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 › 계원필경집 › 권19 잡서

주번 수재가 소산집을 보여 준 것을 사례하는 글謝周繁秀才以小山集見示書

계원필경집 桂苑筆耕集 · 최치원(崔致遠) · 886년 (당 중화 6·신라 헌강왕 12) · 단락 1 · 한자 320자 · 낭독 1.3분

「계원필경집」 권19 잡서 「주번 수재가 소산집을 보여 준 것을 사례하는 글」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최치원이 당나라 회남절도사 고변의 막부에서 네 해 동안 쓴 글 가운데 스스로 골라 스무 권으로 엮어 886년 신라 헌강왕에게 올린 문집. 황제에게 올린 표와 장, 황소를 꾸짖은 격문, 여러 절도사에게 보낸 편지, 부하에게 내린 위곡과 거첩, 도교 재사와 불교 재문, 제문, 성도 나성과 안남 그림에 붙인 기, 그리고 고변에게 올린 계와 시까지 366편이 실려 있다. 「신은 신라 사람입니다」로 시작하는 첫 계와 「천하 사람이 너를 죽이려 할 뿐 아니라 땅속 귀신도 너를 베기로 의논하였다」는 토황소격문이 여기 있고, 마지막 권은 열두 살에 떠난 고향으로 돌아가는 뱃길에서 지은 시다. 지금 전하는 한국인의 문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1834년 홍석주와 서유구가 활자로 찍으며 「우리 동방 문장의 근본이요 시작」이라 하였다. 그 두 서문도 함께 옮겼다.

1아홉 편을 읽고 노나라에 성인이 남을 알다

昨日早謁玄成。晚歸弊止。覺戶庭之發光彩。聞机案之散馨香。遂因驚訊僕夫。果得捧承留示。温辭一幅。粲然受益之規。雅什九篇。蔚矣患多之思。莫不振紀綱於六義。飾冠冕於七言。旣崇大雅之基。實播中和之響。伏以諸從事鴻儔鵠侶。鳳翥鸞翔。集桂苑之名都。占蓮池之雅望。二十三官卽先輩。備觀周樂。深閱楚材。各陳贊詠之詞。能展縱橫之作。筆皆實錄。機不虛張。始窺八首之前。只謂衞多君子。終覽九華之後。方知魯出聖人。某今所以禱望者。翠輦早遇東巡。白環免勞西獻。二十三官百步穿葉。一飛沖天。姮娥則迎入桂宮。王母則引歸蓬島。然後輟勝遊於御氣。展長策於濟時。來登郭隗之臺。坐弄陳琳之筆。則乃今朝麗藻。已掩八仙公之名。他日賓筵。必盈七才子之數。見丘門之請禱。待陳榻之解懸。某使欲銜璧乞降。摳衣請益。但以志勤詞戰。雖將築室反耕。道拙世塗。僅類杜門却掃。未獲面申感謝。謹專修狀啓陳云云。

어제 아침 일찍 현성을 뵙고 저녁에 제 누추한 거처로 돌아오니 뜰에 광채가 나고 책상에 향기가 흩어짐을 깨달아 마침내 놀라 종에게 물으니 과연 남겨 보여 주신 것을 받들게 되었습니다. 따뜻한 말씀 한 폭은 찬연히 더함을 받는 법도요 아담한 시 아홉 편은 울연히 많음을 근심하는 생각이라, 육의에서 기강을 떨치고 칠언에서 관면을 꾸미지 않음이 없어 이미 대아의 터를 높이고 실로 중화의 울림을 퍼뜨립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여러 종사는 기러기 무리 고니 벗이요 봉황 날고 난새 나는 이라 계원의 이름난 도읍에 모여 연지의 아망을 차지하였는데, 이십삼관 곧 선배께서 주나라 음악을 갖추어 보고 초의 재목을 깊이 열람하여 각기 찬영의 말을 아뢰고 종횡의 지음을 펼 수 있어 붓이 다 실록이요 기틀이 헛되이 펴지지 않으니, 처음 여덟 수 앞을 엿보아 다만 위나라에 군자가 많다 하였는데 끝내 구화 뒤를 보고 바야흐로 노나라에 성인이 남을 알겠습니다. 제가 이제 비는 바는 취련이 일찍 동쪽 순행을 만나고 흰 고리가 서쪽에 바치는 수고를 면하며 이십삼관이 백 보에서 잎을 뚫고 한 번 날아 하늘에 치솟아 항아는 계궁에 맞아들이고 왕모는 봉래섬으로 이끌어 돌아가는 것이니, 그런 뒤 바람을 타고 노니는 좋은 노닒을 그치고 시대를 건지는 긴 계책을 펴서 와서 곽외의 대에 오르고 앉아서 진림의 붓을 놀리면 오늘 아침 고운 문채가 이미 팔선공의 이름을 덮고 뒷날 빈객 자리에 반드시 칠재자의 수를 채워 공자 문하의 빎을 보고 진번의 평상이 매달림을 푸는 것을 기다릴 것입니다. 저는 옥을 물고 항복을 빌며 옷자락을 걷고 더함을 청하려 하나 다만 뜻은 부지런하고 말은 싸워 비록 집을 짓고 밭을 갈려 하나 도가 세상길에 졸렬하여 겨우 문을 닫고 쓸기를 그친 것과 같아 얼굴을 마주하여 감사를 펴지 못하고 삼가 오로지 장을 닦아 아룁니다. 운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