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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3 — 임연·삼별초·탐라高麗 三

원사 고려전 元史 高麗傳 · 송렴(宋濂) 등 · 1370년 (명 홍무 3) · 단락 10 · 한자 2,200자 · 낭독 8.8분

「원사 고려전」 한 권 「고려 3 — 임연·삼별초·탐라」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몽골 제국이 본 고려 백 년. 강동성의 거란 토벌에서 시작해 다루가치 살해와 강화 천도, 쿠빌라이와 원종의 담판, 임연의 폐립, 삼별초와 탐라, 충렬왕의 혼인과 정동행성, 그리고 두 차례 일본 원정의 전말(십만 가운데 돌아온 자 셋)까지.

1마형의 두 가지 계책

樞密院臣議征高麗事。初,馬亨以為「高麗者,本箕子所封之地,漢、晉皆為郡縣。今雖來朝,其心難測。莫若嚴兵假道,以取日本為名,乘勢可襲其國,定為郡縣」。亨又言:「今既有釁端,不宜遣兵伐之。萬一不勝,上損國威,下損士卒。彼或上表言情,宜赦其罪戾,減其貢獻,以安撫其民,庶幾感慕聖化。俟南宋已平,彼有他志,回兵誅之,亦未晚也。」前樞密院經歷馬希驥亦言:「今之高麗,乃古新羅、百濟、高句麗三國併而為一。大抵藩鎮權分則易制,諸侯強盛則難臣。驗彼州城軍民多寡,離而為二,分治其國,使權侔勢等,自相維制,則徐議良圖,亦易為區處耳。」黑的等至其國,禃受詔復位,遣借禮部侍郎朴(杰)〔烋〕從黑的等奉表入朝。十二月,乃親朝京師。

추밀원 신하들이 고려 칠 일을 의논하였다. 처음에 마형은 「고려는 본디 기자가 봉해진 땅으로 한·진이 다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이제 비록 조회하러 오나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군사를 엄히 하여 길을 빌리되 일본을 친다는 명분을 세우고, 기세를 타서 그 나라를 습격하여 군현으로 정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형이 또 말하였다. 「이제 이미 틈이 생겼으니 군사를 보내 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만에 하나 이기지 못하면 위로 나라의 위엄을 덜고 아래로 사졸을 잃습니다. 저들이 표를 올려 사정을 말하거든 그 죄를 사면하고 공물을 줄여 백성을 안무하면 거의 성스러운 교화를 사모할 것입니다. 남송이 평정되기를 기다려 저들에게 딴 뜻이 있거든 군사를 돌려 베어도 늦지 않습니다.」 전 추밀원경력 마희기도 말하였다. 「지금의 고려는 곧 옛 신라·백제·고구려 세 나라가 합쳐 하나 된 것입니다. 대저 번진은 권세가 나뉘면 제어하기 쉽고 제후는 강성하면 신하 삼기 어렵습니다. 저 주성(州城)과 군민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둘로 갈라 그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면, 권세가 맞먹어 서로 견제할 터이니, 천천히 좋은 계책을 의논해도 처리하기 쉬울 것입니다.」 흑적 등이 그 나라에 이르니 식이 조서를 받고 복위하여, 차예부시랑 박휴를 흑적 등을 따라 표를 받들고 입조시켰다. 12월에 이에 서울에 친조하였다.

협주 1

朴(杰)〔烋〕據本書卷六世祖紀至元六年十一月庚午條及高麗史卷二六元宗世家元宗十年十一月戊辰條改。

「박(杰)〔휴(烋)〕」는 본서 세조기 지원 6년 11월 경오조와 고려사 원종세가 10년 11월 무진조에 따라 고쳤다.

