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補閑集 卷上

보한집 補閑集 · 최자(崔滋) · 1254년 · 단락 52 · 한자 12,181자 · 낭독 48.7분

「보한집」 권상 「補閑集 卷上」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파한집의 뒤를 잇는 시화집. 최우가 「그 책이 넓지 못하니 이어 기우라」 명하여 최자가 지었다. 이규보·이인로·유승단·김인경을 한 사람씩 품평하고, 같은 제목을 여럿이 저마다 읊은 것을 나란히 놓고 누가 어떻게 다른지 따진다. 고려 문단이 서로를 어떻게 보았는지가 그대로 남았다. 오수(獒樹)의 개 이야기가 처음 적힌 곳이고, 몽골에 불탄 개경 옛터에서 오동 한 그루를 보고 온 기록도 여기 있다. 끝 편에는 괴이한 이야기 여덟 자락을 일부러 붙여 두었다 — 「괴로이 배우는 이로 하여금 노닐고 쉬게 하려 함」이라 적었다.

孫知樞抃,以太祖聖製,示予曰:「宜載補閑。」對曰:「此書欲集瑣言,爲遣閑耳,非撰盛典也。」知樞曰:「爲儒臣,辭撰聖訓可乎?」聞之,蹶然載諸編首。太祖當干戈草創之際,留意陰陽浮屠。參謀崔凝諫云:「傳曰『當亂修文,以得人心』,王者雖當軍旅之時,必修文德。未聞依浮屠陰陽,以得天下者。」太祖曰:「斯言朕豈不知之?然我國山水靈奇,介在荒僻,土性好佛神,欲資福利。方今兵革未息,安危未決,旦夕恓惶,不知所措,唯思佛神陰助,山水靈應,儻有效於姑息耳。豈以此爲理國、得民之大經也。待定亂居安,正可以移風俗美敎化也。」長興五年甲午,征百濟大克,獲河內三十餘郡,及渤海國人皆歸順。乃命有司,剏開泰寺,爲華嚴道場,親製願文手書。略「生遇百罹,未堪多難。兵纒兎郡,災擾辰韓,人莫聊生,室無完堵云云。證天有誓,剗平巨孽,拯塗炭之生民,恣農桑於鄕里。上憑佛力,次仗玄威,二紀之水擊火攻,身蒙矢石,千里之南征東討,親枕干戈。丙申秋九月,於崇善城邊,與百濟兵交陣,一呼而兇狂瓦解,再鼓而逆黨氷消。凱唱浮天,歡聲動地云云,雚蒲宼竊,溪洞微凶,改悔自新,尋懷歸順。某也志在於搦姧除惡,濟弱扶傾,不犯秋毫,不傷寸草云云。答佛聖之維持,酬山靈之贊助,特命司局,剏造蓮宮。乃以天護爲山號,以開泰爲寺名云云。所願佛威庇護,天力扶持云云。淸泰二年,新羅敬順王來朝上書,略曰:「本國禍亂將構,曆數已窮。幸觀天子之光,願作庭臣之禮。」三年,百濟王甄萱入朝,上許住南宮,討其子神劎之罪。後奉御崔遠表賀,略曰:「神劎之自取滅亡,盖爾罪不容天地,羅王之自來賓服,由盛德遠屆遐荒云云。智邦之簪紳也,曾輻湊於上國,逆子之兵革也,今瓦解於南方。而陛下聞隣之急,徑往救之,仁勇也,隣王來附,曲待悉親,智信也,忘萱小嫌,接以恩信,寬仁也,誅諸逆子,慰撫殘民,義明而仁洽矣。以此爲帝王垂統之五常,胡不有子孫遵先於萬世云云?」太祖文章筆法,天縱多能,然此帝王家餘事,不足歸美。觀信書訓書及崔遠表,其盛德可知。

지추(知樞) 손변(孫抃)이 태조의 성제(聖製)를 보이며 나에게 말하였다. 「마땅히 보한집에 실어야 합니다.」 내가 답하였다. 「이 책은 자질구레한 말을 모아 한가함을 보내려는 것이지 성대한 법전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지추가 말하였다. 「유신(儒臣)이 되어 성인의 가르침 적기를 사양함이 옳겠습니까.」 이를 듣고 벌떡 일어나 편의 첫머리에 싣는다.

태조께서 창과 방패로 나라를 처음 여는 즈음에 음양과 부도(浮屠)에 뜻을 두셨다. 참모 최응(崔凝)이 간하였다. 「전(傳)에 이르기를 『어지러울 때에 문(文)을 닦아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 하였습니다. 왕 된 이가 비록 군려의 때를 만나도 반드시 문덕을 닦아야 합니다. 부도와 음양에 기대어 천하를 얻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태조께서 말씀하셨다. 「이 말을 짐이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우리 나라는 산수가 신령하고 기이하며 외지고 궁벽한 데 끼어 있어 땅의 성품이 부처와 신을 좋아하니, 복과 이로움을 빌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병혁이 그치지 않고 편안함과 위태로움이 갈리지 않아 아침저녁으로 허둥거리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오직 부처와 신의 그윽한 도움과 산수의 신령한 응답이 혹 잠시나마 보람이 있을까 생각할 뿐이다. 어찌 이것을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얻는 큰 벼리로 삼겠는가. 어지러움이 정해지고 편안히 살게 되기를 기다리면 바로 풍속을 옮기고 교화를 아름답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장흥 오년 갑오에 백제를 쳐 크게 이겨 하내(河內) 서른 남짓 고을을 얻었고, 발해국 사람들도 다 돌아와 순종하였다. 이에 맡은 관아에 명하여 개태사를 세워 화엄도량으로 삼고 몸소 원문(願文)을 지어 손수 쓰셨다. 대략 이러하다.

「살면서 온갖 근심을 만나 많은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였다. 병란이 토군(兎郡)에 얽히고 재앙이 진한(辰韓)을 어지럽혀, 사람이 살아갈 길이 없고 집에 온전한 담이 없었다. …… 하늘에 맹세를 증험하여 큰 재앙을 베어 평정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건져 마을에서 농사와 누에치기를 마음껏 하게 하려 하였다. 위로 부처의 힘에 기대고 다음으로 그윽한 위엄에 의지하여, 스물네 해 동안 물로 치고 불로 공격하며 몸소 화살과 돌을 무릅썼고, 천 리를 남으로 치고 동으로 토벌하며 몸소 방패와 창을 베고 잤다. 병신년 가을 구월 숭선성 가에서 백제 군사와 진을 마주하여, 한 번 외치매 흉하고 미친 것들이 기왓장처럼 무너지고 두 번 북을 치매 거스르던 무리가 얼음처럼 스러졌다. 개선의 노래가 하늘에 뜨고 기뻐하는 소리가 땅을 울렸다. …… 갈대와 부들 사이에서 도둑질하던 것들과 시내와 골짜기의 작은 흉한 무리도 뉘우쳐 스스로 새로워져 이내 돌아와 순종할 마음을 품었다. 아무개는 뜻이 간악한 것을 붙잡고 악한 것을 없애며 약한 이를 건지고 기우는 것을 붙드는 데 있어, 터럭 하나도 범하지 않고 한 치 풀도 상하지 않았다. …… 부처와 성인이 붙들어 주신 데 답하고 산신령이 도와주신 데 갚고자, 특별히 맡은 국(局)에 명하여 연궁(蓮宮)을 짓게 하였다. 이에 천호(天護)로 산 이름을 삼고 개태(開泰)로 절 이름을 삼는다. …… 바라는 바는 부처의 위엄이 감싸 지켜 주시고 하늘의 힘이 붙들어 주시는 것이다. ……」

청태 이년에 신라 경순왕이 와서 조회하고 글을 올렸다. 대략 이러하다. 「본국은 화란이 장차 얽히고 역수(曆數)가 이미 다하였습니다. 다행히 천자의 빛을 뵈오니 뜰의 신하 되는 예를 행하기를 원합니다.」

삼년에 백제 왕 견훤이 들어와 조회하매 임금께서 남궁에 머물기를 허락하시고 그 아들 신검의 죄를 치셨다. 뒤에 봉어 최원(崔遠)이 표를 올려 하례하였다. 대략 이러하다.

「신검이 스스로 멸망을 부른 것은 대개 그 죄가 하늘과 땅에 용납되지 않은 것이요, 신라 왕이 스스로 와서 손님으로 복종한 것은 성대한 덕이 멀리 거친 변방까지 이른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 지방(智邦)의 벼슬아치들이 일찍이 상국으로 바퀴살처럼 모여들었고, 거스른 아들의 병혁이 이제 남방에서 기왓장처럼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이웃의 급함을 들으시고 곧장 가서 구하셨으니 어질고 용감하심이요, 이웃 왕이 와서 붙으매 곡진히 대하여 다 친히 하셨으니 지혜롭고 미더우심이요, 견훤의 작은 혐의를 잊고 은혜와 믿음으로 맞으셨으니 너그럽고 어지심이요, 여러 거스른 아들을 베고 남은 백성을 위로하여 어루만지셨으니 의로움이 밝고 어짊이 흡족한 것입니다. 이로써 제왕이 계통을 드리우는 오상(五常)을 삼으시니, 어찌 자손이 만세에 선조를 좇지 않겠습니까. ……」

태조의 문장과 필법은 하늘이 내리신 재능이 많으신 것이나, 이는 제왕가에서 남은 일이라 아름다움을 돌릴 것이 못 된다. 「신서(信書)」와 「훈서(訓書)」와 최원의 표를 보면 그 성대한 덕을 알 수 있다.

光宗尙儒雅,擧賢良文學。時玄鶴來儀於含元殿,文士皆作贊頌。學士趙翼頌曰:「伊鶴軒昻,禀精于陽。有白斯羽,則惟汝常。匪白匪黄,玄乃衣裳!之禽之色,厥表何祥?惟我后德,過百皇王,崇文重道,急用賢良。仙翰色純,厥祥允當。含元肅穆,望天高翔。覽文德輝,豈周鳳凰?飲啄率度,羽儀載光。諸福畢至,四方其昌。於萬斯年,景祚無疆。」學士雙冀,典試春闈,亦以玄鶴呈祥,爲詩題。

광종이 유아(儒雅)를 숭상하여 어질고 문학하는 이를 뽑았다. 그때 검은 학이 함원전에 와서 춤추매 문사들이 다 찬(讚)과 송(頌)을 지었다. 학사 조익(趙翼)의 송에 이르기를,

저 학이 높이 솟아 볕에서 정기를 받았네. 흰 깃이 있는 것은 너희에게 늘 있는 일이거늘 희지도 누르지도 않고 검은 것이 옷이로구나. 이 새의 이 빛깔 그 드러남이 무슨 상서인가. 오직 우리 임금의 덕이 온갖 임금을 넘어서 문을 높이고 도를 무겁게 하여 어진 이 쓰기를 서두르시니 신선의 깃털 빛이 순수하여 그 상서로움이 참으로 마땅하다. 함원전이 엄숙한데 하늘을 바라보며 높이 나는구나. 문덕의 빛남을 보니 어찌 주나라의 봉황만 하랴. 마시고 쪼는 것이 법도를 따르고 깃과 거동이 빛을 실었다. 온갖 복이 다 이르니 사방이 창성하리라. 아, 만년토록 큰 복이 끝이 없으리.

학사 쌍기(雙冀)가 봄 과장을 맡았을 때에도 검은 학이 상서를 드러낸 것으로 시제를 삼았다.

王輪寺三重子,其袖一蠧篇來示予,乃光宗代侍中文貞公崔承老禁中雜著詩藁也。惜其國初文字,幸不湮沒到于今,取其中四韻絶句四首,載之。長生殿後百葉杜鵑花應製云:「去年曾是滿朱欄,今日芳姿又一般。伹願此花開萬轉,微臣長奉聖人歡。」東池新竹云:「錦籜初開粉節明,低臨輦路綠陰成。宸遊何必將天樂,自有金風撼玉聲。」百濟進白鵲讚云:「皚皚雪色好飛鳴,來自江南僅十程。看爾羽毛偏潔朗,只應來瑞我時淸。」謝宣獎入唐文字,兼頒內庫酒果詩云:「多幸千年遇至尊,不才忝職在西垣。文章敢望同諸彦,寵渥須誇示後昆。銘感極來徒有淚,喜歡深處却無言。尋思報答終難得,伹祝南山拜聖恩。」又有重陽讌御製,走筆頌美詩。以此知光廟弄翰捷疾,煥乎有文。方其時,金虎不偃,未暇嚮學,而宸翰猶若是,況大平已久,世世君王,當淸燕之際,黃竹白雲之作,不爲不多。然補閑所載,皆卿大夫高僧逸士所作,豈宜與天章同列而評?當別部收錄,卓其雲漢之瞻望。

왕륜사의 삼중자(三重子)가 좀먹은 책 한 편을 소매에 넣어 와 내게 보였다. 광종 대 시중 문정공 최승로(崔承老)가 궁중에서 지은 잡저 시고였다. 나라 처음의 글자가 다행히 묻히지 않고 지금까지 이른 것이 아까워, 그 가운데 네 운 절구 네 수를 골라 싣는다.

「장생전 뒤의 백엽 두견화」를 임금의 명으로 지은 것에 이르기를,

지난해에도 붉은 난간에 가득하더니 오늘 그 고운 자태 또 한가지구나. 다만 바라건대 이 꽃이 만 번을 피어 미천한 신하가 길이 성인의 즐거움을 받들었으면.

「동쪽 못의 새 대」에 이르기를,

비단 껍질 갓 벌어져 흰 마디가 밝은데 임금 수레 길에 나직이 임하여 푸른 그늘을 이루었네. 임금의 놀이에 어찌 반드시 하늘의 풍류를 데려오랴 절로 가을바람이 옥소리를 흔드는 것을.

「백제가 흰 까치를 바친 것을 기림」에 이르기를,

희디흰 눈빛으로 곱게 날며 우니 강남에서 온 길이 겨우 열 참이로다. 네 깃털이 유달리 깨끗하고 밝은 것을 보니 다만 내 시대가 맑음을 알리러 온 것이리라.

「당나라에 보낼 글을 지은 것을 기려 주시고 아울러 내고의 술과 과일을 내리신 데 사례함」에 이르기를,

천 년 만에 지극한 임금을 만난 것이 큰 다행이라 재주 없이 외람되이 서원(西垣)에 벼슬을 맡았네. 문장으로야 감히 여러 어진 이와 같기를 바라랴만 두터운 은총은 뒷자손에게 자랑할 만하네. 새겨 느끼는 마음이 사무쳐 다만 눈물이 있을 뿐 기쁨이 깊은 곳에서는 도리어 말이 없구나. 갚을 길을 아무리 생각해도 끝내 얻지 못하니 다만 남산을 두고 임금의 은혜에 절하며 빌 뿐.

또 중양절 잔치에 임금이 지으신 글에 붓을 달려 아름다움을 기린 시가 있다. 이로써 광종께서 붓을 놀리심이 빠르고 환하게 문채가 있었음을 알겠다.

그때는 쇠와 범이 눕지 않아 배움에 나아갈 겨를이 없었는데도 임금의 글이 오히려 이러하였으니, 하물며 태평이 오래되어 대대로 임금들이 한가한 즈음에 지으신 황죽(黃竹)과 백운(白雲) 같은 작품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한집에 실은 것은 다 경대부와 고승과 숨어 사는 선비가 지은 것이니, 어찌 하늘의 글과 한자리에 놓고 품평하겠는가. 마땅히 따로 부(部)를 두어 거두어 적고, 은하수를 우러르듯 높여야 할 것이다.

成宗十五年八月,車盖幸東京,頒赦,凡有奇才異能隱滯丘園者,勅有司捜訪無遺。又收籍內外義夫節婦孝子順孫,旌表門閭,錫物段有差。時有敬順王入朝日不來者,己鮐背矣,猶爲白衣,作詩獻內相王融,云:「九天光動轉星辰,日旆龍旗竝海巡。黃葉鷄林曾索漠〔我太祖作興,新羅崔致遠,知必受命,上書,有鷄林黃葉,鵠嶺靑松之語。羅王聞而惡之,卽帶家隱居伽耶山海印寺終焉。其鑑識之明,見於上書中。羅人深服之,乃以公昔所居,名爲上書莊。後高士李能逢,吳世才,安淳之,相繼而寄居〕。烟花今復上園春。」又云:「閭閻光彩旌忠孝,丘壑喧傳訪隱淪。縱昔未隨周老往,幸今親覩漢儀新。」上自東京還過興禮府,御大和樓,宴群臣有唱和,流傳于世。

성종 십오년 팔월에 임금의 수레가 동경(東京)에 거둥하여 사면을 내리고, 무릇 기이한 재주와 남다른 능력을 지니고 언덕과 동산에 묻혀 있는 이가 있으면 맡은 관아에 명하여 빠짐없이 찾게 하였다. 또 안팎의 의로운 지아비와 절개 있는 부인과 효자와 순한 손자를 적어 문과 마을에 정표(旌表)하고 물건을 차등 있게 내렸다.

그때 경순왕이 들어와 조회하던 날에 오지 않은 이가 있었는데, 이미 늙어 등이 굽었으면서도 아직 흰옷을 입은 채로 시를 지어 내상 왕융(王融)에게 바쳤다.

