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新羅
1골품과 화백
新羅,弁韓苗裔也。居漢樂浪地,橫千里,縱三千里,東拒長人,東南日本,西百濟,南瀕海,北高麗。而王居金城,環八里所,衛兵三千人。謂城爲健牟羅,邑在內曰喙評,外曰邑勒。有喙評六,邑勒五十二。朝服尚白,好祠山神。八月望日,大宴齎官吏,射。其建官,以親屬爲上,其族名第一骨、第二骨以自別。兄弟女、姑、姨、從姊妹,皆聘爲妻。王族爲第一骨,妻亦其族,生子皆爲第一骨,不娶第二骨女,雖娶,常爲妾媵。官有宰相、侍中、司農卿、太府令,凡十有七等,第二骨得爲之。事必與衆議,號「和白」,一人異則罷。宰相家不絕祿,奴僮三千人,甲兵牛馬豬稱之。畜牧海中山,須食乃射。息谷米於人,償不滿,庸爲奴婢。王姓金,貴人姓朴,民無氏有名。食用柳杯若銅、瓦。元日相慶,是日拜日月神。男子褐褲。婦長襦,見人必跪,則以手據地爲恭。不粉黛,率美髮以繚首,以珠彩飾之。男子翦發鬻,冒以黑巾。市皆婦女貿販。冬則作灶堂中,夏以食置冰上。畜無羊,少驢、驘,多馬。馬雖高大,不善行。
신라는 변한의 후예다. 한나라 낙랑 땅에 사니 가로 천 리, 세로 삼천 리다. 동으로 장인(長人)에 막히고 동남은 일본, 서는 백제, 남은 바다에 닿고 북은 고려다. 왕은 금성에 사니 둘레 팔 리쯤에 호위 군사 삼천이다. 성을 건모라(健牟羅)라 이르고, 안에 있는 읍을 탁평, 밖에 있는 것을 읍륵이라 하니, 탁평이 여섯이요 읍륵이 쉰둘이다. 조복은 흰빛을 숭상하고 산신에게 제사하기를 좋아한다. 팔월 보름이면 크게 잔치를 베풀어 관리들에게 상 주고 활을 쏜다. 벼슬을 세움에 친속을 위로 삼으니, 그 족속의 이름이 제일골·제이골로 스스로 구별한다. 형제의 딸이나 고모·이모·사촌 자매를 다 아내로 맞는다. 왕족은 제일골이요 아내도 그 족속이며 낳은 아들이 다 제일골이 되는데, 제이골 여자에게 장가들지 않으며 들더라도 늘 첩으로 삼는다. 벼슬에 재상·시중·사농경·태부령이 있고 무릇 열일곱 등급인데 제이골이라야 될 수 있다. 일은 반드시 무리와 의논하니 「화백(和白)」이라 부르며 한 사람이라도 다르면 그만둔다. 재상 집은 녹이 끊이지 않고 종이 삼천 명이며 갑병과 소·말·돼지도 그만큼이다. 바다 가운데 산에 길러 두고 먹을 때면 쏘아 잡는다. 곡식을 남에게 꾸어 주고 갚지 못하면 종으로 삼는다. 왕의 성은 김이요 귀인의 성은 박이며, 백성은 성이 없고 이름만 있다. 그릇은 버들 잔이나 구리·질그릇을 쓴다. 설날 서로 하례하며 이날 해와 달의 신에게 절한다. 남자는 갈옷 바지를 입고, 부인은 긴 저고리를 입으며 사람을 보면 반드시 꿇되 손을 땅에 짚는 것을 공손함으로 삼는다. 분과 눈썹먹을 하지 않고 다 고운 머리를 감아 머리에 두르며 구슬과 채색으로 꾸민다. 남자는 머리를 잘라 팔고 검은 두건을 쓴다. 저자는 다 부녀가 사고판다. 겨울이면 집 안에 부뚜막을 만들고 여름이면 음식을 얼음 위에 둔다. 가축에 양이 없고 나귀와 노새가 적으며 말이 많다. 말은 크지만 잘 걷지 못한다.
2장인국
長人者,人類長三丈,鋸牙鉤爪,黑毛覆身,不火食,噬禽獸,或搏人以食;得婦人,以治衣服。其國連山數十里,有峽,固以鐵闔,號關門,新羅常屯弩士數千守之。
장인(長人)이란 키가 세 길에 톱니 이빨과 갈고리 손톱으로 검은 털이 몸을 덮은 자들이니, 불로 익혀 먹지 않고 새와 짐승을 씹으며 혹 사람을 잡아먹고, 부인을 얻으면 옷을 짓게 한다. 그 나라는 산이 수십 리 이어지는데 골 어귀를 쇠문으로 굳게 닫아 관문이라 부르며, 신라가 늘 쇠뇌 군사 수천을 두어 지킨다.
