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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기 — 뒷기록駕洛國記 (後)

삼국유사 三國遺事 · 일연(一然) · 1281년 (고려 충렬왕 7) · 단락 9 · 한자 2,378자 · 낭독 9.5분

「삼국유사」 기이 제2 「가락국기 — 뒷기록」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고려의 승려 일연이 엮은 삼국시대 설화집. 정사가 버린 이야기를 모았다. 단군신화가 실린 가장 오래된 책이다.

1문무왕이 끊긴 제사를 되살리다

洎新羅第三十王法敏龍朔元年辛酉三月日有制曰.“朕是伽耶國元君九代孫仇衝王降于當國也,所率來子世宗之子率友公之子庻云匝干之女文明皇后寔生我者.兹故元君於㓜冲人乃爲十五代始祖也.所御國者已曽敗,所葬廟者今尚存,合于宗祧續乃祀事.”…美矣㦲,文武王〔法敏王謚也.〕先奉尊祖,孝乎惟孝.継泯絶之祀復行之也.

신라 서른째 법민왕(法敏王) 용삭 원년 신유년 3월에 이런 조서를 내렸다.

"짐은 가야국 첫 임금의 9대손 구형왕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 그 아들 솔우공, 그 아들 서운 잡간의 딸 문명황후께서 낳으신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 첫 임금은 어린 나에게 15대 시조가 된다. 다스리던 나라는 이미 무너졌으나 장사 지낸 사당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하여 그 제사를 잇게 하라."

이에 사신을 옛터에 보내 사당 가까운 좋은 밭 서른 경을 제사 밑천으로 삼고 왕위전(王位田)이라 이름하여 그 고을에 붙였다.

왕의 17대손 갱세(賡世) 급간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맡아, 해마다 술을 빚고 떡·밥·차·과일 등을 차려 제사를 해마다 거르지 않았다. 그 제삿날도 거등왕이 정한 한 해 다섯 날을 잃지 않았다.

거등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사당을 둔 뒤로 구형왕 때까지 삼백삼십 해 동안 제사가 어긋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구형왕이 자리를 잃고 나라를 떠난 뒤 용삭 원년 신유년까지 예순 해 사이에는 제사가 더러 끊기기도 하였다.

아름답도다, 문무왕(文武王)이여.〔법민왕의 시호이다.〕 먼저 조상을 받들었으니 효성스럽고도 효성스럽다. 끊어진 제사를 이어 다시 행하였다.

협주 2

龍朔

용삭(龍朔)

法敏王謚也.

법민왕(法敏王)의 시호이다.

2제사를 함부로 한 이들이 화를 입다

新羅季末有忠至匝干者,攻取金官髙城而爲城主將軍.爰有英䂓阿干假威於將軍奪廟享而滛祀,當端午而致告祠堂,梁無故折墜因覆壓而死焉.…遂以鮫絹三尺摸出真影安於壁上,旦夕膏炷瞻仰虔至.才三日影之二目流下血淚而貯於地上,㡬一斗矣.…然古人有言.“淫祀無福反受其殃.”前有英䂓後有俊必,父子之謂乎.又有賊徒謂廟中多有金玉将来盗焉.…故知陵園表裏必有神物護之.…由是觀之,辛替否曰“自古迄今豈有不亡之國不破之墳”,唯此駕洛國之昔曽亡則替否之言有徴矣,首露廟之不毀則替否之言未足信也.

신라 말에 충지(忠至) 잡간이라는 이가 있어 금관 고성(金官高城)을 쳐서 빼앗고 성주장군이 되었다.

이때 영규(英規) 아간이 장군의 위세를 빌려 사당의 제사를 빼앗아 함부로 지냈는데, 단옷날 사당에 고하다가 들보가 까닭 없이 부러져 떨어지는 바람에 깔려 죽었다.

이에 장군이 스스로 말하였다. "전생의 인연이 다행하여 외람되이 거룩한 임금이 다스리던 성의 제사를 맡게 되었으니, 마땅히 내가 그 초상을 그려 향과 등불로 받들어 그 은혜에 보답하리라."

