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계원필경집 › 권17 계장

다시 올린 계再獻啓

계원필경집 桂苑筆耕集 · 최치원(崔致遠) · 886년 (당 중화 6·신라 헌강왕 12) · 단락 1 · 한자 558자 · 낭독 2.2분

「계원필경집」 권17 계장 「다시 올린 계」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최치원이 당나라 회남절도사 고변의 막부에서 네 해 동안 쓴 글 가운데 스스로 골라 스무 권으로 엮어 886년 신라 헌강왕에게 올린 문집. 황제에게 올린 표와 장, 황소를 꾸짖은 격문, 여러 절도사에게 보낸 편지, 부하에게 내린 위곡과 거첩, 도교 재사와 불교 재문, 제문, 성도 나성과 안남 그림에 붙인 기, 그리고 고변에게 올린 계와 시까지 366편이 실려 있다. 「신은 신라 사람입니다」로 시작하는 첫 계와 「천하 사람이 너를 죽이려 할 뿐 아니라 땅속 귀신도 너를 베기로 의논하였다」는 토황소격문이 여기 있고, 마지막 권은 열두 살에 떠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뱃길에서 지은 시다. 지금 전하는 한국인의 문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1834년 홍석주와 서유구가 활자로 찍으며 「우리 동방 문장의 근본이요 시작」이라 하였다. 그 두 서문도 함께 옮겼다.

1뜻 있는 선비는 날이 짧음을 아끼고 시름하는 사람은 밤이 긺을 안다

某啓。某今月五日。謹以所學篇章五通。貢于賓次。雖慙獻豕。輒覬攀龍脩客路以心摧。望仁風以目斷。乍覩秦雲之態。或似美人。細看燕石之姿。恐爲棄物。伏蒙司徒相公光逾愛日。煦及寒灰。念以遠別海隅。久沈江徼。特垂豐餼。俾濟朝飢。自驚樗櫟之材。已荷稻粱之惠。雖龜魚投水。驟喜命蘇。而蚤蝨負山。深憂力敗。且某也ꟙ絲雖絡。蛛網自營。萬計尋思。不如學也。百年勤苦。猶恐失之。所以未競宦塗。但遵儒道。筮仕而懶趨塵土。卜居而貪憶林泉。人間之要路通津。眼無開處。物外之靑山綠水。夢有歸時。所願更淬鉛刀。終求鐵印。斂跡而銓藏學藪。安身而跌宕詞林。嘗誦古詩。還符此意。云志士惜日短。愁人知夜長。某旣懷志士之勤。又抱愁人之苦。聊憑毫牘。敢述肺肝。且如蹋壁冥搜。杜門寂坐。席冷而窓風擺雪。筆乾而硯水成氷。欲爲尼父之絶編。無奈羲和之促轡。卽可知指萬卷之經史。恨三冬之景光。及其凍枕傷神。孤燈伴影。寒漏則滴殘別淚。遙碪則擣破羈心。空勞甯戚之悲歌。莫繼陸機之安寢。亦可想貯千端之鬱邑。過五夜之寂寥。然則志士之勤也旣如彼。愁人之苦也又如此。況某家遙日域。路隔天池。投客舍而方甚死讎。持何門而欲安生計。唯慮道之將廢。豈言人不易知。不敢以陋質凡姿。覲相公淸嚴之德。不敢以片言隻字。希相公採錄之恩。所望者。或以其萬里地遠來。十餘年苦學。稍垂惻憫。得濟困窮。則必堅背水之心。終爲勇士決。移山之志。不讓愚公。伏以某譯殊方之語言。學聖代之章句。舞態則難爲短袖。辯詞則未比長裾。舌無三寸之能。空緘壯氣。腸有九回之懇。但戀深恩干浼尊嚴。下情無任感戴兢惶涕泗之至。謹啓。