아홉 하늘의 빛이 움직여 별들이 옮겨 가고 해 깃발 용 깃발이 나란히 바다를 돌아 도네. 누런 잎의 계림은 일찍이 쓸쓸하였으나 〔우리 태조께서 일어나실 때 신라의 최치원이 반드시 천명을 받을 줄 알고 글을 올렸는데, 「계림은 누런 잎이요 곡령은 푸른 솔」이라는 말이 있었다. 신라 왕이 듣고 미워하매 곧 집안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살다 마쳤다. 그 알아보는 밝음이 올린 글 가운데 드러났으므로 신라 사람들이 깊이 감복하여, 공이 옛날 살던 곳을 상서장(上書莊)이라 이름 하였다. 뒤에 높은 선비 이능봉·오세재·안순지가 잇달아 와서 살았다.〕 연기와 꽃은 이제 다시 봄 동산에 오르네.

또 이르기를,

마을 거리에 빛이 나 충과 효를 정표하고 언덕과 골짜기에 떠들썩하게 숨은 이를 찾네. 비록 옛날에는 주나라 늙은이를 따라가지 못하였으나 다행히 이제 한나라의 새 의례를 몸소 보는구나.

임금께서 동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흥례부를 지나며 대화루에 오르시어 여러 신하와 잔치하며 부르고 화답한 것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姜仁憲公邯贊,大平七年壬午,擢甲科第一人,顯宗統和二十七年己酉,爲翰林學士。是年十一月,契丹聖宗親將兵而至,上幸錦城,以河拱辰請降,丹帝還師。凡策皆出姜邯贊,上以詩慰獎曰:「庚戌年中有虜塵,干戈深入漢江濱。當時不用姜君策,擧國皆爲左衽人。」今俗傳云:「有一使臣,夜入始興郡,見大星隕于人家,遣吏往審之,其家婦適生男子。使心異之,因求其子而養,是爲姜公,及爲相。宋使有鑑識者,來見公曰,『文曲星不現久矣,不知何在,今公卽是。』乃下階禮之」〔此說甚荒唐,然今古搢紳相傳,又任相國宅有記,故載之。〕

강인헌공 감찬(姜邯贊)은 태평 칠년 임오에 갑과 제일인으로 뽑혔고, 현종 통화 이십칠년 기유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이해 십일월에 거란 성종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매 임금께서 금성으로 거둥하셨는데, 하공진(河拱辰)이 항복을 청하여 거란 황제가 군사를 돌렸다.

무릇 계책이 다 강감찬에게서 나왔으므로 임금께서 시로 위로하고 기리셨다.

경술년 가운데 오랑캐 티끌이 있어 창과 방패가 깊이 한강 물가까지 들어왔네. 그때 강군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온 나라가 다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사람이 되었으리.

지금 세속에 전하기를, 「어떤 사신이 밤에 시흥군에 들었다가 큰 별이 어느 집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전을 보내어 살피게 하니, 그 집 부인이 마침 사내아이를 낳았다. 사신이 마음에 이상히 여겨 그 아이를 구하여 길렀으니 이가 강공이다. 재상이 되었을 때 송나라 사신 가운데 사람을 알아보는 이가 와서 공을 보고 『문곡성이 나타나지 않은 지 오래인데 어디 있는지 몰랐더니 지금 공이 바로 그것이다』 하고 섬돌을 내려와 예를 갖추었다」 한다.〔이 말은 매우 황당하다. 그러나 예와 이제의 벼슬아치들이 서로 전하고 또 임 상국 댁에 기록이 있으므로 싣는다.〕

崔文憲公沖有二子,常戒之曰:「士以勢力進,鮮克有終,以文行達,乃爾有慶。吾幸以文行顯,誓以淸愼終于世。」乃作訓子孫文傳之。中葉不謹失其本,有二詩。其一曰:「家世無長物,唯傳至寶藏。文章爲錦繡,德行是珪璋。今日相分付,他年莫散忘。好支廊廟用,世世益興昌。」文憲公之孫,中書令思諏,作訓儉文,遺子平章溱,溱之孫持示予。今已三十餘年,但記:「吾祖令公常用木器八字」,忘其餘。不知其卷子今誰傳之。

최문헌공 충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늘 경계하여 말하였다. 「선비가 세력으로 나아가면 끝을 잘 마치는 이가 드물고, 문(文)과 행실로 이르러야 이에 경사가 있다. 나는 다행히 문과 행실로 드러났으니 맑고 삼가는 것으로 세상을 마치기를 맹세한다.」 이에 「훈자손문(訓子孫文)」을 지어 전하였다.

중엽에 삼가지 못하여 그 본을 잃고 두 시만 남았다. 그 하나에 이르기를,

집안에 대대로 긴 물건이 없고 오직 지극한 보배의 갈무리만 전하네. 문장은 비단이 되고 덕행은 옥홀이 되네. 오늘 서로 나누어 주노니 뒷날에 흩어 잊지 말라. 낭묘(廊廟)의 쓰임을 잘 받들어 대대로 더욱 흥하고 창성하라.

문헌공의 손자 중서령 사추(思諏)가 「훈검문(訓儉文)」을 지어 아들 평장 진(溱)에게 남겼는데, 진의 손자가 가지고 와서 내게 보였다. 이제 이미 삼십여 해가 지나 다만 「우리 할아버지 영공께서 늘 나무 그릇을 쓰셨다」는 여덟 자만 기억하고 그 나머지는 잊었다. 그 두루마리를 지금 누가 전하는지 알지 못한다.

文憲公於成宗在位二十五年乙巳,擢第春官,爲甲科第一,位至內史令。其子文和公惟善,當顯宗二十二年庚午,爲御試乙科獨元。文宗七年辛丑,改內史爲中書,父子皆拜爲中書令。次子惟吉,以門蔭累遷,守司空左僕射,攝尙書令。及二十二年丁未,上賜宴國老,文和公兄弟扶持文憲公入赴,當時以爲盛事。翰林學士金行瓊,作詩賀之曰:「紫綬金章子及孫,共陪鳩枕醉皇恩。尙書令侍中書令,乙狀元扶甲狀元。曠代唯聞四人到,一門今有兩公存。家傳冢宰猶爲罕,世襲魁科最可尊。幾日搢紳相藉藉,今朝街路更喧喧。聯翩功業流靑史,雖秃千毫不足言。」

문헌공은 성종 재위 이십오년 을사에 예부의 시험에 뽑혀 갑과 제일인이 되었고 벼슬이 내사령에 이르렀다. 그 아들 문화공 유선(惟善)은 현종 이십이년 경오에 어시(御試)에서 을과 홀로 장원이 되었다. 문종 칠년 신축에 내사(內史)를 고쳐 중서(中書)라 하였으니, 아버지와 아들이 다 중서령에 임명된 것이다.

둘째 아들 유길(惟吉)은 문음으로 여러 번 옮겨 수사공 좌복야가 되고 상서령을 겸하였다. 이십이년 정미에 이르러 임금께서 나라의 늙은이들에게 잔치를 내리시매, 문화공 형제가 문헌공을 부축하여 들어와 나아가니 그때 사람들이 성대한 일로 여겼다.

한림학사 김행경(金行瓊)이 시를 지어 하례하였다.

자줏빛 인끈 금빛 인장의 아들과 손자가 함께 비둘기 지팡이를 모시고 임금 은혜에 취하네. 상서령이 중서령을 모시고 을과 장원이 갑과 장원을 부축하네. 오랜 세대에 오직 네 사람이 이르렀다 들었는데 한 문중에 이제 두 공이 계시는구나. 집안이 총재를 전하는 것도 오히려 드문데 대를 이어 으뜸 과거에 붙은 것이 가장 높일 만하네. 며칠이나 벼슬아치들이 서로 떠들썩하더니 오늘 아침 거리에서는 더욱 시끄럽구나. 잇달아 나는 공업이 청사에 흐르리니 천 자루 붓이 닳아도 다 말하지 못하리.

鄭中丞敍雜書載,崔侍中惟善閨情詩云:「黃鳥曉啼愁裏雨,綠楊晴弄望中春。」又梳詩云:「入用宜加首,何曾在匣中。」非特才華贍給,足以知位極人臣也。今觀侍中集中,如加首之句頗多,鄭何取此一聯,知位極人臣也?始公於顯廟二十二大平十年,赴簾前試,上謂侍臣曰:「華國文章,花月亦與其末,朕欲幷試要其捷疾。」先放賦題「君猶舟」,及賦畢就方寫,乃署詩題「御苑種仙桃」。公卽應題直書,名紙曰:「御苑桃新種,移從閬苑仙。結根丹地上,分影紫庭前。細葉看如畵,繁英望欲然。品高鷄省樹,香接獸爐烟。天近先春茂,晨淸帶露鮮。是應王母獻,聖壽益千年。」詩與賦俱稱旨,御手批爲牓元,詔入翰林,直除七品。明年庚辰,爲禮部員外郞、兼掌誥,累遷至中書令卒,配饗於廟庭。則其位極人臣之兆,惟此詩的矣。

중승 정서(鄭敍)의 잡서에 최 시중 유선의 「규정(閨情)」 시를 실었다.

꾀꼬리 새벽에 우니 시름 속의 비요 푸른 버들 개어 흔드니 바라보는 가운데 봄이로다.

또 「빗」 시에 이르기를,

써서 머리에 더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어찌 일찍이 갑 속에 있었으랴.

재주가 넉넉할 뿐 아니라 벼슬이 신하로서 지극한 데 이를 줄을 알 만하다 하였다. 그러나 지금 시중의 문집을 보면 「머리에 더한다」 같은 구절이 자못 많은데, 정서는 어찌 이 한 연을 취하여 벼슬이 지극할 줄을 알았다 하는가.

처음에 공이 현종 이십이년 태평 십년에 발 앞의 시험에 나아갔을 때 임금께서 모시는 신하에게 이르셨다. 「나라를 빛내는 문장에 꽃과 달도 그 끝에 든다. 짐이 아울러 시험하여 그 빠름을 보고자 한다.」 먼저 부(賦) 제목 「임금은 배와 같다」를 내고, 부를 마치고 바야흐로 정서(淨書)하려 할 때에 시 제목 「어원에 신선의 복숭아를 심다」를 내걸었다.

공이 곧 제목에 응하여 바로 이름 적은 종이에 썼다.

어원에 복숭아를 새로 심으니 낭원(閬苑)의 신선에게서 옮겨 왔네. 붉은 땅 위에 뿌리를 맺고 자줏빛 뜰 앞에 그림자를 나누네. 가는 잎은 그림 같고 많은 꽃은 타는 듯하네. 품격은 계성(鷄省)의 나무보다 높고 향기는 짐승 모양 화로의 연기에 닿네. 하늘이 가까워 봄보다 먼저 무성하고 새벽이 맑아 이슬을 띠어 곱네. 이는 마땅히 서왕모가 바친 것이니 성인의 수명이 천 년 더하리라.

시와 부가 다 임금의 뜻에 맞아 임금의 손으로 방(牓)의 으뜸으로 매기시고, 조서로 한림에 들여 곧바로 칠품에 제수하셨다. 이듬해 경진에 예부원외랑이 되어 장고(掌誥)를 겸하였고, 여러 번 옮겨 중서령에 이르러 죽으매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러니 벼슬이 신하로서 지극할 조짐은 오직 이 시가 뚜렷하다.

慶源李氏,自國初世爲大官。至昌和公子淵,有子曰顥,爲慶源伯,頲顗顔三子,皆爲宰相。一女是仁睿太后,兩女俱爲宮主。弟僕射子祥,有二子曰預曰䫨,爲宰相,其孫皆婚宗室。貴戚之盛,今古罕比。初顗在諫垣,時陰陽者流,各執圖讖,互言裨補。上問之,顗對曰:「陰陽本乎大易,易不言地理裨補。後世詭誕者曲論之,以至成文字惑衆人。況圖讖荒虛怪妄,一無可取。」上心然之。頲顗䫨子孫,今尤顯達。昌和公以龍首,入黃扉,掌試得人,崔平章奭、金平章良鑑、參政崔思訓朴寅亮、學士崔澤魏齊萬等,皆門生。有人作詩云:「庭下芝蘭三宰相,門前桃李十公卿。」

경원 이씨는 나라 처음부터 대대로 큰 벼슬을 하였다. 창화공 자연(子淵)에 이르러 아들이 있으니 호(顥)라 하는데 경원백이 되었고, 정(頲)·의(顗)·안(顔) 세 아들이 다 재상이 되었다. 한 딸은 인예태후요 두 딸은 다 궁주가 되었다. 아우 복야 자상(子祥)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예(預)와 자(䫨)라 하는데 재상이 되었고, 그 손자들이 다 종실과 혼인하였다. 귀척의 성함이 예와 이제에 견줄 데가 드물다.

처음에 의(顗)가 간원에 있을 때 음양을 하는 무리가 저마다 도참을 들고 서로 비보(裨補)를 말하였다. 임금께서 물으시매 의가 답하였다. 「음양은 대역(大易)에 근원하는데 역에는 지리의 비보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뒷세상의 속이고 허탄한 자들이 굽혀 논하여 마침내 글자를 이루어 뭇사람을 홀리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도참은 허황하고 괴이하여 하나도 취할 것이 없습니다.」 임금께서 마음으로 그렇게 여기셨다.

정과 의와 자의 자손이 지금 더욱 현달하였다. 창화공은 용두로 황비(黃扉)에 들어가 시험을 맡아 사람을 얻었으니, 최 평장 석(奭)과 김 평장 양감(良鑑)과 참정 최사훈·박인량과 학사 최택·위제만 들이 다 문생이다. 어떤 이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

뜰 아래에는 지초와 난초 같은 세 재상이요 문 앞에는 복숭아 오얏 같은 열 공경이라.

崔文憲公典試,所貢十四人,乙科三人金無滯、李從現、洪德成,同拜尙書,李象廷、崔尙、崔有孚,相繼爲參政,金淑昌、金正、金良贄、吳學麟,竝爲學士,世號尙書牓。大康九年癸亥,同牓,無達官,李資玄、郭輿,皆棄官爲處士,時號處士牓。有一滑稽僧,戲擧子云:「須占尙書牓,休登處士科。」

최문헌공이 시험을 맡아 뽑은 열네 사람 가운데, 을과 세 사람인 김무체·이종현·홍덕성이 함께 상서에 임명되었고, 이상정·최상·최유부가 잇달아 참정이 되었으며, 김숙창·김정·김양지·오학린이 아울러 학사가 되었으므로 세상에서 「상서방(尙書牓)」이라 하였다.

대강 구년 계해의 같은 방에는 현달한 벼슬아치가 없고 이자현과 곽여가 다 벼슬을 버리고 처사가 되었으므로 그때 「처사방(處士牓)」이라 하였다. 어떤 익살스러운 승려가 과거 보는 이들을 놀려 말하기를,

모름지기 상서방을 차지할 것이지 처사과에는 오르지 마오.

任良淑公濡門下四牓,文正公、文安公、文順公、韓陳兩樞密、劉司成沖基、尹亞卿于一,皆同年。又有金平章敞,李樞密中敏,崔僕射、承宣昆季,王儞、金珪、葛南成三卿,亦多韻人。今時參知政事崔璘,知門下省事洪鈞,守司空、左僕射孫抃,樞密院使趙脩,右僕射、翰林學士李淳牧,右承宣、翰林學士尹有功,刑部尙書、學士宋國瞻,兵部尙書、學士金孝印,左諫議大夫、衛尉卿河千旦及予,皆英烈公門生,時論推盛。

임양숙공 유(任濡)의 문하에 네 방이 있었으니, 문정공과 문안공과 문순공과 한·진 두 추밀과 유 사성 충기와 윤 아경 우일이 다 같은 해에 뽑혔다. 또 김 평장 창(敞)과 이 추밀 중민(中敏)과 최 복야·승선 형제와 왕이(王儞)·김규(金珪)·갈남성(葛南成) 세 경도 운치 있는 사람이 많았다.

지금 참지정사 최인(崔璘), 지문하성사 홍균(洪鈞), 수사공·좌복야 손변(孫抃), 추밀원사 조수(趙脩), 우복야·한림학사 이순목(李淳牧), 우승선·한림학사 윤유공(尹有功), 형부상서·학사 송국첨(宋國瞻), 병부상서·학사 김효인(金孝印), 좌간의대부·위위경 하천단(河千旦)과 나까지 다 영렬공의 문생이니, 그때 의론이 성대하다고 추어올렸다.

