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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로 가져와 모신 사리前後所將舍利

삼국유사 三國遺事 · 일연(一然) · 1281년 (고려 충렬왕 7) · 단락 13 · 한자 2,315자 · 낭독 9.3분

「삼국유사」 탑상 제4 「앞뒤로 가져와 모신 사리」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고려의 승려 일연이 엮은 삼국시대 설화집. 정사가 버린 이야기를 모았다. 단군신화가 실린 가장 오래된 책이다.

1통도사 계단의 돌뚜껑을 연 사람들

前後所将舎利國史云真興王大清三年己巳,梁使沈湖送舎利若干粒.善徳王代貞觀十七年癸夘,慈藏法師所將佛頭骨·佛牙·佛舎利百粒·佛所著緋羅金㸃袈裟一領,其舎利分爲三,一分在皇龍塔,一分在太和塔,一分并袈裟在通度寺戒壇,其餘未詳所在.壇有二級,上級之中安石蓋如覆鑊.諺云,昔在夲朝相次有二廉使禮壇舉石鑊而敬之,前感脩蟒在凾中,後見巨蟾蹲石腹,自此不敢舉之.近有上将軍金公利生·庾侍郎碩以髙廟朝受㫖指揮江東,仗節到寺擬欲舉石瞻禮,寺僧以徃事難之.二公令軍士固舉之,内有小石凾,凾襲之中貯以瑠璃筒,筒中舎利只四粒.傳示瞻敬,筒有小傷裂處.於是庾公適蓄一水精凾子遂奉施兼藏焉,識之以記,移御江都四年乙未歳也.古記稱百枚分藏三䖏,今唯四爾.旣隠現隨人,多小不足恠也.

앞뒤로 가져와 모신 사리.

『국사』에 이르기를, 진흥왕 대청 삼년 기사년에 양나라 사신 심호(沈湖)가 사리 몇 낱을 보내왔다 하였다.

선덕왕 대 정관 십칠년 계묘년에 자장법사가 가져온 것은 부처의 머리뼈, 부처의 어금니, 부처의 사리 백 낱, 부처가 입던 붉은 비단에 금점을 놓은 가사 한 벌이었다.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한 몫은 황룡사 탑에, 한 몫은 태화사 탑에, 한 몫은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다. 그 나머지는 있는 곳이 자세하지 않다.

계단은 두 층인데 위층 가운데에 가마솥을 엎어 놓은 듯한 돌뚜껑을 놓았다.

세속에 전하기를 이러하다. 옛날 본조에 잇달아 두 염사(廉使)가 계단에 예하며 돌뚜껑을 들고 공경하였는데, 앞 사람은 함 속에 긴 구렁이가 있는 것을 보았고 뒷사람은 큰 두꺼비가 돌 배에 웅크린 것을 보았다. 이때부터 감히 들지 못하였다.

근래에 상장군 김이생(金利生)과 시랑 유석(庾碩)이 고종 조에 뜻을 받들어 강동을 지휘하게 되어, 절부를 짚고 절에 이르러 돌을 들고 우러러보려 하였다. 절의 승려가 지난 일을 들어 어렵게 여겼으나 두 사람이 군사를 시켜 기어이 들게 하였다.

안에 작은 돌함이 있고 함 속에 유리통이 담겼는데, 통 안의 사리는 다만 네 낱이었다.

돌려 보이며 우러러 공경하였다. 통에 조금 상하여 갈라진 데가 있었다. 이에 유공이 마침 지녔던 수정함 하나를 바쳐 함께 간직하게 하고 글로 적어 두었다. 강도로 옮겨 간 지 네 해째 되는 을미년의 일이다.

옛 기록에는 백 낱을 세 곳에 나누어 두었다 하는데 지금은 오직 넷뿐이다. 이미 사람에 따라 숨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하니, 많고 적음은 괴이할 것이 못 된다.

