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高麗
1압록수와 평양
高麗,本扶餘別種也。地東跨海距新羅,南亦跨海距百濟,西北度遼水與營州接,北靺鞨。其君居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隨山屈繚爲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又有國內城、漢城,號別都。水有大遼、少遼:大遼出靺鞨西南山,南曆安市城;少遼出遼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與之合。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鴨頭,號鴨淥水,曆國內城西,與鹽難水合,又西南至安市,入於海。而平壤在鴨淥東南,以巨艫濟人,因恃以爲塹。
고려는 본디 부여의 별종이다. 땅은 동으로 바다를 건너 신라에 다다르고, 남으로도 바다를 건너 백제에 다다르며, 서북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와 접하고, 북은 말갈이다. 그 임금은 평양성에 사니 장안성이라고도 하며 한나라 낙랑군으로, 서울에서 오천 리 남짓이다. 산세를 따라 굽이굽이 성곽을 두르고 남쪽은 패수에 닿았으며, 왕은 그 왼쪽에 궁을 지었다. 또 국내성과 한성이 있어 별도(別都)라 부른다. 물에는 대요수·소요수가 있으니, 대요수는 말갈 서남산에서 나와 남으로 안시성을 지나고, 소요수는 요산 서쪽에서 나와 역시 남으로 흐르는데, 새외에서 나온 양수가 서쪽으로 흘러와 합친다. 마자수가 있어 말갈의 백산에서 나오는데 빛이 오리 머리 같아 압록수라 부르며, 국내성 서쪽을 지나 염난수와 합치고 다시 서남으로 안시에 이르러 바다에 든다. 평양은 압록 동남에 있어 큰 배로 사람을 건네니, 이를 믿고 해자로 삼는다.
2열두 벼슬
官凡十二級:曰大對廬,或曰吐捽;曰鬱折,主圖簿者;曰太大使者;曰帛衣頭大兄,所謂帛衣者,先人也,秉國政,三歲一易,善職則否,凡代日,有不服則相攻,王爲閉宮守,勝者聽爲之;曰大使者;曰大兄;曰上位使者;曰諸兄;曰小使者;曰過節;曰先人;曰古鄒大加。其州縣六十。大城置傉薩一,比都督;餘城置處閭近支,亦號道使,比刺史。有參佐,分幹。有大模達,比衛將軍;末客,比中郎將。
벼슬은 무릇 열두 급이다. 대대로(大對盧)라 하니 토졸이라고도 한다. 울절이라 하니 문서와 장부를 맡는 자다. 태대사자라 한다. 백의두대형이라 하니 이른바 백의(帛衣)란 선인(先人)으로, 국정을 잡아 세 해에 한 번 갈되 직을 잘 살피면 그러지 않으며, 무릇 교대하는 날 승복하지 않는 이가 있으면 서로 치는데, 왕은 궁문을 닫아 지키다가 이긴 자를 들어준다. 대사자라 하고, 대형이라 하고, 상위사자라 하고, 제형이라 하고, 소사자라 하고, 과절이라 하고, 선인이라 하고, 고추대가라 한다. 그 주현은 예순이다. 큰 성에는 욕살 하나를 두니 도독에 비기고, 나머지 성에는 처려근지를 두니 도사라고도 부르며 자사에 비긴다. 참좌가 있어 일을 나누어 본다. 대모달이 있으니 위장군에 비기고, 말객은 중랑장에 비긴다.
3다섯 부
分五部:曰內部,即漢桂婁部也,亦號黃部;曰北部,即絕奴部也,或號後部;曰東部,即順奴部也,或號左部;曰南部,即灌奴部也,亦號前部;曰西部,即消奴部也。
다섯 부로 나뉜다. 내부라 하니 곧 한나라 때 계루부로 황부라고도 하고, 북부라 하니 곧 절노부로 후부라고도 하고, 동부라 하니 곧 순노부로 좌부라고도 하고, 남부라 하니 곧 관노부로 전부라고도 하고, 서부라 하니 곧 소노부다.
4풍속과 국당
王服五采,以白羅制冠,革帶皆金扣。大臣青羅冠,次絳羅,珥兩鳥羽,金銀雜扣,衫筒袖,褲大口,白韋帶,黃革履。庶人衣褐,戴弁。女子首巾幗。俗喜弈、投壺、蹴鞠。食用籩、豆、簠、簋、罍、洗。居依山谷,以草茨屋,惟王宮、官府、佛廬以瓦。窶民盛冬作長坑,煴火以取暖。其治,峭法以繩下,故少犯。叛者叢炬灼體,乃斬之,籍入其家。降、敗、殺人及剽劫者斬,盜者十倍取償,殺牛馬者沒爲奴婢,故道不掇遺。婚娶不用幣,有受者恥之。服父母喪三年,兄弟逾月除。俗多淫祠,禮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國左有大穴曰神隧,每十月,王皆自祭。人喜學,至窮里廝家,亦相矜勉,衢側悉構嚴屋,號局堂,子弟未婚者曹處,誦經習射。
왕은 다섯 채색 옷을 입고 흰 깁으로 관을 지으며 가죽 띠에는 다 금테를 단다. 대신은 푸른 깁 관, 그다음은 진홍 깁 관인데 두 새 깃을 꽂고 금은을 섞어 달며, 통소매 적삼에 통 큰 바지와 흰 가죽 띠, 누런 가죽신이다. 서민은 갈옷을 입고 고깔을 쓰며, 여자는 머리에 건귁을 쓴다. 풍속이 바둑·투호·축국을 즐긴다. 먹을 때 변·두·보·궤·뇌·세를 쓴다. 사는 곳은 산골에 의지해 풀로 지붕을 이고, 오직 왕궁과 관부와 절만 기와를 쓴다. 가난한 백성은 한겨울에 긴 구들을 만들어 불을 때어 덥힌다. 그 다스림은 준엄한 법으로 아랫사람을 잡죄므로 범하는 이가 적다. 배반한 자는 횃불을 모아 몸을 지진 뒤에 목을 베고 집안을 적몰한다. 항복한 자, 패한 자, 살인하고 겁탈한 자는 목을 베고, 도둑질한 자는 열 배로 갚게 하며, 소나 말을 죽인 자는 노비로 몰수하니, 그러므로 길에서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다. 혼인에 폐백을 쓰지 않으니 받는 자가 있으면 부끄럽게 여긴다. 부모 상은 세 해를 입고 형제는 달을 넘기면 벗는다. 풍속에 음사가 많아 영성과 해와 기자와 가한 등 신을 섬긴다. 나라 왼쪽에 큰 굴이 있어 신수(神隧)라 하는데 시월마다 왕이 다 몸소 제사한다. 사람들이 배우기를 즐겨 미천한 골목의 하인 집까지 서로 삼가 힘쓰며, 길가에 다 튼튼한 집을 지어 국당(局堂)이라 부르니, 혼인 전의 자제들이 무리 지어 지내며 경전을 외고 활쏘기를 익힌다.
