政體第二
貞觀初,太宗謂蕭瑀曰:「朕少好弓矢,自謂能盡其妙。近得良弓十數,以示弓工。乃曰:『皆非良材也。』朕問其故,工曰:『木心不正,則脈理皆邪,弓雖剛勁而遣箭不直,非良弓也。』朕始悟焉。朕以弧矢定四方,用弓多矣,而猶不得其理。況朕有天下之日淺,得為理之意,固未及於弓,弓猶失之,而況於理乎?」自是詔京官五品以上,更宿中書內省。每召見,皆賜坐與語,詢訪外事,務知百姓利害,政教得失焉。
정관 초에 태종이 소우에게 말하였다.
「짐이 어려서부터 활과 화살을 좋아하여 스스로 그 묘리를 다 안다고 여겼다. 근래에 좋은 활 열 몇 개를 얻어 활 만드는 장인에게 보였더니 『다 좋은 재목이 아닙니다』 하였다. 짐이 까닭을 물으니 장인이 말하기를 『나무의 심이 바르지 않으면 결이 다 비뚤어져, 활이 비록 굳세어도 화살을 곧게 보내지 못하니 좋은 활이 아닙니다』 하였다. 짐이 비로소 깨달았다.
짐이 활과 화살로 사방을 정하여 활을 쓴 것이 많은데도 오히려 그 이치를 알지 못하였다. 하물며 짐이 천하를 가진 날이 얕아 다스리는 뜻을 얻은 것이 활에도 미치지 못하니, 활조차 그르쳤는데 하물며 다스림이겠는가.」
이로부터 서울의 오품 이상 벼슬아치에게 조서를 내려 번갈아 중서내성에서 묵게 하였다. 부를 때마다 다 자리를 내려 함께 말하며 바깥일을 물어, 백성의 이롭고 해로움과 정사와 가르침의 잘잘못을 알기에 힘썼다.
貞觀元年,太宗謂黃門侍郎王珪曰:「中書所出詔敕,頗有意見不同,或兼錯失而相正以否。元置中書、門下,本擬相防過誤。人之意見,每或不同,有所是非,本為公事。或有護己之短,忌聞其失,有是有非,銜以為怨。或有茍避私隙,相惜顏面,知非政事,遂即施行。難違一官之小情,頓為萬人之大弊。此實亡國之政,卿輩特須在意防也。隋日內外庶官,政以依違,而致禍亂,人多不能深思此理。當時皆謂禍不及身,面從背言,不以為患。後至大亂一起,家國俱喪,雖有脫身之人,縱不遭刑戮,皆辛苦僅免,甚為時論所貶黜。卿等特須滅私徇公,堅守直道,庶事相啟沃,勿上下雷同也。」
정관 원년에 태종이 황문시랑 왕규에게 말하였다.
「중서성에서 내는 조칙에 자못 뜻이 같지 않은 것이 있고, 더러는 잘못이 섞여 서로 바로잡기도 하고 그러지 못하기도 한다. 애초에 중서성과 문하성을 둔 것은 본디 서로 허물을 막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람의 뜻은 늘 같지 않아 옳고 그름을 가리는 바가 있으니 본디 공적인 일이다.
그런데 더러는 제 모자람을 감싸고 제 잘못을 듣기 싫어하여, 옳고 그름을 두고 앙심을 품어 원망으로 삼는다. 더러는 구차히 사사로운 틈을 피하고 서로 낯을 아껴, 정사에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곧 그대로 행한다. 한 벼슬아치의 작은 정을 어기기 어려워하다가 문득 만 사람의 큰 폐단이 된다. 이것이 참으로 나라를 망치는 정사이니 경들은 특히 마음에 두어 막아야 한다.
수나라 때 안팎의 여러 벼슬아치가 정사를 어물어물 좇아 화란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이 이치를 깊이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때는 다들 화가 제 몸에 미치지 않으리라 여겨 앞에서는 따르고 뒤에서는 딴말하며 걱정으로 삼지 않았다. 뒤에 큰 난리가 한 번 일어나자 집과 나라가 함께 무너졌으니, 비록 몸을 빼낸 이가 형벌과 죽임을 만나지는 않았더라도 다 괴로이 겨우 면하였고 그때 여론에 몹시 깎이고 내쫓겼다.
