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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증 — 글자와 책을 살피다書證

안씨가훈 顏氏家訓 · 안지추(顏之推) · 6세기 말 · 단락 47 · 한자 6,137자 · 낭독 24.5분

「안씨가훈」 한 권 「서증 — 글자와 책을 살피다」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남북조 말의 학자 안지추가 자손에게 남긴 스무 편의 가훈. 양나라에서 나서 서위·북제·북주·수 네 나라를 떠돌며 살아남은 사람이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자손을 일깨우려고」 쓴 글이라, 아이 가르치기·형제·재혼·집안 살림·몸가짐과 말씨·배움·문장·이름과 실상·족함을 아는 것에서 글자와 책의 고증, 말소리, 글씨·그림·활·점·거문고·바둑 같은 여러 재주, 그리고 제 장례를 어떻게 치르라는 유언까지 이른다. 「수레에서 안 떨어지면 저작랑」이라던 양나라 귀족 자제가 난리 뒤 밭 갈고 말 기르게 된 것을 보고 「몸에 지닌 작은 재주가 재물 천만보다 낫다」고 한 대목, 「어려서 배우는 이는 해 뜰 때의 빛 같고 늙어서 배우는 이는 촛불을 들고 밤길을 가는 것 같다」는 대목이 여기서 나왔다. 뒷날의 가훈이 모두 이 책을 조상으로 삼는다.

1「참치행채」의 행(荇)은 마름이지 비름이 아니다

詩云:「參差荇菜。」爾雅云:「荇,接余也。」字或爲莕。先儒解釋皆云:水草,圓葉細莖,隨水淺深。今是水悉有之,黃花似蒓,江南俗亦呼爲豬蒓,或呼爲荇菜。劉芳具有注釋。而河北俗人多不識之,博士皆以參差者是莧菜,呼人莧爲人荇,亦可笑之甚。

『시경』에 「들쭉날쭉한 행채(荇菜)」라 하였고 『이아』에 「행은 접여(接余)다」 하였으며 글자는 더러 행(莕)으로 쓴다. 옛 선비들의 풀이는 다 물풀로, 잎이 둥글고 줄기가 가늘어 물의 깊고 얕음을 따른다고 하였다. 지금 물이 있는 곳에는 다 있는데 노란 꽃이 순채 같아 강남의 속칭으로는 돼지순채라 하고 더러 행채라 부른다. 유방이 자세히 주석하였다. 그런데 하북의 속인들은 흔히 이것을 몰라 박사들이 다 「참치」라 한 것을 비름이라 여겨 사람이 먹는 비름을 사람의 행이라 부르니 우습기 그지없다.

2「누가 씀바귀를 쓰다 하는가」의 씀바귀

詩云:「誰謂荼苦?」爾雅、毛詩傳並以荼,苦菜也。又禮云:「苦菜秀。案:易統通卦驗玄圖曰:「苦菜生於寒秋,更冬歷春,得夏乃成。」今中原苦菜則如此也。一名遊冬,葉似苦苣而細,摘斷有白汁,花黃似菊。江南別有苦菜,葉似酸漿,其花或紫或白,子大如珠,熟時或赤或黑,此菜可以釋勞。案:郭璞注爾雅,此乃蘵黃蒢也。今河北謂之龍葵。梁世講禮者,以此當苦菜;旣無宿根,至春方生耳,亦大誤也。又高誘注呂氏春秋曰:「榮而不實曰英。」苦菜當言英,益知非龍葵也。

『시경』에 「누가 도(荼)를 쓰다 하는가」 하였고 『이아』와 『모시전』은 다 도를 씀바귀라 하였다. 또 『예기』에 「씀바귀가 이삭 팬다」 하였다. 살펴보니 『역통통괘험현도』에 「씀바귀는 찬 가을에 나서 겨울을 지나 봄을 거쳐 여름이 되어야 이루어진다」 하였으니 지금 중원의 씀바귀가 그러하다. 일명 유동(遊冬)이라 하며 잎은 방가지똥 같으나 가늘고 꺾으면 흰 즙이 나오며 꽃은 노랗고 국화 같다. 강남에는 따로 씀바귀가 있어 잎은 꽈리 같고 꽃은 자줏빛이거나 희며 열매는 구슬만 하고 익으면 붉거나 검으니 이 나물은 피로를 풀 수 있다. 살펴보니 곽박의 『이아』 주에 이것은 곧 직황제(蘵黃蒢)이니 지금 하북에서 용규(龍葵)라 하는 것이다. 양나라에서 『예기』를 강론하는 이들은 이것을 씀바귀로 여겼으나, 묵은 뿌리가 없어 봄에야 비로소 나니 또한 큰 잘못이다. 또 고유가 『여씨춘추』에 주하기를 「꽃 피고 열매 맺지 않는 것을 영(英)이라 한다」 하였으니 씀바귀는 영이라 해야 하므로 용규가 아님을 더욱 알겠다.

3「유체지두」의 체(杕)를 적(狄)으로 읽는 하북본

詩云:「有杕之杜。」江南本並木傍施大,傳曰:「杕,獨貌也。」徐仙民音徒計反。説文曰:「杕,樹貌也。」在木部。韻集音次第之第,而河北本皆爲夷狄之狄,讀亦如字,此大誤也。

『시경』에 「유체지두(有杕之杜)」라 하였는데 강남본은 다 나무 목(木) 변에 큰 대(大)를 쓰고 전(傳)에 「체는 홀로 선 모양」이라 하였으며 서선민은 도(徒)·계(計)의 반절로 읽었다. 『설문』에 「체는 나무의 모양」이라 하여 목부에 있다. 『운집』은 차제(次第)의 제로 읽었다. 그런데 하북본은 다 이적(夷狄)의 적으로 쓰고 읽기도 글자대로 읽으니 이는 큰 잘못이다.

4「경경목마」의 목(牡)은 수말이지 목축의 목이 아니다

詩云:「駉駉牡馬。」江南書皆作牝牡之牡,河北本悉爲放牧之牧。鄴下博士見難云:「駉頌旣美僖公牧於垧野之事,何限騲騭乎?」余答曰:「案:毛傳云:『駉駉,良馬腹幹肥張也。』其下又云:『諸侯六閑四種:有良馬,戎馬,田馬,駑馬。』若作放牧之意,通於牝牡,則不容限在良馬獨得駉駉之稱。良馬,天子以駕玉輅,諸侯以充朝聘郊祀,必無騲也。周禮圉人職:『良馬,匹一人。駑馬,麗一人。』圉人所養,亦非騲也;頌人舉其強駿者言之,於義爲得也。易曰:『良馬逐逐。』左傳云:『以其良馬二。』亦精駿之稱,非通語也。今以詩傳良馬,通於牧騲,恐失毛生之意,且不見劉芳義證乎?」

『시경』에 「경경한 목마(駉駉牡馬)」라 하였는데 강남 책은 다 빈모(牝牡)의 모로 쓰고 하북본은 다 방목(放牧)의 목으로 쓴다. 업의 박사가 따져 「경(駉) 송은 희공이 경(垧) 들에서 말을 기른 일을 찬미한 것이니 어찌 암수를 한하는가」 하였다. 내가 답하였다. 「살펴보니 모전에 『경경은 좋은 말의 배와 몸통이 살지고 큰 것』이라 하고 그 아래 또 『제후는 여섯 마구간에 네 종류가 있으니 양마·융마·전마·노마다』 하였소. 방목의 뜻으로 삼아 암수에 통한다면 양마만 홀로 경경이라는 일컬음을 얻는 데 한할 수 없소. 양마는 천자가 옥로를 끌게 하고 제후가 조빙과 교사에 쓰니 반드시 암말은 없소. 『주례』 어인 직에 『양마는 한 필에 한 사람, 노마는 두 필에 한 사람』이라 하였으니 어인이 기르는 것도 암말이 아니오. 송을 지은 이가 그 강하고 준수한 것을 들어 말한 것이 뜻에 맞소. 『역』에 『양마가 달린다』 하고 『좌전』에 『그 양마 두 필로』 하였으니 역시 정예의 일컬음이지 두루 쓰는 말이 아니오. 지금 『시전』의 양마를 암말 기르는 데 통하게 하면 모공의 뜻을 잃을까 두렵고, 또 유방의 『의증』을 보지 못하였소?」

5「여정」은 풀 이름이 아니라 「여(荔)가 곧게 나온다」

月令云:「荔挺出。」鄭玄注云:「荔挺,馬薤也。」説文云:「荔,似蒲而小,根可爲刷。」廣雅云:「馬薤,荔也。」通俗文亦云馬藺。易統通卦驗玄圖云:「荔挺不出,則國多火災。」蔡邕月令章句云:「荔似挺。」高誘注呂氏春秋云:「荔草挺出也。」然則月令注荔挺爲草名,誤矣。河北平澤率生之。江東頗有此物,人或種於階庭,但呼爲旱蒲,故不識馬薤。講禮者乃以爲馬莧;馬莧堪食,亦名豚耳,俗名馬齒。江陵嘗有一僧,面形上廣下狹;劉緩幼子民譽,年始數歲,俊晤善體物,見此僧云:「面似馬莧。」其伯父縧因呼爲荔挺法師。縧親講禮名儒,尙誤如此。

「월령」에 「여정(荔挺)이 나온다」 하였고 정현의 주에 「여정은 마해(馬薤)다」 하였다. 『설문』에 「여는 부들 같으나 작고 뿌리로 솔을 만든다」 하였고 『광아』에 「마해는 여다」 하였으며 『통속문』도 마린(馬藺)이라 하였다. 『역통통괘험현도』에 「여정이 나오지 않으면 나라에 화재가 많다」 하였고 채옹의 『월령장구』에 「여는 정(挺)과 비슷하다」 하였으며 고유의 『여씨춘추』 주에 「여 풀이 곧게 나온다」 하였다. 그렇다면 「월령」 주가 여정을 풀 이름으로 삼은 것은 잘못이다. 하북의 평야 못가에 대개 난다. 강동에도 이것이 자못 있어 사람들이 더러 뜰에 심는데 다만 한포(旱蒲)라 부르므로 마해인 줄 모른다. 『예기』 강론하는 이는 마현(馬莧)이라 여긴다. 마현은 먹을 수 있고 돈이(豚耳)라고도 하며 속명은 마치(馬齒)다. 강릉에 한 승려가 있어 얼굴이 위는 넓고 아래는 좁았는데, 유완의 어린 아들 민예가 나이 겨우 몇 살에 영특하여 사물을 잘 그려 내어 이 승려를 보고 「얼굴이 마현 같다」 하니 그 백부 유조가 그래서 여정법사라 불렀다. 유조는 몸소 『예기』를 강론한 이름난 선비인데도 잘못이 이러하였다.