5영류왕과 화친
隋末,其王高元死,異母弟建武嗣。武德初,再遣使入朝。高祖下書脩好,約高麗人在中國者護送,中國人在高麗者敕遣還。於是建武悉搜亡命歸有司,且萬人。後三年,遣使者拜爲上柱國、遼東郡王、高麗王。命道士以像法往,爲講《老子》。建武大悅,率國人共聽之,日數千人。帝謂左右曰:「名實須相副。高麗雖臣于隋,而終拒煬帝,何臣之爲?朕務安人,何必受其臣?」裴矩、溫彥博諫曰:「遼東本箕子國,魏晉時故封內,不可不臣。中國與夷狄,猶太陽於列星,不可以降。」乃止。明年,新羅、百濟上書,言建武閉道,使不得朝,且數侵入。有詔散騎侍郎硃子奢持節諭和,建武謝罪,乃請與二國平。太宗已禽突厥頡利,建武遣使者賀,并上封域圖。帝詔廣州司馬長孫師臨瘞隋士戰胔,毀高麗所立京觀。建武懼,乃築長城千里,東北首扶餘,西南屬之海。久之,遣太子桓權入朝獻方物,帝厚賜齎,詔使者陳大德持節答勞,且觀亹。
수나라 말에 왕 고원이 죽고 배다른 아우 건무가 이었다. 무덕 초에 두 번 사신을 보내 입조하였다. 고조가 글을 내려 우호를 닦고, 중국에 있는 고려 사람은 호송하고 고려에 있는 중국 사람은 칙으로 돌려보내기로 약속하였다. 이에 건무가 떠돌던 이들을 다 찾아 유사에 돌려보내니 거의 만 명이었다. 세 해 뒤에 사자를 보내 상주국·요동군왕·고려왕에 제수하고, 도사에게 명해 천존상을 가지고 가서 노자를 강하게 하니, 건무가 크게 기뻐하여 나라 사람을 거느리고 함께 들었는데 날마다 수천 명이었다. 황제가 좌우에 「이름과 실상은 서로 맞아야 한다. 고려가 수나라에 신하라 했어도 끝내 양제를 막았으니 무슨 신하인가. 짐은 사람 편안케 하기를 힘쓸 뿐이니 하필 그 신하 노릇을 받으랴」 하니, 배구와 온언박이 간하였다. 「요동은 본디 기자의 나라요 위·진 때의 옛 봉역 안이니 신하 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국과 이적은 태양과 뭇별 같으니 낮출 수 없습니다.」 이에 그만두었다. 이듬해 신라와 백제가 글을 올려, 건무가 길을 닫아 조회하지 못하게 하고 또 자주 침입한다고 말하였다. 조서로 산기시랑 주자사가 부절을 가지고 화해를 타이르니, 건무가 사죄하고 두 나라와 화평하기를 청하였다. 태종이 돌궐 힐리를 사로잡자 건무가 사자를 보내 하례하고 아울러 봉역도를 올렸다. 황제가 조서로 광주사마 장손사에게 수나라 군사의 드러난 해골을 묻고 고려가 세운 경관을 헐게 하였다. 건무가 두려워 이에 장성 천 리를 쌓으니, 동북은 부여에서 시작해 서남은 바다에 닿았다. 한참 뒤 태자 환권을 보내 입조해 방물을 바치니, 황제가 두터이 상을 내리고 조서로 사자 진대덕에게 부절을 가지고 답례로 위로하며 아울러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6진대덕의 정탐
大德入其國,厚餉官守,悉得其纖曲。見華人流客者,爲道親戚存亡,人人垂涕,故所至士女夾道觀。建武盛陳兵見使者。大德還奏,帝悅。大德又言:「聞高昌滅,其大對廬三至館,有加禮焉。」帝曰:「高麗地止四郡,我發卒數萬攻遼東,諸城必救,我以舟師自東萊帆海趨平壤,固易。然天下甫平,不欲勞人耳。」
대덕이 그 나라에 들어가 지키는 관원들에게 두터이 선물하니 세세한 것까지 다 알아냈다. 떠돌다 눌러사는 화인(華人)들을 보면 친척의 생사를 말해 주니 사람마다 눈물을 흘렸고, 그래서 이르는 곳마다 남녀가 길을 끼고 구경하였다. 건무는 군사를 성대히 벌이고 사자를 만났다. 대덕이 돌아와 아뢰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대덕이 또 「고창이 망했다는 말을 듣자 그 대대로가 세 번 객관에 와서 예를 더했습니다」 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고려는 땅이 네 군에 그친다. 내가 군사 수만을 내어 요동을 치면 여러 성이 반드시 구원하리니, 내가 수군으로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나아가면 참으로 쉽다. 그러나 천하가 갓 평정되어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7개소문의 정변
有蓋蘇文者,或號蓋金,姓泉氏,自云生水中以惑衆。性忍暴。父爲東部大人、大對廬,死。蓋蘇文當嗣,國人惡之,不得立。頓首謝衆,請攝職,有不可,雖廢無悔。衆哀之,遂嗣位。殘凶不道,諸大臣與建武議誅之,蓋蘇文覺,悉召諸部,紿雲大閱兵,列饌具請大臣臨視,賓至盡殺之,凡百餘人。馳入宮殺建武,殘其屍投諸溝。更立建武弟之子藏爲王,自爲莫離支,專國,猶唐兵部尚書、中書令職云。貌魁秀,美須髯,冠服皆飾以金,佩五刀,左右莫敢仰視。使貴人伏諸地,踐以升馬。出入陳兵,長呼禁切,行人畏竄,至投坑穀。
개소문이라는 자가 있으니 혹 개금이라 부르며 성은 천씨(泉氏)인데, 스스로 물에서 났다고 말해 무리를 홀렸다. 성질이 잔인하고 사나웠다. 아버지가 동부대인 대대로로 죽자 개소문이 이어야 했는데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여 서지 못하니, 머리를 조아려 뭇사람에게 사죄하며 직을 대행하기를 청하고, 안 되겠으면 폐해도 뉘우침이 없겠다 하였다. 뭇사람이 불쌍히 여겨 드디어 자리를 이었다. 잔인하고 흉하여 무도하니 여러 대신이 건무와 의논해 죽이려 하였다. 개소문이 알아채고 여러 부를 다 불러 크게 군사를 사열한다 속이고 음식을 벌여 대신들을 청해 보게 하고는, 손님이 이르자 다 죽이니 무릇 백여 명이었다. 궁으로 달려들어 건무를 죽이고 그 주검을 토막 내어 도랑에 버렸다. 건무의 아우의 아들 장을 다시 세워 왕으로 삼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나라를 오로지하니, 당나라의 병부상서와 중서령 직책 같은 것이라 한다. 모습이 크고 빼어나며 수염이 아름답고, 관과 옷을 다 금으로 꾸미고 칼 다섯을 차니 좌우가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귀인을 땅에 엎드리게 하고 밟고서 말에 올랐다. 드나들 때 군사를 벌이고 길게 소리쳐 행인을 금하니, 사람들이 두려워 달아나다 구덩이와 골짜기에 몸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8상을 틈타 치지 않는다
帝聞建武爲下所殺,惻然遣使者持節弔祭。或勸帝可遂討之,帝不欲因喪伐罪,乃拜藏爲遼東郡王、高麗王。帝曰:「蓋蘇文殺君攘國,朕取之易耳,不願勞人,若何?」司空房玄齡曰:「陛下士勇而力有餘,戢不用,所謂'止戈爲武'者。」司徒長孫無忌曰:「高麗無一介告難,宜賜書安尉之,隱其患,撫其存,彼當聽命。」帝曰:「善。」
황제가 건무가 아랫사람에게 살해되었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며 사자를 보내 부절을 가지고 조문하고 제사하였다. 어떤 이가 이 김에 칠 만하다고 권했으나, 황제는 상을 틈타 죄를 치고 싶지 않다 하여 이에 장을 요동군왕·고려왕에 제수하였다. 황제가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았으니 짐이 취하기는 쉽다. 다만 사람들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은데 어떤가」 하니, 사공 방현령이 「폐하의 군사는 용감하고 힘이 남는데도 거두어 쓰지 않으시니, 이른바 〈창을 그치는 것이 무(武)〉라는 것입니다」 하고, 사도 장손무기는 「고려에서 한 사람도 난을 알려 오지 않았으니, 마땅히 글을 내려 위안하시고 그 근심을 감싸고 남은 이를 어루만지시면 저들이 명을 들을 것입니다」 하니, 황제가 「좋다」 하였다.
