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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조 — 몸가짐과 말씨風操

안씨가훈 顏氏家訓 · 안지추(顏之推) · 6세기 말 · 단락 40 · 한자 4,047자 · 낭독 16.2분

「안씨가훈」 한 권 「풍조 — 몸가짐과 말씨」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남북조 말의 학자 안지추가 자손에게 남긴 스무 편의 가훈. 양나라에서 나서 서위·북제·북주·수 네 나라를 떠돌며 살아남은 사람이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자손을 일깨우려고」 쓴 글이라, 아이 가르치기·형제·재혼·집안 살림·몸가짐과 말씨·배움·문장·이름과 실상·족함을 아는 것에서 글자와 책의 고증, 말소리, 글씨·그림·활·점·거문고·바둑 같은 여러 재주, 그리고 제 장례를 어떻게 치르라는 유언까지 이른다. 「수레에서 안 떨어지면 저작랑」이라던 양나라 귀족 자제가 난리 뒤 밭 갈고 말 기르게 된 것을 보고 「몸에 지닌 작은 재주가 재물 천만보다 낫다」고 한 대목, 「어려서 배우는 이는 해 뜰 때의 빛 같고 늙어서 배우는 이는 촛불을 들고 밤길을 가는 것 같다」는 대목이 여기서 나왔다. 뒷날의 가훈이 모두 이 책을 조상으로 삼는다.

1사대부의 풍조 — 쑥이 삼밭에서 자라듯

吾觀禮經,聖人之教:箕帚匕箸,咳唾唯諾,執燭沃盥,皆有節文,亦爲至矣。但旣殘缺,非復全書;其有所不載,及世事變改者,學達君子,自爲節度,相承行之,故世號士大夫風操。而家門頗有不同,所見互稱長短;然其阡陌,亦自可知。昔在江南,目能視而見之,耳能聽而聞之;蓬生麻中,不勞翰墨。汝曹生於戎馬之閑,視聽之所不曉,故聊記錄,以傳示子孫。

내가 『예경』을 보니 성인의 가르침은 키와 비, 숟가락과 젓가락, 기침과 침, 대답하는 말, 촛불을 잡고 세숫물을 붓는 일에까지 다 절차와 격식이 있어 지극하다 하겠다. 다만 이미 빠지고 떨어져 온전한 책이 아니다. 거기 실리지 않은 것과 세상일이 바뀐 것은 배움이 통달한 군자들이 스스로 절도를 세워 서로 이어 행하니, 그래서 세상에서 사대부의 풍조라 부른다. 그러나 집안마다 자못 다름이 있어 보는 바에 따라 서로 장단을 말하지만 그 큰길은 절로 알 수 있다. 옛날 강남에 있을 때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으니 쑥이 삼밭에서 자라듯 붓과 먹을 수고롭게 할 것이 없었다. 너희는 전쟁 통에 태어나 보고 들어 깨칠 것이 없으므로 대강 적어 자손에게 전해 보이려 한다.

2「엄한(嚴寒)」이라는 글자만 보아도 운 사람 — 휘를 피하는 정도

禮曰:「見似目瞿,聞名心瞿。」有所感觸,惻愴心眼;若在從容平常之地,幸須申其情耳。必不可避,亦當忍之;猶如伯叔兄弟,酷類先人,可得終身腸斷,與之絶耶?又:「臨文不諱,廟中不諱,君所無私諱。」益知聞名,須有消息,不必期於顛沛而走也。梁世謝舉,甚有聲譽,聞諱必哭,爲世所譏。又有臧逢世,臧嚴之子也,篤學修行,不墜門風;孝元經牧江州,遣往建昌督事,郡縣民庶,競修箋書,朝夕輻輳,幾案盈積,書有稱「嚴寒」者,必對之流涕,不省取記,多廢公事,物情怨駭,竟以不辦而還。此幷過事也。

『예기』에 「닮은 이를 보면 눈이 놀라고 이름을 들으면 마음이 놀란다」 하였다. 느끼는 바가 있어 마음과 눈이 슬퍼지는 것은, 조용하고 평상시라면 그 정을 펴야 마땅하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자리라면 또한 참아야 한다. 백부나 숙부, 형제가 선인과 몹시 닮았다고 하여 평생 창자를 끊으며 그들과 인연을 끊겠는가. 또 「글을 지을 때는 휘하지 않고, 사당 안에서는 휘하지 않으며, 임금 앞에서는 사사로운 휘가 없다」 하였으니, 이름을 듣는 데도 형편을 살펴야 하고 반드시 엎어질 듯 달아나기를 바랄 것은 아님을 더욱 알겠다. 양나라 사거는 명성이 자자하였으나 휘를 들으면 반드시 곡하여 세상의 비웃음을 샀다. 또 장봉세는 장엄의 아들로 배움이 독실하고 행실을 닦아 가풍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효원제가 강주를 다스릴 때 그를 건창에 보내 일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군현의 백성이 다투어 편지를 올려 아침저녁으로 몰려들어 책상에 가득 쌓였다. 편지에 「엄한(嚴寒)」이라 적힌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것을 대하고 눈물을 흘리며 살펴 처리하지 않아 공무를 많이 폐하니, 사람들이 원망하고 놀라 끝내 일을 못 하고 돌아왔다. 이것은 다 지나친 일이다.

3성을 빼고 이름만 적은 편지

近在揚都,有一士人諱審,而與沈氏交結周厚,沈與其書,名而不姓,此非人情也。

근래 양도(揚都)에 심(審)을 휘하는 선비 하나가 있어 심(沈)씨와 두텁게 사귀었는데, 심씨가 그에게 편지를 보내며 이름만 쓰고 성을 쓰지 않았다. 이것은 인정이 아니다.

