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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4 — 충렬왕과 정동행성高麗 四

원사 고려전 元史 高麗傳 · 송렴(宋濂) 등 · 1370년 (명 홍무 3) · 단락 19 · 한자 1,626자 · 낭독 6.5분

「원사 고려전」 한 권 「고려 4 — 충렬왕과 정동행성」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몽골 제국이 본 고려 백 년. 강동성의 거란 토벌에서 시작해 다루가치 살해와 강화 천도, 쿠빌라이와 원종의 담판, 임연의 폐립, 삼별초와 탐라, 충렬왕의 혼인과 정동행성, 그리고 두 차례 일본 원정의 전말(십만 가운데 돌아온 자 셋)까지.

1관직 이름을 고치라

十二年七月,黑的還朝。十一月,遣使諭愖改官職名號,愖遣其帶方侯王澂率衣冠子弟二十人入侍。以石抹天衢充副達魯花赤。

12년 7월에 흑적이 조정으로 돌아갔다. 11월에 사신을 보내 심에게 관직 이름을 고치라 타이르니, 심이 대방후 왕징을 시켜 의관 자제 스무 명을 거느리고 입시시켰다. 석말천구를 부다루가치에 충임하였다.

2송 평정을 하례하다

十三年七月,愖遣其僉議中贊金方慶奉表賀平宋。十一月,愖遣其判祕書寺事朱悅奉表,奏改名(睶)〔賰〕。

13년 7월에 심이 첨의중찬 김방경을 보내 표를 받들어 송 평정을 하례하였다. 11월에 심이 판비서시사 주열을 보내 표를 받들어 이름을 춘(賰)으로 고쳤다고 아뢰었다.

협주 1

奏改名(睶)〔賰〕見卷九校勘記[九]。下同。

「이름을 (睶)〔춘(賰)〕으로 고쳤다고 아뢰었다」는 권9 교감기에 보인다. 아래도 같다.

3김방경의 무고

十四年正月,金方慶等為亂,命愖治之,仍命忻都、洪茶丘飭兵禦備。

14년 정월에 김방경 등이 난을 꾀한다 하여 심에게 명해 다스리게 하고, 아울러 흔도와 홍다구에게 군사를 정돈해 막아 대비하게 하였다.

4옥사와 둔전

十五年一月,(睶)〔賰〕以達魯花赤石抹天衢秩滿未代,請復留三年,從之。東征元帥府上言:「以高麗侍中金方慶與其子㥅、愃、恂,婿趙(卞)〔抃〕等,陰養死士四百人,匿鎧仗器械,造戰艦,積糧餉,欲謀作亂,捕方慶等按驗得實,已流諸海島。然高麗初附,民心未安,可發征日本還卒二千七百人,置長吏,屯忠清、全羅諸處,鎮撫外夷,以安其民;復令士卒備牛畜耒耜,為來歲屯田之計。」七月,改鑄駙馬高麗王印賜(睶)〔賰〕。

15년 정월에 춘이, 다루가치 석말천구가 임기가 찼으나 교대되지 않았으니 다시 세 해 머물기를 청하므로 따랐다. 동정원수부가 아뢰었다. 「고려 시중 김방경이 아들 흔·선·순과 사위 조변 등과 함께 몰래 결사대 사백 명을 기르고 갑옷과 병장기를 감추며 싸움배를 짓고 군량을 쌓아 난을 꾀하려 하므로, 방경 등을 잡아 조사해 사실을 얻어 이미 여러 바다 섬에 유배했습니다. 그러나 고려는 갓 붙어 민심이 아직 편안치 않으니, 일본 정벌에서 돌아온 군사 이천칠백 명을 내어 장리를 두고 충청·전라 여러 곳에 주둔시켜 바깥 오랑캐를 진무하여 백성을 안정시키고, 다시 사졸에게 소와 쟁기를 갖추게 하여 명년 둔전의 계책을 삼으소서.」 7월에 부마고려왕인(駙馬高麗王印)을 고쳐 부어 춘에게 내렸다.

협주 1

趙(卞)〔抃〕據高麗史卷一0四金方慶傳、東國通鑑卷三七改。

「조(卞)〔변(抃)〕」은 고려사 김방경전과 동국통감 권37에 따라 고쳤다.

5네 역을 두다

十六年正月,敕其國置大灰艾州、東京、柳石、孛落四驛。

16년 정월에 칙으로 그 나라에 대회애주·동경·유석·패락 네 역을 두었다.

