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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2 — 현종에서 문종까지高麗 二

송사 고려전 宋史 高麗傳 · 탈탈(脫脫) 등 · 1345년 (원 지정 5) · 단락 20 · 한자 2,499자 · 낭독 10.0분

「송사 고려전」 한 권 「고려 2 — 현종에서 문종까지」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송나라가 본 고려 이백 년. 왕건의 책봉부터 서희·의천·김부식의 이름이 지나가고, 소식(蘇軾)이 고려 사신을 물리친 사연, 신주(神舟) 두 척의 뱃길, 팔관재와 개경 풍속까지 — 바다 건너에서 적은 고려의 실록이다.

1왕빈과 최한의 급제

先是,三年,上親試諸道貢舉人,詔賜高麗賓貢進士王彬、崔罕等及第,既授以官,遣還本國。至是,靖等使回,治上表謝曰:「學生王彬、崔罕等入朝習業,蒙恩並賜及第,授將仕郎、守祕書省校書郎,仍放歸本國。竊以當道荐修貢奉,多歷歲年,蓋以上國天高,遐荒海隔,不獲躬趨金闕,面叩玉堦,唯深拱極之誠,莫展來庭之禮。彬、罕等幼從匏繫,嗟混迹於嵎夷;不憚蓬飄,早賓王於天邑。縕袍短褐,玉粒桂薪,堪憂食貧,若為卒歲。皇帝陛下天慈照毓,海量優容,豐其館穀之資,勗以藝文之業。去歲高懸軒鑑,大選魯儒,彬、罕接武澤宮,敢萌心於中鵠;濫巾英域,空有志於羨魚。陛下以其萬里辭家,十年觀國,俾登名於桂籍,仍命秩於芸臺;憫其懷土之心,慰以倚門之望,別垂宸旨,令歸故鄉。玄造曲成,鴻恩莫報,臣不勝感天戴聖之至。」

이보다 앞서 3년에 임금이 여러 도의 공거인을 친히 시험하고, 조서로 고려 빈공진사 왕빈·최한 등에게 급제를 내려 벼슬을 준 뒤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이르러 정 등이 사행에서 돌아오자 치가 표를 올려 사례하였다. 「학생 왕빈·최한 등이 조정에 들어가 학업을 익히다가 은혜를 입어 나란히 급제를 받고 장사랑·수비서성교서랑을 제수받아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가만히 생각건대 저희가 거듭 조공을 닦은 지 여러 해이온데, 상국은 하늘같이 높고 먼 변방은 바다로 막혀, 몸소 금궐에 나아가 옥계를 두드리지 못하고 오직 북극성을 두르는 정성만 깊을 뿐 조정에 나아가는 예를 펴지 못했습니다. 빈·한 등은 어려서 매인 박처럼 우이(嵎夷)에 자취가 섞임을 한탄하다가, 쑥대처럼 떠도는 것을 꺼리지 않고 일찍 천자의 도읍에 손님으로 조회하였습니다. 헌 솜옷과 짧은 베옷으로 쌀은 옥 같고 땔감은 계수 같은 서울에서 가난을 견디니 어찌 해를 마치겠습니까. 황제 폐하께서 하늘 같은 사랑으로 비추어 기르시고 바다 같은 도량으로 너그러이 품으시어, 관곡의 밑천을 넉넉히 하시고 예문의 학업으로 힘쓰게 하셨습니다. 지난해 밝은 거울을 높이 다시고 노나라 선비를 크게 뽑으실 때, 빈·한이 택궁에 잇달아 나아가 감히 과녁 맞히기에 마음을 두고, 외람되이 영재의 마당에 끼어 부질없이 고기 부러워하는 뜻만 두었더니, 폐하께서 만 리에 집을 떠나 십 년을 상국에서 지낸 것을 어여삐 여기시어 계적(桂籍)에 이름을 올리게 하시고 운대(芸臺)에 벼슬을 명하셨으며, 흙을 그리는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문에 기대는 바람을 위로하시어 따로 성지를 내려 고향에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늘의 지으심이 곡진히 이루어 주시니 큰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 신은 하늘에 감격하고 성상을 떠받드는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2장인전을 용서하다

