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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日本

원사 고려전 元史 高麗傳 · 송렴(宋濂) 등 · 1370년 (명 홍무 3) · 단락 10 · 한자 2,358자 · 낭독 9.4분

「원사 고려전」 한 권 「일본」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몽골 제국이 본 고려 백 년. 강동성의 거란 토벌에서 시작해 다루가치 살해와 강화 천도, 쿠빌라이와 원종의 담판, 임연의 폐립, 삼별초와 탐라, 충렬왕의 혼인과 정동행성, 그리고 두 차례 일본 원정의 전말(십만 가운데 돌아온 자 셋)까지.

1송나라 때까지의 일본

日本國在東海之東,古稱倭奴國,或云惡其舊名,故改名日本,以其國近日所出也。其土疆所至與國王世系及物產風俗,見《宋史》本傳。日本爲國,去中土殊遠,又隔大海,自後漢歷魏、晉、宋、隋皆來貢。唐永徽、顯慶、長安、開元、天寶、上元、貞元、元和、開成中,並遣使入朝。宋雍熙元年,日本僧奝然,與其徒五六人浮海而至,奉職貢,并獻銅器十餘事。奝然善隸書,不通華言。問其風土,但書以對,云其國中有五經書及佛經、白居易集七十卷。奝然還後,以國人來者曰滕木吉,以僧來者曰寂照。寂照識文字,繕寫甚妙。至熙寧以後,連貢方物,其來者皆僧也。

일본국은 동해 동쪽에 있으니 옛날 왜노국이라 일컬었다. 혹은 옛 이름을 싫어하여 일본으로 이름을 고쳤다 하니, 나라가 해 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 강토의 이르는 곳과 국왕의 세계와 물산·풍속은 송사 본전에 보인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중토에서 몹시 멀고 또 큰 바다로 막혔는데, 후한부터 위·진·송·수를 거치며 다 와서 조공했다. 당나라 영휘·현경·장안·개원·천보·상원·정원·원화·개성 연간에 다 사신을 보내 입조했다. 송 옹희 원년에 일본 승려 조연(奝然)이 그 무리 대여섯 사람과 바다에 떠서 이르러 직공을 받들고 아울러 구리그릇 십여 점을 바쳤다. 조연은 예서를 잘 썼으나 중국말을 통하지 못하여, 풍토를 물으면 다만 글로 써서 답했는데, 나라 안에 오경 책과 불경과 백거이집 칠십 권이 있다 하였다. 조연이 돌아간 뒤 나라 사람으로 온 이는 등목길이요 승려로 온 이는 적조니, 적조는 문자를 알고 베껴 쓰기가 몹시 묘하였다. 희령 이후에 이르러 잇달아 방물을 바쳤는데 오는 자가 다 승려였다.

2대몽골국 황제의 국서

元世祖之至元二年,以高麗人趙彝等言日本國可通,擇可奉使者。三年八月,命兵部侍郎黑的,給虎符,充國信使,禮部侍郎殷弘給金符,充國信副使,持國書使日本。書曰:大蒙古國皇帝奉書日本國王。朕惟自古小國之君,境土相接,尚務講信修睦。況我祖宗,受天明命,奄有區夏,遐方異域畏威懷德者,不可悉數。朕卽位之初,以高麗無辜之民久瘁鋒鏑,卽令罷兵還其疆域,反其旄倪。高麗君臣感戴來朝,義雖君臣,歡若父子。計王之君臣亦已知之。高麗,朕之東藩也。日本密邇高麗,開國以來亦時通中國,至於朕躬,而無一乘之使以通和好。尚恐王國知之未審,故特遣使持書,布告朕志,冀自今以往,通問結好,以相親睦。且聖人以四海爲家,不相通好,豈一家之理哉。以至用兵,夫孰所好。王其圖之。

