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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가 신라의 터를 닦다阿道基羅

삼국유사 三國遺事 · 일연(一然) · 1281년 (고려 충렬왕 7) · 단락 6 · 한자 1,653자 · 낭독 6.6분

「삼국유사」 흥법 제3 「아도가 신라의 터를 닦다」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고려의 승려 일연이 엮은 삼국시대 설화집. 정사가 버린 이야기를 모았다. 단군신화가 실린 가장 오래된 책이다.

1묵호자가 오고, 아무도 향을 알지 못하다

阿道基羅〔一作我道又阿頭〕新羅夲記第四云.第十九訥祗王時沙門墨胡子自髙䴡至一善郡.郡人毛禮〔或作毛禄.〕於家中作堀室安置.時梁遣使賜衣著香物〔髙得相詠史詩云,梁遣使僧曰元表宣送溟檀及經像〕.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遣人齎香遍問國中.墨胡子見之曰,“此之謂香也,焚之則香氣芬馥所以逹誠於神聖.神聖未有過於三寳,若燒此發願則必有霊應〔訥祗在晋宋之世,而云梁遣使恐誤.〕.”

아도가 신라의 터를 닦다〔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도 한다.〕

「신라본기」 제4에 이르기를 —

열아홉째 눌지왕 때 사문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렀다. 고을 사람 모례(毛禮)가〔모록으로도 쓴다.〕 집 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있게 하였다.

그때 양나라가 사신을 보내 옷과 향을 내렸다. 임금과 신하가 그 향의 이름과 쓰임을 알지 못하여,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나라 안을 두루 다니며 물었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말하였다. "이것을 향이라 합니다. 사르면 향기가 짙게 퍼져 신성한 이에게 정성을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성한 이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이것을 사르고 발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눌지왕은 진·송 시대의 사람인데 양이 사신을 보냈다 하니 아마도 잘못인 듯하다.〕

협주 3

一作我道又阿頭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도 한다.

或作毛禄.

모록(毛祿)으로도 쓴다.

訥祗在晋宋之世, 而云梁遣使恐誤.

눌지왕은 진(晉)·송(宋) 시대의 사람인데 양(梁)이 사신을 보냈다 하니 아마도 잘못인 듯하다.

2향을 사르니 공주의 병이 낫다

時王女病革,使召墨胡子焚香表誓,王女之病尋愈.王喜厚加賚貺,俄而不知所歸.

그때 왕의 딸이 병이 위독하였으므로 묵호자를 불러 향을 사르고 서원을 올리게 하니, 왕녀의 병이 곧 나았다.

왕이 기뻐하여 후하게 상을 내렸는데, 얼마 뒤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3아도의 어머니가 일곱 절터를 미리 이르다

又至二十一毗處王時,有我道和尚與侍者三人亦來毛禮家,儀表似墨胡子.住數年無疾而終,其侍者三人留住講讀經律,徃徃有信奉者.按我道夲碑云.我道髙麗人也.母髙道寧,正始間曺魏人我崛摩奉使勾䴡,私之而還,因而有娠.師生五歳其母令出家.年十六歸魏省覲崛摩,投玄彰和尚講下就業.年十九又歸寧於母,母謂曰.“此國于今不知佛法爾後三千餘月雞林有聖王岀大興佛教.其亰都内有七處伽藍之墟.…”道禀教至雞林寓正王城西里,今嚴莊寺,于時未雛王即位二年癸未也.…乃逃隠于續林毛禄家.…三年時成國公主疾,巫醫不效…師卛然赴闕其疾遂理.…“但願創佛寺於天境林大興佛敎奉福邦家爾.”…号興輪寺.毛祿之妹名史氏投師爲尼,亦於三川歧創寺而居.名永興寺.未㡬末雛王即世,國人將害之,師還毛禄家自作塚閉戶自絶,遂不復現.因此大敎亦廢.至二十三法興大王以蕭梁天監十三年甲午登位乃興釋氏,距末雛王癸未之歳二百五十二年.道寕所言三千餘月驗矣.

