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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수서 동이전 隋書 東夷傳 · 위징(魏徵) 등 · 636년 (당 정관 10) · 단락 12 · 한자 2,049자 · 낭독 8.2분

「수서 동이전」 한 권 「고려」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수나라가 본 동방 여섯 나라 — 고려·백제·신라·말갈·유구·왜. 수 문제가 고구려에 보낸 새서와, 왜왕이 보낸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국서가 함께 실려 있다. 살수대첩으로 끝난 세 차례 원정의 중국 쪽 기록이다.

1주몽이 부여에서 달아나다

高麗之先,出自夫餘。夫餘王嘗得河伯女,因閉於室內,為日光隨而照之,感而遂孕,生一大卵,有一男子破殼而出,名曰朱蒙。夫餘之臣以朱蒙非人所生,咸請殺之,王不聽。及壯,因從獵,所獲居多,又請殺之。其母以告朱蒙,朱蒙棄夫餘東南走。遇一大水,深不可越。朱蒙曰:「我是河伯外孫,日之子也。今有難,而追兵且及,如何得渡?」於是魚鼈積而成橋,朱蒙遂渡。追騎不得濟而還。

고려(고구려)의 선조는 부여에서 나왔다. 부여 왕이 일찍이 하백의 딸을 얻어 방 안에 가두었더니, 햇빛이 따라와 비추므로 감응하여 그예 아이를 배어 큰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오니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다.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은 사람이 낳은 것이 아니라 하여 다 죽이기를 청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자라서 사냥을 따라다니면 잡는 것이 가장 많으니 또 죽이기를 청하였다. 그 어머니가 주몽에게 알리자 주몽은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큰 물을 만나 깊어서 건널 수 없게 되자 주몽이 말하였다. 「나는 하백의 외손이요 해의 아들이다. 지금 어려움이 있는데 뒤쫓는 군사가 곧 미치리니 어찌 건너랴.」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쌓여 다리를 이루니 주몽이 드디어 건넜다. 뒤쫓던 기병은 건너지 못하고 돌아갔다.

2나라를 세우고 고씨라 하다

朱蒙建國,自號高句麗,以高為氏。朱蒙死,子閭達嗣。至其孫莫來興兵,遂并夫餘。至裔孫位宮,以魏正始中入寇西安平,毌丘儉拒破之。位宮玄孫之子曰昭列帝,為慕容氏所破,遂入丸都,焚其宮室,大掠而還。昭列帝後為百濟所殺。其曾孫璉,遣使後魏。璉六世孫湯,在周遣使朝貢,武帝拜湯上開府、遼東郡公、遼東王。高祖受禪,湯復遣使詣闕,進授大將軍,改封高麗王。歲遣使朝貢不絕。

주몽이 나라를 세워 스스로 고구려라 이름하고 고(高)로 성씨를 삼았다. 주몽이 죽자 아들 여달이 이었다. 그 손자 막래에 이르러 군사를 일으켜 드디어 부여를 아울렀다. 후손 위궁에 이르러 위나라 정시 연간에 서안평을 침범했다가 관구검이 막아 깨뜨렸다.

위궁의 현손의 아들을 소열제라 하는데 모용씨에게 패하니, 모용씨가 드디어 환도에 들어가 그 궁실을 불사르고 크게 노략질하고 돌아갔다. 소열제는 뒤에 백제에게 살해되었다. 그 증손 련(장수왕)이 후위에 사신을 보냈다. 련의 6세손 탕(평원왕)이 주나라 때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무제가 탕에게 상개부·요동군공·요동왕을 제수하였다. 고조(수 문제)가 선양을 받자 탕이 다시 사신을 대궐에 보내니 대장군으로 올려 제수하고 고려왕으로 고쳐 봉하였다. 해마다 사신을 보내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

협주 1

璉六世孫湯 「湯」,本書高祖紀上作「陽」。

「탕(湯)」은 이 책 고조기 상권에는 「양(陽)」으로 되어 있다.