3원한의 시작
初,百濟伐高麗,來請救,悉兵往破之,自是相攻不置。後獲百濟王殺之,滋結怨。武德四年,王真平遣使者入朝,高祖詔通直散騎侍郎庾文素持節答齎。後三年,拜柱國,封樂浪郡王、新羅王。
처음 백제가 고려를 치러 가며 구원을 청하니 온 군사로 가서 깨뜨렸고, 이로부터 서로 치기를 그치지 않았다. 뒤에 백제왕을 잡아 죽이니 원한이 더욱 맺혔다. 무덕 사년에 왕 진평이 사자를 보내 입조하니, 고조가 조서로 통직산기시랑 유문소에게 부절을 지니고 답례하게 하였다. 세 해 뒤 주국에 제수하고 낙랑군왕·신라왕에 봉하였다.
4성조황고 선덕
貞觀五年,獻女樂二。太宗曰:「比林邑獻鸚鵡,言思鄉,丐還,況於人乎?」付使者歸之。是歲,真平死,無子,立女善德爲王,大臣乙祭柄國。詔贈真平左光祿大夫,賻物段二百。九年,遣使者冊善德襲父封,國人號聖祖皇姑。十七年,爲高麗、百濟所攻,使者來乞師,亦會帝親伐高麗,詔率兵以披虜勢。善德使兵五萬入高麗南鄙,拔水口城以聞。二十一年,善德死,贈光祿大夫,而妹真德襲王。明年,遣子文王及弟伊贊子春秋來朝,拜文王左武衛將軍,春秋特進。因請改章服,從中國制,內出珍服賜之。又詣國學觀釋奠、講論,帝賜所制《晉書》。辭歸,敕三品以上郊餞。
정관 오년에 여악사 둘을 바쳤다. 태종이 「지난번 임읍이 앵무새를 바쳤는데 고향 생각을 말하며 돌아가기를 빌었다. 하물며 사람이랴」 하고 사자에게 딸려 돌려보냈다. 이해에 진평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딸 선덕을 세워 왕으로 삼고 대신 을제가 국정을 잡았다. 조서로 진평에게 좌광록대부를 추증하고 부의 이백 단을 내렸다. 9년에 사자를 보내 선덕을 아버지의 봉작을 잇게 책봉하니, 나라 사람들이 성조황고(聖祖皇姑)라 불렀다. 17년에 고려·백제에게 공격당해 사자가 와서 군사를 빌었는데, 마침 황제가 친히 고려를 치므로 조서로 군사를 거느리고 적의 형세를 갈라놓게 하니, 선덕이 군사 오만을 시켜 고려 남쪽 변경에 들어가 수구성을 빼앗아 아뢰었다. 21년에 선덕이 죽으니 광록대부를 추증하고 그 아우(여동생) 진덕이 왕위를 이었다. 이듬해 아들 문왕과 아우 이찬간 춘추를 보내 조회하니, 문왕에게 좌무위장군을, 춘추에게 특진을 제수하였다. 이어 장복을 고쳐 중국 제도를 따르기를 청하니 궁중에서 진귀한 옷을 내어 주었다. 또 국학에 나아가 석전과 강론을 보니 황제가 지은 진서를 내렸다. 하직하고 돌아갈 때 삼품 이상에게 칙해 교외에서 전송하게 하였다.