2황룡사 탑이 탄 날 돌에 생긴 얼룩

又諺云其皇龍寺塔災之日石鑊之東面始有大斑,至今猶然.即大遼應暦三年癸丑歳也,本朝光廟五載也,塔之第三災也.曺溪無衣子留詩云,“聞道皇龍災塔日,連燒一面示無間”,是也.自至元甲子已來大朝使佐本國皇華爭来瞻禮,四方雲水輻湊來叅,或舉不舉.真身四枚外變身舎利碎如砂礫現於𥖪外,而異香郁烈旀日不歇者比比有之,此末季一方之竒事也.

또 세속에 전하기를, 황룡사 탑이 불탄 날 돌뚜껑의 동쪽 면에 비로소 큰 얼룩이 생겨 지금까지 그러하다 한다.

곧 대요 응력 삼년 계축년이니 본조 광종 5년이며, 탑이 세 번째로 불탄 때다.

조계의 무의자(無衣子)가 남긴 시에 "황룡사 탑이 불탄 날 소식을 들으니, 잇달아 한 면을 태워 사이 없음을 보였네" 한 것이 이것이다.

지원 갑자년 이래로 큰 나라의 사신과 본국의 사신이 다투어 와서 우러러 예배하고, 사방의 수행자들이 몰려와 참례하였다. 더러는 돌뚜껑을 들기도 하고 들지 않기도 하였다.

참몸 네 낱 밖에도 변신사리가 모래알처럼 부서져 함 밖에 나타나고, 기이한 향내가 짙어 며칠이 지나도 그치지 않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는 말세 한 지방의 기이한 일이다.

3사신들이 가져온 것들

唐大中五年辛未入朝使元弘所将佛牙,〔今未詳所在,新羅文聖王代.〕後唐同光元年癸未,本朝大祖即位六年入朝使尹質所将五百羅漢像,今在北崇山神光寺.大宋宣和元年己夘〔睿廟十五年〕入貢使鄭克永·李之羙等所将佛牙今内殿置奉者是也.

당나라 대중 오년 신미년에 조회하러 간 사신 원홍(元弘)이 가져온 부처의 어금니〔지금 있는 곳이 자세하지 않다. 신라 문성왕 대다.〕가 있다.

후당 동광 원년 계미년, 본조 태조 즉위 6년에 조회하러 간 사신 윤질(尹質)이 가져온 오백나한상은 지금 북숭산 신광사에 있다.

대송 선화 원년 기묘년〔예종 15년이다.〕에 조공하러 간 사신 정극영(鄭克永)과 이지미(李之美) 등이 가져온 부처의 어금니가 지금 내전에 두어 받드는 것이 이것이다.

협주 2

今未詳所在, 新羅文聖王代.

지금 있는 곳이 자세하지 않다. 신라 문성왕 대다.

睿廟十五年

예종 15년이다.

4하늘의 공양이 늦은 까닭

相傳云,昔義湘法師入唐到終南山至相寺智儼尊者處,隣有宣律師常受天供每齋時天厨送食.一日律師請湘公齋,湘至坐定旣久,天供過時不至.湘乃空鉢而歸,天使乃至.律師問“今日何故遟”,天使曰,“滿洞有神兵遮擁不能淂入.”於是律師知湘公有神衛,乃服其道勝仍留其供具,翌日又邀儼湘二師齋具陳其由.湘公從容謂宣曰,“師旣被天帝所敬,甞聞帝釋宫有佛四十齒之一牙,爲我䓁軰請下人間爲福如何.”律師後與天使傳其意於上帝,帝限七日送與.湘公致敬訖邀安大内.

서로 전하기를 이러하다.

옛날 의상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가 종남산 지상사 지엄존자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이웃에 선율사(宣律師)가 있어 늘 하늘의 공양을 받았는데, 재를 올릴 때마다 하늘의 주방에서 밥을 보내왔다.

하루는 율사가 의상공을 청하여 재를 올렸다. 의상이 이르러 자리를 잡고 앉은 지 오래되었는데도 하늘의 공양이 때를 넘겨 이르지 않았다.

