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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 최치원이 책을 올리며序

계원필경집 桂苑筆耕集 · 최치원(崔致遠) · 886년 (당 중화 6·신라 헌강왕 12) · 단락 13 · 한자 493자 · 낭독 2.0분

「계원필경집」 서 「서 — 최치원이 책을 올리며」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최치원이 당나라 회남절도사 고변의 막부에서 네 해 동안 쓴 글 가운데 스스로 골라 스무 권으로 엮어 886년 신라 헌강왕에게 올린 문집. 황제에게 올린 표와 장, 황소를 꾸짖은 격문, 여러 절도사에게 보낸 편지, 부하에게 내린 위곡과 거첩, 도교 재사와 불교 재문, 제문, 성도 나성과 안남 그림에 붙인 기, 그리고 고변에게 올린 계와 시까지 366편이 실려 있다. 「신은 신라 사람입니다」로 시작하는 첫 계와 「천하 사람이 너를 죽이려 할 뿐 아니라 땅속 귀신도 너를 베기로 의논하였다」는 토황소격문이 여기 있고, 마지막 권은 열두 살에 떠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뱃길에서 지은 시다. 지금 전하는 한국인의 문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1834년 홍석주와 서유구가 활자로 찍으며 「우리 동방 문장의 근본이요 시작」이라 하였다. 그 두 서문도 함께 옮겼다.

1스물여덟 권을 올리다

淮南入本國兼送詔書等使、前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進所著雜詩賦及表奏集二十八卷,具錄如後。

회남에서 본국으로 들어가며 조서 등을 함께 보내는 사신, 전 도통순관·승무랑·시어사·내공봉·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은 지은바 잡시부와 표주집 스물여덟 권을 올리며 아래와 같이 갖추어 적습니다.

2사시 금체부

私試今體賦五首一卷。

사시 금체부 다섯 수 한 권.

3금체시

五言七言今體詩共一百首一卷。

오언·칠언 금체시 모두 백 수 한 권.

4잡시부

雜詩賦共三十首一卷。

잡시부 모두 서른 수 한 권.

5중산복궤집

《中山覆簣集》一部五卷。

『중산복궤집』 한 부 다섯 권.

6계원필경집

《桂苑筆耕集》一部二十卷。

『계원필경집』 한 부 스무 권.

7아버지의 훈계와 급제

右臣自年十二,離家西泛,當乘桴之際,亡父誡之曰:「十年不第進士,則勿謂吾兒,吾亦不謂有兒,往矣勤哉。無隳乃力。」臣佩服嚴訓,不敢弭忘,懸刺無遑,冀諧養志。實得人百之己千之,觀光六年,金名榜尾。

신은 열두 살에 집을 떠나 서쪽으로 배를 탔는데, 뗏목에 오를 즈음 돌아가신 아버지가 훈계하였습니다. 「십 년 안에 진사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말라. 나도 아들이 있다 하지 않겠다. 가서 힘쓰라. 네 힘을 게을리하지 말라.」 신은 엄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감히 잊지 않고 부지런히 배워 쉴 겨를 없이 뜻을 이루기를 바랐습니다. 실로 남이 백 번 하면 저는 천 번 하여 유학한 지 여섯 해 만에 방 끝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8어릴 적 글은 버리고

此時諷詠情性,寓物名篇,曰賦曰詩,幾溢箱篋。但以童子篆刻,壯夫所慙,及忝得魚,皆爲棄物。尋以浪跡東都,筆作飯囊,遂有賦五首、詩一百首、雜詩賦三十首,共成三篇。

이때 성정을 읊고 사물에 붙여 편을 이룬 것이 부다 시다 하여 거의 상자에 넘쳤습니다. 다만 어린아이의 전각(篆刻)은 장부가 부끄러워하는 바라 급제한 뒤에는 다 버렸습니다. 이어 동도에서 떠돌며 붓으로 밥주머니를 삼아 마침내 부 다섯 수, 시 백 수, 잡시부 서른 수를 두어 모두 세 편을 이루었습니다.

9율수현위에서 회남 막부까지

爾後調授宣州、溧水縣尉,祿厚官閑,飽食終日,仕優則學,免擲寸陰,公私所爲,有集五卷。益勵爲山之志,爰標覆簣之名,地號中山,遂冠其首。及罷微秩,從職淮南,蒙高侍中專委筆硯,軍書輻至,竭力抵當,四年用心,萬有餘首。然淘之汰之,十無一二。敢比披沙見寶,粗勝毁瓦畫墁,遂勒成《桂苑集》二十卷。

그 뒤 선주 율수현위에 임명되어 녹은 두텁고 벼슬은 한가하여 종일 배불리 먹으며, 벼슬에 여유가 있으면 배운다는 말대로 촌음도 버리지 않아 공사간에 지은 것으로 문집 다섯 권이 있습니다. 산을 쌓는 뜻을 더욱 힘써 「복궤(覆簣)」라는 이름을 붙이고 땅 이름이 중산이라 그 머리에 얹었습니다. 낮은 벼슬을 그만두고 회남에서 일하며 고 시중이 붓과 벼루를 오로지 맡기니 군서가 몰려들어 힘을 다해 감당하기를 네 해 동안 마음을 써서 만여 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려 내고 골라 내니 열에 하나 둘도 못 됩니다. 감히 모래를 헤쳐 보배를 본 것에 견주고 기와를 깨고 담을 그리는 것보다는 조금 낫다 하여 마침내 『계원집』 스무 권을 엮었습니다.

10붓으로 밭을 간다는 이름

臣適當亂離,寓食戎幕,所謂饘於是粥於是,輒以筆耕爲目,仍以王韶之語,前事可憑。雖則傴僂言歸,有慙鳧雀,旣墾旣耨,用破情田,自惜微勞,冀達聖鑑。其詩、賦、表、狀等集二十八卷隨狀奉進,謹進。

신은 마침 난리를 만나 군막에서 밥을 얻어먹었으니 이른바 「여기서 죽을 먹고 여기서 밥을 먹었다」는 것이라, 문득 「필경(筆耕)」으로 이름을 삼았으니 왕소의 말을 따른 것이라 앞선 일이 근거가 됩니다. 비록 허리를 굽히고 돌아가는 길이라 물오리와 참새에 부끄러움이 있으나, 이미 갈고 이미 김매어 마음의 밭을 다 갈았으니 작은 수고를 스스로 아껴 성상의 살피심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그 시·부·표·장 등 문집 스물여덟 권을 장계와 함께 받들어 올리니 삼가 올립니다.

11중화 6년 정월

中和六年正月日,前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遠狀奏。

중화 육년 정월 일, 전 도통순관·승무랑·시어사·내공봉·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장계로 아룁니다.

12한 부 스무 권

《桂苑筆耕集》,一部二十卷。

『계원필경집』 한 부 스무 권.

13최치원 찬

都統巡官、侍御史、內供奉崔致遠撰。

도통순관·시어사·내공봉 최치원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