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삼국유사 › 탑상 제4

백엄사 석탑의 사리伯嚴寺石塔舍利

삼국유사 三國遺事 · 일연(一然) · 1281년 (고려 충렬왕 7) · 단락 2 · 한자 269자 · 낭독 1.1분

「삼국유사」 탑상 제4 「백엄사 석탑의 사리」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고려의 승려 일연이 엮은 삼국시대 설화집. 정사가 버린 이야기를 모았다. 단군신화가 실린 가장 오래된 책이다.

1절의 내력을 아는 이가 없다

開運三年丙午十月二十九日,康州界任道大監柱貼云,“伯嚴禪寺坐草八縣〔今草溪〕,寺僧偘逰上座年三十九云,寺之絰始則不知.”但古傳云.前代新羅時北宅廳基捨置兹寺中間久廢,去丙寅年中沙木谷陽孚和尚攺造住持丁丑遷化.乙酉年曦陽山兢讓和尚来住十年,又乙未年却返曦陽,時有神卓和尚自南原白嵓藪来入當院如法住持.

개운 삼년 병오년 시월 스무아흐레, 강주(康州) 지경 임도대감(任道大監)의 문서에 이렇게 적혀 있다.

"백엄선사(伯嚴禪寺)는 초팔현(草八縣)에 자리하는데〔지금의 초계이다.〕, 절의 승려 간유(偘遊) 상좌가 나이 서른아홉으로 말하기를 절이 언제 처음 섰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였다."

다만 옛 전승에 이렇게 이른다.

앞선 시대 신라 때 북택(北宅) 관청 터를 내놓아 이 절을 두었는데, 중간에 오래 폐하였다.

지난 병인년에 사목곡(沙木谷) 양부화상(陽孚和尙)이 고쳐 짓고 주지가 되었다가 정축년에 세상을 떠났다.

을유년에 희양산(曦陽山) 긍양화상(兢讓和尙)이 와서 열 해를 머물다가 을미년에 도로 희양으로 돌아갔다.

그때 신탁화상(神卓和尙)이 남원 백암수(白嵓藪)에서 와 이 절에 들어와 법대로 주지가 되었다.

협주 2

開運

개운(開運)

今草溪

지금의 초계이다.

2탑을 세우고 절의 규례를 정하다

又咸雍元年十一月當院住持得奥㣲定大師釈秀立定院中常規十條,新竪五層石塔真身佛舎利四十二粒安邀,以私財立寳追年供飬條弟一.當寺護法敬僧嚴欣伯欣两明神及近岳等三位前,立寳供養條,〔諺傳, 嚴欣·伯欣二人捨家爲寺因名曰伯嚴, 仍爲護法神.〕金堂藥師前,木鉢月朔遆米條等.已下不録.

또 함옹 원년 십일월에 이 절의 주지 득오미정대사(得奧微定大師) 석수(釋秀)가 절 안의 상규(常規) 열 조목을 세워 정하였다.

새로 오층 석탑을 세우고 참몸 부처의 사리 마흔두 알을 모셨으며, 사재로 보(寶)를 세워 해마다 공양하게 한 것이 첫째 조목이다.

이 절의 법을 지키고 승려를 공경하는 엄흔·백흔 두 밝은 신과 근악(近岳) 등 세 자리 앞에 보를 세워 공양하는 조목이 있다.〔세간에 전하기를, 엄흔·백흔 두 사람이 집을 내놓아 절로 삼았으므로 백엄이라 이름하였고, 이내 법을 지키는 신이 되었다고 한다.〕

금당의 약사여래 앞에 나무 바리를 두고 초하루마다 쌀을 올리는 조목 등이 있다. 그 아래는 적지 않는다.

협주 2

咸雍

함옹(咸雍)

諺傳, 嚴欣·伯欣二人捨家爲寺因名曰伯嚴, 仍爲護法神.

세간에 전하기를, 엄흔(嚴欣)·백흔(伯欣) 두 사람이 집을 내놓아 절로 삼았으므로 백엄이라 이름하였고, 이내 법을 지키는 신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