6「시시」를 「시」 하나로 쓴 강남 옛 책

詩云:「將其來施施。」毛傳云:「施施,難進之意。」鄭箋云:「施施,舒行貌也。」韓詩亦重爲施施。河北毛詩皆云施施。江南舊本,悉單爲施,俗遂是之,恐爲少誤。

『시경』에 「장차 시시(施施)하게 온다」 하였는데 모전에 「시시는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이라 하고 정전에 「시시는 천천히 가는 모양」이라 하였다. 『한시』도 거듭하여 시시라 하였고 하북의 『모시』도 다 시시라 한다. 강남의 옛 책은 다 시 하나만 써서 세속이 마침내 그것을 옳다 하니 조금 잘못된 듯하다.

7「흥운기기」의 운(雲)은 우(雨)

詩云:「有渰萋萋,興雲祁祁。」毛傳云:「渰,陰雲貌。萋萋,雲行貌。祁祁,徐貌也。」箋云:「古者,陰陽和,風雨時,其來祁祁然,不暴疾也。」案:渰已是陰雲,何勞復云「興雲祁祁」耶?「雲」當爲「雨」,俗寫誤耳。班固靈臺詩云:「三光宣精,五行布序,習習祥風,祁祁甘雨。」此其證也。

『시경』에 「음산한 구름 처처하고, 구름 일어 기기하다(有渰萋萋,興雲祁祁)」 하였는데 모전에 「엄(渰)은 음산한 구름의 모양, 처처는 구름이 가는 모양, 기기는 느린 모양」이라 하였고 전(箋)에 「옛날 음양이 화하고 비바람이 때맞아 그 옴이 기기하여 사납지 않았다」 하였다. 살펴보니 엄이 이미 음산한 구름인데 어찌 다시 「구름이 일어 기기하다」 할 것인가. 운(雲)은 우(雨)여야 하니 속인이 베끼며 잘못한 것이다. 반고의 「영대시」에 「삼광이 정기를 펴고 오행이 차례를 베푸니, 산들산들 상서로운 바람에 기기한 단비」 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다.

8「유예」와 「호의」의 유래

禮云:「定猶豫,決嫌疑。」離騷曰:「心猶豫而狐疑。」先儒未有釋者。案:尸子曰:「五尺犬爲猶。」説文云:「隴西謂犬子爲猶。」吾以爲人將犬行,犬好豫在人前,待人不得,又來迎候,如此返往,至於終日,斯乃豫之所以爲未定也,故稱猶豫。或以爾雅曰:「猶如麂,善登木。」猶,獸名也,旣聞人聲,乃豫緣木,如此上下,故稱猶豫。狐之爲獸,又多猜疑,故聽河冰無流水聲,然後敢渡。今俗云:「狐疑,虎卜。」則其義也。

『예기』에 「유예(猶豫)를 정하고 혐의를 결단한다」 하였고 「이소」에 「마음이 유예하고 호의(狐疑)한다」 하였는데 옛 선비 가운데 풀이한 이가 없다. 살펴보니 『시자』에 「다섯 자 되는 개를 유(猶)라 한다」 하였고 『설문』에 「농서에서는 개 새끼를 유라 한다」 하였다. 내 생각에 사람이 개를 데리고 가면 개는 미리(豫) 사람 앞에 가기를 좋아하여 사람을 기다리지 못하고 또 와서 맞으니 이렇게 오가기를 온종일 하는데, 이것이 곧 예가 정해지지 않음이 되는 까닭이므로 유예라 일컫는다. 혹은 『이아』에 「유는 궤(麂) 같고 나무에 잘 오른다」 하였으니 유는 짐승 이름으로 사람 소리를 들으면 미리 나무를 타고 이렇게 오르내리므로 유예라 일컫는다고도 한다. 여우라는 짐승은 또 의심이 많아 황하의 얼음 아래 흐르는 물소리가 없음을 듣고서야 감히 건넌다. 지금 속담에 「여우는 의심하고 범은 점친다」 하니 그 뜻이다.

9「제후개(痎)」를 옴으로 읽는 잘못

左傳曰:「齊侯痎,遂痁。」説文云:「痎,二日一發之瘧。痁,有熱瘧也。」案:齊侯之病,本是間日一發,漸加重乎故,爲諸侯憂也。今北方猶呼痎瘧,音皆。而世間傳本多以痎爲疥,杜征南亦無解釋,徐仙民音介,俗儒就爲通云:「病疥,令人惡寒,變而成瘧。」此臆説也。疥癬小疾,何足可論,寧有患疥轉作瘧乎?

『좌전』에 「제후가 개(痎)를 앓다가 마침내 점(痁)이 되었다」 하였다. 『설문』에 「개는 이틀에 한 번 발작하는 학질, 점은 열이 있는 학질」이라 하였다. 살펴보니 제후의 병은 본디 하루걸러 발작하다 차츰 무거워진 것이므로 제후들의 근심이 되었다. 지금 북방에서는 아직 개학(痎瘧)이라 부르며 소리는 개(皆)다. 그런데 세간의 전본은 흔히 개(痎)를 개(疥, 옴)로 쓰고 두정남(두예)도 풀이가 없으며 서선민은 개(介)로 읽고, 속된 선비들은 얼버무려 「옴을 앓으면 사람이 오한이 나서 변하여 학질이 된다」 하니 이는 억설이다. 옴은 작은 병인데 어찌 논할 만하며, 옴을 앓다가 학질이 되는 일이 어찌 있겠는가.

10그림자 영(影)은 본디 경(景)

尙書曰:「惟影響。」周禮云:「土圭測影,影朝影夕。」孟子曰:「圖影失形。」莊子云:「罔兩問影。」如此等字,皆當爲光景之景。凡陰景者,因光而生,故即謂爲景。淮南子呼爲景柱,廣雅云:「晷柱挂景。」並是也。至晉世葛洪字苑,傍始加影□〔去掉景〕,音於景反。而世間輒改治尙書、周禮、莊、孟從葛洪字,甚爲失矣。

『상서』에 「그림자와 메아리 같다(惟影響)」 하고 『주례』에 「토규로 그림자를 재니 아침 그림자와 저녁 그림자」 하며 『맹자』에 「그림자를 그리다 형체를 잃는다」 하고 『장자』에 「망량이 그림자에게 묻는다」 하였으니, 이런 글자는 다 광경(光景)의 경(景)이어야 한다. 그늘진 그림자란 빛으로 말미암아 생기므로 곧 경이라 한다. 『회남자』는 경주(景柱)라 하고 『광아』는 「해시계 기둥이 그림자를 건다」 하였으니 다 이것이다. 진나라 갈홍의 『자원』에 이르러 곁에 비로소 삼(彡)을 더하여 영(影)이 되었고 소리는 어(於)·경(景)의 반절이다. 그런데 세간에서 문득 『상서』·『주례』·『장자』·『맹자』를 갈홍의 글자에 따라 고치니 몹시 잘못이다.

11군진의 진(陳)을 진(陣)으로 고치지 마라

太公六韜,有天陳、地陳、人陳、雲鳥之陳。論語曰:「衞靈公問陳於孔子。」左傳:「爲魚麗之陳。」俗本多作阜傍車乘之車。案諸陳隊,並作陳、鄭之陳。夫行陳之義,取於陳列耳,此六書爲假借也,蒼、雅及近世字書,皆無別字;唯王羲之小學章,獨阜傍作車,縱復俗行,不宜追改六韜、論語、左傳也。

태공의 『육도』에 천진·지진·인진·운조지진이 있다. 『논어』에 「위 영공이 공자에게 진(陳)을 물었다」 하였고 『좌전』에 「어리(魚麗)의 진을 쳤다」 하였는데 속본에는 흔히 언덕 부(阜) 변에 수레 거(車)를 쓴다. 살펴보니 여러 군진은 다 진·정(陳鄭)의 진으로 쓴다. 행진(行陳)의 뜻은 진열(陳列)에서 취한 것이니 이것은 육서의 가차다. 『창힐』·『이아』와 근세의 자서에 다 다른 글자가 없고 오직 왕희지의 『소학장』에서만 부 변에 거를 썼으니, 속간에 통행하더라도 『육도』·『논어』·『좌전』을 좇아 고쳐서는 안 된다.

