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대왕金傅大王
1포석정에서 군사가 이른 줄도 몰랐다
金傅大王第五十六金傅大王謚敬順.天成二年丁亥九月,百濟甄萱侵羅至髙鬱府,景哀王請救扵我太祖.命将以勁兵一万往救之,救兵未至,萱以冬十一月掩入王京.王與妃嬪·宗戚逰鮑石亭宴娛,不覺兵至倉卒不知所爲.王與妃奔入後宫,宗戚及公卿大夫士女四散奔走爲賊所虜,無貴賤匍匐乞爲奴婢.萱縱兵摽掠公私財物,入處王宫.乃命左右索王,王與妃妾数人匿在後宮.拘致軍中,逼令王自進而強滛王妑,縱其下亂其嬪妾.乃立王之族弟傅爲王,王爲萱所舉即位.前王尸殯扵西堂與羣下慟哭.我太祖遣使弔祭.
김부대왕.
쉰여섯째 김부대왕은 시호가 경순이다.
천성 이년 정해년 9월에 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여 고울부에 이르니, 경애왕이 우리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장수에게 명하여 굳센 군사 일만으로 가서 구하게 하였는데, 구원병이 이르기 전에 견훤이 겨울 11월에 왕경을 덮쳐 들어왔다.
왕이 왕비와 후궁과 겨레붙이와 함께 포석정에 노닐며 잔치하고 즐기다가, 군사가 이른 줄도 알지 못하여 갑작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왕비가 뒷궁으로 달아나 들어갔고, 겨레붙이와 공경대부와 남녀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 도적에게 사로잡혔다. 귀천 없이 기어 다니며 종이 되기를 빌었다.
견훤이 군사를 놓아 공사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왕궁에 들어가 자리 잡았다.
이에 좌우에게 명하여 왕을 찾게 하니, 왕이 왕비와 첩 몇 사람과 뒷궁에 숨어 있었다.
군중에 붙들어 오게 하여 왕을 다그쳐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아랫사람을 놓아 후궁들을 어지럽혔다.
이에 왕의 겨레 아우 부(傅)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워 즉위한 것이다.
앞 임금의 주검을 서당에 빈소로 모시고 신하들과 통곡하였다.
우리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하였다.
2견씨가 왔을 때는 이리와 범을 만난 듯
明年戊子春三月,太祖率五十餘騎巡到京畿,王與百官郊迎入宮相對曲盡情禮,置宴臨海殿.酒酣,王言曰.“吾以不天侵致禍亂,甄萱恣行不義喪我國家,何痛如之.”因泫然涕泣左右莫不鳴咽,太祖亦流涕.因留数旬乃迴駕,麾下肅靜不犯秋毫.都人士女相慶曰,“昔甄氏之來也如逢犲虎,今王公之至如見父母.”八月太祖遣使遺王錦衫鞍馬,并賜羣僚将士有差.
이듬해 무자년 봄 3월에 태조가 오십여 기를 거느리고 서울 지경에 이르렀다.
왕이 백관과 함께 들에 나가 맞아 궁에 들여 마주하고 정과 예를 곡진히 다하였으며, 임해전에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얼근할 때 왕이 말하였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해 화란을 부르게 되었고, 견훤이 의롭지 못한 일을 함부로 행하여 내 나라를 잃게 하였으니 이보다 아픈 일이 어디 있겠소."
이내 줄줄 눈물을 흘리니 좌우가 흐느끼지 않는 이가 없었고, 태조 또한 눈물을 흘렸다.
이내 여러 날을 머물다가 수레를 돌렸는데, 거느린 군사가 조용하여 터럭만큼도 침범하지 않았다.
서울의 남녀가 서로 경사로 여기며 말하였다.
"옛날 견씨가 왔을 때는 이리와 범을 만난 듯하더니, 이제 왕공이 이르니 부모를 뵙는 듯하다."
8월에 태조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비단옷과 안장 얹은 말을 주고, 아울러 여러 신하와 장수에게도 차등을 두어 내렸다.
3천 년 사직을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습니다
清泰二年乙未十月,以四方地盡爲他有,國弱勢孤不已自安.乃與羣下謀舉土降太祖.羣臣可否紛然不已.王太子曰,“國之存王必有天命,當與忠臣·義士収合心力盡而後已,豈可以一千年之社稷軽以與人.”王曰“孤危若此勢不能全.旣不能強又不能弱,至使無辜之民肝腦塗地,吾所不能忍也.”乃使侍郎金封休齎書請降扵太祖.太子哭泣辭王,徑徃皆骨山麻衣草食以終其身.季子祝髮隷華嚴為浮圖名梵空,後住法水海印寺云.
청태 이년 을미년 10월에, 사방의 땅이 다 남의 것이 되고 나라가 약하고 형세가 외로워 스스로 편안할 수 없었다.
이에 신하들과 함께 땅을 들어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꾀하였다. 신하들의 옳고 그름을 다투는 말이 어지러이 그치지 않았다.
왕태자가 말하였다.
