥덕왕)를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 겸 지절충영해군사·신라왕으로 삼고, 경휘의 어머니 박씨를 태비로, 아내 박씨를 비로 삼았다. 태자좌유덕 겸 어사중승 원적에게 명해 부절을 가지고 조문·제사·책립하게 하였다. 개성 원년에 왕자 김의종이 와서 은혜에 사례하고 겸하여 숙위하였다. 2년 4월에 번국으로 돌려보내며 물건을 내려 보냈다. 5년 4월에 홍려시가 아뢰기를, 신라국이 상을 알려 왔으므로 볼모와 연한이 찬 학생 등 합쳐 백다섯 명을 다 돌려보낸다 하였다. 회창 원년 7월에 칙하였다. 「귀국하는 신라 관원, 앞서 신라에 들어간 선위부사·전 연주도독부사마·사비어대 김운경을 치주장사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