12「관목」은 떨기나무

詩云:「黃鳥于飛,集於灌木。」傳云:「灌木,叢木也。」此乃爾雅之文,故李巡注曰:「木叢生曰灌。」爾雅末章又云:「木族生爲灌。」族亦叢聚也。所以江南詩古本皆爲叢聚之叢,而古叢字似最字,近世儒生,因改爲最,解云:「木之最高長者。」案:眾家爾雅及解詩無言此者,唯周續之毛詩注,音爲徂會反,劉昌宗詩注,音爲在公反,又祖會反:皆爲穿鑿,失爾雅訓也。

『시경』에 「누런 새가 날아 관목(灌木)에 모인다」 하였고 전에 「관목은 떨기나무」라 하였다. 이는 『이아』의 글이므로 이순의 주에 「나무가 떨기로 나는 것을 관이라 한다」 하였다. 『이아』 끝 장에 또 「나무가 족생하는 것을 관이라 한다」 하였으니 족(族)도 떨기로 모인 것이다. 그래서 강남의 『시경』 고본은 다 총취(叢聚)의 총으로 쓰는데, 옛 총(叢) 자가 최(最) 자와 비슷하여 근세의 유생이 최로 고치고 「나무 가운데 가장 높고 긴 것」이라 풀이하였다. 살펴보니 여러 집의 『이아』와 시 풀이에 이렇게 말한 이가 없고, 오직 주속지의 『모시주』가 조(徂)·회(會)의 반절로 읽고 유창종의 시주가 재(在)·공(公)의 반절 또는 조(祖)·회(會)의 반절로 읽었으니 다 억지로 뚫은 것으로 『이아』의 풀이를 잃었다.

13「야(也)」 자를 다 지워 버린 하북의 경전

「也」是語已及助句之辭,文籍備有之矣。河北經傳,悉略此字,其間字有不可得無者,至如「伯也執殳」,「於旅也語」,「回也屢空」,「風,風也,教也」,及詩傳云:「不戢,戢也;不儺,儺也。」「不多,多也。」如斯之類,儻削此文,頗成廢闕。詩言:「靑靑子衿。」傳曰:「靑衿,靑領也,學子之服。」按:古者,斜領下連於衿,故謂領爲衿。孫炎、郭璞注爾雅,曹大家注列女傳,並云:「衿,交領也。」鄴下詩本,旣無「也」字,群儒因謬説云:「靑衿、靑領,是衣兩處之名,皆以靑爲飾。」用釋「靑靑」二字,其失大矣!又有俗學,聞經傳中時須也字,輒以意加之,每不得所,益成可笑。

「야(也)」는 말이 끝남과 구절을 돕는 말이니 문적에 다 갖추어 있다. 하북의 경전은 이 글자를 다 줄였는데 그 가운데 없어서는 안 될 글자도 있다. 「백야집수(伯也執殳)」, 「어려야어(於旅也語)」, 「회야루공(回也屢空)」, 「풍, 풍야, 교야(風,風也,教也)」와 시전의 「부집, 집야; 부나, 나야(不戢,戢也;不儺,儺也)」, 「부다, 다야(不多,多也)」 같은 것은 이 글자를 깎으면 자못 폐하고 빠진 글이 된다. 『시경』에 「푸르고 푸른 그대의 옷깃(靑靑子衿)」이라 하였고 전에 「청금은 푸른 옷깃이니 학생의 옷」이라 하였다. 살펴보니 옛날에는 비스듬한 깃이 아래로 옷섶에 이어졌으므로 깃을 금(衿)이라 하였다. 손염·곽박의 『이아』 주와 조대가의 『열녀전』 주에 다 「금은 교차한 깃」이라 하였다. 업의 『시경』 책에 「야」 자가 없으므로 여러 선비가 그래서 잘못 말하기를 「청금과 청령은 옷의 두 곳 이름으로 다 푸른 것으로 꾸민다」 하고 「청청」 두 글자를 풀이하니 그 잘못이 크다. 또 속된 학자가 경전에 때때로 야 자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문득 제 생각대로 더하여 번번이 자리를 잃으니 더욱 우습다.

14『역』의 촉재 주는 누구인가

易有蜀才注,江南學士,遂不知是何人。王儉四部目錄,不言姓名,題云:「王弼後人。」謝炅、夏侯該,並讀數千卷書,皆疑是譙周;而李蜀書一名漢之書,云:「姓范名長生,自稱蜀才。」南方以晉家渡江後,北間傳記,皆名爲僞書,不貴省讀,故不見也。

『역』에 촉재(蜀才)의 주가 있는데 강남 학사들은 마침내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왕검의 『사부목록』은 성명을 말하지 않고 「왕필의 후인」이라 적었다. 사경·하후해는 다 수천 권을 읽었는데 다 초주가 아닐까 의심하였다. 그런데 이씨의 『촉서』 일명 『한지서』에 「성은 범, 이름은 장생으로 스스로 촉재라 일컬었다」 하였다. 남방에서는 진나라가 강을 건넌 뒤 북쪽의 전기를 다 위서라 하여 읽기를 귀히 여기지 않았으므로 보지 못한 것이다.

15「나고굉」의 나(臝)는 소매를 걷는 것

禮王制云:「臝股肱。」鄭注云:「謂揎衣出其臂脛。」今書皆作擐甲之擐。國子博士蕭該云:「擐當作揎,音宣,擐是穿著之名,非出臂之義。」案字林,蕭讀是,徐爰音患,非也。

『예기』 왕제에 「나고굉(臝股肱)」이라 하였고 정현의 주에 「옷을 걷어 그 팔과 정강이를 드러내는 것」이라 하였다. 지금 책은 다 갑옷 입는 환(擐)으로 쓴다. 국자박사 소해는 「환은 선(揎)으로 써야 하니 소리는 선(宣)이다. 환은 꿰어 입는다는 이름이지 팔을 드러낸다는 뜻이 아니다」 하였다. 『자림』을 살피면 소해의 읽기가 옳고 서원이 환(患)으로 읽은 것은 그르다.

16「전긍」인가 「전소」인가

漢書:「田肯賀上。」江南本皆作「宵」字。沛國劉顯,博覽經籍,偏精班漢,梁代謂之漢聖。顯子臻,不墜家業。讀班史,呼爲田肯。梁元帝嘗問之,答曰:「此無義可求,但臣家舊本,以雌黃改『宵』爲『肯』。」元帝無以難之。吾至江北,見本爲「肯」。

『한서』에 「전긍(田肯)이 임금에게 하례하였다」 하였는데 강남본은 다 「소(宵)」 자로 되어 있다. 패국의 유현은 경적을 널리 보고 특히 반고의 『한서』에 정통하여 양나라에서 한성(漢聖)이라 하였다. 유현의 아들 유진도 가업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반고의 사서를 읽으며 전긍이라 불렀다. 양 원제가 일찍이 물으니 답하였다. 「여기에는 구할 뜻이 없으나 다만 신의 집안 옛 책에 자황으로 『소』를 『긍』으로 고쳤습니다.」 원제가 따지지 못하였다. 내가 강북에 이르러 보니 책이 「긍」으로 되어 있었다.

17「자색와성」은 생김새가 아니다

漢書王莽贊云:「紫色蛙聲,餘分閏位。」蓋謂非玄黃之色,不中律呂之音也。近有學士,名問甚高,遂云:「王莽非直鳶髆虎視,而復紫色蛙聲。」亦爲誤矣。

『한서』 왕망찬에 「자줏빛과 개구리 소리, 남은 나머지가 윤위」라 하였으니 대개 정색인 검고 누런 빛이 아니고 율려에 맞는 소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근래 한 학사가 이름이 매우 높은데 마침내 「왕망은 솔개 어깨에 범 눈길일 뿐 아니라 또 자줏빛 낯에 개구리 소리였다」 하니 역시 잘못이다.

18책(策)·협(筴), 실(悉)·술(述), 투(妒)·구(姤)

簡策字,竹下施朿,末代隸書,似杞、宋之宋,亦有竹下遂爲夾者;猶如刺字之傍應爲朿,今亦作夾。徐仙民春秋、禮音,遂以筴爲正字,以策爲音,殊爲顛倒。史記又作悉字,誤而爲述,作妒字,誤而爲姤,裴、徐、鄒皆以悉字音述,以妒字音姤。旣爾,則亦可以亥爲豕字音,以帝爲虎字音乎?

간책(簡策)의 책 자는 대 죽(竹) 아래 자(朿)를 쓰는데 말세의 예서는 기·송(杞宋)의 송과 비슷하고 대 죽 아래를 마침내 협(夾)으로 쓴 것도 있다. 자(刺) 자의 곁도 자(朿)여야 하는데 지금 또 협으로 쓰는 것과 같다. 서선민의 『춘추음』·『예음』은 마침내 협(筴)을 바른 글자로 삼고 책(策)을 음으로 삼았으니 몹시 뒤집힌 것이다. 『사기』는 또 실(悉) 자를 잘못 술(述)로 쓰고 투(妒) 자를 잘못 구(姤)로 썼는데 배인·서광·추탄생이 다 실 자를 술로 읽고 투 자를 구로 읽었다. 그렇다면 또한 해(亥)를 시(豕) 자의 음으로 삼고 제(帝)를 호(虎) 자의 음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19복희(虙羲)를 복희(宓羲)로 잘못 쓴 내력

張揖云:「虙,今伏羲氏也。」孟康漢書古文注亦云:「虙,今伏。」而皇甫謐云:「伏羲或謂之宓羲。」按諸經史緯候,遂無宓羲之號。虙字從虍,宓字從宓□〔去掉必〕,下俱爲必,末世傳寫,遂誤以虙爲宓,而帝王世紀因更立名耳。何以驗之?孔子弟子虙子賤爲單父宰,即虙羲之後,俗字亦爲宓,或復加山。今兗州永昌郡城,舊單父地也,東門有子賤碑,漢世所立,乃曰:「濟南伏生,即子賤之後。」是知虙之與伏,古來通字,誤以爲宓,較可知矣。

장읍이 「복(虙)은 지금의 복희씨다」 하였고 맹강의 『한서고문주』도 「복(虙)은 지금의 복(伏)」이라 하였다. 그런데 황보밀은 「복희를 더러 복희(宓羲)라 한다」 하였다. 살펴보니 여러 경사와 위서에 끝내 복희(宓羲)라는 이름이 없다. 복(虙) 자는 호(虍)를 따르고 복(宓) 자는 갓머리 아래 □〔去掉必〕를 따라 아래는 다 필(必)인데 말세에 베끼면서 마침내 복(虙)을 복(宓)으로 잘못 쓰고 『제왕세기』가 그로 인해 다시 이름을 세운 것일 뿐이다.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공자의 제자 복자천(虙子賤)이 단보의 수령이 되었는데 곧 복희의 후손이며 속자로 역시 복(宓)이라 쓰고 더러 뫼 산을 더하기도 한다. 지금 연주 영창군성은 옛 단보 땅인데 동문에 자천의 비가 있어 한나라 때 세운 것으로 「제남의 복생(伏生)은 곧 자천의 후손」이라 하였다. 이로써 복(虙)과 복(伏)은 예부터 통용하는 글자이고 복(宓)으로 잘못 쓴 것임을 뚜렷이 알 수 있다.