9세 가지 계책
會新羅遣使者上書言:「高麗、百濟聯和,將見討。謹歸命天子。」帝問:「若何而免?」使者曰:「計窮矣,惟陛下哀憐!」帝曰:「我以偏兵率契丹、靺鞨入遼東,而國可紓一歲,一策也。我以絳袍丹幟數千賜而國,至,建以陣,二國見,謂我師至,必走,二策也。百濟恃海,不修戎械,我以舟師數萬襲之;而國女君,故爲鄰侮,我以宗室主而國,待安則自守之,三策也。使者計孰取?」使者不能對。於是遣司農丞相里玄獎以璽書讓高麗,且使止勿攻。使未至,而蓋蘇文已取新羅二城。玄獎諭帝旨,答曰:「往隋見侵,新羅乘邅奪我地五百里,今非盡反地,兵不止。」玄獎曰:「往事烏足論邪?遼東故中國郡縣,天子且不取,高麗焉得違詔?」不從。玄獎還奏,帝曰:「莫離支殺君,虐用其下如擭阱,怨痛溢道,我出師無名哉?」諫議大夫褚遂良曰:「陛下之兵度遼而克固善,萬分一不得逞,且再用師,再用師,安危不可億。」兵部尚書李勣曰:「不然。
마침 신라가 사자를 보내 글을 올렸다. 「고려와 백제가 화친을 맺어 곧 치려 하니, 삼가 천자께 목숨을 맡깁니다.」 황제가 「어찌하면 면하겠는가」 물으니, 사자가 「계책이 다했으니 오직 폐하께서 가엾이 여기소서!」 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내가 한 갈래 군사로 거란과 말갈을 거느리고 요동에 들어가면 너희 나라가 한 해를 늦출 수 있으니 한 계책이다. 내가 진홍 도포와 붉은 기 수천을 너희 나라에 주어, 이르거든 진에 세우게 하면 두 나라가 보고 우리 군사가 왔다 여겨 반드시 달아나리니 두 계책이다. 백제는 바다를 믿고 병기를 닦지 않으니 내가 수군 수만으로 습격하고, 너희 나라는 여자가 임금이라 이웃의 업신여김을 받으니 내가 종실로 너희 나라 임금을 삼아 편안해지기를 기다려 스스로 지키게 하면 세 계책이다. 사자는 어느 계책을 취하겠는가?」 사자가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 새서로 고려를 꾸짖고 아울러 치지 말게 하였다. 사신이 이르기 전에 개소문이 이미 신라 두 성을 빼앗았다. 현장이 황제의 뜻을 타이르니 답하였다. 「지난날 수나라의 침입 때 신라가 틈을 타 우리 땅 오백 리를 빼앗았으니, 이제 땅을 다 돌려주지 않으면 군사는 그치지 않소.」 현장이 「지난 일을 어찌 논하겠는가. 요동은 옛 중국 군현인데도 천자께서 취하지 않으시거늘, 고려가 어찌 조서를 어기는가」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현장이 돌아와 아뢰니 황제가 「막리지가 임금을 죽이고 아랫사람을 함정처럼 학대하여 원통함이 길에 넘치니, 내가 군사를 냄에 명분이 없겠는가」 하였다. 간의대부 저수량이 「폐하의 군사가 요수를 건너 이기면 참으로 좋으나, 만에 하나 뜻대로 안 되어 다시 군사를 쓰게 되면, 다시 군사를 쓰면 안위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니, 병부상서 이적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10이적의 반론
曩薛延陀盜邊,陛下欲追擊,魏徵苦諫而止。向若擊之,一馬不生返。後復畔擾,至今爲恨。」帝曰:「誠然。但一慮之失而尤之,後誰爲我計者?」新羅數請援,乃下吳船四百柁輸糧,詔營州都督張儉等發幽、營兵及契丹、奚、靺鞨等出討。會遼溢,師還。莫離支懼,遣使者內金,帝不納。使者又言:「莫離支遣官五十入宿衛。」帝怒責使者曰:「而等委質高武,而不伏節死義,又爲逆子謀,不可赦。」悉下之獄。
지난날 설연타가 변경을 노략할 때 폐하께서 추격하려 하셨는데 위징이 애써 간하여 그만두셨습니다. 그때 쳤더라면 말 한 마리 살아 돌아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뒤에 다시 배반해 소란하니 지금껏 한이 됩니다.」 황제가 「참으로 그렇다. 다만 한 번의 실수를 탓하기만 하면 뒤에 누가 나를 위해 계책을 내겠는가」 하였다. 신라가 자주 구원을 청하니, 이에 오나라 배 사백 척을 내려 군량을 나르게 하고, 조서로 영주도독 장검 등에게 유주·영주 군사와 거란·해·말갈을 내어 나가 치게 하였다. 마침 요수가 넘쳐 군사가 돌아왔다. 막리지가 두려워 사자를 보내 금을 바치니 황제가 받지 않았다. 사자가 또 「막리지가 관원 쉰 명을 보내 숙위하게 하겠답니다」 하니, 황제가 노하여 사자를 꾸짖었다. 「너희는 다 고무(高武·건무)에게 벼슬하고도 절개를 지켜 의리에 죽지 못하고, 또 역적을 위해 꾀하니 용서할 수 없다.」 다 옥에 내렸다.
11친정을 결심하다
於是帝欲自將討之,召長安耆老勞曰:「遼東故中國地,而莫離支賊殺其主,朕將自行經略之,故與父老約:子若孫從我行者,我能拊循之,毋庸恤也。」即厚賜布粟。群臣皆勸帝毋行,帝曰:「吾知之矣,去本而就末,舍高以取下,釋近而之遠,三者爲不祥,伐高麗是也。然蓋蘇文弑君,又戮大臣以逞,一國之人延頸待救,議者顧未亮耳。」於是北輸粟營州,東儲粟古大人城。帝幸洛陽,乃以張亮爲平壤道行軍大總管,常何、左難當副之,冉仁德、劉英行、張文幹、龐孝泰、程名振爲總管,帥江、吳、京、洛募兵凡四萬,吳艘五百,泛海趨平壤。以李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江夏王道宗副之,張士貴、張儉、執失思力、契苾何力、阿史那彌射、薑德本、曲智盛、吳黑闥爲行軍總管隸之,帥騎士六萬趨遼東。詔曰:「朕所過,營頓毋飭,食毋豐怪,水可涉者勿作橋樑,行在非近州縣不得令學生、耆老迎謁。朕昔提戈撥亂,無盈月儲,猶所響風靡。今幸家給人足,只恐勞於轉餉,故驅牛羊以飼軍。且朕必勝有五:以我大擊彼小,以我順討彼逆,以我安乘彼亂,以我逸敵彼勞,以我悅當彼怨,渠憂不克邪!」又發契丹、奚、新羅、百濟諸君長兵悉會。
이에 황제가 스스로 거느리고 치고자 하여 장안의 늙은이들을 불러 위로하며 말하였다. 「요동은 옛 중국 땅인데 막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짐이 몸소 가서 경략하려 한다. 그러므로 부로들과 약속하니, 아들이나 손자로 나를 따라가는 자는 내가 잘 보살필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 곧 베와 곡식을 두터이 내렸다. 뭇 신하가 다 가시지 말기를 권하니, 황제가 「나도 안다. 근본을 버리고 끝을 좇으며,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것을 취하며, 가까운 것을 놓고 먼 데로 가는 셋은 상서롭지 못하니, 고려를 치는 일이 그것이다. 그러나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또 대신을 죽여 방자하니, 온 나라 사람이 목을 늘여 구원을 기다리는데 의논하는 이들이 미처 헤아리지 못할 뿐이다」 하였다. 이에 북으로 영주에 곡식을 나르고 동으로 고대인성에 곡식을 쌓았다. 황제가 낙양에 거둥하여 장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상하·좌난당을 부로, 염인덕·유영행·장문간·방효태·정명진을 총관으로 삼아, 강·오·경·낙에서 모집한 군사 사만과 오나라 배 오백으로 바다에 떠서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강하왕 도종을 부로 삼고, 장사귀·장검·집실사력·계필하력·아사나미사·강덕본·곡지성·오흑달을 행군총관으로 딸려 기병 육만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조서에 일렀다. 「짐이 지나는 곳에 영과 참을 꾸미지 말고 음식을 풍성하고 별나게 하지 말며, 건널 만한 물에는 다리를 놓지 말고, 행재소 가까운 주현이 아니면 학생과 기로가 마중해 뵙지 못하게 하라. 짐이 옛날 창을 들고 어지러움을 다스릴 때 한 달 치 쌓아 둔 것이 없어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하였다. 이제 다행히 집집이 넉넉하니 다만 군량 나르는 수고가 걱정이라, 소와 양을 몰아 군사를 먹인다. 또 짐이 반드시 이길 다섯 가지가 있으니, 우리의 큼으로 저들의 작음을 치고, 우리의 순리로 저들의 거스름을 치고, 우리의 안정으로 저들의 어지러움을 타고, 우리의 편안함으로 저들의 수고로움을 대적하고, 우리의 기쁨으로 저들의 원망을 당하니, 어찌 이기지 못할까 근심하랴!」 또 거란·해·신라·백제 여러 군장의 군사를 내어 다 모이게 하였다.
12정주에서 요동으로
十九年二月,帝自洛陽次定州,謂左右曰:「今天下大定,唯遼東未賓,後嗣因士馬盛強,謀臣導以征討,喪亂方始,朕故自取之,不遺後世憂也。」帝坐城門,過兵,人人撫慰,疾病者親視之,敕州縣治療,士大悅。長孫無忌白奏:「天下符魚悉從,而宮官止十人,天下以爲輕神器。」帝曰:「士度遼十萬,皆去家室。朕以十人從,尚恧其多,公止勿言!」帝身屬橐房,結兩箙於鞍。四月,勣績濟遼水,高麗皆嬰城守。帝大饗士,帳幽州之南,詔長孫無忌誓師,乃引而東。
19년 2월에 황제가 낙양에서 정주에 머물며 좌우에 말하였다. 「이제 천하가 크게 정해졌는데 오직 요동만 복종하지 않는다. 뒷임금이 군사와 말의 강성함을 믿으면 모신들이 정벌로 이끌어 상란이 비로소 일어날 터이니, 짐이 일부러 스스로 취하여 후세에 근심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황제가 성문에 앉아 지나가는 군사를 사람마다 어루만지고 병든 이는 친히 살펴 주현에 칙해 치료하게 하니 군사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장손무기가 「천하의 부어(符魚)가 다 따르는데 궁관은 열 사람뿐이니, 천하가 신기(神器)를 가벼이 여긴다 합니다」 하니, 황제가 「군사 십만이 요수를 건너며 다 집을 떠났다. 짐은 열 사람을 데리고도 오히려 많음이 부끄러운데 공은 더 말하지 말라!」 하였다. 황제가 몸소 화살통을 차고 안장에 우장 두 벌을 매었다. 4월에 이적이 요수를 건너니 고려가 다 성을 닫고 지켰다. 황제가 군사를 크게 먹이고 유주 남쪽에 장막을 치고 조서로 장손무기에게 군사 앞에서 맹세하게 한 뒤 이끌고 동으로 갔다.
