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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춘추공太宗春秋公

삼국유사 三國遺事 · 일연(一然) · 1281년 (고려 충렬왕 7) · 단락 14 · 한자 3,465자 · 낭독 13.9분

「삼국유사」 기이 제1 「태종 춘추공」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고려의 승려 일연이 엮은 삼국시대 설화집. 정사가 버린 이야기를 모았다. 단군신화가 실린 가장 오래된 책이다.

1언니의 꿈을 비단 치마로 사다

大宗春秋公第二十九大宗大王名春秋姓金氏.龍樹〔一作龍春.〕角干追封文興大王之子也,妣真平大王之女天明夫人.妃文明皇后文姬即庾信公之季姝也.初文姬之姊寳姬夢登西岳捨溺㳽滿亰城.旦與妹說夢文姬聞之謂曰,“我買此夢.”姊曰“與何物乎”,曰“鬻錦裙可乎”,姊曰諾.妹開襟受之,姊曰“疇昔之夢傳付於汝.”姝以錦裙酬之.

태종 춘추공.

스물아홉째 태종대왕은 이름이 춘추요 성이 김씨다.

문흥대왕으로 추봉된 용수〔용춘이라고도 한다.〕 각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 천명부인이다.

왕비는 문명황후 문희이니 곧 유신공의 막내 누이다.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에 올라 오줌을 누니 서울에 가득 찼다.

아침에 아우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문희가 듣고 말하였다. "내가 이 꿈을 사겠습니다."

언니가 "무엇을 주겠느냐" 하니 "비단 치마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하였고, 언니가 "좋다" 하였다.

아우가 옷깃을 열어 받으니 언니가 말하였다. "지난밤의 꿈을 너에게 전하여 준다."

아우가 비단 치마로 값을 치렀다.

협주 1

一作龍春.

용춘이라고도 한다.

2뜰에 섶을 쌓고 불을 지르다

後旬日庾信與春秋公正月午忌日〔見上射琴匣事,乃崔致逺之說.〕蹴鞠于庾信宅前〔羅人謂蹴鞠爲弄珠之戱.〕.故踏春秋之裙裂其襟紐,請曰“入吾家縫之”,公從之.庾信命阿海奉針,海曰“豈以細事軽近貴公子子”因辭〔古本云因病不進.〕.乃命阿之.公知庾信之意遂幸之,自後數數來徃.庾信知其有娠乃嘖之曰,“爾不告父母而有娠何也”,乃宣言於國中欲焚其妹.一日俟善徳王遊幸南山積薪於庭中焚火烟起.王望之問“何烟”,左右奏曰“殆庾信之焚姝也.”王問其故,曰“爲其妹無夫有娠.”王曰“是誰所爲”,時公昵侍在前顔色大變.王曰“是汝所爲也速徃救之.”公受命馳馬傳宣沮之,自後現行婚禮.

열흘 뒤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정월 말날의 꺼리는 날에〔위 「사금갑」의 일에 보이니 곧 최치원의 말이다.〕 유신의 집 앞에서 공을 찼다.〔신라 사람은 축국을 구슬 놀리는 놀이라 하였다.〕

일부러 춘추의 옷자락을 밟아 옷깃 끈을 찢고 청하였다. "내 집에 들어가 꿰매십시오."

공이 따랐다.

유신이 아해에게 바늘을 들라 하니 아해가 "어찌 사소한 일로 가벼이 귀공자에게 가까이하겠습니까" 하며 사양하였다.〔옛 책에는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아지에게 명하였다.

공이 유신의 뜻을 알고 마침내 가까이하였고, 이 뒤로 자주 오갔다.

유신이 아이를 밴 것을 알고 꾸짖었다. "너는 부모께 알리지 않고 아이를 배었으니 어찌 된 일이냐."

이에 나라 안에 말을 퍼뜨려 그 누이를 불태우려 하였다.

하루는 선덕왕이 남산에 거둥하기를 기다려 뜰에 섶을 쌓고 불을 놓아 연기를 일으켰다.

왕이 바라보고 "저 연기가 무엇이냐" 물으니 좌우가 아뢰었다. "아마 유신이 제 누이를 태우는 것인가 합니다."

왕이 까닭을 물으니 "그 누이가 남편 없이 아이를 배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는 누가 한 일이냐" 하니, 그때 공이 가까이 모시고 앞에 있다가 낯빛이 크게 변하였다.

왕이 말하였다. "이는 네가 한 일이니 어서 가서 구하라."