門生之於宗伯,執父子禮。唐裵皡三知貢擧,門生馬胤孫掌試後,引新牓門生往謁。裵作一絶云:「三主禮闈年八十,門生門下見門生。」本朝學士韓彦國,率門生謁崔文淑公惟淸,公作詩云:「綴行來訪我何榮,喜見門生門下生。」良淑公爲三代帝舅〔毅明神宗三代。〕,位冢宰。門下趙文正公,以司成典試,領門生往謁誥院,李仁老作詩賀云:「十年黃閣佐昇平,四闢春闈獨擅盟。國士從來酬國士,門生今復得門生。」良淑公之冢嗣,平章事景肅,四提文柄,不數年門下腰犀者,十餘人。中有三將軍一郞將,前古未聞。芸閣學士柳璥,自登第十六年,典司馬試署牓,明日往謁。時平章以大師懸車。有姪兩宰兩樞,諸從弟姪甥,亦皆卿大夫,與四牓門生,分列階前。柳率門生入拜庭下,平章坐堂上,伶官奏樂。觀者莫不慶嘆,以至泣下。翰林林桂一以詩賀云:「兩府鈞台拜庭下,一時英俊集門前。坐看桃李孫枝秀,盛事希聞繼世傳。」

문생은 종백(宗伯)에게 아버지와 아들의 예를 갖춘다. 당나라 배호(裵皡)가 세 번 공거를 맡았는데, 문생 마윤손(馬胤孫)이 시험을 맡은 뒤에 새 방의 문생을 이끌고 가서 뵈었다. 배호가 절구 하나를 지었다.

세 번 예위(禮闈)를 주관하고 나이 여든에 문생의 문하에서 문생을 보는구나.

본조의 학사 한언국(韓彦國)이 문생을 거느리고 최문숙공 유청(惟淸)을 뵈었을 때 공이 시를 지었다.

줄지어 나를 찾아오니 이 무슨 영광인가 문생의 문하에서 난 이를 기쁘게 보는구나.

양숙공은 삼대 임금의 외숙이 되고〔의종·명종·신종 삼대다.〕 자리가 총재였다. 문하의 조문정공이 사성으로 시험을 맡아 문생을 거느리고 고원(誥院)에 뵈러 가매, 이인로가 시를 지어 하례하였다.

열 해를 황각에서 태평을 도우시고 네 번 봄 과장을 여시어 홀로 맹주를 맡으셨네. 나라의 선비가 예로부터 나라의 선비에게 갚나니 문생이 이제 다시 문생을 얻었구나.

양숙공의 맏아들 평장사 경숙(景肅)이 네 번 문병(文柄)을 잡으매 몇 해 안 되어 문하에 서각 띠를 두른 이가 열 남짓이었다. 그 가운데 세 장군과 한 낭장이 있었으니 예로부터 듣지 못한 일이다.

운각학사 유경(柳璥)이 급제한 지 열여섯 해에 사마시를 맡아 방을 붙이고 이튿날 뵈러 갔다. 그때 평장은 대사(大師)로 수레를 걸어 두고 물러나 있었다. 조카로 재신 둘과 추신 둘이 있고 여러 종제와 조카와 생질도 다 경대부라, 네 방의 문생과 더불어 섬돌 앞에 나뉘어 섰다. 유경이 문생을 거느리고 들어와 뜰 아래에서 절하매 평장은 마루 위에 앉고 영관이 풍악을 아뢰었다. 보는 이가 경하하고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어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한림 임계일(林桂一)이 시로 하례하였다.

두 부(府)의 균대(鈞台)가 뜰 아래에 절하고 한때의 영준이 문 앞에 모였네. 앉아서 복숭아 오얏의 손자 가지가 빼어남을 보니 성대한 일이 대를 이어 전한다는 말을 드물게 듣는구나.

崔譽肅公奭,其先佐太祖有功。公擢第狀元,爲平章事。其子文肅公惟淸,留守南都日,有二子在輦下,公以詩訓之曰:「家傳淸白無餘物,只有經書萬卷存。恣汝分將勤讀閱,立身行道使君尊。」因自注曰:「君尊則國理,國理則家安,家安則身安,身安則餘無所求。」二嗣果以儒雅位宰相。長曰靖安公讜,今判樞璘卽其孫,弟曰文懿公詵,今侍中宗峻,僕射宗梓,承宣宗蕃皆其子。僕射和侍中詩曰:「三代平章後,唯兄拜侍中」。又有三壻皆爲相。一是龍頭,二同受鉞,爲上副元帥。世世積善,慶流子孫,靑紫滿朝,盛矣哉!」文肅公家集行於世,故唯載訓子一篇。

최예숙공 석(奭)은 그 선조가 태조를 도와 공이 있었다. 공은 장원으로 뽑혀 평장사가 되었다. 그 아들 문숙공 유청(惟淸)이 남도에 유수로 있을 때 두 아들이 서울에 있었는데, 공이 시로 가르쳤다.

집안이 전하는 것은 맑고 흰 것뿐 남은 물건이 없고 다만 경서 만 권이 있을 뿐이다. 너희 마음껏 나누어 가지고 부지런히 읽어 몸을 세우고 도를 행하여 임금을 높이게 하라.

그러고는 스스로 주를 달아 이르기를, 「임금이 높으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지면 집이 편안하고, 집이 편안하면 몸이 편안하고, 몸이 편안하면 그 밖에 구할 것이 없다」 하였다.

두 아들이 과연 유아(儒雅)로 재상에 올랐다. 맏이는 정안공 당(讜)이니 지금 판추 인(璘)이 곧 그 손자요, 아우는 문의공 선(詵)이니 지금 시중 종준(宗峻)과 복야 종재(宗梓)와 승선 종번(宗蕃)이 다 그 아들이다. 복야가 시중에게 화답한 시에 이르기를,

삼대의 평장 뒤에 오직 형님만이 시중에 절하시네.

또 세 사위가 있어 다 재상이 되었다. 하나는 용두요 둘은 함께 도끼를 받아 상원수와 부원수가 되었다. 대대로 착함을 쌓아 경사가 자손에게 흐르고 푸르고 자줏빛 인끈이 조정에 가득하니 성대하다.

문숙공의 문집이 세상에 행하므로 오직 아들을 가르친 한 편만 싣는다.

文宗在宥十一,淸寧二年丙申,始創興王寺,甚欲宏壯。時文和公爲知奏事,諫曰:「昔唐太宗神聖英武,數千百年已來,罕有倫比。不許度人爲僧,不許創立寺觀。遵述高祖之志,益固王業,史傳美之。今陛下承祖宗積累之功,天下向成,固宜節用愛人,能持盈守成,以傳於聖嗣也。奈何罄民財竭民力,以供不急之費,欲危邦本耶?臣竊惑焉。」上優詔答曰:「卿言誠忠,朕夙願已成,不可廻革。」異日侍淸閑論時政,上從容慰獎曰:「諫諍是忠,從好佞。」公卽對曰:「創垂猶易,守成難。」雖虞夏之賡歌,何以加此?

문종이 자리에 계신 지 열한 해, 청녕 이년 병신에 처음으로 흥왕사를 세우며 몹시 크고 웅장하게 하고자 하셨다. 그때 문화공이 지주사로 있으며 간하였다.

「옛날 당 태종은 신성하고 영무하여 수천백 년 이래로 견줄 이가 드뭅니다. 사람을 제도하여 승려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절과 도관 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고조의 뜻을 좇아 왕업을 더욱 굳게 하였으므로 사서가 이를 아름답게 여겼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조종이 쌓아 오신 공을 이어 천하가 이루어져 가니, 진실로 마땅히 쓰임을 아끼고 사람을 사랑하며 가득함을 지키고 이룬 것을 지켜 성스러운 후사에게 전하셔야 합니다. 어찌 백성의 재물을 다하고 백성의 힘을 마르게 하여 급하지 않은 비용에 대며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려 하십니까. 신은 그윽이 의혹합니다.」

임금께서 넉넉한 조서로 답하셨다. 「경의 말이 참으로 충성스럽다. 그러나 짐의 오랜 원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되돌릴 수 없다.」

다른 날 한가한 자리에 모시고 그때의 정사를 논할 때, 임금께서 조용히 위로하고 기려 말씀하셨다. 「간쟁하는 것이 충성이요 좋아하는 대로 좇는 것은 아첨이다.」 공이 곧 답하였다. 「처음 세워 드리우기는 오히려 쉽고 이룬 것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우(虞)와 하(夏)의 화답한 노래인들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李參政靈幹,題羅州法輪寺云:「秋凉晚景最相宜,一宿蓮房一展眉。星斗夜深光燦爛,樓臺月轉影參差。六時永耀慈燈朗,萬古長存聖跡奇。結得良緣何事也,爇心香供佛爲師。」或以此詩落句語未工,使也字尤疎野,非也。公從上遊朴淵,風雨暴作振座石,上心動。公乃作勅書投淵,數龍之罪欲罰之,龍卽感悟,出其脊受杖。則公之爲文,其神乎不可測也。豈以此么麼詩中一字之工拙,度於公也。

이 참정 영간(靈幹)이 나주 법륜사에 제하여 이르기를,

가을 서늘한 늦은 경치가 가장 마땅하니 연방(蓮房)에 하룻밤 자며 한 번 눈썹을 펴네. 별들은 밤 깊어 빛이 찬란하고 누대에 달이 옮겨 그림자가 들쭉날쭉하네. 여섯 때에 길이 빛나 자비의 등불이 밝고 만고에 길이 남아 성인의 자취가 기이하네. 좋은 인연을 맺은 것이 무슨 일인가 마음의 향을 사르어 부처께 공양하여 스승으로 삼았네.

어떤 이는 이 시의 낙구가 말이 다듬어지지 않았고 「야(也)」 자가 더욱 성기고 거칠다 하나 그렇지 않다. 공이 임금을 모시고 박연에 노닐 때 비바람이 갑자기 일어 자리의 돌을 흔들매 임금의 마음이 움직였다. 공이 이에 칙서를 지어 못에 던져 용의 죄를 세어 벌하려 하니, 용이 곧 느껴 깨닫고 그 등을 내밀어 매를 받았다. 그러니 공이 글을 지음이 신묘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어찌 이런 자질구레한 시 가운데 한 글자의 잘되고 못됨으로 공을 헤아리겠는가.

文宗大康七年辛酉,崔良平公思齊,使入宋,船上云:「天地何疆界,山河自異同。君母謂宋遠,回首一帆風。」陳補闕澕,以書狀官入大金云:「西華已蕭索,北寨尙昏蒙。坐待文明旦,天東日欲紅。」癸巳春,朝家聞大金皇帝,播遷河南,遣起居注崔璘、內侍權述及予,詣行在問安。時因韃靼路梗,以木道過鐡山浦,至遼地海州津。權有詩云:「九天移四海,悲乘槎去路。憑誰問萬里,烟波迷所之。」予於前歲,以副樞使蒙古。抵宿興中府,見一寺壁上書一絶云:「四野盡爲狐兎窟,萬邦猶仰犬羊天。人間樂國是何處,深歎吾生不後先。」崔有朝覲不遠千里之意。陳以幕佐入朝,稱北寨昏蒙,非禮。權詩言雖迷悶,義存奔問。興中一絶,是客子所題,言高何罪。

문종 대강 칠년 신유에 최양평공 사제(思齊)가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며 배 위에서 이르기를,

하늘과 땅에 무슨 지경이 있으랴 산과 물이 절로 다르고 같을 뿐. 그대는 송나라가 멀다 이르지 마오 머리 돌리면 한 돛의 바람이라오.

진 보궐 화(澕)가 서장관으로 대금(大金)에 들어가며 이르기를,

서화(西華)는 이미 쓸쓸하고 북쪽 진영은 아직 어둡고 몽롱하네. 앉아서 문명한 아침을 기다리노니 하늘 동쪽에 해가 붉으려 하네.

계사년 봄에 조정이 대금 황제가 하남으로 옮겨 갔다는 말을 듣고, 기거주 최인과 내시 권술과 나를 보내어 행재소에 나아가 문안하게 하였다. 그때 달단(韃靼) 때문에 길이 막혀 뱃길로 철산포를 지나 요동 땅 해주 나루에 이르렀다. 권술이 시를 지었다.

아홉 하늘이 네 바다로 옮겨 가니 슬프다, 뗏목을 타고 가는 길이여. 누구에게 만 리를 물으랴 안개 물결에 갈 곳을 잃었네.

나는 지난해에 부추(副樞)로 몽고에 사신 갔었다. 흥중부에 이르러 묵다가 어느 절 벽 위에 쓰인 절구 하나를 보았다.

사방 들이 다 여우와 토끼의 굴이 되고 만방이 아직도 개와 양의 하늘을 우러르네. 인간의 즐거운 나라는 어디인가 내 삶이 앞서지도 뒤서지도 못한 것을 깊이 탄식하노라.

최사제는 조근(朝覲)에 천 리를 멀다 하지 않는 뜻이 있다. 진화는 막좌로 조회에 들면서 「북쪽 진영이 어둡고 몽롱하다」 일컬었으니 예가 아니다. 권술의 시는 말이 비록 아득하고 답답하나 뜻이 달려가 문안하는 데 있다. 흥중부의 절구는 나그네가 제한 것이니 말이 높은들 무슨 죄이겠는가.

睿宗御宇,尙章句,好遊宴。時曾王父尙書崔㵸,在綸閣,乃上書,略曰:「昔唐文宗欲置詩學士,宰相奏曰,『詩人多輕薄,昧於識理。若承顧問,恐撓聖聰。』文宗乃止。帝王當好經術,日與儒雅討論經史,諮諏政理化民成俗之無暇,安有事童子之雕蟲,數與輕蕩詞臣,吟風嘯月,以喪天衷之淳正耶?」上優納。有一詞臣承隙曰:「所言儒雅,別是何人?㵸短於風月,不樂人唱和,故有此言。」上怒,左遷爲春州副使。方上道,和人贈別云:「吾家世受盛朝恩,欲繼忠淸不墮門。但把螢輝增聖日,敢將蠡測議詞源。自慙風月無功業,回望雲霄已夢魂。駭汗未收還感淚,謫來猶得駕朱轓。」

예종께서 세상을 다스리실 때 장구를 숭상하고 놀이와 잔치를 좋아하셨다. 그때 증왕부(曾王父) 상서 최영(崔㵸)이 윤각(綸閣)에 있으며 글을 올렸다. 대략 이러하다.

「옛날 당 문종이 시학사를 두려 하매 재상이 아뢰기를 『시인은 대개 경박하고 이치를 아는 데 어둡습니다. 만약 돌아보아 물으심을 받들면 성상의 총명을 어지럽힐까 두렵습니다』 하니 문종이 이에 그만두었습니다. 제왕은 마땅히 경술을 좋아하여 날마다 유아한 이들과 경서와 사서를 토론하고 정치의 이치와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는 것을 묻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하거늘, 어찌 아이들의 벌레 새기는 짓을 일삼아 자주 경박한 사신(詞臣)들과 바람을 읊고 달을 휘파람하며 하늘이 주신 순수하고 바른 것을 잃으려 하십니까.」

임금께서 넉넉히 받아들이셨다. 어떤 사신이 틈을 타 말하였다. 「말한 바 유아한 이가 따로 누구입니까. 최영은 풍월에 짧아 남과 부르고 화답하기를 즐기지 않으므로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임금께서 노하시어 춘주 부사로 좌천하셨다. 바야흐로 길에 오르며 사람에게 화답하여 이별하며 이르기를,

우리 집안이 대대로 성한 조정의 은혜를 받았으니 충성과 맑음을 이어 가문을 떨어뜨리지 않으려 했네. 다만 반딧불 빛을 잡아 임금의 해를 더하려 했을 뿐 감히 표주박으로 헤아려 사원(詞源)을 의논하랴. 스스로 부끄럽다, 풍월에 공업이 없음이여 구름 하늘을 돌아보니 이미 꿈속의 넋이로다. 놀란 땀이 채 가시기 전에 도리어 감격의 눈물이 흐르니 귀양 와서도 오히려 붉은 수레를 타는구나.

凡出大軍,命元帥必以儒將。西都反,文烈公爲元帥。時太平已久,諸武人未曉行營故事,公於帳中微吟古人詩曰:「白鹿坡頭百萬兵,碧油幢下一書生。如今始信爲儒貴,臥聽將軍報五更。」軍中傳誦,自是內廂將軍報更籌。

무릇 큰 군사를 낼 때 원수를 명하는 데는 반드시 유장(儒將)으로 하였다. 서도가 배반하매 문열공이 원수가 되었다. 그때 태평이 이미 오래되어 여러 무인이 행영의 옛일을 알지 못하였는데, 공이 장막 가운데서 옛사람의 시를 나직이 읊었다.

백록파 머리의 백만 군사요 푸른 기름 장막 아래의 한 서생이라. 이제야 비로소 선비 된 것이 귀한 줄 믿겠으니 누워서 장군이 오경을 알리는 것을 듣는구나.

군중이 전하여 외웠고, 이로부터 내상의 장군이 경(更)을 알렸다.

朴參政寅亮,奉使入中朝,所至皆留詩。金山寺云:「巉巖怪石疊成山,上有蓮房水四環。塔影倒江蟠浪底,磬聲搖月落雲間。門前客棹洪波急,竹下僧棊白日閑。一奉皇華堪惜別,更留詩句約重還。」行次越州,聞樂調中奏新聲,旁人曰:「此公詩也。」至浙江,風濤大起,見子胥廟在江邊,作詩弔之曰:「掛眼東門憤未消,碧江千古起波濤。今人不識前賢志,但問潮頭幾尺高。」須臾風霽船利涉,其感動幽顯如此。宋人集其詩成編,今傳于世。

참정 박인량(朴寅亮)이 사신의 명을 받들어 중국 조정에 들어가 이르는 곳마다 다 시를 남겼다. 「금산사」에 이르기를,

가파른 바위 괴이한 돌이 겹쳐 산을 이루고 위에는 연방(蓮房)이 있어 물이 사방을 둘렀네. 탑 그림자는 강에 거꾸러져 물결 밑에 서리고 경쇠 소리는 달을 흔들어 구름 사이로 떨어지네. 문 앞의 나그네 노는 큰 물결에 급하고 대숲 아래 승려의 바둑은 대낮에도 한가하네. 한 번 황화(皇華)를 받들매 이별이 아까우니 다시 시구를 남겨 거듭 돌아오기를 기약하네.

