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蠻)蠻
1반호의 후손
蠻者,盤瓠之後。族類〔蕃〕衍,散處江、淮之間,汝、豫之郡。憑險作梗,世為寇亂。逮魏人失馭,其暴滋甚。有冉氏、向氏、田氏者,陬落尤盛。餘則大者萬家,小者千戶。更相崇樹,僭稱王侯,屯據三峽,斷遏水路,荊、蜀行人,至有假道者。太祖畧定伊、瀍,聲教南被,諸蠻畏威,靡然向風矣。
만(蠻)은 반호(盤瓠)의 후손이다. 족류가 번성하여 퍼져 장강·회수 사이와 여주·예주의 군에 흩어져 살며, 험함을 믿고 버티어 대대로 도적이 되어 어지럽혔다. 위나라 사람들이 통제를 잃자 그 사나움이 더욱 심해졌다. 염씨·상씨·전씨가 있어 부락이 더욱 성했고, 그 나머지도 큰 것은 만 가요 작은 것은 천 호였다. 서로 높여 세우며 왕후를 참칭하고 삼협에 진 쳐 물길을 끊으니, 형주·촉 길 가는 사람이 길을 빌리는 데까지 이르렀다. 태조가 이수·전수를 대략 평정하여 성교(聲敎)가 남으로 미치니, 뭇 만이 위엄을 두려워하여 쏠리듯 풍화를 향하였다.
협주 2
(番)
원래 판본의 글자는 「番」이다.
族類(番)〔蕃〕衍宋本「番」作「蕃」。張森楷云:「『番』當作『蕃』,『番』字無義。」按張說是,今據改。
「족류가 (番)〔번성하여(蕃)〕 퍼졌다」 — 송본에 「番」이 「蕃」으로 되어 있다. 장삼해가 「番은 마땅히 蕃이어야 하니 番 자는 뜻이 없다」 하였는데 그 말이 옳으므로 이에 따라 고쳤다.
2귀부와 배반
大統五年,蔡陽蠻王魯超明內屬,以為南雍州刺史,仍世襲焉。十一年,蠻首梅勒特來貢其方物。尋而蠻帥田杜清及沔、漢諸蠻擾動,大將軍楊忠擊破之。其後蠻帥杜青和自稱巴州刺史,以州入附。朝廷因其所稱而授之。青和後遂反,攻圍東梁州。其唐州蠻田魯嘉亦叛,自號豫州伯。王雄、權景宣等前後討平之。語在泉仲遵及景宣傳。
대통 오년에 채양만 왕 노초명이 내속하니 남옹주자사로 삼고 대대로 잇게 하였다. 11년에 만의 우두머리 매륵특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이윽고 만의 우두머리 전두청과 면수·한수의 뭇 만이 들썩이니 대장군 양충이 쳐서 깨뜨렸다. 그 뒤 만의 우두머리 두청화가 스스로 파주자사라 일컬으며 주를 들어 붙좇으니, 조정이 그 일컬음대로 제수하였다. 청화가 뒤에 드디어 배반하여 동량주를 에워쌌다. 당주만 전로가도 배반하여 스스로 예주백이라 이름하니, 왕웅·권경선 등이 앞뒤로 쳐서 평정하였다. 이야기는 천중준과 경선의 전에 있다.
협주 2
尋而蠻帥田杜清及沔漢諸蠻擾動卷一九楊忠傳作「日柱清」,卷二七厙狄昌傳作「田社清」,北史卷九五蠻傳作「田杜青和」。按楊忠傳「日」是「田」之訛,「柱」「社」「杜」形近,不知孰是,北史多「和」字,乃涉下「杜青和」而衍。
「이윽고 만의 우두머리 전두청과 면수·한수의 뭇 만이 들썩였다」 — 권19 양충전에는 「일주청」, 권27 고적창전에는 「전사청」, 북사 만전에는 「전두청화」로 되어 있다. 양충전의 「일(日)」은 「전(田)」의 잘못이고 「주(柱)·사(社)·두(杜)」는 모양이 비슷하여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며, 북사의 「화(和)」 자는 아래 「두청화」에 이끌려 잘못 붙은 것이다.
