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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장륙존상皇龍寺丈六

삼국유사 三國遺事 · 일연(一然) · 1281년 (고려 충렬왕 7) · 단락 4 · 한자 630자 · 낭독 2.5분

「삼국유사」 탑상 제4 「황룡사 장륙존상」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고려의 승려 일연이 엮은 삼국시대 설화집. 정사가 버린 이야기를 모았다. 단군신화가 실린 가장 오래된 책이다.

1궁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 절이 되다

新羅第二十四真興王即位十四年癸酉二月,將築紫宫於龍宫南,有黃龍現其地乃攺置爲佛寺号黄龍寺.至己丑年周圍墻宇,至十七年方畢.

신라 스물넷째 진흥왕 즉위 14년 계유년 2월에, 용궁 남쪽에 궁궐을 지으려 하였다.

그 땅에 누런 용이 나타나므로 고쳐서 절로 삼고 이름을 황룡사(黃龍寺)라 하였다.

기축년에 이르러 담과 집을 둘러 세우고, 17년에야 비로소 마쳤다.

2아육왕이 못 이룬 불상을 신라에서 이루다

未㡬海南有一巨舫來泊於河曲縣之絲浦〔今蔚州谷浦也〕.撿看有牒丈云,“西笁阿育王聚黄䥫五萬七千斤黃金三萬分,〔別傳云, 䥫四十万七千斤金一千兩, 恐誤. 或云三万七千斤.〕將鑄釋迦三尊像未就,載舡泛海而祝曰,‘願到有縁國圡成丈六尊容.’并載模様一佛二菩薩像.”…以大建六年甲午三月,〔寺中記云癸巳十月十七日.〕鑄成丈六尊像一鼔而就.…安於皇龍寺.明年像淚流至蹱沃地一尺.大王升遐之兆.或云像成在真平之世者,謬也.別本云.阿育王在西笁大香華國生佛後一百年間.恨不得供養真身,歛化金䥫若干斤三度鑄成無㓛.時王之太子獨不預斯事,王使詰之.太子奏云,“獨力非功.曽知不就.”王然之乃載舡泛海.南閻浮提十六大國,五百中國,十千小國,八萬聚落靡不周旋皆鑄不成.最後到新羅國,真興王鑄之於文仍林,像成相好畢備.阿育此飜無憂.…今兵火已來大像與二菩薩皆融没,而小釋迦猶存焉.

얼마 뒤 남쪽 바다에 큰 배 하나가 하곡현 사포(絲浦)에 와서 닿았다.〔지금의 울주 곡포이다.〕

살펴보니 문서가 있어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서역 아육왕(阿育王)이 누런 쇠 오만 칠천 근과 황금 삼만 푼을 모아〔다른 전기에는 쇠 사십만 칠천 근에 금 일천 냥이라 하나 아마도 잘못인 듯하다. 혹은 삼만 칠천 근이라고도 한다.〕 석가 삼존상을 부으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며 빌기를 '인연 있는 나라에 이르러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이루기를 원한다' 하였다."

아울러 부처 하나와 보살 둘의 본보기 상도 실려 있었다.

고을 아전이 사실을 갖추어 아뢰니, 명을 내려 그 고을 성 동쪽의 높고 밝은 땅을 골라 동축사(東竺寺)를 세우고 그 삼존을 맞아 모시게 하였다.

그 금과 쇠를 서울로 실어 보내어, 대건 육년 갑오년 3월에〔절에 있는 기록에는 계사년 10월 열이레라 한다.〕 장륙존상(丈六尊像)을 부으니 한 번에 이루어졌다.

황룡사에 모셨다. 이듬해 상이 눈물을 흘려 발꿈치에 이르러 땅을 한 자나 적셨으니, 대왕이 세상을 떠날 조짐이었다. 혹 상이 이루어진 것이 진평왕 대라 하는 이가 있으나 잘못이다.

다른 책에는 이렇게 이른다.

아육왕은 서역 대향화국(大香華國)에 부처가 난 뒤 백 년 사이에 있었다. 참된 몸을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여 금과 쇠 얼마를 거두어 세 번이나 부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때 왕의 태자만 홀로 이 일에 참여하지 않으므로 왕이 꾸짖어 물으니, 태자가 아뢰었다. "혼자 힘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이루지 못할 줄 진작 알았습니다."

왕이 그렇게 여겨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다. 남염부제의 열여섯 큰 나라와 오백 중간 나라, 일만 작은 나라와 팔만 마을을 두루 돌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모두 부어도 이루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신라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부으니 상이 이루어져 갖출 모습을 다 갖추었다. 아육(阿育)은 옮기면 '근심 없음(無憂)'이다.

지금 병화(兵火)를 겪은 뒤로 큰 상과 두 보살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상만 남아 있다.

협주 4

大建

대건(大建)

今蔚州谷浦也

지금의 울주 곡포이다.

別傳云, 䥫四十万七千斤金一千兩, 恐誤. 或云三万七千斤.

다른 전기에는 쇠 사십만 칠천 근에 금 일천 냥이라 하나 아마도 잘못인 듯하다. 혹은 삼만 칠천 근이라고도 한다.

寺中記云癸巳十月十七日.

절에 있는 기록에는 계사년 10월 열이레라 한다.

3자장이 문수보살에게 들은 말

後大徳慈藏西學到五䑓山,感文殊現身授訣仍囑云,“汝國皇龍寺乃釋迦與迦葉佛講演之地,宴坐石猶在.故天笁無憂王聚黄䥫若干斤泛海,歴一千三百餘年然後乃到而國,成安其寺.蓋威縁使然也.”〔与别記所載符同.〕像成後,東笁寺三尊亦移安寺中.寺記云,“真平五年甲辰金堂造成,善徳王代寺初主真骨歡喜師,第二主慈藏國統,次國統惠訓,次廂律師云.”

뒤에 대덕 자장(慈藏)이 서쪽에 배우러 가서 오대산에 이르렀을 때, 문수보살이 몸을 나타내어 비결을 주며 이렇게 당부하였다.

"그대 나라의 황룡사는 곧 석가와 가섭불이 강연하던 자리요, 편히 앉으시던 돌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러므로 천축의 무우왕(無憂王)이 누런 쇠 얼마를 모아 바다에 띄운 것이 일천삼백여 해를 지난 뒤에야 그대 나라에 이르러, 그 절에 이루어져 모셔진 것이다. 대개 위엄 있는 인연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다른 기록에 실린 것과 딱 들어맞는다.〕

상이 이루어진 뒤에 동축사의 삼존도 이 절로 옮겨 모셨다.

절의 기록에 이르기를 "진평왕 5년 갑진년에 금당이 이루어졌고, 선덕왕 대에 절의 첫 주지는 진골 환희사(歡喜師)요, 둘째 주지는 자장 국통이며, 다음이 국통 혜훈(惠訓), 다음이 상률사(廂律師)이다" 하였다.

협주 1

与别記所載符同.

다른 기록에 실린 것과 딱 들어맞는다.

4기려서 이르다

讃曰.塵方何處匪真郷,香火因縁最我邦.不是育王難下手.月城來訪舊行藏.

기려서 이른다.

티끌 세상 어느 곳인들 참된 고향이 아니랴만 향불의 인연은 우리나라가 으뜸이라 아육왕이 손대기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월성에 와서 옛 자취를 찾으려 함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