2임연 한 사람만 친다

七年正月,遣使言:「比奉詔,臣已復位,令從七百人入覲。」詔令從四百人來,餘留之西京。詔西京內屬,改東寧府,畫慈悲嶺為界,以忙哥都為安撫使,佩虎符,率兵戍其西境。詔諭其國僚屬軍民以討林衍之故,其略曰:「朕即位以來,閔爾國久罹兵亂,冊定爾主,撤還兵戍,十年之間,其所以撫護安全者,靡所不至。不圖逆臣林衍自作弗靖,擅廢易國王禃,脅立安慶公淐,詔令赴闕,復稽延不出,豈可釋而不誅?已遣行省率兵東下,惟林衍一身是討。其安慶公淐本非得已,在所寬宥。自餘脅從詿誤,一無所問。」二月,遣軍送禃就國,詔諭高麗國官吏軍民曰:「朕惟臣之事君,有死無二,不意爾國權臣輒敢擅廢國主。彼既驅率兵眾,將致爾眾危擾不安,以汝黎庶之故,特遣兵護送國王禃還國,奠居舊京,命達魯花赤同往鎮撫,以靖爾邦。惟爾東土之人,不知為汝之故,必生疑懼,爾眾咸當無畏,按堵如故。已別敕將帥,嚴戒兵士勿令侵犯。汝或妄動,汝妻子及汝身當致俘略,宜審思之。」

7년 정월에 사신을 보내 「지난번 조서를 받들어 신이 이미 복위했으니 종자 칠백 명을 거느리고 입근하겠습니다」 하니, 조서로 종자 사백 명만 오게 하고 나머지는 서경에 머물게 하였다. 조서로 서경을 내속시켜 동녕부로 고치고 자비령을 그어 경계로 삼았으며, 망가도를 안무사로 삼아 호부를 차고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서쪽 지경을 지키게 하였다. 조서로 그 나라 관료와 군민에게 임연을 치는 까닭을 타이르니 그 대략에 일렀다. 「짐이 즉위한 이래 너희 나라가 오래 병란에 걸린 것을 딱하게 여겨, 너희 임금을 책봉해 정하고 수자리 군사를 거두어 돌렸으니, 십 년 사이 어루만져 보호하고 편안케 한 바가 이르지 않은 데가 없다. 뜻밖에 역신 임연이 스스로 불측한 짓을 하여 제멋대로 국왕 식을 폐하여 바꾸고 안경공 창을 협박해 세웠으며, 조서로 대궐에 나오라 명해도 다시 미루며 나오지 않으니 어찌 놓아두고 베지 않으랴. 이미 행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동으로 내려가게 했으니, 오직 임연 한 몸만 친다. 안경공 창은 본디 부득이한 것이니 너그러이 용서할 바요, 그 밖에 협박에 따르고 잘못 얽힌 자는 하나도 묻지 않는다.」 2월에 군사를 보내 식을 호송해 나라로 나아가게 하고, 조서로 고려국 관리와 군민을 타일렀다. 「짐이 생각건대 신하가 임금을 섬김은 죽음이 있을 뿐 두 마음이 없거늘, 뜻밖에 너희 나라 권신이 문득 감히 국주를 제멋대로 폐하였다. 저들이 군사 무리를 몰아 너희를 위태롭고 소란하게 하겠기에, 너희 백성을 위하여 특별히 군사를 보내 국왕 식을 호송해 귀국시켜 옛 서울에 자리 잡게 하고, 다루가치를 함께 보내 진무하여 너희 나라를 안정시킨다. 너희 동녘 사람들은 저희 때문인 줄 모르고 반드시 의심과 두려움이 생기려니와, 너희는 다 두려워 말고 예전처럼 안도하라. 이미 장수들에게 따로 칙하여 군사가 침범하지 못하게 엄히 경계하였다. 너희가 혹 망령되이 움직이면 너희 처자와 너희 몸이 사로잡힘에 이를 것이니 마땅히 깊이 생각하라.」

3임연의 최후와 삼별초

初,有旨令頭輦哥行省駐西京,而以忙哥都、趙良弼充安撫使,與禃俱入其京;既而復令行省入其王京,而以脫(脫)朵兒充其國達魯花赤,罷安撫司。四月,東京行尚書省軍近西京,遣徹徹都等同禃之臣鄭子璵等持省劄召高麗國令公林衍。使還,言:「衍已死,子惟茂襲令公位。其國侍郎洪文(係)〔系〕、尚書宋宗禮,殺惟茂及衍婿崔宗(玿)〔紹〕。惟茂弟惟(䄄)〔栶〕自剄。衍黨裴仲孫等復集餘眾,立禃庶族承化侯為王,竄入珍島。」大軍次王京西關城,遣人收繫林衍妻子。行省與禃議遷江華島居民於王京,仍宣詔撫綏之,禃弗從,至入居其舊京,始從行省之議。

