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이 서쪽에서 배우다圓光西學
1스물다섯에 배를 타고 금릉으로 가다
圎光西學唐續高僧傳苐十三卷載.新羅皇隆寺釋圎光俗姓朴氏本住三韓.卞韓·辰韓·馬韓,光即辰韓人也.家世海東祖習綿逺,而神噐恢廓,愛染篇章校獵玄儒,討讎子史文華騰翥於韓服,愽贍猶愧扵中原.遂割略親朋發憤溟渤,年二十五乗舶造于金陵,有陳之世号稱文國,故得諮考先疑詢猷了義.初聽𤴶嚴旻公弟子講,素霑世典謂理窮神,及聞釋宗反同腐芥.虚尋名教實懼生涯,乃上啓陳主請歸道法,有勑許焉.既爰初落采即禀具戒,逰歴講肆具盡嘉謀領牒徵言.不謝光景故得成實·涅槃蕰括心府,三藏釋論徧所披尋.末又投吳之虎山,念定相㳂無忘覺觀.
원광이 서쪽에서 배우다.
당나라 『속고승전』 제13권에 실려 있다.
신라 황륭사의 승려 원광(圓光)은 세속의 성이 박씨이며 본디 삼한에 살았다. 삼한은 변한·진한·마한인데 원광은 곧 진한 사람이다.
집안이 대대로 해동에 살아 조상의 익힌 바가 멀리 이어졌다. 그릇이 넓고 커서 글을 좋아하여 노장과 유가를 두루 훑고 제자와 사서를 캐어 따졌다.
글재주가 한(韓) 땅에서 높이 날았으나, 널리 갖춤에서는 오히려 중원에 부끄러웠다.
마침내 친척과 벗을 끊고 바다로 뜻을 발하여, 스물다섯 살에 배를 타고 금릉(金陵)에 이르렀다.
진(陳)나라 때는 글의 나라라 일컬었으므로, 앞서 품었던 의심을 물어 밝히고 도를 물어 뜻을 마칠 수 있었다.
처음에 장엄사 민공(旻公)의 제자가 강하는 것을 들었다. 본디 세속의 전적에 젖어 이치를 다하고 신묘함을 얻었다 여겼는데, 불교의 종지를 듣고 나니 도리어 썩은 지푸라기 같았다.
헛되이 유가의 가르침만 좇았으니 한평생이 헛될까 두려웠다. 이에 진나라 임금께 글을 올려 도법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니 허락하는 명이 있었다.
처음 머리를 깎고 곧 구족계를 받았다. 강석을 두루 다니며 좋은 계책을 다 갖추고 말씀의 요지를 받아 적었다.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므로 『성실론』과 『열반경』을 마음속에 갈무리하고, 삼장과 석론을 두루 펴 보았다.
끝에 다시 오(吳) 땅의 호구산에 들어가 생각과 선정을 서로 이어 깨어 살핌을 잊지 않았다.
협주 1
吳之虎山
저본은 「虎山」이나 「虎丘山」의 잘못으로 보아 「호구산」으로 옮겼다.
2탑에 불이 났다는 착각이 목숨을 살리다
息心之衆雲結林泉.並以綜渉四含,㓛流八定明善易擬筒直難虧.深副夙心遂有終焉之慮.於即頓絶人事盤遊聖迹,攝想青霄緬謝終右.時有信士宅居山下,請光出講固辝不許.苦事邀延遂従其志.創通成論末講般若,皆思解佼徹嘉問飛移,兼䋴以絢采織綜詞義,聽者欣欣㑹其心府.従此因循舊章開化成任,每法輪一動輒傾注江湖.雖是異域通傳,而沐道頓除嫌郄,故名望横流播于嶺表,披榛負橐而至者相接如鱗.㑹隋后御字,威加南國.暦窮其數軍入揚都,遂被乱兵将加刑戮.有大主将望見寺塔火燒走赴救之,了無火狀但見光在塔前被縛將殺.旣恠其異即解而放之.斯臨危逹感如此也.光學通吳越便欲觀化周·秦,開皇九年来逰帝宇.值佛法初㑹攝論肇興,奉佩文言振績微緖,又馳慧解宣譽京臯.
