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3 — 문종에서 인종까지高麗 三
1명주로 길을 바꾸다
往時高麗人往反皆自登州,七年,遣其臣金良鑑來言,欲遠契丹,乞改塗由明州詣闕,從之。郡縣供頓無舊準,頗擾民,詔立式頒下,費悉官給。又以其不邇華言,恐規利者私與交關,令所至禁止。徽問遺二府甚厚,詔以付市易務售縑帛答之。又表求醫藥、畫塑之工以教國人,詔羅拯募願行者。
지난날 고려 사람의 오감은 다 등주를 통했는데, 7년에 그 신하 김양감을 보내 와서, 거란을 멀리하고자 하니 명주를 거쳐 대궐에 이르는 길로 바꾸기를 빌므로 따랐다. 군현의 접대에 옛 기준이 없어 자못 백성을 성가시게 하니, 조서로 법식을 세워 반포하고 비용은 다 관에서 대게 하였다. 또 그들이 중국말에 익숙지 않으므로 이익을 노리는 자가 사사로이 거래할까 하여, 이르는 곳마다 금하게 하였다. 휘가 이부(二府)에 보내는 선물이 몹시 두터우니, 조서로 시역무(市易務)에 넘겨 비단을 팔아 답하게 하였다. 또 표로 의약과 그림·조각 장인을 구해 나라 사람을 가르치고자 하니, 조서로 나증에게 가기를 원하는 자를 모집하게 하였다.
2글을 숭상하는 나라
九年,復遣崔思訓來,命中貴人倣都亭西驛例治館,待之寖厚,其使來者亦益多。嘗獻伶官十餘輩,曰:「夷樂無足觀,止欲潤色國史爾。」帝以其國尚文,每賜書詔,必選詞臣著撰而擇其善者。
9년에 다시 최사훈을 보내오니, 궁중 사람에게 명해 도정서역(都亭西驛)의 예를 본떠 객관을 지어 대접함이 갈수록 두터워졌고, 오는 사신도 더욱 많아졌다. 일찍이 악공 십여 명을 바치며 「이(夷)의 음악은 볼 것이 없으니, 다만 국사(國史)를 빛내고자 할 뿐입니다」 하였다. 황제는 그 나라가 글을 숭상하므로, 조서를 내릴 때마다 반드시 문신을 골라 짓게 하고 그 잘된 것을 가렸다.
3신주(神舟)를 띄우다
元豐元年,始遣安燾假左諫議大夫、陳睦假起居舍人往聘。造兩艦於明州,一曰凌虛致遠安濟,次曰靈飛順濟,皆名為神舟。自定海絕洋而東,既至,國人歡呼出迎。徽具袍笏玉帶拜受詔,與燾、睦尤禮,館之別宮,標曰順天館,言尊順中國如天云。徽已病,僅能拜命,且乞醫藥。
원풍 원년에 처음 안도에게 좌간의대부를, 진목에게 기거사인을 임시로 주어 빙문을 보냈다. 명주에서 배 두 척을 지으니, 하나는 능허치원안제라 하고 다음은 영비순제라 하여 다 신주(神舟)라 이름하였다. 정해에서 큰 바다를 가로질러 동으로 가서 이르니, 나라 사람들이 환호하며 나와 맞았다. 휘가 도포와 홀과 옥띠를 갖추고 절하여 조서를 받고, 도·목을 더욱 예우하여 별궁에 묵게 하고 순천관(順天館)이라 써 붙이니, 중국을 높이고 따르기를 하늘같이 한다는 말이었다. 휘가 이미 병들어 겨우 명을 받고, 아울러 의약을 빌었다.
협주 2
假左諫議大夫「假」字原脫,據本書卷三二八安燾傳、長編卷八七補。
「가좌간의대부(假左諫議大夫)」의 가(假) 자는 원래 빠졌는데, 본서 권328 안도전과 장편 권87에 따라 보충했다.
凌虛致遠安濟「致遠」、「安濟」原倒,據長編卷八七、宋會要食貨五0之四、宣和奉使高麗圖經卷三四乙正。
「능허치원안제(凌虛致遠安濟)」의 「치원」과 「안제」는 원래 자리가 뒤바뀌었는데, 장편 권87, 송회요 식화 50의 4,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4에 따라 바로잡았다.