원 세조 지원 이년에 고려 사람 조이 등이 일본국과 통할 수 있다고 말하므로 사신으로 받들 만한 자를 골랐다. 3년 8월에 병부시랑 흑적에게 호부를 주어 국신사에 충임하고, 예부시랑 은홍에게 금부를 주어 국신부사에 충임하여 국서를 지니고 일본에 사신 가게 하였다. 국서에 일렀다. 「대몽골국 황제가 일본 국왕에게 글을 받들어 보낸다. 짐이 생각건대 예로부터 작은 나라의 임금도 지경이 서로 잇닿으면 오히려 신의를 강론하고 화목 닦기를 힘썼다. 하물며 우리 조종은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 온 중국을 차지하니, 먼 곳 다른 지역에서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해 온 자를 이루 다 셀 수 없다. 짐이 즉위한 처음에 고려의 죄 없는 백성이 오래 싸움에 시달렸으므로 곧 군사를 거두어 그 강토를 돌려주고 그 늙은이와 아이를 돌려보냈다. 고려의 임금과 신하가 감격하여 조회하러 오니, 의리는 임금과 신하나 기쁨은 아버지와 아들 같다. 헤아리건대 왕의 군신도 이미 알 것이다. 고려는 짐의 동쪽 울타리다. 일본은 고려에 바싹 가깝고 개국 이래 때로 중국과 통했는데, 짐의 대에 이르러서는 한 번의 사신도 화호를 통함이 없다. 아직 왕의 나라가 이를 자세히 알지 못할까 두려워 특별히 사신을 보내 글을 지니고 짐의 뜻을 널리 알리니, 바라건대 이제부터 문안을 통하고 우호를 맺어 서로 친목하자. 또 성인은 사해를 한집으로 삼으니, 서로 통호하지 않으면 어찌 한집의 이치이겠는가. 군사를 쓰는 데 이르는 것을 무릇 뉘라서 좋아하랴. 왕은 그것을 헤아리라.」

3조량필을 보내다

黑的等道由高麗,高麗國王王禃以帝命遣其樞密院副使宋君斐、借禮部侍郎金贊等導詔使黑的等往日本,不至而還。四年六月,帝謂王禃以辭爲解,令去使徒還,復遣黑的等至高麗諭禃,委以日本事,以必得其要領爲期。禃以爲海道險阻,不可辱天使,九月,遣其起居舍人潘阜等持書往日本,留六月,亦不得其要領而歸。五年九月,命黑的、弘復持書往,至對馬島,日本人拒而不納,執其塔二郎、彌二郎二人而還。六年六月,命高麗金有成送還執者,俾中書省牒其國,亦不報。有成留其太宰府守護所者久之。十二月,又命祕書監趙良弼往使。書曰:「蓋聞王者無外,高麗與朕既爲一家,王國實爲鄰境,故嘗馳信使修好,爲疆埸之吏抑而弗通。所獲二人,敕有司慰撫,俾齎牒以還,遂復寂無所聞。繼欲通問,屬高麗權臣林衍構亂,坐是弗果。豈王亦因此輟不遣使,或已遣而中路梗塞,皆不可知。

흑적 등이 고려를 거쳐 가는데, 고려국왕 왕식이 황제의 명으로 추밀원부사 송군비와 차예부시랑 김찬 등을 보내 조사 흑적 등을 인도해 일본으로 가게 했으나 이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4년 6월에 황제가 왕식이 말로 둘러대어 간 사신을 헛되이 돌아오게 했다 하여, 다시 흑적 등을 고려에 보내 식을 타이르고 일본 일을 맡기며 반드시 요령을 얻는 것을 기한으로 삼았다. 식이 바닷길이 험조하여 천사(天使)를 욕되게 할 수 없다 하여, 9월에 기거사인 반부 등을 시켜 글을 지니고 일본에 가게 했는데, 여섯 달을 머물고도 요령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5년 9월에 흑적과 은홍에게 명해 다시 글을 지니고 가게 하니, 대마도에 이르렀으나 일본 사람이 막고 받아들이지 않아 탑이랑과 미이랑 두 사람을 잡아 돌아왔다. 6년 6월에 고려 김유성에게 명해 잡아 온 자들을 돌려보내고 중서성이 그 나라에 공문을 보내게 했으나 역시 답이 없었다. 유성은 태재부 수호소에 오래 머물렀다. 12월에 또 비서감 조량필에게 명해 사신 가게 하였다. 국서에 일렀다. 「대개 들으니 왕자(王者)에게는 바깥이 없다 한다. 고려는 짐과 이미 한집이 되었고 왕의 나라는 실로 이웃 지경이므로 일찍이 신사를 달려 우호를 닦으려 했는데, 변방 관리에게 눌려 통하지 못했다. 잡아 온 두 사람은 유사에 칙해 위무하고 공문을 지니고 돌아가게 했는데, 그 뒤로 다시 아무 소식이 없다. 이어 문안을 통하려 했으나 마침 고려 권신 임연이 난을 얽어 이 때문에 이루지 못했다. 왕도 이 때문에 사신 보내기를 그만두었는가, 아니면 이미 보냈는데 중로가 막혔는가, 다 알 수 없다.