마음을 쉬는 무리가 숲과 샘에 구름처럼 모였다.
아울러 네 아함을 두루 건너고 여덟 선정에 공이 흘러, 밝고 착함은 견주기 쉬우나 곧고 굳음은 헐기 어려웠다.
예전의 마음에 깊이 맞아 마침내 여기서 마치리라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세상일을 뚝 끊고 거룩한 자취를 두루 노닐며, 푸른 하늘에 생각을 거두고 세속과 아득히 작별하였다.
그때 믿는 이가 산 아래 살면서 원광에게 나와 강해 주기를 청하였다.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으나 애써 맞이하기를 거듭하므로 마침내 그 뜻을 따랐다.
처음에 『성실론』을 통하고 나중에 『반야경』을 강하니, 모두 생각과 풀이가 사무치고 아름다운 물음이 오갔다. 아울러 고운 문채로 말과 뜻을 짜 넣으니 듣는 이가 기뻐하며 그 마음에 들어맞았다.
이로부터 옛 법을 따라 교화를 열어 소임을 이루니, 법의 수레바퀴가 한 번 구를 때마다 곧 강호가 기울어 쏠렸다.
비록 다른 나라 사람의 전함이었으나 도에 젖어 꺼림을 단박에 없앴으므로, 명망이 널리 퍼져 영남 바깥까지 퍼졌다. 덤불을 헤치고 바랑을 지고 이르는 이가 비늘처럼 잇달았다.
마침 수나라 임금이 천하를 다스려 위엄이 남쪽 나라에 미쳤다. 운수가 다하여 군사가 양도(揚都)에 들어오니, 마침내 어지러운 군사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큰 주장(主將)이 절의 탑에 불이 붙은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 구하려 하였는데, 전혀 불난 자취는 없고 다만 원광이 탑 앞에 묶여 죽게 된 것만 보였다.
이미 그 기이함을 괴이히 여겨 곧 풀어 놓아 주었다. 위태로움에 임하여 감응이 이른 것이 이와 같았다.
원광은 배움이 오와 월에 통하자 곧 주(周)와 진(秦) 땅의 교화를 보고자 하여, 개황 구년에 서울에 와서 노닐었다.
마침 불법이 처음 모이고 『섭대승론』이 비로소 일어나는 때를 만나, 글월을 받들어 지니고 희미한 실마리를 떨쳐 일으켰다. 또 슬기로운 풀이를 달려 서울에 이름을 폈다.
3돌아온 뒤 나라의 글을 도맡다
勣業旣成道東湏継.夲國逺聞上啓頻請,有勑厚加勞問放歸桑梓.光徃還累紀,老幼相欣.新羅王金氏靣申䖍敬仰若聖人.光性在虚閑,情多汎愛,言常含笑愠結不形.而牋表啓書徃還國命並出自胷襟,一隅傾奉皆委以治方詢之道化.事異錦衣.請同觀國.乗機敷訓垂範于今.年齒旣高乗輿入内.衣服·藥·食並王手自營不許佐助用希專福,其感敬爲此類也.将終之前王親執慰,嘱累遺法兼濟民斯,爲說徴祥被于海曲.
공부가 이미 이루어졌으니 도가 동쪽으로 이어져야 했다.
본국에서 멀리 소문을 듣고 글을 올려 자주 청하니, 명을 내려 위로를 두터이 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원광이 오간 것이 여러 해였으므로 늙은이와 어린이가 서로 기뻐하였다. 신라 왕 김씨는 얼굴을 마주하여 삼가는 뜻을 펴고 성인처럼 우러렀다.
