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호稽胡
1계호의 풍속
稽胡一曰步落稽,蓋匈奴別種,劉元海五部之苗裔也。或云山戎赤狄之後。自離石以西,安定以東,方七八百里,居山谷間,種落繁熾。其俗土著,亦知種田。地少桑蠶,多麻布。其丈夫衣服及死亡殯葬,與中夏畧同。婦人則多貫蜃貝以為耳及頸飾。又與華民錯居,其渠帥頗識文字。然語類夷狄,因譯乃通。蹲踞無禮,貪而忍害。俗好淫穢,處女尤甚。將嫁之夕,方與淫者敘離,夫氏聞之,以多為貴。既嫁之後,頗亦防閑,有犯姦者,隨事懲罰。又兄弟死,皆納其妻。雖分統郡縣,列於編戶,然輕其徭賦,有異齊民。山谷阻深者,又未盡役屬。而凶悍恃險,數為寇亂。
계호(稽胡)는 일명 보락계니, 대개 흉노의 별종으로 유원해 다섯 부의 후예다. 혹은 산융 적적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이석 서쪽, 안정 동쪽 사방 칠팔백 리 산골 사이에 살며 갈래가 번성하다. 그 풍속은 토착하여 밭갈이도 안다. 땅에 뽕과 누에가 적어 삼베가 많다. 장부의 옷과 죽어 장사 지내는 것은 중하와 대략 같으나, 부인은 조개를 많이 꿰어 귀와 목의 꾸미개로 삼는다. 화민과 섞여 살아 그 우두머리는 자못 문자를 알지만, 말은 이적과 비슷하여 통역이 있어야 통한다. 쭈그려 앉아 예가 없으며 탐욕스럽고 모질다. 풍속이 음란하며 처녀가 더욱 심한데, 시집가려 할 즈음에야 정을 통하던 자와 헤어지니, 남편 집에서 그 소문을 들으면 많을수록 귀하게 여긴다. 시집간 뒤에는 자못 단속하여 간음한 자가 있으면 일에 따라 벌한다. 또 형제가 죽으면 다 그 아내를 거둔다. 군현에 나뉘어 통솔되어 호적에 올라 있으나 요역과 부세를 가볍게 하니 일반 백성과 달랐다. 산골 깊고 험한 곳은 아직 다 부리지 못하니, 흉하고 사나우며 험함을 믿고 자주 도적이 되어 어지럽혔다.
협주 1
地少桑蠶多麻布其丈夫衣服及死亡殯葬與中夏略同北史卷九六稽胡傳、通典卷一九七稽胡條「多」下有「衣」字。通典「其丈夫衣服及」作「其丈夫服皮」。
「땅에 뽕과 누에가 적고 삼베가 많다. 그 장부의 옷과 죽어 장사 지냄은 중하와 대략 같다」 — 북사 계호전·통전에는 「多」 아래 「衣」 자가 있고, 통전에는 「그 장부는 가죽을 입는다」로 되어 있다.
2유려승의 참칭
魏孝昌中,有劉蠡升者,居雲陽谷,自稱天子,立年號,署百官。屬魏氏政亂,力不能討。蠡升遂分遣部眾,抄掠居民,汾、晉之間,畧無寧歲。齊神武遷鄴後,始密圖之。偽許以女妻蠡升太子,蠡升信之,遂遣其子詣鄴。齊神武厚為之禮,緩以婚期。蠡升既恃和親,不為之備。大統元年三月,齊神武潛師襲之。蠡升率輕騎出外徵兵,為其北部王所殺,斬首送於齊神武。其眾復立蠡升第三子南海王為主,率兵拒戰。齊神武擊滅之,獲其偽主,及其弟西海王,并皇后夫人王公以下四百餘人,歸於鄴。
위 효창 연간에 유려승이라는 자가 운양곡에 살며 스스로 천자라 일컫고 연호를 세우고 백관을 두었다. 위씨의 정사가 어지러운 때라 힘으로 치지 못하니, 여승이 드디어 부중을 나누어 보내 백성을 노략하여 분수·진양 사이에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제 신무(고환)가 업으로 도읍을 옮긴 뒤 비로소 은밀히 도모하여, 거짓으로 딸을 여승의 태자에게 시집보내겠다 허락하니 여승이 믿고 아들을 업에 보냈다. 제 신무가 두터이 예우하며 혼인 날짜를 늦추었다. 여승이 화친을 믿고 방비하지 않으니, 대통 원년 3월에 제 신무가 몰래 군사를 내어 습격하였다. 여승이 가벼운 기병으로 밖에 나가 군사를 모으다가 그 북부왕에게 살해되니, 목을 베어 제 신무에게 보냈다. 그 무리가 다시 여승의 셋째 아들 남해왕을 세워 임금으로 삼고 군사를 거느려 막아 싸웠으나, 제 신무가 쳐서 멸하고 그 거짓 임금과 아우 서해왕과 황후·부인·왕공 이하 사백여 명을 잡아 업으로 돌아갔다.