3평양의 세 서울과 열두 벼슬

其國東西二千里,南北千餘里。都於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復有國內城、漢城,並其都會之所,其國中呼為「三京」。與新羅每相侵奪,戰爭不息。官有太大兄,次大兄,次小兄,次對盧,次意侯奢,次烏拙,次太大使者,次大使者,次小使者,次褥奢,次翳屬,次仙人,凡十二等。復有內評、外評、五部褥薩。人皆皮冠,使人加插鳥羽。貴者冠用紫羅,飾以金銀。服大袖衫,大口袴,素皮帶,黃革屨。婦人裙襦加襈。兵器與中國略同。每春秋校獵,王親臨之。人稅布五匹,穀五石。遊人則三年一稅,十人共細布一匹。租戶一石,次七斗,下五斗。反逆者縛之於柱,爇而斬之,籍沒其家。盜則償十倍。用刑既峻,罕有犯者。樂有五絃、琴、箏、篳篥、橫吹、簫、鼓之屬,吹蘆以和曲。每年初,聚戲於浿水之上,王乘腰輿,列羽儀以觀之。事畢,王以衣服入水,分左右為二部,以水石相濺擲,諠呼馳逐,再三而止。

그 나라는 동서 이천 리, 남북 천여 리다. 평양성에 도읍하니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동서 육 리로 산을 따라 굽이지고 남쪽은 패수에 임한다. 또 국내성과 한성이 있어 모두 도회지이니, 나라 안에서 「삼경(三京)」이라 부른다. 신라와 늘 서로 침탈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

벼슬에는 태대형이 있고, 다음 대형, 다음 소형, 다음 대로, 다음 의후사, 다음 오졸, 다음 태대사자, 다음 대사자, 다음 소사자, 다음 욕사, 다음 예속, 다음 선인으로 무릇 열두 등급이다. 또 내평·외평과 오부 욕살이 있다.

사람들은 다 가죽 관을 쓰고, 벼슬아치는 새 깃을 더 꽂는다. 귀한 자의 관은 자줏빛 비단으로 하고 금은으로 꾸민다. 소매 큰 적삼과 통 넓은 바지를 입고 흰 가죽 띠에 누런 가죽신을 신는다. 부인은 치마저고리에 선을 두른다. 병기는 중국과 대략 같다. 봄가을마다 사냥 대회를 여는데 왕이 몸소 나온다.

사람마다 베 다섯 필과 곡식 다섯 섬을 세로 낸다. 떠돌이는 삼 년에 한 번 세를 내되 열 사람이 함께 가는 베 한 필을 낸다. 조(租)는 상호가 한 섬, 다음이 일곱 말, 아래가 다섯 말이다. 반역한 자는 기둥에 묶어 불사르고 목 베며 그 집안을 적몰한다. 도둑질하면 열 배로 물어낸다. 형벌 쓰는 것이 준엄하여 범하는 자가 드물다.

악기로는 오현금·거문고·쟁·필률·횡취·소·북 따위가 있고, 갈대를 불어 곡을 맞춘다. 해마다 연초에 패수 가에 모여 놀이하는데, 왕은 가마를 타고 깃털 의장을 벌여 놓고 구경한다. 놀이가 끝나면 왕이 옷을 입은 채 물에 들어가고, 좌우 두 편으로 나뉘어 물과 돌을 서로 끼얹고 던지며 소리치고 내달리기를 두세 번 하고 그친다.

협주 1

意侯奢 「侯」,周書異域傳作「俟」。

「의후사(意侯奢)」의 「후」는 주서 이역전에는 「사(俟)」로 되어 있다.

