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1 — 강동성에서 개경 환도까지高麗 一
1왕씨 사백 년
高麗本箕子所封之地,又扶餘別種嘗居之。其地東至新羅,南至百濟,皆跨大海,西北度遼水接營州,而靺鞨在其北。其國都曰平壤城,即漢樂浪郡。水有出靺鞨之白山者,號鴨淥江,而平壤在其東南,因恃以為險。後闢地益廣,并古新羅、百濟、高句麗三國而為一。其主姓高氏,自初立國至唐乾封初而國亡。垂拱以來,子孫復封其地,後稍能自立。至五代時,代主其國遷都松岳者,姓王氏,名建。自建至燾凡二十七王,歷四百餘年未始易姓。
고려는 본디 기자가 봉해진 땅이요, 또 부여의 별종이 일찍이 살던 곳이다. 그 땅은 동으로 신라에 이르고 남으로 백제에 이르니 다 큰 바다에 걸치고, 서북으로 요수를 건너 영주에 접하며 말갈이 그 북쪽에 있다. 나라 도읍은 평양성이라 하니 곧 한나라 낙랑군이다. 말갈의 백산에서 나오는 물이 있어 압록강이라 부르는데, 평양이 그 동남에 있어 이를 믿고 험함으로 삼는다. 뒤에 땅을 더욱 넓혀 옛 신라·백제·고구려 세 나라를 아울러 하나로 만들었다. 그 임금은 성이 고씨니, 처음 나라를 세운 때부터 당나라 건봉 초에 나라가 망했다. 수공 이래 자손이 다시 그 땅에 봉해져 뒤에 차츰 자립할 수 있었다. 오대 때에 이르러 대신 그 나라의 주인이 되어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이는 성이 왕씨요 이름이 건이다. 건부터 도(충숙왕)까지 무릇 스물일곱 왕에 사백여 년을 지나도록 성이 바뀐 적이 없다.
2강동성의 거란
入元,太祖十一年,契丹人金山、元帥六哥等領眾九萬餘竄入其國。十二年九月,攻拔江東城據之。十三年,帝遣哈只吉、劄剌等領兵征之。國人洪大宣詣軍中降,與哈只吉等同攻圍之。高麗王奉牛酒出迎王師,且遣其樞密院使、吏部尚書、上將軍、翰林學士承旨趙冲共討滅六哥。劄剌與冲約為兄弟。冲請歲輸貢賦。劄剌曰:「爾國道遠,難於往來,每歲可遣使十人入貢。」十二月,劄剌移文取兵糧,送米一千斛。十四年正月,遣其權知閤門祗候尹公就、中書注書崔逸以結和牒文送劄剌行營,劄剌遣使報之。高麗王以其侍御史朴時允為接伴使迎之。帝又遣蒲里帒也持詔往諭之,高麗王迎拜設宴。
원나라와 얽힌 것은, 태조(칭기스칸) 11년에 거란 사람 금산과 원수 육가 등이 무리 구만여를 거느리고 그 나라로 도망쳐 들어가면서다. 12년 9월에 강동성을 쳐서 빼앗아 웅거하였다. 13년에 황제가 합지길(카치운)·찰랄(자라)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치게 하였다. 나라 사람 홍대선이 군중에 나아가 항복하고 합지길 등과 함께 에워싸 쳤다. 고려왕이 소와 술을 받들고 나와 왕사(王師)를 맞고, 아울러 추밀원사·이부상서·상장군·한림학사승지 조충을 보내 함께 육가를 쳐서 멸하였다. 찰랄이 충과 형제를 맺었다. 충이 해마다 공부(貢賦)를 바치기를 청하니, 찰랄이 「너희 나라는 길이 멀어 오가기 어려우니 해마다 사신 열 사람을 보내 조공하면 된다」 하였다. 12월에 찰랄이 공문을 보내 군량을 요구하니 쌀 일천 곡을 보냈다. 14년 정월에 권지합문지후 윤공취와 중서주서 최일을 시켜 화친 맺는 첩문을 찰랄의 행영에 보내니 찰랄이 사신을 보내 답하였다. 고려왕이 시어사 박시윤을 접반사로 삼아 맞았다. 황제가 또 포리대완을 보내 조서를 지니고 가서 타이르니, 고려왕이 맞아 절하고 잔치를 베풀었다.