원광은 성품이 비고 한가로우며 정이 두루 사랑하는 데 있었고, 말에는 늘 웃음을 머금어 성난 빛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글과 표와 아뢰는 글, 나라의 명을 주고받는 일이 모두 그의 가슴에서 나왔다.
온 나라가 기울여 받들어 모두 다스리는 방도를 맡기고 교화의 길을 물었다.
비단옷을 입고 돌아오는 일과는 달라, 나라를 함께 보자고 청한 것이다. 기회를 타 가르침을 펴서 지금까지 본보기가 되었다.
나이가 이미 높아 수레를 타고 대궐 안에 들어갔다. 옷과 약과 음식을 모두 왕이 손수 마련하고 남이 돕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복을 오로지 하고자 함이었다. 그 감동하고 공경함이 이런 따위였다.
세상을 뜨기 전 왕이 몸소 손을 잡아 위로하며, 남길 법과 아울러 백성을 건질 일을 거듭 당부하였다. 이에 좋은 조짐을 말해 주니 바닷가 구석까지 미쳤다.
4복 있는 이의 무덤에 묻었다가
以彼建福五十八年少覺不悆.経于七日遺誡清切,端坐終于所住皇隆寺中.春秋九十有九,即唐貞觀四年也.〔冝云十四年.〕當終之時寺東北虚中音樂滿空異香充院,道俗悲慶知其霊感.遂葬于郊外,國給羽儀葬具同於王禮.後有俗人児胎死者,彼土諺云“當於有福人墓埋之種㣧不絶.”乃私瘞於墳側,當日震此胎屍擲于塋外.由此不懐敬者率崇仰焉.
저 건복 오십팔년에 조금 편치 않음을 느꼈다.
이레를 지나 남긴 훈계가 맑고 간절하였으며, 머물던 황륭사 안에서 단정히 앉아 세상을 떠났다. 나이 아흔아홉이니 곧 당나라 정관 사년이다.〔마땅히 십사년이라 해야 한다.〕
세상을 뜰 때 절 동북쪽 허공에 음악이 하늘에 가득하고 기이한 향내가 절에 찼다. 승려와 속인이 슬퍼하면서도 경사로 여겨 그 신령한 감응을 알았다.
마침내 성 밖에 장사 지냈는데, 나라에서 의장과 장구를 대어 왕의 예와 같이 하였다.
뒤에 어떤 속인이 아이를 배 속에서 잃었다. 그 땅의 말에 "복 있는 사람의 무덤에 묻으면 자손이 끊이지 않는다" 하므로, 이에 몰래 무덤 곁에 묻었다.
그날로 이 태아의 주검에 벼락이 쳐 무덤 밖으로 내던졌다.
이로 말미암아 공경하는 마음을 품지 않던 이들도 다 높이 우러렀다.
협주 1
冝云十四年.
마땅히 십사년이라 해야 한다.
5제자 원안이 전한 말
有弟子圎安,神忘機頴.性希歴覽慕仰幽求.遂北趣九都,東觀不耐,又西燕·魏後展帝亰.備通方俗,尋諸経論跨轢大綱,洞清纖旨.晚歸心學高䡄光塵初住亰寺,以道素有聞特進蕭瑀奏請住於藍田所造津梁寺,四事供給無替六時矣.安甞叙光云.“夲國王染患醫治不損,請光入宫别省安置,夜别二時爲說深法,受戒懴悔,王大信奉.一時初夜王見光首金色晃然,有象日輪隨身而至.王后宫女同共觀之.由是重發勝心克留疾所,不久遂差.光於辰韓·馬韓之間盛通正法,每歳再講匠成後學.之資並充營寺,餘惟衣盋而已.〔載逹凾.〕
제자 원안(圓安)이 있었다. 정신이 맑고 재주가 빼어났다.
성품이 두루 살피기를 좋아하고 그윽한 것을 구하기를 사모하였다. 마침내 북으로 구도(九都)에 나아가고 동으로 불내(不耐)를 보았으며, 또 서쪽으로 연과 위를 거쳐 뒤에 서울에 이르렀다.