4휘를 피할 때는 같은 뜻의 말로

凡避諱者,皆須得其同訓以代換之:桓公名白,博有五皓之稱;厲王名長,琴有修短之目。不聞謂布帛爲布皓,呼腎腸爲腎修也。梁武小名阿練,子孫皆呼練爲絹;乃謂銷煉物爲銷絹物,恐乖其義。或有諱云者,呼紛紜爲紛煙;有諱桐者,呼梧桐樹爲白鐵樹,便似戲笑耳。

휘를 피할 때는 다 같은 뜻의 글자를 얻어 바꾸어야 한다. 환공의 이름이 백(白)이라 바둑판에 오호(五皓)라는 이름이 있고, 여왕의 이름이 장(長)이라 거문고에 수단(修短)이라는 이름이 있다. 그러나 포백(布帛)을 포호(布皓)라 하고 신장(腎腸)을 신수(腎修)라 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양 무제의 아명이 아련(阿練)이라 자손이 모두 련(練)을 견(絹)이라 불렀는데, 그래서 쇠를 녹여 단련하는 것을 소견(銷絹)이라 하니 뜻에 어긋날까 두렵다. 운(云)을 휘하는 이는 분운(紛紜)을 분연(紛煙)이라 하고, 동(桐)을 휘하는 이는 오동나무를 백철수(白鐵樹)라 하니, 곧 장난과 같을 뿐이다.

5아이 이름을 나귀 새끼·돼지 새끼라 짓는 북쪽 풍속

周公名子曰禽,孔子名兒曰鯉,止在其身,自可無禁。至若衛侯、魏公子、楚太子,皆名蟣蝨;長卿名犬子,王修名狗子,上有連及,理未爲通,古之所行,今之所笑也。北土多有名兒爲驢駒、豚子者,使其自稱及兄弟所名,亦何忍哉?前漢有尹翁歸,後漢有鄭翁歸,梁家亦有孔翁歸,又有顧翁寵;晉代有許思妣、孟少孤:如此名字,幸當避之。

주공은 아들 이름을 금(禽)이라 하고 공자는 아들 이름을 리(鯉)라 하였으니, 그 몸에 그칠 뿐이라 절로 꺼릴 것이 없었다. 위후·위공자·초태자가 다 기슬(蟣蝨)이라 이름하고, 장경이 견자(犬子), 왕수가 구자(狗子)라 이름한 것은 위로 이어 미치는 바가 있어 이치로 통하지 않으니, 옛날에는 행하였으나 지금은 비웃음거리다. 북쪽 땅에는 아이 이름을 나귀 새끼·돼지 새끼라 짓는 이가 많은데, 제 스스로 부르거나 형제가 부르게 하기를 어찌 차마 하는가. 전한에 윤옹귀, 후한에 정옹귀가 있고 양나라에도 공옹귀와 고옹총이 있으며 진나라에 허사비(許思妣)·맹소고(孟少孤)가 있으니, 이런 이름은 마땅히 피해야 한다.

6자식 이름을 지을 때는 손자를 생각하라

今人避諱,更急於古。凡名子者,當爲孫地。吾親識中有諱襄、諱友、諱同、諱清、諱和、諱禹,交疏造次,一座百犯,聞者辛苦,無憀賴焉。

요즘 사람의 휘 피하기는 옛날보다 더 급하다. 자식의 이름을 짓는 이는 마땅히 손자를 위한 자리를 남겨야 한다. 내 친지 가운데 양(襄)·우(友)·동(同)·청(清)·화(和)·우(禹)를 휘하는 이가 있어, 사귐이 성글고 급한 자리에서는 한자리에서 백 번을 범하여 듣는 이가 괴롭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7옛사람의 성까지 이름으로 삼는 것은 천한 일

昔司馬長卿慕藺相如,故名相如,顧元嘆慕蔡邕,故名雍,而後漢有朱倀字孫卿,許暹字顔回,梁世有庾晏嬰、祖孫登,連古人姓爲名字,亦鄙事也。

옛날 사마장경은 인상여를 사모하여 이름을 상여라 하였고, 고원탄은 채옹을 사모하여 이름을 옹이라 하였다. 그런데 후한에 주창(朱倀)의 자가 손경(孫卿), 허섬(許暹)의 자가 안회(顔回)였고, 양나라에 유안영(庾晏嬰)·조손등(祖孫登)이 있으니, 옛사람의 성까지 이어 이름과 자로 삼는 것은 천한 일이다.

8종을 짐승이라 부르지 못한 유문요

昔劉文饒不忍駡奴爲畜産,今世愚人遂以相戲,或有指名爲豚犢者:有識傍觀,猶欲掩耳,況當之者乎?

옛날 유문요는 차마 종을 짐승이라 꾸짖지 못하였다. 요즘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마침내 그것으로 서로 놀리며 더러 이름을 가리켜 돼지 새끼·송아지라 하는 이도 있다. 식견 있는 이는 곁에서 보고도 오히려 귀를 막고 싶은데, 하물며 당하는 이는 어떻겠는가.

9「명공은 틀림없이 도주공의 맏아들」 — 농담으로 오간 말

近在議曹,共平章百官秩祿,有一顯貴,當世名臣,意嫌所議過厚。齊朝有一兩士族文學之人,謂此貴曰:「今日天下大同,須爲百代典式,豈得尙作關中舊意?明公定是陶朱公大兒耳!」彼此歡笑,不以爲嫌。

근래 의조(議曹)에서 함께 백관의 녹봉을 논의할 때 한 현귀한 이가 당세의 명신인데 논의된 것이 너무 후하다고 꺼렸다. 제나라 조정의 사족 문학 하는 한두 사람이 이 귀인에게 말하였다. 「오늘 천하가 크게 하나 되었으니 백대의 법식을 삼아야 하거늘 어찌 아직도 관중의 옛 생각을 하십니까. 명공은 틀림없이 도주공의 맏아들이십니다.」 서로 웃고 즐기며 꺼리지 않았다.

10「가공·가부·가모」 — 집안 어른을 이르는 말

昔侯霸之子孫,稱其祖父曰家公;陳思王稱其父爲家父,母爲家母;潘尼稱其祖曰家祖:古人之所行,今人之所笑也。今南北風俗,言其祖及二親,無云家者;田裏猥人,方有此言耳。凡與人言,言己世父,以次第稱之,不云家者,以尊於父,不敢家也。凡言姑姊妹女子子:已嫁,則以夫氏稱之;在室,則以次第稱之。言禮成他族,不得云家也。子孫不得稱家者,輕略之也。蔡邕書集,呼其姑姊爲家姑家姊;班固書集,亦云家孫:今幷不行也。

옛날 후패의 자손은 그 조부를 가공(家公)이라 하였고, 진사왕은 그 아버지를 가부(家父), 어머니를 가모(家母)라 하였으며, 반니는 그 조부를 가조(家祖)라 하였다. 옛사람이 행한 것을 지금 사람은 비웃는다. 요즘 남북의 풍속은 조부와 부모를 말할 때 가(家)를 붙이는 이가 없고, 시골의 상스러운 사람이나 이런 말을 쓸 뿐이다. 남과 말할 때 제 백부를 말하면 차례로 일컫고 가(家)를 붙이지 않는 것은 아버지보다 높으므로 감히 가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모·손위 누이·손아래 누이·딸을 말할 때 이미 시집갔으면 남편의 성으로 일컫고 아직 집에 있으면 차례로 일컫는다. 예를 갖추어 남의 집안을 이루었으니 가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손을 가라 일컫지 못하는 것은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다. 채옹의 서집에는 그 고모와 누이를 가고(家姑)·가자(家姊)라 하였고 반고의 서집에도 가손(家孫)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다 쓰지 않는다.