4예우와 경계

不然,日本素號知禮之國,王之君臣寧肯漫爲弗思之事乎。近已滅林衍,復舊王位,安集其民,特命少中大夫祕書監趙良弼充國信使,持書以往。如卽發使與之偕來,親仁善鄰,國之美事。其或猶豫以至用兵,夫誰所樂爲也,王其審圖之。」良弼將往,乞定與其王相見之儀。廷議與其國上下之分未定,無禮數可言。帝從之。七年十二月,詔諭高麗王禃送國信使趙良弼通好日本,期於必達。仍以忽林失、王國昌、洪茶丘將兵送抵海上,比國信使還,姑令金州等處屯駐。八年六月,日本通事曹介升等上言:「高麗迂路導引國使,外有捷徑,倘得便風半日可到。若使臣去,則不敢同往;若大軍進征,則願爲鄉導。」帝曰:「如此則當思之。」九月,高麗王禃遣其通事別將徐偁導送良弼使日本,日本始遣彌四郎者入朝,帝宴勞遣之。九年二月,樞密院臣言:「奉使日本趙良弼遣書狀官張鐸來言,去歲九月,與日本國人彌四郎等至太宰府西守護所。

그렇지 않다면 일본은 본디 예를 안다고 이름난 나라니, 왕의 군신이 어찌 생각 없는 일을 함부로 하겠는가. 근래 이미 임연을 멸하고 옛 왕을 복위시켜 그 백성을 안집시켰으므로, 특별히 소중대부 비서감 조량필을 국신사에 충임하여 글을 지니고 가게 한다. 곧 사신을 내어 함께 오게 하면 어짊을 친히 하고 이웃과 잘 지냄이니 나라의 아름다운 일이다. 혹 머뭇거려 군사 쓰기에 이른다면 무릇 뉘라서 즐겨 하랴. 왕은 살펴 헤아리라.」 량필이 떠나려 하며 그 왕과 서로 보는 의례를 정해 달라 비니, 조정 의논이 그 나라와 위아래의 구분이 아직 정해지지 않아 말할 예수(禮數)가 없다 하매 황제가 따랐다. 7년 12월에 조서로 고려왕 식에게 국신사 조량필을 호송해 일본과 통호하되 반드시 닿기를 기약하게 하고, 그대로 홀림실·왕국창·홍다구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닷가까지 호송하게 하며, 국신사가 돌아올 때까지 우선 금주 등지에 주둔하게 하였다. 8년 6월에 일본 통사 조개승 등이 아뢰기를 「고려가 먼 길로 국사를 인도하는데 달리 지름길이 있어 순풍을 만나면 한나절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사신이 가는 것이면 감히 함께 가지 못하나 대군이 나아가 치는 것이면 길잡이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니, 황제가 「그렇다면 마땅히 생각해 보리라」 하였다. 9월에 고려왕 식이 통사 별장 서칭을 보내 량필의 일본 사행을 인도해 보내니, 일본이 비로소 미사시로(彌四郎)라는 자를 보내 입조하매 황제가 잔치로 위로해 보냈다. 9년 2월에 추밀원 신하가 말하였다. 「일본에 봉사한 조량필이 서장관 장탁을 보내와 말하기를, 지난해 9월에 일본국 사람 미사시로 등과 태재부 서쪽 수호소에 이르렀다 합니다.

