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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왕이 도교를 받들고 보덕이 암자를 옮기다寶藏奉老 普德移庵

삼국유사 三國遺事 · 일연(一然) · 1281년 (고려 충렬왕 7) · 단락 6 · 한자 1,088자 · 낭독 4.4분

「삼국유사」 흥법 제3 「보장왕이 도교를 받들고 보덕이 암자를 옮기다」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고려의 승려 일연이 엮은 삼국시대 설화집. 정사가 버린 이야기를 모았다. 단군신화가 실린 가장 오래된 책이다.

1고구려가 도교를 들여오다

髙麗夲記云.䴡季武徳·貞觀間國人爭奉五斗米教.唐髙祖聞之,遣道士送天尊像來講道徳經,王與國人聽之.即第二十七代榮留王即位七年,武徳七年甲申也.明年遣使徃唐求學佛老,唐帝〔謂髙祖也.〕許之.及寳藏王即位〔貞觀十六年壬寅也.〕亦欲併興三教.時寵相蓋蘇文說王以儒釋並熾,而黄冠未盛特使於唐求道教.

「고려본기(高麗本記)」에 이르기를 —

고구려 말기 무덕(武德)·정관(貞觀) 연간에 나라 사람들이 다투어 오두미교(五斗米教)를 받들었다. 당 고조가 이를 듣고 도사를 보내 천존상(天尊像)을 보내오고 『도덕경』을 강의하게 하니, 왕과 나라 사람들이 들었다. 곧 스물일곱째 영류왕 즉위 7년이요 무덕 칠년 갑신년이다.

이듬해 사신을 당에 보내 불교와 도교를 배워 오게 하니 당나라 임금이〔고조를 이른다.〕 허락하였다.

보장왕이 즉위하자〔정관 십육년 임인년이다.〕 또한 세 가르침을 아울러 일으키려 하였다. 그때 총애받던 재상 개소문(蓋蘇文)이 왕에게 말하기를, 유교와 불교는 다 같이 성한데 도교만 성하지 못하다 하여, 특별히 당에 사람을 보내 도교를 구하게 하였다.

협주 2

謂髙祖也.

고조를 이른다.

貞觀十六年壬寅也.

정관 십육년 임인년이다.

2보덕이 암자를 날려 남쪽으로 옮기다

時普徳和尚住盤龍寺,憫左道匹正國祚危矣,屢諌不聽.乃以神力飛方丈,南移于完山州〔今全州也.〕孤大山而居焉.即永徽元年庚戌六月也.〔又夲傳云,乹封二年丁夘三月三日也.〕未㡬國㓕.〔以㧾章元年戊辰囯㓕,則計距庚戌十九年矣.〕今景福寺有飛來方丈是也云云.〔已上囯史.〕真樂公留詩在堂,文烈公著傳行世.

그때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반룡사(盤龍寺)에 있었는데, 그릇된 가르침이 바른 가르침과 맞서 나라의 운수가 위태로워짐을 근심하여 여러 번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신통한 힘으로 방장(方丈)을 날려 남쪽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이다.〕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 살았다. 곧 영휘 원년 경술년 6월이다.〔본전에는 건봉 이년 정묘년 3월 초사흘이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가 망하였다.〔총장 원년 무진년에 나라가 망하였으니, 경술년에서 헤아리면 열아홉 해가 된다.〕

지금 경복사(景福寺)에 있는 비래방장(飛來方丈)이 그것이라 한다.〔여기까지는 『국사』이다.〕

진락공(眞樂公)이 남긴 시가 그 집에 있고, 문열공(文烈公)이 전(傳)을 지어 세상에 전한다.

협주 5

永徽

영휘(永徽)

今全州也.

지금의 전주이다.

又夲傳云, 乹封二年丁夘三月三日也.

본전(本傳)에는 건봉 이년 정묘년 3월 초사흘이라 한다.

以㧾章元年戊辰囯㓕, 則計距庚戌十九年矣.

총장 원년 무진년에 나라가 망하였으니, 경술년에서 헤아리면 열아홉 해가 된다.

已上囯史.

여기까지는 『국사』이다.