지방의 풍속에 두루 통하고 여러 경과 논을 찾아 큰 줄기를 넘나들며 가는 뜻까지 환히 밝혔다.
늦게 마음 닦는 배움으로 돌아와 원광의 자취를 높이 따랐다. 처음 서울 절에 머물렀는데, 도가 본디 알려져 특진 소우(蕭瑀)가 아뢰어 남전에 세운 진량사에 머물기를 청하였고, 네 가지 공양이 여섯 때에 걸러짐이 없었다.
원안이 일찍이 원광을 이렇게 말하였다.
"본국의 왕이 병들어 의원의 치료로 낫지 않으므로, 원광을 궁에 들여 따로 방을 마련해 머물게 하고 밤마다 두 차례 깊은 법을 설하게 하였다. 계를 받고 참회하니 왕이 크게 믿고 받들었다.
어느 날 초저녁에 왕이 원광의 머리가 금빛으로 환한 것을 보았는데, 해 바퀴 같은 모습이 몸을 따라 이르렀다. 왕후와 궁녀가 함께 이를 보았다.
이로 말미암아 거듭 뛰어난 마음을 내어 병실에 머물게 하니 오래지 않아 마침내 나았다.
원광은 진한과 마한 사이에 바른 법을 크게 통하게 하여, 해마다 두 번 강하여 뒷사람을 길러 이루었다. 시주한 재물은 아울러 절 짓는 데 채우고, 남은 것은 오직 옷과 바리뿐이었다."〔'달' 함에 실려 있다.〕
협주 1
載逹凾.
'달' 함에 실려 있다.
6삼기산의 신이 이웃 비구를 눌러 버리다
又東亰安逸戸長貞孝家在古夲殊異傳載圎光法師傳曰.“法師俗姓薛氏王亰人也.初爲僧學佛法,年三十歳思静居修道獨居三岐山.後四年有一比丘来所居不逺别作蘭若居二年,爲人強猛好修呪述.法師夜獨坐誦経,忽有神聲呼其名.“善㦲善㦲.汝之修行.凢修者雖衆如法者稀有.今見隣有比丘径修呪術而無所,得喧聲惱他静念,住䖏礙我行路每有去来㡬發惡心.法師爲我語告而使移遷.若久住者恐我忽作罪業.”明日法師徃而告曰,“吾於昨夜有聽神言,比丘可移别䖏.不然應有餘殃.”比丘對曰,“至行者爲魔所眩.法師何憂狐鬼之言乎.”其夜神又來曰,“向我告事比丘有何荅乎.”法師恐神瞋怒而對曰.“終未了說.若強語者何敢不聽.”神曰,“吾已具聞.法師何湏補說.但可黙然見我所爲.”遂辝而去.夜中有聲如雷震,明日視之山頹填比丘所在蘭若.神亦来曰“師見如何.”法師對曰“見甚驚懼.”
또 동경 안일호장 정효(貞孝)의 집에 있는 옛 책 『수이전』에 실린 「원광법사전」에 이렇게 이른다.
"법사는 세속의 성이 설씨(薛氏)이며 서울 사람이다.
처음 승려가 되어 불법을 배우다가, 나이 서른에 고요히 살며 도를 닦을 것을 생각하여 삼기산에 홀로 살았다.
네 해 뒤에 한 비구가 와서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데 따로 절을 짓고 두 해를 살았다. 사람됨이 사납고 굳세며 주술 닦기를 좋아하였다.
법사가 밤에 홀로 앉아 경을 외는데, 홀연 신의 목소리가 그 이름을 불렀다.
'좋구나, 좋구나. 그대의 수행이여. 무릇 닦는 이는 많으나 법대로 하는 이는 드물다.
이제 보니 이웃에 비구가 있어 곧장 주술만 닦아 얻는 바가 없고, 시끄러운 소리로 남의 고요한 생각을 어지럽힌다. 사는 곳이 내 다니는 길을 막아 오갈 때마다 자못 나쁜 마음이 일어난다.