其後蠻帥杜青和自稱巴州刺史汲本、局本及卷四四泉企附子仲遵傳、漢魏南北朝墓誌集釋寇奉叔墓誌圖版三六二「青」作「清」。王氏十七史商榷卷六八云:「杜青和與上田杜青和自是一人,二者必有一誤。」按卷一九楊忠傳稱:「及東魏圍潁川,蠻帥(日)〔田〕柱清據險為亂,」應是豫州蠻。杜青和自稱巴州刺史,攻圍東梁州,地在今陝西南部之安康、洵陽,相去甚遠。王說非。
「그 뒤 만의 우두머리 두청화가 스스로 파주자사라 일컬었다」 — 급본·국본과 천중준전, 묘지집석에 「청(青)」이 「청(清)」으로 되어 있다. 왕씨 십칠사상각에 「두청화와 위의 전두청화는 본디 한 사람이니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잘못이다」 하였으나, 양충전을 살피면 전주청은 예주의 만이요, 두청화는 파주자사를 일컬으며 동량주를 쳤으니 땅이 지금 섬서 남부 안강·순양이라 서로 매우 머니 왕씨 말이 그르다.
3번사가 붙좇다
魏廢帝初,蠻酋樊舍舉落內附,以為淮北三州諸軍事、淮州刺史、淮安郡公。于謹等平江陵,諸蠻騷動,詔豆盧寧、蔡祐等討破之。
위 폐제 초에 만의 추장 번사(樊舍)가 부락을 들어 내부하니, 회북삼주제군사·회주자사·회안군공으로 삼았다. 우근 등이 강릉을 평정하자 뭇 만이 소동하니, 조서로 두로녕·채우 등을 보내 쳐서 깨뜨렸다.
4뭇 만이 들썩이다
魏恭帝二年,蠻酋宜民王田興彥、北荊州刺史梅季昌等相繼款附。以興彥、季昌竝為開府儀同三司,加季昌洛州刺史,賜爵石臺縣公。其後巴西人譙淹扇動羣蠻,以附於梁。蠻帥向鎮侯、向〔白〕彪等應之。向五子王又攻陷信州。田烏度、田都唐等抄斷江路。文子榮復據荊州之汶陽郡,自稱仁州刺史。并隣州刺史蒲微亦舉兵逆命。詔田弘、賀若敦、潘招、李遷哲討破之。語在敦及遷哲、〔陽〕雄等傳。
위 공제 2년에 만의 추장 의민왕 전흥언과 북형주자사 매계창 등이 잇달아 귀부하였다. 흥언과 계창을 다 개부의동삼사로 삼고, 계창에게 낙주자사를 더하며 석대현공의 작을 내렸다. 그 뒤 파서 사람 초엄이 뭇 만을 부추겨 양(梁)에 붙으니, 만의 우두머리 상진후·상백표 등이 응하였다. 상오자왕이 또 신주를 쳐서 함락시키고, 전오도·전도당 등이 강길을 끊어 노략하며, 문자영이 다시 형주 문양군을 차지하고 스스로 인주자사라 일컬었다. 아울러 인주자사 포미도 군사를 들어 명을 거슬렀다. 조서로 전홍·하약돈·반초·이천철을 보내 쳐서 깨뜨렸다. 이야기는 하약돈과 이천철과 양웅 등의 전에 있다.
협주 4
(日)
원래 판본의 글자는 「日」이다.
蠻帥向鎮侯向(日)〔白〕彪卷二八賀若敦傳、冊府卷九八四一一五五九頁「日」作「白」,北史本傳作「向白虎」。按「日」是「白」之訛,今據改。疑本名「白虎」,避唐諱改「虎」作「彪」,北史乃後人迴改。
「만의 우두머리 상진후와 상(日)〔백〕표」 — 하약돈전·책부원귀에 「日」이 「白」으로 되어 있고 북사 본전에는 「상백호」로 되어 있다. 「日」은 「白」의 잘못이라 이에 따라 고쳤다. 본디 이름이 「백호」인데 당나라 피휘로 「虎」를 「彪」로 고쳤고, 북사는 뒷사람이 도로 고친 것인 듯하다.
(楊)
원래 판본의 글자는 「楊」이다.
語在敦及遷哲(楊)〔陽〕雄等傳按楊雄乃楊紹子,附見卷二九楊紹傳,隋書卷四三有專傳,不載其事,且名輩也較晚。「楊」乃「陽」之訛,事見卷四四本傳,今據改。
「하약돈과 이천철과 (楊)〔양(陽)〕웅 등의 전에 실려 있다」 — 양웅(楊雄)은 양소의 아들로 권29 양소전에 붙어 보이고 수서에 전이 있으나 이 일을 싣지 않았으며 연배도 늦다. 「楊」은 「陽」의 잘못이니 일이 권44 본전에 보이므로 이에 따라 고쳤다.
5백제성을 함락하다
武成初,文州蠻叛,州選軍討定之。尋而冉令賢、向五子王等又攻陷白帝,殺開府楊長華,遂相率作亂。前後遣開府元契、趙剛等總兵出討,雖頗剪其族類,而元惡未除。
무성 초에 문주의 만이 배반하니 주에서 군사를 뽑아 쳐서 안정시켰다. 이윽고 염령현과 상오자왕 등이 또 백제성(白帝城)을 함락시키고 개부 양장화를 죽인 뒤 서로 이끌고 난을 지으니, 앞뒤로 개부 원계와 조강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쳤는데, 그 족류를 자못 쳐 냈으나 원흉은 없애지 못했다.