3양명이 죽어 개금으로 태어나다

又按唐書云.先是隋煬帝征遼東,有裨將羊皿.不利於軍,將死有誓曰,“必爲寵臣㓕彼國矣.”及蓋氏擅朝以盖爲氏,乃以羊皿是之應也.又桉髙䴡古記云.隋煬帝以大業八年壬申,領三十萬兵渡海來征.十年甲戌十月,髙䴡王〔時第三十六代嬰陽王立二十五年也〕上表乞降.時有一人密持小弩於懷中,隨持表使到煬帝舡中.帝奉表讀之,弩發中帝胷.帝將旋師謂左右曰,“朕爲天下之主親征小國而不利萬代之所嗤.”時右相羊皿奏曰,“臣死爲髙䴡大臣必滅國報帝王之讎.”帝崩後生於髙䴡十五聦明神武.時武陽王聞其賢〔囯史榮留王名建武或云建成,而此云武陽,未詳.〕徴入爲臣.自稱姓盖名金,位至蘇文,乃侍中職也.

또 『당서(唐書)』를 살피건대 이러하다.

이보다 앞서 수 양제가 요동을 칠 때 비장(裨將) 양명(羊皿)이 있었다. 군사가 불리하여 죽게 되자 이렇게 맹세하였다. "반드시 총애받는 신하가 되어 저 나라를 멸하리라."

개씨(蓋氏)가 조정을 마음대로 하며 개(蓋)로 성을 삼았으니, 곧 양명(羊皿)이 그 응험이다.

또 『고려고기(高麗古記)』를 살피건대 이러하다.

수 양제가 대업 팔년 임신년에 삼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쳤다. 십년 갑술년 10월에 고구려 왕이〔그때는 서른여섯째 영양왕 즉위 25년이다.〕 표를 올려 항복을 빌었다.

그때 한 사람이 작은 쇠뇌를 품속에 몰래 지니고, 표를 가진 사신을 따라 양제의 배에 이르렀다. 황제가 표를 받아 읽는데 쇠뇌가 발사되어 황제의 가슴에 맞았다.

황제가 군사를 돌리려 하며 좌우에 말하였다. "짐이 천하의 주인으로서 작은 나라를 몸소 치다가 이롭지 못하였으니, 만대의 웃음거리로다."

그때 우상(右相) 양명이 아뢰었다. "신이 죽어 고구려의 대신이 되어 반드시 나라를 멸하여 제왕의 원수를 갚겠나이다."

황제가 죽은 뒤 고구려에 태어나니, 나이 열다섯에 총명하고 무예가 신묘하였다. 그때 무양왕(武陽王)이 그 어짊을 듣고〔『국사』에 영류왕의 이름을 건무 또는 건성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무양이라 하니 자세하지 않다.〕 불러들여 신하로 삼았다.

스스로 성을 개(蓋), 이름을 금(金)이라 하고 지위가 소문(蘇文)에 이르렀으니 곧 시중(侍中) 벼슬이다.

협주 3

大業

대업(大業)

時第三十六代嬰陽王立二十五年也

그때는 서른여섯째 영양왕 즉위 25년이다.

囯史榮留王名建武或云建成, 而此云武陽, 未詳.

『국사』에 영류왕의 이름을 건무 또는 건성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무양이라 하니 자세하지 않다.

4개금이 도교를 청하다

金奏曰,“鼎有三足,國有三敎.臣見國中唯有儒釋無道教,故國危矣.”王然之,奏唐請之,太宗遣叙逹等道士八人.〔囯史云,“武徳八年乙酉遣使入唐永佛老,唐帝許之.”拠此,則羊血自甲戌年死而托生于此,則才年十餘歳矣,而云寵宰說王遣請,其年月必有一誤,今两存.〕

개금이 아뢰었다. "솥에 세 발이 있듯 나라에는 세 가르침이 있습니다. 신이 보건대 나라 안에 오직 유교와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으므로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왕이 그렇게 여겨 당에 아뢰어 청하니, 태종이 서달(叙達) 등 도사 여덟 사람을 보냈다.

〔『국사』에 "무덕 팔년 을유년에 사신을 당에 보내 불교와 도교를 구하니 당나라 임금이 허락하였다" 하였다. 이에 따르면 양명이 갑술년에 죽어 여기에 의탁해 태어났다면 겨우 열 살 남짓인데, 총애받던 재상이 왕을 달래어 사람을 보내 청하게 하였다 하니, 그 연월에 반드시 하나가 잘못이다. 이제 두 가지를 다 남겨 둔다.〕

협주 2

羊血

저본은 「羊血」이나 잘못으로 보아 「양명」으로 읽었다.

囯史云, “武徳八年乙酉遣使入唐永佛老, 唐帝許之.” 拠此, 則羊血自甲戌年死而托生于此, 則才年十餘歳矣, 而云寵宰說王遣請, 其年月必有一誤, 今两存.

