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 계원필경집 서 — 서유구校印桂苑筆耕集序 徐有榘
1회남 막부 시절의 글
《桂苑筆耕集》二十卷,新羅孤雲崔公在唐淮南幕府時,公私應酬之作,而東還之後,手編表進于朝者也。
『계원필경집』 스무 권은 신라 고운 최공이 당나라 회남 막부에 있을 때 공사간에 응수한 글로, 동쪽으로 돌아온 뒤 손수 엮어 표문과 함께 조정에 올린 것이다.
2열두 살에 바다를 건너
公名致遠,字海夫,孤雲其號也。湖南之沃溝人。幼穎慧絶倫,年十二從商舶入中原,十八擧進士第。久之,調溧水縣尉,任滿而罷。
공의 이름은 치원, 자는 해부, 고운은 그 호다. 호남 옥구 사람이다. 어려서 총명함이 무리에서 뛰어나 열두 살에 상선을 따라 중원에 들어갔고 열여덟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한참 뒤 율수현위에 임명되었다가 임기가 차서 그만두었다.
3고변의 막부에서 신라로 돌아오기까지
時値黃巢之亂,諸道行營都統高騈開府淮南,辟公爲都統巡官。凡表、狀、文、告,皆出公手。其《討黃巢檄》,天下傳誦。奏除殿中侍御史,賜緋魚袋。後四年,充國信使東歸,事憲康王、定康王,爲翰林學士、兵部侍郞,出爲武城太守。眞聖時,挈家入江陽郡伽倻山以終焉,葬在湖西之鴻山。或謂公羽化者,妄也。
때마침 황소의 난을 만나 제도행영도통 고변이 회남에 막부를 열고 공을 불러 도통순관으로 삼았다. 모든 표·장·문·고가 다 공의 손에서 나왔고 그 「토황소격」은 천하가 전하여 외웠다. 아뢰어 전중시어사에 제수되고 비어대를 받았다. 네 해 뒤 국신사가 되어 동쪽으로 돌아와 헌강왕·정강왕을 섬겨 한림학사·병부시랑이 되고 나가 무성 태수가 되었다. 진성왕 때 집안을 이끌고 강양군 가야산에 들어가 생을 마쳤고 무덤은 호서 홍산에 있다. 더러 공이 신선이 되었다 하는 것은 망령된 말이다.
4기미를 안 군자
夫以海隅偏壤之産,而弱齡北學,取科宦如拾芥,終以文章鳴一世,同時賓貢之流,莫之或先,豈不誠豪傑之士哉?若其居幕數載,知高騈之不足有爲,呂用之、諸葛殷等之誕妄必敗,超然引去,去三年而淮南亂作,則又有似乎知幾明哲之君子,其人與文,要之可傳不可泯者也。
바다 모퉁이 외진 땅에서 나서 어린 나이에 북쪽에 가 배워 과거와 벼슬을 지푸라기 줍듯 얻고 끝내 문장으로 한 세상에 이름을 울려, 같은 때 빈공한 무리 가운데 아무도 앞서지 못하였으니 어찌 참으로 호걸의 선비가 아니겠는가. 막부에 몇 해 있으면서 고변이 큰일을 하기에 모자라고 여용지·제갈은 무리의 허탄함이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아 초연히 물러났는데, 떠난 지 세 해 만에 회남에 난이 일어났으니 또한 기미를 알고 밝게 살핀 군자와 비슷함이 있다. 그 사람과 글은 요컨대 전할 만하고 없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5전하는 것은 이 문집뿐
據進表,是集之外,復有今體賦一卷、今體詩一卷、雜詩賦一卷、《中山覆簣集》五卷。唐《藝文志》則稱《桂苑筆耕》二十卷、文集三十卷,而他皆不傳,唯是集屢經鋟印,板刻舊佚,搨本亦絶罕。
진표에 따르면 이 문집 밖에 다시 금체부 한 권, 금체시 한 권, 잡시부 한 권, 『중산복궤집』 다섯 권이 있었다. 『당서』 「예문지」는 『계원필경』 스무 권과 문집 서른 권이라 하였으나 다른 것은 다 전하지 않고 오직 이 문집만 여러 번 판각을 거쳤는데 판목은 예전에 없어지고 인쇄본도 아주 드물다.