又有張仁銓者,進奉使白思柔之孔目吏也,上書獻便宜。思柔意其持國陰事以告,仁銓懼不敢歸。上命靖等領以還國,仍詔治釋仁銓罪。治又上表謝曰:「官告國信使陳靖、劉式至,奉傳聖旨,以當道進奉使從行孔目官張仁銓至闕,輒進便宜,翻懷憂懼,今附使臣帶歸本國者。仁銓嵎宅細民,海門賤吏,獲趨上國,敢貢愚誠,罔思狂瞽之尤,輒奏權宜之事,妄塵旒冕,上黷朝廷。今者,仰奉綸言,釋其罪罟。小人趨利,豈虞僭越之求,聖主寬恩,遠降哀矜之命。其張仁銓者已依詔旨放罪,令掌事如故。」又上言願賜板本九經書,用敦儒教,許之。

또 장인전이라는 자가 있으니 진봉사 백사유의 공목리인데, 글을 올려 편의(便宜)를 바쳤다. 사유는 그가 나라의 은밀한 일을 가지고 고했으리라 여기니, 인전이 두려워 감히 돌아가지 못했다. 임금이 정 등에게 명해 데리고 귀국하게 하고, 아울러 조서로 치에게 인전의 죄를 풀어 주게 하였다. 치가 또 표를 올려 사례하였다. 「관고국신사 진정·유식이 이르러 성지를 받들어 전하니, 저희 진봉사를 따라간 공목관 장인전이 대궐에 이르러 문득 편의를 올리고는 도리어 근심과 두려움을 품었는데, 이제 사신에게 딸려 본국에 돌려보내신다 하셨습니다. 인전은 바닷가의 잔백성이요 해문의 천한 아전으로, 상국에 나아감을 얻자 감히 어리석은 정성을 바쳐, 앞뒤 없는 허물을 생각지 않고 문득 권의(權宜)의 일을 아뢰어 망령되이 면류를 더럽히고 위로 조정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제 우러러 윤음을 받들어 그 죄의 그물을 풀어 주시니, 소인이 이익을 좇음에 어찌 참월한 구함을 헤아렸겠습니까마는, 성주의 너그러운 은혜가 멀리 가엾이 여기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장인전은 이미 조서의 뜻에 따라 죄를 놓아 주고 전처럼 일을 맡게 하였습니다.」 또 판본 구경(九經) 책을 내려 유교를 도탑게 하기를 원한다고 아뢰니 허락하였다.

3바람에 깨진 배

先是,式等復命,治遣使元證衍送之,證衍至安香浦口,值風損船,溺所賷物。詔登州給證衍文據遣還,仍賜治衣段二百疋、銀器二百兩、羊五十口。

이보다 앞서 식 등이 복명할 때 치가 사신 원증연을 보내 전송하게 했는데, 증연이 안향포 어귀에서 바람을 만나 배가 상하여 지녔던 물건을 빠뜨렸다. 조서로 등주에서 증연에게 문서를 주어 돌려보내고, 아울러 치에게 옷감 이백 필과 은그릇 이백 냥과 양 오십 마리를 내렸다.

4군사를 청했으나

五年六月,遣使元郁來乞師,愬以契丹寇境。朝廷以北鄙甫寧,不可輕動干戈,為國生事,但賜詔慰撫,厚禮其使遣還。自是受制于契丹,朝貢中絕。

5년 6월에 사신 원욱을 보내 군사를 빌며 거란이 지경을 침노한다고 하소연하였다. 조정은 북쪽 변방이 겨우 안정된 터라 가벼이 무기를 움직여 나라에 일을 만들 수 없다 하여, 다만 조서를 내려 위무하고 그 사신을 두터운 예로 돌려보냈다. 이로부터 거란에게 억눌려 조공이 중간에 끊겼다.

5목종이 즉위하다

治卒,弟誦立,嘗遣兵校徐遠來候朝廷德音,遠久不至。

치가 죽고 아우 송(목종)이 서서, 일찍이 병교 서원을 보내 조정의 소식을 살피게 했는데 원이 오래도록 이르지 않았다.