마침내 비단 석 자에 초상을 그려 벽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불을 밝히며 우러러 정성을 다하였다. 겨우 사흘 만에 초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땅에 고였는데 거의 한 말이나 되었다.

장군이 크게 두려워하여 그 초상을 받들고 사당으로 가서 불살랐다. 그러고는 왕의 참된 후손 규림(圭林)을 불러 말하였다. "어제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으니 어찌 이리 거듭되는가. 이는 반드시 사당의 신령이 내가 그림을 그려 받든 것이 공손하지 못하다 하여 노하신 것이다. 영규가 이미 죽었고 나도 몹시 괴이하고 두려워 초상을 태웠으니 반드시 은밀한 벌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왕의 참된 후손이니 예전대로 제사를 지냄이 마땅하다."

규림이 대를 이어 제사를 올리다가 여든여덟에 죽었고, 그 아들 간원경(間元卿)이 이어서 정성껏 제사하였다.

단옷날 사당에 뵙는 제사 때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또 미쳐서 사당에 와 간원의 제물을 걷어 치우고 제 것으로 차려 올리다가, 삼헌(三獻)을 마치기도 전에 급한 병을 얻어 집에 돌아가 죽었다.

옛사람의 말에 "함부로 지내는 제사는 복이 없고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 하였으니, 앞에는 영규가 있고 뒤에는 준필이 있으니 이 부자를 이름인가.

또 도적 떼가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다 하여 훔치러 왔다. 처음 왔을 때는 갑옷을 입고 활에 화살을 먹인 용사 하나가 사당에서 나와 사방으로 쏘아 일고여덟을 맞혀 죽이니 도적들이 달아났다.

며칠 뒤 다시 오니 길이가 서른 자가 넘고 눈빛이 번개 같은 큰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와 여덟아홉을 물어 죽였다. 겨우 목숨을 건진 자들도 모두 엎어지며 흩어졌다.

그러므로 능원 안팎에 반드시 신령한 것이 지키고 있음을 알겠다.

건안 사년 기묘년에 처음 세운 뒤로 지금 임금 재위 서른한 해 대강 이년 병진년까지 무릇 팔백일흔여덟 해인데, 쌓아 올린 고운 흙은 허물어지지 않았고 심은 좋은 나무는 마르거나 썩지 않았으며, 늘어놓은 옥 조각들도 부서지지 않았다.

이로써 보건대 신체부(辛替否)가 "예로부터 지금까지 어찌 망하지 않는 나라와 무너지지 않는 무덤이 있으랴" 한 말은, 이 가락국이 옛적에 망하였으니 그 말에 증험이 있으나, 수로왕의 사당이 헐리지 않았으니 그 말을 다 믿을 수는 없다.

협주 1

大康

대강(大康)

3왕후를 맞던 날을 되풀이하는 놀이

此中更有戱樂思慕之事.每以七月二十九日,土人·吏·卒陟乗岾設帷幕酒食歡呼而東西送目,壯徤人夫分類以左右之,自望山島駮蹄駸駸而競湊於陸,鷁首泛泛而相推於水北指古浦而爭趨.盖此昔留天·神鬼等望后之來,急促告君之遺跡也.

이 가운데 또 즐기며 사모하는 일이 있다.

해마다 7월 스무아흐레에 그 고장 사람과 아전과 군졸이 승점(乘岾)에 올라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차려 환호하며 동서로 눈길을 보낸다. 건장한 사내들을 갈라 좌우로 나누고, 망산도(望山島)에서 말발굽을 달려 뭍으로 다투어 모이고, 뱃머리를 띄워 물 위에서 서로 밀며 북쪽 옛 포구를 향해 다투어 달린다.

이는 대개 옛날 유천간과 신귀간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임금에게 알리던 자취이다.

4나라가 망한 뒤 이름이 여러 번 바뀌다

國亡之後,代代稱號不一.新羅第三十一政明王即位開耀元年辛巳,號爲金官京置太守.後二百五十九年屬我大祖統合之後,代代爲臨海縣,置排岸使四十八年也,次爲臨海郡或爲金海府,置都護府二十七年也,又置防禦使六十四年也.