3하서의 여러 부
居河西者,多恃險不賓。時方與齊神武爭衡,未遑經畧。太祖乃遣黃門郎楊〔𢷋〕就安撫之。五年,黑水部眾先叛。七年,別帥夏州刺史劉平伏又據上郡反。自是北山諸部,連歲寇暴。太祖前後遣李遠、于謹、侯莫陳崇、李弼等相繼討平之。武成初,延州稽胡郝阿保、郝狼皮率其種人附於齊氏。阿保自署丞相,狼皮自署柱國,并與其別部劉桑德共為影響。柱國豆盧寧督諸軍與延州刺史高琳擊破之。二年,狼皮等餘黨復叛。詔大將軍韓〔果〕討之,俘斬甚眾。
하서에 사는 자들은 대개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았다. 그때 바야흐로 제 신무와 다투던 터라 경략할 겨를이 없어, 태조가 이에 황문랑 양표를 보내 가서 안무하게 하였다. 5년에 흑수부의 무리가 먼저 배반하고, 7년에 별수 하주자사 유평복이 또 상군에 웅거해 배반하니, 이로부터 북산의 여러 부가 해마다 도적질하였다. 태조가 앞뒤로 이원·우근·후막진숭·이필 등을 보내 잇달아 쳐서 평정하였다. 무성 초에 연주 계호 학아보·학랑피가 그 종인을 거느리고 제씨에 붙어, 아보는 스스로 승상이라 하고 낭피는 스스로 주국이라 하며 그 별부 유상덕과 함께 호응하였다. 주국 두로녕이 여러 군을 거느리고 연주자사 고림과 함께 쳐서 깨뜨렸다. 2년에 낭피 등의 남은 무리가 다시 배반하니, 조서로 대장군 한과를 보내 쳐서 사로잡고 벤 것이 몹시 많았다.
협주 5
(忠)
원래 판본의 글자는 「忠」이다.
太祖乃遣黃門郎楊(忠)〔𢷋〕就安撫之北史作「黃門侍郎楊㯹」。「㯹」當作「𢷋」。按事見卷三四楊𢷋傳,這裏作「楊忠」誤,今據改。
「태조가 이에 황문랑 양(忠)〔표(𢷋)〕를 보내 가서 안무하게 했다」 — 북사에는 「황문시랑 양표」로 되어 있다. 일이 권34 양표전에 보이니 여기의 「양충」은 잘못이라 이에 따라 고쳤다.
并與其別部劉桑德共為影響通典卷一九七「桑」作「素」。
「아울러 그 별부 유상덕과 함께 호응했다」의 상(桑)은 통전에 「소(素)」로 되어 있다.
(杲)
원래 판본의 글자는 「杲」다.
詔大將軍韓(杲)〔果〕討之局本及北史本傳「杲」作「果」。按事見卷二七韓果傳,今據改。
「조서로 대장군 한(杲)〔과(果)〕를 보내 쳤다」 — 국본과 북사 본전에 「杲」가 「果」로 되어 있다. 일이 권27 한과전에 보이므로 이에 따라 고쳤다.
4험요에 성을 쌓다
保定中,離石生胡數寇汾北,勳州刺史韋孝寬於險要築城,置兵糧,以遏其路。及楊忠與突厥伐齊,稽胡等復懷旅拒,不供糧餼。忠乃詐其酋帥,云與突厥欲回兵討之。酋帥等懼,乃相率供饋焉。語在忠傳。其後丹州、綏州、銀州等部內諸胡,與蒲川別帥郝三郎等又頻年逆命。復詔達奚震、辛威、于寔等前後窮討,散其種落。天和二年,延州總管宇文盛率眾城銀州,稽胡白郁久同、喬是羅等欲邀襲盛軍,盛竝討斬之。又破其別帥喬三勿同等。五年,開府劉雄出綏州,巡檢北邊,川路稽胡帥喬白郎、喬素勿同等度河逆戰,雄復破之。
보정 연간에 이석의 생호(生胡)가 자주 분북을 노략하니, 훈주자사 위효관이 험요에 성을 쌓고 군사와 양식을 두어 그 길을 막았다. 양충이 돌궐과 함께 제를 칠 때 계호들이 다시 반항할 마음을 품고 군량을 대지 않으니, 충이 그 추장들을 속여 돌궐과 함께 군사를 돌려 치겠다 하자 추장들이 두려워 서로 이끌고 군량을 바쳤다. 이야기는 충의 전에 있다. 그 뒤 단주·수주·은주 등 부내의 여러 호가 포천 별수 학삼랑 등과 또 여러 해 명을 거스르니, 다시 조서로 달해진·신위·우식 등이 앞뒤로 끝까지 쳐서 그 종락을 흩었다. 천화 이년에 연주총관 우문성이 무리를 거느리고 은주에 성을 쌓는데, 계호 백욱구동·교시라 등이 성의 군사를 노려 습격하려 하니 성이 다 쳐서 베고, 또 그 별수 교삼물동 등을 깨뜨렸다. 5년에 개부 유웅이 수주로 나가 북변을 순검하는데, 천로의 계호 우두머리 교백랑·교소물동 등이 강을 건너 맞아 싸우니 웅이 다시 깨뜨렸다.
