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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4 — 남송과 풍속高麗 四

송사 고려전 宋史 高麗傳 · 탈탈(脫脫) 등 · 1345년 (원 지정 5) · 단락 17 · 한자 1,783자 · 낭독 7.1분

「송사 고려전」 한 권 「고려 4 — 남송과 풍속」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송나라가 본 고려 이백 년. 왕건의 책봉부터 서희·의천·김부식의 이름이 지나가고, 소식(蘇軾)이 고려 사신을 물리친 사연, 신주(神舟) 두 척의 뱃길, 팔관재와 개경 풍속까지 — 바다 건너에서 적은 고려의 실록이다.

1유약의 경계

紹興元年十月,高麗將入貢,禮部侍郎柳約言:「四明殘破之餘,荒蕪單弱,恐起戎心,宜屯重兵以俟其至。」十一月,詔柳約奉使高麗,不果行。

소흥 원년 10월에 고려가 조공하러 오려 하니, 예부시랑 유약이 「사명(명주)은 잔파된 뒤라 황폐하고 약하니, 저들의 군사 마음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중병을 주둔시켜 그들이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였다. 11월에 조서로 유약을 고려에 사신 보내기로 했으나 결국 가지 못했다.

2동문관을 지었으나

二年閏四月,楷遣其禮部員外郎崔惟清、閤門祗候沈起入貢金百兩、銀千兩、綾羅二百疋、人參五百斤,惟清所獻亦三之一。上御後殿引見,賜惟清、起金帶二,答以溫詔遣還。是月,定海縣言,民亡入高麗者約八十人,願奉表還國。詔候到日,高麗綱首卓榮等量與推恩。十二月,聞高麗遣知樞密院事洪彝敘等六十五人來貢,議以臨安府學館其使。言者謂雖在兵間,不可無學,恐為所窺。詔以法惠寺為同文館以待之。既而卒不至。

2년 윤4월에 해가 예부원외랑 최유청과 합문지후 심기를 보내 금 백 냥, 은 천 냥, 능라 이백 필, 인삼 오백 근을 조공하고, 유청이 바친 것도 그 삼분의 일이었다. 임금이 후전에서 인견하고 유청과 기에게 금띠 둘을 내리고 따뜻한 조서로 답해 돌려보냈다. 이달에 정해현이 아뢰기를, 고려로 도망해 들어갔던 백성 팔십 명쯤이 표를 받들고 귀국하기를 원한다 하니, 조서로 이르는 날을 기다려 고려 강수(綱首) 탁영 등에게 헤아려 은혜를 베풀게 하였다. 12월에 고려가 지추밀원사 홍이서 등 예순다섯 명을 보내 조공한다 듣고, 임안부 부학(府學)을 그 사신의 객관으로 삼자고 의논하니, 말하는 이들이 전란 중이라도 학교가 없을 수 없고 엿보일까 두렵다 하므로, 조서로 법혜사를 동문관으로 삼아 대접하게 하였다. 그러나 끝내 오지 않았다.

협주 1

法惠寺原作「洪惠寺」,據繫年要錄卷六三、通考卷三二五四裔考改。

「법혜사」는 원래 「홍혜사」로 되어 있는데, 계년요록 권63과 통고 권325 사예고에 따라 고쳤다.

3김치규를 돌려보내다

六年,高麗持牒官金稚圭至明州,賜銀帛遣之,懼其為金間也。

6년에 고려 지첩관 김치규가 명주에 이르니, 은과 비단을 내려 보냈다. 금나라의 간첩이 될까 두려워한 것이다.

4서덕영의 청을 물리치다

三十二年三月,高麗綱首徐德榮詣明州言,本國欲遣賀使。守臣韓仲通以聞,殿中侍御史吳芾奏曰:「高麗與金人接壤,昔稚圭之來,朝廷懼其為間,亟遣還。今兩國交兵,德榮之請,得無可疑?使其果來,猶恐不測,萬一不至,貽笑遠方。」詔止之。

32년 3월에 고려 강수 서덕영이 명주에 와서, 본국이 하례 사신을 보내려 한다고 말하였다. 수신 한중통이 아뢰니 전중시어사 오불이 아뢰었다. 「고려는 금나라 사람과 지경을 접했습니다. 지난날 치규가 왔을 때도 조정이 간첩일까 두려워 서둘러 돌려보냈습니다. 이제 두 나라가 싸우는 판에 덕영의 청이 어찌 의심스럽지 않겠습니까. 과연 온다 해도 오히려 헤아리지 못할 일이 두렵고, 만에 하나 오지 않으면 먼 지방에 웃음을 남길 것입니다.」 조서로 그치게 하였다.