20「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마라」의 원문

太史公記曰:「寧爲雞口,無爲牛後。」此是删戰國策耳。案:延篤戰國策音義曰:「尸,雞中之主。從,牛子。」然則,「口」當爲「尸」,「後」當爲「從」,俗寫誤也。

태사공의 기록에 「차라리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뒤가 되지 마라」 하였는데 이는 『전국책』을 줄인 것이다. 살펴보니 연독의 『전국책음의』에 「시(尸)는 닭 가운데 주인이요 종(從)은 소의 새끼다」 하였다. 그렇다면 「구(口)」는 「시(尸)」여야 하고 「후(後)」는 「종(從)」이어야 하니 속인이 베끼며 잘못한 것이다.

21「기양(伎癢)」이 「배회」로 바뀌다

應劭風俗通云:「太史公記:『高漸離變名易姓,爲人庸保,匿作於宋子,久之作苦,聞其家堂上有客擊筑,伎癢,不能無出言。』」案:伎癢者,懷其伎而腹癢也。是以潘岳射雉賦亦云:「徒心煩而伎癢。」今史記並作「徘徊」,或作「彷徨不能無出言」,是爲俗傳寫誤耳。

응소의 『풍속통』에 「태사공의 기록에 『고점리가 이름과 성을 바꾸고 남의 고용살이를 하며 송자에 숨어 일하다가 오랫동안 괴로이 일하던 중 그 집 당 위에서 손님이 축을 타는 것을 듣고 재주가 근질거려(伎癢) 말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살펴보니 기양이란 제 재주를 품고 있어 배 속이 가려운 것이다. 그래서 반악의 「사치부」에도 「한갓 마음이 번거롭고 재주가 근질거린다」 하였다. 지금 『사기』는 다 「배회(徘徊)」로 쓰고 더러 「방황하여 말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로 쓰니 이는 속인이 전하며 베껴 잘못한 것이다.

22「투미(妒媚)」는 「투모(妒媢)」

太史公論英布曰:「禍之興自愛姬,生於妒媚,以至滅國。」又漢書外戚傳亦云:「成結寵妾妒媚之誅。」此二「媚」並當作「媢」,媢亦妒也,義見禮記、三蒼。且五宗世家亦云:「常山憲王後妒媢。」王充論衡云:「妒夫媢婦生,則忿怒鬬訟。」益知媢是妒之別名。原英布之誅爲意賁赫耳,不得言媚。

태사공이 영포를 논하여 「화의 일어남은 사랑하는 첩에게서 비롯되어 투미(妒媚)에서 생겨 나라를 멸하는 데 이르렀다」 하였고, 또 『한서』 외척전에도 「마침내 총첩의 투미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하였다. 이 두 「미(媚)」는 다 「모(媢)」여야 하니 모도 투기라는 뜻으로 『예기』와 『삼창』에 보인다. 또 「오종세가」에도 「상산헌왕의 왕후가 투모하였다」 하였고 왕충의 『논형』에 「투기하는 남편과 투기하는 아내가 나면 성내어 다투고 송사한다」 하였으니 모가 투기의 다른 이름임을 더욱 알겠다. 영포가 죽임을 당한 것은 분혁을 의심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니 미(媚)라 할 수 없다.

23진나라 저울추의 명문으로 「외림」이 「외장」임을 알다

史記始皇本紀:「二十八年,丞相隗林、丞相王綰等,議於海上。」諸本皆作山林之「林。」。開皇二年五月,長安民掘得秦時鐵稱權,旁有銅塗鐫銘二所。其一所曰:「廿六年,皇帝盡並兼天下諸侯,黔首大安,立號爲皇帝,乃詔丞相狀、綰,法度量則不壹嫌疑者,皆明壹之。」凡四十字。其一所曰:「元年,制詔丞相斯、去疾,法度量,盡始皇帝爲之,皆有刻辭焉。今襲號而刻辭不稱始皇帝,其於久遠也,如後嗣爲之者,不稱成功盛德,刻此詔□左,使毋疑。」凡五十八字,一字磨滅,見有五十七字,了了分明。其書兼爲古隸。余被敕寫讀之,與內史令李德林對,見此稱權,今在官庫;其「丞相狀」字,乃爲狀貌之「狀」,丬旁作犬;則知俗作「隗林」,非也,當爲「隗狀」耳。

『사기』 진시황본기에 「28년에 승상 외림(隗林)과 승상 왕관 등이 바다 위에서 의논하였다」 하였는데 여러 판본이 다 산림의 「림(林)」으로 되어 있다. 개황 이년 5월에 장안의 백성이 땅을 파다 진나라 때 쇠 저울추를 얻었는데 곁에 구리를 입혀 새긴 명문 두 곳이 있었다. 한 곳에 「26년에 황제가 천하의 제후를 다 아울러 백성이 크게 편안해지니 호를 세워 황제라 하고 이에 승상 장(狀)과 관(綰)에게 조하여 도량의 법이 통일되지 않아 의심스러운 것을 다 밝혀 하나로 하게 하였다」 하니 모두 마흔 자다. 한 곳에 「원년에 승상 사(斯)와 거질(去疾)에게 제조하니, 도량의 법은 다 시황제가 만든 것이라 다 새긴 글이 있다. 이제 호를 이어받으면서 새긴 글에 시황제라 일컫지 않으면 오래 뒤에 후사가 만든 것 같아 이룬 공과 성한 덕을 일컫지 못하리니 이 조서를 □왼쪽에 새겨 의심이 없게 하라」 하니 모두 쉰여덟 자로 한 자는 닳아 없어지고 쉰일곱 자가 또렷이 보인다. 그 글씨는 고예를 겸하였다. 나는 칙명을 받아 베껴 읽으며 내사령 이덕림과 마주 앉아 이 저울추를 보았는데 지금 관고에 있다. 그 「승상 장」 자는 곧 상모(狀貌)의 장(狀)으로 장(丬) 곁에 견(犬)을 썼으니, 속본의 「외림」이 그르고 「외장(隗狀)」이어야 함을 알겠다.

24「중외제복(禔福)」의 제는 보일 시(示) 변

漢書云:「中外禔福。」字當從示。禔,安也,音匙匕之匙,義見蒼雅、方言。河北學士皆云如此。而江南書本,多誤從手,屬文者對耦,並爲提挈之意,恐爲誤也。

『한서』에 「안팎이 제복(禔福)하다」 하였는데 글자는 마땅히 보일 시(示)를 따라야 한다. 제는 편안하다는 뜻이고 소리는 시비(匙匕)의 시이니 뜻은 『창힐』·『이아』·『방언』에 보인다. 하북 학사들은 다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강남의 책은 흔히 잘못 손 수(手)를 따르고 글 짓는 이는 짝을 맞추어 다 제설(提挈)의 뜻으로 여기니 잘못인 듯하다.

25「금중」을 「성중」이라 한 까닭

或問:「漢書注:『爲元后父名禁,故禁中爲省中。』何故以『省』代『禁』?」答曰:「案:周禮宮正:『掌王宮之戒令糾禁。』鄭注云:『糾,猶割也,察也。』李登云:『省,察也。』張揖云:『省,今省祭□〔示改言〕也。』然則小井、所領二反,並得訓察。其處旣常有禁衞省察,故以『省』代『禁』。祭□〔示改言〕,古察字也。」

어떤 이가 물었다. 「『한서』 주에 『원후의 아버지 이름이 금(禁)이므로 금중(禁中)을 성중(省中)이라 하였다』 하였는데 어찌하여 『성』으로 『금』을 대신하였습니까.」 답하였다. 「살펴보니 『주례』 궁정에 『왕궁의 계령과 규금(糾禁)을 맡는다』 하였고 정현의 주에 『규는 살피는 것과 같다』 하였으며, 이등은 『성(省)은 살피는 것』이라 하고 장읍은 『성은 지금의 성찰(省□〔示改言〕)』이라 하였소. 그렇다면 소정(小井)·소령(所領) 두 반절이 다 살핀다는 뜻을 얻소. 그곳에 늘 금위가 있어 살피므로 『성』으로 『금』을 대신한 것이오. 찰(□〔示改言〕)은 옛 찰(察) 자요.」

26「사성소후」란 외척의 작은 후

漢明帝紀:「爲四姓小侯立學。」按:桓帝加元服,又賜四姓及梁、鄧小侯帛,是知皆外戚也。明帝時,外戚有樊氏、郭氏、陰氏、馬氏爲四姓。謂之小侯者,或以年小獲封,故須立學耳。或以侍祠猥朝,侯非列侯,故曰小侯,禮云:「庶方小侯。」則其義也。

한(漢) 명제기에 「사성소후(四姓小侯)를 위해 학교를 세웠다」 하였다. 살펴보니 환제가 원복을 가할 때 또 사성과 양·등의 소후에게 비단을 내렸으니 다 외척임을 알겠다. 명제 때 외척에 번씨·곽씨·음씨·마씨가 있어 사성이 되었다. 소후라 이르는 것은 더러 어린 나이에 봉을 받았으므로 학교를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혹은 시사(侍祠)와 외조(猥朝)로 후가 열후가 아니므로 소후라 하였다고도 하니, 『예기』에 「여러 지방의 소후」라 한 것이 그 뜻이다.