법사는 나를 위하여 일러 옮겨 가게 하라. 오래 머무르면 내가 문득 죄업을 지을까 두렵다.'
이튿날 법사가 가서 일렀다. '내가 어젯밤 신의 말을 들었으니 비구는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소. 그러지 않으면 마땅히 남는 재앙이 있으리다.'
비구가 대답하였다. '지극히 수행하는 이가 마귀에게 홀렸구려. 법사는 어찌 여우 귀신의 말을 근심하시오.'
그날 밤 신이 또 와서 말하였다. '지난번 내가 이른 일에 비구가 무어라 대답하던가.'
법사가 신이 성낼까 두려워 대답하였다. '아직 다 말하지 못하였소. 굳이 말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소.'
신이 말하였다. '내가 이미 다 들었다. 법사는 어찌 덧붙여 말하려는가. 다만 잠자코 내가 하는 바를 보라.'
마침내 하직하고 갔다.
밤중에 우레 같은 소리가 나더니, 이튿날 보니 산이 무너져 비구가 있던 절을 메워 버렸다.
신이 또 와서 말하였다. '스님이 보기에 어떠한가.'
법사가 대답하였다. '보고서 몹시 놀라고 두려웠소.'"
7신의 정체는 늙은 여우였다
神曰,“我歳㡬於三千年神術最壮,此是小事何足爲驚.但復将来之事無所不知,天下之事無所不逹.今思法師唯居此䖏雖有自利之行而無利他之功.現在不掦高名未来不取勝果.盍採佛法於中國導群迷扵東海.”對曰“學道中國是夲所願,海陸逈阻不能自通而已.”神詳誘歸中國所行之計,法師依其言歸中國.留十一年,愽通三藏兼學儒術.真平王二十二年庚申〔三囯史云明年辛酉来.〕師将理䇿東還,乃隨中國朝聘使還國.法師欲謝神至前住三岐山寺,夜中神亦来呼其名曰,“海陸途間徃還如何.”對曰,“蒙神鴻恩平安到訖.”神曰“吾亦授戒於神仍結生生相濟之約.”又請曰,“神之真容可得見耶.”神曰“法師若欲見我形,平旦可望東天之際.”法師明日望之有大臂貫雲接扵天際.其夜神亦来曰,“法師見我臂耶.”對曰,“見已甚竒絶異.”因此俗号臂長山.神曰,“雖有此身不免無常之害.故吾無月日捨身其嶺.法師来送長逝之魂.”待約曰徃看,有一老狐黒如㭍.但吸吸無息俄然而死.法師始自中國來,本朝君臣敬重爲師.常講大乗経典.此時高䴡·百濟當侵邉鄙王甚患之,欲請兵於隋〔冝作唐〕請法師作乞兵表.皇帝見以三十萬兵親征高䴡.自此知法師旁通儒術也.享年八十四入寂葬明活城西.”
신이 말하였다.
"내 나이는 삼천 해에 가깝고 신통한 술법이 가장 굳세니, 이는 작은 일이라 놀랄 것이 못 된다. 다만 다시 앞으로 올 일을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천하의 일을 통하지 못하는 바가 없다.
이제 생각건대 법사가 오직 이곳에만 살면 비록 제 몸을 이롭게 하는 행은 있어도 남을 이롭게 하는 공이 없다. 지금은 높은 이름을 드날리지 못하고 뒷날에는 뛰어난 열매를 얻지 못하리라.
어찌 중국에서 불법을 캐어다 동해의 뭇 어리석은 이를 이끌지 않는가."
대답하였다. "중국에서 도를 배우는 것은 본디 바라던 바요. 다만 바다와 뭍이 아득히 막혀 스스로 통하지 못할 뿐이오."
신이 중국으로 갈 계책을 자세히 일러 주니, 법사가 그 말대로 중국에 갔다.