경들은 특히 사사로움을 없애고 공을 좇아 곧은 길을 굳게 지키며, 여러 일에 서로 깨우쳐 주고 위아래가 한소리로 따르지 말라.」
貞觀二年,太宗問黃門侍郎王珪曰:「近代君臣治國,多劣於前古,何也?」對曰:「古之帝王為政,皆志尚清靜,以百姓之心為心。近代則唯損百姓以適其欲,所任用大臣,復非經術之士。漢家宰相,無不精通一經,朝廷若有疑事,皆引經決定,由是人識禮教,理致太平。近代重武輕儒,或參以法律,儒行既虧,淳風大壞。」太宗深然其言。自此百官中有學業優長、兼識政體者,多進其階品。累加遷擢焉。
정관 이 년에 태종이 황문시랑 왕규에게 물었다.
「가까운 시대의 임금과 신하가 나라를 다스린 것이 옛날보다 못한 일이 많으니 어찌된 일인가?」
대답하였다.
「옛 제왕이 정사를 함에 다 뜻이 맑고 고요함을 높이 여겨 백성의 마음으로 제 마음을 삼았습니다. 가까운 시대에는 오직 백성을 해쳐 제 욕심에 맞추었고, 맡겨 쓴 대신도 경학을 익힌 선비가 아니었습니다. 한나라의 재상은 한 경전에 정통하지 않은 이가 없어, 조정에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다 경전을 끌어 결정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예와 가르침을 알아 다스림이 태평에 이르렀습니다. 가까운 시대에는 무를 무겁게 여기고 유학을 가벼이 여기며 더러 법률을 섞으니, 선비의 행실이 이미 이지러지고 순박한 풍속이 크게 무너졌습니다.」
태종이 그 말을 깊이 옳게 여겼다. 이로부터 온갖 벼슬아치 가운데 학업이 뛰어나고 다스림의 요체를 아울러 아는 이는 그 품계를 많이 올려 거듭 뽑아 올렸다.
貞觀三年,太宗謂侍臣曰:「中書、門下,機要之司。擢才而居,委任實重。詔敕如有不穩便,皆須執論。比來惟覺阿旨順情,唯唯茍過,遂無一言諫諍者,豈是道理?若惟署詔敕、行文書而已,人誰不堪?何煩簡擇,以相委付?自今詔敕疑有不穩便,必須執言,無得妄有畏懼,知而寢默。」
정관 삼 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중서성과 문하성은 기밀과 요체를 맡은 곳이다. 인재를 뽑아 앉혔으니 맡긴 바가 참으로 무겁다. 조칙에 온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다 붙들고 논해야 한다. 근래에는 오직 뜻에 아부하고 정에 따라 예예 하며 구차히 넘기고, 마침내 한마디도 간하여 다투는 이가 없으니 어찌 도리이겠는가.
만약 조칙에 서명하고 문서를 돌리기만 할 뿐이라면 누구인들 못 하겠는가. 어찌 번거로이 가려 뽑아 서로 맡기겠는가. 이제부터 조칙에 온당하지 않은 의심이 있으면 반드시 붙들고 말하라. 함부로 두려워하여 알면서 잠자코 있지 말라.」
貞觀四年,太宗問蕭瑀曰:「隋文帝何如主也?」對曰:「克己復禮,勤勞思政,每一坐朝,或至日昃,五品已上,引坐論事,宿衛之士,傳飱而食,雖性非仁明,亦是勵精之主。」太宗曰:「公知其一,未知其二。此人性至察而心不明。夫心暗則照有不通,至察則多疑於物。又欺孤兒寡婦以得天下,恒恐群臣內懷不服,不肯信任百司,每事皆自決斷,雖則勞神苦形,未能盡合於理。朝臣既知其意,亦不敢直言。宰相以下,惟承順而已。朕意則不然,以天下之廣,四海之眾,千端萬緒,須合變通,皆委百司商量,宰相籌畫,於事穩便,方可奏行。豈得以一日萬機,獨斷一人之慮也。且日斷十事,五條不中,中者信善,其如不中者何?以日繼月,乃至累年,乖謬既多,不亡何待?豈如廣任賢良,高居深視,法令嚴肅,誰敢為非?」因令諸司,若詔敕頒下有未穩便者,必須執奏,不得順旨便即施行,務盡臣下之意。
정관 사 년에 태종이 소우에게 물었다.