4일본 수레를 바치다
二年,遣王舜封挾醫往診治。徽又使柳洪來謝,海中遇風,失所貢物。洪上章自劾,敕書安慰。尋獻日本所造車,曰:「諸侯不貢車服,故不敢與土貢同進。」前此貢物至,輒下有司估直,償以萬縑,至是命勿復估,以萬縑為定數。
2년에 왕순봉을 보내 의원을 데리고 가서 진료하게 하였다. 휘가 또 유홍을 시켜 와서 사례했는데, 바다에서 바람을 만나 바치려던 물건을 잃었다. 홍이 글을 올려 스스로 탄핵하니 칙서로 위로하였다. 이윽고 일본에서 만든 수레를 바치며 「제후는 수레와 옷을 바치지 않는 법이라, 감히 토공과 함께 바치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물이 이르면 문득 담당 관사에 내려 값을 매기고 비단 만 필로 갚았는데, 이에 이르러 다시 값을 매기지 말고 만 필을 정한 수로 삼게 하였다.
협주 1
不敢與土貢同進「進」字原脫,據長編卷三0二補。
「감히 토공과 함께 바치지 못한다(不敢與土貢同進)」의 진(進) 자는 원래 빠졌는데, 장편 권302에 따라 보충했다.
5문종이 죽다
六年,徽卒,在位三十八年,治尚仁恕,為東夷良主。然猶循其俗,王女不下嫁臣庶,必歸之兄弟,宗族貴臣亦然。次子運諫,以為既通上國,宜以禮革故習。徽怒,斥之于外。訃聞,天子閔焉,詔明州修浮屠供一月,遣楊景略、王舜封祭奠,錢勰、宋球弔慰。景略辟李之儀書狀,帝以之儀文稱不著,宜得問學博洽、器宇整秀者召赴中書,試以文乃遣。又以遠服不責其備,諭使者以相見之所殿名、鴟吻,皆聽勿避。
6년에 휘가 죽었다. 재위 서른여덟 해에 다스림이 어질고 너그러움을 숭상하니 동이의 어진 임금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풍속을 좇아, 왕의 딸을 신하와 백성에게 시집보내지 않고 반드시 형제에게 시집보냈으며 종족과 귀한 신하도 그러하였다. 둘째 아들 운이 간하여, 이미 상국과 통했으니 마땅히 예로 옛 습속을 고쳐야 한다고 하니, 휘가 노하여 밖으로 내쳤다. 부음이 들리자 천자가 애도하여, 조서로 명주에서 한 달 동안 불공을 올리게 하고, 양경략·왕순봉을 보내 제사하고 전협·송구를 보내 조문하였다. 경략이 이지의를 서장관으로 천거하니, 황제는 지의가 문명(文名)이 드러나지 않았다 하여, 학문이 넓고 기품이 반듯한 자를 얻어야 한다며 중서로 불러 글로 시험한 뒤에야 보냈다. 또 먼 나라라 하여 갖춤을 책하지 않고, 사자에게 서로 만나는 곳의 전각 이름과 치미(鴟吻)를 다 피하지 않아도 좋다고 타일렀다.
6순종과 선종
徽子順王勳嗣,百日卒。弟宣王運嗣。運仁賢好文,內行飭備,每賈客市書至,則潔服焚香對之。
휘의 아들 순왕 훈(순종)이 이었으나 백 일 만에 죽고, 아우 선왕 운(선종)이 이었다. 운은 어질고 글을 좋아하며 몸가짐이 잘 갖추어져, 장사꾼이 책을 팔러 올 때마다 옷을 깨끗이 하고 향을 사르고 마주하였다.
협주 1
弟宣王運嗣「運嗣」二字原脫,據通考卷三二五四裔考補。
「아우 선왕 운이 이었다(弟宣王運嗣)」의 「운사」 두 자는 원래 빠졌는데, 통고 권325 사예고에 따라 보충했다.
7아우 승통 의천
八年,遣其弟僧統來朝,求問佛法并獻經像。
8년에 그 아우 승통(의천)을 보내 조회하고, 불법을 물으며 아울러 불경과 불상을 바쳤다.
8문원영화를 내리다
哲宗立,遣使金上琦奉慰,林暨致賀,請市刑法之書、太平御覽、開寶通禮、文苑英華。詔惟賜文苑英華一書,以名馬、錦綺、金帛報其禮。
철종이 서자 사신 김상기를 보내 위문을 받들고 임기가 하례하며, 형법 책과 태평어람·개보통례·문원영화를 사기를 청하였다. 조서로 문원영화 한 책만 내리고, 이름난 말과 비단과 금백으로 그 예에 답하였다.