협주 3
名缺
이름이 빠져 있다.
高麗王名缺考異云:「案太祖紀稱高麗王㬚降,請歲貢方物。考朝鮮史,太祖十三年為王㬚即位之五年。」闕文當作「王㬚」。
고려왕의 빠진 이름 — 고이에 이르기를 「태조기에 고려왕 철(㬚)이 항복하여 해마다 방물을 바치기를 청했다 하고, 조선 역사를 상고하면 태조 13년은 왕철(고종) 즉위 5년이다」 하였다. 빠진 글자는 「왕철」이라야 한다.
蒲里帒也高麗史卷二二高宗世家高宗六年正月庚寅條及東國通鑑均作「蒲里帒完」。新元史改「也」作「完」,疑是。
「포리대야(蒲里帒也)」는 고려사 고종세가 6년 정월 경인조와 동국통감에 다 「포리대완(蒲里帒完)」으로 되어 있다. 신원사가 「야」를 「완」으로 고쳤으니 그것이 옳은 듯하다.
3일곱 해 끊긴 사신
九月,皇太弟、國王及元帥合臣、副元帥劄剌等各以書遣宣差大使慶都忽思等十人趣其入貢,尋以方物進。十五年九月,大頭領官堪古苦、着古歟等復以皇太弟、國王書趣之,仍進方物。十六年七月,有旨,諭以伐女直事,始奉表陳賀。八月,着古歟使其國。十月,喜速不(爪)〔瓜〕等繼使焉。十七年十月,詔遣着古歟等十二人至其國,察其納款之實。十八年八月,宣差山朮䚟等十二人復以皇太弟、國王書趣其貢獻。十九年二月,着(右)〔古〕歟等復使其國;十二月,又使焉,盜殺之于途,自是連七歲絕信使矣。
9월에 황태제(옷치긴)와 국왕과 원수 합신, 부원수 찰랄 등이 저마다 글을 주어 선차대사 경도홀사 등 열 사람을 보내 조공을 재촉하니, 이윽고 방물을 바쳤다. 15년 9월에 대두령관 감고고·착고여 등이 다시 황태제와 국왕의 글로 재촉하니 그대로 방물을 바쳤다. 16년 7월에 여진(女直)을 친다는 뜻을 알리는 지시가 있자 비로소 표를 받들어 하례를 아뢰었다. 8월에 착고여가 그 나라에 사신 갔다. 10월에 희속불과 등이 잇달아 사신 갔다. 17년 10월에 조서로 착고여 등 열두 사람을 그 나라에 보내 귀부의 실상을 살피게 하였다. 18년 8월에 선차 산출대 등 열두 사람이 다시 황태제와 국왕의 글로 공물을 재촉하였다. 19년 2월에 착고여 등이 다시 그 나라에 사신 가고 12월에 또 갔는데, 도적이 길에서 죽이니 이로부터 일곱 해를 잇달아 신사(信使)가 끊겼다.
협주 2
喜速不(爪)〔瓜〕從北監本改。高麗史卷二二高宗世家高宗八年十月乙卯條「瓜」作「花」。「不瓜」、「不花」蒙語,義為「牡牛」。
「희속불(爪)〔과(瓜)〕」는 북감본을 따라 고쳤다. 고려사 고종세가 8년 10월 을묘조에는 「과(瓜)」가 「화(花)」로 되어 있다. 「불과」·「불화」는 몽골말로 뜻이 「수소」다.
着(右)〔古〕歟從北監本改。按前後文皆作「着古歟」。
「착(右)〔고(古)〕여」는 북감본을 따라 고쳤다. 앞뒤 글이 다 「착고여」로 되어 있다.
