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얽매이지 않다元曉不羈
1밤나무 아래에서 태어나다
元曉不覊聖師元曉俗姓薛氏.祖仍皮公亦云赤大公.今赤大淵側有仍皮公廟.父談㮈乃末.初示生于押梁郡南〔今章山郡.〕佛地村北栗谷裟羅樹下.村名佛地或作發智村.〔俚云弗䓁乙村.〕裟羅樹者諺云.師之家夲住此谷西南,母既娠而月滿適過此谷栗樹下,忽分産而倉皇不能歸家,且以夫衣掛樹而寢䖏其中,因号樹曰裟羅樹.其樹之實亦異於常至今稱裟羅栗.古傳,昔有主寺者給寺奴一人一夕饌栗二枚.奴訟于官.官吏怪之取栗撿之一枚盈一鉢.乃皈判給一枚.故因名栗谷.師旣出家捨其宅爲寺名初開,樹之旁置寺曰裟羅.
원효, 얽매이지 않다.
성사 원효(元曉)는 세속의 성이 설씨다. 할아버지는 잉피공이며 적대공이라고도 한다. 지금 적대연 곁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내(談㮈) 내말이다.
처음에 압량군 남쪽〔지금의 장산군이다.〕 불지촌 북쪽 밤골의 사라수 아래에서 태어났다. 마을 이름은 불지(佛地)이며 발지촌이라고도 한다.〔마을에서는 '불등을촌'이라 한다.〕
사라수에 대해 세속에서 이렇게 전한다.
법사의 집이 본디 이 골짜기 서남쪽에 있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배어 달이 찼는데 마침 이 골짜기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홀연 아이를 낳게 되어 다급하여 집에 돌아가지 못하였다.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안에 누웠으므로, 이로 인해 그 나무를 사라수(裟羅樹)라 불렀다.
그 나무의 열매 또한 여느 것과 달라 지금도 사라밤이라 일컫는다.
옛 기록에 이러하다. 옛날 절을 맡은 이가 절의 종에게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을 주었다. 종이 관에 하소연하니 관리가 괴이히 여겨 밤을 가져다 살펴보았다.
한 알이 바리 하나에 가득하였다. 이에 도리어 한 알만 주라고 판결하였다.
그러므로 이로 인해 밤골이라 이름하였다.
법사가 출가한 뒤 그 집을 내놓아 절로 삼고 초개사(初開寺)라 이름하였으며, 나무 곁에 절을 두어 사라사(裟羅寺)라 하였다.
협주 2
今章山郡.
지금의 장산군이다.
俚云弗䓁乙村.
마을에서는 '불등을촌'이라 한다.
2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려는가
師之行状云是亰師人従祖考也,唐僧傳云夲下湘州之人.按麟徳二年間文武王割上州·下州之地置歃良州,則下州乃今之昌寕郡也,押梁郡夲下州之屬縣.上州則今尚州亦作湘州也.佛地村今屬慈仁縣,則乃押梁之所分開也.師生小名誓幢,第名新幢.〔幢者俗云毛也.〕初母夢流星入懐因而有娠,及将産有五色雲覆地.真平王三十九年大業十三年丁丑歳也.生而頴異學不従師.其逰方始末弘通茂跡具載唐傳與行狀.不可具載,唯郷傳所記有一二叚異事.師嘗一日風顛唱街云,“誰許没柯斧.我斫支天柱.”人皆未喻,時太宗聞之曰,“此師殆欲得貴婦産賢子之謂爾.國有大賢利莫大焉.”時瑶石宫〔今學院是也.〕有寡公主.勑宫吏覔曉引入.宫吏奉勑将求之,已自南山来過蚊川橋〔沙川,俗云年川又蚊川,又橋名榆橋也.〕遇之.佯墮水中濕衣袴,吏引師於宫裭衣曬㫰,因留宿焉.公主果有娠生薛聦.
법사의 행장에는 서울 사람이며 할아버지를 따랐다 하고, 당나라 『승전』에는 본디 하상주(下湘州) 사람이라 한다.
살피건대 인덕 이년 무렵 문무왕이 상주와 하주의 땅을 갈라 삽량주를 두었으니, 하주는 곧 지금의 창녕군이며 압량군은 본디 하주에 딸린 현이다. 상주는 곧 지금의 상주이며 상주(湘州)로도 적는다.
불지촌은 지금 자인현에 속하니 곧 압량에서 갈라 나온 곳이다.
법사가 태어났을 때 어릴 적 이름은 서당(誓幢)이며 다음 이름은 신당(新幢)이다.〔'당'은 세속에서 '털'이라 한다.〕
처음에 어머니가 별똥별이 품에 드는 꿈을 꾸고 이내 아이를 배었다. 낳으려 할 때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 진평왕 39년이니 대업 십삼년 정축년이다.
나면서부터 빼어나 배우는 데 스승을 따르지 않았다.
그가 두루 다닌 처음과 끝, 널리 편 큰 자취는 당나라 전과 행장에 갖추어 실려 있으므로 다 적을 수 없다. 오직 우리 전에 적힌 한두 가지 다른 일만 든다.
법사가 일찍이 어느 날 미친 듯이 거리에서 노래하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려는가. 내가 하늘 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사람들이 모두 알아듣지 못하였는데, 그때 태종이 듣고 말하였다.