아무개는 아룁니다. 저는 이달 오일 삼가 배운 바 편장 다섯 통을 빈객 자리에 바쳤으니 비록 돼지를 바침이 부끄러우나 문득 용을 잡기를 바랐습니다. 객로를 닦으며 마음이 꺾이고 어진 바람을 바라며 눈이 끊기니, 잠깐 진운의 모습을 보매 혹 미인 같다가 자세히 연석의 자태를 보매 버릴 물건이 될까 두려웠습니다. 사도 상공께서 빛이 사랑하는 해보다 더하고 따뜻함이 찬 재에 미쳐 바다 모퉁이에서 멀리 떠나 오래 강 변방에 잠긴 것을 생각하시어 특별히 풍성한 음식을 내려 아침 굶주림을 건지게 하시니, 가죽나무 재목이 이미 벼와 기장의 은혜를 입음에 스스로 놀랍니다. 비록 거북과 물고기가 물에 던져져 갑자기 목숨이 되살아남을 기뻐하나 벼룩과 이가 산을 지니 힘이 부칠까 깊이 근심됩니다. 또 저는 실이 비록 얽혔으나 거미줄을 스스로 지어 만 가지 계책으로 생각하나 배움만 못하고 백 년 부지런히 애써도 오히려 잃을까 두려우니, 그러므로 벼슬길을 다투지 않고 다만 유도를 따라 벼슬을 점치되 티끌 땅에 달려가기 게으르고 살 곳을 점치되 임천을 그리워하기를 탐하여 인간의 요로와 통진에는 눈 뜰 곳이 없고 물외의 청산녹수에는 꿈에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원하는 바는 다시 납 칼을 담금질하여 끝내 쇠 도장을 구하되 자취를 거두어 학문의 숲에 감추고 몸을 편안히 하여 글의 숲에서 마음껏 노니는 것입니다. 일찍이 옛 시를 외웠는데 도리어 이 뜻에 맞으니 「뜻 있는 선비는 날이 짧음을 아끼고 시름하는 사람은 밤이 긺을 안다」 하였습니다. 저는 이미 뜻 있는 선비의 부지런함을 품고 또 시름하는 사람의 괴로움을 안으니 애오라지 붓과 종이에 기대어 감히 폐부를 서술합니다. 벽을 밟으며 그윽이 찾고 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 자리가 차니 창 바람이 눈을 흔들고 붓이 마르니 벼루 물이 얼음이 되어 공자의 가죽끈 끊기를 하려 하나 희화가 고삐 재촉함을 어찌하겠습니까. 곧 만 권의 경사를 가리켜 삼동의 경치를 한함을 알 만합니다. 언 베개에 정신이 상하고 외로운 등불이 그림자를 짝하며 찬 물시계는 남은 이별 눈물을 떨구고 먼 다듬이는 나그네 마음을 찧어 부수니 부질없이 영척의 슬픈 노래를 수고롭게 하고 육기의 편안한 잠을 잇지 못하니, 또한 천 가지 답답함을 쌓고 오야의 적막을 지냄을 생각할 만합니다. 그렇다면 뜻 있는 선비의 부지런함이 이미 저와 같고 시름하는 사람의 괴로움이 또 이와 같은데, 하물며 저는 집이 해 뜨는 땅에 멀고 길이 천지에 막혀 객사에 몸을 던지매 바야흐로 죽을 원수처럼 심하고 어느 문에 기대어 살 계책을 편안히 하겠습니까. 오직 도가 장차 폐할까 염려할 뿐 어찌 남이 알아주기 쉽지 않다 말하겠습니까. 감히 비루한 바탕과 범상한 자태로 상공의 맑고 엄한 덕을 뵙지 못하고 감히 한 조각 말과 한 글자로 상공의 채록하는 은혜를 바라지 못합니다. 바라는 바는 혹 만 리 땅에서 멀리 오고 십여 년 고학한 것으로 조금 불쌍히 여기심을 드리워 곤궁을 건질 수 있게 되면 반드시 배수의 마음을 굳혀 끝내 용사가 되기를 결단하고 산을 옮기는 뜻을 우공에게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저는 다른 지방의 말을 통역하여 성대의 장구를 배웠으니 춤추는 모습은 짧은 소매로 어렵고 변론하는 말은 긴 옷자락에 견주지 못하며 혀에 세 치의 능함이 없어 부질없이 장한 기운을 봉하고 창자에 아홉 굽이의 간절함이 있어 다만 깊은 은혜를 그립니다. 존엄을 더럽히니 아랫사람의 마음은 은혜에 감격하여 두려워하며 눈물 흘리는 지극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아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