4살리타의 침입
太宗三年八月,命撒禮塔征其國,國人洪福源迎降于軍,得福源所率編民千五百戶,旁近州郡亦有來師者。撒禮塔即與福源攻未附州郡,又使阿兒禿與福源抵王京,招其主王㬚,㬚遣其弟懷安公王侹請和,許之。置京、府、縣達魯花赤七十二人監之,遂班師。十一月,元帥蒲桃、迪巨、唐古等領兵至其王京,㬚遣使奉牛酒迎之。十二月一日,復遣使勞元帥于行營。明日,其使人與元帥所遣人四十餘輩入王城,付文牒。又明日,㬚遣王侹等詣撒禮塔屯所犒師。
태종 3년 8월에 살례탑(살리타)에게 명해 그 나라를 치게 하니, 나라 사람 홍복원이 군에 나와 항복하매 복원이 거느린 편민 천오백 호를 얻었고, 곁의 주군에서도 와서 항복하는 자가 있었다. 살례탑이 곧 복원과 함께 아직 붙지 않은 주군을 치고, 또 아아독과 복원을 시켜 왕경에 다다라 그 임금 왕철을 부르니, 철이 아우 회안공 왕정을 보내 화친을 청하므로 허락하였다. 서울과 부·현에 다루가치 일흔두 사람을 두어 감독하게 하고 드디어 군사를 돌렸다. 11월에 원수 포도·적거·당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왕경에 이르니, 철이 사신을 보내 소와 술을 받들고 맞았다. 12월 초하루에 다시 사신을 보내 행영에서 원수를 위로하고, 이튿날 그 사인이 원수가 보낸 사람 사십여 명과 왕성에 들어가 문첩을 전했으며, 또 이튿날 철이 왕정 등을 살례탑의 진소에 보내 군사를 호궤하였다.
협주 1
懷安公「懷」當作「淮」。見卷二校勘記[一]。
「회안공(懷安公)」의 회(懷)는 마땅히 「회(淮)」라야 한다. 권2 교감기에 보인다.
5다루가치를 다 죽이다
四年正月,帝遣使以璽書諭㬚。三月,㬚遣中郎將池義源、錄事洪巨源、金謙等齎國贐牒文送撒禮塔屯所。四月,㬚遣其將軍趙叔(章)〔昌〕、御史薛慎等奉表入朝。五月,復下詔諭之。六月,㬚盡殺朝廷所置達魯花赤七十二人以叛,遂率王京及諸州縣民竄海島。洪福源集餘民保聚,以俟大兵。八月,復遣撒禮塔領兵討之,至王京南,攻其處仁城,中流矢卒。別將鐵哥以軍還。其已降之人令福源領之。十月,㬚遣其將軍金寶鼎、郎中趙瑞章上表陳情。
4년 정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 새서로 철을 타일렀다. 3월에 철이 중랑장 지의원, 녹사 홍거원·김겸 등을 시켜 나라의 예물과 첩문을 살례탑 진소에 보냈다. 4월에 철이 장군 조숙창과 어사 설신 등을 보내 표를 받들어 입조시켰다. 5월에 다시 조서를 내려 타일렀다. 6월에 철이 조정이 둔 다루가치 일흔두 사람을 다 죽이고 배반하여, 드디어 왕경과 여러 주현 백성을 거느리고 바다 섬(강화)으로 들어갔다. 홍복원이 남은 백성을 모아 지키며 대군을 기다렸다. 8월에 다시 살례탑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치게 하니, 왕경 남쪽에 이르러 처인성을 치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별장 철가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고, 이미 항복한 사람들은 복원이 거느리게 하였다. 10월에 철이 장군 김보정과 낭중 조서장을 보내 표를 올려 사정을 아뢰었다.