처음에 두련가 행성은 서경에 머물고 망가도와 조량필을 안무사로 삼아 식과 함께 왕경에 들어가게 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이윽고 다시 행성이 왕경에 들어가게 하고 탈타아를 그 나라 다루가치로 삼으며 안무사를 없앴다. 4월에 동경행상서성 군사가 서경에 다가가자, 철철도 등을 식의 신하 정자여 등과 함께 보내 성의 공문서를 지니고 고려 영공 임연을 불렀다. 사신이 돌아와 말하였다. 「연은 이미 죽고 아들 유무가 영공 자리를 이었는데, 그 나라 시랑 홍문계와 상서 송종례가 유무와 연의 사위 최종소를 죽이고, 유무의 아우 유인은 스스로 목을 찔렀습니다. 연의 무리 배중손 등이 다시 남은 무리를 모아 식의 서족 승화후를 왕으로 세우고 진도로 도망쳐 들어갔습니다.」 대군이 왕경 서쪽 관성에 머물며 사람을 보내 임연의 처자를 거두어 가두었다. 행성이 식과 강화도 거민을 왕경으로 옮기기를 의논하고 조서를 펴서 어루만졌는데, 식이 따르지 않다가 옛 서울에 들어가 살게 되자 비로소 행성의 의논을 따랐다.

협주 5

脫(脫)朵兒見卷七校勘記[三]。

「탈(脫)타아」는 권7 교감기에 보인다.

洪文(係)〔系〕據高麗史卷二六元宗世家元宗十一年五月癸丑條及卷一三0林衍傳改。

「홍문(係)〔계(系)〕」는 고려사 원종세가 11년 5월 계축조와 임연전에 따라 고쳤다.

宋宗禮見卷七校勘記[五]。下同。

「송종례」는 권7 교감기에 보인다. 아래도 같다.

崔宗(玿)〔紹〕據高麗史卷一三0林衍傳及東國通鑑卷三五改。

「최종(玿)〔소(紹)〕」는 고려사 임연전과 동국통감 권35에 따라 고쳤다.

惟(裀)〔栶〕據高麗史卷一三0林衍傳及東國通鑑卷三五改。

「유(裀)〔인(栶)〕」은 고려사 임연전과 동국통감 권35에 따라 고쳤다.

4강화도의 빈 성

六月,禃遣人報有朝廷逃軍與承化侯者以三別抄軍叛。世子愖復言:「叛兵據江華島,宜率軍水陸進擊之。」禃復報叛兵悉遁去。世子愖言:「叛兵劫府庫,燒圖籍,逃入海中。」行省使人覘江華島中百姓皆空,島之東南,相距約四十里,叛兵乘船候風,勢欲遁。於是即命乃顏率眾追擊之。七月,丞相安童等言,頭輦哥等遣大托、忙古䚟來言,令阿海領軍一千五百,屯王京伺察其國中。遂以阿海為安撫使。十一月,中書省臣言於高麗設置屯田經略司。以忻都、史樞為鳳州等處經略使,佩虎符,領軍五千屯田於金州;又令洪茶丘以舊領民二千屯田,阿剌帖木兒為副經略司,總轄之,而罷阿海軍。

