敘目
淮南子名安,厲王長子也。長,高皇帝之子也。其母趙氏女,為趙王張敖美人。高皇帝七年討韓信於銅鞮,信亡走匈奴,上遂北至樓煩。還過趙,不禮趙王。趙王獻美女趙氏女,得幸,有身。趙王不敢內之於宮。為築舍于外。及貫高等謀反發覺,并逮治王,盡收王家及美人,趙氏女亦與焉。吏以得幸有身聞上,上方怒趙王,未理也。趙美人弟兼因辟陽侯審食其言之呂后,呂后不肯白,辟陽侯亦不強爭。及趙美人生男,恚而自殺。吏奉男詣上,上命呂后母之,封為淮南王。暨孝文皇帝即位,長弟上書願相見,詔至長安。日從游宴,驕蹇如家人兄弟。怨辟陽侯不爭其母於呂后,因椎殺之。上非之,肉袒北闕謝罪,奪四縣,還歸國。為黃屋左纛,稱東帝,坐徒蜀巖道,死於雍。上閔之,封其四子為列侯。時民歌之曰:「一尺繒,好童童;一升粟,飽蓬蓬。兄弟二人,不能相容。」上聞之曰:「以我貪其地邪?」乃召四侯而封之:其一人病薨,長子安襲封淮南王,次為衡山王,次為廬江王。太傅賈誼諫曰:「怨讎之人,不可貴也。」後淮南衡山卒反如賈誼言。初,安為辨達,善屬文。皇帝為從父,數上書,召見。
회남자는 이름이 안이니 여왕 장의 아들이다. 장은 고황제의 아들이다. 그 어미는 조씨의 딸로 조왕 장오의 미인이 되었다. 고황제 일곱째 해에 한신을 동제에서 칠 때 신이 달아나 흉노로 가매 임금이 마침내 북으로 누번에 이르렀다. 돌아오며 조나라를 지날 때 조왕에게 예를 갖추지 않았다. 조왕이 미녀 조씨의 딸을 바쳐 사랑을 얻고 아이를 배었다. 조왕이 감히 궁에 들이지 못하고 밖에 집을 지어 두었다. 관고 등이 모반한 것이 드러남에 미쳐 아울러 왕을 잡아 다스리며 왕의 집과 미인을 다 거두니 조씨의 딸도 또한 거기 들었다. 아전이 사랑을 얻어 아이를 밴 것을 임금에게 아뢰었으나 임금이 바야흐로 조왕에게 노하여 다스리지 않았다. 조나라 미인의 아우 겸이 벽양후 심이기를 통해 여후에게 말하였으나 여후가 아뢰기를 즐기지 않고 벽양후도 또한 굳이 다투지 않았다. 조나라 미인이 사내를 낳음에 미쳐 분하여 스스로 죽었다. 아전이 사내를 받들어 임금에게 나아가매 임금이 여후에게 어미 노릇 하라 명하고 회남왕에 봉하였다. 효문황제가 자리에 오르매 아우인 장(長)이 글을 올려 서로 보기를 바라니 조서로 장안에 이르게 하였다. 날마다 노닐고 잔치함을 따르며 교만하고 방자하기가 한집안 형제 같았다. 벽양후가 그 어미를 여후에게 다투어 주지 않음을 원망하여 철퇴로 쳐 죽였다. 임금이 그르다 하매 웃통을 벗고 북쪽 대궐에서 죄를 빌어 네 현을 빼앗기고 나라로 돌아갔다. 누런 지붕과 왼쪽 깃대를 하고 동제라 일컬으매 죄에 걸려 촉의 엄도로 옮겨져 옹에서 죽었다. 임금이 불쌍히 여겨 그 네 아들을 열후에 봉하였다. 그때 백성이 노래하여 말하기를 「한 자 비단도 넉넉히 곱고 한 되 조도 배부르게 넉넉하네. 형제 두 사람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네」 하였다. 임금이 듣고 말하기를 「내가 그 땅을 탐한 것이라 하는가?」 하고 곧 네 후를 불러 봉하였다. 그 한 사람은 병들어 죽고 맏아들 안이 회남왕을 이어 봉해졌으며 다음은 형산왕이 되고 다음은 여강왕이 되었다. 태부 가의가 간하여 말하기를 「원수진 사람은 귀히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뒤에 회남과 형산이 마침내 가의의 말대로 반란하였다. 처음에 안은 가리어 통달하고 글을 잘 지었다. 황제가 아버지뻘이 되어 자주 글을 올리매 불러 보았다.