4고려의 풍속

俗好蹲踞,潔淨自喜,以趨走為敬,拜則曳一脚,立各反拱,行必搖手。性多詭伏。父子同川而浴,共室而寢。婦人淫奔,俗多遊女。有婚嫁者,取男女相悅,然即為之,男家送猪酒而已,無財聘之禮。或有受財者,人共恥之。死者殯於屋內,經三年,擇吉日而葬。居父母及夫之喪,服皆三年,兄弟三月。初終哭泣,葬則鼓儛作樂以送之。埋訖,悉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於墓側,會葬者爭取而去。敬鬼神,多淫祠。

풍속은 쭈그려 앉기를 좋아하고, 깨끗한 것을 스스로 즐기며, 종종걸음을 공경으로 삼는다. 절할 때는 한 다리를 끌고, 설 때는 저마다 손을 뒤로 마주 잡으며, 걸을 때는 반드시 손을 흔든다. 성품에 속임과 감춤이 많다. 아비와 자식이 같은 내에서 목욕하고 한 방에서 잔다. 부인은 음란하게 내닫고 풍속에 노는 여인이 많다.

혼인은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곧 이루어지는데, 남자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재물로 맞는 예가 없다. 혹 재물을 받는 자가 있으면 사람들이 다 부끄럽게 여긴다.

죽은 이는 집 안에 빈소를 차렸다가 세 해가 지나면 길일을 가려 장사 지낸다. 부모와 지아비의 상에는 다 세 해 상복을 입고 형제는 석 달이다. 처음 죽었을 때는 곡하며 울지만, 장사 지낼 때는 북 치고 춤추며 풍악을 울려 보낸다. 묻기를 마치면 죽은 이가 살았을 때 쓰던 옷가지와 노리개와 수레와 말을 다 가져다 무덤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 사람들이 다투어 가져간다. 귀신을 공경하여 음사(淫祠)가 많다.

5새서를 내리다

開皇初,頻有使入朝。及平陳之後,湯大懼,治兵積穀,為守拒之策。十七年,上賜湯璽書曰:

개황 초에 자주 사신이 입조하였다. 진(陳)을 평정한 뒤에 탕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사를 다스리고 곡식을 쌓아 지키고 막을 계책을 세웠다. 십칠년에 임금이 탕에게 새서(璽書)를 내렸다.

6새서 — 신하의 정성을 다하지 않았다

:朕受天命,愛育率土,委王海隅,宣揚朝化,欲使圓首方足各遂其心。王每遣使人,歲常朝貢,雖稱藩附,誠節未盡。王既人臣,須同朕德,而乃驅逼靺鞨,固禁契丹。諸藩頓顙,為我臣妾,忿善人之慕義,何毒害之情深乎?太府工人,其數不少,王必須之,自可聞奏。昔年潛行財貨,利動小人,私將弩手逃竄下國。豈非修理兵器,意欲不臧,恐有外聞,故為盜竊?時命使者,撫慰王藩,本欲問彼人情,教彼政術。王乃坐之空館,嚴加防守,使其閉目塞耳,永無聞見。有何陰惡,弗欲人知,禁制官司,畏其訪察?又數遣馬騎,殺害邊人,屢騁姦謀,動作邪說,心在不賓。

「짐은 천명을 받아 온 땅을 사랑으로 기르며, 왕에게 바다 모퉁이를 맡겨 조정의 교화를 펴게 하여, 둥근 머리 모난 발의 사람마다 제 마음을 이루게 하고자 하였다. 왕은 늘 사신을 보내 해마다 조공하며 번국이라 일컫지만, 정성과 절개를 다하지 않는다. 왕이 이미 남의 신하가 되었으면 모름지기 짐과 덕을 같이해야 하거늘, 도리어 말갈을 몰아붙이고 거란을 굳게 가로막는다. 여러 번국이 머리를 조아려 나의 신첩이 되었는데, 착한 사람들이 의를 사모함에 분개하니 어찌 해치려는 마음이 그리 깊은가.

태부의 장인이 그 수가 적지 않으니, 왕이 꼭 필요하면 아뢰면 될 일이다. 지난해에는 몰래 재화를 옮겨 소인을 움직여, 사사로이 쇠뇌 다루는 이를 그대 나라로 빼돌렸다. 병기를 손보려는 뜻이 좋지 못하여, 남이 알까 두려워 훔쳐 간 것 아닌가.

