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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왕과 대나뭇잎 군사未鄒王竹葉軍

삼국유사 三國遺事 · 일연(一然) · 1281년 (고려 충렬왕 7) · 단락 3 · 한자 443자 · 낭독 1.8분

「삼국유사」 기이 제1 「미추왕과 대나뭇잎 군사」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고려의 승려 일연이 엮은 삼국시대 설화집. 정사가 버린 이야기를 모았다. 단군신화가 실린 가장 오래된 책이다.

1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르다

末鄒王竹葉軍第十三末鄒尼叱今〔一作末祖又末古.〕金閼智七世孫.赫世紫纓仍有聖徳,受禪于理解始登王位〔今始称王之陵爲始祖堂.盖以金始始登王位.故後代金氏諸王皆以末鄒爲始祖冝矣.〕.在位二十三年而崩,陵在興輪寺東.

미추왕과 대나뭇잎 군사.

열셋째 미추이질금은〔미조 또는 미고라고도 한다.〕 김알지의 칠 대 손이다.

대대로 벼슬이 빛나고 이내 거룩한 덕이 있어, 이해왕(理解王)에게서 자리를 물려받아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

〔지금 이 임금의 능을 시조당이라 일컫는다. 대개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뒷날 김씨 여러 임금이 모두 미추를 시조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

자리에 있은 지 스물세 해에 세상을 떠났고, 능은 흥륜사 동쪽에 있다.

협주 2

一作末祖又末古.

미조(未祖) 또는 미고(未古)라고도 한다.

今始称王之陵爲始祖堂. 盖以金始始登王位. 故後代金氏諸王皆以末鄒爲始祖冝矣.

지금 이 임금의 능을 시조당이라 일컫는다. 대개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뒷날 김씨 여러 임금이 모두 미추를 시조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

2귀에 대나뭇잎을 꽂은 군사들

第十四儒理王代伊西國人來攻金城.我大舉防禦久不能抗.忽有異兵來助皆珥竹葉.與我軍并力擊賊破之.軍退後不知所歸.但見竹葉積於未鄒陵前乃知先王隂隲有㓛,因呼竹現陵.

열넷째 유리왕 대에 이서국 사람이 와서 금성을 쳤다.

신라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막았으나 오래도록 당해 내지 못하였다.

홀연 남다른 군사가 와서 도왔는데 모두 귀에 대나뭇잎을 꽂고 있었다.

신라 군사와 힘을 합쳐 적을 쳐서 깨뜨렸다.

군사가 물러난 뒤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다만 대나뭇잎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인 것을 보고 비로소 선왕이 남몰래 도운 공이 있음을 알았다.

이로 인해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

3김유신의 넋이 능에 들어가 하소연하다

越三十七世惠恭王代大暦十四年己未四月忽有旋風從庾信公塚起.中有一人乗駿馬如将軍.儀状亦有衣甲噐仗者四十許人隨從而來入於竹現陵.俄而陵中似有振動哭泣聲或如告訴之音.其言曰“臣平生有輔時救難匡合之㓛.今爲魂魄鎮護邦國攘災,救患之心暫無渝攺.徃者庚戌年臣之子孫無罪被誅,君臣不念我之㓛烈.臣欲逺移他所不復勞勤願王允之.”王荅曰“惟我與公不護此邦其如民庻何.公復努力如前.”三請三不許旋風乃還.王聞之懼,乃遣工臣金敬信就金公陵謝過焉,為公立㓛徳寳田三十結于鷲仙寺以資冥福.寺乃金公討平壤後植福所置故也.非末鄒之霊無以遏金公之怒,王之護國不爲不大矣.是以邦人懐徳與三山同祀而不墜,躋秩于五陵之上稱大廟云.

서른일곱 대를 지나 혜공왕 대 대력 십사년 기미년 4월에, 홀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어 장군 같았고, 차림새 또한 갑옷을 입고 병기를 든 이 마흔쯤이 따라와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능 안에서 흔들리는 듯한 소리와 울음소리가 나고 더러는 하소연하는 소리 같았다. 그 말은 이러하였다.

"신이 평생 때를 돕고 어려움을 구하며 나라를 바로 합친 공이 있습니다.

이제 넋이 되어서도 나라를 지키고 재앙을 물리치며 환란을 구하려는 마음이 잠시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죄 없이 죽임을 당하였는데 임금과 신하가 저의 공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신은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 가 다시는 수고하지 않으려 하니 왕께서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왕이 대답하였다.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백성을 어찌하겠소. 공은 다시 예전처럼 힘써 주시오."

세 번 청하고 세 번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바람이 이에 돌아갔다.

왕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에 대신 김경신을 보내 김공의 능에 가서 잘못을 사과하게 하였다.

공을 위해 공덕보전 서른 결을 취선사에 세워 저승의 복을 돕게 하였다. 절은 곧 김공이 평양을 친 뒤 복을 심으려 세운 곳이기 때문이다.

미추왕의 신령이 아니었다면 김공의 노여움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니, 왕이 나라를 지킨 것이 크지 않다 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나라 사람들이 덕을 생각하여 세 산과 함께 제사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차례를 오릉의 위에 올려 대묘(大廟)라 일컬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