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현 — 어진 이를 그리며慕賢
1지초와 난초의 방, 절인 생선 가게
古人云:「千載一聖,猶旦暮也;五百年一賢,猶比髆心。」言聖賢之難得,疏闊如此。儻遭不世明達君子,安可不攀附景仰之乎?吾生於亂世,長於戎馬,流離播越,聞見已多;所値名賢,未嘗不心醉魂迷向慕之也。人在年少,神情未定,所與款狎,熏漬陶染,言笑舉動,無心於學,潛移暗化,自然似之;何況操履藝能,較明易習者也?是以與善人居,如入芝蘭之室,久而自芳也;與惡人居,如入鮑魚之肆,久而自臭也。墨子悲於染絲,是之謂矣。君子必愼交遊焉。孔子曰:「無友不如己者。」顔、閔之徒,何可世得!但優於我,便足貴之。
옛사람이 「천 년에 성인 하나 나는 것은 아침저녁 같고, 오백 년에 어진 이 하나 나는 것은 어깨를 잇댄 듯하다」 하였다. 성현을 얻기 어려움이 이처럼 성글다는 말이다. 만일 세상에 드문 밝고 통달한 군자를 만난다면 어찌 붙좇아 우러르지 않겠는가. 나는 난세에 태어나 전쟁 속에서 자라 흘러 다니며 보고 들은 것이 이미 많은데, 만난 명현마다 마음이 취하고 넋이 홀려 우러르지 않은 적이 없다. 사람이 젊을 때는 정신이 아직 정해지지 않아 가까이 사귀는 이에게 물들고 젖어, 말과 웃음과 몸가짐이 배울 마음이 없어도 저도 모르게 옮아 절로 닮게 된다. 하물며 지조와 행실, 재주와 능력처럼 견주어 밝고 익히기 쉬운 것이야 어떻겠는가. 그러므로 착한 이와 함께 살면 지초와 난초의 방에 든 것 같아 오래면 절로 향기롭고, 악한 이와 함께 살면 절인 생선 가게에 든 것 같아 오래면 절로 냄새난다. 묵자가 실 물들이는 것을 슬퍼한 것이 이것을 이른다. 군자는 반드시 사귐을 삼가야 한다. 공자가 「나만 못한 이를 벗하지 마라」 하였는데, 안회·민자건 같은 이를 어찌 세상에서 얻겠는가. 다만 나보다 나으면 곧 귀히 여길 만하다.
2동가의 구(丘) — 가까운 이를 얕보는 병
世人多蔽,貴耳賤目,重遙輕近。少長周旋,如有賢哲,每相狎侮,不加禮敬;他鄉異縣,微借風聲,延頸企踵,甚於飢渴。校其長短,核其精麤,或彼不能如此矣。所以魯人謂孔子爲東家丘,昔虞國宮之奇,少長於君,君狎之,不納其諫,以至亡國,不可不畱心也。
세상 사람은 흔히 가려서 귀를 귀히 여기고 눈을 천히 여기며 먼 것을 무겁게 가까운 것을 가볍게 여긴다. 젊어서부터 어울려 지낸 이 가운데 어진 이가 있어도 늘 허물없이 얕보고 예로 공경하지 않으며, 다른 고장 다른 고을 사람은 조금만 소문을 빌려도 목을 빼고 발돋움하기가 굶주림과 목마름보다 심하다. 그 장단을 견주고 정조(精粗)를 따져 보면 저쪽이 이쪽만 못한 일도 있다. 그래서 노나라 사람은 공자를 동쪽 집의 구(丘)라 하였다. 옛날 우나라의 궁지기는 임금과 어려서부터 자라 임금이 그를 허물없이 여겨 그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나라를 망하는 데 이르렀으니,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없다.
3남의 좋은 것을 훔쳐 제 힘이라 하지 마라
用其言,棄其身,古人所恥。凡有一言一行,取於人者,皆顯稱之,不可竊人之美,以爲己力;雖輕雖賤者,必歸功焉。竊人之財,刑辟之所處;竊人之美,鬼神之所責。
그 말은 쓰고 그 사람은 버리는 것을 옛사람은 부끄러워하였다. 한마디 말이나 한 가지 행실이라도 남에게서 취한 것은 다 드러내 일컬어야지, 남의 좋은 것을 훔쳐 제 힘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비록 가볍고 천한 이라도 반드시 공을 돌려야 한다. 남의 재물을 훔치면 형벌이 처하는 바요, 남의 좋은 것을 훔치면 귀신이 꾸짖는 바다.