13요동성 함락
勣攻蓋牟城,拔之,得戶二萬,糧十萬石,以其地爲蓋州。程名振攻沙卑城,夜入其西,城潰,虜其口八千,遊兵鴨淥上。勣遂圍遼東城。帝次遼澤,詔瘞隋戰士露骼。高麗發新城、國內城騎四萬救遼東。道宗率張乂君逆戰,君乂卻。道宗以騎馳之,虜兵辟易,奪其梁,收散卒,高以望,見高麗陣囂,急擊破之,斬首千餘級,誅君乂以徇。帝度遼水,徹杠彴,堅士心。營馬首山,身到城下,見士填塹,分負之,重者馬上持之'群臣震懼,爭挾塊以進。城有硃蒙祠,祠有鎖甲、銛矛,妄言前燕世天所降。方圍急,飾美女以婦神,誣言硃蒙悅,城必完。勣列拋車,飛大石過三百步,所當輒潰,虜積木爲樓,結絙罔,不能拒。以沖車撞陴屋,碎之。時百濟上金旐鎧,又以玄金爲山五文鎧,士被以從。帝與勣會,甲光炫日。會南風急,士縱火焚西南,熛延城中,屋幾盡,人死于燎者萬餘。衆登陴,虜蒙盾以拒,士舉長矛舂之,藺石如雨,城遂潰,獲勝兵萬,戶四萬,糧五十萬石。以其地爲遼州。初,帝自太子所屬行在,舍置一烽,約下遼東舉烽,是日傳燎入塞。
이적이 개모성을 쳐서 빼앗아 호 이만과 양곡 십만 석을 얻고 그 땅을 개주로 삼았다. 정명진이 사비성을 치는데 밤에 그 서쪽으로 들어가니 성이 무너져 팔천 명을 사로잡고, 유병(遊兵)이 압록강 가에 이르렀다. 이적이 드디어 요동성을 에워쌌다. 황제가 요택에 머물며 조서로 수나라 군사의 드러난 해골을 묻었다. 고려가 신성·국내성의 기병 사만을 내어 요동을 구원하니, 도종이 장군예를 거느리고 맞아 싸우는데 군예가 물러났다. 도종이 기병으로 달려 치니 적병이 물러나 흩어지므로, 그 다리를 빼앗고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높은 데 올라 바라보다가, 고려 진이 소란함을 보고 급히 쳐서 깨뜨려 천여 급을 베고, 군예를 베어 조리돌렸다. 황제가 요수를 건너자 외나무다리를 걷어 군사의 마음을 굳히고 마수산에 진을 쳤다. 몸소 성 아래 이르러 군사들이 해자를 메우는 것을 보고 짐을 나누어 지며 무거운 것은 말 위에서 들으니, 뭇 신하가 놀라고 두려워 다투어 흙덩이를 끼고 나아갔다. 성에 주몽의 사당이 있어 쇠사슬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는데, 전연(前燕) 시대에 하늘이 내린 것이라고 함부로 말하였다. 포위가 급해지자 미녀를 꾸며 여신으로 삼고, 주몽이 기뻐하니 성이 반드시 온전하리라고 무당이 거짓말하였다. 이적이 포차를 벌여 큰 돌을 삼백 걸음 너머로 날리니 맞는 곳마다 무너졌고, 적이 나무를 쌓아 다락을 만들고 밧줄 그물을 얽었으나 막지 못했다. 충차로 성가퀴 위 집을 들이받아 부수었다. 그때 백제가 금휴개를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산 무늬 갑옷을 바쳐 군사들이 입고 따르니, 황제가 이적과 만날 때 갑옷 빛이 해에 번쩍였다. 마침 남풍이 급하자 군사를 놓아 서남 다락에 불을 지르니 불길이 성안까지 번져 집이 거의 다 탔고, 불에 죽은 사람이 만여 명이었다. 군사들이 성가퀴에 오르자 적이 방패를 덮어쓰고 막으니, 군사들이 긴 창으로 찧고 돌이 비오듯 하매 성이 드디어 무너졌다. 씩씩한 군사 만 명과 호 사만과 양곡 오십만 석을 얻고 그 땅을 요주로 삼았다. 처음 황제가 태자 있는 행재소에서부터 여관마다 봉화 하나씩을 두고, 요동이 떨어지면 봉화를 들기로 약속했는데, 이날 횃불을 전해 변방 안으로 들였다.
14백암성의 항복
進攻白崖城,城負山有厓水,險甚。帝壁西北。虜酋孫伐音陰丐降,然城中不能一。帝賜幟曰:「若降,建於堞以信。」俄而舉幟,城人皆以唐兵登矣,乃降。初,伐音中悔,帝怒,約以虜口畀諸將。及是,李勣曰:「士奮而先,貪虜獲也。今城危拔,不可許降以孤士心。」帝曰:「將軍言是也。然縱兵殺戮,略人妻孥,朕不忍。將軍麾下有功者,朕能以庫物賞之,庶因將軍贖一城乎。」獲男女凡萬、兵二千。以其地爲岩州,拜伐音爲刺史。莫離支以加屍人七百戍蓋牟,勣俘之。請自效,帝曰:「而家加屍,乃爲我戰,將盡戮矣。夷一姓求一人力,不可。」稟而縱之。
나아가 백암성을 치니, 성은 산을 지고 물가 벼랑이 있어 몹시 험했다. 황제가 서북에 진을 쳤다. 적의 우두머리 손벌음이 몰래 항복을 빌었으나 성안이 하나 되지 못하였다. 황제가 깃발을 내리며 「항복하겠거든 성가퀴에 세워 미덥게 하라」 하였다. 이윽고 깃발이 오르자 성 사람들이 다 당나라 군사가 오른 줄 알고 이에 항복하였다. 처음 벌음이 중도에 뉘우쳤을 때 황제가 노하여 사로잡는 사람과 재물을 장수들에게 주기로 약속했었다. 이에 이르러 이적이 「군사들이 떨쳐 앞서는 것은 노획을 탐해서입니다. 이제 성이 위태로워 떨어지게 되었는데 항복을 받아 군사들의 마음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황제가 「장군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놓아 죽이고 남의 처자를 노략함은 짐이 차마 못 한다. 장군 휘하의 공 있는 자는 짐이 창고 물건으로 상 줄 수 있으니, 장군에게서 성 하나를 대속하려 한다」 하였다. 남녀 만 명과 군사 이천을 얻고 그 땅을 암주로 삼고 벌음을 자사로 제수하였다. 막리지가 가시 사람 칠백으로 개모를 지키게 했는데 이적이 사로잡으니 스스로 공을 세우겠다 청했으나, 황제가 「너희 집이 가시에 있는데 나를 위해 싸우면 다 도륙되리라. 한 성씨를 멸해 한 사람의 힘을 구함은 안 될 일이다」 하고, 양식을 주어 놓아 보냈다.