월주(越州)를 지날 때 풍악 가락 가운데 새 소리를 아뢰는 것을 듣고 곁의 사람이 「이는 공의 시입니다」 하였다.

절강에 이르러 바람과 물결이 크게 일었다. 오자서(伍子胥)의 사당이 강가에 있는 것을 보고 시를 지어 조상하였다.

동문에 눈을 걸어 두고 분함이 아직 삭지 않아 푸른 강에 천고토록 물결을 일으키네. 지금 사람은 앞선 어진 이의 뜻을 알지 못하고 다만 조수 머리가 몇 자나 높은지만 묻는구나.

잠깐 사이에 바람이 개어 배가 순히 건넜으니, 그윽한 데와 드러난 데를 움직인 것이 이와 같았다. 송나라 사람이 그 시를 모아 책을 엮어 지금 세상에 전한다.

權學士適,奉國表遊學於宋。路上寄文烈公及諸友曰:「別離眞細事,此別意難窮。客路波濤外,家鄕夢寐中。出門纔暑雨,倚棹已秋風。他日江湖興,扁舟復欲東。」及到泊明州定海縣,皇帝遣使,勞問於道路,擇州府秀才令伴行。入參闕下,寵賚異常,詔入辟廱承學。凡在學七年,屢居考藝科魁,皇帝臨軒策試,擢甲科第一人。及還本朝,睿廟聞而嘉之,命有司,備樂部綵山,迎于禮成江。御大觀殿迎見,仍讌群臣三日以慶之。直除爲國子博士,命撰定國學禮儀規式書簿。不數年間備歷淸要。使於四方,題詠頗多。嘗於樂安北寺詠竹云:「大雪漫天萬木摧,琅玕相映一枝梅。不如六月炎蒸酷,呼召淸風分外來。」送安禪老之楓岳云:「江陵日暖花初發,楓岳天寒雪未消。翻笑上人山水癖,未能隨處作逍遙。」亭止房云:「半年塵土負靑山,蕭寺偸乘一日閑。始見黃花知令節,更驚紅葉炤衰顔。天圍大野蒼茫外,舟在淸江寂寞間。賴有上房沽酒引,淡烟斜日未能還。」凡題詠和贈至數十卷,皆散亡。今纔得二十餘首,率皆長篇,但取其中絶句四韻各二首,錄之。公率不事章句,如有和答之作,率爾出語,不欲驚人。尤長於文辭,富艶體中,有淸駛之骨。累遷國子祭酒、翰林學士、兼寶文閣學士、知制誥。典試南省,甚得其人,門下秀士林宗庇,獻詩引略云:「乘航歸上國,北方學者莫之先。衣錦還故鄕,東都主人喟然嘆。」詩曰:「東國罕聞雙學士,西朝獨步甲科名。」公覽之,美其引曰:「擧前言敍今事甚的,又對屬甚善。但宋西也而言北方,是謂拘文失實,白圭一玷耳。」

학사 권적(權適)이 나라의 표문을 받들고 송나라에 유학하였다. 길 위에서 문열공과 여러 벗에게 부쳐 이르기를,

이별은 참으로 자잘한 일이나 이번 이별은 뜻이 다하기 어렵네. 나그넷길은 물결 밖이요 고향은 꿈속에 있네. 문을 나설 때는 겨우 더운 비였는데 노에 기대니 이미 가을바람이로다. 뒷날 강호의 흥이 나면 조각배로 다시 동쪽으로 가려네.

명주 정해현에 배를 대매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길에서 위로하여 묻고, 주부의 수재를 골라 함께 가게 하였다. 대궐에 들어가 뵈오니 총애와 하사가 남달랐고, 조서로 벽옹(辟廱)에 들어가 학문을 잇게 하였다. 무릇 학교에 있기 일곱 해에 여러 번 예능을 상고하는 과목의 으뜸을 차지하였고, 황제가 난간에 임하여 책문으로 시험하매 갑과 제일인으로 뽑혔다.

본조에 돌아오매 예종께서 들으시고 아름답게 여기시어 맡은 관아에 명하여 악부와 채산(綵山)을 갖추어 예성강에서 맞게 하셨다. 대관전에 납시어 맞아 보시고 이어 여러 신하에게 사흘 동안 잔치를 베풀어 경하하셨다. 곧바로 국자박사에 제수하고 국학의 예의 규식과 장부를 지어 정하게 하셨다. 몇 해 안 되어 맑고 요긴한 자리를 두루 거쳤다.

사방에 사신 가며 제영한 것이 자못 많다. 일찍이 낙안 북사에서 대를 읊어 이르기를,

큰 눈이 하늘에 가득하여 온갖 나무가 꺾이는데 낭간(琅玕)이 매화 한 가지와 서로 비치네. 유월의 찌는 더위가 혹독할 때에 맑은 바람을 불러 뜻밖에 오게 함만 하랴.

「안 선로를 풍악으로 보내며」에 이르기를,

강릉은 날이 따뜻하여 꽃이 처음 피는데 풍악은 하늘이 차서 눈이 아직 녹지 않았네. 도리어 웃노라, 스님의 산수 벽(癖)이여 가는 곳마다 소요하지는 못하는구려.

「정지방」에 이르기를,

반년을 티끌에 묻혀 푸른 산을 저버리다가 쓸쓸한 절에서 하루의 한가함을 훔쳤네. 비로소 누런 국화를 보고 좋은 철인 줄 알고 다시 붉은 잎이 늙은 얼굴을 비추는 데 놀라네. 하늘은 큰 들을 아득한 밖에 둘렀고 배는 맑은 강 적막한 사이에 있네. 윗방에서 술을 사 오는 인연이 있어 엷은 연기 비낀 해에 돌아가지 못하네.

무릇 제영하고 화답하여 준 것이 수십 권에 이르렀으나 다 흩어져 없어졌다. 이제 겨우 스무 남짓 수를 얻었는데 대개 다 장편이라, 다만 그 가운데 절구와 사운(四韻) 각 두 수만 골라 적는다.

공은 대개 장구를 일삼지 않아, 화답하는 작품이 있으면 대충 말을 내고 남을 놀라게 하려 하지 않았다. 문사에 더욱 뛰어나 넉넉하고 고운 체 가운데 맑고 빠른 뼈대가 있었다. 여러 번 옮겨 국자좨주·한림학사 겸 보문각학사·지제고가 되었다.

남성(南省)의 시험을 맡아 사람을 매우 잘 얻었다. 문하의 뛰어난 선비 임종비(林宗庇)가 시와 그 서문을 바쳤는데 대략 이러하다. 「배를 타고 상국으로 돌아가매 북방의 배우는 이가 앞서지 못하였고, 비단옷 입고 고향에 돌아오매 동도의 주인이 한숨지어 감탄하였다.」 시에 이르기를,

동국에서는 두 학사를 드물게 들었고 서조(西朝)에서 홀로 갑과의 이름을 밟았네.

공이 보고 그 서문을 아름답게 여겨 말하였다. 「앞사람의 말을 들어 지금 일을 서술한 것이 매우 적확하고 대구도 매우 좋다. 다만 송나라는 서쪽인데 북방이라 하였으니, 이는 글에 매여 실상을 잃은 것이라 흰 옥의 한 티일 뿐이다.」

鄭舍人知常,以詩鳴於仁廟時。嘗與郭先生,扈從宿長源亭有作云:「玉漏丁東月掛空,一春天與牧丹風。小堂卷箔烟波綠,人在蓬萊縹緲中。」詠竹云:「脩竹小軒東,蕭然數十叢。碧根龍走地,寒葉玉鳴風。秀色高群卉,淸陰拂半空。幽奇不可狀,霜夜月明中。」留題團月驛云:「飲闌欹枕畵屛低,夢覺前村第一鷄。却憶夜深雲雨散,碧空孤月小樓西。」長源亭有作云:「岧嶢雙闕枕江濱,淸夜都無一點塵。風送客帆雲片片,露凝宮瓦玉鱗鱗。綠楊閉戶八九屋,明月卷簾三四人。縹緲蓬萊在何許,夢闌黃鳥報靑春。」月詠臺云:「碧波浩渺石崔嵬,中有蓬萊學士臺。松老壇邊蒼蘚合,雲低天末片帆來。百年風雅新詩句,萬里江山一酒杯。回首鷄林人不見,月華空炤海門回。」題邊山蘇來寺云:「古徑寂寞縈松根,天近斗牛聊可捫。浮雲流水客到寺,紅葉蒼苔僧閉門。秋風微凉吹落日,山月漸白啼淸猿。奇哉厖眉一衲老,長年不夢人間喧。」西都云:「南陌風微細雨過,輕塵不動柳陰斜。綠窓朱戶笙歌咽,摠是梨園弟子家。」語韻淸華,句格豪逸,讀之使煩襟昏眼。洒然醒悟,但雄深巨作乏耳。

사인 정지상(鄭知常)이 인종 때 시로 이름이 났다. 일찍이 곽 선생과 더불어 임금을 모시고 장원정에 묵으며 지은 것에 이르기를,

옥 물시계 소리 뚝뚝 달은 공중에 걸렸는데 한 봄을 하늘이 모란 바람과 함께 주었네. 작은 집에 발을 걷으니 안개 물결이 푸르고 사람은 봉래의 아득한 가운데 있네.

「대를 읊음」에 이르기를,

긴 대가 작은 마루 동쪽에 쓸쓸히 수십 떨기로다. 푸른 뿌리는 용이 땅을 달리는 듯 찬 잎은 옥이 바람에 우는 듯. 빼어난 빛은 뭇 풀보다 높고 맑은 그늘은 반공을 스치네. 그윽하고 기이함을 형용할 수 없으니 서리 내린 밤 달 밝은 가운데로다.

「단월역에 남겨 제함」에 이르기를,

술자리 끝나 베개에 기대니 그림 병풍이 낮은데 꿈을 깨니 앞마을의 첫 닭이 우네. 문득 생각하니 밤 깊어 구름과 비 흩어지고 푸른 하늘 외로운 달이 작은 누각 서쪽에 있네.

「장원정에서 지음」에 이르기를,

높다란 두 대궐이 강가를 베고 누웠는데 맑은 밤에 도무지 한 점 티끌이 없네. 바람은 나그네 돛을 보내어 구름이 조각조각 이슬은 궁궐 기와에 엉겨 옥이 비늘비늘. 푸른 버들에 문 닫은 집이 여덟아홉 밝은 달에 발 걷은 사람이 서넛. 아득한 봉래는 어디쯤인가 꿈이 다하니 꾀꼬리가 푸른 봄을 알리네.

「월영대」에 이르기를,

푸른 물결 아득하고 돌이 우뚝한데 그 가운데 봉래 학사의 대가 있네. 소나무 늙은 단 가에 푸른 이끼가 어우러지고 구름 낮은 하늘 끝에 조각 돛이 오네. 백 년의 풍아(風雅)는 새 시구요 만 리의 강산은 한 잔 술이로다. 머리 돌리니 계림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달빛만 부질없이 바다 문을 비추어 도네.

「변산 소래사에 제함」에 이르기를,

옛길이 적막하여 솔뿌리에 얽혔는데 하늘이 가까워 북두와 견우를 만질 만하네. 뜬구름 흐르는 물에 나그네가 절에 이르고 붉은 잎 푸른 이끼에 승려가 문을 닫네. 가을바람이 서늘하게 지는 해에 불고 산의 달이 점점 희어지자 맑은 잔나비가 우네. 기이하다, 눈썹 센 누더기 걸친 늙은이여 긴 세월 인간의 시끄러움을 꿈꾸지 않는구나.

「서도」에 이르기를,

남쪽 두렁에 바람 잔잔하고 가는 비 지나가니 가벼운 티끌도 일지 않고 버들 그늘이 비꼈네. 푸른 창 붉은 문에 생황과 노래가 목메니 모두 이원(梨園) 제자의 집이로다.

말과 운이 맑고 화려하며 구절과 격이 호방하고 빼어나, 읽으면 번거로운 가슴과 흐린 눈이 시원하게 깨어난다. 다만 웅숭깊고 큰 작품이 모자랄 뿐이다.

高學士唐愈微時云:「安得凌河漢,高遊上界仙。直將千斛水,擧手洗雲天。」書雲巖云:「風入湖山萬竅呼,宿雲歸盡塞天高。蒼鷹直上百千尺,那箇纖塵點羽毛。」觀其詩辭意豪壯。果以志節爲名宰相,歷仕三朝。

학사 고당유(高唐愈)가 미천할 때 이르기를,

어찌하면 은하수를 넘어 높이 상계의 신선으로 노닐까. 곧장 천 섬의 물을 가지고 손을 들어 구름 하늘을 씻으리.

「운암에 씀」에 이르기를,

바람이 호수와 산에 드니 만 구멍이 부르짖고 자던 구름 다 돌아가매 변방 하늘이 높네. 푸른 매가 곧장 백천 자를 오르니 어느 가는 티끌이 깃털에 묻으랴.

그 시를 보면 말과 뜻이 호방하고 씩씩하다. 과연 지조와 절개로 이름난 재상이 되어 세 조정을 벼슬살이하였다.

睿王乾統七年丁亥,欲伐東藩,制尹瓘爲上元帥,吳延寵爲副。駕幸西都,御龍堰闕,授鉞遣之。師行入大戍關,屠部落八十餘,築英吉等四城。詔拜尹侍中吳參政,皆爲功臣。又築咸州崇寧鎭等城,明年虜圍新城,吳率衆往救。酋長實現等,獻黃金良馬,詣闕陳款。於是會群臣廷議,諫議大夫金緣奏曰:「人主之愛土地,將以養民,豈宜爭地,使赤子肝腦塗地?願陛下許其地,以禽獸畜之,服則撫,否則舍,吾民可得休息矣。」上心然之。六月實現等,伏宣政殿門外,叩頭曰:「夷狄亦人耳。今蕩覆我巢穴,我安所依?願還我疆土,令復地着,則誓不擾邊境。」上笑許之。七月罷吉英州戍兵,有司劾兩元帥,罷封傳,私騎還。諫官又奏:「尹吳及林彦等,誘古羅等殲之,失義於夷狄,師多喪亡。竭民力耗國用,築九城,勢殆而卒棄之,罪無赦。」上不得已許皆罷職。踰年臺省上疏,極論尹吳林等罪,竟不納。臺閣諸郞,皆去職不視事。時因接宋朝使,詔令就職,獨金諫議緣便不出,特制爲借樞密院副使,趣就參議,後除禮賓卿。詔復兩元帥及林彦等官。時學士李䫨和金富佾詩曰:「臨軒授鉞命東征,一擧腥膻盡掃淸。漢塞已空無古月,秦人何苦築新城。滿庭諫切眞長策,拓地功高是大名。從諫擧功誰最急,吾皇聖制兩平明。」

예종 건통 칠년 정해에 동번을 치고자 하여 윤관(尹瓘)을 상원수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으셨다. 임금께서 서도에 거둥하시어 용언궐에 납시고 도끼를 주어 보내셨다.

군사가 나아가 대수관에 들어가 부락 여든 남짓을 무찌르고 영길 등 네 성을 쌓았다. 조서로 윤관을 시중, 오연총을 참정으로 삼고 다 공신이라 하셨다. 또 함주와 숭녕진 등의 성을 쌓았다.

이듬해에 오랑캐가 신성을 에워싸매 오연총이 무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하였다. 추장 실현(實現) 등이 황금과 좋은 말을 바치고 대궐에 나아가 정성을 아뢰었다. 이에 여러 신하를 모아 조정에서 의논할 때 간의대부 김연(金緣)이 아뢰었다.

「임금이 땅을 아끼는 것은 백성을 기르려는 것입니다. 어찌 마땅히 땅을 다투어 어린아이 같은 백성으로 하여금 간과 뇌를 땅에 바르게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그 땅을 허락하시고 짐승처럼 기르시어, 복종하면 어루만지고 그러지 않으면 버려 두십시오. 그러면 우리 백성이 쉴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께서 마음으로 그렇게 여기셨다. 유월에 실현 등이 선정전 문 밖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이적도 또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제 우리 보금자리를 뒤엎으셨으니 우리가 어디에 의지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우리 강토를 돌려주시어 다시 땅에 붙어 살게 하시면 맹세코 변경을 어지럽히지 않겠습니다.」 임금께서 웃으며 허락하셨다.

칠월에 길주와 영주의 수자리 군사를 파하매, 맡은 관아가 두 원수를 탄핵하기를 봉전(封傳)을 파하고 사사로이 말을 타고 돌아왔다 하였다. 간관이 또 아뢰었다. 「윤관과 오연총과 임언 들이 고라(古羅) 등을 꾀어 죽여 이적에게 의를 잃고 군사를 많이 잃었습니다. 백성의 힘을 다하고 나라의 쓰임을 소모하여 아홉 성을 쌓았으나 형세가 위태로워 마침내 버렸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임금께서 마지못하여 다 벼슬을 파하기를 허락하셨다.