4「정군의 열 장은 왕포의 몇 자만 못하다」 — 뒤늦게 한 장을 그리워하다
梁孝元前在荆州,有丁覘者,洪亭民耳,頗善屬文,殊工草隸;孝元書記,一皆使之。軍府輕賤,多未之重,恥令子弟以爲楷法,時云:「丁君十紙,不敵王褒數字。」吾雅愛其手迹,常所寶持。孝元嘗遣典簽惠編送文章示蕭祭酒,祭酒問云:「君王比賜書翰,及寫詩筆,殊爲佳手,姓名爲誰?那得都無聲問?」編以實答。子雲嘆曰:「此人後生無比,遂不爲世所稱,亦是奇事。」於是聞者稍復刮目。稍仕至尙書儀曹郎,末爲晉安王侍讀,隨王東下。及西臺陷歿,簡牘湮散,丁亦尋卒於揚州;前所輕者,後思一紙,不可得矣。
양 효원제가 전에 형주에 있을 때 정첨이라는 이가 있었다. 홍정의 평민일 뿐이었으나 글을 자못 잘 짓고 초서와 예서에 유달리 뛰어나 효원제의 서기를 다 그에게 시켰다. 군부에서는 가벼이 천하게 여겨 흔히 중히 여기지 않았고 자제에게 그것을 본으로 삼게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당시에 「정군의 열 장은 왕포의 몇 자만 못하다」 하였다. 나는 본디 그 글씨를 사랑하여 늘 보배로 간직하였다. 효원제가 일찍이 전첨 혜편을 보내 글을 소제주(蕭祭酒)에게 보였는데 제주가 「임금께서 요즘 내리신 편지와 베껴 쓴 시문은 유달리 좋은 솜씨인데 이름이 누구입니까. 어찌 전혀 소문이 없습니까」 물었다. 혜편이 사실대로 답하니 소자운이 탄식하였다. 「이 사람은 후생 가운데 견줄 이가 없는데 끝내 세상에 일컬어지지 않으니 또한 기이한 일이다.」 이에 듣는 이들이 차츰 다시 눈을 씻고 보았다. 차츰 벼슬하여 상서의조랑에 이르렀고 끝에는 진안왕의 시독이 되어 왕을 따라 동으로 내려갔다. 서대가 함락되자 문서가 흩어져 없어졌고 정첨도 곧 양주에서 죽었다. 전에 가벼이 여기던 이들이 뒤에 한 장을 그리워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다.
5양간 한 사람이 성을 지켰다
侯景初入建業,臺門雖閉,公私草擾,各不自全。太子左衛率羊侃坐東掖門,部分經略,一宿皆辦,遂得百餘日抗拒兇逆。於時,城內四萬許人,王公朝士,不下一百,便是恃侃一人安之,其相去如此。古人云:「巢父、許由,讓於天下;市道小人,爭一錢之利。」亦已懸矣。
후경이 처음 건업에 들어왔을 때 대문(臺門)은 닫혔으나 공사가 어지러워 각자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였다. 태자좌위솔 양간이 동액문에 앉아 부서를 나누고 경략하여 하룻밤에 다 처리하니, 마침내 백여 일 동안 흉역에 맞설 수 있었다. 그때 성안에 사만 명쯤 있었고 왕공과 조사가 백을 밑돌지 않았는데, 곧 양간 한 사람에 기대어 편안하였으니 그 차이가 이러하였다. 옛사람이 「소보·허유는 천하를 사양하였고 저자의 소인은 한 푼의 이익을 다툰다」 하였으니 또한 이미 아득하다.
6나라의 존망이 한 사람의 생사에 달리다
齊文宣帝即位數年,便沈湎縱恣,略無綱紀;尙能委政尙書令楊遵彥,內外清謐,朝野晏如,各得其所,物無異議,終天保之朝。遵彥後爲孝昭所戮,刑政於是衰矣。斛律明月齊朝折衝之臣,無罪被誅,將士解體,周人始有吞齊之志,關中至今譽之。此人用兵,豈止萬夫之望而已哉!國之存亡,繫其生死。
제 문선제가 즉위한 지 몇 해 만에 술에 빠져 방자하여 기강이 거의 없었으나, 그래도 정사를 상서령 양준언에게 맡길 줄 알아 안팎이 맑고 조용하며 조야가 편안하여 각기 제자리를 얻고 아무도 다른 말이 없이 천보 연간을 마쳤다. 양준언이 뒤에 효소제에게 죽임을 당하자 형정이 이에 쇠하였다. 곡률명월은 제나라 조정의 절충(折衝)하는 신하였는데 죄 없이 죽임을 당하자 장수와 군사가 흩어지고 주나라 사람이 비로소 제나라를 삼킬 뜻을 두었으니, 관중에서 지금까지 그를 기린다. 이 사람의 용병은 어찌 만 명이 우러르는 데 그쳤겠는가. 나라의 존망이 그의 생사에 달려 있었다.
7장연준이 옮겨지자 진주가 먼저 무너지다
張延雋之爲晉州行臺左丞,匡維主將,鎮撫疆埸,儲積器用,愛活黎民,隱若敵國矣。群小不得行志,同力遷之;旣代之後,公私擾亂,周師一舉,此鎮先平。齊亡之迹,啓於是矣。
장연준이 진주 행대좌승이 되어 주장을 바로잡아 돕고 변경을 진무하며 기물을 저축하고 백성을 아껴 살리니 우뚝하기가 적국과 맞설 만하였다. 뭇 소인이 뜻을 이루지 못하여 힘을 합쳐 그를 옮기니, 바뀐 뒤로 공사가 어지러워져 주나라 군사가 한 번 일어나자 이 진이 먼저 평정되었다. 제나라가 망한 자취는 여기서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