6주인소의 하소연

咸平三年,其臣吏部侍郎趙之遴命牙將朱仁紹至登州偵之,州將以聞,上特召見仁紹。因自陳國人思慕皇化,為契丹羈制之狀,乃賜誦鈿函詔一道,令仁紹賷還。

함평 삼년에 그 신하 이부시랑 조지린이 아장 주인소에게 명해 등주에 이르러 살피게 하니, 주장(州將)이 아뢰자 임금이 특별히 인소를 불러 보았다. 인소가 이에 나라 사람들이 황화(皇化)를 사모하나 거란에게 매여 눌린 정상을 스스로 아뢰니, 송에게 전함(鈿函)에 담은 조서 한 통을 내려 인소에게 지니고 돌아가게 하였다.

7연 땅을 거란에 떼어 준 탓

六年,誦遣使戶部郎中李宣古來朝謝恩,且言:「晉割燕薊以屬契丹,遂有路趣玄菟,屢來攻伐,求取不已,乞王師屯境上為之牽制。」詔書優答之。

6년에 송이 사신 호부낭중 이선고를 보내 조회하고 은혜에 사례하며 아울러 말하였다. 「진(晉)이 연·계를 떼어 거란에 붙이니, 드디어 현도로 가는 길이 생겨 여러 번 와서 치고 끝없이 요구합니다. 바라건대 왕사(王師)를 지경 위에 주둔시켜 견제해 주소서.」 조서로 두터이 답하였다.

8여섯 성을 다투다

誦卒,弟詢權知國事。先是,契丹既襲高麗,遂築六城曰興州、曰鐵州、曰通州、曰龍州、曰龜州、曰郭州于境上。契丹以為貳己,遣使來求六城,詢不許。遂舉兵,奄至城下,焚蕩宮室,剽劫居人,詢徙居昇羅州以避之。兵退,乃遣使請和。契丹堅以六城為辭,自是調兵守六城。

송이 죽고 아우 순(현종)이 권지국사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거란이 고려를 습격한 뒤 지경 위에 여섯 성을 쌓았으니 흥주·철주·통주·용주·귀주·곽주다. 거란은 저희를 배반한다 여겨 사신을 보내 여섯 성을 요구했는데 순이 허락하지 않았다. 드디어 군사를 들어 갑자기 성 아래 이르러 궁실을 불사르고 사는 사람들을 노략하니, 순이 승라주로 옮겨 피하였다. 군사가 물러가자 이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거란이 굳이 여섯 성을 구실로 삼으니 이로부터 군사를 내어 여섯 성을 지켰다.

협주 1

興州按通考卷三二五四裔考作「興化」。

「흥주」는 통고 권325 사예고를 살피면 「흥화」로 되어 있다.

9압록강 동쪽의 새 성

大中祥符三年,大舉來伐,詢與女真設奇邀擊,殺契丹殆盡。詢又于鴨綠江東築城,與來遠城相望,跨江為橋,潛兵以固新城。

대중상부 삼년에 크게 군사를 들어 쳐들어오니, 순이 여진과 함께 기병(奇兵)을 두고 맞받아쳐 거란을 거의 다 죽였다. 순이 또 압록강 동쪽에 성을 쌓아 내원성과 서로 바라보게 하고, 강을 걸터 다리를 놓고 군사를 숨겨 새 성을 굳혔다.

10용봉 안장을 바치다

七年,方遣告奏使御事工部侍郎尹證古以金線織成龍鳳鞍并綉龍鳳鞍幞各二幅、細馬二疋、散馬二十疋來貢。證古還,賜詢詔書七通并衣帶、銀綵、鞍勒馬等。

7년에 바야흐로 고주사 어사공부시랑 윤증고를 보내, 금실로 짜 이룬 용봉 안장과 수놓은 용봉 안장 덮개 각 두 폭, 좋은 말 두 필, 산마 스무 필을 바쳤다. 증고가 돌아갈 때 순에게 조서 일곱 통과 의대·은채·안장 갖춘 말 등을 내렸다.