나라가 망한 뒤로 대대로 일컫는 이름이 한결같지 않았다.

신라 서른한째 정명왕(政明王)이 즉위한 개요 원년 신사년에 금관경(金官京)이라 하고 태수를 두었다.

그 뒤 이백쉰아홉 해에 우리 태조께서 통합하신 뒤로는 대대로 임해현(臨海縣)이 되어 배안사(排岸使)를 둔 것이 마흔여덟 해요, 다음으로 임해군 또는 김해부(金海府)가 되어 도호부를 둔 것이 스물일곱 해이며, 또 방어사를 둔 것이 예순네 해였다.

협주 1

開耀

개요(開耀)

5능묘의 밭을 줄이려던 이가 죽다

淳化二年金海府量田使中大夫趙文善申省状稱.“首露陵王廟屬田結數多也,宜以十五結仍舊貫,其餘分折於府之役丁.”…時廟朝宣㫖曰.“天所降卵化爲聖君,居位而延齡則一百五十八年也.自彼三皇而下鮮克比肩者歟.崩後自先代俾屬廟之壠畒而今減除良堪疑懼.”而不允.…㡬臨事畢而甚勞倦,忽一夕夢見七八介鬼神,執縲紲握刀劒而至云.“你有大憝故加斬戮.”…其病不間渡關而死.是故量田都帳不著印也.

순화 이년에 김해부 양전사(量田使) 중대부 조문선(趙文善)이 조정에 아뢰었다. "수로왕 능묘에 딸린 밭의 결수가 많으니, 마땅히 열다섯 결만 예전대로 두고 나머지는 고을의 부역민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맡은 관청이 이 글을 아뢰니, 그때 조정에서 이런 뜻을 내렸다.

"하늘이 내린 알이 변하여 거룩한 임금이 되셨고, 자리에 계시며 나이를 누린 것이 백쉰여덟 해였다. 저 삼황(三皇) 이래로 이에 견줄 이가 드물다. 세상을 떠나신 뒤 선대로부터 사당에 붙인 밭이거늘 이제 덜어 내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그러고는 허락하지 않았다. 사신이 다시 아뢰니 조정이 그렇게 여겨, 절반은 능묘에 그대로 두고 절반은 고을 사람들의 부역 몫으로 나누어 주게 하였다.

절사(節使)가〔양전사를 이른다.〕 조정의 뜻을 받아 절반은 능원에 붙이고 절반은 고을의 부역 호에 나누어 주었다.

일이 거의 끝날 무렵 몹시 지쳤는데, 어느 날 저녁 꿈에 귀신 일고여덟이 오랏줄을 쥐고 칼을 들고 와서 말하였다. "네게 큰 죄가 있으므로 목을 벤다."

그 사신은 형벌을 받아 몹시 아프다고 여기며 놀라 깨었다. 이내 병이 들어 남에게 알리지 않고 밤에 달아났는데, 병이 낫지 않아 관문을 넘다가 죽었다. 그러므로 양전 장부에 도장을 찍지 못하였다.

뒷사람이 명을 받아 와서 그 밭을 살펴보니 겨우 한 결 열두 부 아홉 속뿐이었고, 모자라는 것이 세 결 여든일곱 부 한 속이었다. 이에 잘못 들어간 곳을 조사하여 안팎 관청에 알리고, 명을 내려 채워 주게 하였다.

또한 예나 지금이나 탄식할 만한 일이다.

협주 2

淳化

순화(淳化)

量田使稚也.

양전사를 이른다.

6왕후사가 서고 헐리다

元君八代孫金銍王克勤爲政又切崇真,爲世祖母許皇后奉資冥福.以元嘉二十九年壬辰,於元君與皇后合婚之地創寺額曰王后寺,遣使審量近側平田十結以爲供億三寳之費.自有是寺五百後置長遊寺,所納田柴并三百結.於是右寺三剛以王后寺在寺柴地東南標内,罷寺爲荘,作秋收冬藏之場·秣馬飬牛之厩,悲夫.