열한 해를 머물며 삼장에 널리 통하고 아울러 유가의 학술도 배웠다.
진평왕 22년 경신년에〔『삼국사』에는 이듬해 신유년에 왔다고 한다.〕 법사가 채비를 갖추어 동쪽으로 돌아오려 하여, 중국에 조회하러 온 사신을 따라 나라로 돌아왔다.
법사가 신에게 사례하려고 전에 머물던 삼기산의 절에 이르렀다. 밤중에 신이 또 와서 이름을 부르며 말하였다. "바다와 뭍 길을 오간 것이 어떠하였는가."
대답하였다. "신의 큰 은혜를 입어 평안히 다녀왔소."
신이 말하였다. "나 또한 그대에게 계를 받고 이내 태어날 때마다 서로 건지자는 약속을 맺는다."
또 청하였다. "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겠소."
신이 말하였다. "법사가 내 모습을 보고자 하거든 새벽에 동쪽 하늘 끝을 바라보라."
법사가 이튿날 바라보니 큰 팔뚝이 구름을 꿰어 하늘 끝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 신이 또 와서 말하였다. "법사는 내 팔을 보았는가."
대답하였다. "보고서 몹시 기이하고 뛰어났소."
이로 말미암아 세속에서 비장산(臂長山)이라 부른다.
신이 말하였다. "비록 이 몸이 있으나 덧없음의 해를 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 달 아무 날에 저 고개에 몸을 버리리니, 법사는 와서 길이 떠나는 넋을 보내 달라."
약속한 날을 기다려 가서 보니, 늙은 여우 한 마리가 옻처럼 검은데, 다만 헐떡일 뿐 숨이 없다가 이내 죽었다.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돌아오자 본조의 임금과 신하가 공경하고 중히 여겨 스승으로 삼았다. 늘 대승 경전을 강하였다.
이때 고구려와 백제가 늘 변방을 침범하므로 왕이 몹시 근심하여 수나라에〔마땅히 '당'으로 적어야 한다.〕 군사를 청하고자 하여, 법사에게 군사를 비는 표를 짓게 하였다.
황제가 보고 삼십만 군사로 몸소 고구려를 쳤다. 이로부터 법사가 유가의 학술에도 두루 통한 줄을 알았다.
나이 여든넷에 입적하여 명활성 서쪽에 장사 지냈다.
협주 2
三囯史云明年辛酉来.
『삼국사』에는 이듬해 신유년에 왔다고 한다.
冝作唐
마땅히 '당'으로 적어야 한다.
8세속오계 — 살생에도 가림이 있다
又三國史列傳云.“賢士貴山者沙梁部人也.與同里箒項爲友,二人相謂曰,“我等期與士君子逰,而不先正心持身則恐不免於招辱.盍問道於賢者之側乎.”時聞圎光法師入隋回寓止嘉瑟岬.〔或作加西又嘉拪,皆方言也.岬俗云古尸,故或云古尸寺,猶言岬寺也.今雲門寺東九千歩許有加西峴,或云嘉瑟峴.峴之北洞有寺基是也.〕二人詣門進告昌.“俗士顓蒙無所知識.願賜一言以爲終身之誡.”光曰,“佛敎有菩薩戒其别有十.若䓁爲人臣子恐不能堪.今有世俗五戒,一曰事君以忠,二曰事親以孝,三曰交友有信,四曰臨戰無退,五曰殺生有擇.若行之無忽.”貴山䓁曰,“他則旣受命矣.所謂殺生有擇特未曉也.”光曰,“六齋曰春夏月不殺,是擇時也.不殺使畜謂馬·牛·雞·犬.不殺細物謂肉不足一臠,是擇物也.此亦唯其所用不求多殺.此是世俗之善戒也.”貴山荨曰,“自今以後奉以周旋不敢失墜.”後二人従軍事皆有竒㓛於國家.又䢖福三十年癸酉〔即真平王即位三十五年也.〕秋隋使王世儀至,於皇龍寺設百座道塲請諸高徳說経,光最居上首.”
