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와 견훤後百濟·甄萱
1본디 성은 이씨였다
後百濟甄萱三國史本傳云,“甄萱尚州加恩縣人也,咸通八年丁亥生.本姓李,後以甄為氏.父阿慈个以農自活,光啓中㨿沙弗城〔今尚州〕自稱将軍.有四子皆知名扵世.萱號傑出多智略.”李碑家記云,“真興大王妃思刀謚曰白𪀚夫人.第三子仇輪公之子,波珎干善品之子角干酌珎妻王咬巴里,生角干元善,是為阿慈个也.慈之弟一妻上院夫人,第二妻南院夫人,生五子一女.其長子是尚父萱,二子将軍能哀,三子将軍龍盖,四子寳盖,五子将軍小盖,一女大主刀金.”
후백제와 견훤.
『삼국사』 본전에 이르기를 이러하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이며 함통 팔년 정해년에 태어났다. 본디 성은 이씨였는데 뒤에 견(甄)으로 성을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로 살다가 광계 연간에 사불성에〔지금의 상주다.〕 웅거하여 스스로 장군이라 일컬었다.
아들 넷이 있어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견훤은 뛰어나다 일컬어졌고 지략이 많았다."
「이비가기」에 이르기를, 진흥대왕의 비 사도는 시호가 백융부인이며, 셋째 아들 구륜공의 아들이요 파진간 선품의 아들인 각간 작진의 아내 왕교파리가 각간 원선을 낳으니 이가 아자개라 한다.
아자개의 첫째 아내는 상원부인이요 둘째 아내는 남원부인인데,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맏아들이 상보 견훤이요, 둘째는 장군 능애, 셋째는 장군 용개, 넷째는 보개, 다섯째는 장군 소개, 딸 하나는 대주도금이다.
협주 1
今尚州
지금의 상주다.
2실에 꿰인 바늘이 지렁이 허리에 꽂히다
又古記云.“昔一富人居光州北村.有一女子姿容端正.謂父曰,‘每有一紫衣男到寢交㛰.’父謂曰,‘汝以長絲貫針刺其衣.’從之.至明尋絲扵北墻下,針刺扵大蚯蚓之腰.後因姙生一男,年十五自稱甄萱.至景福元年壬子,稱王立都扵完山郡.理四十三年以清泰元年甲午,萱之三子簒逆,萱投太祖.子金剛即位,天福元年丙申與髙麗兵會戰扵一善郡,百濟敗績國亡云.”初萱生孺褓時,父耕于野.母餉之以兒置于林下,虎來乳之,郷黨聞者異焉.及壮體皃雄竒,志倜儻不凡.
또 『고기』에 이렇게 이른다.
"옛날 어떤 부자가 광주 북촌에 살았다. 딸 하나가 있어 얼굴과 자태가 단정하였다.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늘 자줏빛 옷 입은 사내가 잠자리에 와서 사귑니다.'
아버지가 말하였다. '너는 긴 실에 바늘을 꿰어 그 옷에 꽂아라.'
그대로 하였다.
날이 밝아 실을 찾으니 북쪽 담 아래에서 바늘이 큰 지렁이 허리에 꽂혀 있었다.
뒤에 이로 인해 아이를 배어 사내를 낳으니, 나이 열다섯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
경복 원년 임자년에 이르러 왕이라 일컫고 완산군에 도읍을 세웠다.
마흔세 해를 다스리다가 청태 원년 갑오년에 견훤의 세 아들이 반역하였고, 견훤은 태조에게 몸을 던졌다.
아들 금강이 즉위하였는데, 천복 원년 병신년에 고려 군사와 일선군에서 싸워 백제가 패하여 나라가 망하였다 한다."
처음에 견훤이 강보에 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았다.
어머니가 밥을 내가느라 아이를 숲 아래에 두었더니 범이 와서 젖을 먹였다. 마을에서 들은 이가 기이히 여겼다.
