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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국夫餘國

후한서 동이열전 後漢書 東夷列傳 · 범엽(范曄) · 5세기 (432~445년 무렵) · 단락 3 · 한자 622자 · 낭독 2.5분

「후한서 동이열전」 한 권 「부여국」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후한 이백 년 동안 중국이 동쪽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5세기 사람이 정리한 글. 부여·읍루·고구려·동옥저·예·삼한·왜가 차례로 나온다. 삼국지 동이전보다 백오십 해쯤 뒤에 엮이면서 더 이른 시대를 다루므로, 같은 자리를 두고 두 책이 무엇을 덜고 무엇을 보탰는지가 나란히 드러난다. 동명이 활로 물을 쳐 부여를 세운 이야기, 히미코가 왕으로 세워진 내력, 마한이 큰 나무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세운 소도가 여기 실렸다.

1부여 — 현도 북쪽 천 리, 본디 예의 땅

夫餘國,在玄菟北千里。南與高句驪,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地方二千里,本濊地也。

부여국은 현도 북쪽 천 리에 있다. 남으로 고구려, 동으로 읍루, 서로 선비와 잇대었고 북에 약수(弱水)가 있다. 땅이 사방 이천 리이니 본디 예(濊)의 땅이다.

2동명이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랐다

初,北夷索離國王出行,其待兒於後妊身,王還,欲殺之。侍兒曰:“前見天上有氣,大如雞子,來降我,因以有身。”王囚之,後遂生男。王令置於豕牢,豕以口氣噓之,不死。復徙於馬蘭,馬亦如之。王以為神,乃聽母收養,名曰東明。東明長而善射,王忌其猛,復欲殺之。東明奔走,南至掩淲水,以弓擊水,魚鱉皆聚浮水上,東明乘之得度,因至夫餘而王之焉。於東夷之域,最為平敞,土宜五穀。出名馬、赤玉、貂豽,大珠如酸棗。以員柵為城,有宮室、倉庫、牢獄。其人粗大强勇而謹厚,不為寇鈔。以弓矢刀矛為兵。以六畜名官,有馬加、牛加、狗加,其邑落皆主屬諸加,食飲用俎豆,會同拜爵洗爵,揖讓升降。以臘月祭天,大會連日,飲食歌舞,名曰“迎鼓”。是時斷刑獄,解囚徒。有軍事亦祭天,殺牛,以蹄占其吉凶。行人無晝夜,好歌吟,音聲不絕。其俗用刑嚴急,被誅者皆沒其家人為奴婢。盜一責十二。男女淫,皆殺之,尤治惡妒婦,既殺,復尸於山上。兄死妻嫂。死則有椁無棺。殺人殉葬,多者以百數。其王葬用玉匣,漢朝常豫以玉匣付玄菟郡,王死則迎取以葬焉。

처음에 북이(北夷) 색리국(索離國) 왕이 나들이를 나간 사이에 그 시녀가 뒤에서 아이를 배었다. 왕이 돌아와 죽이려 하니 시녀가 말하였다. 「앞서 하늘 위에 기운이 있어 크기가 달걀만 한데 내려와 내게 닿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아이를 배었습니다.」 왕이 가두었더니 뒤에 마침내 사내아이를 낳았다. 왕이 돼지우리에 두게 하였으나 돼지가 입김을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겼으나 말도 그와 같이 하였다. 왕이 신령하다 여겨 이에 어미가 거두어 기르게 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였다.

동명이 자라 활을 잘 쏘매 왕이 그 날램을 꺼려 다시 죽이려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으로 엄호수(掩淲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 모여 물 위에 떠올랐다. 동명이 그것을 타고 건너 부여에 이르러 그곳에 왕 노릇 하였다.

동이의 땅 가운데 가장 평평하고 트였으며 땅이 오곡에 알맞다. 이름난 말과 붉은 옥과 담비와 놜(豽)이 나고 큰 구슬은 멧대추만 하다. 둥근 목책으로 성을 삼고 궁실과 곳간과 감옥이 있다. 그 사람들은 몸이 크고 굳세고 날래되 삼가고 두터워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활과 화살과 칼과 창을 병기로 삼는다.

여섯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삼아 마가(馬加)·우가(牛加)·구가(狗加)가 있고, 그 읍락은 다 여러 가(加)에 딸린다. 마시고 먹는 데 조두를 쓰고, 모여 만날 때에는 잔을 올리고 잔을 씻으며 읍하고 사양하며 오르내린다. 섣달에 하늘에 제사하는데 크게 모여 여러 날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름을 「영고(迎鼓)」라 한다. 이때에 형벌과 옥사를 끊고 갇힌 이를 풀어 준다. 군사 일이 있어도 하늘에 제사하고 소를 잡아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친다. 길 가는 이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여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 풍속에 형벌 쓰기를 엄하고 급하게 하여, 죽임을 당한 자는 다 그 집안사람을 몰수하여 종으로 삼는다. 도둑질한 자는 열두 곱을 물린다. 남녀가 음란하면 다 죽이고, 특히 투기하는 여자를 무겁게 다스려 죽인 뒤에 다시 그 주검을 산 위에 둔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죽으면 덧널은 있고 널은 없다. 사람을 죽여 함께 묻으니 많을 때는 백으로 헤아린다. 그 왕의 장사에는 옥갑(玉匣)을 쓰는데, 한나라 조정에서 늘 미리 옥갑을 현도군에 맡겨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맞아다 장사하였다.

3해마다 사신이 오가고, 때로 낙랑과 현도를 노략하다

建武中,東夷諸國皆來獻見。二十五年,夫餘王遣使奉貢,光武厚答報之,於是使命歲通。至安帝永初五年,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抄樂浪,殺傷吏民,後復歸附。永寧元年,乃遣嗣子尉仇台詣闕貢獻,天子賜尉仇台印綬金彩。順帝永和元年,其王來朝京師,帝作黄門鼓吹、角抵戲以遣之。桓帝延熹四年,遣使朝賀貢獻。永康元年,王夫台將二萬餘人寇玄菟,玄菟太守公孫域擊破之,斬首千餘級。至靈帝熹平三年,復奉章貢獻。夫餘本屬玄菟,獻帝時,其王求屬遼東云。

건무 연간에 동이의 여러 나라가 다 와서 바치고 뵈었다. 이십오년에 부여 왕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매 광무제가 두터이 답하여 갚았으니, 이로부터 사신의 왕래가 해마다 통하였다.

안제 영초 오년에 이르러 부여 왕이 처음으로 보병과 기병 칠팔천 명을 거느리고 낙랑을 노략하여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다치게 하였으나, 뒤에 다시 돌아와 붙었다. 영녕 원년에 이에 대를 이을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대궐에 나아가 공물을 바치매 천자가 위구태에게 인수와 금과 채색 비단을 내렸다. 순제 영화 원년에 그 왕이 서울에 와서 조회하매 황제가 황문의 고취(鼓吹)와 각저희(角抵戲)를 베풀어 보냈다.

환제 연희 사년에 사신을 보내어 하례하고 공물을 바쳤다. 영강 원년에 왕 부태(夫台)가 이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도를 노략하매 현도태수 공손역(公孫域)이 쳐 깨뜨리고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영제 희평 삼년에 이르러 다시 글을 받들어 공물을 바쳤다. 부여는 본디 현도에 딸렸는데, 헌제 때에 그 왕이 요동에 딸리기를 구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