5진덕의 태평송
高宗永徽元年,攻百濟,破之,遣春秋子法敏入朝。真德織錦爲頌以獻,曰:「巨唐開洪業,巍巍皇猷昌。止戈成大定,興文繼百王。統天崇雨施,治物體含章。深仁諧日月,撫運邁時康。幡旗既赫赫,鉦鼓何鍠鍠。外夷違命者,翦覆被天殃。淳風凝幽顯,遐邇競呈祥。四時和玉燭,七耀巡萬方。維嶽降宰輔,維帝任忠良。三五成一德,昭我唐家唐。」帝美其意,擢法敏太府卿。
고종 영휘 원년에 백제를 쳐서 깨뜨리고 춘추의 아들 법민을 보내 입조시켰다. 진덕이 비단을 짜서 송(頌)을 지어 바쳤다. 「거대한 당나라 큰 왕업을 여니, 높고 높은 황제의 계책 창성하도다. 싸움을 그쳐 큰 평정을 이루고, 문을 일으켜 백왕을 이었도다. 하늘을 거느려 비 내리는 은혜 숭상하고, 만물을 다스려 머금은 빛을 몸소 하시도다. 깊은 어짊은 해와 달과 어울리고, 시운을 어루만짐은 태평으로 나아가도다. 깃발은 저리도 빛나며, 징과 북은 어찌 그리 우렁찬가. 명을 어기는 바깥 오랑캐는, 잘리고 엎어져 하늘 재앙을 입으리라. 순한 풍속이 그윽한 데나 드러난 데나 엉기고, 멀고 가까운 데서 다투어 상서를 바치도다. 사철은 옥촉처럼 고르고, 해와 달과 뭇별은 만방을 도는도다. 산악의 정기는 재보를 내리시고, 황제는 충량한 이를 쓰시도다. 삼황오제의 덕이 하나 되니, 우리 당나라 황가를 밝히리로다.」 황제가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법민을 태부경으로 올렸다.
6무열왕과 백제 평정
五年,真德死,帝爲舉哀,贈開府儀同三司,賜彩段三百,命太常丞張文收持節弔祭,以春秋襲王。明年,百濟、高麗、靺鞨共伐取其三十城。使者來請救,帝命蘇定方討之,以春秋爲隅夷道行軍總管,遂平百濟。龍朔元年,死,法敏襲王。以其國爲雞林州大都督府,授法敏都督。
5년에 진덕이 죽으니 황제가 애도를 표하고 개부의동삼사를 추증하며 채단 삼백을 내리고, 태상승 장문수에게 부절을 지니고 조문·제사하게 하며 춘추가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듬해 백제·고려·말갈이 함께 쳐서 서른 성을 빼앗으니, 사자가 와서 구원을 청하매 황제가 소정방에게 명해 치게 하고 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드디어 백제를 평정하였다. 용삭 원년에 춘추가 죽고 법민이 왕위를 이었다. 그 나라를 계림주대도독부로 삼고 법민에게 도독을 제수하였다.
7문무왕과 아홉 주
咸亨五年,納高麗叛衆,略百濟地守之。帝怒,詔削官爵,以其弟右驍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仁問爲新羅王,自京師歸國。詔劉仁軌爲雞林道大總管,衛尉卿李弼、右領軍大將軍李謹行副之,發兵窮討。上元二年二月,仁軌破其衆於七重城,以靺鞨兵浮海略南境,斬獲甚衆。詔李謹行爲安東鎮撫大使,屯買肖城,三戰,虜皆北。法敏遣使入朝謝罪,貢篚相望,仁問乃還,辭王,詔復法敏官爵。然多取百濟地,遂抵高麗南境矣。置尚、良、康、熊、全、武、漢、朔、溟九州,州有都督,統郡十或二十,郡有大守,縣有小守。開耀元年,死,子政明襲王。遣使者朝,丐唐禮及它文辭,武后賜《吉凶禮》并文詞五十篇。死,子理洪襲王。死,弟興光襲王。
함형 오년에 고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백제 땅을 경략해 지키니, 황제가 노하여 조서로 관작을 깎고, 그 아우 우효위원외대장군 임해군공 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서울에서 귀국하게 하였다. 조서로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고 위위경 이필과 우령군대장군 이근행을 부로 삼아 군사를 내어 끝까지 쳤다. 상원 이년 2월에 인궤가 칠중성에서 그 무리를 깨뜨리고, 말갈 군사로 바다를 건너 남쪽 지경을 경략하여 베고 사로잡음이 몹시 많았다. 조서로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로 삼아 매초성에 주둔하니, 세 번 싸워 적이 다 달아났다. 법민이 사신을 보내 입조해 사죄하고 공물 바구니가 잇달으니, 인문이 이에 돌아와 왕을 사양하매 조서로 법민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차지하여 드디어 고려 남쪽 지경까지 이르렀다. 상주·양주·강주·웅주·전주·무주·한주·삭주·명주 아홉 주를 두니, 주에는 도독이 있어 군 열이나 스물을 거느리고, 군에는 태수가 있고 현에는 소수가 있다. 개요 원년에 법민이 죽고 아들 정명이 왕위를 이었다. 사자를 보내 조회하며 당례(唐禮)와 다른 글을 비니, 무후가 길흉례와 문사 오십 편을 내렸다. 죽으니 아들 이홍이 잇고, 죽으니 아우 흥광이 이었다.