의상이 이에 빈 바리로 돌아가니, 그제야 하늘의 사자가 이르렀다.

율사가 물었다. "오늘은 어찌하여 늦었는가."

하늘의 사자가 말하였다. "골짜기에 신병(神兵)이 가득 막고 있어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이에 율사는 의상공에게 신의 호위가 있음을 알고 그 도가 뛰어남에 탄복하였다. 이내 그 공양 그릇을 그대로 두었다가, 이튿날 다시 지엄과 의상 두 분을 청하여 재를 올리고 그 까닭을 갖추어 말하였다.

의상공이 조용히 선율사에게 일렀다. "스님은 이미 하늘 임금의 공경을 받고 계십니다. 일찍이 듣건대 제석궁에 부처의 마흔 이 가운데 어금니 하나가 있다 하니, 우리들을 위하여 인간 세상에 내려 주기를 청하여 복을 짓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율사가 뒤에 하늘의 사자와 함께 그 뜻을 상제께 전하니, 상제가 이레를 기한으로 삼아 보내 주었다.

의상공이 공경을 다한 뒤 맞이하여 궁궐에 모셨다.

5'금인이 나라를 망친다'는 참언

後至大宋徽宗朝崇奉尢道,時國人傳啚䜟曰,“金人敗國.”黄巾之徒諷日官奏曰,“金人者佛教之謂也,将不利於國家.”議将破滅釋氏坑諸沙門,焚燒経典,而别造小舡載佛牙泛於大海,任隨縁流泊.

뒤에 대송 휘종 조에 이르러 도교를 더욱 높이 받들었다.

그때 나라 사람들 사이에 도참이 전하기를 "금인(金人)이 나라를 망친다" 하였다.

황건의 무리가 일관을 부추겨 아뢰게 하였다. "금인이란 불교를 이르는 말이니 장차 나라에 이롭지 않을 것입니다."

의논하여 장차 부처의 가르침을 없애고 승려들을 구덩이에 묻고 경전을 불사르기로 하였다. 그러고는 따로 작은 배를 지어 부처의 어금니를 싣고 큰 바다에 띄워, 인연 따라 흘러가 닿는 대로 맡겨 두었다.

6뇌물로 어금니를 바꿔치기하다

于時適有本朝使者至宋聞其事,以天花茸五十領紵布三百疋行賂於押舡内史宻授佛牙,但流空舡.使臣等旣淂佛牙來奏.扵是睿宗大喜,奉安于十貟殿左掖小殿常鑰匙殿門施香燈于外,每親幸日開殿瞻敬.

이때 마침 본조의 사신이 송나라에 이르러 그 일을 들었다.

천화용(天花茸) 쉰 벌과 모시 삼백 필로 배를 맡은 내사에게 뇌물을 주어 몰래 부처의 어금니를 건네받고, 다만 빈 배만 띄워 보냈다.

사신들이 어금니를 얻어 와서 아뢰니, 예종이 크게 기뻐하여 십원전(十員殿) 왼쪽 곁의 작은 전각에 받들어 모셨다.

늘 전각 문을 잠그고 밖에 향과 등을 베풀었으며, 몸소 거둥하는 날마다 전각을 열고 우러러 공경하였다.

7강화로 옮길 때 잃어버리다

至壬辰歳移御次,内官忩遽中忘不收撿.至丙申四月御願堂神孝寺釋蕰光請致敬佛牙聞于上,勑令内臣遍検宫中無淂也.時栢䑓侍御史崔冲命薛伸急徴于諸謁者房,皆未知所措.内臣金承老奏曰,“壬辰年移御時紫門日記推看.”從之,記云,“入内侍大府卿李白全受佛牙凾云.”召李詰之,對曰“請歸家更尋私記.”到家検看,得左番謁者金瑞龍佛牙凾准受記來呈.召問瑞龍無辭以對.又以金承老所奏云,壬辰至今丙申五年間御佛堂及景霊殿上守等囚禁問當,依違未决.

