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高句麗
1고구려 — 다섯 부, 그리고 시월의 동맹
高句驪,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地方二千里,多大山深谷,人隨而為居。少田業,力作不足以自資,故其俗節於飲食,而好修宮室。東夷相傳以為夫餘別種,故言語法則多同,而跪拜曳一腳,行步皆走。凡有五族,有消奴部、絕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本消奴部為王,稍微弱,後桂婁部代之。其置官,有相加、對盧、沛者、古鄒大加、主簿、優台、使者、帛衣先人。武帝滅朝鮮,以高句驪為縣,使屬玄菟,賜鼓吹伎人。其俗淫,皆潔淨自熹,暮夜輒男女群聚為倡樂。好祠鬼神、社稷、零星,以十月祭天大會,名曰“東盟”。其國東有大穴,號禭神,亦以十月迎而祭之。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大加、主簿皆著幘,如冠幘而無後;其小加著折風,形如弁。無牢獄,有罪,諸加評議便殺之,沒入妻子為奴婢。其昏姻皆就婦家,生子長大,然後將還,便稍營送終之具。金銀財幣盡於厚葬,積石為封,亦種松柏。其人性凶急,有氣力,習戰斗,好寇鈔,沃沮、東濊皆屬焉。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 리에 있다. 남으로 조선과 예맥, 동으로 옥저, 북으로 부여와 잇대었다. 땅이 사방 이천 리인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아 사람이 그를 따라 산다. 밭 지을 땅이 적어 힘써 지어도 제 밑천을 대기에 넉넉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 풍속에 마시고 먹는 것은 아끼면서도 궁실 꾸미기를 좋아한다. 동이가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다른 갈래라 하니, 말과 법도가 대개 같으나 무릎 꿇어 절할 때 한 다리를 끄는 것이 다르고 걸음은 다 달음질하듯 한다.
무릇 다섯 족속이 있으니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絕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다. 본디 소노부가 왕이 되었으나 차츰 약해져 뒤에 계루부가 대신하였다. 벼슬을 두되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고추대가(古鄒大加)·주부(主簿)·우태(優台)·사자(使者)·백의선인(帛衣先人)이 있다.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에 딸리게 하고 고취와 재인을 내렸다.
그 풍속이 음란하고 다 깨끗이 하기를 스스로 즐겨, 저물어 밤이 되면 문득 남녀가 무리로 모여 노래하고 논다. 귀신과 사직과 영성(零星)에 제사하기를 좋아하고, 시월에 하늘에 제사하며 크게 모이니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 나라 동쪽에 큰 굴이 있어 수신(禭神)이라 부르는데, 또한 시월에 맞아다 제사한다.
그 공식 모임의 옷은 다 비단에 수를 놓고 금과 은으로 스스로 꾸민다. 대가와 주부는 다 책(幘)을 쓰는데 관책 같으면서 뒤가 없고, 소가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모양이 고깔 같다.
감옥이 없고 죄가 있으면 여러 가(加)가 의논하여 곧 죽이고 처자를 몰수하여 종으로 삼는다. 혼인은 다 신부 집으로 가서 하고, 아들을 낳아 자란 뒤에야 데리고 돌아오며, 그러고서 차츰 죽어 묻을 채비를 마련한다. 금과 은과 재물을 두터운 장사에 다 쓰고, 돌을 쌓아 봉분을 삼으며 또한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그 사람들은 성품이 사납고 급하며 힘이 있고 싸움을 익혀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니, 옥저와 동예가 다 여기에 딸렸다.
2소수맥과 맥궁
句驪一名貊,有別種,依小水為居,因名曰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
구려를 달리 맥(貊)이라 한다. 다른 갈래가 있어 소수(小水)를 따라 사니 그로 말미암아 소수맥(小水貊)이라 한다. 좋은 활이 나니 이른바 「맥궁(貊弓)」이 그것이다.
3왕망이 고구려 왕을 하구려 후로 낮추다
王莽初,發句驪兵以伐匈奴,其人不欲行,强迫遣之,皆亡出塞為寇盜。遼西大尹田譚追擊,戰死。莽令其將嚴尤擊之,誘句驪侯騶入塞,斬之,傳首長安。莽大說,更名高句驪王為下句驪侯,於是貊人寇邊愈甚。建武八年,高句驪遣使朝貢,光武復其王號。二十三年冬,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内屬。二十五年春,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皆復款塞。
왕망 처음에 구려 군사를 내어 흉노를 치려 하였는데 그 사람들이 가려 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몰아 보내매, 다 도망하여 변새를 나가 도둑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田譚)이 뒤쫓아 치다가 싸워 죽었다. 왕망이 그 장수 엄우(嚴尤)에게 치게 하니, 구려 후 추(騶)를 꾀어 변새에 들이고 목을 베어 머리를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이 크게 기뻐하여 고구려 왕의 이름을 하구려 후(下句驪侯)로 고치니, 이에 맥인이 변방을 노략하는 것이 더욱 심하였다.
건무 팔년에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매 광무제가 그 왕호를 되돌려 주었다. 이십삼년 겨울에 구려의 잠지락(蠶支落) 대가 대승(戴升) 등 만여 사람이 낙랑에 나아가 안으로 딸렸다. 이십오년 봄에 구려가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노략하매 요동태수 채융이 은혜와 믿음으로 불러 다 다시 변새에 정성을 보였다.