협주 1
川路稽胡帥喬白郎喬素勿同等度河逆戰北史本傳但作「白郎」,無「喬」字。按「白」也是稽胡姓,未知孰是。
「천로의 계호 우두머리 교백랑·교소물동 등이 강을 건너 맞아 싸웠다」 — 북사 본전에는 다만 「백랑」이라 하고 「교」 자가 없다. 「백」도 계호의 성이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5몰탁을 사로잡다
建德五年,高祖敗齊師於晉州,乘勝逐北,齊人所棄甲仗,未暇收歛,稽胡乘閒竊出,竝盜而有之。乃立蠡升孫沒鐸為主,號聖武皇帝,年曰石平。六年,高祖定東夏,將討之,議欲窮其巢穴。齊王憲以為種類既多,又山谷阻絕,王師一舉,未可盡除。且當剪其魁首,餘加慰撫。高祖然之,乃以憲為行軍元帥,督行軍總管趙王招、譙王儉、滕王逌等討之。憲軍次馬邑,乃分道俱進。沒鐸遣其黨天柱守河東,又遣其大帥穆支據河西,規欲分守險要,掎角憲軍。憲命譙王儉攻天柱,滕王逌擊穆支,竝破之,斬首萬餘級。趙王招又擒沒鐸,餘眾盡降。
건덕 오년에 고조가 진주에서 제나라 군사를 깨뜨리고 이긴 김에 북으로 쫓으니, 제나라 사람들이 버린 갑옷과 병장기를 미처 거두지 못했는데 계호가 틈을 타 몰래 나와 다 훔쳐 가졌다. 이에 여승의 손자 몰탁을 세워 임금으로 삼고 성무황제라 이름하며 연호를 석평이라 하였다. 6년에 고조가 동하(東夏)를 평정하고 치려 하며 그 소굴을 끝까지 없앨 것을 의논하니, 제왕 헌이 「갈래가 이미 많고 산골이 막혀 험하니, 왕의 군사가 한 번 일어나 다 없앨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그 우두머리만 치고 나머지는 위무해야 합니다」 하니 고조가 옳다 하였다. 이에 헌을 행군원수로 삼아 행군총관 조왕 초·초왕 검·등왕 유 등을 거느리고 치게 하였다. 헌의 군사가 마읍에 이르러 길을 나누어 함께 나아가니, 몰탁은 그 무리 천주를 보내 하동을 지키게 하고 또 대수 목지를 보내 하서에 웅거하게 하여, 험요를 나누어 지키며 헌의 군사를 앞뒤로 노리려 하였다. 헌이 초왕 검에게 천주를, 등왕 유에게 목지를 치게 하여 다 깨뜨리니 만여 급을 베었다. 조왕 초가 또 몰탁을 사로잡으니 남은 무리가 다 항복하였다.
협주 1
又遣其大帥穆支據河西卷一三滕王逌傳「支」作「友」。
「또 그 대수 목지를 보내 하서에 웅거하게 하고」의 지(支)는 권13 등왕유전에 「우(友)」로 되어 있다.
6도적질이 자못 그치다
宣政元年,汾州稽胡帥劉受羅千復反,越王盛督諸軍討擒之。自是寇盜頗息。
선정 원년에 분주 계호 우두머리 유수라천이 다시 배반하니, 월왕 성이 여러 군을 거느리고 쳐서 사로잡았다. 이로부터 도적질이 자못 그쳤다.
협주 1
汾州稽胡劉受羅千復反冊府明本卷九八四一一五六0頁作「劉受邏干」,宋本冊府同周書。按「羅」「邏」同音通用,「千」疑當作「干」。參卷七校記第二條。
「분주 계호 유수라천이 다시 배반하니」 — 책부원귀 명본에는 「유수라간」으로 되어 있고 송본 책부원귀는 주서와 같다. 「羅」와 「邏」는 소리가 같아 통용하며, 「千」은 「干」이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