협주 1
林暨長編卷三六二作「林槩」。
「임기(林曁)」는 장편 권362에 「임개(林槩)」로 되어 있다.
9헌종과 숙종
運立四年卒,子懷王堯嗣,未閱歲,以病不能為國,國人請其叔父鷄林公熙攝政。未幾堯卒,熙乃立,凡數歲使不至。
운이 선 지 네 해 만에 죽고 아들 회왕 요(헌종)가 이었으나, 한 해가 못 되어 병으로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니 나라 사람들이 그 숙부 계림공 희(숙종)에게 섭정을 청하였다. 얼마 안 되어 요가 죽고 희가 이에 서니, 무릇 몇 해 동안 사신이 이르지 않았다.
협주 1
鷄林公熙「熙」下原衍「衞」字,據下文及通考卷三二五四裔考刪。
「계림공 희(熙)」 — 희 아래 원래 「위(衞)」 자가 잘못 붙어 있는데, 아래 글과 통고 권325 사예고에 따라 지웠다.
10소식이 금탑을 물리치다
元祐四年,其王子義天使僧壽介至杭州祭亡僧,言國母使持二金塔為兩宮壽,知州蘇軾奏却之,語在軾傳。熙後避遼主諱,改名顒。顒性貪吝,好奪商賈利,富室犯法,輒久縻責贖,雖微罪亦輸銀數斤。
원우 사년에 그 왕자 의천이 승려 수개를 시켜 항주에 이르러 죽은 승려를 제사하게 하고, 국모가 금탑 둘을 지니고 가 두 궁전의 장수를 빌게 했다고 말하니, 지주 소식이 아뢰어 물리쳤다. 이야기는 식의 전에 있다. 희는 뒤에 요나라 임금의 이름을 피해 옹(顒)으로 이름을 고쳤다. 옹은 성품이 탐하고 인색하여 상인의 이익 빼앗기를 좋아하니, 부잣집이 법을 범하면 문득 오래 붙들어 속바치기를 요구하여 작은 죄라도 은 몇 근을 바치게 하였다.
11은그릇 오천 냥
五年,復通使,賜銀器五千兩。
5년에 다시 사신을 통하니 은그릇 오천 냥을 내렸다.
12소식의 다섯 가지 해
七年,遣黃宗慤來獻黃帝鍼經,請市書甚眾。禮部尚書蘇軾言:「高麗入貢,無絲髮利而有五害,今請諸書與收買金箔,皆宜勿許。」詔許買金箔,然卒市冊府元龜以歸。
7년에 황종각을 보내 황제침경을 바치고 책을 사기를 매우 많이 청하였다. 예부상서 소식이 「고려의 조공은 털끝만 한 이익도 없이 다섯 가지 해가 있으니, 이번에 청한 책들과 금박 사들이기를 다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다. 조서로 금박 사는 것은 허락했는데, 그러나 끝내 책부원귀를 사서 돌아갔다.
13원부 연간의 빈공
元符中,遣士賓貢。
원부 연간에 선비를 보내 빈공으로 삼았다.
14휘종 즉위
徽宗立,遣任懿、王嘏來弔賀。
휘종이 서자 임의와 왕하를 보내 조문하고 하례하였다.
15유규와 오식의 사행
崇寧二年,詔戶部侍郎劉逵、給事中吳拭往使。
숭녕 이년에 조서로 호부시랑 유규와 급사중 오식을 보내 사신 가게 하였다.
16예종과 다섯 유학생
顒卒,子俁嗣,貢使接踵,且令士子金瑞等五人入太學,朝廷為置博士。
옹이 죽고 아들 우(예종)가 이으니 공물 사신이 잇달았고, 아울러 선비 김서 등 다섯 사람을 태학에 들여보내니 조정이 그들을 위해 박사를 두었다.
17하국보다 위에 두다
政和中,升其使為國信,禮在夏國上,與遼人皆隸樞密院;改引伴、押伴官為接送館伴。賜以大晟燕樂、籩豆、簠簋、尊罍等器,至宴使者于睿謨殿中。
정화 연간에 그 사신을 국신(國信)으로 올려 예우를 하국(夏國) 위에 두고 요나라 사람과 함께 다 추밀원에 붙였으며, 인반·압반관을 접송관·관반관으로 고쳤다. 대성악(大晟樂)과 변두·보궤·준뢰 등 제기를 내리고, 예모전 안에서 사자에게 잔치를 베풀기까지 하였다.