11곽원이 전한 고려

八年,詔登州置館於海次以待使者。其年,又遣御事民官侍郎郭元來貢。元自言:「本國城無垣牆,府曰開城,管六縣,民不下三五千。有州軍百餘,置十路轉運司統之。每州管縣五六,小者亦三四,每縣戶三四百。國境南北千五百里,東西二千里。軍民雜處,隸軍者不黥面。方午為市,不用錢,第以布米貿易。地宜秔稻,風俗頗類中國。無羊、兔、橐駝、水牛、驢。氣候少寒,暑差多。有僧,無道士。民家器皿,悉銅為之。樂有二品:曰唐樂,曰鄉樂。三歲一試舉人,有進士、諸科、算學,每試百餘人,登第者不過一二十。每正月一日、五月五日祭祖禰廟。又正月七日,家為王母像戴之。二月望,僧俗燃燈如中國上元節。上巳日,以青艾染餅為盤羞之冠。端午有鞦韆之戲。士女服尚素。地產龍鬚席、藤席、白硾紙、鼠狼尾筆。」元辭貌恭恪,每受宴賜,必自為謝表,粗有文采,朝廷待之亦厚。九年,辭還,賜詢詔書七函,襲衣、金帶、器幣、鞍馬及經史、曆日、聖惠方等。元又請錄國朝登科記及所賜御詩以歸,從之。

8년에 조서로 등주에 바닷가 객관을 두어 사자를 대접하게 하였다. 그해에 또 어사민관시랑 곽원을 보내 조공하였다. 원이 스스로 말하였다. 「본국 성에는 담장이 없고 부(府)는 개성이라 하며 여섯 현을 관할하는데 민가는 삼오천을 밑돌지 않습니다. 주군(州軍)이 백여 개 있어 십로 전운사를 두어 통솔하며, 주마다 현 대여섯 혹은 서너 개를 관할하고 현마다 호수는 삼사백입니다. 나라 지경은 남북 천오백 리, 동서 이천 리입니다. 군사와 백성이 섞여 사는데 군적에 든 자도 낯에 먹물을 뜨지 않습니다. 한낮에 저자를 여는데 돈을 쓰지 않고 다만 베와 쌀로 바꿉니다. 땅은 메벼에 알맞고 풍속은 자못 중국과 비슷합니다. 양·토끼·낙타·물소·나귀가 없습니다. 기후는 추위가 적고 더위가 좀 많습니다. 승려는 있고 도사는 없습니다. 민가의 그릇은 다 구리로 만듭니다. 음악에 두 품(品)이 있으니 당악과 향악이라 합니다. 세 해에 한 번 거인을 시험하는데 진사·제과·산학이 있어 매번 백여 명을 시험하나 급제하는 자는 열에서 스물을 넘지 않습니다. 정월 초하루와 오월 초닷새마다 조상 사당에 제사합니다. 또 정월 초이레에는 집마다 왕모상(王母像)을 만들어 입니다. 이월 보름에는 승려와 속인이 등을 켜니 중국 상원절 같습니다. 상사일에는 푸른 쑥 물들인 떡을 소반 음식의 으뜸으로 삼습니다. 단오에는 그네 놀이가 있습니다. 남녀의 옷은 흰빛을 숭상합니다. 땅에서 용수석·등석·백추지·족제비 꼬리 붓이 납니다.」 원은 말과 모습이 공손하고 삼가며, 잔치와 하사를 받을 때마다 반드시 손수 사표(謝表)를 지었는데 자못 문채가 있어 조정도 두터이 대접하였다. 9년에 하직하고 돌아갈 때 순에게 조서 일곱 함과 습의·금띠·기물·폐백·안장 갖춘 말과 경사(經史)·책력·성혜방 등을 내렸다. 원이 또 국조등과기와 내려 준 어시(御詩)를 적어 돌아가기를 청하니 따랐다.

협주 1

唐樂「唐」原作「庫」,據下文及長編卷三二三、宣和奉使高麗圖經卷四0樂律條改。

「당악」의 당(唐)은 원래 「고(庫)」로 되어 있는데, 아래 글과 장편 권323, 선화봉사고려도경 권40 악률 조에 따라 고쳤다.