5미사시로의 입조

守者云,曩爲高麗所紿,屢言上國來伐;豈期皇帝好生惡殺,先遣行人下示璽書,然王京去此尚遠,願先遣人從奉使回報。」良弼乃遣鐸同其使二十六人至京師求見。帝疑其國主使之來,云守護所者詐也。詔翰林承旨和禮霍孫以問姚樞、許衡等,皆對曰:「誠如聖算。彼懼我加兵,故發此輩伺吾強弱耳。宜示之寬仁,且不宜聽其入見。」從之。是月,高麗王禃致書日本。五月,又以書往,令必通好大朝,皆不報。

지키는 자가 말하기를 〈지난날 고려에 속아 상국이 와서 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어찌 황제께서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시어 먼저 행인을 보내 새서를 보이실 줄 알았으랴. 그러나 왕경이 여기서 아직 머니, 먼저 사람을 보내 봉사를 따라 회보하게 하기를 원한다〉 하였다 합니다.」 량필이 이에 탁을 그 사신 스물여섯 사람과 함께 서울에 보내 뵙기를 구하였다. 황제는 그 국주가 시켜 보내 놓고 수호소 사람이라 둘러대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조서로 한림승지 화례곽손에게 요추·허형 등에게 묻게 하니 다 답하였다. 「참으로 성상의 헤아림과 같습니다. 저들이 우리가 군사를 더할까 두려워 이 무리를 보내 우리의 강약을 엿보는 것일 뿐이니, 너그러움과 어짊을 보이시되 입견은 들어주지 마소서.」 따랐다. 이달에 고려왕 식이 일본에 글을 보내고 5월에 또 글을 보내 반드시 대조(大朝)와 통호하라 했으나 다 답이 없었다.

6첫 정벌

十年六月,趙良弼復使日本,至太宰府而還。十一年三月,命鳳州經略使忻都、高麗軍民總管洪茶丘,以千料舟、拔都魯輕疾舟、汲水小舟各三百,共九百艘,載士卒一萬五千,期以七月征日本。冬十月,入其國,敗之。而官軍不整,又矢盡,惟虜掠四境而歸。

10년 6월에 조량필이 다시 일본에 사신 가서 태재부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11년 3월에 봉주경략사 흔도와 고려군민총관 홍다구에게 명해, 천료주·발도로경질주·급수소주 각 삼백 척 합쳐 구백 척에 사졸 만 오천을 싣고 7월을 기약해 일본을 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그 나라에 들어가 깨뜨렸다. 그러나 관군이 정돈되지 않고 또 화살이 다하여, 사방 지경을 노략하고 돌아왔을 뿐이다.

7두세충의 죽음

十二年二月,遣禮部侍郎杜世忠、兵部侍郎何文著、計議官撒都魯丁往。使復致書,亦不報。十四年,日本遣商人持金來易銅錢,許之。十七年二月,日本殺國使杜世忠等。征東元帥忻都、洪茶丘請自率兵往討,廷議姑少緩之。五月,召范文虎,議征日本。八月,詔募征日本士卒。

12년 2월에 예부시랑 두세충과 병부시랑 하문저와 계의관 살도로정을 보내 다시 글을 전했으나 역시 답이 없었다. 14년에 일본이 상인을 보내 금을 가지고 와서 동전으로 바꾸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17년 2월에 일본이 국사 두세충 등을 죽였다. 정동원수 흔도와 홍다구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기를 청했으나 조정 의논이 우선 조금 늦추자 하였다. 5월에 범문호를 불러 일본 정벌을 의논하고, 8월에 조서로 일본 칠 사졸을 모집하였다.