6월에 식이 사람을 보내, 조정의 도망병이 승화후와 함께 삼별초군으로 배반했다고 알렸다. 세자 심이 다시 「반병이 강화도에 웅거했으니 마땅히 군사를 거느리고 물과 뭍으로 나아가 쳐야 합니다」 하였다. 식이 다시 반병이 다 도망해 갔다고 알렸다. 세자 심이 「반병이 부고를 겁략하고 도적(圖籍)을 불사르고 바다로 도망해 들어갔습니다」 하였다. 행성이 사람을 시켜 강화도를 엿보니 백성이 다 비었고, 섬 동남 사십 리쯤에 반병이 배를 타고 바람을 기다리며 달아나려는 형세였다. 이에 곧 내안에게 명해 무리를 거느리고 뒤쫓아 치게 하였다. 7월에 승상 안동 등이 아뢰기를, 두련가 등이 대탁·망고대를 보내와 말하기를 아해에게 군사 일천오백을 거느리고 왕경에 주둔하며 나라 안을 살피게 하라 한다 하므로, 드디어 아해를 안무사로 삼았다. 11월에 중서성 신하가 고려에 둔전경략사 두기를 아뢰었다. 흔도와 사추를 봉주 등지 경략사로 삼아 호부를 차고 군사 오천을 거느리고 금주에 둔전하게 하고, 또 홍다구에게 옛 거느리던 백성 이천으로 둔전하게 하며, 아랄첩목아를 부경략사로 삼아 총괄하게 하고 아해의 군사는 파하였다.

5둔전과 다그침

閏十一月,世子愖還。有詔諭禃以其陪臣元傅等妄奏頭輦哥國王為頭行省官員數事,及其國私與南宋、日本交通,又往年所言括兵造船至今未有成效,且謂自此以往或先有事南宋,或先有事日本,兵馬、船艦、資糧,早宜措置。是月,又詔禃曰:「嚮嘗遣信使通問日本,不謂執迷固難以善言開諭,此卿所知。將經略於彼,敕有司發卒屯田,為進取之計,庶免爾國他日轉輸之勞。仍遣使持書,先示招懷。卿其悉心盡慮,俾贊方略,期於有成,以稱朕意。」初,林衍之變,百姓驚擾,至是下詔撫慰之。

윤11월에 세자 심이 돌아갔다. 조서로 식에게, 그 배신 원부 등이 두련가 국왕을 두행성 관원이라 망령되이 아뢴 몇 가지 일과, 그 나라가 사사로이 남송·일본과 교통한 일과, 지난해 말한 군사 모으기와 배 짓기가 지금껏 성과가 없는 일을 타이르고, 또 이르기를 이제부터 먼저 남송에 일이 있든 먼저 일본에 일이 있든 병마·선함·군량을 일찍 조처하라 하였다. 이달에 또 식에게 조서하였다. 「지난번 신사를 보내 일본에 통문했으나, 뜻밖에 고집스레 미혹되어 좋은 말로 타이르기 어려움은 경이 아는 바다. 장차 저곳을 경략하려고 유사에 칙해 군사를 내어 둔전하여 나아가 취할 계책을 삼으니, 너희 나라의 뒷날 나르는 수고를 덜기 위함이다. 그대로 사신에게 글을 지니고 가서 먼저 불러 품는 뜻을 보이게 하니, 경은 마음과 생각을 다해 방략을 도와 이룸을 기약하여 짐의 뜻에 맞게 하라.」 처음 임연의 변에 백성이 놀라 소요했으므로 이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어루만져 위로하였다.

6일본에 반드시 닿게 하라

十二月,詔諭禃送使通好日本,曰:「朕惟日本自昔通好中國,實相密邇,故嘗詔卿導達去使,講信修睦,為其疆吏所梗,竟不獲明諭朕心。後以林衍之亂,故不暇及。今既輯寧爾家,遣少中大夫、祕書監趙良弼充國信使,期於必達。仍以忽林赤、王國昌、洪茶丘將兵送抵海上。比國信使還,姑令金州等處屯駐。所需糧餉,卿專委官赴彼,逐近供給,并鳩集金州旁左船艦,於金州需待,無致稽緩匱乏。」