8군자의 나라
玄宗開元中,數入朝,獻果下馬、朝霞紬、魚牙紬、海豹皮。又獻二女,帝曰:「女皆王姑姊妹,違本俗,別所親,朕不忍留。」厚賜還之。又遣子弟入太學學經術。帝間賜興光瑞文錦、五色羅、紫繡紋袍、金銀精器。興光亦上異狗馬、黃金、美髢諸物。初,渤海靺鞨掠登州,興光擊走之,帝進興光甯海軍大使,使攻靺鞨。二十五年死,帝尤悼之,贈太子太保,命邢璹以鴻臚少卿弔祭。子承慶襲王,詔璹曰:「新羅號君子國,知《詩》、《書》。以卿惇儒,故持節往,宜演經誼,使知大國之盛。」又以國人善棋,詔率府兵曹參軍楊季鷹爲副。國高弈皆出其下,於是厚遺使者金寶。俄冊其妻朴爲妃。承慶死,詔使者臨吊,以其弟憲英嗣王。帝在蜀,遣使溯江至成都朝正月。
현종 개원 연간에 자주 입조하여 과하마·조하주·어아주·바다표범 가죽을 바쳤다. 또 두 여자를 바치니 황제가 「여자들은 다 왕의 고모·자매라, 본속을 어기고 친속과 헤어지니 짐이 차마 붙들지 못하겠다」 하고 두터이 상 주어 돌려보냈다. 또 자제를 태학에 보내 경술을 배우게 하였다. 황제가 이따금 흥광에게 서문금·오색라·자수문포와 금은 그릇을 내리니, 흥광도 진기한 개와 말과 황금과 아름다운 다리(머리채) 등을 올렸다. 처음 발해말갈이 등주를 노략하자 흥광이 쳐서 쫓으니, 황제가 흥광을 영해군대사로 올려 말갈을 치게 하였다. 25년에 죽으니 황제가 더욱 슬퍼하여 태자태보를 추증하고, 형숙에게 홍려소경으로 조문·제사하게 하였다. 아들 승경이 왕위를 이으니 숙에게 조서하였다. 「신라는 군자의 나라라 불려 시서(詩書)를 아니, 경이 도타운 선비이므로 부절을 가지고 가게 한다. 마땅히 경전의 뜻을 펴서 대국의 성함을 알게 하라.」 또 나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두므로 조서로 솔부병조참군 양계응을 부사로 삼으니, 그 나라 고수가 다 그 아래라 이에 사자에게 금과 보물을 두터이 주었다. 이윽고 그 아내 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승경이 죽으니 조서로 사자가 조문하고 그 아우 헌영이 왕을 이었다. 황제가 촉에 있을 때 사자를 보내 강을 거슬러 성도에 이르러 정월을 하례하였다.
9경덕왕에서 그 뒤까지
大曆初,憲英死,子乾運立,甫丱,遣金隱居入朝待命。詔倉部郎中歸崇敬往吊,監察御史陸珽、顧愔爲副冊授之,并母金爲太妃。會其宰相爭權相攻,國大亂,三歲乃定。於是,歲朝獻。建中四年死,無子,國人共立宰相金良相嗣。貞元元年,遣戶部郎中蓋塤持節命之。是年死,立良相從父弟敬信襲王。十四年,死,無子,立嫡孫俊邕。明年,遣司封郎中韋丹持冊,未至,俊邕死,丹還。子重興立,永貞元年,詔兵部郎中元季方冊命。後三年,使者金力奇來謝,且言:「往歲冊故主俊邕爲主,母申太妃,妻叔妃,而俊邕不幸,冊今留省中,臣請授以歸。」又爲其宰相金彥升、金仲恭、王之弟蘇金添明丐門戟,詔皆可。凡再朝貢。七年死,彥升立,來告喪,命職方員外郎崔廷吊,且命新王,以妻貞爲妃。長慶、寶曆間,再遣使者來朝,留宿衛。彥升死,子景徽立。大和五年,以太子左諭德源寂冊吊如儀。開成初,遣子義琮謝,願留衛,見聽,明年遣之。五年,鴻臚寺籍質子及學生歲滿者一百五人,皆還之。
대력 초에 헌영이 죽고 아들 건운이 서니 겨우 더벅머리라, 김은거를 보내 입조해 명을 기다렸다. 조서로 창부낭중 귀숭경이 가서 조문하고 감찰어사 육정·고음을 부로 삼아 책봉해 주며 어머니 김씨를 태비로 삼았다. 마침 재상들이 권세를 다투어 서로 치니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 세 해 만에야 안정되었다. 이에 해마다 조공하였다. 건중 사년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재상 김양상을 함께 세워 이었다. 정원 원년에 호부낭중 개훈이 부절을 지니고 책명하였다. 이해에 죽으니 양상의 종부제 경신을 세워 왕을 이었다. 14년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적손 준옹을 세웠다. 