「수 문제는 어떤 임금인가?」
대답하였다.
「제 몸을 이겨 예로 돌아가고 부지런히 정사를 생각하여, 한 번 조회에 앉으면 해가 기울 때까지 이르렀고, 오품 이상을 끌어 앉혀 일을 논하였으며, 숙위하는 군사가 밥을 날라다 먹었습니다. 비록 성품이 어질고 밝지는 않았으나 또한 정신을 가다듬은 임금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공은 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이 사람은 성품이 지나치게 살피되 마음이 밝지 못하였다. 무릇 마음이 어두우면 비추어도 통하지 못하는 데가 있고, 지나치게 살피면 사물을 많이 의심한다. 또 고아와 과부를 속여 천하를 얻었으므로, 늘 뭇 신하가 속으로 복종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여러 관사를 믿고 맡기려 하지 않고 일마다 다 스스로 결단하였다. 비록 정신을 수고롭게 하고 몸을 괴롭게 하였으나 이치에 다 맞지는 못하였다. 조정의 신하들도 이미 그 뜻을 알아 감히 곧은 말을 하지 못하였고, 재상 이하는 오직 받들어 따를 뿐이었다.
짐의 뜻은 그렇지 않다. 천하가 넓고 사해가 많으며 천 갈래 만 갈래이니 마땅히 변통에 맞아야 한다. 다 여러 관사에 맡겨 헤아리게 하고 재상이 꾀하여 일에 온당한 뒤에라야 아뢰어 행할 수 있다. 어찌 하루에 만 가지 정사를 한 사람의 생각으로 홀로 결단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하루에 열 가지 일을 결단하여 다섯 가지가 맞지 않는다면, 맞은 것은 참으로 좋으나 맞지 않은 것은 어찌하겠는가. 날로 달로 이어 여러 해에 이르면 어그러진 것이 이미 많을 터이니 망하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어찌 어질고 좋은 이를 널리 맡기고 높이 앉아 깊이 살피며, 법령을 엄숙히 하여 누가 감히 그르게 하겠느냐 하는 것만 하겠는가.」
이에 여러 관사에 명하여, 조칙이 내려진 것에 온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붙들고 아뢰게 하고 뜻을 좇아 곧 시행하지 말게 하여, 신하들의 뜻을 다하게 하였다.
貞觀五年,太宗謂侍臣曰:「治國與養病無異也。病人覺愈,彌須將護,若有觸犯,必至殞命。治國亦然,天下稍安,尤須兢慎,若便驕逸,必至喪敗。今天下安危,系之於朕。故日慎一日,雖休勿休。然耳目股肱,寄於卿輩,既義均一體,宜協力同心,事有不安,可極言無隱。儻君臣相疑,不能脩盡肝膈,實為國之大害也。」
정관 오 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병을 다스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병든 이가 나은 듯하면 더욱 조리해야 하니, 만약 건드림이 있으면 반드시 목숨을 잃는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그러하여, 천하가 조금 편안해지면 더욱 조심하고 삼가야 하니, 곧 교만하고 방자해지면 반드시 무너지고 만다.