공이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의 뜻을 전하여 그치게 하였고, 이 뒤로 드러내어 혼례를 행하였다.

협주 3

見上射琴匣事, 乃崔致逺之說.

위 「사금갑」의 일에 보이니 곧 최치원의 말이다.

羅人謂蹴鞠爲弄珠之戱.

신라 사람은 축국을 구슬 놀리는 놀이라 하였다.

古本云因病不進.

옛 책에는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3꿈을 산 값이 여기서 드러나다

真徳王薨,以永徽五年甲寅即位.御國八年龍朔元年辛酉崩壽五十九歳,葬於哀公寺東有碑.王與庾信神謀戮力一統三韓有大㓛於社稷.故廟號太宗.太子法敏·角干仁問·角干文王·角干老且·角干智鏡·角干愷元䓁皆文姬之所岀也,當時買夢之徴現於此矣.庻子曰皆知文級干·車得令公·馬得阿干并女五人.王膳一日飯米三斗雄雉九首,自庚申年滅百濟後除晝饍但朝暮而已.然計一日米六斗酒六斗雉十首.城中市價布一疋租三十碩或五十碩,民謂之聖代.在東宫時欲征髙䴡因請兵入唐.唐帝賞其風彩謂爲神聖之人,固留侍衛力請乃還.

진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영휘 오년 갑인년에 즉위하였다.

나라를 다스린 지 여덟 해에 용삭 원년 신유년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쉰아홉이었다. 애공사 동쪽에 장사 지냈고 비가 있다.

왕이 유신과 함께 신묘하게 꾀하고 힘을 다하여 삼한을 하나로 아울러 사직에 큰 공이 있었다. 그러므로 묘호를 태종이라 하였다.

태자 법민과 각간 인문·문왕·노차·지경·개원 등이 모두 문희의 소생이니, 그때 꿈을 산 조짐이 여기서 드러났다.

서자로는 개지문 급간, 차득 영공, 마득 아간이 있고 아울러 딸이 다섯이다.

왕의 밥상은 하루에 쌀 서 말과 수꿩 아홉 마리였는데, 경신년에 백제를 멸한 뒤로는 낮 밥상을 없애고 다만 아침과 저녁뿐이었다.

그러나 헤아리면 하루에 쌀 여섯 말, 술 여섯 말, 꿩 열 마리였다.

성안의 저자 값이 베 한 필에 조 서른 섬 혹은 쉰 섬이었으므로 백성이 이를 거룩한 시대라 일렀다.

동궁으로 있을 때 고구려를 치고자 하여 군사를 청하러 당나라에 들어갔다.

당나라 임금이 그 풍채를 칭찬하며 신령하고 거룩한 사람이라 하고, 굳이 머물러 모시게 하려 하였으나 힘써 청하여 돌아왔다.

4성충이 옥에서 올린 글

時百濟末王義慈乃虎王之元子也.雄猛有膽氣事親以孝友于兄弟時號海東曽子.以貞觀十五年辛丑即位耽媱酒色政荒國危.佐平〔百済爵名.〕成忠極諌,不聴囚於獄中.瘦困濵死書曰,“忠臣死不忘君.願一言而死臣甞觀時變必有兵革之事.凡用兵審擇其地䖏,上流而迎敵可以保全.若異國兵來陸路不使過炭峴,〔一云沈峴,百済要害之地.〕水軍不使入伎伐浦,〔即長嵓又孫梁,一作只火浦又白江.〕㨿其険隘以禦之然後可也.”王不省.

그때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義慈)는 곧 무왕의 맏아들이다.

웅장하고 사나우며 담력이 있었고, 어버이를 효로 섬기고 형제와 우애하여 그때 해동의 증자(曾子)라 불렸다.

정관 십오년 신축년에 즉위하였는데 술과 여색에 빠져 정사가 거칠어지고 나라가 위태로워졌다.

좌평〔백제의 벼슬 이름이다.〕 성충(成忠)이 힘써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옥에 가두었다.

여위고 지쳐 죽게 되자 글을 올렸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습니다. 원컨대 한마디 말을 남기고 죽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때의 변화를 살피니 반드시 싸움의 일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군사를 쓸 때는 그 자리를 살펴 가려야 하니, 상류에서 적을 맞으면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뭍길로는 탄현을〔침현이라고도 하니 백제의 요해처다.〕 지나지 못하게 하고, 물길로는 기벌포에〔곧 장암이며 손량이라고도 하고, 지화포 또는 백강으로 적기도 한다.〕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 험하고 좁은 데를 의지하여 막은 뒤에야 될 것입니다."