『국사』에 "무덕 팔년 을유년에 사신을 당에 보내 불교와 도교를 구하니 당나라 임금이 허락하였다" 하였다. 이에 따르면 양명이 갑술년에 죽어 여기에 의탁해 태어났다면 겨우 열 살 남짓인데, 총애받던 재상이 왕을 달래어 사람을 보내 청하게 하였다 하니, 그 연월에 반드시 하나가 잘못이다. 이제 두 가지를 다 남겨 둔다.

5도교를 높이다 나라가 망하다

王喜以佛寺爲道舘,尊道士坐儒士之上.道士等行鎮國内有名山川.古平壤城勢新月城也,道士等呪勑南河龍加築爲滿月城.因名龍堰城,作䜟曰龍堰堵,且云千年寳藏堵,或鑿破靈石.〔俗云都帝嵓,亦云朝天石,盖昔聖帝騎此石朝上帝故也.〕盖金又奏築長城東北西南,時男役女耕.役至十六年乃畢.及寳藏王之世唐太宗親統以六軍來征又不利而還.髙宗緫章元年戊辰,右相劉仁䡄·大將軍李勣·新羅金仁問等攻破國滅擒王歸唐,寳藏王庻子卛四千餘家投于新羅.〔与囯史小殊,故并録.〕

왕이 기뻐하여 절을 도관(道館)으로 삼고, 도사를 높여 유학하는 이들 위에 앉혔다.

도사들이 나라 안의 이름난 산천을 다니며 눌렀다. 옛 평양성의 형세가 초승달 모양이었으므로, 도사들이 남쪽 강의 용에게 주문을 걸어 더 쌓아 보름달 모양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용언성(龍堰城)이라 이름하고 참언을 지어 용언도(龍堰堵)라 하였으며 또 천년보장도(千年寶藏堵)라고도 하였다. 혹은 신령한 돌을 뚫어 깨뜨렸다.〔세속에서 도제암 또는 조천석이라 한다. 대개 옛날 거룩한 임금이 이 돌을 타고 상제께 조회하였기 때문이다.〕

개금이 또 아뢰어 동북과 서남에 장성을 쌓게 하니, 그때 남자는 부역하고 여자는 밭을 갈았다. 역사가 열여섯 해에 이르러서야 마쳤다.

보장왕 대에 이르러 당 태종이 몸소 온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쳤으나 또 이롭지 못하여 돌아갔다.

고종 총장 원년 무진년에 우상 유인궤(劉仁軌)와 대장군 이적(李勣), 신라의 김인문(金仁問) 등이 쳐서 나라를 깨뜨리고 왕을 사로잡아 당으로 돌아갔다. 보장왕의 서자가 사천여 집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국사』와 조금 다르므로 아울러 적어 둔다.〕

협주 2

俗云都帝嵓, 亦云朝天石, 盖昔聖帝騎此石朝上帝故也.

세속에서 도제암(都帝嵓) 또는 조천석(朝天石)이라 한다. 대개 옛날 거룩한 임금이 이 돌을 타고 상제께 조회하였기 때문이다.

与囯史小殊, 故并録.

『국사』와 조금 다르므로 아울러 적어 둔다.

6보덕의 제자들이 절을 세우다

具如國史,餘具載夲傳與僧傳.師有髙弟十一人.無上和尚與弟子金趣等創金洞寺,寂㓕·義融二師創珎丘寺,智藪創大乗寺,一乗與心正·大原等創大原寺,水淨創維摩寺,四大與契育等創中臺寺,開原和尚創開原寺,明徳創燕口寺.開心與普明亦有傳,皆如本傳.

자세한 것은 『국사』에 있고, 나머지는 본전과 『승전』에 갖추어 실려 있다.

보덕에게는 뛰어난 제자 열한 사람이 있었다.

무상화상(無上和尙)이 제자 금취(金趣) 등과 금동사(金洞寺)를 세우고, 적멸(寂滅)·의융(義融) 두 스님이 진구사(珍丘寺)를 세우고, 지수(智藪)가 대승사(大乘寺)를 세우고, 일승(一乘)이 심정(心正)·대원(大原) 등과 대원사(大原寺)를 세우고, 수정(水淨)이 유마사(維摩寺)를 세우고, 사대(四大)가 계육(契育) 등과 중대사(中臺寺)를 세우고, 개원화상(開原和尙)이 개원사(開原寺)를 세우고, 명덕(明德)이 연구사(燕口寺)를 세웠다.

개심(開心)과 보명(普明)도 전이 있으니 모두 본전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