12천희 연간의 하례

天禧元年,遣御事刑官侍郎徐訥奉表獻方物于崇政殿,又賀封建壽春郡王。

천희 원년에 어사형관시랑 서눌을 보내 표를 받들어 숭정전에서 방물을 바치고, 또 수춘군왕 책봉을 하례하였다.

13최원신의 배가 뒤집히다

三年九月,登州言高麗進奉使禮賓卿崔元信至秦王水口,遭風覆舟,漂失貢物,詔遣內臣撫之。十一月,元信等入見,貢罽錦衣褥、烏漆甲、金飾長刀匕首、罽錦鞍馬、紵布、藥物等,又進中布二千端,求佛經一藏。詔賜經還布,以元信覆溺匱乏,別賜衣服、繒綵焉。明州、登州屢言高麗海船有風漂至境上者,詔令存問,給度海粮遣還,仍為著例。

3년 9월에 등주가 아뢰기를, 고려 진봉사 예빈경 최원신이 진왕수구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배가 뒤집혀 공물을 떠내려 보냈다 하니, 조서로 내신을 보내 위무하였다. 11월에 원신 등이 들어와 뵙고 모직 비단옷과 요, 검은 옻칠 갑옷, 금 꾸민 장도와 비수, 모직 비단 안장 갖춘 말, 모시, 약물 등을 바치고, 또 중포 이천 단을 바치며 불경 한 장(藏)을 구하였다. 조서로 불경을 내리고 베는 돌려주었으며, 원신이 물에 빠져 군색하므로 따로 옷과 비단을 내렸다. 명주와 등주가 여러 번 고려 바닷배가 바람에 밀려 지경에 이르렀다고 아뢰니, 조서를 내려 위문하고 바다 건널 양식을 주어 돌려보내게 하고 그대로 상례로 삼았다.

14한조의 사행

五年,詢遣告奏使御事禮部侍郎韓祚等一百七十九人來謝恩,且言與契丹修好,又表乞陰陽地理書、聖惠方,並賜之。

5년에 순이 고주사 어사예부시랑 한조 등 백칠십구 명을 보내 은혜에 사례하고, 아울러 거란과 다시 화친했다 말하고, 또 표로 음양지리서와 성혜방을 빌었는데 다 내렸다.

15김행성의 일생

金行成者,累官至殿中丞,治表乞放還。行成自以筮仕朝廷,不願歸本國。又以父母垂老,在海外旦暮思念,恨祿不及,令工圖其像置正寢,與妻史氏居旁室,晨夕定省上食,未嘗少懈。淳化初,通判安州。被病,知州李範與僚佐數人省之,行成病已篤,泣且言曰:「行成外國人,為朝官,佐郡政,病且死,未有以報主恩,雖瞑目固有遺恨。二子宗敏、宗訥皆幼,家素貧,無他親可依,旦暮委溝壑矣。」未幾,行成死,其妻養二子,誓不嫁,織屨以給。範表其事,詔以宗敏補太廟齋郎,令安州月給其家錢叄緡、米五斛,長吏歲時存問。

김행성은 벼슬을 거듭하여 전중승에 이르렀는데, 치가 표를 올려 돌려보내 주기를 빌었다. 행성은 스스로 조정에서 처음 벼슬했으니 본국에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또 부모가 늙어 바다 밖에서 아침저녁으로 그리워하되 봉양이 미치지 못함을 한스러워하여, 화공을 시켜 그 모습을 그려 정침에 두고, 아내 사씨와 곁방에 살며 새벽저녁으로 문안하고 음식을 올리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순화 초에 안주통판이 되었다가 병들었는데, 지주 이범이 관료 몇 사람과 문병하니 행성의 병이 이미 위독한지라 울면서 말하였다. 「행성은 외국 사람으로 조정 관원이 되어 고을 정사를 도왔는데,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임금 은혜를 갚지 못했으니 눈을 감아도 참으로 남는 한이 있습니다. 두 아들 종민·종눌이 다 어리고 집은 본디 가난한데 달리 의지할 친척이 없으니, 조석간에 구렁에 버려질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 행성이 죽으니, 그 아내가 두 아들을 기르며 개가하지 않기로 맹세하고 신을 삼아 살아갔다. 범이 그 일을 표로 아뢰니, 조서로 종민을 태묘재랑에 보임하고 안주에서 다달이 그 집에 돈 삼 민과 쌀 다섯 섬을 주며 장리(長吏)가 철마다 위문하게 하였다.