해를 넘겨 대성(臺省)이 상소하여 윤관과 오연총과 임언 등의 죄를 끝까지 논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대각의 여러 낭관이 다 벼슬을 버리고 일을 보지 않았다. 그때 송나라 사신을 맞는 일 때문에 조서로 벼슬에 나아가게 하였는데, 오직 김 간의 연만은 곧 나오지 않았으므로 특별히 차추밀원부사로 삼아 참의에 나아가기를 재촉하고 뒤에 예빈경에 제수하였다. 조서로 두 원수와 임언 등의 벼슬을 회복하셨다.

그때 학사 이자(李䫨)가 김부일의 시에 화답하여 이르기를,

난간에 임하여 도끼를 주고 동정(東征)을 명하시매 한 번 들어 비린내를 다 쓸어 맑게 하였네. 한나라 변방은 이미 비어 옛 오랑캐가 없거늘 진나라 사람은 무엇이 괴로워 새 성을 쌓았던가. 뜰에 가득한 간언이 간절하니 참으로 좋은 계책이요 땅을 넓힌 공이 높으니 이것이 큰 이름이로다. 간언을 좇음과 공을 듦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급한가 우리 임금의 거룩한 결단이 둘 다 공평하고 밝으시네.

天慶元年,謝恩使金緣林有文等入宋,皇帝接遇加等。金林等還,上問皇帝起居,金曰:「帝厚我國,享禮異常,然凡事皆極侈異,可爲寒心。」後三年癸巳,使李資諒李永等往朝,帝御睿謀殿賜宴,製詩示之,仍命和進。資諒賡韻曰:「鹿鳴嘉宴會賢良,仙樂洋洋出洞房。天上賜花頭上艶,盤中宣橘袖中香。黃河再報千年瑞,綠醑輕浮萬壽觴。今日陪臣參盛際,願歌天保永無忘。」此詩語涉淺易,而帝大加稱賞,以其卽事詳當也。明日流傳諸鋪店,書之爲簇掛諸壁。及資諒等辭,帝密諭曰:「似聞女眞比壤,後日來朝,宜招引數人與偕?」資諒曰:「夷狄貪婪,不可通上國。」宋之廷臣曰:「女眞珍奇雜出,高麗常貿易。資諒恐分利他國,故沮之。陛下於高麗愛如赤子。今資諒負德,陽好言而實詐。女眞不必藉高麗,可遣一介招致。」後果與交通,卒爲女眞移神器。宋朝群臣,不及一資諒之智,反以忠言爲詐,惜也。

천경 원년에 사은사 김연과 임유문 등이 송나라에 들어가매 황제가 맞아 대접함이 등급을 더하였다. 김연과 임유문 등이 돌아오매 임금께서 황제의 기거를 물으셨다. 김연이 말하였다. 「황제가 우리 나라를 두터이 하여 대접하는 예가 남달랐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다 지나치게 사치하고 남다르니 한심할 만합니다.」

뒤 세 해 계사에 이자량(李資諒)과 이영(李永)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황제가 예모전에 납시어 잔치를 내리시고 시를 지어 보이시며 화답하여 올리라 명하셨다. 이자량이 운을 이어 지었다.

녹명(鹿鳴)의 아름다운 잔치에 어진 이가 모이고 신선의 풍악이 넘실넘실 골방에서 나오네. 하늘에서 내리신 꽃은 머리 위에 곱고 소반에서 내리신 귤은 소매 속에 향기롭네. 황하가 다시 천 년의 상서를 알리고 푸른 술이 만수의 잔에 가볍게 뜨네. 오늘 배신(陪臣)이 성대한 자리에 참여하니 「천보(天保)」를 노래하여 길이 잊지 않기를 원하옵니다.

이 시는 말이 얕고 쉬운 데 흘렀으나 황제가 크게 칭찬하고 기렸으니, 그 일에 나아가 자세하고 마땅한 까닭이다. 이튿날 여러 가게에 흘러 전해져 이를 써서 족자를 만들어 벽에 걸었다.

이자량 등이 하직할 때 황제가 은밀히 일렀다. 「듣건대 여진이 땅을 잇대었다 하니, 뒷날 와서 조회할 때 마땅히 몇 사람을 데리고 함께 오게 하라.」 이자량이 말하였다. 「이적은 탐욕스러워 상국과 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송나라의 조정 신하가 말하였다. 「여진에는 진기한 것이 섞여 나 고려가 늘 무역합니다. 이자량은 이로움이 다른 나라에 나뉠까 두려워 막는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고려를 어린아이처럼 사랑하시는데, 이제 이자량이 덕을 저버리고 겉으로는 좋은 말을 하나 실은 속이는 것입니다. 여진은 반드시 고려를 빌릴 것 없으니 한 사람을 보내어 부를 만합니다.」

뒤에 과연 서로 통하였다가 마침내 여진에게 신기(神器)를 옮기고 말았다. 송나라 여러 신하가 이자량 한 사람의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도리어 충성된 말을 속임으로 여겼으니 아깝다.

每歲二月望爲燈夕。前一日駕幸奉恩寺,禮祖聖眞,號爲奉恩行香。在舊都九街廣坦,白沙平鋪,大川溶溶流出兩廊間。至此夕,百寮隨大小各結繒山,諸軍府亦以繒綵結絡,聯亘街陌,以畵幛書屛張左右。競作伎樂,萬枝燈火,連天如白晝。上行幸還,兩部伎女,着霓裳戴花冠,執樂迎蹕于昇平門外,奏還宮樂。入興禮利賓門間,宮殿沈沈,高㨖星斗,樂聲轟轟,如在半天。仁廟朝魏闕火,興禮利賓門還宮樂廢,久矣。重營至十八年畢,就是年燈夕,復舊樂入此門。上吟一絶云:「此地君臣樂,虛經十八年。幸因匡弼力,旣醉復如前。」載此御製者因紀事,他皆類此。

해마다 이월 보름을 등석(燈夕)으로 삼는다. 그 하루 앞에 임금의 수레가 봉은사에 거둥하여 태조의 진영에 예하니 「봉은행향」이라 하였다.

옛 도읍의 아홉 거리는 넓고 평탄하여 흰 모래가 판판히 깔리고 큰 내가 넘실넘실 두 행랑 사이로 흘러 나갔다. 이 저녁이 되면 온 벼슬아치가 크고 작음을 따라 저마다 비단 산을 얽고, 여러 군부도 비단으로 얽어 거리와 두렁에 잇대었으며, 그림 장막과 글씨 병풍을 좌우에 폈다. 다투어 기악을 벌이고 만 가지 등불이 하늘에 이어져 대낮 같았다.

임금께서 거둥하였다 돌아오시면 양부의 기녀가 무지개 치마를 입고 꽃 관을 쓰고 풍악을 잡아 승평문 밖에서 어가를 맞으며 「환궁악」을 아뢰었다. 흥례문과 이빈문 사이에 들면 궁전이 깊숙하고 높이 별을 찌르며 풍악 소리가 우렁차 반공에 있는 듯하였다.

인종 조에 위궐(魏闕)에 불이 나 흥례·이빈 두 문에서 환궁악을 아뢰는 일이 폐한 지 오래였다. 다시 지어 십팔년에 이르러 마쳤는데, 그해 등석에 옛 풍악을 되살려 이 문에 들었다. 임금께서 절구 하나를 읊으셨다.

이 땅의 임금과 신하의 즐거움이 헛되이 열여덟 해를 지났구나. 다행히 바로잡아 도운 힘으로 말미암아 이미 취하니 다시 예전 같도다.

이 어제(御製)를 실은 것은 일을 적으려는 까닭이니, 다른 것도 다 이와 같다.

尹文康公彦頤,晚節尤嗜禪味,退居鈴平郡金剛齋,自號金剛居士。每入郭,跨黃牛,人皆識之。與慧炤門人貫乘禪師爲友,相得甚懽。時貫乘住廣明寺,置一蒲庵止容一座,約曰:「先逝者,坐此而化。」一日跨牛詣貫乘同飯,已曰:「吾歸期不遠,吿別來耳。」言訖徑去,貫乘遣人隨其後,送蒲庵。公見之笑曰:「師不負約,吾行決矣。」遽取筆書偈云:「春復秋兮,花開葉落。東復西兮,善養眞君。今日途中,反觀此身,長空萬里,一片閑雲。」書畢,坐庵而逝。當時高人勝士,莫不咨嗟慕望,李中丞者號爲忠謇,獨排之曰:「尹公身爲宰輔,望重具瞻,雖退老,猶念國家風俗,益礪操持,以示後人,乃反作浮屠行,反道敗常,以傷聖化。恐詭異之風,自此始焉。」

윤문강공 언이(彦頤)는 만년에 선(禪)의 맛을 더욱 즐겨 영평군 금강재에 물러나 살며 스스로 금강거사라 하였다. 성안에 들어올 때마다 누런 소를 타니 사람들이 다 알아보았다.

혜소(慧炤)의 문인 관승선사(貫乘禪師)와 벗이 되어 서로 얻은 것이 매우 즐거웠다. 그때 관승이 광명사에 머물며 부들 암자 하나를 두었는데 겨우 한 자리를 담을 만하였다. 약속하여 말하였다. 「먼저 가는 이가 여기 앉아 화(化)하기로 하자.」

하루는 소를 타고 관승에게 가서 함께 밥을 먹고 나서 말하였다. 「내 돌아갈 기약이 멀지 않아 작별을 고하러 왔을 뿐이오.」 말을 마치고 곧장 가매, 관승이 사람을 시켜 그 뒤를 따라 부들 암자를 보냈다. 공이 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스님이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니 내 갈 길이 정해졌구나.」

곧 붓을 들어 게(偈)를 썼다.

봄이 다시 가을이여 꽃이 피고 잎이 지네. 동이 다시 서여 참된 임금을 잘 기르네. 오늘 길 가운데서 이 몸을 돌이켜 보니 긴 하늘 만 리에 한 조각 한가한 구름이로다.

쓰기를 마치고 암자에 앉아 갔다.

그때 높은 사람과 뛰어난 선비가 탄식하며 우러르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이 중승(中丞)이라는 이는 곧다고 일컬어졌는데 홀로 배척하여 말하였다. 「윤공은 몸이 재상이 되어 명망이 무거워 모두가 우러르던 이다. 비록 늙어 물러났더라도 오히려 나라와 풍속을 생각하여 지조를 더욱 갈고 지켜 뒷사람에게 보여야 할 것인데, 도리어 부도의 행실을 하여 도를 뒤집고 떳떳함을 무너뜨려 성인의 교화를 상하게 하였다. 괴이한 기풍이 이로부터 시작될까 두렵다.」

予嘗見風騷格論,平頭上尾、蜂腰鶴膝、大韻小韻、正紐旁紐之病,是好事者閑談。昨日聞人言:「昔有金國使來寓客館,館後苽花盛開。使云:「苽花千萬發。」促接伴卽對。伴曰:「蓂葉兩三開。」使笑而不肯,又對亦不諾。有一胥吏進曰:「柳樹一雙垂。」使者曰:「柳樹二字雖非同韻,聲相近可對。」伴遽曰:「是不難,宜致蓂爲莢。」使大悅。」此風騷小韻病也,金使犯之。接伴雖不能對,不爲不才而卒能善對。

내가 일찍이 「풍소격론(風騷格論)」을 보니 평두(平頭)·상미(上尾)·봉요(蜂腰)·학슬(鶴膝)·대운(大韻)·소운(小韻)·정뉴(正紐)·방뉴(旁紐)의 병(病)이 있었는데, 이는 일 좋아하는 이들의 한가한 이야기다.

어제 남에게 들은 말이다. 「옛날에 금나라 사신이 와서 객관에 묵었는데 객관 뒤에 오이꽃이 한창 피었다. 사신이 『오이꽃이 천만 송이 피었다』 하고 접반에게 곧 대구를 짓기를 재촉하였다. 접반이 『명협(蓂葉)이 두세 잎 열렸다』 하니 사신이 웃으며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대구를 지어도 끄덕이지 않았다. 어떤 아전이 나아가 『버드나무 한 쌍이 드리웠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유수(柳樹) 두 글자가 비록 같은 운은 아니나 소리가 서로 가까워 대구가 될 만하다』 하였다. 접반이 곧 말하기를 『이는 어렵지 않습니다. 명(蓂)을 협(莢)으로 하면 마땅합니다』 하니 사신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는 풍소의 소운(小韻) 병이니 금나라 사신이 그것을 범한 것이다. 접반이 비록 곧바로 대구를 짓지는 못하였으나 재주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마침내 잘 대구를 지을 수 있었다.

東都本新羅。古有四仙,各領徒千餘人,歌法盛行。又有玉府仙人,始制曲調數百。本朝閔僕射可擧,傳得其妙。嘗一日獨坐彈琴,有雙鶴來翔,因作別調云:「月城仙迹遠,玉府樂聲微。雙鶴來何晚,吾將伴汝歸。」皇龍寺雨花門,是古仙徒所創,風物荒凉,過者無不感傷。學士胡宗旦,乘使軺過是門,見進士崔鴻賓留題:「古樹鳴朔吹,微波漾殘暉。徘徊想前事,不覺淚霑衣。」胡瞿然驚曰:「眞不世才也。」及復命,上問東都遺事,遂奏此詩以爲警。皇祖以繡衣巡北塞曰:「龍城秋日淡,古戍白烟橫。萬里無金革,胡兒賀大平。」其淡古無痕迹,與崔詩同,彼崔詩感歎今昔,故情思多,此詩閑昑邊塞,故風力壯。

동도(東都)는 본디 신라다. 옛날에 사선(四仙)이 있어 저마다 무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노래하는 법이 성행하였다. 또 옥부선인(玉府仙人)이 있어 처음으로 곡조 수백을 지었다. 본조의 복야 민가거(閔可擧)가 그 묘함을 전하여 얻었다.

일찍이 하루는 홀로 앉아 거문고를 타는데 두 마리 학이 날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별조(別調)를 지어 이르기를,

월성의 신선 자취는 멀고 옥부의 풍악 소리는 희미하네. 두 학은 어찌 이리 늦게 왔는가 내 장차 너희와 짝하여 돌아가리.

황룡사 우화문(雨花門)은 옛 선도(仙徒)가 세운 것인데 풍물이 거칠고 쓸쓸하여 지나는 이가 마음 상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학사 호종단(胡宗旦)이 사신의 수레를 타고 이 문을 지나다가 진사 최홍빈(崔鴻賓)이 남겨 제한 것을 보았다.

옛 나무는 북풍에 울고 잔물결은 남은 햇빛에 일렁이네. 서성이며 지난 일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옷을 적시네.

호종단이 깜짝 놀라 말하였다.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주다.」 돌아와 복명할 때 임금께서 동도의 남은 일을 물으시매 마침내 이 시를 아뢰어 경계로 삼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수의(繡衣)로 북쪽 변방을 순행하며 이르기를,

용성의 가을 해는 담담하고 옛 수자리에 흰 연기가 비꼈네. 만 리에 병장기가 없으니 오랑캐 아이가 태평을 하례하네.

그 담담하고 예스러워 자취가 없음이 최홍빈의 시와 같다. 저 최홍빈의 시는 이제와 옛을 느껴 탄식하였으므로 정과 생각이 많고, 이 시는 변방을 한가히 읊었으므로 풍력이 씩씩하다.

任文肅公克忠,過延福亭云:「煬帝汴河秋冷落,明皇蜀道雨凄凉。當時此恨無人信,滿目溪山淚數行。」文順公題云:「複道渾成碧草蕪,笙歌寂寞鳥相呼。箇中殷鑑分明在,莫遣遺基掃地無。」感古情深,讀之悽然。殷鑑一聯,含蓄深切。

임문숙공 극충(克忠)이 연복정을 지나며 이르기를,

양제의 변하(汴河)는 가을이 쓸쓸하고 명황의 촉도(蜀道)는 비가 처량하네. 그때 이 한을 믿는 이 없었으나 눈에 가득한 시내와 산에 눈물이 두어 줄이로다.

문순공이 제하여 이르기를,

복도(複道)는 온통 푸른 풀에 묻히고 생황과 노래는 적막한데 새가 서로 부르네. 이 가운데 은나라의 거울이 분명히 있으니 남은 터를 쓸어 없애게 하지 말라.

옛일에 느끼는 정이 깊어 읽으면 처연하다. 「은감(殷鑑)」 한 연은 머금은 뜻이 깊고 간절하다.

大同江是西都人送別之渡,江山形勝,天下絶景。鄭舍人知常送人云:「大同江水何時盡,別淚年年添作波。」當時以爲警策。然杜小陵云:「別淚遙添錦江水。」李太白云:「願結九江波,添成萬行淚。」皆出一模也。文順公於祖江送別云:「舟將人遠心隨去,海送潮來淚共流。」言淚雖同,意或小異。

대동강은 서도 사람이 이별하여 보내는 나루다. 강과 산의 좋은 경치가 천하의 절경이다. 사인 정지상이 사람을 보내며 이르기를,

대동강 물이 어느 때 마르랴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더하여 물결이 되네.