자라서 몸과 얼굴이 웅장하고 기이하며 뜻이 활달하여 범상하지 않았다.
3묵은 분함을 씻으리라
從軍入王京,赴西南海防戍,枕戈待敵其氣恒為士卒先,以勞為裨将.唐昭宗景福元年,是新羅真聖王在位六年.嬖竪在側竊弄國權綱紀紊弛,加之以飢饉百姓流移群盗蜂起.扵是萱竊有叛心,嘯聚徒侣行撃京西南州縣,所至響應旬月之間衆至五千.遂襲武珎州自王,猶不敢公然稱王,自署為新羅西南都統行全州刺史兼御史中承上柱國漢南國開國公.龍化元年己酉也.一云景福元年壬子.是時北原賊良吉雄強,弓裔自投為麾下.萱聞之遥授良吉職為裨將.萱西廵至皃山州,州民迎勞.喜得人心謂左右曰.“百濟開國六百餘年,唐髙宗以新羅之請遣將軍蘇定方以舡兵十三万越海,新羅金庾信卷土歴黄山,與唐兵合攻百濟滅之.予今敢不立都以雪宿憤乎.”遂自稱後百濟王,設官分職,是唐光化三年,新羅孝恭王四年也.
군사를 따라 왕경에 들어갔다가 서남해의 수비로 나아갔는데, 창을 베고 적을 기다려 그 기개가 늘 사졸의 앞에 섰으므로 공로로 비장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 경복 원년은 곧 신라 진성왕 재위 6년이다.
총애하는 이들이 곁에서 나라의 권세를 몰래 희롱하여 기강이 어지럽고 느슨해졌으며, 거기에 굶주림이 더하여 백성이 흩어지고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이 남몰래 배반할 마음을 품고 무리를 불러 모아 서울의 서남쪽 주와 현을 쳤다.
이르는 곳마다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열흘에서 한 달 사이에 무리가 오천에 이르렀다.
마침내 무진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오히려 감히 드러내어 왕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스스로 '신라 서남도통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국 개국공'이라 서명하였다.
용화 원년 기유년이며, 경복 원년 임자년이라고도 한다.
이때 북원의 도적 양길이 웅장하고 강하여 궁예가 스스로 몸을 던져 그 아래가 되었다.
견훤이 듣고 멀리서 양길에게 벼슬을 주어 비장으로 삼았다.
견훤이 서쪽으로 돌아 완산주에 이르니 고을 백성이 맞아 위로하였다.
인심을 얻은 것이 기뻐 좌우에게 일렀다.
"백제가 나라를 연 지 육백여 해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청으로 장군 소정방을 보내 배로 십삼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고, 신라 김유신이 땅을 휩쓸 듯 밀고 나아가 황산을 지나 당나라 군사와 합쳐 백제를 쳐서 멸하였다.
내가 이제 어찌 감히 도읍을 세워 묵은 분함을 씻지 않겠는가."
마침내 스스로 후백제 왕이라 일컫고 관직을 두어 일을 나누었다. 당나라 광화 삼년이며 신라 효공왕 4년이다.
협주 1
皃山州
저본은 「皃山州」이나 「完山州」의 잘못으로 보아 「완산주」로 옮겼다.
4겉으로는 화친하고 속으로는 겨루다
貞明四年戊寅,䥫原京衆心忽變,推戴我太祖即位.萱聞之遣使稱賀,遂獻孔雀扇地理山竹箭等.萱與我太祖陽和隂尅獻驄馬扵太祖,三年冬十月萱率三千騎至曹物城.太祖亦以精兵來與之角.萱兵銳未决勝負.太祖欲權和以老其師,移書乞和以堂弟王信為質,萱亦以外甥真虎交質.十二月攻取居西等二十餘城,遣使入後唐稱藩.四年真虎暴卒,疑故殺即囚王信,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太祖笑還之.
정명 사년 무인년에 철원경의 뭇 마음이 홀연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즉위하게 하였다.