왕이 살피지 않았다.

협주 3

百済爵名.

백제의 벼슬 이름이다.

一云沈峴, 百済要害之地.

침현이라고도 하니 백제의 요해처다.

即長嵓又孫梁, 一作只火浦又白江.

곧 장암이며 손량이라고도 하고, 지화포 또는 백강으로 적기도 한다.

5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

現慶四年己未百濟烏㑹寺〔亦云烏合寺〕有大赤馬晝夜六時遶寺行道,二月衆狐入義慈宫中,一白狐坐佐平書案上.四月太子宫雌雞與小雀交婚,五月泗泚〔扶餘江名〕岸大魚岀死長三丈,人食之者皆死.九月宫中槐樹鳴如人哭,夜鬼哭宫南路上.五年庚申春二月王都井水血色,西海邊小魚岀死百姓食之不盡,泗泚水血色.四月蝦蟆數萬集於樹上,王都市人無故驚走如有捕捉,驚什死者百餘,亡失財物者無數.六月王興寺僧皆見如舡揖隨大水入寺門,有大犬如野鹿自西至泗泚岸向王宫吠之俄不知所之.城中群犬集扵路上或吠或哭移時而散.有一鬼入宫中大呼曰“百濟亡百濟亡”,即入地.王恠之使人掘地深三尺許有一龜.其背有文“百濟圎月輪新羅如新月”,問之,巫者云“圎月輪者滿也滿則虧,如新月者未滿也未滿則漸盈.”王怒殺之,或曰“圎月輪盛也如新月者微也意者國家盛而新羅寢微乎”,王喜.

현경 사년 기미년에 백제 오회사에〔오합사라고도 한다.〕 큰 붉은 말이 있어 밤낮 여섯 때로 절을 돌며 다녔다.

2월에 여우 떼가 의자왕의 궁 안에 들어왔고, 흰 여우 하나가 좌평의 책상 위에 앉았다.

4월에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어울렸다.

5월에 사비〔부여의 강 이름이다.〕 언덕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었고, 먹은 사람은 다 죽었다.

9월에 궁 안 홰나무가 사람이 우는 것처럼 울고, 밤에 귀신이 궁 남쪽 길에서 울었다.

오년 경신년 봄 2월에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다. 서쪽 바닷가에 작은 물고기가 나와 죽어 백성이 먹어도 다 먹지 못하였고, 사비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

4월에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서울의 저자 사람들이 까닭 없이 놀라 달아나기를 잡으러 오는 이가 있는 듯하니, 놀라 넘어져 죽은 이가 백여 명이고 재물을 잃은 이가 수없이 많았다.

6월에 왕흥사의 승려들이 모두 배의 돛대 같은 것이 큰물을 따라 절 문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들사슴 같은 큰 개가 서쪽에서 사비 언덕에 이르러 왕궁을 향해 짖더니 이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성안의 개들이 길 위에 모여 짖기도 하고 울기도 하다가 한참 만에 흩어졌다.

귀신 하나가 궁 안에 들어와 크게 외쳤다.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 그러고는 곧 땅으로 들어갔다.

왕이 괴이히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석 자쯤 파게 하니 거북 한 마리가 있었다.

그 등에 글이 있어 "백제는 둥근 달이요 신라는 초승달 같다" 하였다.

물으니 무당이 말하였다. "둥근 달은 찬 것이니 차면 기울고, 초승달 같은 것은 아직 차지 않은 것이니 차지 않으면 점점 차 오릅니다."

왕이 노하여 죽였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둥근 달은 성한 것이요 초승달 같은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생각건대 나라는 성하고 신라는 점점 미약해진다는 뜻일 것입니다."

왕이 기뻐하였다.

협주 2

亦云烏合寺

오합사라고도 한다.

扶餘江名

부여의 강 이름이다.

6당나라 군사가 오다

太宗聞百濟國中多恠變,五年庚申遣使仁問請兵.唐髙宗詔左虎衛大将軍荊國公蘇定方爲神丘道行䇿揔管,率左衛将軍劉伯英字仁逺·左虎衛将軍馮士貴·左驍衛将軍龎孝公等統十三万兵來征〔郷記云軍十二万二千七百十一人舡一千九百隻,而唐史不詳言之.〕.以新羅王春秋爲嵎夷道行軍揔管,将其國兵與之合勢.定方引兵自城山濟海至國西徳勿島,羅王遣将軍金庾信領精兵五万以赴之.