15주필산에 진을 치다
次安市。於是高麗北部傉薩高延壽、南部傉薩高惠真引兵及靺鞨衆十五萬來援。帝曰:「彼若勒兵連安市而壁,據高山,取城中粟食之,縱靺鞨略吾牛馬,攻之不可下,此上策也。拔城夜去,中策也。與吾爭鋒,則禽矣。」有大對廬爲延壽計曰:「吾聞中國亂,豪雄並奮,秦王神武,敵無堅,戰無前,遂定天下,南面而帝,北狄、西戎罔不臣。今掃地而來,謀臣重將皆在,其鋒不可校。今莫若頓兵曠日,陰遣奇兵絕其餉道,不旬月糧盡,欲戰不得,歸則無路,乃可取也。」延壽不從,引軍距安市四十里而屯。帝曰:「虜墮吾策中矣。」命左衛大將軍阿史那社爾以突厥千騎嘗之,虜常以靺鞨銳兵居前,社爾兵接而北。延壽曰:「唐易與耳。」進一舍,倚麓而陣。帝詔延壽曰:「我以爾有強臣賊殺其主,來問罪,即交戰,非我意。」延壽謂然,按甲俟。帝夜召諸將,使李勣率步騎萬五千陣西嶺當賊,長孫無忌、牛進達精兵萬人出虜背狹穀,帝以騎四千偃幟趨虜北山上,令諸軍曰:「聞鼓聲而縱。
안시에 이르렀다. 이에 고려 북부 욕살 고연수와 남부 욕살 고혜진이 군사와 말갈 무리 십오만을 이끌고 구원하러 왔다. 황제가 말하였다. 「저들이 군사를 묶어 안시에 잇대어 벽을 쌓고 높은 산에 웅거하여 성안 곡식을 먹으며, 말갈을 놓아 우리 소와 말을 노략하면, 쳐도 떨어뜨릴 수 없으니 이것이 상책이다. 성을 빼내어 밤에 달아나면 중책이다. 우리와 칼끝을 다투면 사로잡힐 뿐이다.」 대대로 하나가 연수에게 꾀를 내었다. 「내 들으니 중국이 어지러워 호걸이 다투어 일어났는데, 진왕은 신령한 무용으로 대적하면 굳센 이가 없고 싸우면 앞을 막는 이가 없어 드디어 천하를 정하고 남면하여 황제가 되니, 북적과 서융이 신하 되지 않음이 없다 하오. 이제 온 나라를 쓸어 왔고 모신과 중장이 다 있으니 그 칼끝을 견줄 수 없소. 이제 군사를 눌러 날을 끌면서 몰래 기병(奇兵)을 보내 군량 길을 끊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열흘 한 달이 못 되어 양식이 다하면 싸우려도 못 하고 돌아가려도 길이 없어 이에 이길 수 있소.」 연수가 따르지 않고 군사를 이끌어 안시 사십 리 밖에 주둔하였다. 황제가 「적이 내 꾀 안에 떨어졌다」 하고, 좌위대장군 아사나사이에게 돌궐 기병 천으로 찔러 보게 하니, 적은 늘 말갈 정예를 앞에 두는데 사이의 군사가 맞붙자 물러났다. 연수가 「당나라는 상대하기 쉽다」 하고 삼십 리를 나아가 산기슭에 의지해 진을 쳤다. 황제가 연수에게 조서하기를 「나는 너희 강신(強臣)이 제 임금을 죽였기에 죄를 물으러 왔다. 맞붙어 싸우는 것은 내 뜻이 아니다」 하니, 연수가 그런가 하여 군사를 눌러 두고 기다렸다. 황제가 밤에 여러 장수를 불러, 이적에게 보병·기병 만 오천으로 서쪽 고개에 진 쳐 적을 맡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은 정병 만 명으로 적의 등 뒤 좁은 골짜기로 나가게 하고, 황제는 기병 사천에 깃발을 눕히고 적의 북쪽 산 위로 나아가며, 여러 군에 명하였다. 「북소리를 듣거든 일제히 나서라.」
16이만 급을 베다
」張幄朝堂,曰:「明日日中,納降虜於此。」是夜,流星墮延壽營。旦日,虜視勣軍少,即戰。帝望無忌軍塵上,命鼓角作,兵幟四合,虜惶惑,將分兵禦之,衆已囂。勣以步槊擊敗之,無忌乘其後,帝自山馳下,虜大亂,斬首二萬級。延壽收餘衆負山自固,無忌、勣合圍之,徹川梁,斷歸路。帝按轡觀虜營壘曰:「高麗傾國來,一麾而破,天贊我也。」下馬再拜,謝況于天。延壽等度勢窮,即舉衆降。入轅門,膝而前,拜手請命。帝曰:「後敢與天子戰乎?」惶汗不得對。帝料酋長三千五百人,悉官之,許內徙,餘衆三萬縱還之,誅靺鞨三千餘人,獲馬牛十萬,明光鎧萬領。高麗震駭,後黃、銀二城自拔去,數百里無舍煙。乃驛報太子,并賜諸臣書曰:「朕自將若此,云何?」因號所幸山爲駐蹕山,圖破陣狀,勒石紀功。拜延壽鴻臚卿,惠真司農卿。候騎獲覘人,帝解其縛,自言不食且三日,命飼之,賜以屩,遣曰:「歸語莫離支,若須軍中進退,可遣人至吾所。」帝每營不作塹壘,謹斥候而已,而士運糧,雖單騎,虜不敢鈔。
조당에 장막을 치게 하고 「내일 한낮에 항복한 오랑캐를 여기에 들이리라」 하였다. 이날 밤 유성이 연수의 진영에 떨어졌다. 아침에 적이 이적의 군사가 적음을 보고 곧 싸우려 하였다. 황제가 무기의 군사 먼지가 이는 것을 바라보고 북과 나팔을 울리고 깃발을 사방에서 모으게 하니, 적이 어리둥절하여 군사를 나누어 막으려 했으나 무리가 이미 소란하였다. 이적이 보병 창으로 쳐서 깨뜨리고 무기가 그 뒤를 타니, 황제가 산에서 달려 내려오매 적이 크게 어지러워 이만 급을 베었다. 연수가 남은 무리를 거두어 산을 지고 스스로 굳히니, 무기와 이적이 합쳐 에워싸고 내의 다리를 걷어 돌아갈 길을 끊었다. 황제가 고삐를 당기고 적의 진영을 살펴보며 「고려가 나라를 기울여 왔는데 한 번 휘둘러 깨뜨렸으니 하늘이 나를 도움이라」 하고, 말에서 내려 두 번 절하여 하늘에 사례하였다. 연수 등이 형세가 다함을 헤아려 곧 무리를 들어 항복하고, 원문에 들어와 무릎걸음으로 나아가 절하며 명을 청하였다. 황제가 「이 뒤에도 감히 천자와 싸우겠는가」 하니, 두려워 땀 흘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황제가 추장 삼천오백 명을 가려 다 벼슬을 주고 안으로 옮기기를 허락하고, 남은 무리 삼만은 놓아 돌려보내고, 말갈 삼천여 명은 베었으며, 말과 소 십만과 명광개 만 벌을 얻었다. 고려가 놀라 떨어 뒤에 황성·은성 두 성이 스스로 비우고 달아나니 수백 리에 밥 짓는 연기가 없었다. 이에 역마로 태자에게 알리고 아울러 신하들에게 글을 내려 「짐이 몸소 거느림이 이와 같으니 어떠한가」 하였다. 그리하여 머문 산을 주필산이라 이름하고 진 깨뜨린 모양을 그림으로 그리고 돌에 새겨 공을 기록하였다. 연수를 홍려경, 혜진을 사농경에 제수하였다. 척후 기병이 정탐꾼을 잡으니 황제가 결박을 풀어 주었는데, 스스로 사흘을 못 먹었다 하므로 먹이게 하고 짚신을 내려 보내며 「돌아가 막리지에게 전하라. 군중의 나아가고 물러남이 궁금하거든 내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도 좋다」 하였다. 황제는 진영마다 참호와 보루를 만들지 않고 척후만 삼갔는데, 군사가 양식을 나르며 한 필 말로 다녀도 적이 감히 노략하지 못했다.