12월에 조서로 식에게 사신을 보내 일본과 통호하게 하였다. 「짐이 생각건대 일본은 예로부터 중국과 통호했고 실로 서로 가까우므로, 일찍이 경에게 가는 사신을 인도해 신의를 강론하고 화목을 닦게 했는데, 그 변방 관리에게 막혀 끝내 짐의 마음을 밝게 타이르지 못했다. 뒤에는 임연의 난 때문에 미칠 겨를이 없었다. 이제 너희 집안이 안정되었으므로 소중대부 비서감 조량필을 국신사로 삼아 반드시 닿기를 기약한다. 그대로 홀림적·왕국창·홍다구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닷가까지 호송하게 하고, 국신사가 돌아올 때까지 우선 금주 등지에 주둔하게 한다. 필요한 군량은 경이 관원을 오로지 맡겨 그곳에 보내 가까운 데서 대고, 아울러 금주 곁의 배들을 모아 금주에서 기다리게 하여 지체와 모자람이 없게 하라.」

7진도를 평정하다

八年正月,禃遣其樞密使金鍊奉表入見,請結婚。安撫使阿海略地珍島,與逆黨遇,多所亡失。中書省臣言諜知珍島餘糧將竭,宜乘弱攻之,詔不許。二月,命忽都答兒持詔諭裴仲孫。三月,仲孫乞諸軍退屯,然後內附,忻都未從其請,有詔諭之。四月,忻都言仲孫稽留詔使,負固不服,乞與虎林赤、王國昌分道進討,從之。以討珍島諭禃。五月,忻都與史樞、洪茶丘大敗珍島賊,獲承化侯斬之,其黨金通精走耽羅。七月,禃遣其上將軍鄭子璵奉表謝平珍島。世子愖率其尚書右丞宋玢、軍器監薛公儉等衣冠胤冑二十八人入侍。八月,忽林赤赴鎮邊合浦縣屯所。九月,禃遣其通事別將徐(稱)〔偁〕導送宣撫趙良弼使日本。帝遣愖還國。十一月,禃遣其同知樞密院事李昌慶奉表謝許婚事。

8년 정월에 식이 추밀사 김련을 보내 표를 받들어 뵙고 혼인 맺기를 청하였다. 안무사 아해가 진도를 치다가 역당과 만나 잃은 것이 많았다. 중서성 신하가, 진도의 남은 양식이 다해 감을 염탐해 알았으니 약해진 틈에 쳐야 한다고 아뢰었으나 조서로 허락하지 않았다. 2월에 홀도답아에게 명해 조서를 지니고 배중손을 타이르게 하였다. 3월에 중손이 여러 군이 물러가 주둔한 뒤에 내부하겠다 비니, 흔도가 그 청을 따르지 않자 조서로 타일렀다. 4월에 흔도가, 중손이 조사(詔使)를 붙들고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으니 호림적·왕국창과 길을 나누어 나아가 치기를 청하므로 따랐다. 진도를 친다고 식에게 타일렀다. 5월에 흔도가 사추·홍다구와 진도의 적을 크게 깨뜨리고 승화후를 잡아 베니, 그 무리 김통정이 탐라로 달아났다. 7월에 식이 상장군 정자여를 보내 표를 받들어 진도 평정을 사례하였다. 세자 심이 상서우승 송분과 군기감 설공검 등 의관 자제 스물여덟 명을 거느리고 입시하였다. 8월에 홀림적이 진변 합포현 둔소로 갔다. 9월에 식이 통사 별장 서칭을 보내 선무 조량필의 일본 사행을 인도해 보냈다. 황제가 심을 귀국시켰다. 11월에 식이 동지추밀원사 이창경을 보내 표를 받들어 혼인을 허락한 일을 사례하였다.

협주 1

徐(稱)〔偁〕據高麗史卷二七元宗世家元宗十三年四月庚寅條、東國通鑑卷三六改。下同。

「서(稱)〔칭(偁)〕」은 고려사 원종세가 13년 4월 경인조와 동국통감 권36에 따라 고쳤다. 아래도 같다.

