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阿道
1아도 — 흑호자와 아도와 수이전, 세 갈래로 갈린 자취
釋阿道.或云本天竺人。或云從吳來。或云自高句麗入魏。後歸新羅。未知孰是。風儀特異。神變左奇。恒以行化為任。每當開講。天雨妙花。始新羅訥祇王時。有黑胡子者。從句高麗至一善郡。宣化有緣。郡人毛禮。家中作窟室安置。於是梁遣使賜衣著香物。君臣不知香名及與所用。乃遣中使賚香遍問中外。胡子見之稱其名目曰。焚此則香氣芬馥。所以達誠於神靈。所謂神聖不過三寶。一曰佛陀。二曰達摩。三曰僧伽。若燒此發願。必有靈應。時王女病革。王使胡子焚香表誓。厥疾尋愈。王甚喜.酬贈尤厚。胡子出見毛禮。以所得物贈之。報其德焉。因語曰。吾有所歸請辭。俄而不知所去。及毘處王時。有阿道和尚。與侍者三人。亦來止毛禮家。儀表似胡子。住數年無疾而化。其侍者三人留住讀誦經律。往往有信受奉行者焉。然按古記。梁大通元年三月十一日。阿道來至一善郡。天地震動。師左執金環錫杖。右擎玉鉢應器。身著霞衲。口誦花詮初到信士毛禮家。禮出見驚愕而言曰。曩者高麗僧正方來入我國。君臣怪為不祥。議而殺之。又有滅垢玭從彼復來。殺戮如前。汝尚何求而來耶。宜速入門。莫令隣人得見。引置密室。修供不怠。適有吳使以五香獻原宗王。王不知所用。遍詢國中。使者至問法師。師曰以火燒而供佛也。其後偕至京師。王令法師見使。使禮拜曰。此邊國高僧何不遠。而王因此知佛僧可敬。勅許斑行。又按高得相詩史。曰梁氏遣使曰。元表送沈檀及經像。不知所為。咨四野。阿道逢時指法。相註云。阿道再遭斬害。神通不死。隱毛禮家。則梁吳之使莫辨其詳。又阿道之跡多同黑胡子。何哉。然自永平至大通丁未。凡四百十餘年。句高麗興法已百五十餘年。而百濟已行一百四十餘年矣。若按朴寅亮殊異傳。云.師父魏人崛摩。母曰高道寧。高麗人也。崛摩奉使高麗。私通還魏。道寧因有身誕焉。師生五稔有異相。母謂曰。偏𧙖之子。莫若為僧。師依教。即於是日剃髮。十六入魏。覲省崛摩。遂投玄彰和尚。受業十九年。歸寧於母。母諭曰。此國機緣未熟。難行佛法。惟彼新羅今雖無聲教。爾後三十餘月有護法明王御宇。大興佛事。又其國京師有七法住之處。一曰金橋天鏡林〔今與輪寺。〕二曰三川岐〔今永興寺。〕三曰龍宮南〔今皇龍寺。〕四曰龍宮北〔今芬皇寺。〕五曰神遊林〔今天王寺。〕六曰沙川尾〔今靈妙寺。〕七曰婿請田〔今曇嚴寺。〕此等佛法不滅前劫時伽藍墟也。汝當歸彼土。初傳玄旨。為浮屠始祖。不亦美乎。師既承命子之聲。出疆而來寓新羅王闕西里〔今嚴莊寺是也〕時當味鄒王即位二年癸未矣。師請行竺教。以前所不見為怪。至有將殺之者。故退隱于續村毛祿家。今善州也。逃害三年。成國宮主病疾不愈。遣使四方。求能治者。師應募赴闕。為療其患。王大悅問其所欲。師請曰。但剏寺於天鏡林。吾願足矣。王許之。然世質民頑。不能歸向。乃以白屋為寺。後七年始有欲為僧者。來依受法。毛祿之妹名史侍。亦投為尼。乃於三川岐立寺曰永興。以依住焉。味雛王崩後。嗣王亦不敬浮屠。將欲廢之。師還續村。自作墓入其內。閉戶示滅。因此聖教不行於斯盧。厥後二百餘年。原宗果興像教。皆如道寧所言。自味雛至法興凡十一王矣。阿道出現年代前卻如是其差舛。竝是古文不可取捨。然若當味雛時。已有弘宣之益。則與順道同時明矣。以其中廢而至梁大通乃興耳。故竝出黑胡子元表等。敘而觀焉。
석 아도(阿道)는 본디 천축 사람이라고도 하고 오나라에서 왔다고도 하며 고구려에서 위나라로 들어갔다가 뒤에 신라로 돌아왔다고도 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한다. 풍채와 몸가짐이 유달랐고 신통한 변화가 기이하였다. 늘 다니며 교화하는 것을 맡은 일로 삼았고, 강을 열 때마다 하늘에서 묘한 꽃이 비처럼 내렸다.