첫 임금의 8대손 김질왕(金銍王)이 정사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것을 몹시 받들어, 세조모 허황후의 명복을 빌고자 하였다.

원가 이십구년 임진년에 첫 임금과 황후가 혼인한 자리에 절을 세우고 현판을 왕후사(王后寺)라 하였다. 사람을 보내 가까운 평지 밭 열 결을 헤아려 삼보(三寶)를 받드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이 절이 생긴 지 오백 해 뒤에 장유사(長遊寺)를 두었는데, 바친 밭과 땔나무 땅이 아울러 삼백 결이었다.

이에 장유사의 세 주지가 왕후사가 절의 땔나무 땅 동남쪽 경계 안에 있다 하여, 절을 헐어 농장으로 삼고 가을에 거두어 겨울에 갈무리하는 마당과 말을 먹이고 소를 기르는 외양간으로 만들었다.

슬프도다.

협주 1

元嘉

원가(元嘉)

7명(銘) — 가락국을 기리는 노래

世祖已下九代孫暦數委録于下,銘曰.元胎肇啓,利眼初明.人倫雖誕,君位未成.中朝累世,東國分京.雞林先定,駕洛後營.自無銓宰,誰察民氓.遂兹玄造,顧彼蒼生.用授符命,特遣精靈.山中降卵,霧裏藏刑.内猶漠漠,外亦冥冥.望如無象,聞乃有聲.羣歌而奏,衆舞而呈.七日而後,一時所寧.風吹雲卷,空碧天青.下六圎卵,垂一紫纓.殊方異土,比屋連甍.觀者如堵,覩者如羹.五歸各邑,一在兹城.同時同迹,如弟如兄.實天生徳,爲世作程.寳位初陟,寰區欲清.華構徴古,土階尚平.万機始勉,庻政施行.無偏無儻,惟一惟精.行者譲路,農者讓耕.四方奠枕,萬姓迓衡.俄晞薤露,靡保椿㱓.乾坤変氣,朝野痛情.金相其躅,玉振其聲.來苖不絶,薦藻惟馨.日月雖逝,䂓儀不傾.

세조 이하 아홉 대 자손의 햇수를 아래에 자세히 적고, 명(銘)에 이렇게 이른다.

천지가 처음 열리매 해와 달이 비로소 밝았네 사람의 도리는 생겼으나 임금의 자리는 이루지 못했네

중국은 여러 대를 이었으나 동쪽 나라는 서울이 나뉘어 계림이 먼저 정해지고 가락이 뒤에 세워졌네

스스로 다스릴 이 없으니 누가 백성을 살피랴 이에 하늘이 깊이 헤아려 저 백성을 돌아보시고

부명(符命)을 내리시어 특별히 신령을 보내셨네 산 가운데 알이 내리고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었네

안은 아득하고 밖도 어두웠네 바라보면 형상이 없고 들으면 소리가 있었네

무리가 노래하여 아뢰고 뭇사람이 춤추어 바쳤네 이레가 지난 뒤에 한때에 편안해졌네

바람이 불어 구름이 걷히니 하늘이 푸르고 맑았네 둥근 알 여섯이 내리고 자줏빛 끈 하나가 드리웠네

낯선 땅 다른 고을에 집이 이어지고 지붕이 잇닿았네 보는 이가 담을 두른 듯하고 모여든 이가 저자를 이룬 듯했네

다섯은 저마다 고을로 돌아가고 하나는 이 성에 남았네 때를 같이하고 자취를 같이하니 아우 같고 형 같았네

참으로 하늘이 낸 덕이요 세상의 법도가 되었네 보배로운 자리에 처음 오르니 온 누리가 맑아지려 했네

화려한 집은 옛것을 본떴고 흙 계단은 오히려 평평했네 온갖 정사에 힘쓰기 시작하니 여러 일이 행해졌네

치우침도 없고 무리 지음도 없이 오직 하나로 오직 정성으로 길 가는 이는 길을 양보하고 밭 가는 이는 밭을 양보했네

사방이 베개를 편히 하고 만백성이 태평을 맞았네 갑자기 부추 잎의 이슬이 마르니 오랜 나이를 지키지 못하셨네

하늘과 땅의 기운이 변하고 조정과 들이 슬퍼했네 그 자취는 금과 같고 그 소리는 옥과 같았네

오는 싹이 끊이지 않으니 올리는 제물이 향기롭네 해와 달은 가더라도 그 법도는 기울지 않으리

8역대 아홉 임금

居登王父首露王, 母許王后.