17안시성 공방
帝與勣議所攻,帝曰:「吾聞安市地險而衆悍,莫離支擊不能下,因與之。建安恃險絕,粟多而士少,若出其不意攻之,不相救矣。建安得,則安市在吾腹中。」勣曰:「不然。積糧遼東,而西擊建安,賊將梗我歸路,不如先攻安市。」帝曰:「善。」遂攻之,未能下。延壽、惠真謀曰:「烏骨城傉薩已耄,朝攻而夕可下。烏骨拔,則平壤舉矣。」群臣亦以張亮軍在沙城,召之一昔至,若取烏骨,度鴨淥,迫其腹心,計之善者。無忌曰:「天子行師不徼幸。安市衆十萬在吾後,不如先破之,乃驅而南,萬全勢也。」乃止。城中見帝旌麾,輒乘陴噪,帝怒。勣請破日男子盡誅。虜聞,故死戰。江夏王道宗築距闉攻東南,虜增陴以守。勣攻其西,撞車所壞,隨輒串柵爲樓。帝聞城中雞彘聲,曰:「圍久,突無黔煙。今雞彘鳴,必殺以饗士,虜且夜出。」詔嚴兵。丙夜,虜數百人縋而下,悉禽之。道宗以樹枚裹土積之,距闉成,迫城不數丈,果毅都尉傅伏愛守之,自高而排其城,城且頹,伏愛私去所部,虜兵得自頹城出,據而塹斷之,積火縈盾固守。帝怒,斬伏愛,敕諸將擊之,三日不克。
황제가 이적과 칠 곳을 의논하며 말하였다. 「내 들으니 안시는 땅이 험하고 무리가 사나워 막리지가 쳐도 떨어뜨리지 못해 그대로 맡겼다 한다. 건안은 험함만 믿고 곡식은 많은데 군사가 적으니, 뜻밖에 나가 치면 서로 구원하지 못하리라. 건안을 얻으면 안시는 내 뱃속에 있다.」 이적이 「그렇지 않습니다. 군량을 요동에 쌓아 두고 서쪽으로 건안을 치면 적이 우리 돌아갈 길을 막을 터이니, 먼저 안시를 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황제가 「좋다」 하고 드디어 쳤으나 떨어뜨리지 못했다. 연수와 혜진이 꾀하기를 「오골성 욕살이 이미 늙었으니 아침에 치면 저녁에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오골이 빠지면 평양도 함락됩니다」 하고, 신하들도 장량의 군사가 사성에 있으니 부르면 하룻밤에 이를 터, 오골을 취하고 압록을 건너 그 심복을 다그침이 좋은 계책이라 하였다. 무기가 「천자의 행군은 요행을 바라지 않습니다. 안시의 무리 십만이 우리 뒤에 있으니 먼저 깨뜨린 뒤에 몰아 남으로 가는 것이 만전의 형세입니다」 하니 이에 그만두었다. 성안이 황제의 깃발을 보면 문득 성가퀴에 올라 소리 지르니 황제가 노하였다. 이적이 깨뜨리는 날 남자를 다 죽이기를 청하니, 적이 듣고 일부러 죽기로 싸웠다. 강하왕 도종이 거인(距闉·흙산)을 쌓아 동남을 치니 적이 성가퀴를 돋우어 지켰다. 이적이 서쪽을 치는데 충차에 무너지는 대로 문득 목책을 얽어 다락을 만들었다. 황제가 성안의 닭과 돼지 소리를 듣고 「에워싼 지 오래라 굴뚝에 연기가 없더니, 이제 닭과 돼지가 우니 반드시 잡아 군사를 먹이는 것이라, 적이 밤에 나오리라」 하고 조서로 군사를 엄히 하였다. 한밤에 적 수백 명이 줄을 타고 내려오니 다 사로잡았다. 도종이 나뭇단에 흙을 싸서 쌓아 거인이 이루어져 성에 몇 길 안 되게 다가갔는데, 과의도위 부복애가 지키다가, 흙산이 높아지며 성을 밀어 성이 무너지려는 즈음 복애가 사사로이 부서를 떠났다. 적병이 무너진 성으로 나와 차지하고 참호로 끊고 불을 쌓고 방패를 둘러 굳게 지켰다. 황제가 노하여 복애를 베고 여러 장수에게 치라 칙했으나 사흘이 되도록 이기지 못했다.
18눈 속의 회군
有詔班師,拔遼、蓋二州之人以歸。兵過城下,城中屏息偃旗,酋長登城再拜,帝嘉其守,賜絹百匹。遼州粟尚十萬斛,士取不能盡。帝至渤錯水,阻淖,八十里車騎不通。長孫無忌、楊師道等率萬人斬樵築道,聯車爲梁,帝負薪馬上助役。十月,兵畢度,雪甚,詔屬燎以待濟。始行,士十萬,馬萬匹;逮還,物故裁千余,馬死十八。船師七萬,物故亦數百。詔集戰骸葬柳城,祭乙太牢,帝臨哭,從臣皆流涕。帝總飛騎入臨渝關,皇太子迎道左。初,帝與太子別,御褐袍,曰:「俟見爾乃更。」袍曆二時弗易,至穿穴。群臣請更服,帝曰:「士皆敝衣,吾可新服邪?」及是,太子進潔衣,乃御。遼降口萬四千,當沒爲奴婢,前集幽州,將分賞士。帝以父子夫婦離析,詔有司以布帛贖之,原爲民,列拜歡舞,三日不息。延壽既降,以憂死,獨惠真至長安。
조서로 군사를 돌리며 요주·개주 두 주의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군사가 성 아래를 지나니 성안이 숨을 죽이고 깃발을 눕혔으며, 추장이 성에 올라 두 번 절하였다. 황제가 그 지킴을 가상히 여겨 비단 백 필을 내렸다. 요주에 곡식이 아직 십만 곡이라 군사들이 다 가져가지 못했다. 황제가 발착수에 이르니 진창에 막혀 팔십 리에 수레와 기병이 통하지 못했다. 장손무기와 양사도 등이 만 명을 거느리고 나무를 베어 길을 쌓고 수레를 이어 다리를 만드는데, 황제가 말 위에서 섶을 지고 일을 도왔다. 10월에 군사가 다 건너자 눈이 몹시 내리니, 조서로 횃불을 이어 건너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처음 떠날 때 군사 십만에 말 만 필이더니 돌아옴에 죽은 이는 겨우 천여 명이요 말은 열에 여덟이 죽었다. 수군 칠만에도 죽은 이가 또한 수백이었다. 조서로 싸우다 죽은 해골을 유성에 모아 장사하고 태뢰로 제사하니, 황제가 곡에 임하매 따르는 신하가 다 눈물을 흘렸다. 황제가 나는 기병을 거느리고 임유관에 들어가니 황태자가 길 왼쪽에서 맞았다. 처음 황제가 태자와 헤어질 때 갈색 도포를 입으며 「너를 다시 보아야 갈아입으리라」 했는데, 도포가 두 철을 지나도록 갈지 않아 구멍이 났다. 신하들이 갈아입기를 청하니 「군사들 옷이 다 해졌는데 내가 새 옷을 입으랴」 하다가, 이에 이르러 태자가 깨끗한 옷을 올리니 입었다. 요동의 항복한 사람 만 사천 명은 노비로 몰수되어 유주에 미리 모아 군사들에게 나누어 줄 참이었는데, 황제가 아비와 자식, 지아비와 지어미가 흩어짐을 딱하게 여겨 유사에 조서해 베와 비단으로 대속하여 백성으로 놓아주니, 늘어서 절하고 기뻐 춤추며 사흘을 그치지 않았다. 연수는 항복한 뒤 근심으로 죽고 혜진만 장안에 이르렀다.
19두 미인을 돌려보내다
明年春,藏遣使者上方物,且謝罪;獻二姝口,帝敕還之,謂使者曰:「色者人所重,然湣其去親戚以傷乃心,我不取也。」初,師還,帝以弓服賜蓋蘇文,受之,不遣使者謝,於是下詔削棄朝貢。
이듬해 봄에 장이 사자를 보내 방물을 올리고 사죄하며 미인 둘을 바쳤는데, 황제가 칙으로 돌려보내며 사자에게 「미색은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바나, 친척과 헤어져 마음 상할 것을 딱하게 여기니 나는 취하지 않는다」 하였다. 처음 군사가 돌아올 때 황제가 활과 옷을 개소문에게 내렸는데, 받고도 사자를 보내 사례하지 않으니 이에 조서를 내려 조공을 깎아 끊었다.
20우진달과 이적의 재침
又明年三月,詔左武衛大將軍牛進達爲青丘道行軍大總管,右武衛將軍李海岸副之,自萊州度海;李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右武衛將軍孫貳朗、右屯衛大將軍鄭仁泰副之,率營州都督兵,繇新城道以進。次南蘇、木底,虜兵戰不勝,焚其郛。七月,進達等取石城,進攻積利城,斬級數千,乃皆還。藏遣子莫離支高任武來朝,因謝罪。
또 이듬해 3월에 조서로 좌무위대장군 우진달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우무위장군 이해안을 부로 삼아 내주에서 바다를 건너게 하고,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우무위장군 손이랑과 우둔위대장군 정인태를 부로 삼아 영주도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성길로 나아가게 하였다. 남소·목저에 이르니 적병이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매 그 외성을 불살랐다. 7월에 진달 등이 석성을 취하고 나아가 적리성을 쳐서 수천 급을 베고 다 돌아왔다. 장이 아들 막리지 고임무를 보내 조회하고 사죄하였다.
