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삼국유사 › 피은 제8

신충이 갓을 걸다信忠掛冠

삼국유사 三國遺事 · 일연(一然) · 1281년 (고려 충렬왕 7) · 단락 2 · 한자 437자 · 낭독 1.7분

「삼국유사」 피은 제8 「신충이 갓을 걸다」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고려의 승려 일연이 엮은 삼국시대 설화집. 정사가 버린 이야기를 모았다. 단군신화가 실린 가장 오래된 책이다.

1잣나무가 누렇게 시들다

信忠掛冠孝成王潜邸時,與賢士信忠圍碁於宫庭栢樹下,甞謂曰,“他日若㤀郷有如栢樹.”信忠興拜.隔數月王即位賞功臣,㤀忠而不第之.忠怨而作歌帖於栢樹,樹忽黄悴.王恠使審之,得歌献之,大驚曰,“萬機鞅掌㡬㤀乎角弓.”乃召之賜爵禄,栢樹乃蘇.歌曰.“物叱好支栢史,秋察尸不冬爾屋攴墮米,汝於多攴行齊教因隐,仰頓隐面矣攺衣賜乎隐冬矣也.月羅理影攴古理因淵之叱行尸浪阿叱沙矣以攴如攴,皃史沙叱望阿乃,世理都之叱逸烏隐第也.”後句亡.由是龍現於两朝.

신충이 갓을 걸다.

효성왕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에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궁궐 뜰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다가 일찍이 일렀다.

"뒷날 만약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있으리라."

신충이 일어나 절하였다.

몇 달을 사이에 두고 왕이 즉위하여 공신에게 상을 주는데, 신충을 잊고 차례에 넣지 않았다.

신충이 원망하여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이니 나무가 홀연 누렇게 시들었다.

왕이 괴이히 여겨 살피게 하니 노래를 얻어 바쳤다.

크게 놀라 말하였다. "온갖 정사에 바빠 하마터면 각궁(角弓)의 뜻을 잊을 뻔하였구나."

이에 불러 벼슬과 녹을 주니 잣나무가 이에 되살아났다.

노래는 이러하다.

物叱好支栢史 秋察尸不冬爾屋攴墮米 汝於多攴行齊教因隐 仰頓隐面矣攺衣賜乎隐冬矣也 月羅理影攴古理因淵之叱 行尸浪阿叱沙矣以攴如攴 皃史沙叱望阿乃 世理都之叱逸烏隐第也

뒷구절은 없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두 조정에 총애가 드러났다.

2벼슬을 걸어 두고 산으로 들다

景徳王〔王即孝成之弟也.〕二十二年癸夘,忠與二友相約掛冠入南岳,再徴不就落髮爲沙門.爲王創断俗寺居焉,願終身丘壑以奉福大王,王許之.留真在金堂後壁是也.南有村名俗休,今訛云小花里.〔按三和尚傳,有信忠奉聖寺與此相混然,計其神文之世,距景徳已百餘年.况神文与信忠乃宿世之事,則非此信忠明矣.冝詳之.〕又别記云.景徳王代有直長李俊〔髙僧傳作李純.〕早㑹發願,年至知命須出家創佛寺.天寳七年戊子年登五十矣,攺創槽淵小寺爲大刹,名断俗寺.身亦削髮法名孔宏長老,住寺二十年乃卒.與前三國史所載不同,两存之闕疑.讃曰.功名未已鬢先霜,君寵雖多百嵗忙.隔岸有山頻入夢,逝将香火祝吾皇.

경덕왕〔왕은 곧 효성왕의 아우다.〕 22년 계묘년에 신충이 두 벗과 서로 약속하여 갓을 걸어 두고 남악에 들어갔다.

두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머리를 깎아 사문이 되었다.

왕을 위해 단속사를 세우고 거기 살며, 한평생 산골에서 대왕의 복을 받들기를 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남긴 초상이 금당 뒤 벽에 있는 것이 이것이다.

남쪽에 마을이 있어 속휴(俗休)라 하는데 지금은 잘못 불러 소화리라 한다.

〔『삼화상전』을 살피건대 신충봉성사가 있어 이와 서로 섞였다. 그러나 신문왕 때를 헤아리면 경덕왕과 이미 백 년 남짓 떨어진다. 하물며 신문왕과 신충의 일은 곧 지난 세상의 일이니 이 신충이 아님이 분명하다. 마땅히 자세히 살피라.〕

또 별기에 이르기를 이러하다.

경덕왕 대에 직장 이준이〔『고승전』에는 이순이라 하였다.〕 일찍이 발원하여, 나이가 쉰에 이르면 모름지기 출가하여 절을 세우겠다 하였다.

천보 칠년 무자년에 나이 쉰이 되자, 조연의 작은 절을 고쳐 큰 절로 만들고 이름을 단속사라 하였다.

제 몸도 머리를 깎고 법명을 공굉장로라 하여 절에 스무 해를 살다가 죽었다.

앞의 『삼국사』에 실린 것과 같지 않으므로 두 가지를 다 남겨 의심스러운 데를 비워 둔다.

기려서 이른다.

공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살쩍이 먼저 서리 지고 임금의 총애가 비록 많으나 백 년이 바쁘구나. 언덕 너머 산이 있어 자주 꿈에 드니 가서 향불로 우리 임금을 축원하리라.

협주 3

王即孝成之弟也.

왕은 곧 효성왕의 아우다.

按三和尚傳, 有信忠奉聖寺與此相混然, 計其神文之世, 距景徳已百餘年. 况神文与信忠乃宿世之事, 則非此信忠明矣. 冝詳之.

『삼화상전』을 살피건대 신충봉성사가 있어 이와 서로 섞였다. 그러나 신문왕 때를 헤아리면 경덕왕과 이미 백 년 남짓 떨어진다. 하물며 신문왕과 신충의 일은 곧 지난 세상의 일이니 이 신충이 아님이 분명하다. 마땅히 자세히 살피라.

髙僧傳作李純.

『고승전』에는 이순(李純)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