때로 사자를 보내 왕의 번국을 위무한 것은 본디 그곳 인정을 묻고 정치하는 법을 가르치려 함이었다. 그런데 왕은 사자를 빈 관사에 앉혀 놓고 엄히 지켜, 눈을 막고 귀를 막아 끝내 듣고 보지 못하게 하였다. 무슨 몰래 하는 악이 있어 남이 알기를 바라지 않고, 관사(官司)를 단속하며 살필까 두려워하는가. 또 자주 기병을 보내 변경 사람을 죽이고, 여러 번 간사한 꾀를 부리며 삿된 말을 지어내니, 마음이 손님으로 복종함에 있지 않다.」

7새서 — 마음을 씻어 행실을 바꾸라

:朕於蒼生悉如赤子,賜王土宇,授王官爵,深恩殊澤,彰著遐邇。王專懷不信,恒自猜疑,常遣使人密覘消息,純臣之義豈若是也?蓋當由朕訓導不明,王之愆違,一已寬恕,今日以後,必須改革。守藩臣之節,奉朝正之典,自化爾藩,勿忤他國,則長享富貴,實稱朕心。彼之一方,雖地狹人少,然普天之下,皆為朕臣。今若黜王,不可虛置,終須更選官屬,就彼安撫。王若洒心易行,率由憲章,即是朕之良臣,何勞別遣才彥也?昔帝王作法,仁信為先,有善必賞,有惡必罰,四海之內,具聞朕旨。王若無罪,朕忽加兵,自餘藩國謂朕何也!王必虛心納朕此意,慎勿疑惑,更懷異圖。

「짐은 창생을 다 갓난아이같이 여겨 왕에게 땅을 주고 왕에게 관작을 주었으니, 깊은 은혜와 남다른 혜택이 멀고 가까운 데 뚜렷하다. 왕은 오로지 불신을 품고 늘 스스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늘 사람을 보내 몰래 소식을 엿보니 순수한 신하의 의리가 어찌 이와 같으랴.

대개 짐의 가르침이 밝지 못한 탓이려니, 왕의 잘못은 이미 한 번 너그러이 용서하였다. 오늘 이후로는 반드시 고쳐야 한다. 번신의 절개를 지키고 조정의 바른 법을 받들어, 스스로 그대 번국을 교화하고 다른 나라를 거스르지 말면 길이 부귀를 누리리니 실로 짐의 마음에 맞으리라.

그곳 한 지방이 땅은 좁고 사람은 적으나, 온 하늘 아래가 다 짐의 신하다. 이제 왕을 내친다 해도 비워 둘 수는 없으니, 끝내는 다시 관속을 뽑아 그곳에 가서 안무하게 해야 한다. 왕이 만약 마음을 씻고 행실을 바꾸어 법도를 따르면 곧 짐의 좋은 신하니, 어찌 수고로이 따로 인재를 보내랴.

옛적 제왕이 법을 만듦에 어짊과 믿음을 먼저로 하여, 선이 있으면 반드시 상 주고 악이 있으면 반드시 벌하니, 사해 안이 짐의 뜻을 다 들었다. 왕이 죄가 없는데 짐이 문득 군사를 더한다면 다른 번국들이 짐을 무엇이라 하겠는가! 왕은 반드시 마음을 비워 짐의 이 뜻을 받아들이고, 부디 의혹하여 다시 다른 꾀를 품지 말라.」

8새서 — 요수가 장강만 한가

:往者陳叔寶代在江陰,殘害人庶,驚動我烽候,抄掠我邊境。朕前後誡勑,經歷十年,彼則恃長江之外,聚一隅之眾,惛狂驕傲,不從朕言。故命將出師,除彼凶逆,來往不盈旬月,兵騎不過數千。歷代逋寇,一朝清蕩,遐邇乂安,人神胥悅。聞王歎恨,獨致悲傷,黜陟幽明,有司是職,罪王不為陳滅,賞王不為陳存,樂禍好亂,何為爾也?王謂遼水之廣何如長江?高麗之人多少陳國?朕若不存含育,責王前愆,命一將軍,何待多力!慇懃曉示,許王自新耳。宜得朕懷,自求多福。