11남의 어른에게는 존(尊), 손아래에는 현(賢)

凡與人言,稱彼祖父母、世父母、父母及長姑,皆加尊字,自叔父母已下,則加賢字,尊卑之差也。王羲之書,稱彼之母與自稱己母同,不云尊字,今所非也。

남과 말할 때 상대의 조부모·백부모·부모·손위 고모를 일컬으면 다 존(尊) 자를 붙이고, 숙부모 이하는 현(賢) 자를 붙이니 높낮이의 차이다. 왕희지의 편지는 상대의 어머니를 일컬을 때 제 어머니를 일컫는 것과 같이 하고 존 자를 붙이지 않았으니 지금은 그르다 하는 바다.

12남쪽과 북쪽의 조문과 손님 맞이

南人冬至歲首,不詣喪家;若不修書,則過節束帶以申慰。北人至歲之日,重行弔禮;禮無明文,則吾不取。南人賓至不迎,相見捧手而不揖,送客下席而已;北人迎送幷至門,相見則揖,皆古之道也,吾善其迎揖。

남쪽 사람은 동지와 설날에 상가에 가지 않고, 편지를 못 하면 명절이 지난 뒤 띠를 매고 가서 위로한다. 북쪽 사람은 동지와 설날에 조문의 예를 무겁게 행하는데, 예에 밝은 글이 없으니 나는 취하지 않는다. 남쪽 사람은 손님이 와도 마중하지 않고 만나면 두 손을 모을 뿐 읍하지 않으며 손님을 보낼 때는 자리에서 내려설 뿐이다. 북쪽 사람은 맞고 보낼 때 다 문까지 가고 만나면 읍하니 다 옛 도리다. 나는 그 맞이하고 읍하는 것을 좋게 여긴다.

13이름으로 자칭하는 것은 옛 풍속

昔者,王侯自稱孤、寡、不谷,自茲以降,雖孔子聖師,與門人言皆稱名也。後雖有臣僕之稱,行者蓋亦寡焉。江南輕重,各有謂號,具諸書儀;北人多稱名者,乃古之遺風,吾善其稱名焉。

옛날 왕후는 스스로를 고(孤)·과(寡)·불곡(不穀)이라 하였고, 그 아래로는 공자 같은 성스러운 스승도 문인과 말할 때 다 이름으로 일컬었다. 뒤에 신(臣)·복(僕)이라는 칭호가 있었으나 행하는 이가 또한 드물었다. 강남은 높고 낮음에 각기 부르는 이름이 있어 여러 서의(書儀)에 갖추어져 있다. 북쪽 사람은 이름으로 일컫는 이가 많은데 곧 옛 풍속이 남은 것이니 나는 그 이름으로 일컫는 것을 좋게 여긴다.

14돌아가신 어른을 말할 때

言及先人,理當感慕,古者之所易,今人之所難。江南人事不獲已,須言閥閲,必以文翰,罕有面論者。北人無何便爾話説,及相訪問。如此之事,不可加於人也。人加諸己,則當避之。名位未高,如爲勛貴所逼,隱忍方便,速報取了;勿使煩重,感辱祖父。若沒,言須及者,則斂容肅坐,稱大門中,世父、叔父則稱從兄弟門中,兄弟則稱亡者子某門中,各以其尊卑輕重爲容色之節,皆變於常。若與君言,雖變於色,猶云亡祖亡伯亡叔也。吾見名士,亦有呼其亡兄弟爲兄子弟子門中者,亦未爲安貼也。北土風俗,都不行此。太山羊侃,梁初入南;吾近至鄴,其兄子肅訪侃委曲,吾答之云:「卿從門中在梁,如此如此。」肅曰:「是我親第七亡叔,非從也。」祖孝徵在坐,先知江南風俗,乃謂之云:「賢從弟門中,何故不解?」

선인을 말하는 데 이르면 마땅히 그리워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하니, 옛사람에게는 쉬웠던 것이 지금 사람에게는 어렵다. 강남 사람은 부득이 문벌을 말해야 하면 반드시 글로 하고 얼굴을 맞대고 논하는 이는 드물다. 북쪽 사람은 아무 때나 곧 이야기하고 서로 묻는다. 이런 일은 남에게 더해서는 안 되며, 남이 내게 더하면 마땅히 피해야 한다. 이름과 지위가 높지 않아 훈귀에게 핍박당하거든 참고 방편을 써서 빨리 답하여 끝내되, 번거롭게 거듭하여 조부를 욕되게 하지 마라. 이미 돌아가셨는데 말이 미쳐야 하면 낯빛을 거두고 엄숙히 앉아 대문중(大門中)이라 일컫고, 백부·숙부는 종형제 문중이라 일컬으며, 형제는 죽은 이의 아들 아무개 문중이라 일컬어, 각기 그 높낮이와 경중으로 낯빛의 절도를 삼되 다 평상시와 달리한다. 임금과 말할 때는 낯빛은 바꾸더라도 오히려 망조(亡祖)·망백(亡伯)·망숙(亡叔)이라 한다. 내가 보니 명사 가운데도 죽은 형제를 형의 아들·아우의 아들 문중이라 부르는 이가 있으나 역시 편안하지 않다. 북쪽 땅 풍속은 이것을 전혀 행하지 않는다. 태산의 양간은 양나라 초에 남으로 들어갔다. 내가 근래 업에 이르렀을 때 그 형의 아들 양숙이 양간의 소식을 자세히 물었다. 내가 답하기를 「그대의 종문중(從門中)이 양나라에 계실 때 이러이러하였소」 하니 양숙이 「그분은 내 친 일곱째 돌아가신 숙부이지 종숙이 아닙니다」 하였다. 조효징이 자리에 있다가 강남 풍속을 먼저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현종제문중(賢從弟門中)이 어찌 이해를 못 하시오」 하였다.