처음 신라 눌지왕 때에 흑호자(黑胡子)라는 이가 고구려에서 일선군에 이르렀다. 교화를 펴 인연이 있었으므로 고을 사람 모례(毛禮)가 집 안에 굴방을 만들어 모셨다. 이때 양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옷감과 향을 내렸는데 임금과 신하가 향의 이름과 쓰는 법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내시를 보내어 향을 가지고 안팎에 두루 물었다. 흑호자가 보고 그 이름을 일컬어 말하였다.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짙게 퍼지니 신령에게 정성을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성한 것으로는 삼보를 넘는 것이 없으니, 첫째는 불타요 둘째는 달마요 셋째는 승가입니다. 만약 이것을 사르고 원을 세우면 반드시 신령한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왕의 딸이 병이 위독하였다. 왕이 흑호자에게 향을 사르고 맹세를 드러내게 하니 그 병이 이내 나았다. 왕이 몹시 기뻐하여 갚아 준 것이 더욱 두터웠다. 흑호자가 나와 모례를 보고 얻은 물건을 주어 그 은덕에 갚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게 돌아갈 곳이 있어 하직한다」 하고, 조금 뒤에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 때에 이르러 아도 화상이 시자 세 사람과 함께 또한 와서 모례의 집에 머물렀다. 몸가짐이 흑호자와 비슷하였다. 몇 해 머물다가 병 없이 죽었다. 그 시자 세 사람이 남아 머물며 경과 율을 읽고 외우니 이따금 믿고 받아 받들어 행하는 이가 있었다.
그러나 옛 기록을 보면, 양나라 대통 원년 삼월 십일일에 아도가 일선군에 이르매 천지가 진동하였다. 스승이 왼손에 금고리 석장을 잡고 오른손에 옥 바리때를 받들었으며, 몸에는 노을빛 가사를 걸치고 입으로 꽃 같은 경을 외었다. 처음 신도 모례의 집에 이르니 모례가 나와 보고 놀라 말하였다. 「지난날 고구려 승려 정방(正方)이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데 임금과 신하가 괴이하고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의논하여 죽였습니다. 또 멸구비(滅垢玭)가 저기서 다시 왔는데 앞서와 같이 죽였습니다. 그대는 오히려 무엇을 구하여 왔습니까. 어서 문 안으로 드십시오. 이웃 사람이 보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고는 이끌어 밀실에 두고 공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마침 오나라 사신이 다섯 가지 향을 원종왕(原宗王)께 바쳤는데 왕이 쓰는 법을 알지 못하여 나라 안에 두루 물었다. 사자가 이르러 법사에게 물으니 법사가 말하기를 「불에 사르어 부처께 공양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 뒤에 함께 서울에 이르렀다. 왕이 법사에게 사신을 만나게 하니 사신이 절하며 말하였다. 「이 변방 나라에 고승이 계신 것이 어찌 멀다 하겠습니까.」 왕이 이로 말미암아 부처와 승려가 공경할 만한 줄 알고 조칙으로 널리 행하기를 허락하였다.
또 고득상(高得相)의 시사(詩史)에 이르기를, 양씨가 사신을 보냈는데 원표(元表)라는 이가 침향과 단향과 경과 불상을 보내오매 어찌할 바를 몰라 사방에 물었더니 아도가 때를 만나 법을 가리켰다 하고, 그 주에 이르기를 아도가 두 번 베임을 당하였으나 신통하여 죽지 않고 모례의 집에 숨었다 하였다. 그러니 양나라 사신인지 오나라 사신인지 그 자세함을 가릴 수 없다. 또 아도의 자취가 흑호자와 같은 것이 많으니 어찌 된 일인가. 그러나 영평에서 대통 정미까지 무릇 사백십여 년이요, 고구려에 법이 일어난 지 이미 백오십여 년이며 백제는 이미 백사십여 년을 행하였다.
박인량(朴寅亮)의 『수이전(殊異傳)』을 보면 이렇게 말한다. 스승의 아버지는 위나라 사람 굴마(崛摩)요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이니 고구려 사람이다. 굴마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 위나라로 돌아갔는데, 도령이 이로 말미암아 아이를 배어 낳았다. 스승이 난 지 다섯 해에 남다른 상이 있으니 어머니가 이르기를 「한쪽만 있는 자식이니 승려가 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스승이 가르침을 따라 곧 그날로 머리를 깎았다. 열여섯에 위나라에 들어가 굴마를 뵙고 마침내 현창(玄彰) 화상에게 나아가 열아홉 해 동안 배웠다. 어머니께 돌아와 문안하니 어머니가 일러 말하였다.