견훤이 듣고 사신을 보내 하례하고, 마침내 공작 부채와 지리산 대나무 화살 등을 바쳤다.
견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고 속으로는 겨루면서 총마를 태조에게 바쳤다.
삼년 겨울 10월에 견훤이 삼천 기를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다.
태조 또한 정예 군사로 와서 겨루었다. 견훤의 군사가 날카로워 승부가 나지 않았다.
태조가 잠시 화친하여 그 군사를 지치게 하려고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며 사촌 아우 왕신을 볼모로 삼으니, 견훤 또한 생질 진호를 보내 서로 볼모를 삼았다.
12월에 거서 등 스무 남짓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 번국이라 일컬었다.
사년에 진호가 갑자기 죽으니, 일부러 죽인 것이라 의심하여 곧 왕신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 지난해에 보낸 총마를 돌려 달라 하였다.
태조가 웃으며 돌려주었다.
5포석정을 덮치다
天成二年丁亥九月,萱攻取近品城燒之,新羅王求救於太祖.太祖将出帥,萱襲取髙鬱府,進軍族始林卒入新羅王都.新羅王與夫人出遊鮑石亭時,由是甚敗.萱強引夫人乱之,以王之族弟金傅嗣位.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又取國珎寳兵仗子女百工之巧者自隨以歸.太祖以精騎五千要萱於公山下大戰.太祖之將金樂·崇謙死之諸軍敗北,太祖僅以身免.而不與相抵使盈其貫.萱乗勝轉掠大木城·京山府·康州,攻缶谷城.又義成府之守洪述拒戰而死.太祖聞之曰,“吾失右手矣.”
천성 이년 정해년 9월에 견훤이 근품성을 쳐서 빼앗고 불살랐다. 신라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가 장차 군사를 내려 하는데, 견훤이 고울부를 습격해 빼앗고 시림으로 군사를 나아가게 하여 갑자기 신라 왕도에 들어갔다.
신라 왕이 부인과 포석정에 나가 노닐 때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몹시 무너졌다.
견훤이 억지로 부인을 끌어다 욕보이고, 왕의 겨레 아우 김부로 자리를 잇게 하였다.
그런 뒤에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을 사로잡고, 또 나라의 보배와 병장기와 자녀와 온갖 재주 있는 장인을 데리고 돌아갔다.
태조가 정예 기병 오천으로 공산 아래에서 견훤을 맞아 크게 싸웠다.
태조의 장수 김락과 신숭겸이 죽고 여러 군사가 패하여 달아났으며,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그러면서 맞서지 않고 그 죄가 차기를 기다렸다.
견훤이 이긴 기세를 타고 대목성과 경산부와 강주를 옮겨 가며 노략하고 부곡성을 쳤다.
또 의성부의 수령 홍술이 맞서 싸우다 죽었다.
태조가 듣고 말하였다. "내가 오른팔을 잃었다."
6태조가 보낸 답서
二年正月太祖荅曰.“… 僕仰承天假俯迫人推,過叨将帥之權獲赴經綸之㑹.… 及至癸酉年維時陽月,忽焉生事至乃交兵.足下始軽敵以直前若螳蜋之拒轍,終知難而勇退如蚊子之負山.拱手陳辝指天作誓,‘今日之後永世歡和,苟或渝盟神其殛矣.’僕亦尚止戈之㱏期不殺之仁,遂解重圍以休疲卒,不辝質子,但欲安民.此即我有大徳於南人也.豈期歃血未乾,凶威復作蜂蠆之毒侵害於生民,狼虎之狂為梗於畿甸,金城窘忽黄屋震驚.… 足下見毫釐之小利,忘天地之厚恩,斬戮君主焚燒宮闕,葅醢卿佐虔劉士民.姬姜則取以同車,珎寳則奪之相載,元惡浮於桀·紂,不仁甚於獍梟.… 若不過而能攺,其如悔不可追.”〔書乃崔致逺作也.〕
이년 정월에 태조가 답하여 이렇게 이른다.