16강전의 일생

又高麗信州永寧人康戩,字休祐,父允,三世為兵部侍郎。戩少好學,時紇升與契丹交兵,戩從允戰木葉山下,連中二矢,神色不變。後陷契丹,遁居墨斗嶺,又至黃龍府,間道得歸高麗,時允猶在。開寶中,允遣戩隨賓貢肄業國學。太平興國五年,登進士第,解褐大理評事,知湘鄉縣,再遷著作佐郎,知江陰軍、江州。歷官以清白幹力聞,改太常博士。蘇易簡在翰林,稱其吏才,命為廣南西路轉運副使,賜緋魚,就遷正使,再轉度支員外郎、戶部判官。出知峽、越二州,連被詔褒其能政。又為京西轉運使,加工部郎中,賜金紫。戩所至好行事,上章多建白,以竭誠自任。景德三年,卒,真宗特以其子希齡為太常寺奉禮郎,給奉終喪。

또 고려 신주 영녕 사람 강전은 자가 휴우니, 아버지 윤까지 삼대가 병부시랑이었다. 전은 젊어서 배우기를 좋아했다. 그때 흘승(발해 유민)이 거란과 싸우니, 전이 윤을 따라 목엽산 아래서 싸우다 화살 둘을 잇달아 맞고도 낯빛이 변하지 않았다. 뒤에 거란에 사로잡혔다가 묵두령에 숨어 살고 또 황룡부에 이르렀다가 샛길로 고려에 돌아오니 그때 윤이 아직 살아 있었다. 개보 연간에 윤이 전을 빈공을 따라 국학에서 배우게 하였다. 태평흥국 오년에 진사시에 올라 대리평사로 벼슬을 시작해 상향현을 맡고, 두 번 옮겨 저작좌랑으로 강음군과 강주를 맡았다. 벼슬을 지내며 청백하고 유능하기로 이름나 태상박사로 옮겼다. 소이간이 한림에 있으면서 그 관리의 재주를 일컬어 광남서로전운부사로 명해지고 붉은 인끈과 어대를 받았으며, 곧 정사(正使)로 옮기고 다시 탁지원외랑·호부판관으로 옮겼다. 나가서 협주·월주 두 주를 맡아 잇달아 조서로 그 잘 다스림을 표창받았다. 또 경서전운사가 되어 공부낭중을 더하고 금자를 받았다. 전은 가는 곳마다 일하기를 좋아하고 글을 올려 건의함이 많았으며 정성을 다함을 자임하였다. 경덕 삼년에 죽으니, 진종이 특별히 그 아들 희령을 태상시봉례랑으로 삼고 상을 마칠 때까지 녹을 주었다.

17진종의 유물

乾興元年二月,祚等辭歸國,賜詢如故事。會真宗晏駕,又賷遺物以賜詢。

건흥 원년 2월에 한조 등이 하직하고 귀국하니 전례대로 순에게 내렸다. 마침 진종이 승하하자 또 유물을 지니고 가서 순에게 내렸다.

18마흔세 해의 단절

天聖八年,詢復遣御事民官侍郎元穎等二百九十三人奉表入見於長春殿,貢金器、銀罽刀劍、鞍勒馬、香油、人參、細布、銅器、磂黃、青鼠皮等物。明年二月辭歸,賜予有差,遣使護送至登州。其後絕不通中國者四十三年。

천성 팔년에 순이 다시 어사민관시랑 원영 등 이백구십삼 명을 보내 표를 받들고 장춘전에서 들어와 뵙고, 금그릇, 은장식 모직 칼, 안장 갖춘 말, 향유, 인삼, 가는 베, 구리그릇, 유황, 청서 가죽 등을 바쳤다. 이듬해 2월에 하직하고 돌아가니 차등 있게 내리고, 사신을 보내 등주까지 호송하였다. 그 뒤로 중국과 통하지 않은 것이 마흔세 해였다.