15백숙·형자·질 — 친척을 부르는 말

古人皆呼伯父叔父,而今世多單呼伯叔。從父兄弟姊妹已孤,而對其前,呼其母爲伯叔母,此不可避者也。兄弟之子已孤,與他人言,對孤者前,呼爲兄子弟子,頗爲不忍;北土人多呼爲姪。案:爾雅、喪服經、左傳,姪雖名通男女,幷是對姑之稱。晉世已來,始呼叔姪;今呼爲姪,於理爲勝也。

옛사람은 다 백부·숙부라 불렀는데 지금 세상은 흔히 백·숙이라고만 부른다. 종형제자매가 이미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 그 앞에서 그 어머니를 백숙모라 부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형제의 아들이 아버지를 여의었을 때 남과 말하며 그 앞에서 형의 아들·아우의 아들이라 부르는 것은 자못 차마 못 할 일이다. 북쪽 사람은 흔히 질(姪)이라 부른다. 살펴보니 『이아』·『의례 상복』·『좌전』에서 질은 남녀에 두루 쓰는 이름이지만 다 고모에 대한 호칭이다. 진나라 이래로 비로소 숙질이라 불렀으니, 지금 질이라 부르는 것이 이치에 낫다.

16헤어질 때 우는 강남, 웃으며 헤어지는 북쪽

別易會難,古人所重;江南餞送,下泣言離。有王子侯,梁武帝弟,出爲東郡,與武帝別,帝曰:「我年已老,與汝分張,甚以惻愴。」數行淚下。侯遂密云,赧然而出。坐此被責,飄颻舟渚,一百許日,卒不得去。北間風俗,不屑此事,歧路言離,歡笑分首。然人性自有少涕淚者,腸雖欲絶,目猶爛然;如此之人,不可強責。

헤어지기는 쉽고 만나기는 어려움을 옛사람이 무겁게 여겼으니, 강남에서는 전송할 때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말한다. 양 무제의 아우인 어떤 왕자후가 동쪽 군으로 나가며 무제와 작별할 때 무제가 「나는 이미 늙었는데 너와 헤어지니 몹시 서글프다」 하고 눈물을 몇 줄 흘렸다. 왕자후는 마침내 눈물 없이 낯을 붉히며 나갔다. 이 일로 꾸지람을 받아 배로 물가를 떠돌며 백여 일이 되도록 끝내 떠나지 못하였다. 북쪽 풍속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갈림길에서 이별을 말하며 웃으며 헤어진다. 그러나 사람의 성품에는 본디 눈물이 적은 이가 있어 창자는 끊어질 듯하여도 눈은 오히려 말갛다. 이런 사람은 억지로 꾸짖어서는 안 된다.

17외조부모를 가공·가모라 부르는 하북

凡親屬名稱,皆須粉墨,不可濫也。無風教者,其父已孤,呼外祖父母與祖父母同,使人爲其不喜聞也。雖質於面,皆當加外以別之;父母之世叔父,皆當加其次第以別之;父母之世叔母,皆當加其姓以別之;父母之群從世叔父母及從祖父母,皆當加其爵位若姓以別之。河北士人,皆呼外祖父母爲家公家母;江南田里間亦言之。以家代外,非吾所識。

친족의 호칭은 다 분명히 가려야지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가르침이 없는 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외조부모를 조부모와 똑같이 불러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게 한다. 얼굴을 마주하고 묻더라도 다 외(外)를 붙여 구별해야 하고, 부모의 백숙부는 다 차례를 붙여 구별하며, 부모의 백숙모는 다 성을 붙여 구별하고, 부모의 여러 종백숙부모와 종조부모는 다 벼슬이나 성을 붙여 구별해야 한다. 하북의 사인들은 다 외조부모를 가공·가모라 부르고 강남의 시골에서도 그렇게 말하지만, 가로써 외를 대신하는 것은 내가 아는 바가 아니다.

18「골육이 성글어지기 쉬워 차마 족이라 하지 못합니다」

凡宗親世數,有從父,有從祖,有族祖。江南風俗,自茲已往,高秩者,通呼爲尊,同昭穆者,雖百世猶稱兄弟;若對他人稱之,皆云族人。河北士人,雖三二十世,猶呼爲從伯從叔。梁武帝嘗問一中土人曰:「卿北人,何故不知有族?」答云:「骨肉易疏,不忍言族耳。」當時雖爲敏對,於禮未通。

종친의 세수(世數)에는 종부·종조·족조가 있다. 강남 풍속은 그 위로는 지위 높은 이를 두루 존(尊)이라 부르고, 소목(昭穆)이 같으면 백 대가 지나도 형제라 일컬으며, 남에게 일컬을 때는 다 족인(族人)이라 한다. 하북의 사인은 이삼십 대가 지나도 오히려 종백·종숙이라 부른다. 양 무제가 일찍이 중원 사람 하나에게 「그대는 북쪽 사람인데 어찌 족이 있는 줄 모르는가」 하니 「골육이 성글어지기 쉬워 차마 족이라 말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였다. 당시에는 재치 있는 대답이었으나 예에는 통하지 않는다.

19부인에게 장인이라는 호칭을 쓰는가

吾嘗問周弘讓曰:「父母中外姊妹,何以稱之?」周曰:「亦呼爲丈人。」自古未見丈人之稱施於婦人也。吾親表所行,若父屬者,爲某姓姑;母屬者,爲某姓姨。中外丈人之婦,猥俗呼爲丈母,士大夫謂之王母、謝母云。而陸機集有與長沙顧母書,乃其從叔母也,今所不行。

내가 일찍이 주홍양에게 「부모의 내외 자매는 무엇이라 부릅니까」 물으니 주가 「역시 장인(丈人)이라 부릅니다」 하였다. 예부터 장인이라는 호칭을 부인에게 쓴 것은 보지 못하였다. 우리 친척이 행하는 바로는 아버지 쪽이면 아무 성 고모라 하고 어머니 쪽이면 아무 성 이모라 한다. 내외 장인의 부인을 속되게는 장모라 부르고 사대부는 왕모(王母)·사모(謝母)라 한다. 육기의 문집에 장사 고모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곧 그의 종숙모이니 지금은 행하지 않는 바다.

