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운法雲
1법운 — 진흥왕이 원화를 세우고 화랑을 두다
釋法雲.俗名公夌宗。諡曰真興。而法興王弟葛文王之子也。母金氏。生七歲即位。克寬克仁。敬事而信。聞善若驚。除惡務本。七年興輪寺成。許人出家為僧尼。八年命大阿餐柒夫等廣集文士。修撰國史。十年梁遣使。與入學僧覺德送佛舍利。王使群臣奉迎興輪寺前路。十四年命有司築新宮於月城東。黃龍見其地。王疑之改為佛寺。號曰黃龍。二十六年陳遣使劉思及僧明觀。送釋氏經論七百餘卷。二十七年祇園實際二寺成。而黃龍亦畢功。三十三年十月為戰死士卒設八關齋會於外寺。七日乃罷。三十五年鑄黃龍寺丈六像。或傳阿育王所泛船載黃金至絲浦。輸入而鑄焉。語在慈藏傳。三十六年丈六出淚至踵。三十七年始奉原花為仙郎。初君臣病無以知人。欲使類聚群遊.以觀其行儀。舉而用之。遂簡美女二人。曰南無.曰俊貞。聚徒三百餘人。二女爭妍。貞引南無。強勸酒醉。而投河殺之。徒人失和而罷。其後選取美貌男子。傳粉粧飾之。奉為花郎。徒眾雲集。或相磨以道義。或相悅以歌樂。娛遊山水。無遠不至。因此知人之邪正。擇其善者薦之於朝。故金大問世記云。賢佐忠臣。從此而秀。良將猛卒。由是而生。崔致遠鸞郎碑序曰。國有玄妙之道。曰風流。實乃包含三教。接化群生。且如入則孝於家。出則忠於國。魯司寇之旨也。處無為之事。行不言之教。周柱史之宗也。諸惡莫作。眾善奉行。竺乾太子之化也。又唐令狐澄新羅國記云。擇貴人子弟之美者傳粉粧飾。而奉之名曰花郎。國人皆尊事之。此蓋王化之方便也。自原郎至羅末。凡二百餘人。其中四仙最賢。且如世記中。王幼年即祚。一心奉佛。至末年祝髮為浮屠。被法服自號法雲。受持禁戒。三業清淨。遂以終焉。及其薨也。國人以禮葬于哀公寺之北峯。是歲安含法師至自隋。至安含傳辨之。
석 법운(法雲)은 세속 이름이 공릉종(公夌宗)이요 시호를 진흥(真興)이라 한다. 법흥왕의 아우 갈문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씨다. 나이 일곱에 자리에 올랐다. 너그럽고 어질었으며 일을 공경히 하고 미더웠다. 착한 말을 들으면 놀란 듯하였고 악을 없애되 뿌리에 힘썼다.
칠년에 흥륜사가 이루어져 사람이 출가하여 승려와 비구니가 되기를 허락하였다. 팔년에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문사들을 널리 모아 국사를 엮게 하였다. 십년에 양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유학 갔던 승려 각덕(覺德)과 함께 부처의 사리를 보내오매, 왕이 여러 신하에게 흥륜사 앞길에서 받들어 맞게 하였다.
십사년에 맡은 관아에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을 짓게 하였는데 누런 용이 그 땅에 나타났다. 왕이 이를 이상히 여겨 절로 고치고 이름을 황룡(黃龍)이라 하였다. 이십육년에 진(陳)나라가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어 불경과 논 칠백여 권을 보내왔다. 이십칠년에 기원사와 실제사 두 절이 이루어지고 황룡사도 공사를 마쳤다. 삼십삼년 시월에 싸우다 죽은 군졸을 위하여 바깥 절에서 팔관재회를 베풀고 이레 만에 마쳤다. 삼십오년에 황룡사 장륙상을 부었다. 어떤 이는 아육왕이 띄워 보낸 배에 실린 황금이 사포(絲浦)에 이르매 실어 들여 부었다고 전한다. 그 말은 자장전에 있다. 삼십육년에 장륙상이 발꿈치까지 눈물을 흘렸다.