19문종이 즉위하다

詢孫徽嗣立,是為文王。

순의 손자 휘가 이어 서니 이가 문왕(문종)이다.

20예빈성의 글

熙寧二年,其國禮賓省移牒福建轉運使羅拯云:「本朝商人黃真、洪萬來稱,運使奉密旨,令招接通好。奉國王旨意,形于部述。當國僻居暘谷,邈戀天朝,頃從祖禰以來,素願梯航相繼。蕞爾平壤,邇于大遼,附之則為睦鄰,疏之則為勍敵。慮邊騷之弗息,蓄陸讋以靡遑,久困羈縻,難圖攜貳,故違述職,致有積年。屢卜雲祥,雖美聖辰於中國;空知日遠,如迷舊路於長安。運屬垂鴻,禮稽展慶。大朝化覃無外,度豁包荒,山不謝乎纖埃,海不辭於支派。謹當遵尋通道,遄赴槀街,但茲千里之傳聞,恐匪重霄之紆眷。今以公狀附真、萬西還,俟得報音,即備禮朝貢。」徽又自言嘗夢至中華,作詩紀其事。三年,拯以聞,朝廷議者亦謂可結之以謀契丹,神宗許焉,命拯諭以供擬腆厚之意。徽遂遣民官侍郎金悌等百十人來,詔待之如夏國使。

희령 이년에 그 나라 예빈성이 복건전운사 나증에게 공문을 보내 말하였다. 「본조 상인 황진·홍만이 와서, 운사께서 밀지를 받들어 맞아 통호하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국왕의 뜻을 받들어 말씀을 폅니다. 저희 나라는 해 뜨는 골에 궁벽히 살면서 아득히 천조를 사모하여, 조상 적부터 배와 사다리를 잇대기를 본디 원하였습니다. 조그마한 평양이 대요(大遼)에 가까워, 붙으면 화목한 이웃이 되나 멀리하면 굳센 적이 되는지라, 변경 소란이 그치지 않을 것을 염려하고 두려움을 쌓아 겨를이 없어, 오래 굴레에 매인 채 두 마음을 꾀하기 어려워 직공을 어긴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여러 번 상서로운 구름을 점치며 중국의 성스러운 날을 기렸으나, 부질없이 해가 멀다는 것만 알아 장안 가는 옛길에 헤매는 듯하였습니다. 운수가 크게 트임을 만나니 예로 경사를 펴기를 상고합니다. 대조(大朝)의 교화는 밖이 없이 덮고 도량은 널리 품으시니, 산은 가는 티끌을 사양하지 않고 바다는 갈래 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삼가 통하는 길을 좇아 빨리 고가(藁街)로 달려가려니와, 다만 천 리의 전해 들음이라 하늘의 굽어살피심이 아닐까 두렵습니다. 이제 공식 문서를 진·만에게 부쳐 서쪽으로 돌려보내니, 회답을 얻으면 곧 예를 갖추어 조공하겠습니다.」 휘가 또 스스로 일찍이 꿈에 중화에 이르렀다 하며 시를 지어 그 일을 적었다. 3년에 증이 아뢰니, 조정의 의논하는 이들도 맺어서 거란을 도모할 만하다 하여 신종이 허락하고, 증에게 명해 대접을 두터이 하겠다는 뜻을 타이르게 하였다. 휘가 드디어 민관시랑 김제 등 백십 명을 보내오니, 조서로 하국(夏國) 사신같이 대접하게 하였다.

협주 1

蓄陸讋以靡遑「讋」原作「襲」,據通考卷三二五四裔考改。

「축륙습이미황(蓄陸讋以靡遑)」의 습(讋)은 원래 「襲」으로 되어 있는데, 통고 권325 사예고에 따라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