20조복야를 조공이라 부른 제나라 선비들

齊朝士子,皆呼祖僕射爲祖公,全不嫌有所涉也,乃有對面以相戲者。

제나라 조정의 선비들은 다 조복야를 조공(祖公)이라 불러 조상을 일컫는 말과 겹치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았고, 심지어 얼굴을 맞대고 서로 놀리는 이도 있었다.

21이름은 휘하고 자는 부른다

古者,名以正體,字以表德,名終則諱之,字乃可以爲孫氏。孔子弟子記事者,皆稱仲尼;呂后微時,嘗字高祖爲季;至漢爰種,字其叔父曰絲;王丹與侯霸子語,字霸爲君房;江南至今不諱字也。河北士人全不辨之,名亦呼爲字,字固呼爲字。尙書王元景兄弟,皆號名人,其父名雲,字羅漢,一皆諱之,其餘不足怪也。

옛날에는 이름으로 몸을 바로 하고 자로 덕을 드러내어, 이름은 죽은 뒤에 휘하고 자는 손자의 씨로 삼을 수 있었다. 공자의 제자로 일을 기록한 이들은 다 중니라 일컬었고, 여후는 미천하던 때 고조를 자로 불러 계(季)라 하였으며, 한나라 원종은 그 숙부를 자로 불러 사(絲)라 하였고, 왕단은 후패의 아들과 말하며 후패를 자로 불러 군방(君房)이라 하였다. 강남은 지금까지 자를 휘하지 않는다. 하북의 사인은 전혀 가리지 못하여 이름도 자라 부르고 자는 물론 자라 부른다. 상서 왕원경 형제는 다 이름난 사람인데 그 아버지의 이름이 운(雲)이요 자가 나한(羅漢)인데 둘 다 휘하니, 그 나머지야 이상할 것도 없다.

22곡에도 말이 있다

禮閑傳云:「斬縗之哭,若往而不反;齊縗之哭,若往而反;大功之哭,三曲而偯;小功緦麻,哀容可也,此哀之發於聲音也。」孝經云:「哭不偯。」皆論哭有輕重質文之聲也。禮以哭有言者爲號;然則哭亦有辭也。江南喪哭,時有哀訴之言耳;山東重喪,則唯呼蒼天,期功以下,則唯呼痛深,便是號而不哭。

『예기』 간전에 「참최의 곡은 가서 돌아오지 않는 듯하고, 자최의 곡은 갔다가 돌아오는 듯하며, 대공의 곡은 세 번 꺾여 여운이 있고, 소공과 시마는 슬픈 낯빛이면 된다. 이것이 슬픔이 소리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였다. 『효경』에 「곡에 여운을 두지 않는다」 하였다. 다 곡에 가볍고 무겁고 질박하고 꾸밈이 있는 소리가 있음을 논한 것이다. 예에서는 곡에 말이 있는 것을 호(號)라 하니 그렇다면 곡에도 말이 있다. 강남의 상곡은 때때로 슬피 하소연하는 말이 있을 뿐이다. 산동은 중상(重喪)이면 오직 「창천」이라 부르짖고 기년·대공 이하면 오직 「통심」이라 부르짖으니, 곧 호이지 곡이 아니다.

23사흘 안에 조문하지 않으면 끊는다

江南凡遭重喪,若相知者,同在城邑,三日不弔則絶之;除喪,雖相遇則避之,怨其不己憫也。有故及道遙者,致書可也;無書亦如之。北俗則不爾。江南凡弔者,主人之外,不識者不執手;識輕服而不識主人,則不於會所而弔,他日修名詣其家。

강남에서는 중상을 당하면 서로 아는 이가 같은 성읍에 있으면서 사흘 안에 조문하지 않으면 끊고, 상을 벗은 뒤에도 마주치면 피하니 제 슬픔을 딱하게 여기지 않은 것을 원망하는 것이다. 사정이 있거나 길이 멀면 편지를 보내도 되고, 편지가 없어도 같이 여긴다. 북쪽 풍속은 그렇지 않다. 강남에서는 조문할 때 주인 말고 모르는 이와는 손을 잡지 않고, 가벼운 상복을 입은 이는 알되 주인을 모르면 모인 자리에서 조문하지 않고 다른 날 이름을 적어 그 집에 간다.

24진일에는 곡하지 않는다는 말

陰陽説云:「辰爲水墓,又爲土墓,故不得哭。」王充論衡云:「辰日不哭,哭則重喪。」今無教者,辰日有喪,不問輕重,舉家清謐,不敢發聲,以辭弔客。道書又曰:「晦歌朔哭,皆當有罪,天奪其算。」喪家朔望,哀感彌深,寧當惜壽,又不哭也?亦不諭。

음양설에 「진(辰)은 물의 무덤이요 또 흙의 무덤이니 곡해서는 안 된다」 하고, 왕충의 『논형』에 「진일에는 곡하지 않으니 곡하면 상이 겹친다」 하였다. 지금 가르침 없는 이들은 진일에 상이 나면 경중을 묻지 않고 온 집안이 고요히 감히 소리를 내지 않으며 조문객을 사절한다. 도서(道書)에 또 「그믐에 노래하고 초하루에 곡하면 다 죄가 있어 하늘이 그 수명을 빼앗는다」 하였다. 상가는 초하루와 보름에 슬픔이 더욱 깊은데, 어찌 수명을 아껴 또 곡하지 않겠는가. 역시 깨우치지 못한 것이다.

25죽은 이의 귀살(歸殺)을 피해 달아나는 자손

偏傍之書,死有歸殺。子孫逃竄,莫肯在家;畫瓦書符,作諸厭勝;喪出之日,門前然火,戶外列灰,祓送家鬼,章斷注連:凡如此比,不近有情,乃儒雅之罪人,彈議所當加也。

방술의 책에 죽은 이는 귀살(歸殺)이 있다고 한다. 자손이 달아나 숨어 아무도 집에 있으려 하지 않고, 기와에 그리고 부적을 써서 온갖 압승(厭勝)을 만들며, 상여 나가는 날 문 앞에 불을 피우고 문밖에 재를 늘어놓아 집의 귀신을 씻어 보내고 부적으로 주련(注連)을 끊는다. 이런 따위는 다 인정에 가깝지 않으니 곧 유아(儒雅)의 죄인이라 탄핵이 마땅히 더해질 바다.