27황새가 문 것은 전어(鱣)가 아니라 드렁허리(鱔)

後漢書云:「鸛雀銜三鱔魚。」多假借爲鱣鮪之鱣;俗之學士,因謂之爲鱣魚。案:魏武四時食制:「鱣魚大如五斗奩,長一丈。」郭璞注爾雅:「鱣長二三丈。」安有鸛雀能勝一者,況三乎?鱣又純灰色,無文章也。鱔魚長者不過三尺,大者不過三指,黃地黑文;故都講云:「蛇鱔,卿大夫服之象也。」續漢書及搜神記亦説此事,皆作「鱔」字。孫卿云:「魚鱉鰍鱣。」及韓非、説苑皆曰:「鱣似蛇,蠶似蠋。」並作「鱣」字。假「鱣」爲「鱔」,其來久矣。

『후한서』에 「황새가 세 마리 선어(鱔魚)를 물었다」 하였는데 흔히 전유(鱣鮪)의 전(鱣)으로 가차하고 속된 학사들이 그래서 전어라 한다. 살펴보니 위 무제의 「사시식제」에 「전어는 크기가 닷 말들이 상자만 하고 길이가 한 길」이라 하였고 곽박의 『이아』 주에 「전은 길이가 두세 길」이라 하였으니 어찌 황새가 한 마리라도 감당하겠으며 하물며 셋이랴. 전은 또 순수한 잿빛으로 무늬가 없다. 드렁허리는 긴 것이 석 자를 넘지 않고 큰 것이 손가락 셋을 넘지 않으며 누런 바탕에 검은 무늬다. 그래서 도강(都講)이 「뱀과 드렁허리는 경대부 옷의 상징」이라 하였다. 『속한서』와 『수신기』도 이 일을 말하며 다 「선(鱔)」 자로 썼다. 순경이 「물고기·자라·미꾸라지·전」이라 하고 한비와 『설원』이 다 「전은 뱀 같고 누에는 뽕나무벌레 같다」 하였으니 다 「전」 자로 썼다. 「전」을 「선」으로 빌려 쓴 것은 그 유래가 오래다.

28「젖 먹이는 범의 굴」을 「여섯」으로 잘못 쓴 강남본

後漢書:「酷吏樊曄爲天水郡守,凉州爲之歌曰:『寧見乳虎穴,不入冀府寺。』」而江南書本「穴」皆誤作「六」。學士因循,迷而不寤。夫虎豹穴居,事之較者;所以班超云:「不探虎穴,安得虎子?」寧當論其六七耶?

『후한서』에 「혹리 번엽이 천수군수가 되니 양주에서 노래하기를 『차라리 젖 먹이는 범의 굴을 볼지언정 기부의 관청에는 들지 않으리』 하였다」 하였는데 강남의 책은 「혈(穴)」을 다 「육(六)」으로 잘못 썼다. 학사들이 그대로 따르며 헤매어 깨닫지 못한다. 범과 표범이 굴에 사는 것은 분명한 일이므로 반초가 「범의 굴을 더듬지 않고 어찌 범의 새끼를 얻으랴」 하였으니 어찌 여섯이니 일곱이니 논하겠는가.

29「풍취삭폐」의 폐(肺)는 깎아 낸 나뭇조각

後漢書楊由傳云:「風吹削肺。」此是削札牘之柿耳。古者,書誤則削之,故左傳云「削而投之」是也。或即謂札爲削,王褒童約曰:「書削代牘。」蘇竟書云:「昔以摩硏編削之才。」皆其證也。詩云:「伐木滸滸。」毛傳云:「滸滸,柿貌也。」史家假借爲肝肺字,俗本因是悉作脯臘之脯,或爲反哺之哺。學士因解云:「削哺,是屛障之名。」旣無證據,亦爲妄矣!此是風角占候耳。風角書曰:「庶人風者,拂地揚塵轉削。」若是屛障,何由可轉也?

『후한서』 양유전에 「바람이 삭폐(削肺)를 날렸다」 하였는데 이것은 나무패를 깎아 낸 조각(柿)일 뿐이다. 옛날에는 글을 잘못 쓰면 깎아 냈으므로 『좌전』에 「깎아서 던졌다」 한 것이 이것이다. 혹은 곧 나무패를 삭이라 하니 왕포의 「동약」에 「삭에 써서 나무패를 대신한다」 하고 소경의 글에 「옛날 갈고 다듬어 엮고 깎는 재주로」 한 것이 다 그 증거다. 『시경』에 「나무를 베니 호호(滸滸)하다」 하였고 모전에 「호호는 나뭇조각의 모양」이라 하였다. 사가가 간폐(肝肺)의 글자로 가차하였는데 속본은 그로 인해 다 포랍(脯臘)의 포로 쓰거나 반포(反哺)의 포로 쓴다. 학사들은 그래서 「삭포는 병풍의 이름」이라 풀이하니 증거도 없고 또한 망령되다. 이것은 풍각(風角)으로 점치는 것일 뿐이다. 『풍각서』에 「서인의 바람은 땅을 스치고 먼지를 날리며 나뭇조각을 굴린다」 하였으니 병풍이라면 어찌 굴릴 수 있겠는가.

30「산과(蒜果)」의 과는 알갱이 과(顆)

三輔決錄云:「前隊大夫范仲公,鹽豉蒜果共一筩。」「果」當作魏顆之「顆」。北土通呼物一塊,改爲一顆,蒜顆是俗間常語耳。故陳思王鷂雀賦曰:「頭如果蒜,目似擘椒。」又道經云:「合口誦經聲璅璅,眼中淚出珠子□〔石果〕。」其字雖異,其音與義頗同。江南但呼爲蒜符,不知謂爲顆。學士相承,讀爲裹結之裹,言鹽與蒜共一苞裹,內筩中耳。正史削繁音義又音蒜顆爲苦戈反,皆失也。

『삼보결록』에 「전대대부 범중공은 소금과 메주와 마늘 과(果)를 한 통에 담았다」 하였는데 「과」는 위과(魏顆)의 「과(顆)」로 써야 한다. 북쪽 땅에서는 두루 물건 한 덩이를 한 과라 고쳐 부르니 마늘 한 알(蒜顆)은 속간의 흔한 말이다. 그래서 진사왕의 「요작부」에 「머리는 마늘 알 같고 눈은 쪼갠 산초 같다」 하였고 또 도경에 「입을 모아 경을 외니 소리 자잘하고 눈에서 눈물이 구슬처럼 □〔石果〕」 하였으니 글자는 다르지만 소리와 뜻은 자못 같다. 강남에서는 다만 산부(蒜符)라 부를 뿐 과라 하는 줄 모른다. 학사들이 서로 이어받아 과결(裹結)의 과(裹)로 읽고 소금과 마늘을 한 꾸러미에 싸서 통 안에 넣은 것이라 하였다. 『정사삭번음의』는 또 산과를 고(苦)·과(戈)의 반절로 읽었으니 다 잘못이다.

31장제가 스스로 만든 글자

有人訪吾曰:「魏志蔣濟上書云『弊□〔支力〕之民』,是何字也?」余應之曰:「意爲□〔支力〕即是□〔危皮〕倦之□〔危皮〕耳。張揖、呂忱並云:『支傍作刀劍之刀,亦是剞字。』不知蔣氏自造支傍作筋力之力,或借剞字,終當音九僞反。」

어떤 이가 나를 찾아와 물었다. 「『위지』 장제의 상서에 『폐□〔支力〕한 백성』이라 하였는데 무슨 글자입니까.」 내가 응답하였다. 「내 생각에 □〔支力〕는 곧 □〔危皮〕권(倦)의 □〔危皮〕일 뿐이오. 장읍과 여침이 다 『지(支) 곁에 도검(刀劍)의 도를 쓰면 역시 기(剞) 자』라 하였소. 장씨가 스스로 지 곁에 근력(筋力)의 력을 만든 것인지 혹은 기 자를 빌린 것인지 모르겠으나 끝내 구(九)·위(僞)의 반절로 읽어야 하오.」

32양만의 「탑백(濌伯)」

晉中興書:「太山羊曼,常頽縱任俠,飲酒誕節,兗州號爲濌伯。」此字皆無音訓。梁孝元帝常謂吾曰:「由來不識。唯張簡憲見教,呼爲嚃羹之嚃。自爾便遵承之,亦不知所出。」簡憲是湘州刺史張纘謚也,江南號爲碩學。案:法盛世代殊近,當是耆老相傳;俗間又有濌濌語,蓋無所不施,無所不容之意也。顧野王玉篇誤爲黑傍沓。顧雖博物,猶出簡憲、孝元之下,而二人皆云重邊。吾所見數本,並無作黑者。重沓是多饒積厚之意,從黑更無義旨。

『진중흥서』에 「태산의 양만은 늘 무너지듯 방종하고 임협하며 술을 마시고 절도가 없어 연주에서 탑백(濌伯)이라 불렀다」 하였는데 이 글자는 어디에도 음과 풀이가 없다. 양 효원제가 늘 내게 말하였다. 「본디 몰랐는데 오직 장간헌이 가르쳐 주어 탑갱(嚃羹)의 탑으로 읽는다. 그로부터 따르고 있으나 역시 출처는 모른다.」 간헌은 상주자사 장찬의 시호로 강남에서 큰 학자라 하였다. 살펴보니 하법성은 시대가 매우 가까우니 마땅히 노인들에게서 전해 들었을 것이다. 속간에 또 탑탑(濌濌)이라는 말이 있는데 대개 베풀지 않는 데가 없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고야왕의 『옥편』은 잘못 검을 흑(黑) 변에 답(沓)으로 썼다. 고야왕이 비록 박물하나 오히려 간헌과 효원제의 아래이고 두 사람이 다 중(重) 변이라 하였다. 내가 본 몇 판본에도 흑으로 쓴 것은 없다. 중답(重沓)은 많고 넉넉히 쌓여 두텁다는 뜻이니 흑을 따르면 더욱 뜻이 없다.