수로왕과 허왕후의 뒤를 이은 아홉 임금이다.

1. 거등왕(居登王)

居登王父首露王,母許王后.立安四年己卯三月十三日即位.治三十九年,嘉平五年癸酉九月十七日崩.王妃泉府卿申輔女慕貞,生太子麻品.開皇暦云“姓金氏,盖國世祖從金卵而生,故以金爲姓厼.”

거등왕은 아버지가 수로왕이요 어머니가 허왕후이다. 건안 4년 기묘년 3월 열사흘에 즉위하여 서른아홉 해를 다스리고, 가평(嘉平) 5년 계유년 9월 열이레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천부경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이며 태자 마품(麻品)을 낳았다.

『개황력(開皇曆)』에 이르기를 "성은 김씨이니, 대개 나라의 세조가 금 알에서 났으므로 김으로 성을 삼았다" 하였다.

2. 마품왕(麻品王)

麻品王一云馬品,金氏.嘉平五年癸酉即位.治三十九年,永平元年辛亥一月二十九日崩.王妃宗正監趙匡孫女好仇,生太子居叱弥.

마품왕은 마품(馬品)이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가평 5년 계유년에 즉위하여 서른아홉 해를 다스리고, 영평 원년 신해년 정월 스무아흐레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종정감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이며 태자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3. 거질미왕(居叱彌王)

居叱弥王一云今勿,金氏.永平元年即位.治五十六年,永和二年丙午七月八日崩.王妃阿躬阿干孫女阿志,生王子伊品.

거질미왕은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영평 원년에 즉위하여 쉰여섯 해를 다스리고, 영화(永和) 2년 병오년 7월 초여드레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아궁 아간의 손녀 아지(阿志)이며 왕자 이품(伊品)을 낳았다.

4. 이시품왕(伊尸品王)

伊尸品王金氏,永和二年即位.治六十二年,義熈三年丁未四月十日崩.王妃司農卿克忠女貞信,生王子坐知.

이시품왕은 김씨이다. 영화 2년에 즉위하여 예순두 해를 다스리고, 의희(義熙) 3년 정미년 4월 초열흘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사농경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이며 왕자 좌지(坐知)를 낳았다.

5. 좌지왕(坐知王) — 간언을 듣고 돌이키다

坐知王一云金叱.義熈三年即位.娶傭女,以女黨爲官,國內擾乱.雞林國以謀欲伐,有一臣名朴元道諌曰,“遺草閱閱亦含羽况乃人乎.天亡地䧟人保何基.又卜士筮得解卦,其辭曰‘解而悔朋至斯孚’,君鑒易卦乎.”王謝曰“可.”擯傭女貶於荷山島,攺行其政長御安民也.治十五年,永初二年辛酉五月十二日崩.王妃道寧大阿干女福壽,生子吹希.

좌지왕은 김질(金叱)이라고도 한다. 의희 3년에 즉위하였다.

품팔이하던 여자를 아내로 맞고 그 여자 편 사람들을 벼슬에 앉히니 나라 안이 어지러웠다. 계림국이 이를 틈타 치려고 꾀하였다.

박원도(朴元道)라는 신하가 있어 간하였다. "버려진 풀도 무성하면 깃든 새를 품거늘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무엇에 기대겠습니까. 또 점치는 이가 괘를 얻으니 해괘(解卦)였고 그 말에 '풀어서 뉘우치면 벗이 이르러 미더워진다' 하였습니다. 임금께서는 역(易)의 괘를 살피시겠습니까."

왕이 사례하며 말하였다. "옳다."

품팔이하던 여자를 물리쳐 하산도(荷山島)로 내치고 정사를 고쳐 행하여 오래도록 백성을 편안히 다스렸다.