5사신 길이 끊어지다

隆興二年四月,明州言高麗入貢。史不書引見日,恐同彝敘之詐。其後使命遂絕。

융흥 이년 4월에 명주가 고려가 조공하러 온다고 아뢰었다. 사서에 인견한 날이 적히지 않았으니, 홍이서 때 같은 속임이었을 것이다. 그 뒤 사신 길이 드디어 끊겼다.

6동전을 금하다

慶元間,詔禁商人持銅錢入高麗,蓋絕之也。

경원 연간에 조서로 상인이 동전을 지니고 고려에 들어가는 것을 금하니, 대개 관계를 끊은 것이다.

7다섯 가지 해라 한 까닭

初,高麗入使,明、越困於供給,朝廷館遇燕賚錫予之費以鉅萬計,饋其主者不在焉。我使之行,每乘二神舟,費亦不貲。三節官吏縻爵捐廩,皆仰縣官。昔蘇軾言于先朝,謂高麗入貢有五害,以此也。惟是國於吳會,事異東都。昔高麗入使,率由登、萊,山河之限甚遠,今直趨四明,四明距行都限一浙水耳。

처음 고려 사신이 들어오면 명주·월주가 접대에 시달렸고, 조정이 객관 대접과 잔치와 하사에 쓰는 비용이 거만(鉅萬)으로 헤아려졌는데 그 임금에게 보내는 것은 셈에 들지도 않았다. 우리 사신의 행차도 매번 신주 두 척을 타니 비용이 또한 적지 않았고, 삼절(三節)의 관리에게 주는 벼슬과 녹이 다 관가에 기대었다. 옛날 소식이 선조(先朝)에 고려 조공에 다섯 가지 해가 있다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다만 나라를 오회(吳會)에 세웠으니 사정이 동도(개봉) 때와 다르다. 옛날 고려 사신은 대개 등주·내주를 거쳐 산과 강의 한계가 몹시 멀었는데, 이제는 곧장 사명으로 오니 사명에서 행도(임안)까지는 절강 물 하나가 막을 뿐이다.

8험한 바닷길

由海道奉使高麗,瀰漫汪洋,洲嶼險阻,遇黑風,舟觸嶕輒敗,出急水門至群山島,始謂平達,非數十日不至也。舟南北行,遇順風則歷險如夷,至不數日。其國東西二千里,南北五百里,西北接契丹,恃鴨綠江以為固,江廣三百步。其東所臨,海水清澈,下視十丈,東南望明州,水皆碧。

바닷길로 고려에 사신 가면 물이 아득히 넓고 섬과 여울이 험하여, 검은 바람을 만나 배가 암초에 부딪히면 문득 부서진다. 급수문을 나가 군산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탄히 닿았다 이르니, 수십 일이 아니면 이르지 못한다. 배가 남북으로 갈 때 순풍을 만나면 험한 데 지나기를 평지같이 하여 며칠이 못 되어 이른다. 그 나라는 동서 이천 리, 남북 오백 리다. 서북으로 거란과 접하여 압록강을 믿고 굳게 지키니 강 너비가 삼백 걸음이다. 그 동쪽에 임한 바닷물은 맑게 사무쳐 열 길 아래가 내려다보이고, 동남으로 명주를 바라보면 물이 다 푸르다.