4나면서 눈을 뜬 왕 궁, 그리고 스무 해의 싸움
後句驪王宮生而開目能視,國人懷之,及長勇壯,數犯邊境。和帝元興元年春,復入遼東,寇略六縣,太守耿夔擊破之,斬其渠帥。安帝永初五年,宮遣使貢獻,求屬玄菟。元初五年,復與濊貊寇玄菟,攻華麗城。建光元年春,幽州刺史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等,將兵出塞擊之,捕斬濊貊渠帥,獲兵馬財物。宮乃遣嗣子遂成將二千餘人逆光等,遣使詐降;光等信之,遂成因據險厄以遮大軍,而潜遣三千人攻玄菟、遼東,焚城郭,殺傷二千餘人。於是發廣陽、漁陽、右北平、涿郡屬國三千餘騎同救之,而貊人已去。夏,復與遼東鮮卑八千餘人攻遼隊,殺略吏人。蔡諷等追擊於新昌,戰歿,功曹耿耗、兵曹掾龍端、兵馬掾公孫酺以身扞諷,俱歿於陣,死者百餘人。秋,宮遂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菟。夫餘王遣子尉仇台將二萬餘人,與州郡并力討破之。斬首五百餘級。
뒤에 구려 왕 궁(宮)이 나면서 눈을 떠 볼 수 있으매 나라 사람이 꺼렸다. 자라서는 용맹하고 씩씩하여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다. 화제 원흥 원년 봄에 다시 요동에 들어와 여섯 현을 노략하매 태수 경기(耿夔)가 쳐 깨뜨리고 그 우두머리의 목을 베었다.
안제 영초 오년에 궁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치고 현도에 딸리기를 구하였다. 원초 오년에 다시 예맥과 함께 현도를 노략하고 화려성(華麗城)을 쳤다.
건광 원년 봄에 유주자사 풍환(馮煥)과 현도태수 요광(姚光)과 요동태수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변새를 나가 치니, 예맥의 우두머리를 잡아 목 베고 병마와 재물을 얻었다. 궁이 이에 대를 이을 아들 수성(遂成)에게 이천여 명을 거느리고 요광 등을 맞게 하면서 사신을 보내어 거짓 항복하였다. 요광 등이 이를 믿었더니, 수성이 험한 곳에 웅거하여 큰 군사를 막고 몰래 삼천 명을 보내어 현도와 요동을 쳐 성곽을 불사르고 이천여 명을 죽이고 다치게 하였다. 이에 광양·어양·우북평과 탁군 속국에서 삼천여 기를 내어 함께 구원하였으나 맥인은 이미 물러간 뒤였다.
여름에 다시 요동 선비 팔천여 명과 함께 요대(遼隊)를 쳐서 관리와 백성을 죽이고 노략하였다. 채풍 등이 신창(新昌)에서 뒤쫓아 치다가 싸워 죽었고, 공조 경모(耿耗)와 병조연 용단(龍端)과 병마연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을 막다가 함께 진중에서 죽으니 죽은 이가 백여 명이었다.
가을에 궁이 마침내 마한과 예맥의 수천 기를 거느리고 현도를 에워쌌다. 부여 왕이 아들 위구태에게 이만여 명을 거느리게 하여 주와 군의 힘을 아울러 쳐 깨뜨리고 오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5상중에 치는 것은 의롭지 않다 — 상서 진충의 말
是歲宮死,子遂成立。姚光上言欲因其喪發兵擊之,議者皆以為可許。尚書陳忠曰:“宮前桀黠,光不能討,死而擊之,非義也。宜遣吊問,因責讓前罪,赦不加誅,取其後善。”安帝從之。明年,遂成還漢生口,詣玄菟降。詔曰:“遂成等桀逆無狀,當斬斷菹醢,以示百姓,幸會赦令,乞罪請降。鮮卑、濊貊連年寇鈔,驅略小民,動以千數,而裁送數十百人,非向化之心也。自今已後,不與縣官戰斗而自以親附送生口者,皆與贖直,縑人四十匹,小口半之。”
이 해에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섰다. 요광이 글을 올려 그 상중을 틈타 군사를 내어 치기를 바라매 의논하는 이들이 다 옳다 하였다. 상서 진충(陳忠)이 말하였다. 「궁이 앞서 사납고 교활하였으나 요광이 치지 못하였는데, 죽은 뒤에 치는 것은 의롭지 않습니다. 마땅히 조문을 보내고 앞의 죄를 꾸짖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뒷날의 잘함을 취해야 합니다.」 안제가 그 말을 좇았다.
이듬해에 수성이 사로잡았던 한나라 사람을 돌려보내고 현도에 나아가 항복하였다. 조서를 내렸다. 「수성 등이 사납고 거슬러 무엄하니 마땅히 베고 잘라 젓담아 백성에게 보여야 할 것이나, 다행히 사면령을 만나 죄를 빌고 항복을 청하였다. 선비와 예맥이 해마다 노략하여 작은 백성을 몰아가는 것이 천으로 헤아리는데 겨우 수십 백 사람만 보내니, 교화를 향하는 마음이 아니다. 이제부터 관과 싸우지 않고 스스로 가까이 붙어 사로잡은 이를 보내는 자에게는 다 값을 갚아 주되, 어른은 한 사람에 비단 마흔 필, 아이는 그 절반으로 하라.」
6백고가 항복하고 현도에 딸리기를 빌다
遂成死,子伯固立。其後濊貊率服,東垂少事。順帝陽嘉元年,置玄菟郡屯田六部。質、桓之間,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掠得樂浪太守妻子。建寧二年,玄菟太守耿臨討之,斬首數百級,伯固降服,乞屬玄菟云。
수성이 죽고 아들 백고(伯固)가 섰다. 그 뒤로 예맥이 거느리고 복종하여 동쪽 변두리에 일이 적었다. 순제 양가 원년에 현도군에 둔전 여섯 부를 두었다. 질제와 환제 사이에 다시 요동 서안평을 침범하여 대방 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건녕 이년에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쳐서 수백 명의 목을 베매 백고가 항복하여 현도에 딸리기를 빌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