26명절에 절할 때 우는 것은 인정

己孤,而履歲及長至之節,無父,拜母、祖父母、世叔父母、姑、兄、姊,則皆泣;無母,拜父、外祖父母、舅、姨、兄、姊,亦如之:此人情也。

아버지를 여읜 이가 설과 동지를 맞아 아버지 없이 어머니·조부모·백숙부모·고모·형·누이에게 절하면 다 울고, 어머니 없이 아버지·외조부모·외숙·이모·형·누이에게 절해도 그러하니, 이것이 인정이다.

27「배지례는 죽지 않았다」

江左朝臣,子孫初釋服,朝見二宮,皆當泣涕;二宮爲之改容。頗有膚色充澤,無哀感者,梁武薄其爲人,多被抑退。裴政出服,問訊武帝,貶瘦枯槁,涕泗滂沱,武帝目送之曰:「裴之禮不死也。」

강좌의 조신은 자손이 처음 상복을 벗고 두 궁을 뵈면 다 눈물을 흘려야 하고 두 궁도 그를 위해 낯빛을 고친다. 살빛이 윤택하고 슬퍼하는 기색이 없는 이가 더러 있으면 양 무제는 그 사람됨을 얕잡아 흔히 눌러 물리쳤다. 배정이 상복을 벗고 무제에게 문안할 때 여위고 초췌하며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흐르니 무제가 눈으로 배웅하며 「배지례는 죽지 않았구나」 하였다.

28부모가 쓰던 방, 부모가 죽은 까닭이 된 것

二親旣沒,所居齋寢,子與婦弗忍入焉。北朝頓丘李構,母劉氏,夫人亡後,所住之堂,終身鎖閉,弗忍開入也。夫人,宋廣州刺史纂之孫女,故構猶染江南風教。其父奬,爲揚州刺史,鎮壽春,遇害。構嘗與王松年、祖孝徵數人同集談燕。孝徵善畫,遇有紙筆,圖寫爲人。頃之,因割鹿尾,戲截畫人以示構,而無他意。構愴然動色,便起就馬而去。舉坐驚駭,莫測其情。祖君尋悟,方深反側,當時罕有能感此者。吳郡陸襄,父閑被刑,襄終身布衣蔬飯,雖薑菜有切割,皆不忍食;居家惟以掐摘供廚。江寧姚子篤,母以燒死,終身不忍噉炙。豫章熊康父以醉而爲奴所殺,終身不復嘗酒。然禮緣人情,恩由義斷,親以噎死,亦當不可絶食也。

부모가 다 돌아가시면 살던 재실과 침실에 아들과 며느리가 차마 들어가지 못한다. 북조 돈구의 이구는 어머니 유씨가 돌아가신 뒤 살던 집을 평생 잠가 두고 차마 열고 들어가지 못하였다. 부인은 송나라 광주자사 유찬의 손녀이므로 이구는 아직 강남의 풍교에 물들어 있었다. 그 아버지 이장은 양주자사로 수춘을 지키다 해를 입었다. 이구가 일찍이 왕송년·조효징 몇 사람과 모여 이야기하며 잔치하였다. 조효징은 그림을 잘 그려 종이와 붓을 만나면 사람을 그렸다. 얼마 뒤 사슴 꼬리를 자르다가 장난삼아 그린 사람을 잘라 이구에게 보였는데 다른 뜻은 없었다. 이구가 슬픔에 낯빛이 변하여 곧 일어나 말을 타고 가 버렸다. 온 자리가 놀라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고, 조군은 곧 깨닫고 비로소 깊이 불안해하였으니, 당시에 이것을 느낄 수 있는 이는 드물었다. 오군의 육양은 아버지 육한이 형을 받아 죽자 평생 베옷에 채소밥을 먹고, 생강과 나물이라도 칼로 자른 것이면 다 차마 먹지 못하여 집에서는 오직 손으로 뜯어 부엌에 대었다. 강녕의 요자독은 어머니가 불에 타 죽어 평생 구운 것을 차마 먹지 못하였다. 예장의 웅강은 아버지가 취하여 종에게 죽임을 당하자 평생 다시 술을 맛보지 않았다. 그러나 예는 인정을 따르고 은혜는 의리로 끊으니, 부모가 목이 메어 죽었다 하여 밥을 끊을 수는 없다.

29아버지가 남긴 책, 어머니가 쓰던 잔

禮經:父之遺書,母之杯圈,感其手口之澤,不忍讀用。政爲常所講習,讎校繕寫,及偏加服用,有迹可思者耳。若尋常墳典,爲生什物,安可悉廢之乎?旣不讀用,無容散逸,惟當緘保,以畱後世耳。

『예경』에 아버지가 남긴 책과 어머니가 쓰던 잔은 손과 입의 흔적을 느껴 차마 읽거나 쓰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늘 강습하고 교감하고 베끼던 것, 유달리 쓰시던 것으로 자취가 있어 그리워할 만한 것을 두고 한 말일 뿐이다. 예사 책과 살림살이야 어찌 다 버리겠는가. 읽거나 쓰지 않더라도 흩어 잃어서는 안 되니 오직 봉하여 간직하여 후세에 남겨야 한다.

30어머니의 병풍을 보고 창자가 끊어진 딸

思魯等第四舅母,親吳郡張建女也,有第五妹,三歲喪母。靈牀上屛風,平生舊物,屋漏沾濕,出曝曬之,女子一見,伏牀流涕。家人怪其不起,乃往抱持;薦席淹漬,精神傷怛,不能飲食。將以問醫,醫診脈云:「腸斷矣!」因爾便吐血,數日而亡。中外憐之,莫不悲嘆。

사로 등의 넷째 외숙모는 오군 장건의 딸인데 다섯째 누이가 있어 세 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영상(靈牀) 위의 병풍은 어머니가 평생 쓰던 물건이었는데 지붕이 새어 젖어 내다 말리니, 딸이 한 번 보고 상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집안사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가서 안아 일으키니 자리가 흠뻑 젖어 있고 정신이 상하여 먹고 마시지 못하였다. 의원에게 물으니 맥을 짚고 「창자가 끊어졌다」 하였다. 그로부터 피를 토하다 며칠 만에 죽었다. 안팎이 가엾이 여겨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31기일에 즐기지 않는다는 뜻

禮云:「忌日不樂。」正以感慕罔極,惻愴無聊,故不接外賓,不理眾務耳。必能悲慘自居,何限於深藏也?世人或端坐奧室,不妨言笑,盛營甘美,厚供齋食;迫有急卒,密戚至交,盡無相見之理:蓋不知禮意乎!