또 스물한째 비처왕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이 시자 세 사람과 함께 또한 모례의 집에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몇 해를 머물다 병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사람이 남아 경과 율을 강독하니 이따금 믿고 받드는 이가 있었다.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살피건대 이러하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이다. 정시(正始) 연간에 조위(曹魏) 사람 아굴마(我崛摩)가〔성이 아씨이다.〕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사통하고 돌아갔는데, 이로 인해 아이를 배었다.

아도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출가시켰다. 열여섯에 위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의 강석에 들어가 배웠다. 열아홉에 돌아와 어머니를 뵈니 어머니가 말하였다.

"이 나라는 지금까지 불법을 모른다. 그러나 이후 삼천여 달이 지나면 계림에 거룩한 임금이 나와 불교를 크게 일으키리라. 그 서울 안에 일곱 곳 절터가 있으니 —

첫째, 금교 동쪽 천경림 〔지금의 흥륜사〕 둘째, 삼천기 〔지금의 영흥사〕 셋째, 용궁 남쪽 〔지금의 황룡사〕 넷째, 용궁 북쪽 〔지금의 분황사〕 다섯째, 사천 끝 〔지금의 영묘사〕 여섯째, 신유림 〔지금의 천왕사〕 일곱째, 서청전 〔지금의 담엄사〕

모두 앞선 부처 시대의 절터요 법의 물이 길이 흐르는 땅이다. 너는 그리로 가서 큰 가르침을 펴라. 마땅히 동쪽에서 부처의 제사를 받들게 되리라."

아도가 가르침을 받고 계림에 이르러 왕성 서쪽 마을에 붙어 사니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다. 그때가 미추왕 즉위 2년 계미년이다.

대궐에 나아가 교법 행하기를 청하니, 세상이 전에 보지 못한 것이라 하여 꺼려 죽이려는 자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續林) 모록의 집에 도망쳐 숨었다.〔녹과 예는 글자 모양이 비슷해 생긴 잘못이다. 『고기』에 이르기를 "법사가 처음 모록의 집에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승려라는 이름을 몰라 아두삼마라 하였다. 삼마란 곧 우리말로 승려를 일컫는 말이니 사미라는 말과 같다" 하였다.〕

3년에 성국공주가 병들어 무당과 의원이 효험이 없으므로 사방에 의원을 구하라 명하였다. 법사가 갑자기 대궐에 나아가니 그 병이 마침내 나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바라는 바를 물으니 대답하였다. "소승은 백에 하나도 구하는 것이 없고, 다만 천경림에 절을 세워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복을 받들기를 원할 뿐입니다."

왕이 허락하고 공사를 명하였다. 풍속이 질박하고 검소하여 띠를 엮어 지붕을 이었다. 머물며 강연하니 이따금 하늘 꽃이 땅에 떨어졌다. 이름을 흥륜사라 하였다.

모록의 누이는 이름이 사씨(史氏)인데 법사에게 의탁하여 비구니가 되었고, 또한 삼천기에 절을 세워 살았다. 이름을 영흥사라 하였다.

얼마 뒤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 하였다. 법사가 모록의 집에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문을 닫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마침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큰 가르침도 폐하였다.

스물셋째 법흥대왕이 소량 천감 십삼년 갑오년에 즉위하여 불법을 일으키니, 미추왕 계미년에서 이백쉰두 해이다. 도령이 말한 삼천여 달이 들어맞았다.

협주 2

姓我也

성이 아(我)씨이다.

禄与礼形近之訛. 古記云 “法師初來毛禄家時天地震驚. 時人不知僧名而云阿頭彡麽. 彡麽者乃郷言之称僧也, 猶言沙弥也.”

녹(祿)과 예(禮)는 글자 모양이 비슷해 생긴 잘못이다. 『고기』에 이르기를 "법사가 처음 모록의 집에 왔을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승려라는 이름을 몰라 아두삼마(阿頭彡麽)라 하였다. 삼마란 곧 우리말로 승려를 일컫는 말이니 사미(沙彌)라는 말과 같다" 하였다.