33「삼부」 시의 부(婦)는 며느리, 「장인」은 시아버지

古樂府歌詞,先述三子,次及三婦,婦是對舅姑之稱。其末章云:「丈人且安坐,調弦未遽央。」古者,子婦供事舅姑,旦夕在側,與兒女無異,故有此言。丈人亦長老之目,今世俗猶呼其祖考爲先亡丈人。又疑「丈」當作「大」,北間風俗,婦呼舅爲大人公。「丈」之與「大」,易爲誤耳。近代文士,頗作三婦詩,乃爲匹嫡並耦己之群妻之意,又加鄭、衞之辭,大雅君子,何其謬乎?

옛 악부 가사에 먼저 세 아들을 말하고 다음 세 며느리에 미치니 부(婦)는 시부모를 상대로 하는 이름이다. 그 끝 장에 「장인은 편안히 앉으소서, 줄을 고르니 아직 다하지 않았네」 하였다. 옛날 며느리는 시부모를 받들어 아침저녁 곁에 있어 자녀와 다름이 없었으므로 이런 말이 있다. 장인은 또한 어른을 가리키는 이름이니 지금 세속에서도 그 조부와 아버지를 돌아가신 장인이라 부른다. 또 「장(丈)」은 「대(大)」로 써야 할 것으로 의심되니 북쪽 풍속에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대인공(大人公)이라 부른다. 장과 대는 잘못되기 쉽다. 근대의 문사가 자못 삼부시를 짓는데 곧 적처와 제 여러 아내를 짝짓는 뜻으로 삼고 또 정·위의 말을 더하니, 대아군자가 어찌 그리 그릇되는가.

34「취염이」의 취(吹)는 취(炊)

古樂府歌百里奚詞曰:「百里奚,五羊皮。憶別時,烹伏雌,吹扊□〔上戸下多〕;今日富貴忘我爲!」「吹」當作炊煮之「炊」。案:蔡邕月令章句曰:「鍵,關牡也,所以止扉,或謂之剡移。」然則當時貧困,並以門牡木作薪炊耳。聲類作扊,又或作扂。

옛 악부의 백리해 노래에 「백리해여, 양가죽 다섯 장이여. 헤어질 때를 생각하니 알 품은 암탉을 삶고 문빗장을 때어 취(吹)하였네. 오늘 부귀해져 나를 잊었는가」 하였다. 「취(吹)」는 밥 짓는 「취(炊)」로 써야 한다. 살펴보니 채옹의 『월령장구』에 「건(鍵)은 빗장의 수쇠니 문짝을 멈추는 것으로 더러 섬이(剡移)라 한다」 하였다. 그렇다면 그때 가난하여 문빗장 나무까지 땔감으로 밥을 지은 것이다. 『성류』는 염(扊)으로 쓰고 더러 점(扂)으로도 쓴다.

35『통속문』은 누가 지었나

通俗文,世間題云「河南服虔字子愼造」。虔旣是漢人,其敍乃引蘇林、張揖;蘇、張皆是魏人。且鄭玄以前,全不解反語,通俗反音,甚會近俗。阮孝緒又云「李虔所造」。河北此書,家藏一本,遂無作李虔者。晉中經簿及七志,並無其目,竟不得知誰制。然其文義允愜,實是高才。殷仲堪常用字訓,亦引服虔俗説,今復無此書,未知即是通俗文,爲當有異?或更有服虔乎?不能明也。

『통속문』은 세간에 「하남 복건, 자는 자신이 지음」이라 적혀 있다. 복건은 한나라 사람인데 그 서문에 소림·장읍을 끌어왔고 소·장은 다 위나라 사람이다. 또 정현 이전에는 반절을 전혀 알지 못하였는데 『통속문』의 반절음은 근세 속음에 매우 맞는다. 완효서는 또 「이건이 지었다」 하였다. 하북에서는 이 책을 집집이 한 벌씩 간직하는데 이건이 지었다고 한 것은 끝내 없다. 『진중경부』와 『칠지』에 다 그 목록이 없으니 끝내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글과 뜻이 알맞으니 실로 높은 재주다. 은중감의 『상용자훈』도 복건의 속설을 끌어왔는데 지금 다시 이 책이 없으니 곧 『통속문』인지 다른 것인지, 혹은 또 다른 복건이 있는지 밝힐 수 없다.

36『산해경』에 후세 군현 이름이 있는 까닭

或問:「山海經,夏禹及益所記,而有長沙、零陵、桂陽、諸暨,如此郡縣不少,以爲何也?」答曰:「史之闕文,爲日久矣;加復秦人滅學,董卓焚書,典籍錯亂,非止於此。譬猶本草神農所述,而有豫章、朱崖、趙國、常山、奉高、眞定、臨淄、馮翊等郡縣名,出諸藥物;爾雅周公所作,而云『張仲孝友』;仲尼修春秋,而經書孔丘卒;世本左丘明所書,而有燕王喜、漢高祖;汲冢瑣語,乃載秦望碑;蒼頡篇李斯所造,而云『漢兼天下,海內並厠,豨黥韓覆,畔討滅殘』;列仙傳劉向所造,而贊云七十四人出佛經;列女傳亦向所造,其子歆又作頌,終於趙悼后,而傳有更始韓夫人、明德馬后及梁夫人嫕:皆由後人所羼,非本文也。」

어떤 이가 물었다. 「『산해경』은 하나라 우와 익이 기록한 것인데 장사·영릉·계양·제기 같은 군현이 적지 않게 있으니 어찌 된 일입니까.」 답하였다. 「사서의 빠진 글은 그 날이 오래되었고, 게다가 진나라 사람이 학문을 없애고 동탁이 책을 불태워 전적이 뒤섞인 것이 여기에 그치지 않소. 비유하자면 『본초』는 신농이 서술한 것인데 예장·주애·조국·상산·봉고·진정·임치·풍익 같은 군현 이름이 있어 약물의 산지로 나오고, 『이아』는 주공이 지은 것인데 『장중은 효성스럽고 우애 있다』 하며, 중니가 『춘추』를 닦았는데 경문에 공구의 죽음이 적혀 있고, 『세본』은 좌구명이 쓴 것인데 연왕 희와 한 고조가 있으며, 급총의 『쇄어』에 진망비를 실었고, 『창힐편』은 이사가 지은 것인데 『한이 천하를 겸하여 해내를 아울러 세우니 경포와 한신이 엎어지고 배반하는 이를 쳐서 없앴다』 하며, 『열선전』은 유향이 지은 것인데 찬에 일흔네 사람이 불경에서 나왔다 하고, 『열녀전』도 유향이 짓고 그 아들 유흠이 또 송을 지어 조도후에서 끝나는데 전에 갱시제의 한부인·명덕마후·양부인 예가 있으니, 다 뒷사람이 끼워 넣은 것이지 본문이 아니오.」

37『동궁구사』의 속자들

或問曰:「東宮舊事何以呼鴟尾爲祠尾?」答曰:「張敝者,呉人,不甚稽古,隨宜記注,逐鄕俗訛謬,造作書字耳。呉人呼祠祀爲鴟祀,故以祠代鴟字;呼紺爲禁,故以糹傍作禁代紺字;呼盞爲竹簡反,故以木傍作展代盞字;呼鑊字爲霍字,故以金傍作霍代鑊字;又金傍作患爲鐶字,木傍作鬼爲魁字,火傍作庶爲炙字,旣下作毛爲髻字;金花則金傍作華,窗扇則木傍作扇:諸如此類,專輒不少。

어떤 이가 물었다. 「『동궁구사』는 어찌하여 치미(鴟尾)를 사미(祠尾)라 부릅니까.」 답하였다. 「장창은 오나라 사람으로 옛것을 그리 상고하지 않고 되는대로 기록하며 고장 풍속의 잘못을 따라 글자를 지어 냈을 뿐이오. 오나라 사람은 사사(祠祀)를 치사(鴟祀)라 부르므로 사(祠)로 치(鴟) 자를 대신하였고, 감(紺)을 금(禁)이라 부르므로 실 사(糹) 변에 금을 써서 감 자를 대신하였으며, 잔(盞)을 죽간(竹簡)의 반절로 부르므로 나무 목(木) 변에 전(展)을 써서 잔 자를 대신하였고, 확(鑊) 자를 곽(霍) 자로 부르므로 쇠 금(金) 변에 곽을 써서 확 자를 대신하였소. 또 금 변에 환(患)을 써서 환(鐶) 자로, 목 변에 귀(鬼)를 써서 괴(魁) 자로, 불 화(火) 변에 서(庶)를 써서 자(炙) 자로, 기(旣) 아래 모(毛)를 써서 계(髻) 자로 삼았고, 금화(金花)는 금 변에 화(華)를, 창선(窗扇)은 목 변에 선(扇)을 썼으니, 이런 따위로 제멋대로 한 것이 적지 않소.」

38「육색계□〔糹畏〕」는 무엇인가

又問:「東宮舊事『六色罽□〔糹畏〕』,是何等物?當作何音?」答曰:「案:説文云:『莙,牛藻也,讀若威。』音隱:『塢瑰反。』即陸機所謂『聚藻,葉如蓬』者也。又郭璞注三蒼亦云:『蘊,藻之類也,細葉蓬茸生。』然今水中有此物,一節長數寸,細茸如絲,圓繞可愛,長者二三十節,猶呼爲莙。又寸斷五色絲,橫著綫股間繩之,以象莙草,用以飾物,即名爲莙;於時當紺六色罽,作此莙以飾緄帶,張敞因造糹旁畏耳,宜作隈。」