또 『삼국사』 열전에 이렇게 이른다.
"어진 선비 귀산(貴山)은 사량부 사람이다. 같은 마을 추항(箒項)과 벗이 되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일렀다.
'우리가 선비 군자와 사귀기를 기약하면서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지니지 않으면 욕됨을 부르기를 면하지 못할까 두렵다. 어찌 어진 이의 곁에서 도를 묻지 않겠는가.'
그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갔다 돌아와 가슬갑에 머문다는 말을 들었다.〔가서(加西) 또는 가서(嘉栖)라고도 하니 모두 우리말이다. 갑을 세속에서 '고시'라 하므로 고시사라고도 하니 곧 갑사라는 말과 같다. 지금 운문사 동쪽 구천 걸음쯤에 가서현이 있는데 가슬현이라고도 한다.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는 것이 이것이다.〕
두 사람이 문에 나아가 아뢰었다. '세속의 선비가 어리석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한 말씀을 내리시어 한평생의 훈계로 삼게 해 주소서.'
원광이 말하였다. '불교에 보살계가 있어 그 갈래가 열이나, 그대들처럼 남의 신하 되고 자식 된 이는 아마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세속의 다섯 가지 계가 있다.
하나는 임금을 섬기되 충으로써 하는 것이요, 둘은 어버이를 섬기되 효로써 하는 것이요, 셋은 벗을 사귀되 믿음으로써 하는 것이요, 넷은 싸움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이요, 다섯은 산 것을 죽이되 가림이 있는 것이다.
그대들은 이를 행하되 소홀히 하지 말라.'
귀산 등이 말하였다. '다른 것은 이미 명을 받들겠으나, 이른바 산 것을 죽이되 가림이 있다는 것은 특히 밝지 못합니다.'
원광이 말하였다. '육재일과 봄여름 달에 죽이지 않으니 이는 때를 가리는 것이다.
부리는 가축을 죽이지 않으니 말·소·닭·개를 이르고, 작은 것을 죽이지 않으니 고기가 한 점도 못 되는 것을 이른다. 이는 죽일 것을 가리는 것이다.
이 또한 오직 쓸 만큼만 하고 많이 죽이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세속의 좋은 계다.'
귀산 등이 말하였다. '이제부터 받들어 지켜 감히 잃어버리지 않겠습니다.'
뒤에 두 사람이 군사를 따라 나가 모두 나라에 기이한 공을 세웠다.
또 건복 삼십년 계유년〔곧 진평왕 즉위 35년이다.〕 가을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이르렀다. 황룡사에 백고좌 도량을 베풀고 여러 높은 승려를 청하여 경을 설하게 하니, 원광이 가장 윗자리에 앉았다."
협주 2
或作加西又嘉拪, 皆方言也. 岬俗云古尸, 故或云古尸寺, 猶言岬寺也. 今雲門寺東九千歩許有加西峴, 或云嘉瑟峴. 峴之北洞有寺基是也.
가서(加西) 또는 가서(嘉栖)라고도 하니 모두 우리말이다. 갑(岬)을 세속에서 '고시'라 하므로 고시사(古尸寺)라고도 하니 곧 갑사(岬寺)라는 말과 같다. 지금 운문사 동쪽 구천 걸음쯤에 가서현이 있는데 가슬현이라고도 한다. 고개의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는 것이 이것이다.
即真平王即位三十五年也.
곧 진평왕 즉위 35년이다.