"저는 우러러 하늘이 빌려 주심을 받들고 굽어 사람들이 밀어 줌에 몰려, 외람되이 장수의 권한을 맡고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에 나아갔습니다.
계유년 시월에 이르러 홀연 일이 생겨 마침내 군사를 맞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족하는 처음에 적을 가벼이 여겨 곧장 나아가기를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맞서듯 하더니, 끝내 어려운 줄 알고 용감히 물러나기를 모기가 산을 지듯 하였습니다.
손을 모아 말을 늘어놓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오늘 뒤로는 길이 화목하리니, 만약 맹세를 어기면 신이 벌하리라' 하였습니다.
저 또한 창을 그치는 무(武)를 숭상하고 죽이지 않는 어짊을 기약하여, 마침내 겹겹의 에움을 풀어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볼모를 사양하지 않았으니 다만 백성을 편안히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제가 남쪽 사람에게 베푼 큰 덕입니다.
어찌 피를 마신 맹세가 마르기도 전에 흉한 위세가 다시 일어나, 벌과 전갈의 독이 백성을 해치고 이리와 범의 미친 짓이 서울 언저리를 막을 줄 알았겠습니까.
족하는 터럭만 한 작은 이로움을 보고 하늘과 땅의 두터운 은혜를 잊어, 임금을 베어 죽이고 궁궐을 불사르며, 재상을 젓 담그고 백성을 죽였습니다. 부녀자는 수레에 함께 태워 데려가고 보배는 빼앗아 실어 갔습니다.
악함이 걸왕과 주왕보다 넘치고 어질지 못함이 올빼미보다 심합니다.
만약 허물을 고치지 못한다면 뉘우쳐도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글은 곧 최치원이 지은 것이다.〕
협주 1
書乃崔致逺作也.
이 글은 곧 최치원이 지은 것이다.
7형세가 뒤집히다
長興三年甄萱臣龔直勇而有智略來降太祖,萱捉龔直二子一女烙断股筯.秋九月萱遣一吉以舡兵入髙麗禮城江留三日,取塩·白·真三州船一百艘焚之而去.清泰元年甲午,萱聞太祖屯運州,遂簡甲士蓐食而至末及營壘,将軍黔弼以勁騎撃之斬獲三千餘級,熊津以北三十餘城聞風自降,萱麾下術士宗訓·醫者之謙·勇将尚逢·雀弼等降於太祖.
장흥 삼년에 견훤의 신하 공직이 용맹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태조에게 항복해 왔다.
견훤이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잡아 불로 지지고 다리 힘줄을 끊었다.
가을 9월에 견훤이 일길을 보내 배로 고려 예성강에 들어가 사흘을 머물며, 염주·백주·진주 세 고을의 배 백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갔다.
청태 원년 갑오년에 견훤이 태조가 운주에 진을 쳤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갑옷 입은 군사를 골라 자리에서 밥을 먹고 이르렀으나 아직 진지에 미치기 전이었다.
장군 유금필이 굳센 기병으로 쳐서 삼천여 급을 베어 얻었다.
웅진 이북 서른여 성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항복하였고, 견훤 아래의 술사 종훈과 의원 지겸, 용맹한 장수 상봉과 최필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8아들들이 아버지를 절에 가두다
丙申正月萱謂子曰.“老夫新羅之季立後百濟名,有年于今矣.兵倍於北軍尚爾不利,殆天假手為高麗.盖歸順於北王保首領矣.”其子神劒·龍劒·良劒等三人皆不應.萱多妻妾有子十餘人,第四子金剛身長而多智,萱特愛之意欲傳位,其兄神劒·良劒·龍劒知之憂㦖.時良劍為康州都督,龍劒為正州都督,獨神劒在側.伊飱能奐使人徃康·㱏二州與良劒等謀.至清泰二年乙未春三月,與英順等勸神劍幽萱於金山佛宇,遣人殺金剛.神劍自稱大王赦境内.初萱寢未起遥聞宫庭呼㖤聲,問是何聲歟,告父曰.“五年老暗於軍國政要,長子神劒攝父王位,而諸將歡賀聲也.”俄移父於金山佛宇,以巴逹等壮士三十人守之,童謠曰.可憐完山兒,失父涕連洒.