이제 천하의 편안함과 위태로움이 짐에게 매여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루하루 삼가고 편안하여도 편안히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귀와 눈과 팔다리는 경들에게 맡겼으니, 의리가 이미 한 몸과 같은즉 마땅히 힘을 모으고 마음을 같이하여, 일에 온당하지 않은 것이 있거든 다 말하고 숨기지 말라. 만약 임금과 신하가 서로 의심하여 속마음을 다 펴지 못한다면 참으로 나라의 큰 해가 된다.」
貞觀六年,太宗謂侍臣曰:「看古之帝王,有興有衰,猶朝之有暮,皆為蔽其耳目,不知時政得失,忠正者不言,邪謅者日進,既不見過,所以至於滅亡。朕既在九重,不能盡見天下事,故布之卿等,以為朕之耳目。莫以天下無事,四海安寧,便不存意。可愛非君,可畏非民。天子者,有道則人推而為主,無道則人棄而不用,誠可畏也。」魏徵對曰:「自古失國之主,皆為居安忘危,處理忘亂,所以不能長久。今陛下富有四海,內外清晏,能留心治道,常臨深履薄,國家歷數,自然靈長。臣又聞古語云:『君,舟也;人,水也。水能載舟,亦能覆舟。』陛下以為可畏,誠如聖旨。」
정관 육 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옛 제왕을 보건대 흥함이 있고 쇠함이 있는 것이 아침이 있으면 저녁이 있는 것과 같으니, 다 그 귀와 눈이 가리어져 그때 정사의 잘잘못을 알지 못하고, 충성되고 바른 이는 말하지 않고 사악하고 아첨하는 이가 날로 나아가, 이미 허물을 보지 못하는 까닭에 멸망에 이른 것이다.
짐은 아홉 겹 궁궐 안에 있어 천하의 일을 다 볼 수 없으므로 경들에게 펴서 짐의 귀와 눈으로 삼는다. 천하에 일이 없고 사해가 편안하다 하여 곧 마음을 두지 않는 일이 없게 하라. 사랑할 만한 것이 임금이 아니고 두려워할 만한 것이 백성이 아니겠는가. 천자란 도가 있으면 사람들이 밀어 주인으로 삼고 도가 없으면 사람들이 버려 쓰지 않으니 참으로 두렵다.」
위징이 대답하였다.
「예로부터 나라를 잃은 임금은 다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고 다스려질 때 어지러움을 잊었으므로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폐하께서는 사해를 넉넉히 가지시고 안팎이 맑고 편안한데도 다스리는 도에 마음을 두시어 늘 깊은 못에 다다르고 얇은 얼음을 밟듯 하시니, 나라의 운수가 절로 신령하고 길 것입니다.
신이 또 듣건대 옛말에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또한 배를 엎을 수도 있다』 하였습니다. 폐하께서 두렵게 여기시니 참으로 성스러운 뜻과 같습니다.」
貞觀六年,太宗謂侍臣曰:「古人云:『危而不持,顛而不扶,焉用彼相?』君臣之義,得不盡忠匡救乎?朕嘗讀書,見桀殺關龍逄,漢誅黽錯,未嘗不廢書嘆息。公等但能正詞直諫,裨益政教,終不以犯顏忤旨,妄有誅責。朕比來臨朝斷決,亦有乖於律令者。公等以為小事,遂不執言。凡大事皆起於小事,小事不論,大事又將不可救,社稷傾危,莫不由此。隋主殘暴,身死匹夫之手,率土蒼生,罕聞嗟痛。公等為朕思隋氏滅亡之事,朕為公等思龍逄、晁錯之誅,君臣保全,豈不美哉!」
정관 육 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위태로운데 붙들지 못하고 넘어지는데 부축하지 못한다면 저 재상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에 충성을 다하여 바로잡아 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짐이 일찍이 글을 읽다가 걸이 관룡방을 죽이고 한나라가 조착을 벤 것을 보고, 글을 놓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다. 공들이 다만 바른 말로 곧게 간하여 정사와 가르침에 보탬이 된다면, 끝내 낯을 거스르고 뜻을 어겼다 하여 함부로 베고 꾸짖지 않겠다.