6육등의 계책
天和元年,詔開府陸騰督王亮、司馬裔等討之。騰水陸俱進,次于湯口,先遣喻之。而令賢方增浚城池,嚴設扞禦。遣其長子西黎、次子南王領其支屬,於江南險要之地置立十城,遠結涔陽蠻為其聲援。令賢率其精卒,固守水邏城。騰乃總集將帥,謀其進趣。咸欲先取水邏,然後經略江南。騰言於眾曰:「令賢內恃水邏金湯之險,外託涔陽輔車之援,兼復資糧充實,器械精新。以我懸軍攻其嚴壘,脫一戰不尅,更成其氣。不如頓軍湯口,先取江南,剪其羽毛,然後進軍水邏。此制勝之計也。」眾皆然之。乃遣開府王亮率眾渡江,旬日攻拔其八城,凶黨奔散。獲賊帥冉承公并生口三千人,降其部眾一千戶。遂簡募驍勇,數道入攻水邏。路經石壁城。此城峻嶮,四面壁立,故以名焉。唯有一小路,緣梯而上。蠻蜑以為峭絕,非兵眾所行。騰被甲先登,眾軍繼進,備經危阻,累月乃得舊路。且騰先任隆州總管,雅知蠻帥冉伯犁、冉安西與令賢有隙。
천화 원년에 조서로 개부 육등에게 왕량·사마예 등을 거느리고 치게 하였다. 육등이 물과 뭍으로 함께 나아가 탕구에 진 치고 먼저 사람을 보내 타일렀다. 그러나 염령현은 바야흐로 성과 해자를 더 파고 수비를 엄히 베풀며, 맏아들 서려와 둘째 아들 남왕에게 그 지속(支屬)을 거느리고 강남 험요한 땅에 열 성을 세우게 하고, 멀리 잠양의 만과 맺어 성원으로 삼았다. 영현은 정예를 거느리고 수라성(水邏城)을 굳게 지켰다.
육등이 이에 장수들을 모아 나아갈 길을 꾀하니, 다들 먼저 수라를 빼앗은 뒤에 강남을 경략하자 하였다. 육등이 무리에게 말하였다. 「영현은 안으로 수라의 금성탕지 같은 험함을 믿고 밖으로 잠양의 보거지원을 의탁하며, 겸하여 물자와 양식이 넉넉하고 기계가 정예하고 새롭다. 우리 고립된 군사로 그 엄한 보루를 치다가 한 번 싸워 이기지 못하면 도리어 그 기세만 이루어 준다. 탕구에 군사를 머물러 먼저 강남을 취해 그 깃털을 자른 뒤에 수라로 진군하는 것만 못하다. 이것이 이기는 계책이다.」 무리가 다 옳다 하였다.
이에 개부 왕량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게 하니, 열흘 만에 그 여덟 성을 쳐서 빼앗자 흉한 무리가 달아나 흩어졌다. 적의 우두머리 염승공과 생구 삼천 명을 사로잡고 그 부중 일천 호의 항복을 받았다. 드디어 날래고 용감한 이를 가려 모아 여러 길로 수라를 쳐들어갔다. 길이 석벽성을 지나는데, 이 성은 가파르고 험해 사면이 벽처럼 서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오직 작은 길 하나가 있어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만들은 깎아지른 곳이라 군사가 다닐 데가 아니라 여겼다. 육등이 갑옷을 입고 먼저 오르니 뭇 군사가 이어 나아가, 위태로움을 두루 겪고 여러 달 만에야 옛길을 얻었다. 또 육등은 앞서 융주총관을 지내, 만의 우두머리 염백리·염안서가 영현과 틈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협주 1
累月乃得舊路北史本傳、冊府卷九八四一一五五九頁「月」作「日」,疑是。
「여러 달 만에야 옛길을 얻었다」의 달(月)은 북사 본전·책부원귀에 「일(日)」로 되어 있으니 그것이 옳은 듯하다.