9일연이 따지다 — 한 글자도 더하고 빼지 않았다
議曰.原宗興法已来津梁始置而未遑堂粤.故冝以歸戒滅懴之法開曉愚迷.故光於所住嘉拪岬置占察寳以爲恒規.時有檀越尼納田於占察寳,今東平郡之田一百結是也,古籍猶存.光性好虚静言常含笑形無愠色.年臘旣邁乗輿入內,當時群彦徳義攸屬無敢出其右者.文藻之贍一隅所傾.年八十餘卒於貞觀間.浮啚在三岐山金谷寺.〔今安康之西南洞也.亦明活之西也.〕唐傳云告寂皇隆寺,未詳其地疑皇龍之訛也.如芬皇作王芬寺之例也.據如上唐·郷二傳之文,伹姓氏之朴·薛,出家之東·西如二人焉不敢詳定.故两存之.然彼諸傳記皆無鵲岬·璃目與雲門之事.而郷人金陟明謬以街巷之說潤文作光師傳,濫記雲門開山祖寳壌師之事迹合爲一傳.後撰海東僧傳者承誤而録之.故時人多惑之.因辨於此不加减一字,載二傳之文詳矣.陳·隋之世海東人鮮有航海問道者,設有猶未大振,及光之後継踵西學者憧憧焉,光乃啓途矣.讃曰.航海初穿漢地雲.㡬人来徃挹清芬.昔年蹤迹青山在.金谷·嘉西事可聞.
논하여 이른다.
원종이 법을 일으킨 뒤로 나루와 다리가 비로소 놓였으나 집과 뜰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마땅히 계로 돌아가고 참회로 죄를 없애는 법으로 어리석음을 깨우쳐야 하였다.
그러므로 원광이 머물던 가서갑에 점찰보(占察寶)를 두어 떳떳한 규례로 삼았다. 그때 시주하는 여승이 점찰보에 밭을 바쳤으니, 지금 동평군의 밭 백 결이 그것이며 옛 문서가 아직 남아 있다.
원광은 성품이 비고 고요함을 좋아하며 말에 늘 웃음을 머금어 성난 빛이 드러나지 않았다. 나이와 법랍이 이미 높아 수레를 타고 대궐에 들어갔는데, 그때 여러 어진 이 가운데 덕과 의로 감히 그 위에 나설 이가 없었다. 온 나라가 그 넉넉한 글재주에 기울어 받들었다.
나이 여든 남짓에 정관 연간에 죽었다. 부도가 삼기산 금곡사에 있다.〔지금 안강의 서남쪽 골짜기다. 또한 명활성의 서쪽이다.〕
당나라 전에는 황륭사에서 입적하였다 하는데 그 땅이 자세하지 않으니, 아마도 황룡(皇龍)의 잘못인 듯하다. 분황(芬皇)을 왕분사(王芬寺)라 적은 예와 같다.
위와 같은 당나라 전과 우리 전 두 글에 따르면, 다만 성씨가 박씨와 설씨로, 출가한 곳이 동쪽과 서쪽으로 갈려 마치 두 사람 같으므로 감히 자세히 정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를 다 남겨 둔다.
그러나 저 여러 전기에는 모두 작갑·이목과 운문사의 일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 김척명(金陟明)이 거리의 말로 잘못 글을 다듬어 「원광법사전」을 지으면서, 운문사를 처음 연 조사 보양사(寶壤師)의 사적을 함부로 적어 한 전으로 합쳐 버렸다.
뒤에 『해동승전』을 지은 이가 그 잘못을 이어받아 적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많이 헷갈렸다.
이에 여기서 가려 밝히되 한 글자도 더하거나 빼지 않고 두 전의 글을 실었으니 자세하다.
진나라와 수나라 때 해동 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도를 물은 이가 드물었고, 있더라도 오히려 크게 떨치지 못하였다. 원광 뒤에 이르러 서쪽으로 배우러 가는 이가 잇달아 오갔으니, 원광이 곧 길을 연 것이다.
기려서 이른다.
바다를 건너 처음으로 한나라 땅 구름을 꿰뚫으니 몇 사람이나 오가며 맑은 향내를 떴던가. 옛날의 자취는 푸른 산에 남아 있으니 금곡과 가서의 일을 들을 만하구나.
협주 1
今安康之西南洞也. 亦明活之西也.
지금 안강의 서남쪽 골짜기다. 또한 명활성의 서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