임진년에 임금이 자리를 옮길 때, 내관이 바쁘고 급한 가운데 잊어버려 거두어 챙기지 못하였다.

병신년 4월에 이르러 원당인 신효사의 승려 온광(蘊光)이 부처의 어금니에 공경을 드리기를 청하여 임금께 아뢰었다. 명을 내려 내신에게 궁중을 두루 살피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때 백대시어사 최충명(崔冲命)과 설신(薛伸)이 급히 여러 알자방에서 찾았으나 모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내신 김승로(金承老)가 아뢰었다. "임진년에 옮기실 때의 자문일기(紫門日記)를 살펴보시옵소서."

그대로 하니 일기에 이르기를 "입내시 대부경 이백전(李白全)이 부처 어금니 함을 받았다" 하였다.

이백전을 불러 따져 물으니 "집에 돌아가 사사로운 기록을 다시 찾아보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집에 이르러 살펴 좌번 알자 김서룡(金瑞龍)이 부처 어금니 함을 받았다는 기록을 얻어 와 바쳤다.

서룡을 불러 물으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또 김승로가 아뢴 바로써, 임진년부터 지금 병신년까지 다섯 해 사이의 어불당과 경령전 지킴이들을 가두어 물었으나 이러니저러니 하며 결말이 나지 않았다.

8임금의 네 가지 의심

隔三日夜中,瑞龍家園墻裏有投擲物聲,以火検看乃佛牙凾也.凾本内一重沉香合,次重純金合,次外重白銀凾,次外重瑠璃凾,次外重螺鈿凾各幅子如之,今伹瑠璃凾爾.喜得之入逹于内.有司議金瑞龍及两殿上守皆誅,晉陽府奏云“因佛事不合多傷人.”皆免之.更勑十貟殿中庭特造佛牙殿安之令将士守之,擇吉日請神孝寺上房蕰光領徒三十人入内設齋敬之,其日入直氶宣崔弘上将軍崔公衍·李令長·内侍茶房等侍立于殿庭依次頂戴敬之,佛牙區穴間舎利不知数,晉陽府以白銀合貯而安之.時主上謂臣下曰,“朕自亾佛牙已來自生四疑.一疑天宫七日限滿而上天矣,二疑國亂如此牙旣神物且移有縁無事之邦矣,三疑貪財小人盗取凾幅弃之溝壑矣,四疑盗取珎利而無計自露匿藏家中矣,今第四疑當之矣,”乃放聲大哭,滿庭皆洒涕獻壽,至有煉頂燒臂者不可勝計.得此實録於當時内殿焚修前祗林寺大禪師覺猷,言親所眼見使予録之.

사흘을 지난 밤중에 서룡의 집 담장 안에서 무엇인가 던지는 소리가 났다. 불을 켜 살펴보니 곧 부처 어금니 함이었다.

함은 본디 안으로 한 겹은 침향 합, 그다음 겹은 순금 합, 그 밖 겹은 백은 함, 그 밖 겹은 유리 함, 그 밖 겹은 나전 함이었고 싸개도 각각 그러하였다. 지금은 다만 유리 함뿐이었다.

기뻐하며 얻어 안으로 들여 아뢰었다.

맡은 관원이 김서룡과 두 전각 지킴이를 모두 베자고 의논하니, 진양부가 아뢰기를 "부처의 일로 사람을 많이 상하게 함은 옳지 않습니다" 하여 모두 벌을 면하였다.

다시 명을 내려 십원전 뜰 가운데 특별히 불아전(佛牙殿)을 지어 모시고 장수와 군사로 지키게 하였다.

좋은 날을 가려 신효사 상방 온광에게 무리 서른 명을 거느리고 대궐에 들어와 재를 베풀어 공경하게 하였다.

그날 숙직하던 승선 최홍, 상장군 최공연, 이영장, 내시다방 등이 전각 뜰에 모시고 서서 차례에 따라 머리에 이고 공경하였다.