『예기』에 「기일에는 즐기지 않는다」 하였다. 바로 그리움이 끝없고 슬퍼 마음 둘 곳이 없으므로 바깥손님을 맞지 않고 여러 일을 다스리지 않을 뿐이다. 진실로 슬픔 속에 스스로 거할 수 있다면 어찌 깊이 숨는 데 한하겠는가. 세상 사람은 더러 안방에 단정히 앉아 웃고 이야기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맛난 것을 성대히 마련하고 재식(齋食)을 두터이 대접하면서, 급한 일이 닥쳐도 가까운 친척과 지극한 벗이 도무지 만날 길이 없으니, 예의 뜻을 모르는 것이다.

32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 사일이면

魏世王修母以社日亡;來歲社日,修感念哀甚,鄰里聞之,爲之罷社。今二親喪亡,偶値伏臘分至之節,及月小晦後,忌之外,所經此日,猶應感慕,異於餘辰,不預飲燕、聞聲樂及行遊也。

위나라 왕수의 어머니는 사일(社日)에 돌아가셨다. 이듬해 사일에 왕수가 그리워하며 몹시 슬퍼하니 이웃이 듣고 그를 위해 사제를 그만두었다. 지금 부모가 돌아가신 날이 우연히 복일·납일·춘분·추분·동지·하지 같은 명절이나 작은달 그믐 뒤에 걸리면, 기일 말고도 이런 날을 지날 때 그리워해야 마땅하니 다른 날과 달리하여 잔치에 나가거나 풍악을 듣거나 놀러 다니지 않는다.

33소리가 같은 다른 글자까지 피할 수는 없다

劉縧、緩、綏,兄弟幷爲名器,其父名昭,一生不爲照字,惟依爾雅火旁作召耳。然凡文與正諱相犯,當自可避;其有同音異字,不可悉然。劉字之下,即有昭音。呂尙之兒,如不爲上;趙壹之子,儻不作一:便是下筆即妨,是書皆觸也。

유조·유완·유수 형제는 다 이름난 인물인데 아버지의 이름이 소(昭)라 평생 조(照) 자를 쓰지 않고 오직 『이아』에 따라 화(火) 변에 소(召)를 썼을 뿐이다. 그러나 글이 바로 그 휘와 부딪치면 마땅히 피할 수 있지만 소리는 같되 글자가 다른 것까지 다 그럴 수는 없다. 유(劉) 자 아래에 곧 소(昭)의 소리가 있다. 여상(呂尙)의 아들이 상(上) 자를 안 쓰고 조일(趙壹)의 아들이 일(一) 자를 안 쓴다면, 붓을 들자마자 걸리고 글마다 부딪칠 것이다.

34「존후께서 언제 댁에 오십니까」

嘗有甲設燕席,請乙爲賓;而旦於公庭見乙之子,問之曰:「尊侯早晚顧宅?」乙子稱其父已往。時以爲笑。如此比例,觸類愼之,不可陷於輕脫。

일찍이 갑이 잔치를 베풀어 을을 손님으로 청하였는데, 아침에 관청에서 을의 아들을 보고 「존후(尊侯)께서 언제쯤 댁에 들르십니까」 물었다. 을의 아들이 「아버지는 이미 가셨습니다」 하니 당시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런 예는 비슷한 일마다 삼가서 경박함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35돌잡이 — 시아(試兒)

江南風俗,兒生一期,爲製新衣,盥浴裝飾,男則用弓矢紙筆,女則刀尺針縷,幷加飲食之物,及珍寶服玩,置之兒前,觀其發意所取,以驗貪廉愚智,名之爲試兒。親表聚集,致燕享焉。自茲已後,二親若在,每至此日,嘗有酒食之事耳。無教之徒,雖已孤露,其日皆爲供頓,酣暢聲樂,不知有所感傷。梁孝元年少之時,每八月六日載誕之辰,常設齋講;自阮修容薨歿之後,此事亦絶。

강남 풍속에 아이가 난 지 한 돌이 되면 새 옷을 지어 씻기고 단장하여, 사내면 활과 화살과 종이와 붓을, 계집이면 칼과 자와 바늘과 실을, 아울러 먹을 것과 보물과 옷과 노리개를 아이 앞에 놓고 마음이 가는 대로 잡는 것을 보아 탐욕과 청렴, 어리석음과 슬기를 점치니 이것을 시아(試兒)라 한다. 친척이 모여 잔치를 베푼다. 이날부터 뒤로 부모가 계시면 이날이 올 때마다 술과 음식을 차리는 일이 있을 뿐이다. 가르침 없는 무리는 이미 부모를 여의고도 그날이면 다 차려 놓고 풍악을 울리며 마시고 즐겨 슬퍼할 줄을 모른다. 양 효원제는 젊었을 때 8월 6일 태어난 날마다 늘 재를 베풀고 강경하였는데, 완수용이 돌아가신 뒤로는 이 일도 끊었다.

36아플 때 부르는 말

人有憂疾,則呼天地父母,自古而然。今世諱避,觸途急切。而江東士庶,痛則稱禰。禰是父之廟號,父在無容稱廟,父歿何容輒呼?蒼頡篇有侑字,訓詁云:「痛而謼也,音羽罪反。」今北人痛則呼之。聲類音於耒反,今南人痛或呼之。此二音隨其鄉俗,幷可行也。

사람이 근심하거나 아프면 하늘과 땅과 부모를 부르니 예부터 그러하였다. 지금 세상은 휘하고 피하기를 가는 곳마다 급히 한다. 그런데 강동의 사서(士庶)는 아프면 니(禰)라 부른다. 니는 아버지의 묘호이니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묘호를 일컬을 수 없고 돌아가신 뒤에는 어찌 함부로 부르겠는가. 『창힐편』에 유(侑) 자가 있어 풀이에 「아파서 부르짖는 것이니 소리는 우(羽)와 죄(罪)의 반절이다」 하였는데, 지금 북쪽 사람은 아프면 이렇게 부른다. 『성류』에서는 소리를 어(於)와 뢰(耒)의 반절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쪽 사람은 아프면 더러 이렇게 부른다. 이 두 소리는 그 고장 풍속에 따라 다 쓸 만하다.