4일연이 두 기록을 따져 묵호자와 아도를 한 사람으로 보다

㨿此,夲記與夲碑二說相戾不同如此.嘗試論之.…若以毗處王時方始到羅,則是阿道留髙䴡百餘歳乃來也.…又若在末雛之世,則却超先於到䴡甲戌百餘年矣.于時雞林未有文物禮敎,國号猶未定,何暇阿道來請奉佛之事.…設使暫興還廢,何其間寂寥無聞,而尚不識香名哉.一何大後,一何大先.揆夫東漸之勢必始于麗濟,而終乎羅.則訥祗旣與獸林世相接也,阿道之辭麗抵羅冝在訥祗之世.又王女救病皆傳爲阿道之事,則所謂墨胡者非真名也乃指目之辝.如梁人指逹摩爲碧眼胡,晉調釋道安爲㭍道人類也.乃阿道危行避諱而不言名姓故也.蓋國人隨其所聞,以墨胡·阿道二名分作二人爲傳爾.况云阿道儀表似墨胡,則以此可驗其一人也.…三千餘月未必盡信.書自訥祗之世抵乎丁未旡慮一百餘年,若曰一千餘月則殆㡬矣.姓我單名,疑贗難詳.

이에 따르면 본기와 본비 두 설이 서로 어긋나 이같이 같지 않다. 시험 삼아 논해 본다.

양·당 두 『승전』과 『삼국본사』에 모두 고구려·백제 두 나라 불교의 시작이 진나라 말 태원 연간에 있다 하니, 두 도법사가 소수림왕 갑술년에 고구려에 이른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전은 잘못이 아니다.

만약 비처왕 때 비로소 신라에 이르렀다면, 이는 아도가 고구려에 백여 해나 머물다 온 것이 된다. 비록 큰 성인의 행적과 나고 듦이 일정하지 않다 하나 반드시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신라가 불교를 받든 것이 이렇게까지 늦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미추왕 대에 있었다면 도리어 고구려에 이른 갑술년보다 백여 해나 앞선다. 그때 계림에는 문물과 예교가 없고 나라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았는데, 어느 겨를에 아도가 와서 불법 받들기를 청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또 고구려에 이르지 않고 신라로 건너뛴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설사 잠시 일어났다가 도로 폐하였다 하더라도, 그 사이가 어찌 그리 적막하여 들림이 없고 아직도 향 이름조차 몰랐겠는가. 하나는 어찌 그리 늦고 하나는 어찌 그리 이른가.

동쪽으로 번져 온 형세를 헤아리면 반드시 고구려·백제에서 시작하여 신라에서 마쳤을 것이다. 곧 눌지왕이 이미 소수림왕과 세대가 서로 맞닿으니, 아도가 고구려를 떠나 신라에 이른 것은 마땅히 눌지왕 대여야 한다.

또 왕의 딸의 병을 고친 일을 모두 아도의 일로 전하니, 이른바 묵호(墨胡)란 참 이름이 아니라 가리켜 부른 말이다. 양나라 사람이 달마를 '푸른 눈의 오랑캐'라 지목하고, 진나라에서 석도안을 '옻칠한 도인'이라 놀린 것과 같은 부류다. 곧 아도가 위태로운 길을 가며 이름과 성을 숨겨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개 나라 사람들이 들은 바를 따라 묵호와 아도, 두 이름을 두 사람으로 나누어 전한 것뿐이다. 하물며 아도의 모습이 묵호와 비슷하다 하였으니, 이로써 한 사람임을 증험할 수 있다.

도령이 일곱 곳을 차례 지은 것은 곧 창건의 선후를 미리 말한 것인데, 두 전이 이를 놓쳤으므로 이제 사천 끝을 다섯째에 올린다.

삼천여 달이라는 것은 반드시 다 믿을 수는 없다. 눌지왕 대로부터 정미년에 이르기까지 대략 백여 해이니, 만약 일천여 달이라 하였다면 거의 맞았을 것이다.