18두 의원이 전한 경고
宣和四年,俁卒。初,高麗俗兄終弟及,至是諸弟爭立,其相李資深立俁子楷。來告哀,詔給事中路允迪、中書舍人傅墨卿奠慰。俁之在位也,求醫於朝,詔使二醫往,留二年而歸,楷語之曰:「聞朝廷將用兵伐遼。遼兄弟之國,存之足為邊扞。女真狼虎耳,不可交也。業已然,願二醫歸報天子,宜早為備。」歸奏其言,已無及矣。
선화 사년에 우가 죽었다. 처음 고려 풍속은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었는데, 이에 이르러 여러 아우가 다투어 서려 하니 재상 이자심이 우의 아들 해(인종)를 세웠다. 와서 상을 알리니 조서로 급사중 노윤적과 중서사인 부묵경을 보내 제사하고 위문하였다. 우가 재위에 있을 때 조정에 의원을 구하므로 조서로 의원 둘을 보냈는데, 두 해를 머물고 돌아갈 때 해가 말하였다. 「들으니 조정이 장차 군사를 써서 요를 친다 합니다. 요는 형제의 나라니 두면 변경의 울타리가 되기에 족하고, 여진은 이리와 범이라 사귀어서는 안 됩니다. 일이 이미 그리되었다니, 원컨대 두 분 의원은 돌아가 천자께 아뢰어 일찍 대비하시게 하소서.」 돌아와 그 말을 아뢰었으나 이미 미칠 수 없었다.
협주 1
李資深按宣和奉使高麗圖經卷二作「李資謙」。
「이자심(李資深)」은 선화봉사고려도경 권2를 살피면 「이자겸」으로 되어 있다.
19명주에 머물게 하다
欽宗立,賀使至明州,御史胡舜陟言:「高麗靡敝國家五十年,政和以來,人使歲至,淮、浙之間苦之。彼昔臣事契丹,今必事金國,安知不窺我虛實以報,宜止勿使來。」乃詔留館於明而納其贄幣。明年始歸國。
흠종이 서자 하례 사신이 명주에 이르렀는데, 어사 호순척이 「고려가 나라를 피폐하게 한 지 오십 년이요, 정화 이래 사신이 해마다 이르러 회수·절강 사이가 괴로워합니다. 저들이 옛날 거란을 신하로 섬겼으니 이제 반드시 금나라를 섬길 터인데, 우리 허실을 엿보아 알리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마땅히 그치고 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이에 조서로 명주 객관에 머물게 하고 그 폐백만 받았다. 이듬해에야 귀국하였다.
20거란 섬기던 사정
自王徽以降,雖通使不絕,然受契丹封冊,奉其正朔,上朝廷及他文書,蓋有稱甲子者。歲貢契丹至於六,而誅求不已。常云:「高麗乃我奴耳,南朝何以厚待之?」使至其國,尤倨暴,館伴及公卿小失意,輒行捽箠,聞我使至,必假他事來覘,分取賜物。嘗詰其西向修貢事,高麗表謝,其略曰:「中國,三甲子方得一朝;大邦,一周天每修六貢。」契丹悟,乃得免。
왕휘 이래로 사신은 끊이지 않았으나 거란의 책봉을 받고 그 정삭을 받들어, 조정과 그 밖에 올리는 문서에 대개 갑자(甲子)로 해를 일컬은 것이 있었다. 해마다 거란에 조공하기 여섯 번에 이르렀는데도 토색이 그치지 않았다. 거란은 늘 「고려는 우리 종인데 남조는 어찌 저리 두터이 대접하는가」 하였다. 사신이 그 나라에 이르면 더욱 거만하고 사나워, 관반이나 공경이 조금만 뜻을 거스르면 문득 머리채를 잡고 매질하였으며, 우리 사신이 이른다 들으면 반드시 딴 일을 핑계로 와서 엿보고 하사품을 나누어 가졌다. 일찍이 서쪽을 향해 조공하는 일을 따지니, 고려가 표로 사죄하며 그 대략에 「중국은 세 갑자에 겨우 한 번 조회하고, 대방(大邦)은 한 주천(周天)마다 여섯 번 조공을 닦습니다」 하니, 거란이 깨닫고 이에 면하였다.