태종이 백제 나라 안에 괴변이 많다는 말을 듣고, 오년 경신년에 인문을 사신으로 보내 군사를 청하였다.

당나라 고종이 좌무위대장군 형국공 소정방을 신구도 행책총관으로 삼아, 좌위장군 유백영·좌무위장군 풍사귀·좌효위장군 방효공 등을 거느리고 십삼만 군사를 통솔하여 치러 오게 하였다.

〔우리 기록에는 군사가 십이만 이천칠백열한 사람이고 배가 천구백 척이라 하는데, 당나라 사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신라 왕 춘추를 우이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그 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함께 세력을 합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 서쪽 덕물도에 이르니, 신라 왕이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오만을 거느리고 나아가게 하였다.

협주 1

郷記云軍十二万二千七百十一人舡一千九百隻, 而唐史不詳言之.

우리 기록에는 군사가 십이만 이천칠백열한 사람이고 배가 천구백 척이라 하는데, 당나라 사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7옥에 갇힌 이의 말은 쓸 수 없다

義慈王聞之㑹群臣問戦守之計.佐平義直進曰“唐兵逺渉溟海不習水,羅人恃大國之援有輕敵之心.若見唐人失利必疑懼而不敢銳進.故知先與唐人决戦可也.”逹率常永等曰“不然.唐兵逺來意欲速戰其鋒不可當也.羅人屢見敗於我軍今望我兵勢不得不恐.今日之計冝塞唐人之路以待師老,先使偏師擊羅折其銳氣然後伺其便而合戰,則可淂全軍而保國矣.”王猶預不知所從.時佐平興首得罪流竄于古馬旀知之縣,遣人問之曰“事急矣如何.”首曰“大槩如佐平成忠之說.”大臣䓁不信曰“興首在縲絏之中㤪君而不愛國矣.其言不可用也.莫若使唐兵入白江〔即伎伐浦〕㳂流而不得方舟,羅軍升炭峴由徑而不得並馬,當此之時縱兵擊之,如在籠之雞罹網之魚也.”王曰“然.”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의자왕이 듣고 신하들을 모아 싸울지 지킬지 꾀를 물었다.

좌평 의직이 나아가 말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멀리 바다를 건너와 물에 익숙하지 못하고, 신라 사람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어 적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당나라 사람이 이롭지 못한 것을 보면 반드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날카롭게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당나라 사람과 결전하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달솔 상영 등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가 멀리 와서 빨리 싸우고자 하니 그 날카로움을 당할 수 없습니다.

신라 사람은 우리 군사에게 여러 번 졌으므로 지금 우리 군사의 기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의 계책은 마땅히 당나라 사람의 길을 막아 군사가 지치기를 기다리고, 먼저 일부 군사로 신라를 쳐서 그 날카로운 기운을 꺾은 뒤에 형편을 살펴 함께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군사를 온전히 하고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다."

왕이 머뭇거리며 어느 쪽을 따를지 알지 못하였다.

그때 좌평 흥수(興首)가 죄를 얻어 고마며지현에 귀양 가 있었다. 사람을 보내 물었다. "일이 급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흥수가 말하였다. "대개 좌평 성충의 말과 같습니다."

대신들이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옥에 매인 가운데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쓸 수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를 백강에〔곧 기벌포다.〕 들어오게 하여 물길을 따라 배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를 탄현에 오르게 하여 좁은 길로 말을 나란히 하지 못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때를 당하여 군사를 놓아 치면 마치 새장 속의 닭이요 그물에 걸린 물고기와 같을 것입니다."

왕이 "그렇다" 하였다.

그런데 또 당나라와 신라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들었다.

협주 1

即伎伐浦

곧 기벌포다.

8계백, 네 번 이기고 죽다

遣将軍偕伯帥死士五千出黄山與羅兵戦.四合皆勝之,然兵寡力盡竟敗而偕伯死之.進軍合兵薄津口瀕江屯兵.忽有鳥迴翔於定方營上.使人卜之曰“必傷元帥.”定方懼欲引兵而止,庾信謂定方曰“豈可以飛鳥之恠違天時也.應天順人伐至不仁何不祥之有.”乃拔神釰擬其鳥割裂而墜於座前.於是定方出左涯垂山而陣,與之戰百濟軍大敗.王師乗潮軸轤含尾皷譟而進.定方将歩·騎直趨都城一舎止.城中悉軍拒之又敗死者万餘.

장군 계백(偕伯)을 보내 죽음을 각오한 군사 오천을 거느리고 황산에 나가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다.