「지난날 진숙보(진 후주)가 대를 이어 강남에 있으면서 백성을 해치고 나의 봉수를 놀라게 하며 나의 변경을 노략질하였다. 짐이 앞뒤로 타이르기를 십 년이 지났으나, 저들은 장강 바깥을 믿고 한 모퉁이의 무리를 모아 어리석고 교만하여 짐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장수에게 명해 군사를 내어 저 흉악한 무리를 없앴는데, 오가는 데 열흘 한 달이 차지 않았고 군사와 기병은 몇천에 지나지 않았다. 여러 대의 도망친 도적이 하루아침에 말끔히 쓸리니, 멀고 가까운 데가 다스려져 편안하고 사람과 신이 다 기뻐하였다.

들으니 왕이 한탄하고 홀로 슬퍼했다 한다. 어둡고 밝음을 내치고 올리는 것은 맡은 관원의 직분이니, 왕을 벌하려도 진이 망한 때문이 아니요 왕에게 상 주려도 진이 남은 때문이 아니거늘, 화를 즐기고 난을 좋아함은 어찌 된 일인가.

왕은 요수의 넓이가 장강만 하다 여기는가. 고려의 사람이 진나라보다 많은가. 짐이 만약 품어 기를 마음을 두지 않고 왕의 지난 허물을 책하려 든다면, 한 장군에게 명하면 될 일이지 어찌 큰 힘이 들랴. 간곡히 타일러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허락하는 것이니, 마땅히 짐의 마음을 알아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라.」

9탕이 죽고 원이 즉위하다

湯得書惶恐,將奉表陳謝,會病卒。子元嗣立。高祖使使拜元為上開府、儀同三司,襲爵遼東郡公,賜衣一襲。元奉表謝恩,并賀祥瑞,因請封王。高祖優冊元為王。

탕이 글을 받고 황공하여 표를 받들어 사죄하려다가 마침 병으로 죽었다. 아들 원(영양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고조가 사신을 보내 원에게 상개부·의동삼사를 제수하고 요동군공의 작을 잇게 하고 옷 한 벌을 내렸다. 원이 표를 받들어 은혜에 사례하고 아울러 상서를 하례하며 왕으로 봉해 주기를 청하니, 고조가 우대하여 원을 왕으로 책봉하였다.

10요서를 침범하다

明年,元率靺鞨之眾萬餘騎寇遼西,營州總管韋沖擊走之。高祖聞而大怒,命漢王諒為元帥,總水陸討之,下詔黜其爵位。時餽運不繼,六軍乏食,師出臨渝關,復遇疾疫,王師不振。及次遼水,元亦惶懼,遣使謝罪,上表稱「遼東糞土臣元」云云。上於是罷兵,待之如初,元亦歲遣朝貢。

이듬해에 원이 말갈 무리 만여 기를 거느리고 요서를 침범하니 영주총관 위충이 쳐서 쫓았다. 고조가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량을 원수로 삼아 물과 뭍으로 함께 치게 하고, 조서를 내려 그 작위를 깎았다. 그때 군량 운반이 잇지 못해 육군이 먹을 것이 모자랐고, 군사가 임유관을 나서자 또 돌림병을 만나 왕의 군사가 떨치지 못했다. 요수에 다다르자 원도 두려워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표를 올려 「요동 똥땅의 신 원」이라 일컬었다. 임금이 이에 군사를 거두고 처음처럼 대하니, 원도 해마다 조공을 보냈다.