8십만 대군의 출정

十八年正月,命日本行省右丞相阿剌罕、右丞范文虎及忻都、洪茶丘等率十萬人征日本。二月,諸將陛辭。帝敕曰:「始因彼國使來,故朝廷亦遣使往,彼遂留我使不還,故使卿輩爲此行。朕聞漢人言,取人家國,欲得百姓土地,若盡殺百姓,徒得地何用。又有一事,朕實憂之,恐卿輩不和耳。假若彼國人至,與卿輩有所議,當同心協謀,如出一口答之。」五月,日本行省參議裴國佐等言:「本省右丞相阿剌罕、范右丞、李左丞先與忻都、茶丘入朝。時同院官議定,領舟師至高麗金州,與忻都、茶丘軍會,然後入征日本。又爲風水不便,再議定會於一岐島。今年三月,有日本船爲風水漂至者,令其水工畫地圖,因見近太宰府西有平戶島者,周圍皆水,可屯軍船。此島非其所防,若徑往據此島,使人乘船往一岐,呼忻都、茶丘來會進討爲利。」帝曰:「此間不悉彼中事宜,阿剌罕輩必知,令其自處之。

18년 정월에 일본행성 우승상 아랄한과 우승 범문호와 흔도·홍다구 등에게 명해 십만 명을 거느리고 일본을 치게 하였다. 2월에 여러 장수가 하직하니 황제가 칙하였다. 「처음 저 나라 사신이 왔기에 조정도 사신을 보냈는데, 저들이 우리 사신을 붙들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경들에게 이 걸음을 시킨다. 짐이 한인(漢人)의 말을 들으니, 남의 집과 나라를 취함은 백성과 토지를 얻고자 함이니, 백성을 다 죽이면 헛되이 땅만 얻어 무엇에 쓰랴 한다. 또 한 가지 일이 있으니 짐이 실로 근심하는 바라, 경들이 화합하지 못할까 함이다. 가령 저 나라 사람이 이르러 경들과 의논할 일이 있거든 마땅히 한마음으로 함께 꾀하여 한입에서 나온 듯이 답하라.」 5월에 일본행성 참의 배국좌 등이 말하였다. 「본성의 우승상 아랄한과 범 우승과 이 좌승이 먼저 흔도·다구와 입조했을 때, 함께 원의 관원들과 의논해 정하기를,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 금주에 이르러 흔도·다구의 군사와 만난 뒤에 일본을 치러 들어가기로 했고, 또 풍수가 불편하다 하여 다시 일기도(一岐島)에서 만나기로 정했습니다. 올해 3월에 일본 배가 풍랑에 떠밀려 온 것이 있어 그 뱃사공에게 지도를 그리게 했더니, 태재부 서쪽 가까이에 히라도섬(平戶島)이 있어 둘레가 다 물이라 군선을 주둔시킬 만합니다. 이 섬은 저들이 막는 곳이 아니니, 곧장 가서 이 섬을 차지하고 사람을 시켜 배로 일기에 가서 흔도·다구를 불러 모여 나아가 치는 것이 이롭습니다.」 황제가 「여기서는 저쪽 사정을 다 알지 못한다. 아랄한들이 반드시 알 터이니 스스로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9돌아온 자는 세 사람

」六月,阿剌罕以病不能行,命阿塔海代總軍事。八月,諸將未見敵,喪全師以還,乃言:「至日本,欲攻太宰府,暴風破舟,猶欲議戰,萬戶厲德彪、招討王國佐、水手總管陸文政等不聽節制,輒逃去。本省載餘軍至合浦,散遣還鄉里。」未幾,敗卒于閶脫歸,言:「官軍六月入海,七月至平壺島,移五龍山。八月一日,風破舟。五日,文虎等諸將各自擇堅好船乘之,棄士卒十餘萬于山下。衆議推張百戶者爲主帥,號之曰張總管,聽其約束。方伐木作舟欲還,七日,日本人來戰,盡死。餘二三萬爲其虜去。九日,至八角島,盡殺蒙古、高麗、漢人,謂新附軍爲唐人,不殺而奴之。閶輩是也。」蓋行省官議事不相下,故皆棄軍歸。久之,莫青與吳萬五者亦逃還,十萬之衆得還者三人耳。