"나라가 있고 없음은 반드시 하늘의 명이 있습니다. 마땅히 충신·의사와 함께 민심을 거두어 힘을 다한 뒤에 그만두어야지, 어찌 천 년 사직을 가벼이 남에게 주겠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외롭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형세가 온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하지도 못하고 또 약하지도 못하여, 죄 없는 백성이 간과 뇌를 땅에 바르게 하는 데 이르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바다."
이에 시랑 김봉휴에게 글을 가지고 가서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태자가 울며 왕에게 하직하고 곧장 개골산으로 가서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그 몸을 마쳤다.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에 매여 승려가 되니 이름을 범공이라 하였고, 뒤에 법수사와 해인사에 머물렀다 한다.
협주 1
存王
저본은 「存王」이나 「存亡」의 잘못으로 보아 「있고 없음」으로 옮겼다.
4향기로운 수레가 삼십 리에 이어지다
太祖受書,送太相王䥫迎之.王率百僚歸我太祖.香車寳馬連亘三十餘里道路塡咽,觀者如堵.太祖出郊迎勞賜宮東一區〔今正承院〕,以長女樂浪公主妻之.以王謝自國居他國故,以鸞喻之攺號神鸞公主,謚孝穆.封爲正承,位在太子之上,給禄一千石.侍從·貟·將皆録用之,攺新羅爲慶州以爲公之食邑.
태조가 글을 받고 태상 왕철을 보내 맞이하게 하였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 돌아왔다.
향기로운 수레와 보배로운 말이 삼십여 리에 잇달아 길을 메웠고, 보는 이가 담처럼 늘어섰다.
태조가 들에 나와 맞아 위로하고 궁 동쪽 한 구역을〔지금의 정승원이다.〕 내렸으며, 맏딸 낙랑공주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왕이 제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살게 되었으므로 난새에 견주어 이름을 신란공주로 고쳤고 시호를 효목이라 하였다.
정승으로 봉하니 자리가 태자의 위였고 녹으로 천 섬을 주었다.
모시고 따르던 관원과 장수를 모두 적어 등용하였고,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여 공의 식읍으로 삼았다.
협주 1
今正承院
지금의 정승원이다.
5혼인으로 맺다
初王納土來降,太祖喜甚待之厚禮,使告曰.“今王以國與寡人其爲賜大矣.願結婚扵宗室以永甥舅之好.”王荅曰“我伯父億廉〔王之考孝宗角干追封神興大王之弟也.〕有女子,徳容雙羙.非是無以備内政.”太祖娶之,是爲神成王后金氏.〔本朝登仕郎金寬毅所撰王代宗録云.“神成王后李氏夲慶州大尉李正言爲俠州守時,太祖幸此州納爲妃,故或云俠州君.… ”此外二十五妃主中不載金氏之事,未詳.然而史臣之論亦以安宗爲新羅外孫,當以史傳爲是.〕太祖之孫景宗伷聘政承公之女爲妃,是為憲承皇后.仍封政承為尚父.太平興國三年戊寅崩,謚曰敬順.
처음에 왕이 땅을 바쳐 항복해 오니 태조가 몹시 기뻐 두터운 예로 대접하고, 사람을 시켜 알렸다.
"이제 왕이 나라를 과인에게 주시니 그 내려 주심이 큽니다. 원컨대 종실과 혼인을 맺어 사위와 장인의 좋은 사이를 길이 하고자 합니다."
왕이 대답하였다. "저의 백부 억렴에게〔왕의 아버지 효종 각간을 추봉한 신흥대왕의 아우다.〕 딸이 있어 덕과 얼굴이 다 아름답습니다. 이가 아니면 안살림을 갖출 수 없습니다."
태조가 맞이하니 이가 신성왕후 김씨다.
〔본조 등사랑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에 이르기를 '신성왕후 이씨는 본디 경주 대위 이정언이 협주 수령이 되었을 때 태조가 이 고을에 거둥하여 맞아 왕비로 삼았으므로 협주군이라고도 한다' 하였다. 이 밖에 스물다섯 왕비 가운데 김씨의 일이 실려 있지 않으니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사신의 논에도 안종을 신라의 외손이라 하였으니 마땅히 사전을 옳다고 해야 한다.〕
태조의 손자 경종 주가 정승공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으니 이가 헌승황후다.
이내 정승을 봉하여 상보(尙父)로 삼았다.
태평흥국 삼년 무인년에 세상을 떠나니 시호를 경순이라 하였다.
협주 2
王之考孝宗角干追封神興大王之弟也.
왕의 아버지 효종 각간을 추봉한 신흥대왕의 아우다.
本朝登仕郎金寬毅所撰王代宗録云. “神成王后李氏夲慶州大尉李正言爲俠州守時, 太祖幸此州納爲妃, 故或云俠州君.” 此外二十五妃主中不載金氏之事, 未詳. 然而史臣之論亦以安宗爲新羅外孫, 當以史傳爲是.