9삼경과 삼천칠백 섬

王居開州蜀莫郡,曰開成府。依大山置宮室,立城壁,名其山曰神嵩。民居皆茅茨,大止兩椽,覆以瓦者才十二。以新羅為東州樂浪府,號東京。百濟為金州金馬郡,號南京。平壤為鎮州,號西京。西京最盛。總之,凡三京、四府、八牧、郡百有十八、縣鎮三百九十、洲島三千七百。郡邑之小者,或只百家。男女二百十萬口,兵、民、僧各居其一。地寒多山,土宜松柏,有秔、黍、麻、麥而無秫,以秔為酒。少絲蠶,匹縑直銀十兩,多衣麻紵。

왕은 개주 촉막군에 사니 개성부라 한다. 큰 산에 기대어 궁실을 두고 성벽을 세웠으며 그 산을 신숭(神嵩)이라 이름한다. 민가는 다 띠집으로 크대야 서까래 둘을 넘지 않고, 기와로 덮은 것은 겨우 열에 둘이다. 신라를 동주 낙랑부로 삼아 동경이라 부르고, 백제를 금주 금마군으로 삼아 남경이라 부르고, 평양을 진주로 삼아 서경이라 부르니 서경이 가장 성하다. 통틀어 삼경·사부·팔목이요, 군이 백열여덟, 현진이 삼백구십, 섬이 삼천칠백이다. 작은 군읍은 혹 백 집뿐이다. 남녀 이백십만 명에 군사·백성·승려가 각각 그 하나씩을 차지한다. 땅이 춥고 산이 많으며, 흙은 소나무 잣나무에 알맞고 메벼·기장·삼·보리가 있으나 찰벼는 없어 메벼로 술을 빚는다. 실과 누에가 적어 비단 한 필이 은 열 냥이라, 삼과 모시옷을 많이 입는다.

협주 1

鎮州按長編卷三三九作「鎬州」。

「진주(鎮州)」는 장편 권339를 살피면 「호주(鎬州)」로 되어 있다.

10왕의 거둥과 과거

王出,乘車駕牛,歷山險乃騎。紫衣行前,捧護國仁王經以導。出令曰教,曰宣。臣民呼之曰聖上,私謂曰嚴公,后妃曰宮主。百官名稱、階、勳、功臣、檢校,頗與中朝相類。過御史臺則下馬,違者有劾。士人以族望相高,柳、崔、金、李四姓為貴種。無宦者,以世族子為內侍六衞。歲十二月朔,王坐紫門小殿注官,外官則付國相。有國子監、四門學,學者六千人。貢士三等,王城曰土貢,郡邑曰鄉貢,他國人曰賓貢,間歲試于所屬,再試于學,所取不過三四十人,然後王親試以詩、賦、論三題,謂之簾前重試。亦有制科宏詞之目,然特文具而已。士尚聲律,少通經。

왕이 나들이할 때는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산 험한 데를 지나서야 말을 탄다. 자줏빛 옷이 앞서 가며 호국인왕경을 받들어 인도한다. 명령을 교(敎)라 하고 선(宣)이라 한다. 신하와 백성은 성상(聖上)이라 부르고 사사로이는 엄공이라 하며, 후비는 궁주라 한다. 백관의 명칭과 품계·훈·공신·검교는 자못 중조와 비슷하다. 어사대를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니 어기면 탄핵이 있다. 선비는 족망(族望)으로 서로 높이니 유·최·김·이 네 성이 귀한 씨족이다. 환관이 없고 세족의 아들로 내시와 육위를 삼는다. 해마다 십이월 초하루에 왕이 자문 소전에 앉아 벼슬을 매기고, 바깥 벼슬은 국상(國相)에게 맡긴다. 국자감과 사문학이 있어 배우는 자가 육천 명이다. 공사(貢士)는 세 등급이니 왕성은 토공이라 하고 군읍은 향공이라 하고 다른 나라 사람은 빈공이라 한다. 한 해 걸러 소속에서 시험하고 다시 국학에서 시험하여 뽑는 것이 삼사십 명을 넘지 않으며, 그런 뒤에 왕이 시·부·논 세 제목으로 친히 시험하니 염전중시(簾前重試)라 이른다. 제과와 굉사의 명목도 있으나 다만 겉치레일 뿐이다. 선비들이 성률(聲律)을 숭상하고 경학에 통한 이는 적다.

협주 1

土貢宣和奉使高麗圖經卷一九同;通考卷三二五四裔考作「王貢」。

「토공(土貢)」은 선화봉사고려도경 권19도 같고, 통고 권325 사예고에는 「왕공(王貢)」으로 되어 있다.