21설만철과 신라의 배
二十二年,詔右武衛大將軍薛萬徹爲青丘道行軍大總管,右衛將軍裴行方副之,自海道入。部將古神感與虜戰曷山,虜潰;虜乘暝襲我舟,伏兵破之。萬徹度鴨淥,次泊灼城,拒四十里而舍。虜懼,皆棄邑居去。大酋所夫孫拒戰,萬徹擊斬之,遂圍城,破其援兵三萬,乃還。帝與長孫無忌計曰:「高麗困吾師之入,戶亡耗,田歲不收,蓋蘇文築城增陴,下饑臥死溝壑,不勝敝矣。明年以三十萬衆,公爲大總管,一舉可滅也。」乃詔劍南大治船,蜀人願輸財江南,計直作舟,舟取縑千二百。巴、蜀大騷,邛、眉、雅三州獠皆反,發隴西、峽內兵二萬擊定之。始,帝決取虜,故詔陝州刺史孫伏伽、萊州刺史李道裕儲糧械於三山浦、烏胡島,越州都督治大艎偶舫以待。會帝崩,乃皆罷。藏遣使者奉慰。
22년에 조서로 우무위대장군 설만철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우위장군 배행방을 부로 삼아 바닷길로 들어가게 하였다. 부장 고신감이 적과 갈산에서 싸우니 적이 무너졌고, 적이 어둠을 타 우리 배를 습격했으나 복병이 깨뜨렸다. 만철이 압록을 건너 박작성에 이르러 사십 리 밖에 진을 치니, 적이 두려워 다 읍락을 버리고 달아났다. 대추장 소부손이 막아 싸우니 만철이 쳐서 베고 드디어 성을 에워싸 그 구원병 삼만을 깨뜨리고 돌아왔다. 황제가 장손무기와 꾀하여 말하였다. 「고려가 우리 군사의 들어감에 시달려 호구가 줄고 밭은 해마다 거두지 못하며, 개소문은 성을 쌓고 성가퀴를 더하나 아래는 굶주려 도랑과 구렁에 쓰러져 누우니 피폐함을 이기지 못한다. 명년에 삼십만 무리로 공을 대총관 삼으면 한 번에 멸할 수 있다.」 이에 검남에 조서해 배를 크게 짓게 하니, 촉 사람들이 재물을 강남에 내어 값을 쳐서 배를 만들었는데 배 하나에 비단 천이백 필이 들었다. 파·촉이 크게 소란하여 공주·미주·아주 세 주의 요(獠)가 다 배반하니, 농서와 협내 군사 이만을 내어 쳐서 안정시켰다. 처음 황제가 적을 취하기로 결심하고 조서로 섬주자사 손복가와 내주자사 이도유에게 양식과 기계를 삼산포와 오호도에 쌓게 하고, 월주도독에게 큰 배와 짝배를 지어 기다리게 했는데, 마침 황제가 붕어하자 다 그만두었다. 장이 사자를 보내 위문을 받들었다.
22고종 대의 공방
永徽五年,藏以靺鞨兵攻契丹,戰新城。大風,矢皆還激,爲契丹所乘,大敗。契丹火野復戰,人死相藉,積屍而塚之。遣使者告捷,高宗爲露布於朝。六年,新羅訴高麗、靺鞨奪三十六城,惟天子哀救。有詔營州都督程名振、左衛中郎將蘇定方率師討之。至新城,敗高麗兵,火外郛及墟落,引還。顯慶三年,復遣名振率薛仁貴攻之,未能克。後二年,天子已平百濟,乃以左驍衛大將軍契苾力何、右武衛大將軍蘇定方、左驍衛將軍劉伯英率諸將出浿江、遼東、平壤道討之。龍朔元年,大募兵,拜置諸將,天子欲自行,蔚州刺史李君球建言:「高麗小丑,何至傾中國事之?有如高麗既滅,必發兵以守,少發則威不振,多發人不安,是天下疲於轉戍。臣謂征之未如勿征,滅之未如勿滅。」亦會武后苦邀,帝乃止。八月,定方破虜兵于浿江,奪馬邑山,遂圍平壤。明年,龐孝泰以嶺南兵壁蛇水,蓋蘇文攻之,舉軍沒;定方解而歸。
영휘 오년에 장이 말갈 군사로 거란을 쳐서 신성에서 싸웠다. 큰 바람에 화살이 다 되돌아 날리니 거란이 그 틈을 타서 크게 패하였다. 거란이 들에 불을 지르고 다시 싸우니 죽은 사람이 서로 깔려 주검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다. 사자를 보내 승첩을 알리니 고종이 조정에 노포(露布)를 붙였다. 6년에 신라가 고려와 말갈이 서른여섯 성을 빼앗았다고 하소연하며 천자의 구원을 빌었다. 조서로 영주도독 정명진과 좌위중랑장 소정방이 군사를 거느리고 치니, 신성에 이르러 고려 군사를 깨뜨리고 외성과 마을을 불사르고 돌아왔다. 현경 삼년에 다시 명진을 보내 설인귀를 거느리고 쳤으나 이기지 못했다. 두 해 뒤 천자가 백제를 평정하고 이에 좌효위대장군 계필하력, 우무위대장군 소정방, 좌효위장군 유백영에게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패강·요동·평양도로 나가 치게 하였다. 용삭 원년에 크게 군사를 모집하고 여러 장수를 임명하며 천자가 스스로 가려 하니, 울주자사 이군구가 건의하였다. 「고려는 하찮은 무리인데 어찌 중국을 기울여 상대하십니까. 고려가 멸망하면 반드시 군사를 내어 지켜야 하니, 적게 내면 위엄이 떨치지 못하고 많이 내면 사람들이 불안하여, 천하가 수자리 나르기에 지칠 것입니다. 신은 치는 것이 치지 않음만 못하고 멸함이 멸하지 않음만 못하다 하겠습니다.」 마침 무후도 애써 말리니 황제가 이에 그만두었다. 8월에 정방이 패강에서 적병을 깨뜨리고 마읍산을 빼앗아 드디어 평양을 에워쌌다. 이듬해 방효태가 영남 군사로 사수에 벽을 쌓았다가 개소문이 치니 온 군사가 죽었고, 정방도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23남생이 항복하다
乾封元年,藏遣子男福從天子封泰山,還而蓋蘇文死,子男生代爲莫離支,有弟男建、男產相怨。男生據國內城,遣子獻誠入朝求救,蓋蘇文弟淨土亦請割地降。乃詔契苾何力爲遼東道安撫大使,左金吾衛將軍龐同善、營州都督高偘爲行軍總管,左武衛將軍薛仁貴、左監門將軍李謹行殿而行。九月,同善破高麗兵,男生率師來會。詔拜男生特進、遼東大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封玄菟郡公。又以李勣爲遼東道行軍大總管兼安撫大使,與契苾何力、龐同善并力。詔獨孤卿云由鴨淥道,郭待封積利道,劉仁願畢列道,金待問海穀道,並爲行軍總管,受勣節度;轉燕、趙食廥遼東。明年正月,勣引道次新城,合諸將謀曰:「新城,賊西鄙,不先圖,餘城未易下。」遂壁西南山臨城,城人縛戍酋出降。勣進拔城十有六。郭待封以舟師濟海,趨平壤。三年二月,勣率仁貴拔扶餘城,它城三十皆納款。
건봉 원년에 장이 아들 남복을 보내 천자를 따라 태산에 봉선했는데, 돌아오자 개소문이 죽고 아들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었다. 아우 남건·남산과 서로 원망하여, 남생이 국내성에 웅거하며 아들 헌성을 보내 입조시켜 구원을 구하고, 개소문의 아우 정토도 땅을 떼어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조서로 계필하력을 요동도안무대사로 삼고, 좌금오위장군 방동선과 영주도독 고간을 행군총관으로, 좌무위장군 설인귀와 좌감문장군 이근행을 후군으로 삼아 가게 하였다. 9월에 동선이 고려 군사를 깨뜨리니 남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만났다. 조서로 남생에게 특진·요동대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를 제수하고 현도군공에 봉하였다. 또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아 계필하력·방동선과 힘을 합치게 하였다. 조서로 독고경운은 압록도, 곽대봉은 적리도, 유인원은 필렬도, 김대문은 해곡도로 나아가 다 행군총관이 되어 이적의 지휘를 받게 하고, 연·조의 창고 곡식을 요동으로 날랐다. 이듬해 정월에 이적이 길을 이끌어 신성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꾀하여 「신성은 적의 서쪽 변방이니 먼저 도모하지 않으면 남은 성을 쉽게 떨어뜨릴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서남산에 벽을 쌓고 성에 임하니, 성 사람들이 지키던 우두머리를 묶고 나와 항복하였다. 이적이 나아가 성 열여섯을 빼앗았다. 곽대봉은 수군으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나아갔다. 3년 2월에 이적이 설인귀를 거느리고 부여성을 빼앗으니 다른 성 서른이 다 항복하였다.