6굶는 백성을 꾸어 주다

十七年五月,(睶)〔賰〕以民饑,乞貸糧萬石,從之。七月,以其國初置驛站,民乏食,命給糧一歲,仍禁使臣往來勿求索飲食。十月,加(睶)〔賰〕開府儀同三司、中書左丞相、行中書省事。

17년 5월에 춘이 백성이 굶주리므로 양곡 만 석을 꾸어 달라 비니 따랐다. 7월에 그 나라가 처음 역참을 두어 백성이 먹을 것이 모자라므로 한 해 양식을 주라 명하고, 그대로 오가는 사신이 마시고 먹을 것을 토색하지 못하게 금하였다. 10월에 춘에게 개부의동삼사·중서좌승상·행중서성사를 더하였다.

7역참을 줄이다

十八年二月,(睶)〔賰〕言本國必闍赤不諳行移文字,請除郎中員外各一員以為參佐。(睶)〔賰〕又請易宣命職銜,增駙馬字,從之。六月,(睶)〔賰〕言本國置驛四十,民畜凋弊。敕併為二十站,仍給馬價八百錠。八月,陞其僉議府為從三品。十一月,金州等處置鎮邊萬戶府,以控制日本。

18년 2월에 춘이, 본국의 필도치가 공문 글을 알지 못하니 낭중·원외 각 한 사람을 두어 참좌로 삼아 달라 청하였다. 춘이 또 선명(宣命)의 직함을 바꾸어 부마(駙馬) 글자를 더해 달라 청하니 따랐다. 6월에 춘이 본국에 역 마흔을 두어 백성과 가축이 피폐하다 말하니, 칙으로 합쳐 스무 참으로 하고 그대로 말값 팔백 정을 주었다. 8월에 그 첨의부를 종삼품으로 올렸다. 11월에 금주 등지에 진변만호부를 두어 일본을 통제하였다.

8왜구를 막을 군사

十九年正月,(睶)〔賰〕以日本寇其邊海郡邑,燒居室掠子女而去,請發闍里帖木兒麾下蒙古軍五百人戍金州,又從之。

19년 정월에 춘이, 일본이 그 바닷가 군읍을 노략하여 집을 불사르고 자녀를 노략해 갔다 하여, 사리첩목아 휘하 몽골군 오백 명을 내어 금주를 지키기를 청하니 또 따랐다.

9정동행성

二十年五月,立征東行中書省,以高麗國王與阿塔海共事。

20년 5월에 정동행중서성을 세워 고려국왕이 아탑해와 함께 일을 보게 하였다.

10세자 원

二十八年五月,以(睶)〔賰〕子謜為世子,授特進、上柱國,賜銀印。十月,以其國饑,給以米二十萬斛。

28년 5월에 춘의 아들 원(謜)을 세자로 삼아 특진·상주국을 제수하고 은인(銀印)을 내렸다. 10월에 그 나라에 기근이 들어 쌀 이십만 곡을 주었다.

11공신호를 받다

三十年二月,(睶)〔賰〕遣使入奏,復更名昛,及乞功臣號。制曰:「特進、上柱國、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駙馬高麗王昛,世守王爵,選尚我家。載旌藩屏之功,宜示褒嘉之寵。可賜號推忠宣力定遠功臣,餘如故。益懋厥勳,對揚休命。」十一月,昛入朝。

30년 2월에 춘이 사신을 보내 아뢰어 다시 이름을 거(昛)로 고치고 아울러 공신호를 빌었다. 제서에 일렀다. 「특진·상주국·개부의동삼사·정동행중서성좌승상·부마 고려왕 거는 대대로 왕작을 지키고 우리 황가의 사위로 뽑혔다. 번병의 공을 기려 마땅히 표창의 총애를 보일지니, 추충선력정원공신호를 내리고 나머지는 예전대로 한다. 더욱 그 공훈에 힘써 아름다운 명을 받들어 드날리라.」 11월에 거가 입조하였다.

12첨의사를 올리다

成宗元貞二年七月,陞其僉議司為二品。

성종 원정 이년 7월에 그 첨의사를 2품으로 올렸다.

13부자가 왕위를 주고받다

大德元年十一月,封昛為逸壽王,以世子謜為高麗王,從所請也。

대덕 원년 11월에 거를 일수왕(逸壽王)에 봉하고 세자 원을 고려왕으로 삼으니, 청한 바를 따른 것이다.

14충선왕이 폐위되다

二年七月,中書省臣奏謜有罪當廢,復以其父昛為王。

2년 7월에 중서성 신하가 원(충선왕)이 죄가 있어 폐해야 한다고 아뢰어, 다시 그 아버지 거를 왕으로 삼았다.