그때 사람들이 경책(警策)이라 여겼다. 그러나 두소릉이 「이별의 눈물이 멀리 금강 물에 더한다」 하였고 이태백이 「구강의 물결을 맺어 만 줄기 눈물을 이루기를 원한다」 하였으니, 다 한 본에서 나왔다.

문순공이 조강에서 이별하며 이르기를,

배가 사람을 멀리 데려가매 마음이 따라가고 바다가 조수를 보내오매 눈물이 함께 흐르네.

눈물을 말한 것은 같으나 뜻은 혹 조금 다르다.

凡留題,以辭簡義盡爲佳,不必誇多耀富。朴參政寅亮,題僧伽窟二十韻,咸郞中子眞,題洛山四十四韻,李史館允甫,題佛影一百韻,皆紀事實,辭不得不繁。若亭臺樓,觀所過題詠,只在一兩聯寫景。如畵森然眼界,使悤悤過客讀之,口不倦心不厭,吟玩遣興耳。予平生飽聞任相國克忠,題黃驪縣客樓云:「月黑為飛渚,烟沈江自波。漁舟何處宿,漠漠一聲歌。」但奇其韻語,未得其味。及按廉中道抵宿此樓,是時江烟冥漠,淡月朦朧,水鳥飛鳴,漁人相歌。惱眼感耳,摠是任公之詠,其詩價對景益高。

무릇 남겨 제하는 글은 말이 간결하고 뜻이 다한 것을 아름답게 여기니, 많은 것을 자랑하고 넉넉함을 빛낼 것이 아니다. 참정 박인량이 승가굴에 제한 것이 스무 운이요, 낭중 함자진(咸子眞)이 낙산에 제한 것이 마흔네 운이요, 사관 이윤보(李允甫)가 불영에 제한 것이 백 운인데, 다 사실을 적은 것이라 말이 번거롭지 않을 수 없었다.

정자와 대와 누각 같은 데는 지나며 제영하는 것이 다만 한두 연에 경치를 그리는 데 있다. 그림처럼 눈앞에 삼연히 펼쳐져, 바삐 지나는 나그네가 읽어도 입이 지치지 않고 마음이 싫증나지 않아 읊고 즐기며 흥을 부칠 뿐이다.

내가 평생 임 상국 극충이 황려현 객루에 제한 것을 실컷 들었다.

달이 검어 물가로 나는 듯하고 연기가 잠겨 강이 절로 물결지네. 고깃배는 어디에 묵는가 아득히 한 가락 노랫소리로다.

다만 그 운 붙인 말이 기이하다 여겼을 뿐 그 맛을 얻지 못하였다. 안렴사가 되어 중도에 이 누각에 묵게 되었는데, 이때 강의 연기가 어둑하고 아득하며 담담한 달이 몽롱하고 물새가 날며 울고 어부가 서로 노래하였다. 눈을 괴롭히고 귀를 울리는 것이 모두 임공이 읊은 그것이었으니, 그 시의 값이 경치를 마주하여 더욱 높아졌다.

金海府黃山江,沿流而下六七里,蒼崖斗起。面峰挾江,有烟村十餘戶,皆竹籬茅舍,如在畵圖中。唐侍御史崔致遠,嘗累石爲臺,名曰臨鏡,題詩石壁曰:「烟巒簇簇水溶溶,鏡裡人家對碧峰。何處孤帆飽風去,瞥然飛鳥杳無縱。」歲久臺壞,壁書漫滅。後人移書於黃山樓,所囑物象與詩反。如縣額州榜何其背矣。公凡所留詠,率不過絶句一首,就中嘉景無不破的。故過客見之,吟翫不足。寄贈亦多絶句,淸婉可愛。如贈檜谷獨居僧云:「除却松風耳不喧,結茅深倚白雲根。世人知路應翻恨,石上莓苔汚屐痕。」

김해부의 황산강은 물을 따라 예닐곱 리를 내려가면 푸른 벼랑이 우뚝 솟는다. 봉우리를 마주하고 강을 낀 곳에 안개 낀 마을 열 남짓 집이 있는데 다 대 울타리와 띠집이라 그림 속에 있는 듯하다.

당나라 시어사 최치원이 일찍이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이름을 임경(臨鏡)이라 하고 돌벽에 시를 제하였다.

안개 낀 멧부리 촘촘하고 물은 넘실넘실 거울 속 인가가 푸른 봉우리를 마주하네. 어디로 외로운 돛이 바람을 안고 가는가 언뜻 나는 새처럼 아득히 자취가 없구나.

해가 오래되어 대가 무너지고 벽의 글씨도 흐려 없어졌다. 뒷사람이 황산루로 글씨를 옮겼는데 붙인 물상과 시가 서로 어긋난다. 현의 편액과 주의 방(榜)이 어찌 그리 등졌는가.

공이 무릇 남겨 읊은 것은 대개 절구 한 수에 지나지 않았으되 그 가운데 아름다운 경치를 적확하게 꿰뚫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지나는 나그네가 보고 읊고 즐겨도 모자란다. 부치고 준 것도 절구가 많은데 맑고 아름다워 사랑할 만하다. 「회곡에 홀로 사는 승려에게 줌」에 이르기를,

솔바람 말고는 귀에 시끄러울 것이 없고 띠집을 얽어 깊이 흰 구름 뿌리에 기댔네. 세상 사람이 길을 알까 도리어 한스러우니 돌 위의 이끼에 나막신 자국이 더럽혀지리.

李學士知深,題豐州城頭樓云:「天與海無際,茫茫望不窮。四方千里目,六月九秋風。圖畵應難妙,篇章豈得工。只疑生羽翼,身在大虛中。」時人以此聯,言不雕鑿,而氣豪意豁。雖然十字中言無際,又言不窮,或上言望不窮,下言千里目,似乎意疊。而讀之不知有相疊之意者,盖無聲病也。古人以回忌聲病,爲金針格,信哉。

학사 이지심(李知深)이 풍주 성두루에 제하여 이르기를,

하늘과 바다가 끝이 없어 아득히 바라보아도 다하지 않네. 사방은 천 리를 보는 눈이요 유월에도 구추의 바람이로다. 그림으로도 묘하게 그리기 어렵고 글로도 어찌 잘 지으랴. 다만 날개가 돋아 몸이 큰 허공 가운데 있는가 의심하네.

그때 사람들이 이 연을 두고 말이 깎고 다듬지 않았으면서 기운이 호방하고 뜻이 활달하다 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열 글자 가운데 「끝이 없다」 하고 또 「다하지 않는다」 하였으며, 위에서 「바라보아도 다하지 않는다」 하고 아래에서 「천 리를 보는 눈」이라 하였으니 뜻이 겹친 듯하다. 그런데도 읽으면 서로 겹친 뜻이 있는 줄 모르는 것은 대개 성병(聲病)이 없기 때문이다. 옛사람이 성병을 돌이켜 꺼리는 것을 금침격(金針格)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그렇다.

鄭舍人知常,題八尺房云:「石頭松老一片月,天末雲低千點山。」予嘗愛其辭意淸絶,時時吟翫。及爲全羅道按廉,當二月生明,登邊山不思議房後峰,傍有老松攙天,新月隱映。下望平原,際天衆山,如灸注尖抹雲烟。忽憶鄭公詩,沈吟咀嚼,以爲不到此境,安知鄭公得意處也。

사인 정지상이 팔척방에 제하여 이르기를,

돌머리에 솔이 늙고 한 조각 달이요 하늘 끝에 구름이 낮고 천 점의 산이로다.

내가 일찍이 그 말과 뜻이 맑고 뛰어난 것을 사랑하여 때때로 읊고 즐겼다. 전라도 안렴이 되어 이월 달이 밝을 무렵 변산 불사의방 뒤 봉우리에 오르니, 곁에 늙은 솔이 하늘을 찌르고 새 달이 은은히 비쳤다. 아래로 평원을 바라보니 하늘에 닿은 뭇 산이 뜸을 뜬 듯 뾰족하게 구름과 연기를 문지르고 있었다. 문득 정공의 시가 생각나 나직이 읊으며 곱씹고는, 이 지경에 이르지 않고서야 어찌 정공이 뜻을 얻은 곳을 알겠는가 하였다.

楓岳皆骨立無土,因名爲皆骨。曇無竭菩薩眞身所住,居僧雖無行,亦成道。李祭酒純祐,爲東北面兵馬使,過此山,題一絶,外王父金禮卿,次其韻曰:「韋偃當年葬虢山,變爲皆骨倚天寒。高撑巉絶看如畵,應是丹靑舊筆端。」祭酒稱賞不已,外王父曰:「此猶未盡,尙有餘懷。」更作一絶云:「無竭眞身住此山,幻將枯骨掛雲端。欲令無行居僧眼,朝暮相看入妙觀〔浮屠有白骨觀。〕。」乃曰:「從前癢處已爬了也。

풍악은 다 뼈만 서고 흙이 없으므로 개골(皆骨)이라 이름 하였다. 담무갈보살의 참몸이 머무는 곳이라, 사는 승려가 비록 행실이 없어도 또한 도를 이룬다 한다.

좨주 이순우(李純祐)가 동북면 병마사가 되어 이 산을 지나며 절구 하나를 제하였는데, 외조부 김예경(金禮卿)이 그 운을 이어 이르기를,

위언(韋偃)이 그해 괵산에 묻혔다가 개골로 바뀌어 하늘에 기대어 차구나. 높이 버티어 가파른 것이 그림 같으니 이는 응당 단청하던 옛 붓끝이리라.

좨주가 칭찬하기를 마지않으매 외조부가 말하였다. 「이것으로도 아직 다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남은 회포가 있다.」 다시 절구 하나를 지어 이르기를,

무갈의 참몸이 이 산에 머무시어 헛되이 마른 뼈를 구름 끝에 걸어 두셨네. 행실 없이 사는 승려의 눈으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마주 보아 묘한 관(觀)에 들게 하려 함이리.〔부도(浮屠)에 백골관(白骨觀)이 있다.〕

그러고는 말하였다. 「이제까지 가렵던 데를 다 긁었다.」

東萊客館後有積翠亭,按廉使郭東珣留詩一首。文相國公裕爲大理時,手寫上板,是後無一詩繼上者。學士金精作記,崔相國惟淸,作後記自書,世稱積翠亭三絶,謂詩絶記絶書絶。予丁未春,乘傳過玆亭,一見歎賞,不能緘默,和成一首。縣令池壯元欲勒板,固止之,恐累三絶,且負斯亭。

동래 객관 뒤에 적취정이 있는데 안렴사 곽동순(郭東珣)이 시 한 수를 남겼다. 문 상국 공유(公裕)가 대리(大理)로 있을 때 손수 써서 판에 올렸고, 그 뒤로 시 한 수도 이어 올린 이가 없었다. 학사 김정(金精)이 기(記)를 짓고 최 상국 유청이 후기를 지어 스스로 썼으니, 세상에서 「적취정 삼절(三絶)」이라 일컬어 시가 뛰어나고 기가 뛰어나고 글씨가 뛰어나다 하였다.

내가 정미년 봄에 역마를 타고 이 정자를 지나다가 한 번 보고 감탄하여 잠자코 있을 수 없어 화답하여 한 수를 이루었다. 현령 지장원(池壯元)이 판에 새기려 하매 굳이 말렸으니, 삼절에 누가 되고 또 이 정자를 저버릴까 두려워서였다.

金官樓上,宋學士首題七言六韻詩三首。時有次韻者,亦留三首。後繼和無慮十餘輩。詩板滿樓,讀者皆疲。有一客書板尾云:「一聯已盡西峰意,四句何須北岳書。堪笑宋公眞好事,一樓題詠百言餘。」

금관(金官) 누각 위에 송 학사가 먼저 칠언 육운 시 세 수를 제하였다. 그때 운을 이은 이가 있어 또한 세 수를 남겼고, 뒤에 이어 화답한 이가 무릇 열 남짓이었다. 시판이 누각에 가득하여 읽는 이가 다 지쳤다. 어떤 나그네가 판 끝에 썼다.

한 연에 이미 서쪽 봉우리의 뜻을 다하였거늘 네 구로 어찌 북악을 쓸 것 있으랴. 우습다, 송공은 참으로 일 좋아하는 이라 한 누각의 제영이 백 마디가 넘는구나.

金蘭叢石亭,山人慧素作記。文烈公戲之曰:「此師欲作律詩耶。」星山公館,有一使客留題十韻,辭繁意曲。郭東珣見之曰:「此記也,非詩也。」非特詩與文各異,於一詩文中亦各有體。古人云:「學詩者,對律句體子美,樂章體太白,古詩體韓蘇。若文辭,則各體皆備於韓文,熟讀深,可得其體。」雖然李杜古詩,不下韓蘇,而所云如此者,欲使後進,汎學諸家體耳。」

금란의 총석정에 산인 혜소(慧素)가 기(記)를 지었다. 문열공이 놀려 말하였다. 「이 스님이 율시를 지으려 하는가.」

성산 공관에 어떤 사객이 열 운의 시를 남겨 제하였는데 말이 번거롭고 뜻이 굽었다. 곽동순이 보고 말하였다. 「이는 기(記)요 시가 아니다.」

시와 문이 각각 다를 뿐 아니라 한 시와 한 문 가운데에도 또한 저마다 체(體)가 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시를 배우는 이는 율구를 두자미로 체를 삼고, 악장을 이태백으로 체를 삼고, 고시를 한유와 소식으로 체를 삼는다. 문사로 말하면 각 체가 다 한유의 글에 갖추어져 있으니 익히 읽어 깊이 하면 그 체를 얻을 수 있다」 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이백과 두보의 고시가 한유와 소식에 못하지 않은데도 이렇게 말한 것은, 뒷사람으로 하여금 여러 집의 체를 두루 배우게 하려 함일 뿐이다.

劉學士曦,毅廟時應御試中壯元。嘗投人詩,略云:「壯元及第尋常有,天子門生有幾人。」及爲密城守道,過華封院,晝憩書壁云:「謫宦南行十六驛,今朝始踐尙原境。聊城側畔數里餘,有一僻郡號聞慶。郡邊新院勢甚嚴,爛然金碧交相映。東偏小樓尤奇絶,壓倒休文舊八詠。美哉此屋是誰營,光文其名閔其姓。我是閔公門下人,今見創構益自敬。嗟乎此人留在世,經營天下不爲病,奈何天上玉樓成,鴈過長空不留影。塵凡已隔杳難尋,只自興歎玆之永。」如使東珣見之,殆謂記也。又有人題此院云:「萬緣灰冷老居士,尙有丹心奉聖明。天下蒼生皆請祝,如何獨占華封名。」劉詩遇境戀古,故辭繁意曲,此詩但屬題此院,故語略而警。劉公嗣子大司成沖基,操行孤潔,文章洪贍,有父之風,其所著述皆散亡,不得錄。

학사 유희(劉曦)는 의종 때 어시에 응하여 장원에 뽑혔다. 일찍이 남에게 보낸 시에 대략 이르기를,

장원 급제는 예사로 있으나 천자의 문생은 몇 사람이나 되랴.

밀성 수도(守道)가 되어 화봉원을 지나다가 낮에 쉬며 벽에 썼다.

귀양살이로 남쪽으로 열여섯 역을 가서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상원 땅을 밟았네. 요성 곁 몇 리 남짓에 외진 고을 하나 있어 문경이라 하네. 고을 가에 새 원(院)이 있어 형세가 매우 엄한데 찬란한 금빛 푸른빛이 서로 비치네. 동쪽에 치우친 작은 누각이 더욱 기이하고 뛰어나 심휴문(沈休文)의 옛 팔영(八詠)을 눌러 넘어뜨리네. 아름답다, 이 집은 누가 지었는가 빛날 문(文)이 그 이름이요 성은 민(閔)이로다. 나는 민공의 문하 사람이라 이제 지은 것을 보니 더욱 스스로 공경하네. 아, 이 사람이 세상에 남아 있었더라면 천하를 경영하여도 병통이 되지 않았으리. 어찌하여 하늘 위에 옥루가 이루어져 기러기가 긴 하늘을 지나며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가. 티끌 세상이 이미 막혀 아득히 찾기 어려우니 다만 스스로 이 아득함을 탄식할 뿐이네.

만약 곽동순이 이를 보았더라면 아마 기(記)라 하였을 것이다.

또 어떤 이가 이 원에 제하여 이르기를,

온갖 인연이 재처럼 식은 늙은 거사도 오히려 붉은 마음으로 성명(聖明)을 받드네. 천하의 창생이 다 빌기를 청하거늘 어찌 홀로 화봉(華封)의 이름을 차지하였는가.

유희의 시는 경치를 만나 옛일을 그리워하였으므로 말이 번거롭고 뜻이 굽었고, 이 시는 다만 이 원에 제하는 데 붙였으므로 말이 간략하고 경책이 있다.

유공의 아들 대사성 충기(沖基)는 지조와 행실이 외롭고 깨끗하며 문장이 넓고 넉넉하여 아버지의 기풍이 있었으나, 그 지은 것이 다 흩어져 없어져 적지 못한다.