또 물었다. 「『동궁구사』의 『육색계□〔糹畏〕』는 무슨 물건이며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답하였다. 「살펴보니 『설문』에 『군(莙)은 우조(牛藻)이니 위(威)처럼 읽는다』 하고 음은(音隱)에 『오(塢)·괴(瑰)의 반절』이라 하였소. 곧 육기가 말한 『취조(聚藻)는 잎이 쑥 같다』는 것이오. 또 곽박의 『삼창』 주에도 『온(蘊)은 마름 종류로 가는 잎이 더부룩이 난다』 하였소. 지금 물속에 이것이 있어 한 마디 길이가 몇 치이고 가는 털이 실 같아 둥글게 감겨 사랑스러우며 긴 것은 이삼십 마디인데 아직 군이라 부르오. 또 오색 실을 한 치씩 잘라 실 가닥 사이에 가로 넣어 꼬아 군 풀을 본떠 물건 꾸미는 데 쓰니 곧 군이라 이름하오. 그때 감색 육색계에 이 군을 만들어 곤대(緄帶)를 꾸몄으므로 장창이 그래서 실 사 곁에 외(畏)를 만들었을 뿐이니 마땅히 외(隈)로 써야 하오.」

39백인성 동북의 외로운 산 — 권무산

柏人城東北有一孤山,古書無載者。唯闞駰十三州志以爲舜納於大麓,即謂此山,其上今猶有堯祠焉;世俗或呼爲宣務山,或呼爲虛無山,莫知所出。趙郡士族有李穆叔、季節兄弟、李普濟,亦爲學問,並不能定鄕邑此山。余嘗爲趙州佐,共太原王邵讀柏人城西門內碑。碑是漢桓帝時柏人縣民爲縣令徐整所立,銘曰:「山有巏婺□〔女改山〕,王喬所仙。」方知此巏婺□〔女改山〕山也。巏字遂無所出。婺□〔女改山〕字依諸字書,即旄丘之旄也;旄字,字林一音亡付反,今依附俗名,當音權務耳。入鄴,爲魏收説之,收大嘉嘆。値其爲趙州莊嚴寺碑銘,因云:「權務之精。」即用此也。

백인성 동북에 외로운 산 하나가 있는데 옛 책에 실린 데가 없다. 오직 감인의 『십삼주지』가 순이 대록(大麓)에 들어갔다는 것이 곧 이 산이라 하였고 그 위에는 지금도 요의 사당이 있다. 세속에서 더러 선무산이라 부르고 더러 허무산이라 부르며 어디서 나왔는지 모른다. 조군의 사족 이목숙·계절 형제와 이보제도 학문을 하였으나 다 고향의 이 산을 정하지 못하였다. 내가 일찍이 조주의 보좌가 되어 태원의 왕소와 함께 백인성 서문 안의 비를 읽었다. 비는 한 환제 때 백인현 백성이 현령 서정을 위해 세운 것으로 명에 「산에 권무□〔女改山〕가 있으니 왕교가 신선이 된 곳」이라 하였다. 비로소 이것이 권무□〔女改山〕산임을 알았다. 권(巏) 자는 끝내 출처가 없다. 무□〔女改山〕 자는 여러 자서에 따르면 곧 모구(旄丘)의 모(旄)다. 모 자는 『자림』에 한 음이 망(亡)·부(付)의 반절이니 지금 속명에 붙여 권무(權務)로 읽어야 한다. 업에 들어가 위수에게 말하니 위수가 크게 감탄하였다. 마침 그가 조주 장엄사의 비명을 지으며 「권무의 정기」라 하였으니 곧 이것을 쓴 것이다.

40하룻밤이 왜 오경인가

或問:「一夜何故五更?更何所訓?」答曰:「漢、魏以來,謂爲甲夜、乙夜、丙夜、丁夜、戊夜,又云鼓,一鼓、二鼓、三鼓、四鼓、五鼓,亦云一更、二更、三更、四更、五更,皆以五爲節。西都賦亦云:『衞以嚴更之署。』所以爾者,假令正月建寅,斗柄夕則指寅,曉則指午矣;自寅至午,凡歷五辰。冬夏之月,雖復長短參差,然辰間遼闊,盈不過六,縮不至四,進退常在五者之間。更,歷也,經也,故曰五更爾。」

어떤 이가 물었다. 「하룻밤을 어찌하여 오경(五更)이라 합니까. 경은 무슨 뜻입니까.」 답하였다. 「한·위 이래로 갑야·을야·병야·정야·무야라 하고 또 고(鼓)라 하여 일고·이고·삼고·사고·오고라 하며 또 일경·이경·삼경·사경·오경이라 하니 다 다섯을 마디로 삼았소. 「서도부」에도 『엄경(嚴更)의 관서로 지킨다』 하였소. 그렇게 하는 까닭은, 가령 정월 건인이면 북두 자루가 저녁에는 인을 가리키고 새벽에는 오를 가리키니 인에서 오까지 모두 다섯 진(辰)을 지나오. 겨울과 여름의 달은 길고 짧음이 들쭉날쭉하지만 진 사이가 넓어 늘어도 여섯을 넘지 않고 줄어도 넷에 이르지 않아 나아가고 물러남이 늘 다섯 사이에 있소. 경은 지난다·거친다는 뜻이므로 오경이라 하오.」

41「출(朮)은 산계」의 계(薊)를 근(筋)으로 읽는 잘못

爾雅云:「朮,山薊也。」郭璞注云:「今朮似薊而生山中。」案:朮葉其體似薊,近世文士,遂讀薊爲筋肉之筋,以耦地骨用之,恐失其義。

『이아』에 「출(朮)은 산계(山薊)다」 하였고 곽박의 주에 「지금 출은 엉겅퀴 같으며 산에서 난다」 하였다. 살펴보니 출의 잎은 그 모양이 엉겅퀴 같은데 근세의 문사가 마침내 계를 근육(筋肉)의 근으로 읽어 지골(地骨)과 짝지어 쓰니 그 뜻을 잃을까 두렵다.

42꼭두각시를 「곽독」이라 부르는 까닭

或問:「俗名傀儡子爲郭禿,有故實乎?」答曰:「風俗通云:『諸郭皆諱禿。』當是前代人有姓郭而病禿者,滑稽戲調,故後人爲其象,呼爲郭禿,猶文康象庾亮耳。」

어떤 이가 물었다. 「속명으로 꼭두각시를 곽독(郭禿)이라 하는데 고사가 있습니까.」 답하였다. 「『풍속통』에 『곽씨들은 다 독(禿)을 휘한다』 하였으니 전대에 성이 곽이고 대머리 병이 있는 이가 있어 익살로 놀렸으므로 뒷사람이 그 형상을 만들어 곽독이라 부른 것이니, 문강(文康)이 유량을 본뜬 것과 같소.」

43옥사를 다스리는 참군을 「장류」라 하는 까닭

或問曰:「何故名治獄參軍爲長流乎?」答曰:「帝王世紀云:『帝少昊崩,其神降於長流之山,於祀主秋。』案:周禮秋官,司寇主刑罰、長流之職,漢、魏捕賊掾耳。晉、宋以來,始爲參軍,上屬司寇,故取秋帝所居爲嘉名焉。」

어떤 이가 물었다. 「어찌하여 치옥참군을 장류(長流)라 합니까.」 답하였다. 「『제왕세기』에 『제 소호가 죽자 그 신이 장류의 산에 내려 제사에서 가을을 주관하였다』 하였소. 살펴보니 『주례』 추관에서 사구가 형벌을 주관하니 장류의 직분은 한·위의 포적연일 뿐이오. 진·송 이래로 비로소 참군이 되어 위로 사구에 속하므로 가을 신이 사는 곳을 취해 좋은 이름으로 삼은 것이오.」

44「허신이 공자보다 낫습니까」

客有難主人曰:「今之經典,子皆謂非,説文所言,於皆云是,然則許愼勝孔子乎?」主人拊掌大笑,應之曰:「今之經典,皆孔子手迹耶?」客曰:「今之説文,皆許愼手迹乎?」答曰:「許愼檢以六文,貫以部分,使不得誤,誤則覺之。孔子存其義而不論其文也。先儒尙得改文從意,何況書寫流傳耶?必如左傳止戈爲武,反正爲乏,皿蟲爲蠱,亥有二首六身之類,後人自不得輒改也,安敢以説文校其是非哉?且余亦不專以説文爲是也,其有援引經傳,與今乖者,未之敢從。又相如封禪書曰:『導一莖六穗於庖,犧雙觡共抵之獸。』此導訓擇,光武詔云:『非徒有豫養導擇之勞』是也。而説文云:『導是禾名。』引封禪書爲證;無妨自當有禾名導,非相如所用也。『禾一莖六穗於庖』,豈成文乎?縱使相如天才鄙拙,強爲此語;則下句當云『麟雙觡共抵之獸』,不得云犧也。吾嘗笑許純儒,不達文章之體,如此之流,不足憑信。大抵服其爲書,隱括有條例,剖析窮根源,鄭玄注書,往往引以爲證;若不信其説,則冥冥不知一點一畫,有何意焉。」