21호려의 사행
高宗即位,慮金人通於高麗,命迪功郎胡蠡假宗正少卿為高麗國使以間之。蠡之回,史失書。
고종이 즉위하자 금나라 사람이 고려와 통할까 염려하여, 적공랑 호려에게 종정소경을 임시로 주어 고려국 사신으로 삼아 살피게 하였다. 려가 돌아온 일은 사서에 적히지 않았다.
22양응성의 헛된 계책
二年,浙東路馬步軍都總管楊應誠上言:「由高麗至女真路甚徑,請身使三韓,結鷄林以圖迎二聖。」乃以應誠假刑部尚書充高麗國信使。浙東帥臣翟汝文奏言:「應誠欺罔,為身謀耳。若高麗辭以金人亦請問津以窺吳、越,其將何辭以對?萬一辱命,取笑遠夷,願毋遣。」應誠聞之,遂與副使韓衍、書狀官孟健由杭州浮海以行。六月,抵高麗,諭其王楷以所欲為,楷曰:「大朝自有山東路,盍不由登州往?」應誠曰:「以貴國路徑耳。」楷有難色,已而命其門下侍郎傅佾至館中,果對如翟汝文言。應誠曰:「女真不善水戰。」佾曰:「彼常於海道往來,況女真舊臣本國,今反臣事之,其強弱可見矣。」居數日,復遣其中書侍郎崔洪宰、知樞密院金富軾持前議不變,謂二聖今在燕雲,大朝雖盡納土,未必可得,何不練兵與戰?終不奉詔。
2년에 절동로 마보군 도총관 양응성이 아뢰었다. 「고려에서 여진에 이르는 길이 매우 질러가니, 청컨대 몸소 삼한에 사신 가서 계림과 맺어 두 성상(휘종·흠종)을 맞아 올 일을 꾀하겠습니다.」 이에 응성에게 형부상서를 임시로 주어 고려국신사에 충임하였다. 절동 수신 적여문이 아뢰었다. 「응성의 속임은 제 몸을 위한 꾀일 뿐입니다. 고려가 〈금나라 사람도 나루를 물어 오·월을 엿보겠다 청하면 무슨 말로 대답하시렵니까〉 하고 사양하면, 만에 하나 사명을 욕되게 하여 먼 오랑캐의 웃음을 살 터이니 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응성이 듣고 드디어 부사 한연, 서장관 맹건과 항주에서 바다에 떠서 갔다. 6월에 고려에 닿아 그 왕 해에게 하려는 바를 타이르니, 해가 「대조에 본디 산동 길이 있는데 어찌 등주로 가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응성이 「귀국 길이 지름길이기 때문이오」 하니 해가 난처한 빛이 있었다. 이윽고 문하시랑 부일을 객관에 보냈는데, 과연 적여문의 말대로 대답하였다. 응성이 「여진은 물싸움에 서투르오」 하니, 일이 「저들은 늘 바닷길을 오갑니다. 하물며 여진은 옛날 본국의 신하였는데 이제 도리어 신하로 섬기니, 그 강약을 알 만합니다」 하였다. 며칠 머물자 다시 중서시랑 최홍재와 지추밀원 김부식을 보내 앞의 의논을 지켜 바꾸지 않으며, 「두 성상께서 지금 연운(燕雲)에 계시니 대조가 온 땅을 다 바친들 꼭 모셔 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찌 군사를 단련해 싸우지 않으십니까」 하고, 끝내 조서를 받들지 않았다.
협주 2
都總管繫年要錄卷一四、通考卷三二五四裔考都作「副總管」。
「도총관」은 계년요록 권14와 통고 권325 사예고에 다 「부총관」으로 되어 있다.
居數日「日」原作「月」,據繫年要錄卷一六、通考卷三二五四裔考改。
「며칠 머물다(居數日)」의 일(日)은 원래 「월(月)」로 되어 있는데, 계년요록 권16과 통고 권325 사예고에 따라 고쳤다.