협주 2
池義源高麗史卷二三高宗世家高宗十九年三月甲午條及東國通鑑「源」作「深」。新元史從改,疑是。
「지의원(池義源)」은 고려사 고종세가 19년 3월 갑오조와 동국통감에 「원(源)」이 「심(深)」으로 되어 있다. 신원사가 따라 고쳤으니 그것이 옳은 듯하다.
將軍趙叔(章)〔昌〕御史薛慎據高麗史卷二三高宗世家高宗十九年四月壬戌條改。新元史已校。又高麗史「將軍」作「上將軍」,「御史」作「侍御史」,疑此處有脫文。
「장군 조숙(章)〔창(昌)〕과 어사 설신」은 고려사 고종세가 19년 4월 임술조에 따라 고쳤다. 신원사가 이미 교감했다. 또 고려사에는 「장군」이 「상장군」, 「어사」가 「시어사」로 되어 있으니 여기에 빠진 글자가 있는 듯하다.
6다섯 가지 죄
五年四月,詔諭㬚悔過來朝,且數其五罪:「自平契丹賊、殺劄剌之後,未嘗遣一介赴闕,罪一也。命使齎訓言省諭,輒敢射回,罪二也。爾等謀害着古歟,乃稱萬奴民戶殺之,罪三也。命汝進軍,仍令汝弼入朝,爾敢抗拒,竄諸海島,罪四也。汝等民戶不拘集見數,輒敢妄奏,罪五也。」十月,㬚復遣兵攻陷已附西京等處降民,劫洪福源家。
5년 4월에 조서로 철에게 허물을 뉘우치고 와서 조회하라 타이르며 그 다섯 가지 죄를 헤아렸다. 「거란 도적을 평정하고 찰랄이 죽은 뒤로 한 사람도 대궐에 보낸 적이 없으니 첫째 죄다. 사신이 훈계의 말을 지니고 가서 타이르는데 감히 쏘아 돌려보냈으니 둘째 죄다. 너희가 착고여를 모살하고서 만노(포선만노)의 민호가 죽였다 둘러댔으니 셋째 죄다. 너에게 진군을 명하고 아울러 너 필(弼)에게 입조를 명했는데 감히 항거하며 바다 섬으로 달아났으니 넷째 죄다. 너희 민호의 실제 수를 모아 올리지 않고 문득 감히 망령되이 아뢰니 다섯째 죄다.」 10월에 철이 다시 군사를 보내 이미 붙은 서경 등지의 항복한 백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홍복원의 집을 겁략하였다.
7홍복원의 동경 이주
六年,福源得請,領其降民遷居東京,賜佩金符。
6년에 복원이 청한 대로 그 항복한 백성을 거느리고 동경으로 옮겨 살게 하고 금부(金符)를 차게 하였다.
8탕구의 재정벌
七年,命唐古與洪福源領兵征之。
7년에 당고에게 명해 홍복원과 군사를 거느리고 치게 하였다.
9열 성을 빼앗다
九年,拔其龍岡、咸從等十餘城。
9년에 용강·함종 등 십여 성을 빼앗았다.
10조현습의 항복
十年五月,其國人趙玄習、李元祐等率二千人迎降,命居東京,受洪福源節制,且賜御前銀符,使玄習等佩之,以招未降民戶。又李君式等十二人來降,待之如玄習焉。十二月,㬚遣其將軍金寶鼎、御史宋彥琦等奉表入朝。
10년 5월에 나라 사람 조현습·이원우 등이 이천 명을 거느리고 나와 항복하니, 동경에 살며 홍복원의 지휘를 받게 하고, 아울러 어전 은부를 내려 현습 등에게 차게 하여 아직 항복하지 않은 민호를 부르게 하였다. 또 이군식 등 열두 사람이 와서 항복하니 현습같이 대접하였다. 12월에 철이 장군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 등을 보내 표를 받들어 입조시켰다.