삼십칠년에 처음으로 원화(原花)를 받들어 선랑(仙郎)으로 삼았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가 사람을 알아볼 길이 없음을 근심하여, 무리 지어 함께 놀게 하고 그 하는 짓과 몸가짐을 보아 뽑아 쓰고자 하였다. 마침내 아름다운 여자 둘을 가려 뽑으니 남모(南無)와 준정(俊貞)이라 하고 무리 삼백여 명을 모았다. 두 여자가 고움을 다투다가 준정이 남모를 이끌어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고는 강에 던져 죽였다. 무리가 화합을 잃고 흩어졌다.
그 뒤에 얼굴이 아름다운 사내를 골라 분을 발라 꾸미고 받들어 화랑(花郎)이라 하니 무리가 구름처럼 모였다. 더러는 도의로 서로 갈고 더러는 노래와 풍류로 서로 기뻐하며 산수에 놀아 멀다고 이르지 않는 데가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의 바르고 그름을 알아 그 착한 이를 가려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러므로 김대문의 『세기(世記)』에 이르기를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서 빼어났고, 좋은 장수와 사나운 군졸이 이로 말미암아 났다」 하였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 그윽하고 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참으로 세 가르침을 아울러 품어 뭇 삶을 이끌어 교화한다. 이를테면 들어와서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나라 사구(司寇)의 뜻이요, 함이 없는 일에 머물고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나라 주사(柱史)의 종지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뭇 착함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천축 태자의 교화다」 하였다.
또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에 이르기를 「귀한 이의 자제 가운데 아름다운 이를 골라 분을 발라 꾸미고 받드니 이름을 화랑이라 하며 나라 사람이 다 높이 섬긴다」 하였다. 이는 대개 왕의 교화의 방편이다. 원랑(原郎)에서 신라 말까지 무릇 이백여 사람인데 그 가운데 네 선인이 가장 어질었다.
또 『세기』에 이르기를, 왕이 어린 나이에 자리에 올라 한마음으로 부처를 받들었고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부도가 되어 법복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일컬으며, 금한 계를 받아 지녀 세 가지 업이 맑고 깨끗한 채로 마침내 마쳤다 한다. 그가 죽으매 나라 사람이 예로써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하였다. 이해에 안함 법사가 수나라에서 왔으니 「안함전」에 이르러 밝힌다.
2찬 — 풍속을 옮기는 일이 사람에게 크다
贊曰:風俗之於人大矣哉。王者欲移易。於當世如水之就下。沛然孰禦哉。始真興既崇像教。設花郎之遊。國人樂從倣效。如趍寶肆。如登春臺。要其歸在乎遷善徙義。鴻漸於大道而已。彼漢哀帝徒以色是愛。故班固曰。柔曼之傾人意。非特女徒。蓋亦有男色焉。評之不可同日而語矣。
찬하여 이른다.
풍속이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크다. 왕 된 이가 그 세상에서 옮겨 바꾸고자 하면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 같아 세차게 흘러 누가 막겠는가.
처음 진흥이 이미 상교(像教)를 높이고 화랑의 놀이를 베푸니, 나라 사람이 즐겨 좇아 본받기를 보배 가게로 달려가는 듯하고 봄 누대에 오르는 듯하였다. 그 돌아가는 바를 요약하면 착함으로 옮기고 의로움으로 나아가 큰 도에 차츰 나아가는 데 있을 뿐이었다.
저 한나라 애제는 한갓 빛깔만을 사랑하였으므로, 반고가 이르기를 「부드럽고 나긋하여 사람의 뜻을 기울이는 것이 여자 무리만이 아니라 대개 또한 남색(男色)이 있다」 하였다. 견주어 논할 것이 아니어서 같은 날에 두고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