짐이 근래 조회에 나아가 결단한 것에도 율령에 어긋난 것이 있었다. 공들은 작은 일이라 여겨 마침내 붙들고 말하지 않았다. 무릇 큰 일은 다 작은 일에서 일어나니, 작은 일을 논하지 않으면 큰 일은 또 구할 수 없게 되고, 사직이 기울고 위태로워지는 것이 다 이로 말미암는다. 수나라 임금이 잔인하고 사나워 한 필부의 손에 죽었으나, 온 땅의 백성 가운데 슬퍼하고 아파했다는 말을 듣기 드물다.
공들은 짐을 위하여 수씨가 멸망한 일을 생각하고, 짐은 공들을 위하여 관룡방과 조착이 죽임당한 일을 생각하여, 임금과 신하가 함께 온전하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貞觀七年,太宗與秘書監魏徵從容論自古理政得失,因曰:「當今大亂之後,造次不可致化。」徵曰:「不然,凡人在危困,則憂死亡。憂死亡,則思化。思化,則易教。然則亂後易教,猶饑人易食也。」太宗曰:「善人為邦百年,然後勝殘去殺。大亂之後,將求致化,寧可造次而望乎?」徵曰:「此據常人,不在聖哲。若聖哲施化,上下同心,人應如響,不疾而速,期月而可,信不為難,三年成功,猶謂其晚。」太宗以為然。封德彜等對曰:「三代以後,人漸澆訛,故秦任法律,漢雜霸道,皆欲理而不能,豈能化而不欲?若信魏徵所說,恐敗亂國家。」徵曰:「五帝、三王,不易人而化。行帝道則帝,行王道則王,在於當時所理,化之而已。考之載籍,可得而知。昔黃帝與蚩尤七十餘戰,其亂甚矣,既勝之後,便致太平。九黎亂德,顓頊征之,既克之後,不失其化。桀為亂虐,而湯放之,在湯之代,即致太平。紂為無道,武王伐之,成王之代,亦致太平。若言人漸澆訛,不及純樸,至今應悉為鬼魅,寧可復得而教化耶?」德彜等無以難之,然咸以為不可。太宗每力行不倦,數年間,海內康寧,突厥破滅。因謂群臣曰:「貞觀初,人皆異論,云當今必不可行帝道、王道,惟魏徵勸我。既從其言,不過數載,遂得華夏安寧,遠戎賓服。突厥自古以來,常為中國勍敵,今酋長並帶刀宿衛,部落皆襲衣冠,使我遂至於此,皆魏徵之力也。」顧謂徵曰:「玉雖有美質,在於石間,不值良工琢磨,與瓦礫不別。若遇良工,即為萬代之寶。朕雖無美質,為公所切磋,勞公約朕以仁義,弘朕以道德,使朕功業至此,公亦足為良工爾。」
정관 칠 년에 태종이 비서감 위징과 조용히 예로부터의 정사의 잘잘못을 논하다가 말하였다.
「지금은 큰 난리 뒤라 갑자기 교화에 이를 수 없다.」
위징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사람이 위태롭고 곤궁하면 죽는 것을 걱정하고, 죽는 것을 걱정하면 교화를 생각하며, 교화를 생각하면 가르치기 쉽습니다. 그러니 난리 뒤에 가르치기 쉬운 것은 굶주린 사람이 먹기 쉬운 것과 같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착한 사람이 나라를 백 년 다스린 뒤에야 모진 것을 이기고 죽임을 없앤다 하였다. 큰 난리 뒤에 교화에 이르기를 구하면서 어찌 갑자기 바랄 수 있겠는가?」
위징이 말하였다.
「이는 보통 사람을 두고 한 말이지 성스럽고 밝은 이에게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만약 성스럽고 밝은 이가 교화를 베풀어 위아래가 마음을 같이하면, 사람들이 메아리처럼 응하여 서두르지 않아도 빠르니 한 달이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어렵지 않으며, 세 해에 공을 이룬다 해도 오히려 늦다 하겠습니다.」
태종이 그렇게 여겼다. 봉덕이 등이 대답하였다.
「삼대 뒤로 사람이 차츰 경박하고 거짓되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진나라는 법률에 맡기고 한나라는 패도를 섞었으니, 다 다스리려 하였으나 못한 것이지 어찌 교화할 수 있는데도 하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만약 위징의 말을 믿으신다면 나라를 그르치고 어지럽힐까 두렵습니다.」
위징이 말하였다.