河直講千旦,誦白雲子吳廷碩遊八巓山詩:「水長山影遠,林茂鳥啼深。倦僕莫鞭馬,徐行得久吟。」因曰:「林茂鳥啼深之句,最爲絶唱。」予曰:「此詩遣意閑遠,連吟四句,而後得嘉味,何獨一句爲絶?如林茂鳥啼深之句,是剝杜子美隔竹鳥聲深也,以林茂之言,比隔竹之語,若涇渭然,淸濁自分。」

직강 하천단(河千旦)이 백운자 오정석(吳廷碩)의 「팔전산에 노닒」 시를 외웠다.

물이 길어 산 그림자 멀고 숲이 무성하여 새 우는 소리 깊네. 게으른 종아 말에 채찍질하지 마라 천천히 가야 오래 읊을 수 있다.

그러고는 말하였다. 「『숲이 무성하여 새 우는 소리 깊네』 구절이 가장 절창입니다.」

내가 말하였다. 「이 시는 뜻을 부린 것이 한가하고 멀어 네 구를 이어 읊은 뒤에야 아름다운 맛을 얻는데 어찌 한 구절만 뛰어나다 하는가. 『숲이 무성하여 새 우는 소리 깊네』 같은 구절은 두자미의 『대를 사이하여 새 소리 깊네』를 벗겨 낸 것이다. 『숲이 무성하다』는 말을 『대를 사이한다』는 말에 견주면 경수와 위수처럼 맑고 흐림이 절로 갈린다.」

崔文淑公典試,金承宣立之擢第龍頭,文淑公之嗣文懿公典試,金承宣之子諫議君綏,又中壯元。諫議才識富贍,墨竹傳家,筆法不凡。有一僧將歸江南,以一張紙求畵,畵畢題詩云:「南行數十里,厭見林林竹如簀。嫌君煩鈍手,鈍手慵畵繪胸中。千畝欝欝萬餘丈,一幅香牋何窄窄。君不見長沙地自褊,大王舞袖非不翩翩寬且大〔此互用韻格。〕」及爲東南路按廉,過聊城驛留詩云:「去歲楓欲丹,乘軺赴南國。今年柳初黃,返旆朝北極。萬物化無常,四時行不息。溪流似我心,澄浄唯一色。」人以此詩和裕有味,誠大夫行役之作。

최문숙공이 시험을 맡았을 때 승선 김입지(金立之)가 용두로 뽑혔고, 문숙공의 아들 문의공이 시험을 맡았을 때 김 승선의 아들 간의 군수(君綏)가 또 장원에 들었다.

간의는 재주와 식견이 넉넉하고 먹으로 그린 대가 집안에 전하며 필법이 범상하지 않았다. 어떤 승려가 강남으로 돌아가려 하며 종이 한 장에 그림을 구하매, 그림을 마치고 시를 제하였다.

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숲마다 대가 발처럼 빽빽한 것을 실컷 보리라. 그대의 번거롭고 무딘 손이 싫으니 무딘 손은 가슴속을 그려 내기에 게으르네. 천 이랑이 울창하고 만여 길인데 한 폭 향기로운 종이가 어찌 이리 좁은가.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장사(長沙) 땅이 절로 좁아도 대왕의 춤추는 소매가 펄럭이며 넓고 크지 않은 것이 아님을.〔이는 운을 섞어 쓴 격이다.〕

동남로 안렴이 되어 요성역을 지나며 시를 남겼다.

지난해 단풍이 붉으려 할 때 수레를 타고 남국으로 갔었네. 올해 버들이 처음 누레질 때 깃발을 돌려 북극으로 조회하네. 만물의 변화는 일정함이 없고 네 철의 운행은 쉬지 않네. 시내 흐름이 내 마음 같아 맑고 깨끗하여 오직 한 빛이로다.

사람들이 이 시가 화평하고 넉넉하여 맛이 있으니 참으로 대부가 길 떠나며 지은 작품이라 하였다.

蔡拾遺寶文名重一時,觀其詩,遒麗無雕琢之痕。嘗遊學錦城,後爲按廉而至,題公舍壁云:「此地來遊十餘載,今秋又作雁南飛。簾旌暮捲江山是,鏡匣朝開齒髮非。半夜白沙留月色,長年綠竹媚春輝。腰黃眼赤新榮重,來去誰云一布衣。」又和珍島碧波亭詩云:「此亭誰創碧江濱,無限黃蘆與綠筠。柳岸喜逢彭澤令,桃源行訪武陵人。稀微海上蓬萊島,出沒波間日月輪。金橘數枝低馬首,行人誰導使君貧。」次韻道康會仙亭詩云:「驅馳客路古今同,攻破愁城酒有功。風引水聲來玉枕,月移花影上珠櫳。階邊百草爭春色,檻外雙松盡日風。座上群仙皆令德,可歌詩雅賦椅桐。」

습유 채보문(蔡寶文)은 이름이 한때에 무거웠다. 그 시를 보면 굳세고 고우며 깎고 다듬은 자취가 없다.

일찍이 금성에 유학하였다가 뒤에 안렴이 되어 이르러 공사(公舍) 벽에 제하였다.

이 땅에 와서 노닌 지 십여 해 올가을에 또 기러기 되어 남으로 나네. 발을 저물녘에 걷으니 강산은 그대로인데 거울갑을 아침에 여니 이와 머리털은 예전이 아니로다. 한밤 흰 모래에는 달빛이 머물고 긴 세월 푸른 대는 봄빛에 아양 떠네. 누런 띠에 붉은 눈으로 새 영광이 무거우니 오가는 길에 누가 한낱 베옷이라 이르랴.

또 진도 벽파정 시에 화답하여 이르기를,

이 정자를 누가 푸른 강가에 세웠는가 가없는 누런 갈대와 푸른 대로다. 버들 언덕에서 팽택령을 만난 것이 기쁘고 도원으로 가서 무릉 사람을 찾네. 아스라이 바다 위의 봉래섬이요 물결 사이에 드나드는 해와 달 바퀴로다. 금귤 몇 가지가 말머리에 나직한데 길 가는 이 누가 사군(使君)이 가난하다 이끌겠는가.

도강 회선정 시에 운을 이어 이르기를,

나그넷길에 달리는 것은 예와 이제가 한가지라 시름의 성을 깨뜨리는 데 술이 공이 있네. 바람이 물소리를 끌어 옥베개에 오고 달이 꽃 그림자를 옮겨 구슬 창에 오르네. 섬돌 가의 온갖 풀은 봄빛을 다투고 난간 밖 두 소나무는 종일 바람이로다. 자리의 뭇 신선이 다 아름다운 덕이니 시아(詩雅)를 노래하고 의동(椅桐)을 읊을 만하네.

金右丞敦時少年時,隨一僧遊唐商館。有一商與妻有釁,欲棄去適誰家。時方冬忽雨,金遽索紙書一絶云:「東韓地勝斂寒威,瑞雪翻爲瑞雨飛。應是巫山神女術,故關賓館不敎歸。」商見之,感歎至垂淚,終不去妻。彼中朝人雖庸賈,見好詩感動如此。況士大夫乎。

우승 김돈시(金敦時)가 젊었을 때 어떤 승려를 따라 당나라 상관(商館)에 놀러 갔다. 어떤 장사꾼이 아내와 틈이 생겨 버리고 아무 집으로 가려 하였다. 그때 바야흐로 겨울인데 홀연 비가 내렸다. 김돈시가 곧 종이를 찾아 절구 하나를 썼다.

동한(東韓) 땅이 좋아 찬 위엄을 거두니 상서로운 눈이 뒤집혀 상서로운 비가 되어 나리네. 이는 응당 무산 신녀의 술법이라 짐짓 빈관을 막아 돌아가지 못하게 함이리.

장사꾼이 보고 감탄하여 눈물을 흘리기에 이르러 끝내 아내를 버리지 않았다. 저 중국 사람은 비록 용렬한 장사꾼이라도 좋은 시를 보고 감동함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사대부이겠는가.

翰林學士吳學麟,重遊興福寺云:「日改物自改,事移人又移。鶴添新歲子,松老去年枝。院院古非古,僧僧知不知。悠然登水閣,重驗早題詩。」出語圓滑,曲盡重遊之意。學士家世業儒,其孫世功世文世才三昆季,皆文章大手。季弟世才最優,世文次之。平生詩藁山積,皆散逸不傳于世,悲夫。二兄皆達,世才老不得志,客遊東都。棄庵居士淳之贈詩曰:「我本東南一民耳,老慵未可躬耒耜。來依古寺寓閑房,每被人呼作居士。恰似伯通屋廡下,梁鴻德耀暫同止。時從苾蒭問經論,敢逐搢紳攻文字。玆邦如魯古多儒,縱或相逢如有忌。乃知所趨苟不同,雖在比鄰邈千里。況於京國文翰苑,絶聽猶如天上事。然曾慣聞濮陽公,學海渾渾無涯涘。文如典誥少委蛇,詩似雅頌肯華靡。相如大人尙誕夸,屈平離騷却骫骳。淵深沕穆喜自珍,不露虹蜺千丈氣〔金無迹嘗謂予言:「世之譏評吳公,以爲使酒豪橫者,皆非也。公乃深沈閑雅,挫銳韜光,不欲露一毫芒耳」。〕。心祈一見每叩天,未覺己身賤且鄙。至諴感神固非虛,忽此相逢非夢裡。我嘗夢裡見天人,尙記容顔公卽是。敢將拙詩對神句,但恨其時未呈似〔嘗夢見神人下降,士女觀之者甚衆。予從騈闐中望之,所謂神人者,容貌不甚肥白,乃似世間書生相。傳云,神人作詩有一句云:「萬姓欣欣樂泰階」。予謂,神人若見我,令對此句,則不可以應卒,乃預構之云:「三光爛爛開天仗。」若自進於其前,未果遂覺。今觀公之貌,與夢所見無異。〕如今屢陪樽俎筵,又得新篇加溢美。喜將黃色發眉間,卽今雖死無所恥。陳篇尙慕古聖賢,何況竝生大君子。嗚呼愛之復畏之,佩服德音曷日已。」文順公少於吳三十餘年,結爲忘年交,亦以詩寄之云:「海山東去路悠悠,一落天涯久倦遊。黃稻日肥鷄騖喜,碧梧秋老鳳凰愁。烟波不返遊吳棹,雪月期浮訪剡舟。聖代未應終見棄,莫思垂白釣淸流。」其爲一代英雄所稱慕,如此。

한림학사 오학린(吳學麟)이 흥복사에 다시 노닐며 이르기를,

날이 바뀌니 물건도 절로 바뀌고 일이 옮기니 사람도 또 옮기네. 학은 새해에 새끼를 더하고 솔은 지난해 가지가 늙었네. 절마다 옛것이면서 옛것이 아니고 승려마다 아는 듯 모르는 듯. 느긋이 물가 누각에 오르니 일찍이 제한 시를 거듭 증험하네.

말을 냄이 둥글고 매끄러워 다시 노니는 뜻을 곡진히 다하였다.

학사의 집안은 대대로 유업을 이었다. 그 손자 세공(世功)·세문(世文)·세재(世才) 세 형제가 다 문장의 큰 솜씨였는데, 막내 세재가 가장 뛰어나고 세문이 그다음이었다. 평생의 시고가 산처럼 쌓였으나 다 흩어져 세상에 전하지 않으니 슬프다.

두 형은 다 현달하였으나 세재는 늙도록 뜻을 얻지 못하고 동도에 나그네로 떠돌았다. 기암거사 순지(淳之)가 시를 주어 이르기를,

나는 본디 동남의 한 백성일 뿐 늙고 게을러 몸소 쟁기를 잡지 못하네. 옛 절에 와 의지하여 한가한 방에 붙어 사니 늘 사람들이 거사라 부르네. 흡사 백통(伯通)의 집 처마 아래 양홍(梁鴻)과 덕요(德耀)가 잠시 함께 머문 듯. 때로 스님을 좇아 경론을 묻고 감히 벼슬아치를 좇아 문자를 다투랴. 이 고을은 노나라처럼 예로부터 선비가 많으나 설령 서로 만나도 꺼리는 듯하네. 이에 알겠구나, 나아가는 바가 진실로 같지 않으면 비록 이웃에 있어도 천 리처럼 아득함을. 하물며 서울의 문한원(文翰苑)이야 듣기를 끊은 것이 오히려 하늘 위의 일 같네. 그러나 일찍이 복양공(濮陽公)을 익히 들었으니 배움의 바다가 넓고 넓어 끝이 없다 하네. 글은 전고(典誥) 같아 굽이가 적고 시는 아송(雅頌) 같으니 어찌 화려하고 사치하랴. 상여(相如)의 「대인(大人)」도 오히려 허탄하고 과장되며 굴평(屈平)의 「이소(離騷)」도 도리어 뒤틀렸네. 연못처럼 깊고 그윽하여 스스로 보배로 여기기를 기뻐하고 천 길 무지개 기운을 드러내지 않네.〔김무적(金無迹)이 일찍이 내게 말하였다. 「세상에서 오공을 나무라며 술을 부려 호방하고 방자하다고 하는 것은 다 그르다. 공은 곧 깊고 잠잠하며 한가하고 아담하여, 날카로움을 꺾고 빛을 감추어 터럭만큼도 드러내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마음으로 한 번 뵙기를 빌어 늘 하늘을 두드렸더니 내 몸이 천하고 비루한 줄도 깨닫지 못하였네. 지극한 정성이 신을 감동시킨다는 것이 참으로 헛말이 아니니 홀연 이렇게 만난 것이 꿈속이 아니로다. 내 일찍이 꿈속에서 하늘 사람을 보았는데 아직도 그 얼굴을 기억하니 공이 바로 그이로다. 감히 내 졸렬한 시로 신의 구절을 마주하랴 다만 그때 드리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네.〔일찍이 꿈에 신인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구경하는 남녀가 매우 많았다. 내가 붐비는 가운데서 바라보니 이른바 신인이라는 이가 얼굴이 그리 살지고 희지 않아 세간의 서생 모습 같았다. 전하는 말에 신인이 시를 지었는데 한 구절에 「만백성이 기뻐 태계(泰階)를 즐긴다」 하였다 한다. 나는 생각하기를, 신인이 만약 나를 보고 이 구절에 대구를 지으라 하면 갑자기 응할 수 없겠다 하여 미리 지어 두기를 「세 빛이 찬란히 하늘 의장을 연다」 하였다. 스스로 그 앞에 나아가려 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깨었다. 이제 공의 모습을 보니 꿈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다.〕 이제 여러 번 술자리에 모시고 또 새 편을 얻어 넘치는 아름다움을 더하네. 기쁘게 누런 빛을 눈썹 사이에 피우니 이제 곧 죽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네. 묵은 글로도 오히려 옛 성현을 사모하거늘 하물며 함께 살아 있는 큰 군자이겠는가. 아, 사랑하고 또 두려워하니 덕의 말씀을 몸에 지님이 어느 날에 그치랴.

문순공은 오세재보다 서른 남짓 어렸으나 나이를 잊은 사귐을 맺어 또한 시를 부쳐 이르기를,

바다와 산 동쪽으로 가는 길이 아득한데 한 번 하늘가에 떨어져 오래 노닒에 지쳤네. 누런 벼가 날로 살지니 닭과 오리가 기뻐하고 푸른 오동이 가을에 늙으니 봉황이 시름하네. 안개 물결에 오나라로 노 저어 간 이는 돌아오지 않고 눈 달에 섬계로 배 띄워 찾기를 기약하네. 성대(聖代)가 끝내 버리지는 않으리니 흰머리로 맑은 물에 낚시할 것을 생각지 마오.

한 시대의 영웅에게 일컬어지고 사모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外王父題高城客樓云:「閉窓猶海氣,欹枕亦濤聲。冠盖四仙迹,江湖三日名。」此聯格高意盡。吳秘丞世文題綠楊驛云:「有花村價重,無柳驛名孤。喬木日先照,枯桑風自呼。」此聯高淡有味,有味不如意盡。

외조부가 고성 객루에 제하여 이르기를,

창을 닫아도 오히려 바다 기운이요 베개에 기대어도 또한 물결 소리로다. 갓과 일산은 네 신선의 자취요 강호는 사흘의 이름이로다.

이 연은 격이 높고 뜻이 다하였다.

비승 오세문(吳世文)이 녹양역에 제하여 이르기를,

꽃이 있어 마을 값이 무겁고 버들이 없어 역 이름이 외롭네. 높은 나무에 해가 먼저 비치고 마른 뽕나무에 바람이 절로 부르네.

이 연은 높고 담담하여 맛이 있으나, 맛이 있는 것은 뜻이 다한 것만 못하다.

吳世才賦北岳戟巖云:「北嶺巉巉石,旁人號㦸巖。逈椿乘鶴晉,高刺上天咸。揉柄電爲火,洗鋒霜是鹽。何當作兵器,敗楚亦亡凡。」有宋人見此詩,歎服問曰:「此人在乎,今至何官?我宋有如此作詩者,則必爵之。此詩非閑中題詠,殆被人占强韻令賦耳。」哉字助也,亦難爲韻,昔有一長官,命權敦禮賦竹陣,占哉字。權曰:「刃交風拂是,弓掛月生哉。」可同日而語。

오세재가 북악의 극암(戟巖)을 읊어 이르기를,

북쪽 재의 가파른 바위를 곁의 사람이 극암이라 부르네. 아득한 춘(椿)나무는 학을 탄 진(晉)이요 높이 찌른 것은 하늘에 오른 함(咸)이로다. 자루를 주무르니 번개가 불이 되고 칼끝을 씻으니 서리가 소금이로다. 어찌하면 병기를 만들어 초나라를 깨뜨리고 범(凡)나라도 없앨까.