"이 법사가 아마도 귀한 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자 한다는 말이로다. 나라에 큰 어진 이가 있으면 이보다 큰 이로움이 없다."
그때 요석궁에〔지금의 학원이 그것이다.〕 홀로 된 공주가 있었다.
궁의 관리에게 명하여 원효를 찾아 데려오게 하였다. 관리가 명을 받들어 찾으려 하는데, 이미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사천이니 세속에서 연천 또는 문천이라 하며, 다리 이름은 유교다.〕 지나다가 마주쳤다.
짐짓 물에 떨어져 옷과 바지를 적셨다.
관리가 법사를 궁으로 데려가 옷을 벗겨 말리게 하니, 이로 인해 묵게 되었다.
공주가 과연 아이를 배어 설총(薛聰)을 낳았다.
협주 3
幢者俗云毛也.
'당(幢)'은 세속에서 '털'이라 한다.
今學院是也.
지금의 학원이 그것이다.
沙川, 俗云年川又蚊川, 又橋名榆橋也.
사천이니 세속에서 연천 또는 문천이라 하며, 다리 이름은 유교다.
3무애 — 걸림 없는 이는 한 길로 나고 죽음을 벗는다
聦生而睿敏愽通経史新羅十賢中一也.以方音通㑹華夷方俗物名訓解六経文學,至今海東業明絰者傳受不絶.曉旣失戒生聦已後易俗服自号小姓居士.偶得優人舞弄大瓠其状瑰竒.因其形製爲道具,以華嚴経‘一切無㝵人一道出生死’,命名曰無㝵仍作歌流于世.嘗持此千村萬落且歌且舞化詠而歸,使桑樞瓮牖玃猴之軰皆識佛陁之号,咸作南無之稱曉之化大矣㦲.其生縁之村名佛地,寺名初開,自稱元曉者蓋初輝佛日之意爾.元曉亦是方言也,當時人皆以郷言稱之始且也.
설총은 나면서부터 슬기롭고 민첩하여 경과 사에 널리 통하였으니, 신라 열 어진 이 가운데 하나다.
우리말로 중국과 우리의 풍속과 사물 이름을 두루 알게 하고 육경과 문학을 풀이하였으므로, 지금까지 해동에서 경을 공부하는 이들이 전해 받기를 끊이지 않는다.
원효는 이미 계를 잃고 설총을 낳은 뒤로 세속의 옷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일컬었다.
우연히 광대가 춤추며 놀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이하였다. 그 모양을 따라 도구를 만들고, 『화엄경』의 '모든 걸림 없는 사람은 한 길로 나고 죽음을 벗어난다'는 구절을 따서 무애(無㝵)라 이름하고, 이내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것을 지니고 천 마을 만 고을을 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읊다가 돌아왔다.
그리하여 뽕나무 지도리와 깨진 항아리 창을 쓰는 집, 원숭이처럼 사는 무리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다 같이 '나무(南無)'를 일컫게 하였으니, 원효의 교화가 크도다.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이 불지(佛地)요 절 이름이 초개(初開)이며, 스스로 원효라 일컬은 것은 대개 처음으로 부처의 해를 빛낸다는 뜻일 뿐이다.
원효 또한 우리말이니, 그때 사람들이 모두 우리말로 '첫새벽'이라 불렀다.
4소의 두 뿔 위에 붓과 벼루를 놓고
曾住芬皇寺纂華嚴䟽,至第四十迴向品終乃絶筆.又嘗因訟分軀於百松,故皆謂位階初地矣.亦因海龍之誘承詔於路上撰三昧経䟽,置筆硯於牛之两角工因謂之角乗,亦表夲始二覺之微旨也.大安法師排来而粘紙亦知音唱和也.旣入寂,聦碎遺骸塑真容安芬皇寺,以表敬慕終天之志.聦時旁禮像忽廻顧,至今猶顧矣.曉甞所居穴寺旁有聦家之墟云.讃曰.角乗初開三昧軸,舞壷終掛萬街風.月明瑶石春眠去,門掩芬皇顧影空廻顧至.
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며 『화엄경』의 소(疏)를 엮다가, 제40 회향품에 이르러 마침내 붓을 놓았다.
또 일찍이 송사로 인해 몸을 백 그루 소나무에 나누었으므로, 모두 지위가 초지(初地)에 올랐다고 한다.
또한 바다 용의 이끎으로 길 위에서 조서를 받아 『금강삼매경』의 소를 지었는데,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았으므로 이로 인해 각승(角乘)이라 하였으니, 또한 본각과 시각 두 깨달음의 그윽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가 늘어놓아 종이를 붙였으니 또한 소리를 알아 화답한 것이다.
세상을 뜬 뒤 설총이 남은 뼈를 부수어 참모습을 빚어 분황사에 모시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하늘이 다하도록 이어 갈 뜻을 나타내었다.
설총이 그때 곁에서 절하니 상이 홀연 돌아보았고, 지금도 여전히 돌아본 채로 있다.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 곁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기려서 이른다.
각승은 처음으로 삼매의 두루마리를 열었고 춤추던 박은 끝내 온 거리의 바람에 걸렸네. 달 밝은 요석궁에 봄잠이 지나가고 문 닫힌 분황사에 돌아보는 그림자만 헛되이 남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