본조 등사랑 김관의가 지은 『왕대종록』에 이르기를 '신성왕후 이씨는 본디 경주 대위 이정언이 협주 수령이 되었을 때 태조가 이 고을에 거둥하여 맞아 왕비로 삼았으므로 협주군이라고도 한다' 하였다. 이 밖에 스물다섯 왕비 가운데 김씨의 일이 실려 있지 않으니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사신의 논에도 안종을 신라의 외손이라 하였으니 마땅히 사전을 옳다고 해야 한다.
6사론이 말한다
史論曰.“新羅朴氏·昔氏皆自卵生.金氏從天入金撌而降,或云乗金車,此尤詭恠不可信.然世俗相傳為實事.今但厚厥初,在上者其為己也儉,其爲人也寬.其設官也略,其行事也簡.以至誠事中國梯航朝聘之使相續不絶.常遣子弟造朝宿衛入學而誦習.于以襲聖賢之風化革鴻荒之俗,為禮義之邦.又憑王師之威霊平百濟·髙句麗,取其地郡縣可謂盛矣.然而奉浮屠之法不知其弊,至使閭里比其塔廟,齊民逃扵緇褐兵農侵小,而國家日衰,㡬何其不亂且三也㢤.
사론에 이렇게 이른다.
"신라의 박씨와 석씨는 모두 알에서 났다. 김씨는 하늘에서 금궤에 들어 내려왔다 하고 혹은 금수레를 탔다 하니, 이는 더욱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세속에 서로 전하여 사실로 여긴다.
이제 다만 그 처음을 두터이 보면, 윗자리에 있는 이가 제 몸에는 검소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웠다. 관직을 두는 것이 간략하고 일을 행하는 것이 간소하였다.
지극한 정성으로 중국을 섬겨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조회하는 사신이 잇달아 끊이지 않았다. 늘 자제를 보내 조정에 나아가 숙위하고 학교에 들어가 익히게 하였다.
이로써 성현의 풍속을 이어받아 거친 풍속을 고쳐 예의의 나라가 되었다.
또 왕의 군사의 위엄에 기대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땅을 군현으로 삼았으니 성하다 이를 만하다.
그러나 부처의 법을 받들되 그 폐단을 알지 못하여, 마을마다 탑과 절이 늘어서고 백성이 먹물 옷으로 달아나 군사와 농사가 점점 줄어들었다. 나라가 날로 쇠하였으니 어찌 어지럽고 망하지 않겠는가."
협주 1
亂且三
저본은 「亂且三」이나 「亂且亡」의 잘못으로 보아 「어지럽고 망하지」로 옮겼다.
7항복이 도리어 아름답다
扵是時景哀王加之以荒樂,與宫人左右出逰鮑石亭置酒燕衛,不知甄萱之至,與門外韓檎虎樓頭張麗華無以異矣.若敬順之歸命太祖雖非獲已亦可佳矣.向若力戰守死以抗王師,至扵力屈勢窮即必覆其宗族害及于無辜之民.而乃不待告命,封府庫籍群難以歸之,其有㓛扵朝廷有徳扵生民甚大.昔錢民以吳越入宋,蘇子瞻謂之忠臣,今新羅㓛徳過扵彼逺矣.我太祖妃嬪衆多,其子孫亦繁衍.而顯宗自新羅外孫即寳位,此後継統者皆其子孫,豈非隂徳也歟.新羅旣納土國除,阿干神會罷外署还,見都城離潰有黍離離嘆乃作歌,歌亡未詳.
"이때에 경애왕은 거기에 거친 놀이를 더하여, 궁인과 좌우와 함께 포석정에 나가 노닐며 술자리를 벌이고 즐기다가 견훤이 이른 줄도 알지 못하였다.
문밖의 한금호와 다락 위의 장려화와 다를 것이 없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목숨을 맡긴 것은 비록 마지못한 일이나 또한 아름답다 할 만하다.
만약 힘써 싸워 죽음을 무릅쓰고 왕의 군사에 맞섰다가 힘이 꺾이고 형세가 다하는 데 이르렀다면, 반드시 그 겨레붙이가 뒤엎이고 해가 죄 없는 백성에게까지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명을 기다리지 않고 창고를 봉하고 고을을 문서로 적어 바쳤으니, 그 조정에 세운 공과 백성에게 베푼 덕이 매우 크다.
옛날 전씨가 오월을 가지고 송나라에 들어가자 소자첨이 그를 충신이라 하였는데, 이제 신라의 공과 덕은 그보다 훨씬 낫다.
우리 태조는 왕비와 후궁이 많아 그 자손 또한 번성하였다. 그런데 현종이 신라의 외손으로 보위에 오르고, 그 뒤로 대를 이은 이가 모두 그 자손이니 어찌 남모르게 쌓은 덕이 아니겠는가."
신라가 이미 땅을 바쳐 나라가 없어지자, 아간 신회가 바깥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도성이 무너진 것을 보고 기장이 우거진 것을 탄식하는 마음이 있어 노래를 지었다. 노래는 없어져 자세하지 않다.
협주 1
籍群
저본은 「籍群」이나 「郡縣」을 문서로 적었다는 뜻으로 보아 「고을을 문서로 적어」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