24가언충의 예언
同善、偘守新城,男建遣兵襲之,仁貴救偘,戰金山,不勝。高麗鼓而進,銳甚。仁貴橫擊,大破之,斬首五萬級,拔南蘇、木底、蒼岩三城,引兵略地,與勣會。侍御史賈言忠計事還,帝問軍中云何。對曰:「必克。昔先帝問罪,所以不得志者,虜未有邅也。諺曰:'軍無媒,中道回'。今男生兄弟鬩很,爲我鄉導,虜之情偽,我盡知之,將忠士力,臣故曰必克。且高麗祕記曰:'不及九百年,當有八十大將滅之。'高氏自漢有國,今九百年,勣年八十矣。虜仍薦饑,人相掠賣,地震裂,狼狐入城,蚡穴于門,人心危駭,是行不再舉矣。」
방동선과 고간이 신성을 지키는데 남건이 군사를 보내 습격하니, 인귀가 간을 구원하러 금산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고려가 북을 울리며 나아가니 기세가 몹시 날카로웠다. 인귀가 옆에서 치니 크게 깨뜨려 오만 급을 베고 남소·목저·창암 세 성을 빼앗고, 군사를 이끌고 땅을 경략하여 이적과 만났다. 시어사 가언충이 일을 살피고 돌아오니 황제가 군중이 어떠냐고 물었다. 대답하였다. 「반드시 이깁니다. 옛날 선제께서 죄를 물으시고도 뜻을 얻지 못하신 것은 적에게 아직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에 길잡이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온다〉 합니다. 이제 남생 형제가 집안싸움으로 우리 길잡이가 되어 적의 사정과 허실을 우리가 다 알고, 장수는 충성스럽고 군사는 힘쓰니, 신이 그래서 반드시 이긴다 하는 것입니다. 또 고려의 비기(祕記)에 〈구백 년이 못 되어 팔십 대장이 멸하리라〉 했는데, 고씨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가져 이제 구백 년이요 이적의 나이 여든입니다. 적은 거듭 흉년이 들어 사람을 노략해 팔고,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에 들며 두더지가 문에 굴을 파니 인심이 흉흉하여, 이번 걸음에 다시 일으킬 일이 없을 것입니다.」
25평양성이 무너지다
男建以兵五萬襲扶餘,勣破之薩賀水上,斬首五千級,俘口三萬,器械牛馬稱之。進拔大行城。劉仁願與勣會,後期,召還當誅,赦流姚州。契苾何力會勣軍於鴨淥,拔辱夷城,悉師圍平壤。九月,藏遣男產率首領百人樹素幡降,且請入朝,勣以禮見。而男建猶固守,出戰數北。大將浮屠信誠遣諜約內應。五日,闔啟,兵噪而入,火其門,鬱焰四興,男建窘急,自刺不殊。執藏、男建等,收凡五部百七十六城,戶六十九萬。詔勣便道獻俘昭陵,凱而還。十二月,帝坐含元殿,引見勣等,數俘於廷。以藏素脅制,赦爲司平太常伯,男產司宰少卿;投男建黔州,百濟王扶餘隆嶺外;以獻誠爲司衛卿,信誠爲銀青光祿大夫,男生右衛大將軍,何力行左衛大將軍,勣兼太子太師,仁貴威衛大將軍。剖其地爲都督府者九,州四十二,縣百。復置安東都護府,擢酋豪有功者授都督、刺史、令,與華官參治。仁貴爲都護,總兵鎮之。是歲郊祭,以高麗平,謝成於天。
남건이 군사 오만으로 부여를 습격하니, 이적이 살하수 가에서 깨뜨려 오천 급을 베고 삼만 명을 사로잡았으며 기계와 소와 말도 그만큼이었다. 나아가 대행성을 빼앗았다. 유인원이 이적과 만나기로 하고 기한에 늦으니 불러 돌려 베려다가 사면하여 요주로 유배하였다. 계필하력이 압록에서 이적의 군사와 만나 욕이성을 빼앗고 온 군사로 평양을 에워쌌다. 9월에 장이 남산을 시켜 우두머리 백 명을 거느리고 흰 기를 들고 항복하며 입조를 청하니, 이적이 예로 맞았다. 남건은 오히려 굳게 지키며 나와 싸웠으나 자주 패했다. 대장인 승려 신성이 첩자를 보내 내응을 약속하고, 닷새 뒤 성문이 열리니 군사가 소리치며 들어가 그 문을 불사르매 불길이 사방에서 일었다. 남건이 다급하여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장과 남건 등을 사로잡으니, 거둔 것이 무릇 다섯 부, 백일흔여섯 성, 호 육십구만이었다. 조서로 이적이 가는 길에 소릉에 포로를 바치게 하고 개선해 돌아왔다. 12월에 황제가 함원전에 앉아 이적 등을 인견하고 뜰에서 포로를 헤아렸다. 장은 본디 협박당했다 하여 사면해 사평태상백으로 삼고, 남산은 사재소경, 남건은 검주에 귀양 보내고, 백제왕 부여륭은 영외로 보냈다. 헌성을 사위경으로, 신성을 은청광록대부로, 남생을 우위대장군으로, 하력을 행좌위대장군으로 삼고, 이적에게 태자태사를 겸하게 하고 인귀를 위위대장군으로 삼았다. 그 땅을 갈라 도독부 아홉과 주 마흔둘과 현 백을 만들고, 다시 안동도호부를 두어, 추장 가운데 공 있는 자를 뽑아 도독·자사·현령을 주어 중국 관원과 함께 다스리게 하였다. 인귀가 도호가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진수하였다. 이해 교외 제사에서 고려를 평정했으므로 하늘에 이룸을 아뢰었다.
26검모잠과 안순
總章二年,徙高麗民三萬于江淮、山南。大長鉗牟岑率衆反,立藏外孫安舜爲主。詔高偘東州道,李謹行燕山道,並爲行軍總管討之,遣司平太常伯楊昉綏納亡餘。舜殺鉗牟岑走新羅。偘徙都護府治遼東州,破叛兵于安市,又敗之泉山,俘新羅援兵二千。李謹行破之於發廬河,再戰,俘馘萬計。於是平壤痍殘不能軍,相率奔新羅,凡四年乃平。始,謹行留妻劉守伐奴城,虜攻之,劉擐甲勒兵守,賊引去。帝嘉之,封燕郡夫人。
총장 이년에 고려 백성 삼만을 강회와 산남으로 옮겼다. 대장 검모잠이 무리를 거느리고 배반하여 장의 외손 안순(안승)을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 조서로 고간을 동주도, 이근행을 연산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치게 하고, 사평태상백 양방을 보내 도망한 무리를 다독여 거두었다. 안순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고간이 도호부를 요동주로 옮기고, 배반한 군사를 안시에서 깨뜨리고 또 천산에서 무찔러 신라 구원병 이천을 사로잡았다. 이근행이 발로하에서 깨뜨리고 다시 싸워 사로잡고 벤 것이 만으로 헤아려졌다. 이에 평양의 쇠잔한 무리가 군사를 이루지 못해 서로 이끌고 신라로 달아나니, 무릇 네 해 만에야 평정되었다. 처음 근행이 아내 유씨를 벌노성에 남겨 두었는데 적이 치니, 유씨가 갑옷을 입고 군사를 몰아 지키매 적이 물러갔다. 황제가 가상히 여겨 연군부인에 봉하였다.
27고씨의 끝
儀鳳二年,授藏遼東都督,封朝鮮郡王,還遼東以安餘民,先編僑內州者皆原遣,徙安東都護府於新城。藏與靺鞨謀反,未及發,召還放邛州,廝其人于河南、隴右,弱窶者留安東。藏以永淳初死,贈衛尉卿,葬頡利墓左,樹碑其阡。舊城往往入新羅,遺人散奔突厥、靺鞨,由是高氏君長皆絕。垂拱中,以藏孫寶元爲朝鮮郡王。聖曆初,進左鷹揚衛大將軍,更封忠誠國王,使統安東舊部,不行。明年,以藏子德武爲安東都督,後稍自國。至元和末,遣使者獻樂工云。
의봉 이년에 장에게 요동도독을 제수하고 조선군왕에 봉하여 요동에 돌려보내 남은 백성을 안정시키고, 앞서 내지 주에 옮겨 살던 이들을 다 함께 보냈으며,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겼다. 장이 말갈과 모반을 꾀하다가 일으키기 전에 불려 돌아와 공주에 귀양 가고, 그 사람들은 하남·농우에 흩어졌으며 약하고 가난한 자만 안동에 남았다. 장이 영순 초에 죽으니 위위경을 추증하고 힐리 무덤 왼쪽에 장사하며 그 무덤길에 비를 세웠다. 옛 성들은 이따금 신라에 들어가고 남은 사람들은 돌궐과 말갈로 흩어져 달아나니, 이로써 고씨 군장이 다 끊겼다. 수공 연간에 장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고, 성력 초에 좌응양위대장군으로 올려 충성국왕으로 고쳐 봉하고 안동의 옛 부를 다스리게 했으나 부임하지 못했다. 이듬해 장의 아들 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삼으니 뒤에 차츰 나라를 이루었다. 원화 말에 이르러 사자를 보내 악공을 바쳤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