補閑集序
文者蹈道之門,不涉不經之語。然欲鼓氣肆言,竦動時聽,或涉於險怪。況詩之作,本乎比興諷喩,故必寓託奇詭,然後其氣壯,其意深,其辭顯,足以感悟人心,發揚微旨,終歸於正。若剽竊刻畵誇耀靑紅,儒者固不爲也。雖詩家有琢鍊四格,所取者,琢句鍊意而已。今之後進,尙聲律章句,琢字必欲新,故其語生,鍊對必以類,故其意拙。雄傑老成之風,由是喪矣。我本朝以人文化成,賢儁間出,贊揚風化。光宗顯德五年,始闢春闈,擧賢良文學之士,玄鶴來儀。時則王融、趙翼、徐熙、金策,才之雄者也。越景顯數代間,李夢游、柳邦憲以文顯,鄭倍傑、高凝以詞賦進,崔文憲公沖命世興儒,吾道大行。至於文廟時,聲名文物,粲然大備。當時冢宰崔惟善,以王佐之才,著述精妙。平章事李精恭、崔奭,參政文正、李靈幹、鄭惟産,學士金行瓊、盧坦,濟濟比肩,文王以寧。厥後朴寅亮、崔思齊、思諒、李䫨、金亮鑑、魏繼廷、林元通、黃瑩、鄭文、金緣、金商祐、金富軾、權適、高唐愈、金富轍、富佾、洪瓘、印份、崔允儀、劉羲、鄭知常、蔡寶文、朴浩、朴椿齡、林宗庇、芮樂仝、崔諴、金精、文淑公父子、吳先生兄弟、李學士仁老、兪文安公升旦、金貞肅公仁鏡、李文順公奎報、李承制公老、金翰林克己、金諫議君綏、李史館允甫、陳補闕澕、劉沖基、李百順、兩司成咸淳、林椿、尹于一、孫得之、安淳之,金石間作,星月交輝。漢文唐詩,於斯爲盛。然而古今諸名賢,編成文集者,唯止數十家,自餘名章秀句,皆湮沒無聞。李學士仁老略集成篇,命曰破閑,晋陽公以其書未廣,命予續補。强拾廢忘之餘,得近體若干聯,或至於浮屠兒女輩,有一二事可以資於談笑者,其詩雖不嘉,幷錄之。共一部分爲三卷,而未暇雕板,今侍中上柱國崔公,追述先志,訪採其書,謹繕寫而進。
글이란 도를 밟아 가는 문이라 경(經)에 맞지 않는 말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기운을 북돋우고 거리낌 없이 말하여 그때 사람의 귀를 놀라게 하려 하면 더러 험하고 괴이한 데로 흐른다.
하물며 시를 짓는 일은 본디 비(比)와 흥(興)으로 풍자하고 깨우치는 데 있으니, 반드시 기이한 데 부쳐 말한 뒤에야 그 기운이 씩씩하고 그 뜻이 깊고 그 말이 드러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깨우치고 은미한 뜻을 펴서 마침내 바름으로 돌아갈 수 있다. 남의 것을 훔치고 깎아 새겨 푸르고 붉은 것을 자랑하는 짓은 선비가 본디 하지 않는다.
시가(詩家)에 탁련(琢鍊)의 네 격이 있다 하나 취할 것은 구절을 다듬고 뜻을 벼리는 것뿐이다. 요즈음 뒷사람들은 성률과 장구를 숭상하여, 글자를 다듬되 반드시 새롭고자 하므로 그 말이 설고, 대구를 벼리되 반드시 같은 갈래로 하므로 그 뜻이 옹졸하다. 웅걸하고 노성한 기풍이 이로 말미암아 사라졌다.
우리 본조는 인문으로 교화를 이루어 어질고 뛰어난 이가 사이사이 나와 풍화를 도와 드날렸다. 광종 현덕 오년에 처음으로 봄 과장을 열어 어질고 문학하는 선비를 뽑으니 검은 학이 와서 춤추었다. 그때에 왕융·조익·서희·김책이 재주가 씩씩한 이들이었다.
경종과 현종 몇 대를 지나는 사이에 이몽유와 유방헌이 글로 드러났고, 정배걸과 고응이 사부(詞賦)로 나아갔으며, 최문헌공 충이 세상에 이름날 재주로 유학을 일으켜 우리 도가 크게 행하여졌다.
문종 때에 이르러 명성과 문물이 찬란하게 크게 갖추어졌다. 그때 총재 최유선은 임금을 돕는 재주로 지은 글이 정밀하고 묘하였다. 평장사 이정공과 최석, 참정 문정과 이영간과 정유산, 학사 김행경과 노탄이 즐비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였으니, 「문왕이 이로써 편안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로 박인량·최사제·최사량·이자(李䫨)·김양감·위계정·임원통·황영·정문·김연·김상우·김부식·권적·고당유·김부철·김부일·홍관·인빈·최윤의·유희·정지상·채보문·박호·박춘령·임종비·예락동·최함·김정과, 문숙공 부자와 오 선생 형제와 이 학사 인로와 유문안공 승단과 김정숙공 인경과 이문순공 규보와 이승제공 노와 김한림 극기와 김간의 군수와 이사관 윤보와 진보궐 화와 유충기와 이백순과 두 사성 함순과 임춘과 윤우일과 손득지와 안순지가 쇠와 돌처럼 사이사이 났으니, 별과 달이 서로 빛났다. 한나라의 문장과 당나라의 시가 여기서 성하였다.
그러나 예와 이제의 여러 이름난 어진 이 가운데 문집을 엮어 이룬 이는 다만 수십 집에 그치고, 그 나머지 이름난 글과 빼어난 구절은 다 묻혀 들리지 않는다.
이 학사 인로가 대강 모아 엮고 이름을 파한(破閑)이라 하였는데, 진양공이 그 책이 넓지 못하다 하여 나에게 이어 보태라 명하였다. 억지로 버려지고 잊힌 나머지를 주워 근체시 몇 연을 얻었고, 더러 승려와 아녀자의 무리에 이르러서도 담소에 밑천이 될 만한 한두 가지 일이 있으면 그 시가 비록 아름답지 않아도 아울러 적었다.
모두 한 부를 셋으로 나누어 권을 삼았으나 판에 새길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 시중 상주국 최공이 선친의 뜻을 좇아 그 책을 찾아 구하시므로 삼가 옮겨 적어 올린다.
時甲寅四月日。守太尉崔滋序。
때는 갑인년 사월 아무 날. 수태위 최자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