8백거의 사행

九年正月,禃遣其別將白琚偕張鐸等十二人奉表入見。世子愖以其國尚書右丞宋玢、玢父上將軍宗禮討林惟茂狀,言其功于中書省。遣郎中不花、馬璘使高麗,諭以供戰船輸軍糧事。二月,禃致書日本,使通好于朝。六月,遣西京屬城諸達魯花赤及質子金鎰等歸國。

9년 정월에 식이 별장 백거를 장탁 등 열두 사람과 함께 보내 표를 받들어 뵈었다. 세자 심이 그 나라 상서우승 송분과 분의 아버지 상장군 종례가 임유무를 친 정상을 중서성에 말하여 그 공을 알렸다. 낭중 불화와 마린을 고려에 사신 보내 싸움배 대는 일과 군량 나르는 일을 타일렀다. 2월에 식이 일본에 글을 보내 조정과 통호하게 하였다. 6월에 서경 속성의 여러 다루가치와 볼모 김일 등을 귀국시켰다.

9탐라성을 빼앗다

十年正月,禃遣其世子愖入朝。四月,經略使忻都同洪茶丘領兵入海,攻拔耽羅城,禽金通精等,奉詔誅之。六月,禃遣其大將軍金忻表奏攻破濟州。九月,禃屢言:「小國地狹,比歲荒歉,其生券軍乞駐東京。」詔令營北京界,仍敕東京路運米二萬石賑之。達魯花赤焦天翼還朝。

10년 정월에 식이 세자 심을 보내 입조시켰다. 4월에 경략사 흔도가 홍다구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에 들어가 탐라성을 쳐서 빼앗고 김통정 등을 사로잡아 조서를 받들어 베었다. 6월에 식이 대장군 김흔을 보내 제주를 쳐서 깨뜨린 일을 표로 아뢰었다. 9월에 식이 여러 번 「작은 나라는 땅이 좁은데 해마다 흉년이 들었으니, 그 생권군(生券軍)은 동경에 주둔하기를 빕니다」 하니, 조서로 북경 지경에 진영을 차리게 하고 그대로 동경로에 칙해 쌀 이만 석을 날라 진휼하였다. 다루가치 초천익이 조정으로 돌아갔다.

10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하다

十一年正月己卯朔,宮闕告成,帝始御正殿,受皇太子諸王百官朝賀。禃遣其少卿李義孫等入賀。三月,遣木速塔八、撒木合持詔使高麗簽軍五千六百人助征日本。五月,皇女忽都魯揭里迷失下嫁于世子愖。七月,其樞密院副使奇蘊奉表告王禃薨,命世子愖襲爵,詔諭高麗國王宗族及大小官員百姓人等,其略曰:「國王王禃存日,屢言世子愖可為繼嗣。今令愖襲爵為王。凡在所屬,並聽節制。」八月,世子愖還至其國襲位。九月,遣其齊安侯王淑上表謝恩。十一月,皇女入京城。愖復遣其判閤門事李信孫等奉表入謝。十二月,以黑的為高麗達魯花赤,李益受代還。

11년 정월 기묘 초하루에 궁궐이 낙성되어 황제가 처음 정전에 나아가 황태자와 제왕과 백관의 조하를 받으니, 식이 소경 이의손 등을 보내 하례하였다. 3월에 목속탑팔과 살목합을 보내 조서로 고려에서 군사 오천육백 명을 뽑아 일본 정벌을 돕게 하였다. 5월에 황녀 홀도로게리미실(제국대장공주)이 세자 심에게 시집왔다. 7월에 추밀원부사 기온이 표를 받들어 왕식의 죽음을 아뢰니, 세자 심에게 작위를 잇도록 명하고 조서로 고려국왕의 종족과 대소 관원과 백성들을 타일렀다. 그 대략에 「국왕 왕식이 살았을 때 여러 번 세자 심이 후사가 될 만하다 말했다. 이제 심에게 작위를 이어 왕이 되게 하니, 무릇 소속된 자는 다 절제를 들으라」 하였다. 8월에 세자 심이 그 나라에 돌아가 자리를 이었다. 9월에 제안후 왕숙을 보내 표를 올려 사은하였다. 11월에 황녀가 경성(개경)에 들어갔다. 심이 다시 판합문사 이신손 등을 보내 표를 받들어 사례하였다. 12월에 흑적을 고려 다루가치로 삼고 이익수는 교대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