37아비가 갇히면 자식은 맨발로 대궐에 나아간다

梁世被繫劾者,子孫弟姪,皆詣闕三日,露跣陳謝;子孫有官,自陳解職。子則草屩麤衣,蓬頭垢面,周章道路,要候執事,叩頭流血,申訴冤枉。若配徒隸,諸子幷立草庵於所署門,不敢寧宅,動經旬日,官司驅遣,然後始退。江南諸憲司彈人事,事雖不重,而以教義見辱者,或被輕繫而身死獄戶者,皆爲怨讎,子孫三世不交通矣。到洽爲御史中丞,初欲彈劉孝綽,其兄漑先與劉善,苦諫不得,乃詣劉涕泣告別而去。

양나라에서 갇히고 탄핵당한 이가 있으면 자손과 아우와 조카가 다 대궐에 나아가 사흘 동안 맨발로 사죄하고, 자손 가운데 벼슬이 있으면 스스로 해직을 아뢴다. 아들은 짚신에 거친 옷, 흐트러진 머리에 때 묻은 얼굴로 길을 헤매며 담당 관원을 기다려 머리를 조아려 피를 흘리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도예(徒隸)로 배정되면 아들들이 다 관청 문 앞에 초막을 세우고 감히 집에서 편히 지내지 못하며, 걸핏하면 열흘이 지나 관청에서 쫓아낸 뒤에야 비로소 물러난다. 강남의 여러 헌사(憲司)가 사람을 탄핵하는 일은 일이 비록 무겁지 않더라도 가르침과 의리 때문에 욕을 당한 이나 가벼이 갇혔다가 옥에서 죽은 이가 있으면 다 원수가 되어 자손 삼대가 서로 오가지 않는다. 도흡이 어사중승이 되어 처음 유효작을 탄핵하려 하니, 그 형 도개가 유효작과 먼저 친하여 애써 말렸으나 듣지 않자 유효작에게 가서 눈물 흘리며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

38아버지가 군진에 계시면

兵兇戰危,非安全之道。古者,天子喪服以臨師,將軍鑿兇門而出。父祖伯叔,若在軍陣,貶損自居,不宜奏樂燕會及婚冠吉慶事也。若居圍城之中,憔悴容色,除去飾玩,常爲臨深履薄之狀焉。父母疾篤,醫雖賤雖少,則涕泣而拜之,以求哀也。梁孝元在江州,嘗有不豫;世子方等親拜中兵參軍李猷焉。

군사는 흉하고 싸움은 위태로우니 안전한 길이 아니다. 옛날 천자는 상복을 입고 군사에 임하였고 장군은 흉문(兇門)을 뚫고 나갔다. 아버지와 조부와 백숙부가 군진에 계시면 스스로 낮추어 지내며 풍악과 잔치와 혼인·관례 같은 경사스러운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에워싸인 성안에 있으면 낯빛을 초췌히 하고 장식과 노리개를 치워 늘 깊은 물에 임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한 모습을 해야 한다. 부모의 병이 위독하면 의원이 비록 천하고 비록 젊더라도 눈물 흘리며 절하여 불쌍히 여겨 주기를 구해야 한다. 양 효원제가 강주에 있을 때 병이 난 적이 있는데 세자 방등이 중병참군 이유에게 몸소 절하였다.

39길에서 만나 형제를 맺는 북쪽 사람들

四海之人,結爲兄弟,亦何容易。必有志均義敵,令終如始者,方可議之。一爾之後,命子拜伏,呼爲丈人,申父友之敬;身事彼親,亦宜加禮。比見北人,甚輕此節,行路相逢,便定昆季,望年觀貌,不擇是非,至有結父爲兄,託子爲弟者。

사해의 사람이 형제를 맺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반드시 뜻이 같고 의가 맞아 끝까지 처음과 같을 이라야 비로소 의논할 수 있다. 한번 맺은 뒤에는 아들에게 명하여 절하고 엎드려 장인(丈人)이라 부르게 하여 아버지의 벗에 대한 공경을 펴고, 몸소 그의 부모를 섬기는 데도 예를 더해야 한다. 근래 보니 북쪽 사람은 이 절차를 몹시 가벼이 여겨 길에서 만나면 곧 형 아우를 정하고 나이를 보고 얼굴을 보아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으며, 심지어 아버지뻘과 형을 맺고 아들뻘을 아우로 삼는 이도 있다.

40문에 손님을 세워 두지 않는다

昔者,周公一沐三握發,一飯三吐餐,以接白屋之士,一日所見者七十餘人。晉文公以沐辭竪頭須,致有圖反之誚。門不停賓,古所貴也。失教之家,閽寺無禮,或以主君寢食嗔怒,拒客未通,江南深以爲恥。黃門侍郎裴之禮,號善爲士大夫,有如此輩,對賓杖之;其門生僮僕,接於他人,折旋俯仰,辭色應對,莫不肅敬,與主無別也。

옛날 주공은 한 번 머리를 감다가 세 번 머리칼을 움켜쥐고 한 끼 밥에 세 번 밥을 뱉으며 초가집 선비를 맞아 하루에 만난 이가 칠십여 명이었다. 진 문공은 머리를 감는다며 두수(頭須)를 물리쳤다가 「돌아앉을 생각」이라는 나무람을 들었다. 문에 손님을 세워 두지 않는 것은 옛사람이 귀히 여긴 바다. 가르침을 잃은 집은 문지기가 무례하여 더러 주인이 자거나 먹거나 성났다는 이유로 손님을 막고 통하지 않으니 강남에서는 깊이 부끄러워한다. 황문시랑 배지례는 사대부 노릇을 잘한다고 일컬어졌는데, 이런 무리가 있으면 손님 앞에서 매질하였다. 그 문생과 종들은 남을 대할 때 몸을 돌리고 굽히며 말과 낯빛으로 응대함이 엄숙하고 공경하지 않음이 없어 주인과 다를 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