네 번 맞붙어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다하여 마침내 지고 계백이 죽었다.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합쳐 나루 어귀에 다가가 강가에 군사를 머물게 하였다.

홀연 새가 있어 소정방의 진영 위를 빙빙 돌았다.

사람을 시켜 점치게 하니 "반드시 원수(元帥)를 다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소정방이 두려워하여 군사를 물리고 그만두려 하니, 유신이 소정방에게 일렀다.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함으로 하늘의 때를 어기겠소. 하늘에 응하고 사람을 따라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무슨 상서롭지 못함이 있겠소."

이에 신령한 칼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갈라져 자리 앞에 떨어졌다.

이에 소정방이 왼쪽 벼랑으로 나와 산을 등지고 진을 쳤고, 함께 싸워 백제 군사가 크게 졌다.

왕의 군사가 밀물을 타고 배들이 꼬리를 물고 북을 치며 나아갔다.

소정방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으로 나아가 삼십 리쯤에 멈추었다.

성안에서 군사를 다 내어 막았으나 또 지니 죽은 이가 만여 명이었다.

9성충의 말을 쓰지 않은 것이 뉘우쳐진다

唐人乗勝薄城,王知不免嘆曰,“悔不用成忠之言以至於此.”遂與太子隆〔或作孝,誤也.〕走北鄙.定方圍其城,王次子泰自立爲王率衆固守,太子之子文思謂王泰曰,“王與太子岀而叔擅爲王,若唐兵解去我䓁安得全”,率左右縋而岀.民皆從之泰不能止.定方令士起堞立唐旗幟,泰窘迫乃開門請命.於是王及太子隆·王子泰·大臣貞福與諸城皆降.定方以王義慈及太子隆·王子泰·王子演及大臣将士八十八人,百姓一万二千八百七人送京師.其國本有五部三十七郡二百城七十六万户,至是析置熊津·馬韓·東明·金漣·徳安等五都督府,擢渠長爲都督刺史以理之.命郎将劉仁願守都城,又左衛郎将王文度爲熊津都督撫其餘衆.定方以所俘見上責而宥之.王病死贈金紫光禄大夫衛尉卿,許舊臣赴臨.詔葬孫皓陳叔寳墓側並爲竪碑.

당나라 사람이 이긴 기세를 타고 성에 다가오니, 왕이 면하지 못할 줄 알고 탄식하였다.

"성충의 말을 쓰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이 뉘우쳐진다."

마침내 태자 융과〔효로 적은 데도 있으나 잘못이다.〕 함께 북쪽 변두리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그 성을 에워싸니,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 태에게 일렀다. "왕과 태자가 나갔는데 숙부가 함부로 왕이 되었으니, 만약 당나라 군사가 물러가면 우리가 어찌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좌우를 거느리고 줄을 타고 나가니 백성이 모두 따랐고 태가 막지 못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시켜 성가퀴에 올라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니, 태가 궁하고 다급하여 이에 문을 열고 목숨을 청하였다.

이에 왕과 태자 융, 왕자 태, 대신 정복이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소정방이 왕 의자와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과 대신·장사 여든여덟 사람, 백성 만 이천팔백일곱 사람을 서울로 보냈다.

그 나라는 본디 다섯 부와 서른일곱 군과 이백 성과 칠십육만 호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웅진·마한·동명·금련·덕안 등 다섯 도독부로 갈라 두고, 우두머리를 뽑아 도독과 자사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낭장 유인원에게 명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고, 또 좌위낭장 왕문도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남은 무리를 어루만지게 하였다.

소정방이 사로잡은 이들을 임금께 보이니 꾸짖고 용서하였다.

왕이 병들어 죽자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을 내리고 옛 신하들이 가서 조상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조서를 내려 손호와 진숙보의 무덤 곁에 장사 지내고 아울러 비를 세우게 하였다.

협주 1

或作孝, 誤也.

효(孝)로 적은 데도 있으나 잘못이다.

10흰 말을 잡아 피를 마시며 맹세하다

新羅別記云,“文虎王即位五年乙丑秋八月庚子王親統大兵幸熊津城㑹假王扶餘隆作壇刑白馬而盟.先祀天神及山川之霊然後歃血爲文而盟曰,“徃者百濟先王迷於逆順不敢隣好不睦親姻,結托句䴡交通倭國共爲殘暴,侵削新羅破邑屠城略無寧歳.… 故立前百濟王司農正卿扶餘隆爲熊津都督守其祭祀保其桑梓,依倚新羅長爲與國各除宿憾結好和親.… 若有乖背二三其徳興兵動衆侵犯邊,陲神明鑒之百殃是降子孫不育社稷無宗禋祀磨滅罔有遺餘.故作金書䥫契藏之宗庙子孫万代無或敢犯,神之聽之是享是福.”歃訖埋㢢帛於壇之壬地藏盟文於大庙.盟文乃帶方都督劉仁䡄作〔按上唐史之文,定方以義慈王及太子隆等送亰師,今云㑹扶餘王隆則知唐帝宥隆而遣之立爲熊津都督也.故盟文明言以此爲験.〕.”