병신년 정월에 견훤이 아들들에게 일렀다.
"이 늙은이가 신라 말에 후백제라는 이름을 세운 지 이제 여러 해다.
군사가 북쪽 군사의 갑절인데도 오히려 이롭지 못하니, 아마 하늘이 고려에 손을 빌려 준 듯하다.
대개 북쪽 임금에게 돌아가 붙어 목숨을 보전함이 옳겠다."
그 아들 신검·용검·양검 세 사람이 모두 응하지 않았다.
견훤은 아내와 첩이 많아 아들이 열 몇이었는데,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아 견훤이 특별히 사랑하여 자리를 물려주려 하였다.
그 형 신검·양검·용검이 이를 알고 근심하고 번민하였다.
그때 양검은 강주 도독이요 용검은 정주 도독이며 오직 신검만 곁에 있었다.
이찬 능환이 사람을 강주와 정주 두 고을에 보내 양검 등과 꾀하였다.
청태 이년 을미년 봄 3월에 이르러, 영순 등과 함께 신검에게 권하여 견훤을 금산의 절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 금강을 죽였다.
신검이 스스로 대왕이라 일컫고 지경 안에 사면하였다.
처음에 견훤이 자다가 아직 일어나기 전에 멀리 궁 뜰에서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아버지께 아뢰었다. "왕께서 늙으시어 군사와 나라의 요긴한 정사에 어두우시므로, 맏아들 신검이 아버지의 왕위를 대신하게 되어 여러 장수가 기뻐 하례하는 소리입니다."
이윽고 아버지를 금산의 절로 옮기고 파달 등 장사 서른 사람으로 지키게 하였다.
아이들의 노래에 이렇게 이른다.
가엾다 완산 아이야 아비를 잃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구나.
협주 1
五年老
저본은 「五年老」이나 「王年老」의 잘못으로 보아 「왕께서 늙으시어」로 옮겼다.
9지키던 군사를 취하게 하고 달아나다
萱與後宫年少男女二人·侍婢古比女·内人能又男等囚繫.至四月釀酒而飮醉守卒三十人.而與小元甫香又·吳琰·忠質等以海路迎之.旣至以萱為十年之長,尊號為尚父,安置于南宫,賜楊州食邑·田㽵·奴婢四十口馬九匹,以其國先來降者信康為衙前.
견훤은 후궁의 젊은 남녀 둘과 시비 고비녀, 내인 능우남 등과 함께 갇혀 있었다.
4월에 이르러 술을 빚어 지키던 군사 서른 사람을 취하게 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소원보 향우·오염·충질 등을 보내 바닷길로 견훤을 맞아 오게 하였다.
이르자 견훤이 열 살 위라 하여 상보(尙父)라 높여 부르고 남궁에 머물게 하였다.
양주를 식읍으로 주고 밭과 농장과 노비 마흔 명과 말 아홉 필을 내렸으며, 그 나라에서 먼저 와 항복한 신강을 아전으로 삼았다.
10정녀는 두 남편을 두지 않는다
甄萱婿将軍英䂓密語其妻曰.“大王勤勞四十餘年㓛業垂成,一旦以家人之禍失地從於髙麗.夫貞女不可二夫,忠臣不事二主.若捨己君以事逆子耶,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况聞髙麗王公仁厚懃儉以得民心,殆天啓也.必為三韓之主,盍致書以安慰我王,兼慇懃於王公以圖後來之福乎.”妻曰“子之言是吾意也.”於是天福元年丙申二月,遣人致意於太祖曰.“君舉義旗請為内應以迎王師.”太祖喜厚賜其使者遣之,謝英䂓曰,“若蒙恩一合無道路之梗,即先致謁於将軍然後升堂拜夫人兄事而姊尊之,必終有以厚報之.天地鬼神皆聞此語.”