11양제의 첫 친정

煬帝嗣位,天下全盛,高昌王、突厥啟人可汗並親詣闕貢獻,於是徵元入朝。元懼,藩禮頗闕。大業七年,帝將討元之罪,車駕渡遼水,上營於遼東城,分道出師,各頓兵於其城下。高麗率兵出拒,戰多不利,於是皆嬰城固守。帝令諸軍攻之,又勑諸將:「高麗若降者,即宜撫納,不得縱兵。」城將陷,賊輒言請降,諸將奉旨不敢赴機,先令馳奏。比報至,賊守禦亦備,隨出拒戰。如此者再三,帝不悟。由是食盡師老,轉輸不繼,諸軍多敗績,於是班師。是行也,唯於遼水西拔賊武厲邏,置遼東郡及通定鎮而還。

양제가 자리를 잇자 천하가 온전히 성하여 고창왕과 돌궐 계민가한이 다 몸소 대궐에 나아와 공물을 바치니, 이에 원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다. 원이 두려워하며 번국의 예를 자못 빠뜨렸다.

대업 칠년에 황제가 원의 죄를 치려고 어가로 요수를 건너 요동성에 진을 치고, 길을 나누어 군사를 내어 저마다 그 성 아래 주둔시켰다. 고려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막았으나 싸움에 많이 불리하자 모두 성을 지켜 굳게 버텼다. 황제는 여러 군에 명해 치게 하고, 또 여러 장수에게 칙명하였다. 「고려가 항복하거든 곧 어루만져 받아들이고 군사를 풀지 말라.」

성이 함락되려 하면 적이 문득 항복을 청한다 말하고, 여러 장수는 칙지를 받든 터라 감히 기회를 타지 못하고 먼저 달려 아뢰게 하였다. 회보가 이를 즈음이면 적의 수비도 갖추어져 도로 나와 막아 싸웠다. 이러기를 두세 번 하였는데 황제는 깨닫지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양식이 다하고 군사가 지치고 수송이 잇지 못하여 여러 군이 많이 패하니, 이에 군사를 돌렸다. 이 걸음에는 오직 요수 서쪽에서 적의 무려라를 빼앗아 요동군과 통정진을 두고 돌아왔을 뿐이다.

12다시 치다가 천하가 어지러워지다

九年,帝復親征之,乃勑諸軍以便宜從事。諸將分道攻城,賊勢日蹙。會楊玄感作亂,反書至,帝大懼,即日六軍並還。兵部侍郎斛斯政亡入高麗,高麗具知事實,悉銳來追,殿軍多敗。十年,又發天下兵,會盜賊蜂起,人多流亡,所在阻絕,軍多失期。至遼水,高麗亦困弊,遣使乞降,囚送斛斯政以贖罪。帝許之,頓於懷遠鎮,受其降款。仍以俘囚軍實歸。至京師,以高麗使者親告於太廟,因拘留之。仍徵元入朝,元竟不至。帝勑諸軍嚴裝,更圖後舉,會天下大亂,遂不克復行。

구년에 황제가 다시 친히 정벌하며 여러 군에 형편대로 하라고 칙명하였다. 여러 장수가 길을 나누어 성을 치니 적의 형세가 날로 옹색해졌다. 마침 양현감이 난을 일으켜 그 반서가 이르자 황제가 크게 두려워 그날로 육군을 다 돌렸다.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려로 도망해 들어가니, 고려가 사정을 다 알고 정예를 다해 뒤쫓아 후군이 많이 패했다.

십년에 또 천하의 군사를 징발했으나, 마침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사람들이 많이 흩어져 곳곳이 막혀 군사가 기한을 많이 어겼다. 요수에 이르자 고려도 피폐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을 빌고, 곡사정을 가두어 보내 속죄하였다. 황제가 허락하고 회원진에 머물러 항복을 받았다. 포로와 군수품을 거두어 돌아와 서울에 이르러, 고려 사자에게 태묘에 직접 고하게 하고는 억류하였다. 그리고 원을 불러 입조하게 했으나 원은 끝내 오지 않았다. 황제가 여러 군에 채비를 갖추어 다시 후일을 도모하라 칙명했으나, 마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 끝내 다시 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