『신라별기』에 이렇게 이른다.

"문무왕 즉위 5년 을축년 가을 8월 경자일에 왕이 몸소 큰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성에 거둥하여 임시 왕인 부여융을 만나, 단을 쌓고 흰 말을 잡아 맹세하였다.

먼저 하늘 신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한 뒤에 피를 마시고 글을 지어 맹세하였다.

'지난날 백제의 앞 임금이 거스름과 따름에 어두워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지 않고 혼인한 겨레와 화목하지 않았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통하여 함께 모질고 사납게 굴어, 신라를 침범하고 깎아 고을을 무너뜨리고 성을 도륙하여 편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전 백제왕 사농정경 부여융을 세워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제사를 지키고 그 고향을 보전하게 하며, 신라에 의지하여 오래도록 함께하는 나라가 되어 각각 묵은 원한을 없애고 좋게 사귀어 화친하게 한다.

만약 어기고 등져 그 덕을 두세 가지로 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 변방을 침범한다면, 신명이 이를 살펴 온갖 재앙을 내리리라.

자손이 자라지 못하고 사직에 제사가 없어지며 제사가 닳아 없어져 남는 것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금으로 쓰고 쇠로 새긴 약속을 지어 종묘에 갈무리하니, 자손 만대에 혹시라도 감히 범하지 말라. 신이 이를 들으시고 흠향하시어 복을 내리소서.'

피를 마시기를 마치고 폐백을 단의 북쪽 땅에 묻고 맹세문을 큰 사당에 갈무리하였다.

맹세문은 곧 대방도독 유인궤가 지었다."

〔위의 당나라 사서 글을 살피건대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융 등을 서울로 보냈다 하였는데, 이제 부여융을 만났다 하니 당나라 임금이 융을 용서하여 보내 웅진도독으로 세운 것을 알겠다. 그러므로 맹세문에 밝히 말하였으니 이로써 증거를 삼는다.〕

협주 1

按上唐史之文, 定方以義慈王及太子隆等送亰師, 今云㑹扶餘王隆則知唐帝宥隆而遣之立爲熊津都督也. 故盟文明言以此爲験.

위의 당나라 사서 글을 살피건대 소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융 등을 서울로 보냈다 하였는데, 이제 부여융을 만났다 하니 당나라 임금이 융을 용서하여 보내 웅진도독으로 세운 것을 알겠다. 그러므로 맹세문에 밝히 말하였으니 이로써 증거를 삼는다.

11난새와 송아지를 그려 보내다

又古記云“緫章元年戊辰〔若緫章戊辰則李勣之事而下文蘇定方誤矣.若定方則年号當龍朔二年壬戌來圍平壌之時也.〕國人之所請唐兵屯于平壤郊而通書曰,“急輸軍資.”王㑹群臣問曰“入於敵國至唐兵屯所其勢危矣.所請王師粮匱而不輸其料亦不冝也如何.”庾信奏曰“臣䓁能輸其軍資,請大王無慮.”於是庾信仁問䓁率數万人入句麗境輸料二万斛乃還,王大喜.又欲興師會唐兵,庾信先遣然起·兵川䓁二人問其㑹期,唐帥蘇定方紙畫鸞犢二物迴之.國人未解其意使問於元曉法師,解之曰“速還其兵.謂畫犢畫鸞二切也.”於是庾信迴軍欲渡浿江令曰,“後渡者斬之.”軍士爭先半渡,句麗兵來掠殺其未渡者.翌日信返追句䴡兵捕殺數万級.”

또 『고기』에 이렇게 이른다.

"총장 원년 무진년에〔만약 총장 무진년이라면 이적의 일이니 아래 글의 소정방은 잘못이다. 만약 소정방이라면 연호가 마땅히 용삭 이년 임술년, 평양을 에워싸러 온 때가 되어야 한다.〕 나라 사람이 청한 당나라 군사가 평양 들에 진을 치고 글을 보냈다. '어서 군량을 보내라.'