11친조를 미루다
十一年五月,詔徵㬚入朝,㬚以母喪辭。六月,乃遣其禮賓卿盧演、禮賓少卿金謙充進奉使、副,奉表入朝。十月,有旨諭㬚,徵其親朝於明年。十二月,㬚遣其新安公王佺與寶鼎、彥琦等百四十八人奉表入貢。
11년 5월에 조서로 철의 입조를 부르니 철이 어머니 상으로 사양하였다. 6월에 예빈경 노연과 예빈소경 김겸을 진봉사·부사로 삼아 표를 받들어 입조시켰다. 10월에 철에게 명년에 친조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12월에 철이 신안공 왕전(佺)과 보정·언기 등 백사십팔 명을 보내 표를 받들고 조공하였다.
12창주·삭주 함락
十二年三月,又遣其右諫議大夫趙修、閤門祗候金成寶等奉表入貢。五月,復下詔諭之。十二月,㬚遣其禮賓少卿宋彥琦、侍御史權韙充行李使入貢。是歲,攻拔昌、朔等州。
12년 3월에 또 우간의대부 조수와 합문지후 김성보 등을 보내 표를 받들고 조공하였다. 5월에 다시 조서를 내려 타일렀다. 12월에 철이 예빈소경 송언기와 시어사 권위를 행리사(行李使)로 삼아 조공하였다. 이해에 창주·삭주 등을 쳐서 빼앗았다.
13왕준의 입질
十三年秋,㬚以族子綧為己子入質。
13년 가을에 철이 족자(族子) 준(綧)을 제 아들이라 하여 볼모로 들여보냈다.
14네 번의 정벌
當定宗、憲宗之世,歲貢不入,故自定宗二年至憲宗八年,凡四命將征之,凡拔其城十有四。憲宗末,㬚遣其世子倎入朝。
정종·헌종 시대에는 해마다 바치는 공물이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정종 2년부터 헌종 8년까지 무릇 네 번 장수에게 명해 치니, 빼앗은 성이 열넷이었다. 헌종 말에 철이 세자 전(倎)을 보내 입조시켰다.
15원종의 귀국
世祖中統元年三月,㬚卒,命倎歸國為高麗國王,以兵衞送之,仍赦其境內。制曰:
세조 중통 원년 3월에 철이 죽으니, 전에게 명해 귀국하여 고려국왕이 되게 하고 군사로 호위해 보내며 그대로 지경 안을 사면하였다. 제서에 일렀다.
16송과 너희뿐이다
:我太祖皇帝肇開大業,聖聖相承,代有鴻勳,芟夷羣雄,奄有四海,未嘗專嗜殺也。凡屬國列侯,分茅錫土,傳祚子孫者,不啻萬里,孰非向之勍敵哉!觀乎此,則祖宗之法不待言而章章矣。今也,普天之下未臣服者,惟爾國與宋耳。宋所恃者長江,而長江失險;所藉者川、廣,而川、廣不支。邊戍自徹其藩籬,大軍已駐乎心腹,鼎魚幕燕,亡在旦夕。
「우리 태조 황제께서 대업을 여신 뒤 성군이 서로 이어 대마다 큰 공훈이 있어, 뭇 영웅을 쳐 없애고 사해를 차지하셨으나 일찍이 죽이기만 일삼지는 않으셨다. 무릇 속국과 열후로 띠풀을 나누고 땅을 받아 자손에게 자리를 전한 것이 만 리에 그치지 않으니, 그 누가 지난날의 굳센 적이 아니었으랴! 이를 보면 조종(祖宗)의 법은 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뚜렷하다. 이제 온 하늘 아래 신하로 복종하지 않은 것은 오직 너희 나라와 송나라뿐이다. 송이 믿는 것은 장강인데 장강이 험함을 잃었고, 기대는 것은 사천·광남인데 사천·광남이 지탱하지 못한다. 변경 수자리는 스스로 그 울타리를 거두었고 대군은 이미 심복에 주둔했으니, 솥 안의 고기요 장막 위의 제비라 망함이 조석에 있다.