견훤의 사위 장군 영규가 그 아내에게 몰래 말하였다.
"대왕이 사십여 해를 애쓰시어 공업이 이루어지려는데, 하루아침에 집안사람의 화로 땅을 잃고 고려를 따르셨소.
무릇 정녀는 두 남편을 두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하였소.
만약 제 임금을 버리고 거스른 아들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로운 선비를 보겠소.
하물며 듣건대 고려 왕공은 어질고 두터우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민심을 얻었다 하니 아마 하늘이 열어 준 것이오. 반드시 삼한의 주인이 될 것이오.
어찌 글을 보내 우리 임금을 위로하고, 아울러 왕공께 정성을 다하여 뒷날의 복을 도모하지 않겠소."
아내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이 곧 내 뜻입니다."
이에 천복 원년 병신년 2월에 사람을 보내 태조에게 뜻을 전하였다.
"임금께서 의로운 깃발을 드시면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사를 맞이하기를 청합니다."
태조가 기뻐하여 그 심부름꾼에게 두터이 내리고 보내며 영규에게 사례하였다.
"만약 은혜를 입어 하나로 합치고 길이 막힘이 없게 되면, 곧 먼저 장군께 뵙기를 드리고 그런 뒤에 마루에 올라 부인께 절하여 형으로 섬기고 누이로 높이며, 반드시 끝내 두터이 갚겠소. 하늘과 땅의 귀신이 모두 이 말을 들었소."
11흰 구름이 칼과 창처럼 일다
六月萱告太祖,“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願仗殿下威稜以誅逆子耳,伏望大人借以神兵殱其賊乱,臣雖死無憾.”太祖曰“非不欲討之,待其時也.”先遣太子及㱏将軍述希領歩騎十万趣天安府,秋九月太祖率三軍至天安,合兵進次一善,神劒以兵逆之.甲午隔一利川相對,王師背艮向坤而陳.太祖與萱觀兵,忽白雲狀如劒戟起我師向彼行焉.乃皷行而進,百濟将軍孝奉·徳述·哀述·明吉等望兵勢大而整,弃甲降於陣前.太祖勞慰之問将帥所在,孝奉等曰,“元帥神劒在中軍.”太祖命将軍公萱等三軍齊進挾撃,百濟軍潰北.至黃山炭峴,神劒與二弟将軍冨逹·能奐等四十餘人生降.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아뢰었다.
"늙은 신하가 전하께 몸을 던진 까닭은 전하의 위엄에 기대어 거스른 아들을 베고자 함일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인께서 신령한 군사를 빌려 그 도적과 난리를 없애 주신다면 신은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말하였다. "치고자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때를 기다릴 뿐이오."
먼저 태자와 장군 술희를 보내 보병과 기병 십만으로 천안부로 나아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태조가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이르러 군사를 합쳐 일선에 나아가 머무니, 신검이 군사로 맞섰다.
갑오일에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니, 왕의 군사가 동북쪽을 등지고 서남쪽을 향해 진을 쳤다.
태조가 견훤과 함께 군사를 살피는데, 홀연 흰 구름이 칼과 창 모양으로 고려 군사 쪽에서 일어나 저쪽을 향해 갔다.
이에 북을 치며 나아가니, 백제의 장군 효봉·덕술·애술·명길 등이 군사의 기세가 크고 가지런한 것을 바라보고 갑옷을 벗고 진 앞에 항복하였다.
태조가 위로하고 장수가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 등이 말하였다. "원수 신검이 중군에 있습니다."
태조가 장군 공훤 등에게 명하여 삼군이 나란히 나아가 끼고 치게 하니 백제 군사가 무너져 달아났다.
황산 탄현에 이르러 신검이 두 아우와 장군 부달·능환 등 마흔 남짓과 함께 사로잡혀 항복하였다.