孝文皇帝甚重之,詔使為《離騷賦》,自且受詔,日早食已。上愛而秘之。天下方術之士多往歸焉。於是遂與蘇飛、夜尚、左吳、田由、雷被、毛被、伍被、晉昌等八人,及諸儒大山、小山之徒,共講論道德,總統仁義,而著此書。其旨近《老子》,淡泊無為,蹈虛守靜,出入經道。言其大也,則燾天載地,說其細也,則淪於無垠,及古今治亂存亡禍福,世間詭異瓌奇之事。其義也著,其文也富,物事具類,無所不載,然其大較歸之於道,號曰《鴻烈》。鴻,大也;烈,明也,以為大明道之言也。故夫學者不論《淮南》,則不知大道之深也。是以先賢通儒述作之士,莫不援采以驗經傳。以父諱長,故其所著,諸「長」字皆曰「脩」。光祿大夫劉向校定撰具,名之《淮南》。又有十九篇者,謂之《淮南外篇》。自誘之少,從故侍中、同縣盧君受其句讀,誦舉大義。會遭兵災,天下棋峙,亡失書傳,廢不尋修,二十餘載。建安十年,辟司空椽,除東郡濮陽令,覩時人少為《淮南》者,懼遂凌遲,於是以朝餔事畢之間,乃深思先師之訓,參以經傳道家之言,比方其事,為之注解,悉載本文,并舉音讀。典農中郎將弁揖借八卷刺之,會揖身喪,遂亡不得。
효문황제가 그를 매우 무겁게 여겨 조서로 「이소부」를 짓게 하니 조서를 받자마자 아침 식사를 마칠 무렵에 이루었다. 임금이 사랑하여 감추어 두었다. 천하의 방술하는 선비가 흔히 가서 돌아갔다. 이에 마침내 소비·야상·좌오·전유·뇌피·모피·오피·진창 등 여덟 사람과 여러 유자 대산·소산의 무리와 함께 도덕을 강론하고 인의를 총괄하여 이 글을 지었다. 그 가리킴이 「노자」에 가까워 담담하고 함이 없으며 빔을 밟고 고요함을 지켜 날줄과 도에 드나든다. 그 큼을 말하면 하늘을 덮고 땅을 실으며 그 가늚을 말하면 가없음에 잠기고 옛과 이제의 다스림과 어지러움과 남고 망함과 화와 복과 세상의 괴이하고 기이한 일에 미친다. 그 뜻이 드러나고 그 글이 넉넉하며 물건과 일이 무리를 갖추어 싣지 않은 바가 없으나 그 큰 얼개는 도에 돌아가니 이름하여 「홍렬」이라 하였다. 홍은 큼이요 열은 밝음이니 크게 도를 밝히는 말이라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무릇 배우는 이가 「회남」을 논하지 않으면 큰 도의 깊음을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앞선 어진 이와 통한 유자와 지은 선비가 끌어다 취하여 경전에 증험하지 않음이 없다. 아버지 이름이 장이므로 그 지은 바에 여러 「장」 자를 다 「수」라 하였다. 광록대부 유향이 교정하여 갖추어 짓고 「회남」이라 이름하였다. 또 열아홉 편이 있는데 「회남외편」이라 한다. 유가 어릴 때부터 옛 시중이요 같은 고을인 노군에게서 그 구두를 받고 큰 뜻을 외어 들었다. 마침 병란의 재앙을 만나 천하가 바둑판처럼 대치하고 글과 전함을 잃어 폐하고 찾아 닦지 못한 지 스무 남은 해였다. 건안 열째 해에 사공의 연에 임명되고 동군 복양령에 제수되었는데 그때 사람 가운데 「회남」을 하는 이가 적음을 보고 마침내 스러질까 두려워 이에 아침저녁 일을 마친 사이에 곧 선사의 가르침을 깊이 생각하고 경전과 도가의 말을 참고하며 그 일을 견주어 주해를 하되 본문을 다 싣고 아울러 음과 읽기를 들었다. 전농중랑장 변읍이 여덟 권을 빌려 베꼈는데 마침 읍이 죽어 마침내 없어져 얻지 못하였다.
至十七年,遷監河東,復更補足。淺學寡見,未能備悉,其所不達,注以「未聞」。唯博物君子覽而詳之,以勸後學者云爾。
열일곱째 해에 이르러 감하동으로 옮겨 다시 고쳐 채웠다. 배움이 얕고 봄이 좁아 다 갖출 수 없어 그 통달하지 못한 바는 「듣지 못하였다」로 주하였다. 오직 널리 아는 군자가 보고 자세히 하여 뒷날 배우는 이를 권하기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