17모든 죄를 사면한다
:爾初〔以〕世子奉幣納款,束身歸朝,含哀請命,良可矜憫,故遣歸國,完復舊疆,安爾田疇,保爾室家,弘好生之大德,捐宿構之細故也。用是已嘗戒敕邊將,斂兵待命,東方既定,則將迴戈於錢塘。迨餘半載,乃知爾國內亂渝盟,邊將復請戒嚴,此何故也?以謂果內亂耶,權臣何不自立,而立世孫?以謂傳聞之誤耶,世子何不之國而盤桓於境上也?豈以世子之歸愆期,而左右自相猜疑,私憂過計而然耶?重念島嶼殘民,久罹塗炭,窮兵極討,殆非本心。且御失其道,則天下狙詐咸作敵;推赤心置人腹中,則反側之輩自安矣。悠悠之言,又何足校?申命邊閫,斷自予衷,無以逋逃間執政,無以飛語亂定盟。惟事推誠,一切勿問。宜施曠蕩之恩,一新遐邇之化。自尚書金仁雋以次,中外枝黨、官吏、軍民,聖旨到日已前,或有首謀內亂,旅拒王師,已降附而還叛,因仇讎而擅殺,無所歸而背主亡命,不得已而隨眾脅從,應據國人但曾犯法,罪無輕重咸赦除之。
네가 처음 세자로서 폐백을 받들고 정성을 바쳐, 몸을 묶어 조정에 돌아와 슬픔을 머금고 명을 청하니 참으로 가엾다. 그러므로 귀국시켜 옛 강토를 온전히 회복하고 네 밭이랑을 편안케 하며 네 집안을 보전하게 하니, 살리기 좋아하는 큰 덕을 넓히고 오래 쌓인 자잘한 연고를 버리는 것이다. 이로써 이미 변장(邊將)들을 경계하여 군사를 거두고 명을 기다리게 하였으니, 동방이 안정되면 창끝을 전당(錢塘)으로 돌리리라. 반년쯤 지나 너희 나라가 안에서 어지러워 맹약을 저버렸다 하여 변장이 다시 계엄을 청하니 이 무슨 까닭인가. 과연 내란이라면 권신이 어찌 스스로 서지 않고 세손을 세웠으며, 전해 들은 잘못이라면 세자가 어찌 나라로 가지 않고 지경 위에서 서성이는가. 세자의 돌아감이 기약을 어겨 좌우가 서로 의심하며 지나치게 걱정한 탓인가. 거듭 생각건대 섬의 쇠잔한 백성이 오래 도탄에 빠졌으니, 군사를 끝까지 부려 치는 것은 본심이 아니다. 또 다스림이 그 도를 잃으면 천하의 교활한 무리가 다 적이 되지만, 붉은 마음을 남의 뱃속에 두면 불안해하던 무리도 절로 편안해진다. 떠도는 말을 어찌 따지랴. 변방 장수들에게 거듭 명하니, 짐의 마음으로 결단하여 도망자로 집정을 이간하지 말고 뜬말로 정한 맹약을 어지럽히지 말라. 오직 성심으로 대하고 일체 묻지 않는다. 마땅히 넓은 은혜를 베풀어 원근의 교화를 새롭게 하리라. 상서 김인준부터 그 아래 안팎의 지당·관리·군민까지, 성지가 이르는 날 이전에 혹 내란을 앞장서 꾀했거나 왕사에 항거했거나 항복했다가 도로 배반했거나 원수로 인해 함부로 죽였거나 돌아갈 데 없어 주인을 등지고 망명했거나 마지못해 무리 따라 협종한 자까지, 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법을 범한 자는 죄의 경중 없이 다 사면해 없앤다.」
협주 1
爾初〔以〕世子奉幣納款據高麗史卷二五元宗世家元宗元年四月丙午條補。新元史已校。
「네가 처음 세자로서 폐백을 받들고 정성을 바쳤다」의 〔이(以)〕 자는 고려사 원종세가 원년 4월 병오조에 따라 보충했다. 신원사가 이미 교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