부처 어금니의 오목한 틈 사이에 사리가 셀 수 없이 많았으므로, 진양부가 백은 합에 담아 모셨다.

그때 임금이 신하들에게 일렀다.

"짐이 부처의 어금니를 잃은 뒤로 네 가지 의심이 절로 생겼다.

첫째는 하늘 궁전의 이레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올라갔는가 하는 의심이요, 둘째는 나라가 이렇게 어지러우니 어금니가 이미 신령한 물건이라 인연 있고 일 없는 나라로 옮겨 갔는가 하는 의심이요, 셋째는 재물을 탐한 소인이 함과 싸개를 훔치고 도랑에 버렸는가 하는 의심이요, 넷째는 훔쳐 이득을 보려다 스스로 드러낼 길이 없어 집 안에 감추어 두었는가 하는 의심이었다.

이제 넷째 의심이 들어맞았구나."

이에 소리를 놓아 크게 우니 뜰에 가득한 이들이 모두 눈물을 뿌리며 만수를 빌었다. 정수리를 지지고 팔을 태우는 이까지 있어 이루 셀 수 없었다.

이 사실 기록은 그때 내전에서 향불을 받들던, 전 지림사 대선사 각유(覺猷)에게서 얻었다. 제 눈으로 본 바를 말하며 나에게 적게 하였다.

9개경으로 돌아올 때 몸으로 지켜 낸 사람

又至庚午出都之亂顛沛之甚過於壬辰,十貟殿監主禪師心鑑亡身佩持,獲免於賊難.逹於大内,大賞其功移授名刹今住氷山寺,是亦親聞於彼.

또 경오년 도읍을 나오던 난리에 이르러서는 엎어지고 자빠짐이 임진년보다 심하였다.

십원전 감주 선사 심감(心鑑)이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지녀서 도적의 난을 면하였다.

대궐에 이르니 그 공을 크게 상 주어 이름난 절로 옮겨 주었고 지금은 빙산사에 머무른다. 이 또한 그에게서 직접 들은 것이다.

10경전이 건너온 자취

真興王代天嘉六年乙酉,陳使劉思與釋明觀載送佛経論一千七百餘卷.貞観十七年慈藏法師載三藏四百餘凾來,安于通度寺.興徳王代大和元年丁未,入學僧髙䴡釋丘徳賷佛經若干凾來,王與諸寺僧徒出迎于興輪寺前路.大中五年入朝使元弘賷佛経若干軸來,羅末普耀禪師再至吳越載大藏経來,即海龍王寺開山祖也.

진흥왕 대 천가 육년 을유년에 진나라 사신 유사(劉思)가 승려 명관(明觀)과 함께 불경과 논 천칠백여 권을 실어 보냈다.

정관 십칠년에 자장법사가 삼장 사백여 함을 실어 와 통도사에 모셨다.

흥덕왕 대 태화 원년 정미년에, 유학하던 승려 고려(高麗) 구덕(丘德)이 불경 몇 함을 지고 오니, 왕이 여러 절의 승려들과 함께 흥륜사 앞길에 나가 맞이하였다.

대중 오년에 조회하러 간 사신 원홍이 불경 몇 축을 지고 왔다.

신라 말에 보요선사(普耀禪師)가 오월(吳越)에 두 번 가서 대장경을 실어 왔으니, 곧 해룡왕사를 처음 연 조사다.

11바람이 멎은 뒤에야 배가 나아가다

大宋元祐甲戌,有人真讃云.偉㦲初祖,巍乎真容,再至吳越大藏成㓛.賜衘普耀鳳詔四封.若問其徳白月清風.又大定中漢南管記彭祖逖留詩云.水雲蘭若住空王,况是神龍穏一塲.畢竟名藍誰淂似.初傳像教自南方.有跋云.“昔普耀禪師始求大藏於南越,洎旋返次海風忽起扁舟出没於波間.師即言曰,“意者神龍欲留経耶.”遂呪願乃誠兼奉龍歸焉,於是風靜波息.旣淂還國遍賞山川求可以安邀處,至此山忽見瑞雲起於山上,乃與髙第弘慶経營蓮社,然則像教之東漸實始乎此.漢南管記彭祖逖題.”寺有龍王堂,頗多霊異乃當時隨經而来止者也,至今猶存.