왕이 신하를 모아 물었다. "적국에 들어가 당나라 군사가 진 친 곳에 이르는 것은 그 형세가 위태롭다. 그러나 청해 온 왕의 군사가 양식이 떨어졌는데 그 먹을 것을 보내지 않는 것도 마땅하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유신이 아뢰었다. "신들이 그 군량을 보낼 수 있으니 대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소서."

이에 유신과 인문 등이 수만 사람을 거느리고 고구려 지경에 들어가 양식 이만 섬을 보내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또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사와 만나고자 하여, 유신이 먼저 연기와 병천 두 사람을 보내 만날 날을 물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종이에 난새와 송아지 두 가지를 그려 돌려보냈다.

나라 사람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원효법사에게 묻게 하니 풀어 말하였다.

"어서 군사를 돌리라는 말이다. 송아지를 그린 것과 난새를 그린 것, 두 가지를 반절로 읽으라는 뜻이다."

이에 유신이 군사를 돌려 패강을 건너려 하며 명하였다. "뒤에 건너는 자는 벤다."

군사가 앞을 다투어 절반쯤 건넜는데, 고구려 군사가 와서 아직 건너지 못한 이들을 죽였다.

이튿날 유신이 돌이켜 고구려 군사를 뒤쫓아 수만 급을 잡아 죽였다."

협주 1

若緫章戊辰則李勣之事而下文蘇定方誤矣. 若定方則年号當龍朔二年壬戌來圍平壌之時也.

만약 총장 무진년이라면 이적의 일이니 아래 글의 소정방은 잘못이다. 만약 소정방이라면 연호가 마땅히 용삭 이년 임술년, 평양을 에워싸러 온 때가 되어야 한다.

12타사암은 잘못 전해진 말이다

百濟古記云“扶餘城北角有大岩,下臨江水.相傳云義慈王與諸後宫知其未免,相謂曰‘寧自盡不死於他人手’,相率至此投江而死,故俗云墮死岩斯.”乃俚諺之訛也.但宫人之墮死,義慈卒於唐唐史有明文.又新羅古傳云“定方旣討䴡濟二國又謀伐新羅而留連.於是庾信知其謀饗唐兵鴆之皆死坑之.”今尚州界有唐橋,是其坑地〔按唐史不言其所以死,但書云卒何耶為復諱之耶.郷諺之無據耶.若壬戌年高䴡之役羅人殺定方之師,則後緫章戊辰何有請兵㓕高䴡之事.以此知郷傳無據.但戊辰㓕䴡之後有不臣之事擅有其地而已,非至殺蘇·李二公也.〕.

『백제고기』에 이렇게 이른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 강물에 임하였다.

서로 전하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이 면하지 못할 줄 알고 서로 일러 '차라리 스스로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고, 서로 이끌고 여기에 이르러 강에 몸을 던져 죽었으므로 세속에서 타사암(墮死岩)이라 한다."

이는 곧 세속의 말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다만 궁녀들이 떨어져 죽었을 뿐이며, 의자왕은 당나라에서 죽었으니 당나라 사서에 분명한 글이 있다.

또 『신라고전』에 이르기를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친 뒤 또 신라를 치기를 꾀하며 머물러 있었다. 이에 유신이 그 꾀를 알고 당나라 군사를 대접하며 독을 타 모두 죽여 구덩이에 묻었다" 한다.

지금 상주 지경에 당교(唐橋)가 있으니 이것이 그 묻은 자리다.

〔당나라 사서를 살피건대 그가 죽은 까닭을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적었으니 어찌 된 일인가. 다시 꺼려서인가, 우리 세속 말이 근거가 없어서인가.

만약 임술년 고구려 싸움에서 신라 사람이 소정방의 군사를 죽였다면, 뒤에 총장 무진년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한 일이 있겠는가. 이로써 우리나라에 전하는 말이 근거가 없음을 알겠다.〕

협주 1

按唐史不言其所以死, 但書云卒何耶為復諱之耶. 郷諺之無據耶. 若壬戌年高䴡之役羅人殺定方之師, 則後緫章戊辰何有請兵㓕高䴡之事. 以此知郷傳無據. 但戊辰㓕䴡之後有不臣之事擅有其地而已, 非至殺蘇·李二公也.