11왕성의 중국 사람들

王城有華人數百,多閩人因賈舶至者,密試其所能,誘以祿仕,或強留之終身,朝廷使至,有陳牒來訴者,則取以歸。

왕성에 중국 사람 수백이 있으니 장삿배로 온 민(閩) 사람이 많다. 그 재능을 은밀히 시험하여 벼슬과 녹으로 꾀고 혹 억지로 붙들어 종신토록 두기도 하는데, 조정 사신이 이르렀을 때 글을 올려 하소연하는 자가 있으면 데리고 돌아온다.

12군사와 토지 제도

百官以米為奉,皆給田,納祿半給,死乃拘之。國無私田,民計口授業。十六以上則充軍,六軍三衞常留官府,三歲以選戍西北,半歲而更。有警則執兵,任事則服勞,事已復歸農畝。王亦有分地以供私用,王母、妃主、世子皆受湯沐田。

백관은 쌀로 녹을 삼고 다 밭을 주는데, 녹은 반만 주다가 죽으면 거둔다. 나라에 사전(私田)이 없고 백성은 식구를 헤아려 생업을 받는다. 열여섯 이상이면 군사에 충원되어, 육군 삼위는 늘 관부에 머물고 세 해마다 뽑아 서북에 수자리 가서 반년 만에 교대한다. 경보가 있으면 무기를 잡고, 일을 맡으면 부역하며, 일이 끝나면 다시 농사로 돌아간다. 왕에게도 사사로운 쓰임에 대는 분지(分地)가 있고, 왕모·비주·세자는 다 탕목전을 받는다.

13해동통보

上下以賈販利入為事。日中為虛,用米布貿易。地產銅,不知鑄錢,中國所予錢,藏之府庫,時出傳翫而已。崇寧後,始學鼓鑄,有「海東通寶」、「重寶」、「三韓通寶」三種錢,然其俗不便也。兵器疏簡,無強弩大刀。

위아래가 장사의 이익을 일로 삼는다. 한낮에 저자를 여는데 쌀과 베로 바꾼다. 땅에서 구리가 나지만 돈 부을 줄 몰라, 중국이 준 돈은 창고에 간직해 두고 때때로 꺼내 돌려 구경할 뿐이었다. 숭녕 뒤에야 비로소 주조를 배워 「해동통보」·「해동중보」·「삼한통보」 세 가지 돈이 있게 되었으나, 그 풍속에 잘 쓰이지 않았다. 병기는 성기고 간략하여 센 쇠뇌와 큰 칼이 없다.

14팔관재

崇尚釋教,雖王子弟亦常一人為僧。信鬼,拘陰陽,病不相視,斂不撫棺。貧者死,則露置中野。歲以建子月祭天。國東有穴,號禭神,常以十月望日迎祭,謂之八關齋,禮儀甚盛,王與妃嬪登樓,大張樂宴飲,賈人曳羅為幕,至百疋相聯以示富。三歲大祭祠,遍其封內,因是斂民財,而王與諸臣分取之。祖廟在國門之外,大祭則具車服冕圭親祠。王城有佛寺七十區而無道觀,大觀中,朝廷遣道士往,乃立福源院,置羽流十餘輩。俗不知醫,自王俁來請醫,後始有通其術者。

불교를 숭상하여 왕의 자제라도 늘 한 사람은 승려가 된다. 귀신을 믿고 음양에 얽매여, 병들면 서로 보지 않고 염할 때 관을 어루만지지 않는다. 가난한 이가 죽으면 들 가운데 그대로 둔다. 해마다 십일월에 하늘에 제사한다. 나라 동쪽에 굴이 있어 수신(禭神)이라 부르는데, 늘 시월 보름에 맞아 제사하니 팔관재(八關齋)라 이르며 예의가 몹시 성대하다. 왕과 비빈이 다락에 오르고 크게 풍악을 벌여 잔치하며, 장사꾼들은 비단을 늘여 장막을 치는데 백 필을 잇대어 부유함을 보이기까지 한다. 세 해마다 큰 제사를 지경 안에 두루 지내는데, 이를 빌미로 백성의 재물을 거두어 왕과 신하들이 나누어 가진다. 조상 사당은 나라 문밖에 있어 큰 제사면 수레·옷·면류관·홀을 갖추고 친히 제사한다. 왕성에 절이 일흔 구역인데 도관(道觀)은 없더니, 대관 연간에 조정이 도사를 보내자 이에 복원원을 세우고 도류 십여 명을 두었다. 풍속이 의술을 몰랐는데, 왕우가 의원을 청한 뒤로 비로소 그 기술에 통한 자가 생겼다.