송나라 사람이 이 시를 보고 탄복하여 물었다. 「이 사람이 살아 있습니까. 지금 어느 벼슬에 이르렀습니까. 우리 송나라에 이렇게 시를 짓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벼슬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시는 한가한 가운데 제영한 것이 아니라, 아마 남에게 억지 운을 받아 짓게 된 것이겠습니다.」

「재(哉)」 자는 어조사라 또한 운으로 삼기 어렵다. 옛날에 어떤 장관이 권돈례에게 「죽진(竹陣)」을 지으라 하며 재 자를 던졌다. 권돈례가 이르기를,

칼날이 어우러져 바람이 스치는 것이요 활을 걸어 두니 달이 돋는구나.

같은 날에 두고 말할 만하다.

許壯元洪材,完山道中云:「重尋舊遊處,風月似前春。只歎完山下,時無鼓腹人。」聞者皆云:「淺易然有恤民經濟之意,」後果爲冢宰。齊安進士崔裕,題桃源驛云:「避秦三四家,仍作桃源驛。自言迎送勞,却勝長城役。」有風騷諷喩之意,當時以爲警策。裕十上不第,以布衣終。則古人觀文章,知人之行止,似未必信。雖然觀崔詩,語意自苦,無和裕將大之氣。

장원 허홍재(許洪材)가 완산 가는 길에서 이르기를,

옛 놀던 곳을 거듭 찾으니 바람과 달이 지난봄 같구나. 다만 탄식하노니 완산 아래에 이제는 배를 두드리는 사람이 없구나.

듣는 이가 다 말하기를 「얕고 쉬우나 백성을 구휼하고 세상을 다스리려는 뜻이 있다」 하였다. 뒤에 과연 총재가 되었다.

제안의 진사 최유(崔裕)가 도원역에 제하여 이르기를,

진나라를 피한 서너 집이 그대로 도원역이 되었네. 스스로 이르기를 맞고 보내기가 수고롭다 하나 도리어 장성 부역보다는 낫다 하네.

풍자하고 깨우치는 뜻이 있어 그때 경책이라 하였다. 최유는 열 번 응시하고도 급제하지 못하여 베옷으로 마쳤다. 그러니 옛사람이 문장을 보고 그 사람의 나아감과 머무름을 안다는 것도 반드시 믿을 것은 못 되는 듯하다. 비록 그러하나 최유의 시를 보면 말과 뜻이 절로 괴로워, 화평하고 넉넉하여 장차 크게 될 기운이 없다.

崔景文公洪胤,以金牓元,拜政堂,入中書,寓直房在第四。琴英烈公儀,亦以壯元,拜政堂,踵入此房。夜直作詩云:「中書第四宰臣房,幾閱平章與政堂。此日榮華誰得似,壯元郞代壯元郞。」英烈公掌喉舌,兼三大夫、雙學士,及爲相久柄鈞衡。乃作詩云:「出入黃扉靑瑣闥,于今二十四年臨。鷄鳴漏盡猶行路,恐向沙堤犯夜禁。」於是稱病歸老。二公皆文忠肅克謙之門下壯元也。越壬申春,同掌試春官,予出其門下。兩公竝時爲相,而忠肅公之嗣惟弼,時亦爲相。及英烈公縣車歸老,門生欲獻壽,大敞華筵,仍邀崔文二相同燕。英烈公倚酣唱曰:「一門下兩龍頭,與宗伯同時爲平章,以至退老。赴此門生之賀宴,實千古未聞也。胡不爛醉以答盛事?」門生皆俯伏階下,不勝慶嘆,至或有拭淚嗚咽者。趙同年蕡作詩,私與同年微聲曰:「共登金牓一門下,聯入黃扉數載中。宗伯〔方言座主之嗣。〕亦爲一時相,桂堂春宴賀三公。」同年以此詩雖淺俗,言今日事的然。

최경문공 홍윤(洪胤)이 금방(金牓)의 으뜸으로 정당에 임명되고 중서에 들어가니 묵는 직방이 넷째 방이었다. 금영렬공 의(儀)도 장원으로 정당에 임명되어 발꿈치를 이어 이 방에 들었다. 밤에 숙직하며 시를 지었다.

중서의 넷째 재신의 방이 평장과 정당을 몇이나 겪었던가. 이날의 영화를 누가 견주랴 장원랑을 장원랑이 대신하였네.

영렬공은 후설(喉舌)을 맡고 세 대부와 두 학사를 겸하였으며, 재상이 되어서는 오래 저울대를 잡았다. 이에 시를 지었다.

황비(黃扉)와 청쇄달(靑瑣闥)을 드나든 것이 이제 스물네 해에 이르렀네. 닭이 울고 물시계가 다하도록 길을 가니 사제(沙堤)에서 밤 금함을 범할까 두렵네.

이에 병을 일컫고 늙어 돌아갔다.

두 공은 다 문충숙공 극겸(克謙)의 문하 장원이다. 임신년 봄에 함께 춘관의 시험을 맡았고 내가 그 문하에서 나왔다. 두 공이 같은 때에 재상이 되었는데 충숙공의 아들 유필(惟弼)도 그때 재상이었다.

영렬공이 수레를 걸고 늙어 돌아가매 문생들이 헌수하고자 화려한 자리를 크게 열고, 이어 최·문 두 재상을 맞아 함께 잔치하였다. 영렬공이 술기운에 기대어 부르짖었다. 「한 문하에서 두 용두가 나서 종백과 함께 같은 때에 평장이 되고 늙어 물러나기에 이르렀다. 이 문생의 하례 잔치에 나아가니 참으로 천고에 듣지 못한 일이다. 어찌 흠뻑 취하여 이 성대한 일에 답하지 않으랴.」

문생들이 다 섬돌 아래 엎드려 경하와 탄식을 이기지 못하고, 더러는 눈물을 닦고 흐느끼는 이까지 있었다.

같은 해에 뽑힌 조분(趙蕡)이 시를 지어 사사로이 동년들에게 낮은 소리로 읊었다.

한 문하에서 함께 금방에 오르고 몇 해 사이에 잇달아 황비에 들었네. 종백〔우리말로 좌주의 아들이다.〕도 한때의 재상이 되니 계당(桂堂)의 봄 잔치에서 세 공에게 하례하네.

동년들이 이 시가 비록 얕고 속되나 오늘 일을 말한 것이 적확하다 하였다.

景文公英烈公,俱解相印,歸老于第。上因冊東朝臨軒,敬老勅賜大酺。兩公皆入赴宴,諸門生扶侍上闕,塡街溢巷,觀者莫不嗟嘆。及罷宴歸第,英烈公謂諸子曰:「吾以龍頭爲相,以至退老,得參賜設,而門生扶侍甚盛。皆當代英材,曷勝慶快!宜效文和公宴諸門生故事。」於是召集四年牓,大開燕飮,呼出諸子孫欲命坐,公曰:「一門子弟情同骨肉,吾諸子孫亦爾等兄弟也。」乃以齒坐之。及酒酣懽甚,命門生相唱和。辰年狀頭皇甫瓘唱云:「同年先後爲兄弟。」公卽應聲對曰:「滿座英雄間子孫。」明日諸同年各作詩謝之。僕以公之一聯七字,分爲韻作詩幷引以謝,公覽而肯之。

경문공과 영렬공이 함께 재상의 인끈을 풀고 집에 돌아가 늙었다. 임금께서 동조(東朝)를 책봉하시고 난간에 임하시어 늙은이를 공경하는 뜻으로 큰 잔치를 내리셨다. 두 공이 다 들어와 잔치에 나아가매 여러 문생이 부축하여 모시고 대궐에 오르니, 거리와 골목에 가득하여 보는 이가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잔치가 끝나 집에 돌아와 영렬공이 여러 아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용두로 재상이 되어 늙어 물러나기에 이르렀고, 하사하신 자리에 참여하였으며 문생들이 부축하여 모신 것이 매우 성대하였다. 다 당대의 영재이니 어찌 기쁨을 이기랴. 마땅히 문화공이 여러 문생에게 잔치한 옛일을 본받아야겠다.」

이에 네 해의 방을 불러 모아 크게 잔치를 열고, 여러 아들과 손자를 불러내어 앉히려 하며 공이 말하였다. 「한 문중의 자제는 정이 골육과 같다. 내 여러 아들과 손자도 너희의 형제다.」 이에 나이대로 앉혔다.

술이 무르익어 몹시 즐거워지매 문생들에게 서로 부르고 화답하게 하였다. 진년의 장두 황보관(皇甫瓘)이 부르기를,

동년은 앞서고 뒤섬이 형제와 같네.

공이 곧 소리에 응하여 대구하였다.

자리에 가득한 영웅이 자손 사이에 앉았네.

이튿날 여러 동년이 저마다 시를 지어 사례하였다. 나는 공의 한 연 일곱 자를 나누어 운으로 삼아 시를 짓고 서(引)를 아울러 사례하였는데, 공이 보고 좋게 여겼다.

趙文正公,器識德行文武兼備,望傾朝野。丙子年討丹宼,命元帥,公爲副,不自顓制戰不利,作詩曰:「千里霜蹄容一蹶,悲鳴壯氣何逸越。若敎造父更加鞭,蹋躪沙場摧古月。」及己卯年,朝議推公爲獨元帥,專掌兵權。會蒙古兵追丹宼至,其渠率見公拜而兄之,倂力掃丹寇乃還。遷門下平章事、判兵部。時文安公文順公韓陳兩副樞,劉司成沖基,尹直講于一,皆其同牓,醵宴以賀。公作詩最爲警策,今失之,唯記一句云:「綠袖昔年爲末座,黃扉今日先諸公。」復次韻答劉待制陳臺長云:「文陣當年鼓角雄,銀袍藍袖棘闈中。靑雲穩步無多子,白髮相看不負公。烏府𢥠威搖岳鎭,鴻樞慶頌及兒童。天章待制又如許,同牓飛昇甚日窮。」功名方極,還有烟霞逸想,開獨樂園於東臯,傍竹臨泉。日與門弟賢士大夫,詩酒自娛。其酬唱至成數卷,惜哉無人收錄,不傳于今。年五十卒,三韓莫不搥胸慟慕。尹直講于一作墓銘,略曰:「公德行耶文學耶政事耶,可無愧顔閔季路之徒歟。入而相出而將,半百年前功名富貴何云云。」時謂實錄。

조문정공은 그릇과 식견과 덕행과 문무를 아울러 갖추어 명망이 조야를 기울였다.

병자년에 거란 도적을 칠 때 원수를 명하시며 공을 부원수로 삼았는데, 스스로 오로지 결단하지 못하여 싸움이 이롭지 않았다. 시를 지어 이르기를,

천 리 가는 서리 굽이 한 번 넘어짐을 용납하니 슬피 우는 씩씩한 기운이 어찌 그리 뛰어난가. 만약 조보(造父)에게 다시 채찍을 더하게 한다면 모래벌판을 짓밟아 옛 오랑캐를 꺾으리라.

기묘년에 이르러 조정 의논이 공을 홀로 원수로 밀어 병권을 오로지 맡겼다. 마침 몽고 군사가 거란 도적을 쫓아 이르렀는데, 그 우두머리가 공을 보고 절하며 형으로 삼았고, 힘을 아울러 거란 도적을 쓸어 낸 뒤에 돌아갔다. 문하평장사·판병부로 옮겼다.

그때 문안공과 문순공과 한·진 두 부추와 유 사성 충기와 윤 직강 우일이 다 그 같은 방이라, 추렴하여 잔치를 열고 하례하였다. 공이 지은 시가 가장 경책이었는데 이제 잃어버리고 오직 한 구절만 기억한다.

푸른 소매로 지난해에는 끝자리에 있었는데 황비에 오늘은 여러 공보다 앞섰네.

다시 운을 이어 유 대제와 진 대장에게 답하여 이르기를,

문진(文陣)에 그해 북과 뿔이 씩씩하였고 은포와 남수로 극위(棘闈) 가운데 있었네. 푸른 구름을 편히 밟은 이가 몇 사람 아니요 흰머리로 마주 보아도 공을 저버리지 않았네. 오부(烏府)의 두려운 위엄은 산악을 흔들고 홍추(鴻樞)의 경사를 기림은 아이에게까지 미치네. 천장각 대제도 또 이러하니 같은 방이 날아오르는 것이 어느 날에 다하랴.

공명이 바야흐로 지극하였으나 도리어 안개와 노을에 숨을 뜻이 있어, 동고(東臯)에 독락원을 열고 대를 곁하고 샘에 임하였다. 날마다 문하의 제자와 어진 대부들과 더불어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그 주고받은 것이 여러 권을 이루었는데, 애석하다, 거두어 적은 이가 없어 지금 전하지 않는다.

나이 쉰에 죽으매 삼한이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고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윤 직강 우일이 묘명을 지었는데 대략 이러하다. 「공은 덕행인가 문학인가 정사인가. 안회와 민자건과 계로의 무리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겠구나. 들어와서는 재상이요 나가서는 장수라, 반백 년 앞의 공명과 부귀를 무엇이라 이르랴.」 그때 사람들이 실록이라 하였다.

英烈公與任學士永齡,同師受業,及應擧,任先擢乙第。公作詩曰:「進士出身非所望,壯元及第不才何。羨他吾友任公子,紫陌春風作探花。」明年果中壯元。

영렬공이 학사 임영령(任永齡)과 같은 스승에게 배웠는데, 과거에 응하매 임영령이 먼저 을과에 뽑혔다. 공이 시를 지었다.

진사 출신은 바라는 바가 아니나 장원 급제는 재주 없는 내가 어찌하랴. 부럽구나, 내 벗 임공자여 붉은 거리 봄바람에 탐화랑(探花郞)이 되었네.

이듬해에 과연 장원에 들었다.

趙文正公,與劉待制沖基,李司諫百順,及諸門弟,遊獨樂園,開飮唱和,得欺字。李曰:「谷靜聲猶答,池淸影不欺。」〔時臨池。〕劉曰:「夏日眞堪畏,秋雲不致欺〔指趙〕。」公曰:「膽麤凌酒惡,道直沒人欺。」一座動驚無復繼和。公嘗和英烈公得孫男詩云:「排陰命代我先知,行止休憑六眼龜。英物一朝呱繡帳,微陽午夜動葭帷〔冬至日生。〕。何煩弓韣勤求子,已呪桃花屢靧兒〔兒生用桃花洗面。呪曰:「取紅花,取白雪。」與兒洗面,作光澤。〕,叶得半千爲世瑞,看將十五作人師。文高華國靑錢鷟,威敵扶王白捧羆〔北史王羆〕,自昔通家恩岳在,賀懷聊展一篇詩。」初文士爭次韻,難其羆字,公最後押,尤異。

조문정공이 유 대제 충기와 이 사간 백순과 여러 문하 제자와 더불어 독락원에 노닐며 술자리를 열고 부르고 화답하는데 「기(欺)」 자를 얻었다.

이백순이 이르기를,

골이 고요하니 소리가 오히려 답하고 못이 맑으니 그림자가 속이지 않네.〔그때 못에 임하였다.〕

유충기가 이르기를,

여름 해는 참으로 두려울 만하고 가을 구름은 속이지 않네.〔조공을 가리킨다.〕

공이 이르기를,

담이 거칠어 술의 사나움을 업신여기고 도가 곧아 남에게 속지 않네.

한자리가 놀라 움직여 다시 이어 화답하는 이가 없었다.

공이 일찍이 영렬공이 손자를 얻은 시에 화답하여 이르기를,

음(陰)을 밀어내고 대를 이을 것을 내 먼저 아니 가고 멈춤을 여섯 눈 거북에 기대어 점칠 것 없네. 영특한 아이가 하루아침에 수놓은 휘장에서 울고 희미한 볕이 한밤중에 갈대 휘장을 움직이네.〔동짓날에 났다.〕 어찌 번거로이 활집을 걸어 아들 얻기를 빌랴 이미 복숭아꽃으로 아이 얼굴을 여러 번 씻겼거늘.〔아이가 나면 복숭아꽃으로 얼굴을 씻긴다. 주문에 이르기를 「붉은 꽃을 가져오라, 흰 눈을 가져오라」 하며 아이 얼굴을 씻겨 윤이 나게 한다.〕 반천(半千)에 맞아 세상의 상서가 되고 열다섯을 보아 사람의 스승이 되리라. 글이 높아 나라를 빛내는 청전(靑錢)의 작(鷟)이요 위엄이 적을 눌러 임금을 붙드는 흰 곰이로다.〔북사의 왕비(王羆)다.〕 예로부터 통가(通家)의 은혜가 산악처럼 있으니 품은 하례를 애오라지 한 편 시로 펴노라.

처음에 문사들이 다투어 운을 이었는데 그 「비(羆)」 자를 어려워하였다. 공이 맨 뒤에 눌러 놓았는데 더욱 남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