당나라 사서를 살피건대 그가 죽은 까닭을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적었으니 어찌 된 일인가. 다시 꺼려서인가, 우리 세속 말이 근거가 없어서인가. 만약 임술년 고구려 싸움에서 신라 사람이 소정방의 군사를 죽였다면, 뒤에 총장 무진년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한 일이 있겠는가. 이로써 우리나라에 전하는 말이 근거가 없음을 알겠다. 다만 무진년에 고구려를 멸한 뒤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그 땅을 함부로 차지한 일이 있었을 뿐이지, 소정방과 이적 두 사람을 죽이는 데까지 이른 것은 아니다.

13성부산(星浮山)에서 신술을 베풀다

王師定百濟既還之後,羅王命諸将追捕百濟殘賤屯次于漢山城,髙䴡·靺鞨二國兵來圍之相擊.未解自五月十一日至六月二十二日我兵危甚.王聞之議群臣曰“計将何岀”猶豫未决.庾信馳奏曰“事急矣,人力不可及唯神術可救.”乃於星浮山設壇修神術,忽有光耀如大瓮從壇上而岀乃星飛南北去.漢山城中士卒㤪救兵不至相視哭泣而已.賊欲改急,忽有光耀從南天際來成霹靂擊碎砲石三十餘所賊軍弓箭矛戟籌碎.皆仆地良久乃蘇奔潰而歸.我軍乃還.

왕의 군사가 백제를 평정하고 돌아온 뒤, 신라 왕이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의 남은 무리를 뒤쫓아 잡게 하며 한산성에 진을 쳤다.

고구려와 말갈 두 나라 군사가 와서 에워싸고 서로 쳤다.

5월 열하루부터 6월 스무이틀까지 풀리지 않아 신라 군사가 몹시 위태로웠다.

왕이 듣고 신하들과 의논하며 "장차 어떤 계책을 내겠는가" 하였으나 머뭇거리며 정하지 못하였다.

유신이 달려와 아뢰었다. "일이 급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미칠 수 없고 오직 신묘한 술법만이 구할 수 있습니다."

이에 성부산(星浮山)에 단을 차리고 신술을 닦으니, 홀연 큰 항아리 같은 빛이 단 위에서 나와 별처럼 날아 남북으로 갔다.

한산성 안의 군사들은 구원병이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며 서로 보고 울 뿐이었다.

적이 더욱 다그치려 할 때, 홀연 빛이 남쪽 하늘 끝에서 와서 벼락이 되어 돌을 쏘는 기계 서른 남짓을 쳐서 부수었고, 적군의 활과 화살과 창이 다 부서졌다.

모두 땅에 엎어졌다가 한참 만에 깨어나 흩어져 돌아갔다.

신라 군사도 이에 돌아왔다.

14태종이라는 이름을 고치지 않다

太宗初即位有献猪一頭二身八足者.議者曰“是必并呑六合瑞也.”是王代始服中國衣冠牙笏,乃法師慈藏請唐帝而來傳也.神文王時唐高宗遣使新羅曰“朕之聖考得賢臣魏徴·李淳風等恊心同徳一統天下故爲太宗皇帝,汝新羅海外小國有太宗之号以僣天子之名,義在不忠速改其号.”新羅王上表曰“新羅雖小國得聖臣金庾信一統三國故封爲太宗.”帝見表乃思儲貳時有天唱空云“三十三天之一人降於新羅爲庾信”紀在於書,出撿視之驚懼不已.更遣使許無改太宗之号.

태종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고 발이 여덟인 돼지를 바친 이가 있었다.

의논하는 이가 말하였다. "이는 반드시 천하를 아울러 삼킬 상서입니다."

이 임금 대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과 상아 홀을 썼으니, 곧 법사 자장이 당나라 임금에게 청하여 가져와 전한 것이다.

신문왕 때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짐의 거룩하신 아버지께서 어진 신하 위징과 이순풍 등을 얻어 마음을 합치고 덕을 같이하여 천하를 하나로 하였으므로 태종황제가 되셨다.

너희 신라는 바다 밖 작은 나라인데 태종이라는 이름이 있어 천자의 이름을 함부로 쓰니, 의리에 충성스럽지 못함이 있다. 어서 그 이름을 고치라."

신라 왕이 표를 올렸다.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나 거룩한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하나로 하였으므로 태종으로 봉하였습니다."

임금이 표를 보고 이에 자기가 태자였을 때 하늘에서 공중에 외치기를 '삼십삼천의 한 사람이 신라에 내려와 유신이 되었다' 하던 일을 생각해 냈다.

적어 둔 글이 있어 꺼내어 살펴보고 놀라고 두려워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다시 사신을 보내 태종이라는 이름을 고치지 않아도 좋다고 허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