15완택의 탄핵

三年正月,昛遣使入貢。丞相完澤等言:「世祖時,或言高麗僭設省、院、臺,有旨罷之,其國遂改立僉議府、密直司、監察司。今謜加其臣趙仁規司徒、司空、侍中之職。又昛給仁規赦九死奬諭文書。又擅寫皇朝帝系,及自造曆,加其女為令妃。又立資政院,以崔冲紹為興祿大夫。又嘗奉太后旨,公主與謜兩位下怯薛䚟合併為一。謜不奉旨。謜又擅殺千戶金呂而以其金符給宦者朮合兒。又仁規進女侍謜,有巫蠱事。今乞將仁規、冲紹發付京兆、鞏昌兩路安置,不得他適。昛行事不法,謜年少妄殺無辜,乞降詔戒飭。」帝命杖仁規、冲紹而遣之。二月,詔諭昛并闔境臣民:「自今以始,勉遵守國之規,益謹畏天之戒。凡在官者,各勤乃事,協力匡贊,毋蹈前非,自干刑憲。緇黃士庶,各安其業。」

3년 정월에 거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승상 완택 등이 말하였다. 「세조 때 누가 고려가 성(省)·원(院)·대(臺)를 참람히 두었다 말하니 없애라는 지시가 있어, 그 나라가 드디어 첨의부·밀직사·감찰사로 고쳐 세웠습니다. 이제 원이 그 신하 조인규에게 사도·사공·시중의 직을 더하고, 또 거가 인규에게 아홉 번 죽을죄를 사한다는 장유문서를 주었으며, 또 제멋대로 황조의 제계(帝系)를 베끼고 스스로 책력을 만들고 그 딸을 영비(令妃)로 올렸습니다. 또 자정원을 세워 최충소를 흥록대부로 삼았습니다. 또 일찍이 태후의 지시를 받들어 공주와 원 두 위(位) 아래 겁설대를 합쳐 하나로 하라 했는데 원이 지시를 받들지 않았습니다. 원이 또 천호 김려를 제멋대로 죽이고 그 금부를 환관 출합아에게 주었습니다. 또 인규가 딸을 바쳐 원을 모시게 했는데 무고(巫蠱)의 일이 있었습니다. 이제 인규와 충소를 경조·공창 두 로에 보내 안치하고 딴 데 가지 못하게 하기를 빕니다. 거는 행사가 법답지 못하고 원은 나이 젊어 함부로 무고한 이를 죽이니, 조서를 내려 경계하고 신칙하시기를 빕니다.」 황제가 인규와 충소를 매질해 보내라 명하였다. 2월에 조서로 거와 온 지경 신민을 타일렀다. 「이제부터 시작하여 나라 지키는 규범을 힘써 따르고 하늘 두려워하는 경계를 더욱 삼가라. 무릇 벼슬에 있는 자는 저마다 제 일에 부지런하고 힘을 합쳐 도와서, 지난 잘못을 밟아 스스로 형벌에 걸리지 말라. 승려와 도사와 선비와 서민은 저마다 제 생업에 편안하라.」

16행성을 다시 두다

五月,哈散使高麗還,言昛不能服其眾,朝廷宜遣官共理之。遂復立征東行省,命闊里吉思為高麗行省平章政事。九月,昛遣使入貢,以朝廷增置行省,上表陳情,其略言:「累世有勤王之功,凡八十餘年,歲修職貢。嘗以世子入侍,得聯婚帝室,遂為甥舅,實感至恩。使小國不替祖風,永修侯職,是所望也。」

5월에 합산이 고려에 사신 갔다 돌아와, 거가 그 무리를 복종시키지 못하니 조정이 관원을 보내 함께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드디어 정동행성을 다시 세우고 활리길사를 고려행성 평장정사로 명하였다. 9월에 거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조정이 행성을 더 두었으므로 표를 올려 사정을 아뢰니 그 대략에 「여러 대로 근왕의 공이 있어 무릇 팔십여 년을 해마다 직공을 닦았습니다. 일찍이 세자로 입시하여 황실과 혼인을 맺어 드디어 생구(甥舅)가 되니 실로 지극한 은혜에 감격합니다. 작은 나라로 하여금 조상의 풍도를 갈지 않고 길이 제후의 직분을 닦게 하심이 바라는 바입니다」 하였다.