이듬해 사봉낭중 위단을 보내 책봉하는데 이르기 전에 준옹이 죽어 단이 돌아왔다. 아들 중흥이 서니 영정 원년에 조서로 병부낭중 원계방이 책명하였다. 세 해 뒤 사자 김력기가 와서 사례하며 말하였다. 「지난해 옛 임금 준옹을 왕으로, 어머니 신씨를 태비로, 아내 숙씨를 비로 책봉하셨는데, 준옹이 불행하여 책문이 지금 성중(省中)에 있으니 신에게 주시어 가져가게 하소서.」 또 재상 김언승·김중공과 왕의 아우 소금첨명을 위해 문극을 비니 조서로 다 허락하였다. 무릇 두 번 조공하였다. 7년에 죽고 언승이 서서 와서 상을 알리니, 직방원외랑 최정에게 명해 조문하고 새 왕을 책명하며 아내 정씨를 비로 삼았다. 장경·보력 연간에 두 번 사자를 보내 조회하고 머물러 숙위하였다. 언승이 죽고 아들 경휘가 즉위하였다. 태화 오년에 태자좌유덕 원적이 의례대로 책봉하고 조문하였다. 개성 초에 아들 의종을 보내 사례하고 숙위로 남기를 원하니 들어주었다가 이듬해 보냈다. 5년에 홍려시가 볼모와 연한 찬 학생 백다섯 명을 적어 다 돌려보냈다.
10장보고와 정년
有張保皋、鄭年者,皆善鬥戰,工用槍。年復能沒海,履其地五十里不噎,角其勇健,保皋不及也。年以兄呼保皋,保皋以齒,年以藝,常不相下。自其國皆來爲武甯軍小將。後保皋歸新羅,謁其王曰:「遍中國以新羅人爲奴婢,願得鎮清海,使賊不得掠人西去。」清海,海路之要也。王與保皋萬人守之。自大和後,海上無鬻新羅人者。保皋既貴于其國,年饑寒客漣水,一日謂戍主馮元規曰:「我欲東歸,乞食于張保皋。」元規曰:「若與保皋所負何如?奈何取死其手?」年曰:「饑寒死,不如兵死快,況死故鄉邪!」年遂去。至,謁保皋,飲之極歡。飲未卒,聞大臣殺其王,國亂無主。保皋分兵五千人與年,持年泣曰:「非子不能平禍難。」年至其國,誅反者,立王以報。王遂召保皋爲相,以年代守清海。會昌後,朝貢不復至。
장보고와 정년이라는 이들이 있어 다 싸움을 잘하고 창 쓰기에 능했다. 정년은 또 바닷속에 잠겨 오십 리를 걸어도 숨이 막히지 않았다. 그 용맹과 굳셈을 겨루면 보고가 미치지 못했다. 년은 보고를 형이라 불렀는데, 보고는 나이로, 년은 재주로 늘 서로 지지 않았다. 그 나라에서 다 와서 무령군 소장이 되었다. 뒤에 보고가 신라에 돌아가 왕을 뵙고 「온 중국이 신라 사람을 노비로 삼으니, 원컨대 청해를 지켜 도적이 사람을 노략해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청해는 뱃길의 요충이다. 왕이 보고에게 만 명을 주어 지키게 하니, 태화 이후 바다 위에서 신라 사람을 파는 자가 없어졌다. 보고가 제 나라에서 귀해진 뒤, 년은 헐벗고 굶주리며 연수에서 나그네로 지내다가, 하루는 수자리 장수 풍원규에게 「내 동으로 돌아가 장보고에게 걸식하려 하오」 하니, 원규가 「그대와 보고의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 그 손에 죽으러 가는가」 하였다. 년이 「굶고 얼어 죽느니 싸우다 죽는 것이 시원하오. 하물며 고향에서 죽음에랴」 하고 드디어 떠났다. 이르러 보고를 뵈니 술을 마시며 지극히 즐거워하였다.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대신이 왕을 죽여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이 없다는 소식이 들렸다. 보고가 군사 오천을 나누어 년에게 주며 년의 손을 잡고 울면서 「그대가 아니면 화난을 평정할 수 없다」 하였다. 년이 그 나라에 이르러 배반한 자를 베고 왕을 세워 아뢰었다. 왕이 드디어 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년으로 대신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 회창 이후로는 조공이 다시 이르지 않았다.