협주 1

禭神原作「歲神」,據後漢書卷一一五高句驪傳、宣和奉使高麗圖經卷一七改。

「수신(禭神)」은 원래 「세신(歲神)」으로 되어 있는데, 후한서 권115 고구려전과 선화봉사고려도경 권17에 따라 고쳤다.

15풍속과 예절

人首無枕骨,背扁側。男子巾幘如唐裝,婦人鬌髻垂右肩,餘髮被下,約以絳羅,貫之簪。旋裙重疊,以多為勝。男女自為夫婦者不禁,夏月同川而浴。婦人、僧、尼皆男子拜。樂聲甚下,無金石之音,既賜樂,乃分為左、右二部:左曰唐樂,中國之音也;右曰鄉樂,其故習也。堂上設席,升必脫屨,見尊者則膝行,必跪,應必唯。其拜無不答,子拜,父猶半答其禮。性仁柔惡殺,不屠宰,欲食羊豕則包以蒿而燔之。

사람들은 머리에 침골(枕骨)이 없고 등이 납작하다. 남자의 두건은 당나라 차림 같고, 부인은 갈래머리를 오른 어깨에 드리우고 남은 머리를 아래로 늘어뜨려 붉은 깁으로 묶고 비녀를 꽂는다. 두른 치마는 겹겹이 껴입어 많음을 낫다 여긴다. 남녀가 절로 부부 되는 것을 금하지 않고, 여름이면 같은 내에서 목욕한다. 부인과 승려는 다 남자처럼 절한다. 음악 소리는 매우 낮아 쇠와 돌의 소리가 없더니, 음악을 내려 준 뒤 이에 좌우 두 부로 나누니, 왼쪽은 당악이라 하여 중국의 음악이요, 오른쪽은 향악이라 하여 그 옛 익힘이다. 마루 위에 자리를 펴고 오를 때 반드시 신을 벗으며, 어른을 보면 무릎걸음으로 가고 반드시 꿇으며 대답은 반드시 「예」 한다. 절에는 답하지 않음이 없어, 아들이 절해도 아비가 오히려 반절로 답한다.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워 죽이기를 싫어하여 도살하지 않으니, 양이나 돼지를 먹으려면 쑥으로 싸서 굽는다.

16너그러운 형벌

刑無慘酷之科,唯惡逆及罵父母者斬,餘皆杖肋。外郡刑殺悉送王城,歲以八月減囚死罪,貸流諸島,累赦,視輕重原之。

형벌에 참혹한 조목이 없어, 오직 악역과 부모를 욕한 자만 목을 베고 나머지는 다 갈빗대를 때린다. 바깥 군의 사형은 다 왕성으로 보내며, 해마다 팔월에 죄수를 심사해 사죄는 감하여 여러 섬에 유배하고, 여러 번 사면하여 경중을 살펴 용서한다.

17명주에서 개경까지

自明州定海遇便風,三日入洋,又五日抵墨山,入其境。自墨山過島嶼,詰曲嶕石間,舟行甚駛,七日至禮成江。江居兩山間,束以石峽,湍激而下,所謂急水門,最為險惡。又三日抵岸,有館曰碧瀾亭,使人由此登陸,崎嶇山谷四十餘里,乃其國都云。

명주 정해에서 순풍을 만나면 사흘에 큰 바다에 들고, 또 닷새면 묵산에 닿아 그 지경에 든다. 묵산에서 섬들을 지나 굽이굽이 암초 사이를 가면 뱃길이 몹시 빨라 이레면 예성강에 이른다. 강은 두 산 사이에 돌 협곡으로 묶여 여울이 세차게 쏟아지니, 이른바 급수문으로 가장 험악하다. 또 사흘이면 기슭에 닿는데 벽란정이라는 객관이 있어, 사인(使人)은 여기서 뭍에 올라 산골 사십여 리를 꼬불꼬불 가면 곧 그 나라 도읍이라 한다.

협주 1

墨山按長編卷三三九、宣和奉使高麗圖經卷三五作「黑山」。

「묵산(墨山)」은 장편 권339와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5를 살피면 「흑산(黑山)」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