23수창문에서 절 받고 돌아오다
應誠留兩月餘,不得已見楷於壽昌門,受其拜表而還。十月,至闕,入對言狀,上以楷負國恩,怒甚。尚書右丞朱勝非曰:「彼鄰金人,與中國隔海,利害甚明。曩時待之過厚,今安能責其報也。」右僕射黃潛善曰:「以巨艦載精兵數萬,徑擣其國,彼寧不懼。」勝非曰:「越海興師,燕山之事可為近鑒。」上怒解。十一月,楷遣其臣尹彥頤奉表謝罪,詔以二聖未歸,燕設不宜用樂,乃設幕殿門外,命客省官吳得興伴賜酒食,命中書舍人張澂押伴,如禮遣還。
응성이 두 달 남짓 머물다 하는 수 없이 수창문에서 해를 보고, 그 배표(拜表)만 받고 돌아왔다. 10월에 대궐에 이르러 들어가 정상을 아뢰니, 임금이 해가 나라의 은혜를 저버렸다 하여 노함이 심하였다. 상서우승 주승비가 「저들은 금나라와 이웃하고 중국과는 바다로 막혔으니 이해가 몹시 분명합니다. 지난날 대접이 지나치게 두터웠으니 이제 어찌 그 보답을 책하겠습니까」 하였다. 우복야 황잠선이 「큰 배에 정예 수만을 싣고 곧장 그 나라를 두드리면 저들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승비가 「바다를 건너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연산(燕山)의 일이 가까운 거울이 될 만합니다」 하매 임금의 노여움이 풀렸다. 11월에 해가 그 신하 윤언이를 보내 표를 받들어 사죄하니, 조서로 두 성상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잔치에 음악을 쓸 수 없다 하여 전문 밖에 장막 전각을 치고, 객성관 오득흥에게 명해 모시고 술과 음식을 내리고 중서사인 장징에게 압반을 명하여, 예대로 돌려보냈다.
24상황의 사람을 물리치다
三年八月,上謂輔臣曰:「聞上皇遣內臣、宮女各二人隨高麗貢使來,朕聞之悲喜交集。」呂頤浩曰:「此必金人之意,不然高麗必不敢,安知非窺我虛實以報。」於是詔止之,略曰:「王緬守基圖,夙同文軌,乃附乘桴之信,嗣修貢篚之恭。惟忠順之無他,質神明而靡愧,屬關聞聽,良用歎嘉。言念晚年,實為多故,舉中原之生聚,遭強敵之震驚,既涉境以冞深,猶稱兵而未已,茲移仗衞,暫駐江湖。如行使之果來,恐有司之不戒,俟休邊警,當問聘期。壞晉館以納車,庶無後悔,閉漢關而謝質,非用前規。想彼素懷,知吾誠意。」
3년 8월에 임금이 보신(輔臣)들에게 「들으니 상황(휘종)께서 내신과 궁녀 각 두 사람을 고려 공사(貢使)에 딸려 보내신다 하니, 짐이 듣고 슬픔과 기쁨이 엇갈린다」 하였다. 여이호가 「이는 반드시 금나라 사람의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려가 감히 못 할 일이니, 우리 허실을 엿보아 알리려는 것이 아닌 줄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이에 조서로 그치게 하였다. 그 대략에 「왕은 멀리 기업을 지키며 일찍부터 문궤를 같이하여, 뗏목 편에 서신을 부치고 공물 바구니의 공손함을 이어 닦았다. 충순하여 다른 마음이 없음은 신명에게 물어도 부끄러움이 없으니, 요즘 듣는 바에 참으로 감탄하고 가상히 여긴다. 생각건대 근년은 실로 일이 많아, 중원의 백성을 들어 강한 적의 진동을 만나, 이미 지경에 깊이 들어왔고 아직도 군사를 거두지 않으므로, 이에 의장과 호위를 옮겨 잠시 강호(江湖)에 머문다. 사신이 과연 오면 유사(有司)가 갖추지 못할까 두려우니, 변경의 경보가 쉬기를 기다려 마땅히 빙문의 기약을 묻겠다. 진(晉)나라 객관을 헐어 수레를 들인 일은 뒤늦은 뉘우침이 없기를 바라서요, 한나라 관문을 닫아 볼모를 사절한 일은 앞 법도를 쓰자는 것이 아니다. 그대의 본디 품은 마음을 헤아리니 나의 참뜻을 알라」 하였다.
협주 1
俟休邊警「警」原作「境」,據通考三二五四裔考改。
「변경의 경보가 쉬기를 기다려(俟休邊警)」의 경(警)은 원래 「경(境)」으로 되어 있는데, 통고 권325 사예고에 따라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