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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氏

한비자 韓非子 · 한비(韓非)와 후학 · 기원전 3세기 · 단락 3 · 한자 638자 · 낭독 2.6분

「한비자」 화씨 「和氏」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법가가 한자리에 모인 책이다. 상앙의 법(法)과 신불해의 술(術)과 신도의 세(勢)를 한비가 받아 하나로 엮었다. 사람은 착해서 착한 것이 아니라 그름을 할 수 없어 착하다고 보고, 임금이 기댈 것은 어짊이 아니라 법과 술과 세라고 말한다. 모순(矛盾)이 여기서 나왔다. 뚫지 못할 방패와 뚫지 못함이 없는 창을 함께 파는 초나라 사람 이야기로 요와 순을 함께 기릴 수 없음을 보였고, 난세에서 다시 한 번 어짊과 세를 두고 같은 비유를 든다. 그루터기를 지키며 토끼를 기다린 송나라 사람(수주대토)과 발이 두 번 잘리고서야 옥으로 인정받은 화씨의 벽옥도 이 책의 이야기다. 말하기의 어려움을 다룬 세난(說難)에는 용의 목 아래 거꾸로 난 비늘 이야기가 있다. 임금에게도 그런 비늘이 있어 건드리면 죽는다는 것인데, 정작 한비 자신이 진나라에서 옥에 갇혀 죽었다. 존한(存韓)에는 한비가 진왕에게 올린 글과, 그 바로 뒤에 이사가 「한비는 한나라를 위해 온 자이니 돌려보내지 말라」고 올린 글이 나란히 실려 있다.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몬 문서가 그 사람의 책에 함께 남았다.

楚人和氏得玉璞楚山中,奉而獻之厲王。厲王使玉人相之。玉人曰:「石也。」王以和爲誑,而刖其左足。及厲王薨,武王即位。和又奉其璞而獻之武王。武王使玉人相之。又曰:「石也。」王又以和爲誑,而刖其右足。武王薨,文王即位。和乃抱其璞而哭於楚山之下,三日三夜,淚盡而繼之以血。王聞之,使人問其故,曰:「天下之刖者多矣,子奚哭之悲也?」和曰:「吾非悲刖也,悲夫寶玉而題之以石,貞士而名之以誑,此吾所以悲也。」王乃使玉人理其璞而得寶焉,遂命曰「和氏之璧」。

초나라 사람 화씨가 초산 가운데서 옥 원석을 얻어 받들어 여왕에게 바쳤다. 여왕이 옥 다루는 이에게 살피게 하니 옥 다루는 이가 말하였다. 「돌입니다.」 왕은 화씨가 속였다 하여 그 왼발을 잘랐다. 여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하였다. 화씨가 또 그 원석을 받들어 무왕에게 바쳤다. 무왕이 옥 다루는 이에게 살피게 하니 또 말하였다. 「돌입니다.」 왕이 또 화씨가 속였다 하여 그 오른발을 잘랐다. 무왕이 죽고 문왕이 즉위하였다. 화씨는 이에 그 원석을 안고 초산 아래서 곡하기를 사흘 밤낮으로 하여 눈물이 다하고 이어 피가 나왔다. 왕이 듣고 사람을 시켜 그 까닭을 물었다. 「천하에 발 잘린 이가 많은데 그대는 어찌 곡하기를 그리 슬피 하는가?」 화씨가 말하였다. 「저는 발 잘림을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배로운 옥을 돌이라 이름 붙이고 곧은 선비를 속였다고 부르는 것을 슬퍼하니, 이것이 제가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왕이 이에 옥 다루는 이를 시켜 그 원석을 다듬게 하니 보배를 얻었다. 마침내 이름하여 「화씨의 벽옥」이라 하였다.