손이 주인에게 따져 물었다. 「지금의 경전은 그대가 다 그르다 하고 『설문』의 말은 다 옳다 하니 그렇다면 허신이 공자보다 낫습니까.」 주인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고 답하였다. 「지금의 경전이 다 공자의 손 글씨인가.」 손이 「지금의 『설문』은 다 허신의 손 글씨입니까」 하니 답하였다. 「허신은 육서로 검증하고 부수로 꿰어 잘못될 수 없게 하였고 잘못되면 알 수 있소. 공자는 그 뜻을 남기고 그 글자를 논하지 않았소. 옛 선비도 오히려 글자를 고쳐 뜻을 따랐는데 하물며 베끼며 전한 것이야. 『좌전』의 지(止)와 과(戈)가 무(武)요, 정(正)을 뒤집으면 핍(乏)이요, 명(皿)과 충(蟲)이 고(蠱)요, 해(亥)에 머리 둘 몸 여섯이 있다는 따위는 뒷사람이 절로 함부로 고칠 수 없으니 어찌 감히 『설문』으로 그 시비를 따지겠소. 또 나도 오로지 『설문』만 옳다 하지 않으니, 경전을 끌어온 것이 지금과 어긋나는 것은 감히 따르지 않소. 또 사마상여의 「봉선서」에 『한 줄기에 여섯 이삭인 것을 부엌에 도(導)하고, 두 뿔이 한 뿌리인 짐승을 희생으로 삼는다』 하였는데 이 도는 가린다는 뜻이니 광무제의 조서에 『한갓 미리 기르고 골라 뽑는 수고가 있을 뿐 아니라』 한 것이 이것이오. 그런데 『설문』은 『도는 벼 이름』이라 하고 「봉선서」를 끌어 증거로 삼았소. 벼 이름 도가 절로 있는 것은 무방하나 사마상여가 쓴 것은 아니오. 『벼 한 줄기 여섯 이삭을 부엌에』가 어찌 글이 되겠소. 설령 상여의 타고난 재주가 비루하고 졸렬하여 억지로 이 말을 지었더라도 아래 구는 『기린의 두 뿔 한 뿌리인 짐승』이라 해야지 희(犧)라 할 수 없소. 나는 일찍이 허신이 순수한 유자라 문장의 체를 모른다고 웃었으니 이런 따위는 믿을 만하지 않소. 그러나 대체로 그 책이 조리 있게 다듬어져 체례가 있고 쪼개 살펴 근원을 다한 것에 탄복하니, 정현이 책에 주할 때 왕왕 끌어와 증거로 삼았소. 그 설을 믿지 않으면 캄캄하여 한 점 한 획에 무슨 뜻이 있는지 모르오.」

45속자를 다 고칠 수는 없으나 다스리지 않을 수 없는 것

世間小學者,不通古今,必依小篆,是正書記;凡爾雅、三蒼、説文,豈能悉得蒼頡本指哉?亦是隨代損益,互有同異。西晉已往字書,何可全非?但令體例成就,不爲專輒耳。考校是非,特須消息。至如「仲尼居」,三字之中,兩字非體,三蒼「尼」旁益「丘」,説文「尸」下施「幾」:如此之類,何由可從?古無二字,又多假借,以中爲仲,以説爲悅,以召爲邵,以閑爲閑:如此之徒,亦不勞改。自有訛謬,過成鄙俗,「亂」旁爲「舌」,「揖」下無「耳」,「黿」、「鼉」從「龜」,「奮」、「奪」從「雚」,「席」中加「帶」,「惡」上安「西」,「鼓」外設「皮」,「鑿」頭生「毁」,「離」則配「禹」,「壑」乃施「豁」,「巫」混「經」旁,「皋」分「澤」片,「獵」化爲「獦」,「寵」變成「□〔上穴下龍〕」,「業」左益「片」,「靈」底著「器」,「率」字自有律音,強改爲別;「單」字自有善音,輒析成異:如此之類,不可不治。吾昔初看説文,蚩薄世字,從正則懼人不識,隨俗則意嫌其非,略是不得下筆也。所見漸廣,更知通變,救前之執,將欲半焉。若文章著述,猶擇微相影響者行之,官曹文書,世間尺牘,幸不違俗也。

세간의 소학하는 이는 고금에 통하지 않고 반드시 소전에 기대어 글을 바로잡는데, 『이아』·『삼창』·『설문』이 어찌 창힐의 본뜻을 다 얻었겠는가. 역시 시대를 따라 덜고 더하여 서로 같고 다름이 있다. 서진 이전의 자서를 어찌 다 그르다 하랴. 다만 체례가 이루어지고 제멋대로 하지 않게 할 뿐이다. 시비를 상고하는 데는 특히 살펴야 한다. 「중니거(仲尼居)」 같은 것은 세 글자 가운데 두 글자가 바른 체가 아니니 『삼창』은 「니」 곁에 「구(丘)」를 더하고 『설문』은 「시(尸)」 아래 「기(幾)」를 두었는데 이런 따위를 어찌 따르겠는가. 옛날에는 두 글자가 없고 또 가차가 많아 중(中)을 중(仲)으로, 열(説)을 열(悅)로, 소(召)를 소(邵)로, 한(閑)을 한(閒)으로 썼으니 이런 무리는 또한 고칠 것이 없다. 본디 잘못이 있어 비속하게 된 것으로, 「란(亂)」 곁이 「설(舌)」이 되고 「읍(揖)」 아래 「이(耳)」가 없으며 「원(黿)」·「타(鼉)」가 「귀(龜)」를 따르고 「분(奮)」·「탈(奪)」이 「관(雚)」을 따르며 「석(席)」 가운데 「대(帶)」를 더하고 「악(惡)」 위에 「서(西)」를 놓으며 「고(鼓)」 밖에 「피(皮)」를 두고 「착(鑿)」 머리에 「훼(毁)」가 나며 「리(離)」는 「우(禹)」와 짝하고 「학(壑)」은 「활(豁)」을 쓰며 「무(巫)」는 「경(經)」 곁과 섞이고 「고(皋)」는 「택(澤)」 조각으로 나뉘며 「렵(獵)」이 「갈(獦)」로 되고 「총(寵)」이 「□〔上穴下龍〕」으로 변하며 「업(業)」 왼쪽에 「편(片)」을 더하고 「령(靈)」 밑에 「기(器)」를 붙이며, 「솔(率)」 자에 본디 률(律) 음이 있는데 억지로 고쳐 딴 글자로 하고 「단(單)」 자에 본디 선(善) 음이 있는데 문득 쪼개어 다른 글자로 만든 것 같은 따위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옛날 처음 『설문』을 보고 세상 글자를 비웃으며 바른 것을 따르자니 남이 알아보지 못할까 두렵고 세속을 따르자니 마음에 그 그름이 꺼려 거의 붓을 댈 수 없었다. 본 것이 차츰 넓어져 다시 통변을 알아 전의 고집을 고치니 반쯤은 되려 한다. 문장을 지어 저술할 때는 오히려 조금 비슷한 것을 가려 행하고, 관청 문서와 세간의 편지는 세속을 어기지 않는 것이 좋다.

46파자 놀이로 글자의 음과 뜻을 정할 수 없다

案:彌亙字從二閑舟,詩云:「亙之秬秠」是也。今之隸書,轉舟爲日;而何法盛中興書乃以舟在二閑爲舟航字,謬也。春秋説以人十四心爲德,詩説以二在天下爲酉,漢書以貨泉爲白水眞人,新論以金昆爲銀,國志以天上有口爲呉,晉書以黃頭小人爲恭,宋書以召刀爲邵,參同契以人負告爲造:如此之例,蓋數術謬語,假借依附,雜以戲笑耳。如猶轉貢字爲項,以叱爲匕,安可用此定文字音讀乎?潘、陸諸子離合詩、賦,栻卜、破字經,及鮑昭謎字,皆取會流俗,不足以形聲論之也。

살펴보니 미긍(彌亙)의 긍 자는 두 이(二) 사이에 주(舟)를 따르니 『시경』에 「긍지거비(亙之秬秠)」라 한 것이 이것이다. 지금의 예서는 주를 일(日)로 바꾸었는데 하법성의 『중흥서』는 곧 두 이 사이의 주를 주항(舟航)의 글자로 여겼으니 잘못이다. 『춘추설』은 인(人)·십(十)·사(四)·심(心)을 덕(德)으로 삼고, 『시설』은 이(二)가 천(天) 아래 있는 것을 유(酉)로 삼으며, 『한서』는 화천(貨泉)을 백수진인(白水眞人)으로, 『신론』은 금곤(金昆)을 은(銀)으로, 『국지』는 천(天) 위에 구(口)가 있는 것을 오(呉)로, 『진서』는 황두소인(黃頭小人)을 공(恭)으로, 『송서』는 소도(召刀)를 소(邵)로, 『참동계』는 인(人)이 고(告)를 진 것을 조(造)로 삼았으니, 이런 예는 대개 술수의 그릇된 말로 가차하고 갖다 붙이며 장난과 웃음을 섞은 것일 뿐이다. 마치 공(貢) 자를 바꾸어 항(項)으로 삼고 질(叱)을 비(匕)로 삼는 것과 같으니 어찌 이것으로 문자의 음과 읽기를 정할 수 있겠는가. 반악·육기 등의 이합시·부, 식복(栻卜)·파자경(破字經)과 포조의 수수께끼 글자는 다 시속에 맞추어 취한 것이라 형성(形聲)으로 논하기에 넉넉하지 않다.

47「일중필□〔上彗下火〕」는 「한낮에는 반드시 볕에 말려라」

河間邢芳語吾云:「賈誼傳云:『日中必□〔上彗下火〕。』注:『□〔上彗下火〕,暴也。』曾見人解云:『此是暴疾之意,正言日中不須臾,卒然便昃耳。』此釋爲當乎?」吾謂邢曰:「此語本出太公六韜,案字書,古者暴曬字與暴疾字相似,唯下少異,後人專輒加傍日耳。言日中時,必須曝曬,不爾者,失其時也。晉灼已有詳釋。」芳笑服而退。

하간의 형방이 내게 말하였다. 「가의전에 『한낮에는 반드시 □〔上彗下火〕한다』 하고 주에 『□〔上彗下火〕는 폭(暴)이다』 하였습니다. 일찍이 어떤 이가 풀이하기를 『이는 갑작스럽다는 뜻으로, 한낮은 잠깐도 머물지 않고 갑자기 기운다는 말이다』 하였는데 이 풀이가 맞습니까.」 내가 형방에게 말하였다. 「이 말은 본디 태공의 『육도』에서 나왔소. 자서를 살피면 옛날 폭쇄(暴曬)의 폭 자와 폭질(暴疾)의 폭 자는 서로 비슷하고 아래만 조금 다른데 뒷사람이 제멋대로 곁에 일(日)을 더하였을 뿐이오. 한낮에는 반드시 볕에 말려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때를 잃는다는 말이오. 진작이 이미 자세히 풀이하였소.」 형방이 웃으며 승복하고 물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