7수라성을 평정하다
騰乃招誘伯犁等,結為父子,又多遺其金帛。伯犁等悅,遂為鄉導。水邏側又有石勝城者,亦是險要。令賢使兄子龍真據之。騰又密誘龍真云,若平水邏,使其代令賢處。龍真大悅,密遣其子詣騰。騰乃厚加禮接,賜以金帛。蠻貪利既深,仍請立効。乃謂騰曰:「欲翻所據城,恐人力寡少。」騰許以三百兵助之。既而遣二千人銜枚夜進。龍真力不能禦,遂平石勝城。晨至水邏,蠻眾大潰,斬首萬餘級,虜獲一萬口。令賢遁走,追而獲之,并其子弟等皆斬之。司馬裔又別下其二十餘城,獲蠻帥冉三公等。騰乃積其骸骨於水邏城側,為京觀。後蠻蜑望見,輒大號哭。自此狼戾之心輟矣。
육등이 이에 백리 등을 불러 꾀어 부자를 맺고 또 금과 비단을 많이 주니, 백리 등이 기뻐하며 드디어 길잡이가 되었다. 수라 곁에 또 석승성이 있어 역시 험요한데, 영현이 형의 아들 용진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육등이 또 용진을 몰래 꾀어, 수라를 평정하면 영현의 자리를 대신하게 해 주마 하니, 용진이 크게 기뻐하며 몰래 제 아들을 육등에게 보냈다. 육등이 두터이 예로 맞고 금과 비단을 내렸다. 만이 이익 탐함이 깊은지라 곧 공을 세우겠다 청하며 육등에게 「차지한 성을 뒤집고 싶으나 사람이 적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육등이 군사 삼백으로 돕기를 허락하고, 이윽고 이천 명을 보내 하무를 물고 밤에 나아가게 하였다. 용진이 힘으로 막지 못하니 드디어 석승성을 평정하였다. 새벽에 수라에 이르니 만의 무리가 크게 무너져, 만여 급을 베고 일만 명을 사로잡았다. 영현은 달아났으나 뒤쫓아 잡고 그 자제들과 함께 다 베었다. 사마예도 따로 그 이십여 성을 함락시키고 만의 우두머리 염삼공 등을 사로잡았다. 육등이 그 해골을 수라성 곁에 쌓아 경관(京觀)을 만드니, 뒤에 만들이 바라보고 문득 크게 울부짖었다. 이로부터 이리 같은 사나운 마음이 그쳤다.
협주 1
令賢使兄子龍真據之北史本傳「兄子」作「其兄」,冊府卷九八四一一五五九頁作「其兄子」。
「영현이 형의 아들 용진을 시켜 지키게 했다」의 형의 아들은 북사 본전에 「그 형」으로, 책부원귀에 「그 형의 아들」로 되어 있다.
8석묵성과 쌍성
時向五子王據石默城,令其子寶勝據雙城。水邏平後,頻遣喻之,而五子王猶不從命。騰又遣王亮屯牢坪,司馬裔屯雙城以圖之。騰慮雙城孤峭,攻未易拔。賊若委城奔散,又難追討。乃令諸軍周回立柵,遏其走路。賊乃大駭。於是縱兵擊破之,擒五子王於石默,獲寶勝於雙城,悉斬諸向首領,生擒萬餘口。信州舊治白帝。騰更於劉備故宮城南,八陣之北,臨江岸築城,移置信州。又以巫縣、信陵、秭歸竝是硤中要險,於是築城置防,以為襟帶焉。
그때 상오자왕은 석묵성을 차지하고 아들 보승에게 쌍성을 차지하게 하였다. 수라가 평정된 뒤 자주 사람을 보내 타일렀으나 오자왕이 오히려 명을 따르지 않았다. 육등이 또 왕량을 뇌평에, 사마예를 쌍성에 주둔시켜 도모하게 하였다. 육등은 쌍성이 외따로 가팔라 치더라도 쉽게 빼앗지 못할 것이요, 적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 흩어지면 또 뒤쫓기 어려울 것을 헤아려, 여러 군에 명해 빙 둘러 목책을 세워 달아날 길을 막게 하니 적이 크게 놀랐다. 이에 군사를 놓아 쳐서 깨뜨리고, 석묵에서 오자왕을 사로잡고 쌍성에서 보승을 잡았으며, 상씨의 우두머리들을 다 베고 만여 명을 사로잡았다.
신주는 옛 다스림터가 백제(白帝)였다. 육등이 다시 유비의 옛 궁성 남쪽, 팔진의 북쪽 강기슭에 성을 쌓아 신주를 옮기고, 또 무현·신릉·자귀가 다 협곡의 요험이므로 성을 쌓고 방수를 두어 금대(襟帶)로 삼았다.
9다시는 도적질하지 못하다
天和六年,蠻渠冉祖喜、冉龍驤又反,詔大將軍趙誾討平之。自此羣蠻懾息,不復為寇矣。
천화 육년에 만의 우두머리 염조희와 염용양이 또 배반하니, 조서로 대장군 조은을 보내 쳐서 평정하였다. 이로부터 뭇 만이 두려워 숨죽여 다시는 도적질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