夫珠玉,人主之所急也。和雖獻璞而未美,未爲主之害也,然猶兩足斬而寶乃論,論寶若此其難也。今人主之於法術也,未必和璧之急也,而禁羣臣士民之私邪。然則有道者之不僇也,特帝王之璞未獻耳。主用術,則大臣不得擅斷,近習不敢賣重;官行法,則浮萌趍於耕農,而游士危於戰陳;則法術者乃羣臣士民之所禍也。人主非能倍大臣之議,越民萌之誹,獨周乎道言也,則法術之士雖至死亡,道必不論矣。

무릇 구슬과 옥은 임금이 급히 여기는 바다. 화씨가 비록 아직 아름답지 않은 원석을 바쳤어도 임금에게 해가 되지 않았는데, 그런데도 두 발이 잘리고서야 보배로 논해졌으니 보배를 논하기가 이처럼 어렵다. 이제 임금이 법과 술에 대하여는 반드시 화씨의 벽옥만큼 급히 여기지 않으면서 뭇 신하와 백성의 사사로운 사악함을 금하려 한다. 그러니 도를 가진 이가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은 다만 제왕의 원석을 아직 바치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임금이 술을 쓰면 대신이 멋대로 끊을 수 없고 가까이 익은 이가 감히 무거움을 팔지 못하며, 벼슬아치가 법을 행하면 떠도는 백성이 밭갈이로 달려가고 노니는 선비가 싸움터에서 위태로워진다. 그러니 법과 술이란 뭇 신하와 백성에게는 화가 되는 것이다. 임금이 대신의 의논을 등지고 백성의 헐뜯음을 넘어 홀로 도의 말에 두루 할 수 없으면, 법과 술의 선비는 비록 죽음에 이르러도 그 도가 반드시 논해지지 않는다.

昔者吳起教楚悼王以楚國之俗曰:「大臣太重,封君太衆。若此,則上偪主而下虐民,此貧國弱兵之道也。不如使封君之子孫三世而收爵祿,絶減百吏之祿秩,損不急之枝官,以奉選練之士。」悼王行之期年而薨矣,吳起枝解於楚。商君教秦孝公以連什伍,設告坐之過,燔詩書而明法令,塞私門之請而遂公家之勞,禁游宦之民而顯耕戰之士。孝公行之,主以尊安,國以富强,八年而薨,商君車裂於秦。楚不用吳起而削亂,秦行商君法而富强。二子之言也已當矣,然而枝解吳起而車裂商君者,何也?大臣苦法而細民惡治也。當今之世,大臣貪重,細民安亂,甚於秦、楚之俗,而人主無悼王、孝公之聽,則法術之士,安能蒙二子之危也而明己之法術哉?此世所以亂無霸王也。

옛날 오기가 초나라 도왕에게 초나라의 풍속을 가르쳐 말하였다. 「대신이 너무 무겁고 봉해진 임금이 너무 많습니다. 이러하면 위로는 임금을 다그치고 아래로는 백성을 사납게 하니, 이는 나라를 가난하게 하고 군사를 약하게 하는 길입니다. 봉해진 임금의 자손은 삼대에 이르면 작위와 녹을 거두고, 백 가지 아전의 녹과 품계를 끊고 덜며, 급하지 않은 곁가지 벼슬을 덜어 가려 뽑아 단련한 군사를 받드는 것만 못합니다.」 도왕이 이를 행한 지 한 해 만에 죽으니 오기는 초나라에서 사지가 찢겼다. 상군이 진나라 효공에게 열 집과 다섯 집을 잇게 하고 고발하고 연좌하는 법을 베풀며, 「시」와 「서」를 불태우고 법령을 밝히며, 사삿집의 청탁을 막고 공변된 집의 수고를 이루며, 떠돌며 벼슬 구하는 백성을 금하고 밭 갈고 싸우는 선비를 드러내라고 가르쳤다. 효공이 이를 행하여 임금은 높고 편안해지고 나라는 부유하고 강해졌는데, 여덟 해 만에 효공이 죽으니 상군은 진나라에서 거열되었다. 초나라는 오기를 쓰지 않아 깎이고 어지러워졌고 진나라는 상군의 법을 행하여 부유하고 강해졌다. 두 사람의 말은 이미 마땅하였는데 오기를 사지 찢고 상군을 거열한 것은 어째서인가. 대신은 법을 괴로워하고 잔백성은 다스려짐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상은 대신이 무거움을 탐하고 잔백성이 어지러움을 편히 여김이 진나라와 초나라의 풍속보다 심한데, 임금에게는 도왕과 효공처럼 들어 줄 귀가 없으니, 법과 술의 선비가 어찌 두 사람의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제 법과 술을 밝힐 수 있겠는가. 이것이 세상이 어지러워 패왕이 없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