6월에 아랄한이 병으로 가지 못하니 아탑해에게 명해 군사(軍事)를 대신 총괄하게 하였다. 8월에 여러 장수가 적을 보지도 못하고 전군을 잃고 돌아와 말하였다. 「일본에 이르러 태재부를 치려는데 사나운 바람이 배를 부수었습니다. 그래도 싸움을 의논하려 했으나 만호 여덕표와 초토 왕국좌와 수수총관 육문정 등이 절제를 듣지 않고 문득 도망갔습니다. 본성이 남은 군사를 싣고 합포에 이르러 흩어 고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얼마 안 되어 패한 군졸 우창이 빠져나와 돌아와 말하였다. 「관군이 유월에 바다에 들어 칠월에 평호도에 이르러 오룡산으로 옮겼습니다. 팔월 초하루에 바람이 배를 부수었습니다. 초닷새에 문호 등 여러 장수가 저마다 튼튼하고 좋은 배를 골라 타고 사졸 십여만을 산 아래 버렸습니다. 무리가 의논해 장백호라는 이를 주수(主帥)로 밀어 장총관이라 부르며 그 지휘를 들었습니다. 바야흐로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돌아오려는데, 초이레에 일본 사람이 와서 싸워 다 죽고 남은 이삼만은 사로잡혀 갔습니다. 초아흐레에 팔각도에 이르러 몽골·고려·한인은 다 죽이고, 신부군(新附軍)은 당인(唐人)이라 하여 죽이지 않고 종으로 삼았으니 창의 무리가 그들입니다.」 대개 행성 관원들이 일을 의논하며 서로 굽히지 않았으므로 다 군사를 버리고 돌아온 것이다. 한참 뒤에 막청과 오만오라는 자도 도망해 돌아오니, 십만의 무리 가운데 돌아온 자는 세 사람뿐이었다.

10그만두게 된 정벌

二十年,命阿塔海爲日本省丞相,與徹里帖木兒右丞、劉二拔都兒左丞,募兵造舟,欲復征日本。淮西宣慰使昂吉兒上言民勞,乞寢兵。二十一年,又以其俗尚佛,遣王積翁與補陀僧如智往使。舟中有不願行者,共謀殺積翁,不果至。二十三年,帝曰:「日本未嘗相侵,今交趾犯邊,宜置日本,專事交趾。」成宗大德二年,江浙省平章政事也速答兒乞用兵日本。帝曰:「今非其時,朕徐思之。」三年,遣僧寧一山者,加妙慈弘濟大師,附商舶往使日本,而日本人竟不至。

20년에 아탑해를 일본행성 승상으로 명하고 철리첩목아 우승, 유이발도아 좌승과 함께 군사를 모집하고 배를 지어 다시 일본을 치려 하였다. 회서선위사 앙길아가 백성이 지쳤다고 아뢰어 군사를 그치기를 비니 그만두었다. 21년에 또 그 풍속이 불교를 숭상한다 하여 왕적옹을 보타산 승려 여지와 함께 사신 보냈는데, 배 안에 가기를 원치 않는 자들이 있어 함께 적옹을 죽이기를 꾀하니 끝내 이르지 못했다. 23년에 황제가 「일본은 일찍이 침범해 온 적이 없다. 이제 교지가 변경을 범하니 마땅히 일본을 놓아두고 교지 일에 오로지하라」 하였다. 성종 대덕 이년에 강절성 평장정사 야속답아가 일본에 용병하기를 비니, 황제가 「지금은 그때가 아니다. 짐이 천천히 생각하마」 하였다. 3년에 승려 영일산(一山一寧)에게 묘자홍제대사를 더해 장삿배에 딸려 일본에 사신 보냈으나, 일본 사람은 끝내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