성이 아(我)씨이고 이름이 외자인 것은 의심스럽고 거짓인 듯하여 자세히 알기 어렵다.

5담시의 일과, 세 사람이 한 사람일 가능성

又按元魏釋曇始〔一云惠始〕傳云.“始關中人,自岀家已後多有異迹.晉孝武大元九年末,賷經律數十部徃遼東宣化,現授三乗立以歸戒,蓋髙䴡聞道之始也.…始足白於靣,雖渉泥水未甞沾濕,天下咸稱白足和尚云.…時始亦遇害刀不能傷.…燾聞令斬之屢不傷,燾自斬之亦無傷.飼北園所飬虎亦不敢近.燾大生慙懼遂感癘疾.…宜下國中大𢎪佛法.”始後不知所終.議曰.曇始以大元末到海東,義熈初還關中,則留此十餘年,何東史無文.始旣恢詭不測之人,而與阿道·墨胡·難陁年事相同,三人中疑一必其變諱也.

또 원위(元魏)의 「석담시전(釋曇始傳)」을 살피건대〔혜시라고도 한다.〕 이러하다.

담시는 관중 사람인데 출가한 뒤로 신이한 자취가 많았다. 진 효무제 태원 구년 말에 경과 율 수십 부를 지니고 요동에 가서 교화를 폈으며, 삼승(三乘)을 일러 주고 귀계(歸戒)를 세웠으니 대개 고구려가 도를 들은 시초다.

담시는 발이 얼굴보다 희었고 흙탕물을 건너도 젖은 적이 없었으므로 천하가 모두 백족화상(白足和尙)이라 일컬었다.

진나라 말에 흉노 혁련발발이 관중을 깨뜨리고 사람을 무수히 베었다. 그때 담시도 해를 입었으나 칼이 상하게 하지 못하였다. 발발이 감탄하여 사문을 널리 사면하고 모두 죽이지 않았다.

뒤에 탁발도가 장안을 차지하고 위세를 부릴 때, 최호(崔皓)라는 이가 도교를 익혀 불교를 시기하고 미워하였는데 재상 자리에 올라 탁발도의 믿음을 얻었다. 이에 천사 구겸지와 함께 탁발도를 달래어 '불교는 이로움이 없고 백성의 이익을 해친다' 하며 없애기를 권하였다.

태평 말년에 담시가 탁발도가 교화될 때가 이르렀음을 알고, 새해 조회 날 홀연히 지팡이를 짚고 궁문에 이르렀다. 탁발도가 듣고 베라 하였으나 여러 번 상하지 않았고, 탁발도가 몸소 베어도 상하지 않았다. 북쪽 동산에 기르던 범에게 먹이려 하였으나 범도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탁발도가 크게 부끄럽고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몹쓸 병에 걸렸다.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도 잇달아 나쁜 병이 났다. 탁발도가 허물이 저들에게서 비롯되었다 하여 두 집안의 문족을 베고, 나라 안에 불법을 크게 펴라는 명을 내렸다.

담시는 뒤에 어디서 마쳤는지 알 수 없다.

논하여 이른다. 담시가 태원 말에 해동에 이르렀다가 의희 초에 관중으로 돌아갔으니 여기 머문 것이 십여 해인데, 어찌 동쪽 사서에는 그 글이 없는가. 담시는 이미 기이하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요 아도·묵호·난타와 연대와 일이 서로 같으니, 세 사람 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그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협주 1

一云惠始

혜시(惠始)라고도 한다.

6기려서 이르다

讃曰.雪擁金橋凍不開,雞林春色未全逥,可怜青帝多才思,先著毛郎宅裏梅.

기려서 이른다.

눈이 금교를 덮어 얼어붙어 열리지 않고 계림의 봄빛은 아직 다 돌아오지 않았네 어여쁘다, 봄의 신이 재주와 생각이 많아 먼저 모랑(毛郎)의 집 안 매화에 손을 대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