11찬 — 누가 동이에 사람이 없다 하는가
贊曰:杜牧稱:「安思順爲朔方節度時,郭汾陽、李臨淮俱爲牙門都將,二人不相能,雖同盤飲食,常睇相視,不交一言。及汾陽代思順,臨淮欲亡去,計未決。旬日,詔臨淮分汾陽半兵東出趙、魏,臨淮入請曰:『一死固甘,乞免妻子。』汾陽趨下,持手上堂,曰:'今國亂主遷,非公不能東伐,豈懷私忿時邪?'及別,執手泣涕,相勉以忠義,訖平劇盜,實二公之力。知其心不叛,知其心,難也;忿必見短,知其材,益難也。此保皋與汾陽之賢等耳。年投保皋必曰:'彼貴我賤,我降下之,不宜以舊忿殺我。'保皋果不殺,人之常情也。臨淮請死於汾陽,亦人之常情也。保皋任年,事出於己,年且寒饑,易爲感動。汾陽、臨淮,平生亢立,臨淮之命,出於天子。榷於保皋,汾陽爲優。此乃聖賢遲疑成敗之際也。世稱周、邵爲百代之師,周公擁孺子而邵公疑之,以周公之聖,邵公之賢,少事文王,老佐武王,能平天下,周公之心,邵公且不知之。苟有仁義之心,不資以明,雖邵公尚爾,況其下哉!」嗟乎,不以怨毒相槊,而先國家之憂,晉有祁奚,唐有汾陽、保皋,孰謂夷無人哉!
찬(贊)한다. 두목(杜牧)이 일컬었다. 「안사순이 삭방절도사일 때 곽분양(곽자의)과 이임회(이광필)가 다 아문도장이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맞지 않아 한 상에서 먹어도 늘 흘겨보며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분양이 사순을 대신하게 되자 임회는 도망가려다 결단하지 못했는데, 열흘 만에 조서로 임회가 분양의 군사 절반을 나누어 동으로 조·위에 나가게 되었다. 임회가 들어가 청하기를 〈한 번 죽음은 참으로 달게 받겠으나 처자만은 살려 주시오〉 하니, 분양이 달려 내려가 손을 잡고 마루에 올라 〈지금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이 옮겨 가셨으니, 그대가 아니면 동쪽을 칠 수 없소. 어찌 사사로운 분을 품을 때이겠소〉 하였다. 헤어질 때 손을 잡고 눈물 흘리며 충의로 서로 힘써, 마침내 큰 도적을 평정했으니 실로 두 공의 힘이다. 그 마음이 배반하지 않을 줄 아는 것, 마음을 알기가 어렵고, 분하면 반드시 단점만 보이니 그 재주를 알기는 더욱 어렵다. 이 점에서 보고와 분양의 어짊은 같다. 년이 보고에게 몸을 던질 때 반드시 〈저는 귀하고 나는 천하니, 내가 낮추면 옛 분으로 나를 죽이지는 않으리라〉 했을 것이다. 보고가 과연 죽이지 않았으니 사람의 상정이요, 임회가 분양에게 죽음을 청한 것도 상정이다. 다만 보고가 년을 쓴 것은 저에게서 나온 일이요 년은 굶주린 처지라 감동하기 쉬웠지만, 분양과 임회는 평생 맞선 사이요 임회를 부린 명은 천자에게서 나왔으니, 보고와 견주면 분양이 낫다. 이는 곧 성현도 머뭇거리는 성패의 갈림이다. 세상이 주공·소공을 백대의 스승이라 하나, 주공이 어린아이를 안고 섭정할 때 소공은 의심하였다. 주공의 성스러움과 소공의 어짊으로, 젊어서 문왕을 섬기고 늙어서 무왕을 도와 천하를 평정할 수 있었는데도, 주공의 마음을 소공도 알지 못했다. 진실로 어질고 의로운 마음이 있어도 밝음이 뒷받침하지 않으면 소공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그 아래랴!」 아, 원망과 독으로 서로 해치지 않고 나라의 근심을 앞세운 이로, 진(晉)에 기해가 있고 당에 분양과 보고가 있으니, 누가 동이(東夷)에 사람이 없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