대송 원우 갑술년에 어떤 이가 초상에 붙인 찬에 이렇게 이른다.

거룩하다 처음 여신 조사여, 우뚝하다 그 참모습이여. 오월에 두 번 이르러 대장경으로 공을 이루었네. 보요라는 이름을 내리고 임금의 조서가 네 번 봉해졌네. 그 덕을 묻는다면 흰 달과 맑은 바람이라 하리.

또 대정 연간에 한남관기 팽조적(彭祖逖)이 남긴 시에 이렇게 이른다.

물과 구름의 절에 부처가 머무시니, 더구나 신룡이 한자리에 편안하네. 끝내 이름난 절 가운데 무엇이 이만하랴, 불교를 처음 전한 것이 남쪽에서였네.

발문이 있어 이르기를 이러하다.

"옛날 보요선사가 처음 남월에서 대장경을 구하고 돌아오는 길에, 바다 바람이 홀연 일어 조각배가 물결 사이에 잠겼다 떴다 하였다.

선사가 곧 말하였다. '생각건대 신룡이 경을 머물게 하려는 것인가.'

마침내 주문을 외며 정성으로 빌고 아울러 용을 받들어 함께 돌아가기로 하니, 이에 바람이 자고 물결이 그쳤다.

나라에 돌아온 뒤 산천을 두루 살펴 모실 만한 곳을 찾다가 이 산에 이르러 홀연 상서로운 구름이 산 위에 이는 것을 보았다. 이에 뛰어난 제자 홍경(弘慶)과 더불어 결사를 경영하였다. 그러한즉 불교가 동쪽으로 번진 것이 실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한남관기 팽조적이 적다."

절에 용왕당이 있어 신령한 이적이 자못 많으니, 곧 그때 경을 따라와 머문 이다. 지금도 그대로 있다.

12대장경이 이어 들어오다 — 찬

又天成三年戊子,黙和尚入唐亦載大藏經來,本朝睿廟時慧照國師奉詔西學,市遼本大藏三部而来,一本今在定惠寺.〔海印寺有一本,許叅政宅有一本.〕大安二年本朝宣宗代,祐世僧統義天入宋多將天台教観而来,此外方冊所不載髙僧信士徃来所賷,不可詳記.大教東漸洋洋乎慶矣哉.讃曰.華月夷風尚隔烟,鹿園鶴樹二千年.流傳海外真堪賀.東震西乹共一天.

또 천성 삼년 무자년에 묵화상(默和尙)이 당나라에 들어가 역시 대장경을 실어 왔다.

본조 예종 때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조서를 받들어 서쪽에서 배우고 요나라 본 대장경 세 벌을 사 왔는데, 한 벌은 지금 정혜사에 있다.〔해인사에 한 본이 있고, 허 참정 댁에 한 본이 있다.〕

대안 이년 본조 선종 대에 우세승통 의천(義天)이 송나라에 들어가 천태의 교관을 많이 가지고 왔다.

이 밖에 책에 실리지 않은 것으로 높은 승려와 믿는 이들이 오가며 지고 온 것은 자세히 적을 수 없다.

큰 가르침이 동쪽으로 번짐이 넘실넘실하니 경사스럽구나.

기려서 이른다.

중화의 달과 변방의 바람이 아직 안개로 막혔는데 녹야원과 학의 숲에서 이천 년이 흘렀네. 바다 밖으로 흘러 전함이 참으로 하례할 만하니 동녘과 서녘이 함께 한 하늘 아래로다.

협주 1

海印寺有一本, 許叅政宅有一本.

해인사에 한 본이 있고, 허 참정 댁에 한 본이 있다.