6홍공이 보낸 책을 무성서원과 가야사에 나누어 두다
癸巳秋,余按察湖南,巡到武城,謁公書院,裴徊乎石龜、流觴臺之間,俛仰遺躅,有餘嘅焉。會淵泉洪公以是集寄曰:「此近千年不絶如線之文獻耳,子其無流通古書之思乎?」余如獲拱璧,懼其愈遠而愈佚也,亟加証校,用聚珍字擺印,分藏諸泰仁縣之武城書院、陜川郡之伽倻寺。
계사년 가을 내가 호남을 안찰하며 순행하다 무성에 이르러 공의 서원에 배알하고 석귀와 유상대 사이를 서성이며 남긴 자취를 굽어보고 우러러보니 남은 탄식이 있었다. 마침 연천 홍공이 이 문집을 부쳐 보내며 말하였다. 「이는 천 년 가까이 끊어질 듯 실처럼 이어 온 문헌일 뿐이니, 그대는 옛 책을 유통시킬 생각이 없는가.」 내가 큰 옥을 얻은 듯하여 더 멀어지고 더 흩어질까 두려워 급히 교정을 더하고 취진자로 찍어 태인현 무성서원과 합천군 가야사에 나누어 두었다.
7동방 예원의 개산 비조
嗟乎!名醞之坊,必題杜康;良劍之鍔,必標歐冶,爲其不忘本始也。我東詩文集之秖今傳者,不得不以是集爲開山鼻祖,是亦東方藝苑之本始也,庸詎可一任其銷沈殘滅而不之圖哉?
아, 이름난 술집은 반드시 두강을 내걸고 좋은 칼날은 반드시 구야를 새기니 그 근본을 잊지 않으려는 것이다. 우리 동방의 시문집으로 지금 전하는 것은 이 문집을 개산 비조로 삼지 않을 수 없으니 이 또한 동방 예원의 근본이요 시작이다. 어찌 가라앉고 스러지도록 내버려 두고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8돌아온 뒤의 글과 사서의 어긋남
東還後著作,散逸無傳,唯有梵宮、祠墓之間,披林藪剔苔蘚,尙可得十數篇,彙附原集,剞劂壽傳,余竊有志而未遑云。按史稱中和二年正月,王鐸代高騈爲諸道行營都統。五月,加高騈侍中,罷鹽鐵轉運使,騈旣失兵柄,復解利權,攘袂大詬,上表自訴,言辭不遜,上命鄭畋草詔切責之。今考集中,有《謝加侍中表》,巽辭引咎而已,無一語激忿勃謾。又有《謝賜宣慰表》云:「仰睹綸音,深嘉秕政,師徒輯睦,黎庶安寧。」其假借慰奬也,若是之慇摯,史所謂「草詔切責」者,無乃非當時實錄也歟?
동쪽으로 돌아온 뒤의 저작은 흩어져 전하지 않고 오직 절과 사당·무덤 사이에서 숲을 헤치고 이끼를 벗기면 아직 십수 편을 얻을 수 있으니, 모아 원집에 붙여 새겨 오래 전하고자 내가 가만히 뜻은 두었으나 겨를이 없었다. 사서를 살피면 중화 이년 정월 왕탁이 고변을 대신하여 제도행영도통이 되고, 오월에 고변에게 시중을 더하고 염철전운사를 파하니 고변이 병권을 잃고 다시 이권을 풀리자 소매를 걷고 크게 욕하며 표를 올려 스스로 호소하되 말이 불손하여 임금이 정전에게 조서를 초하게 하여 준엄히 꾸짖었다 한다. 지금 문집을 살피면 「사가시중표」가 있는데 공손한 말로 허물을 끌어안았을 뿐 격분하거나 오만한 말이 한마디도 없다. 또 「사사선위표」에 「윤음을 우러러 보니 그릇된 정사를 깊이 가상히 여기시어 군사가 화목하고 백성이 편안합니다」 하였으니, 그 위로하고 장려함을 빌려 씀이 이처럼 은근하고 지극한데 사서에서 「조서를 초하여 준엄히 꾸짖었다」 한 것은 아마 당시의 사실 기록이 아닐 것이다.
9중화 6년이라 적은 까닭
又按中和紀年,止於四年,而公進表年月,系以中和六年。蓋公以中和四年十月浮海,翌年春始抵國,又翌年編進是集,而前一年之改元光啓,容或未聞知也。
또 살피건대 중화 연호는 사년에서 그쳤는데 공이 표를 올린 연월은 중화 육년이라 적었다. 대개 공이 중화 사년 시월에 바다에 떠서 이듬해 봄에야 나라에 이르고 또 이듬해에 이 문집을 엮어 올렸으니, 한 해 앞서 광계로 개원한 것을 아직 듣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10갑오년 중원
歲在閼逢敦牂中元,達城徐有榘,書于湖南布政司之觀風軒中。
갑오년 중원에 달성 서유구가 호남 포정사 관풍헌에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