12등창이 나서 죽다
太祖受降,餘皆勞之許令與妻子上京.問能奐曰,“始與良劒等密謀囚大王立其子者汝之謀也,爲臣之義當如是乎.”能奐俛首不能言.遂命誅之.以神劒僣位為人所脅,非其本心.又且歸命乞罪,特原其死.甄萱憂懣發疽數日卒扵黄山佛舎,九月八日也,壽七十.大祖軍令嚴明士卒不犯秋毫,州縣安堵老㓜皆呼万歳.謂英䂓曰,“前王失國後其臣子無一人慰之者,獨卿夫妻千里嗣音以致誠意,兼歸羙於寡人其義不可忘.”許職左承賜田一千項,許借驛馬三十五匹以迎家人,賜其二子以官.甄萱起唐景福元年,至晉天福元年共四十五年丙申㓕.
태조가 항복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위로하여 처자와 함께 서울에 올라오도록 허락하였다.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몰래 꾀하여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세운 것이 네 꾀다. 신하 된 의리가 마땅히 이러하냐."
능환이 머리를 숙이고 말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명하여 베었다.
신검은 자리를 함부로 차지한 것이 남에게 몰린 것이요 본마음이 아니라 하고, 또 목숨을 맡기고 죄를 빌었으므로 특별히 그 죽음을 용서하였다.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며칠 만에 황산의 절에서 죽으니 9월 초여드렛날이며 나이 일흔이었다.
태조의 군령이 엄하고 밝아 사졸이 터럭만큼도 침범하지 않으니, 주와 현이 편안하고 늙은이와 어린이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
영규에게 일렀다. "앞 임금이 나라를 잃은 뒤에 그 신하와 자식 가운데 한 사람도 위로한 이가 없었는데, 오직 경의 부부가 천 리에 소식을 이어 정성을 다하고 아울러 아름다움을 과인에게 돌렸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소."
좌승 벼슬을 주고 밭 천 경을 내렸으며, 역마 서른다섯 필을 빌려 집안사람을 맞아 오게 하고 그 두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견훤은 당나라 경복 원년에 일어나 진나라 천복 원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흔다섯 해에, 병신년에 망하였다.
13사론이 말한다
史論曰.“新羅數窮,道喪天無所助,民無所歸.於是羣盗投隙而作若猬毛然.其劇者弓裔·甄萱二人而已.弓裔本新羅王子而反以家國為讎,至斬先祖之畫像,其為不仁甚矣.甄萱起自新羅之民,食新羅之禄,包藏禍心幸國之危,侵軼都邑虔劉君臣若禽獸,實天下之元惡.故弓裔見弃於其臣,甄萱産禍於其子,皆自取之也,又誰咎也.雖項羽·李密之雄才不能敵漢唐之興,而况裔·萱之㐫人豈可與我太祖相抗歟.”
사론에 이렇게 이른다.
"신라의 운수가 다하고 도가 사라져 하늘이 돕는 바가 없고 백성이 돌아갈 데가 없었다.
이에 도적 무리가 틈을 타고 일어나 고슴도치 털 같았다.
그 심한 이가 궁예와 견훤 두 사람일 뿐이다.
궁예는 본디 신라의 왕자인데 도리어 나라를 원수로 삼아 조상의 그림까지 베기에 이르렀으니 그 어질지 못함이 심하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에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 화를 품은 마음을 감추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다행으로 여겼다. 도읍을 침범하고 임금과 신하를 짐승처럼 죽였으니 실로 천하의 으뜸가는 악이다.
그러므로 궁예는 그 신하에게 버림받고 견훤은 그 아들에게서 화를 입었으니, 모두 스스로 부른 것이지 누구를 탓하겠는가.
비록 항우와 이밀의 뛰어난 재주로도 한나라와 당나라가 일어나는 것을 당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궁예와 견훤 같은 흉한 사람이 어찌 우리 태조와 맞설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