13무극이 덧붙이다 — 내가 본 어금니에는 사리가 없었다

按此録義湘傳云,“永徽初入唐謁智儼”,然㨿浮石本碑,湘武徳八年生丱歳出家,永徽元年庚戌與元曉同伴欲西入至髙䴡,有難而廻.至龍朔元年辛酉入唐就學於智儼.緫章元年儼遷化,咸享二年湘来還新羅,長安二年壬寅示滅,年七十八.則疑與儼公齋於宣律師處請天宫佛牙在辛酉至戊辰七八年間也.本朝髙庙入江都壬辰年疑天宮七日限滿者誤矣.忉利天一日夜當人間一百歳,且從湘公初入唐辛酉計至髙庙壬辰六百九十三歳也,至庚子年始滿七百年,而七日限已滿矣.至岀都至元七年庚午則七百三十年,若如天言而七日後還天宫,則禪師心鑑出都時佩持出献者恐非真佛牙也.於是年春岀都前,於大内集諸宗名徳乞佛牙舎利精勤雖切,而不得一枚則七日限滿上天者㡬矣.二十一年甲申修補國清寺金塔,國主與莊穆王后幸妙覺寺,集衆慶讃訖,右佛牙與洛山水精念珠如意珠君臣與大衆皆瞻奉頂戴後并納金塔内.予亦預斯㑹而親見所謂佛牙者,長三寸許而無舎利焉.無極記.

이 기록을 살피건대 「의상전」에 "영휘 초에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을 뵈었다" 하였다.

그러나 부석사 본비에 따르면, 의상은 무덕 팔년에 태어나 더벅머리에 출가하였고, 영휘 원년 경술년에 원효와 짝하여 서쪽으로 들어가려다 고구려에 이르러 어려움을 만나 돌아왔다. 용삭 원년 신유년에 이르러 당나라에 들어가 지엄에게 나아가 배웠다. 총장 원년에 지엄이 세상을 떠났고, 함형 이년에 의상이 신라로 돌아왔으며, 장안 이년 임인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 일흔여덟이었다.

그런즉 지엄과 함께 선율사가 있는 곳에서 재를 올리고 하늘 궁전의 부처 어금니를 청한 것은 신유년에서 무진년 사이 일고여덟 해 안의 일이 아닌가 한다.

본조 고종이 강도에 들어간 임진년을 하늘 궁전의 이레 기한이 찬 때로 의심한 것은 잘못이다.

도리천의 하루 낮밤은 인간의 백 해에 해당한다. 또 의상공이 처음 당나라에 들어간 신유년부터 헤아려 고종 임진년까지가 육백구십삼 해이니, 경자년에 이르러야 비로소 칠백 년이 차서 이레 기한이 이미 찬 것이 된다.

도읍을 나온 지원 칠년 경오년까지면 칠백삼십 년이다. 만약 하늘의 말대로 이레 뒤에 하늘 궁전으로 돌아갔다면, 선사 심감이 도읍을 나올 때 지녀 나와 바친 것은 아마도 참 부처의 어금니가 아닐 것이다.

이해 봄 도읍을 나오기 전, 대궐에서 여러 종파의 이름난 이들을 모아 부처 어금니의 사리를 빌었는데 정성이 간절하였으나 한 낱도 얻지 못하였으니, 이레 기한이 차서 하늘로 오른 것에 가깝다.

지원 이십일년 갑신년에 국청사 금탑을 고쳐 세우고, 임금이 장목왕후와 함께 묘각사에 거둥하여 사람들을 모아 경축하고 기렸다. 마친 뒤 위의 부처 어금니와 낙산의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임금과 신하와 뭇사람이 모두 우러러 받들어 머리에 이었고, 그 뒤 함께 금탑 안에 넣었다.

나 또한 이 모임에 참여하여 이른바 부처의 어금니라는 것을 직접 보았는데, 길이가 세 치쯤이고 사리는 없었다.

무극이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