「이 나라는 기연이 아직 익지 않아 불법을 행하기 어렵다. 오직 저 신라는 지금 비록 소리와 가르침이 없으나, 네 뒤 삼십여 달에 법을 지키는 밝은 임금이 세상을 다스려 불사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또 그 나라 서울에 법이 머물 일곱 자리가 있으니, 첫째는 금교의 천경림〔지금의 흥륜사〕이요, 둘째는 삼천기〔지금의 영흥사〕요, 셋째는 용궁 남쪽〔지금의 황룡사〕이요, 넷째는 용궁 북쪽〔지금의 분황사〕이요, 다섯째는 신유림〔지금의 천왕사〕이요, 여섯째는 사천미〔지금의 영묘사〕요, 일곱째는 서청전〔지금의 담엄사〕이다. 이것들은 다 불법이 사라지지 않았던 앞 겁 때의 절터다. 너는 마땅히 그 땅에 돌아가 그윽한 뜻을 처음으로 전하여 부도의 시조가 되어야 하니 또한 아름답지 않겠느냐.」
스승이 이미 명을 받들어 지경을 나와 신라 왕궁 서쪽 마을에 붙어 살았다.〔지금의 엄장사가 그것이다.〕 때는 미추왕 즉위 이년 계미년이다. 스승이 천축의 가르침을 행하기를 청하니, 앞서 보지 못하던 것이라 하여 괴이하게 여기고 죽이려는 이까지 있었다. 그러므로 물러나 속촌(續村) 모록(毛祿)의 집에 숨었으니 지금의 선주(善州)다.
해를 피하기 세 해에 성국궁주(成國宮主)가 병이 나 낫지 않으므로 사방에 사신을 보내어 고칠 이를 구하였다. 스승이 부름에 응하여 대궐에 나아가 그 병을 고쳤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바라는 바를 물으니 스승이 청하여 말하였다. 「다만 천경림에 절을 지으면 제 원이 넉넉합니다.」 왕이 허락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질박하고 백성이 완고하여 돌아와 향하지 못하였으므로 흰 띠집으로 절을 삼았다.
일곱 해 뒤에 비로소 승려가 되려는 이가 있어 와서 의지하고 법을 받았다. 모록의 누이 이름이 사시(史侍)인데 또한 몸을 던져 비구니가 되었다. 이에 삼천기에 절을 세워 영흥사라 하고 거기 의지해 살았다. 미추왕이 죽은 뒤 뒤를 이은 왕도 부도를 공경하지 않아 없애려 하매, 스승이 속촌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 멸도를 보였다. 이로 말미암아 거룩한 가르침이 사로(斯盧)에 행하여지지 않았다. 그 뒤 이백여 년에 원종이 과연 상교(像教)를 일으켰으니 다 도령이 말한 바와 같았다. 미추에서 법흥까지 무릇 열한 임금이다.
아도가 나타난 연대가 앞뒤로 이처럼 어긋나나 다 옛 글이라 버리고 취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미추 때에 이미 널리 편 이로움이 있었다면 순도와 같은 때임이 분명하다. 그것이 중간에 폐하여졌다가 양나라 대통에 이르러서야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흑호자와 원표 들을 아울러 내어 서술하여 보인다.
2찬 — 그릇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
贊曰:自像教東漸。信毀交騰。權輿光闡。代有其人。若阿道.黑胡子。皆以無相之法身。隱現自在或先或後。似同異.若捕風搏影。不可執跡而定也。但其先試可而後啟行。始逃害而終成功。則秦之利方。漢之摩騰。亦無以加焉。易曰.藏器待時。阿道之謂矣。
찬하여 이른다.
상교(像教)가 동쪽으로 옮겨 온 뒤로 믿음과 헐뜯음이 번갈아 일었고, 처음 열어 빛낸 일에 대마다 그 사람이 있었다. 아도와 흑호자 같은 이는 다 상(相) 없는 법신으로 숨고 나타남이 자재하여 앞서기도 하고 뒤서기도 하며, 같은 듯 다른 듯한 것이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붙드는 것 같아 자취를 붙들어 정할 수 없다.
다만 먼저 시험해 보고 뒤에 길을 열었으며 처음에는 해를 피하다가 마침내 공을 이루었으니, 진나라의 이방과 한나라의 마등도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 『역』에 「그릇을 감추고 때를 기다린다」 하였으니 아도를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