17활리길사의 보고

四年二月,征東行省平章闊里吉思言:「高麗國王自署官府三百五十八所,官四千五十五員,衣食皆取之民,復苛征之。又其大會,王曲蓋、龍扆、警蹕,諸臣舞蹈山呼,一如朝儀,僭擬過甚。」遣山東宣慰使塔察兒、刑部尚書王泰亨齎詔諭之,使釐正以聞。三月,闊里吉思復上言:「僉議司官不肯供報民戶版籍、州縣疆界。本國橫科暴斂,民少官多,刑罰不一,若止依本俗行事,實難撫治。」

4년 2월에 정동행성 평장 활리길사가 말하였다. 「고려국왕이 스스로 둔 관부가 삼백오십팔 곳이요 관원이 사천오십오 원인데, 입고 먹는 것을 다 백성에게서 취하고 다시 가혹하게 거둡니다. 또 그 큰 모임에 왕의 곡개(曲蓋)·용의(龍扆)·경필(警蹕)과 뭇 신하의 무도산호(舞蹈山呼)가 하나같이 조정 의식과 같으니 참람함이 지나칩니다.」 산동선위사 탑찰아와 형부상서 왕태형을 보내 조서를 지니고 타일러 바로잡아 아뢰게 하였다. 3월에 활리길사가 다시 아뢰었다. 「첨의사 관원이 민호 판적과 주현 강계를 알리려 하지 않습니다. 본국이 마구 거두고 사납게 걷으며, 백성은 적고 관원은 많으며 형벌이 한결같지 않으니, 본속(本俗)대로만 행하게 하면 실로 어루만져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협주 1

四千五十五員高麗史卷三二忠烈王世家忠烈王二十七年四月己丑條作「四千三百五十五員」。東國通鑑同。疑此處脫「三百」二字。

「사천오십오 원」은 고려사 충렬왕세가 27년 4월 기축조에 「사천삼백오십오 원」으로 되어 있다. 동국통감도 같다. 여기에 「삼백」 두 자가 빠진 듯하다.

18산호를 없애다

五年二月,為昛罷行省官,有詔諭昛。秋七月,昛上表言:「昔居海島時,嘗用山呼,後改呼千秋。今既奉明詔,一切皆罷。又革官府九十餘所,汰官吏二百七十餘員。他如雜徭病民、馹騎煩擾驛傳者,亦皆省之。」詔曰:「卿其諭朕意,所言當始終行之,或有不然,寧不羞懼?」

5년 2월에 거를 위해 행성 관원을 없애고 거를 타이르는 조서가 있었다. 가을 7월에 거가 표를 올렸다. 「옛날 바다 섬에 살 때 일찍이 산호(山呼)를 쓰다가 뒤에 천추(千秋)로 고쳐 불렀는데, 이제 밝은 조서를 받들었으니 일체 다 없앴습니다. 또 관부 아흔여 곳을 없애고 관리 이백칠십여 원을 도태했습니다. 그 밖에 잡역으로 백성을 병들게 하고 역마로 역전을 번거롭게 하던 것도 다 덜었습니다.」 조서에 일렀다. 「경은 짐의 뜻을 헤아려 말한 바를 마땅히 시종 행하라. 혹 그렇지 않으면 어찌 부끄럽고 두렵지 않으랴.」

19왕위의 계보

昛自大德二年復位,八年而薨。子謜復襲王位。成宗初年,尚寶塔實憐公主。十一年,進爵瀋陽王,繼襲位高麗國王,生子燾。燾受遜位,以仁宗皇慶二年四月封高麗國王。是年,其弟暠立為世子,以其父瀋陽王請於朝故也。自㬚傳其子禃,禃傳其子昛,昛傳其子謜,謜傳其子燾,燾傳其弟暠。禃初名倎;昛初名愖,又名(睶)〔賰〕,後乃名昛;謜則更名(章)〔璋〕云。

거는 대덕 이년에 복위하여 여덟 해 만에 죽었다. 아들 원이 다시 왕위를 이었다. 성종 초년에 보탑실련공주에게 장가들었다. 11년에 작위가 심양왕으로 오르고 이어 고려국왕 자리를 이었으며 아들 도(燾)를 낳았다. 도가 왕위를 물려받아 인종 황경 이년 4월에 고려국왕에 봉해졌다. 이해에 그 아우 고(暠)가 세자로 섰으니, 그 아버지 심양왕이 조정에 청했기 때문이다. 철부터 그 아들 식에게 전하고, 식은 아들 거에게, 거는 아들 원에게, 원은 아들 도에게, 도는 아우 고에게 전했다. 식의 처음 이름은 전이요, 거의 처음 이름은 심이며 또 춘이라 하다가 뒤에 거라 했고, 원은 곧 이름을 장(璋)으로 고쳤다 한다.

협주 1

謜則更名(章)〔璋〕見卷二二校勘記[一六]。

「원은 곧 이름을 (章)〔장(璋)〕으로 고쳤다」는 권22 교감기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