열다섯 해를 다스리고 영초(永初) 2년 신유년 5월 열이틀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도령 대아간의 딸 복수(福壽)이며 아들 취희(吹希)를 낳았다.

6. 취희왕(吹希王)

吹希王一云叱嘉.金氏,永初二年即位.治三十一年元嘉二十八年辛卯二月三日崩.王妃進思角干女仁徳,生王子銍知.

취희왕은 질가(叱嘉)라고도 하며 김씨이다. 영초 2년에 즉위하여 서른한 해를 다스리고, 원가 28년 신묘년 2월 초사흘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진사 각간의 딸 인덕(仁德)이며 왕자 질지(銍知)를 낳았다.

7. 질지왕(銍知王) — 왕후사를 세우다

銍知王一云金銍王.元嘉二十八年即位,明年爲世祖許黄玉王后奉資冥福,於初與世祖合御之地創寺曰王后寺,納田十結充之.治四十二年,永明十年壬申十月四日崩.王妃金相沙干女邦媛,生王子鉗知.

질지왕은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 28년에 즉위하고, 이듬해에 세조와 허황옥 왕후의 명복을 빌고자 처음 세조와 함께 계시던 자리에 절을 세워 왕후사라 하고 밭 열 결을 바쳐 채웠다.

마흔두 해를 다스리고 영명(永明) 10년 임신년 10월 초나흘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금상 사간의 딸 방원(邦媛)이며 왕자 겸지(鉗知)를 낳았다.

8. 겸지왕(鉗知王)

鉗知王一云金鉗王.永明十年即位.治三十年正光二年辛丑四月七日崩.王妃出忠角干女淑,生王子仇衡.

겸지왕은 금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한다. 영명 10년에 즉위하여 서른 해를 다스리고, 정광(正光) 2년 신축년 4월 초이레에 세상을 떠났다. 왕비는 출충 각간의 딸 숙(淑)이며 왕자 구형(仇衡)을 낳았다.

9. 구형왕(仇衡王) — 나라를 넘기다

仇衡王金氏·正光二年即位.治四十二年,保定二年壬午九月,新羅第二十四君真興王興兵薄伐,王使親軍卒.彼衆我寡不堪對戰也.仍遣同氣脫知尒叱今留在於國,王子上孫卒支公等降入新羅.王妃分叱水尒叱女桂花,生三子,一世宗角干,二茂刀角干,三茂得角干.開皇録云,“梁中大通四年壬子降于新羅.”

구형왕은 김씨이다. 정광 2년에 즉위하여 마흔두 해를 다스렸다.

보정(保定) 2년 임오년 9월에 신라 스물넷째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이 몸소 군사를 부렸다. 그러나 저쪽은 많고 이쪽은 적어 맞서 싸울 수 없었다.

이에 아우 탈지 이질금(脫知爾叱今)을 보내 나라에 남아 있게 하고, 왕자와 맏손자 졸지공(卒支公) 등이 신라에 항복해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 이질의 딸 계화(桂花)이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첫째가 세종(世宗) 각간, 둘째가 무도(茂刀) 각간, 셋째가 무득(茂得) 각간이다.

『개황록(開皇錄)』에는 "양나라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 하였다.

9일연이 두 기록을 나란히 남기다

議曰.案三國史,仇衡以梁中大通四年壬子納土投羅.則計自首露初即位東漢䢖武十八年壬寅,至仇衡末壬子得四百九十年矣.若以此記考之,納土在元魏保定二年壬午.則更三十年捴五百二十年矣.今两存之.

논하여 이른다.

『삼국사』를 살피건대 구형왕은 양나라 중대통 사년 임자년에 땅을 바치고 신라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수로왕이 처음 즉위한 동한 건무 십팔년 임인년부터 구형왕 말년 임자년까지를 헤아리면 사백아흔 해가 된다.

만일 이 기록으로 따지면 땅을 바친 것이 원위 보정 이년 임오년이니, 다시 서른 해를 더하여 모두 오백스무 해가 된다.

이제 두 가지를 다 남겨 둔다.

협주 1

元魏

원위(元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