「오제와 삼왕은 사람을 바꾸지 않고 교화하였습니다. 제왕의 도를 행하면 제왕이 되고 왕의 도를 행하면 왕이 되니, 그때 다스리는 바에 달렸을 뿐 교화하는 것입니다. 옛 기록을 살피면 알 수 있습니다. 옛날 황제가 치우와 일흔 번 남짓 싸웠으니 그 어지러움이 심하였으나 이긴 뒤에 곧 태평을 이루었습니다. 구려가 덕을 어지럽히자 전욱이 쳤고, 이긴 뒤에 그 교화를 잃지 않았습니다. 걸이 어지럽고 사나워 탕이 내쫓았는데 탕의 시대에 곧 태평을 이루었습니다. 주왕이 무도하여 주나라 무왕이 쳤는데 성왕의 시대에 또한 태평을 이루었습니다. 만약 사람이 차츰 경박하고 거짓되어져 순박함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면, 지금은 마땅히 다 도깨비가 되었어야 할 터이니 어찌 다시 가르쳐 교화할 수 있겠습니까.」
덕이 등이 이를 반박하지 못하였으나 다들 될 수 없다고 여겼다. 태종이 늘 힘써 행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니 몇 해 사이에 나라 안이 편안해지고 돌궐이 무너졌다. 이에 뭇 신하에게 말하였다.
「정관 초에 사람들이 다 딴말을 하여, 지금은 반드시 제왕의 도와 왕의 도를 행할 수 없다 하였는데 오직 위징만이 나에게 권하였다. 이미 그 말을 좇아 몇 해가 지나지 않아 마침내 화하가 편안해지고 먼 오랑캐가 손님으로 복종하였다. 돌궐은 예로부터 늘 중국의 굳센 적이었는데, 이제 그 우두머리들이 칼을 차고 숙위하며 부락이 다 옷과 갓을 이어받았다. 나로 하여금 여기에 이르게 한 것은 다 위징의 힘이다.」
돌아보며 위징에게 말하였다.
「옥이 비록 아름다운 바탕이 있어도 돌 사이에 있어 좋은 장인이 쪼고 갈아 주지 않으면 기와 조각과 다르지 않다. 만약 좋은 장인을 만나면 곧 만대의 보배가 된다. 짐이 비록 아름다운 바탕이 없으나 공에게 다듬어지고, 공이 수고로이 짐을 어짊과 의로움으로 묶고 도와 덕으로 넓혀 짐의 공업이 여기에 이르게 하였으니, 공 또한 좋은 장인이라 하기에 넉넉하다.」
貞觀八年,太宗謂侍臣曰:「隋時百姓縱有財物,豈得保此?自朕有天下已來,存心撫養,無有所科差,人人皆得營生,守其資財,即朕所賜。向使朕科喚不已,雖數資賞賜,亦不如不得。」魏徵對曰:「堯、舜在上,百姓亦云『耕田而食,鑿井而飲』,含哺鼓腹,而云『帝何力』於其間矣。今陛下如此含養,百姓可謂日用而不知。」又奏稱:「晉文公出田,逐獸於碭,入大澤,迷不知所出。其中有漁者,文公謂曰:『我,若君也,道將安出?我且厚賜若』漁者曰:『臣願有獻。』文公曰:『出澤而受之。』於是送出澤。文公曰:『今子之所欲教寡人者,何也?願受之。』漁者曰:『鴻鵠保河海,厭而徙之小澤,則有矰丸之憂。黿鼉保深淵,厭而出之淺渚,必有釣射之憂。今君逐獸碭,入至此,何行之太遠也?』文公曰:『善哉!』謂從者記漁者名。漁者曰:『君何以名?為君尊天事地,敬社稷,保四國,慈愛萬民,薄賦斂,輕租稅,臣亦與焉。君不尊天,不事地,不敬社稷,不固四海,外失禮於諸侯,內逆民心,一國流亡,漁者雖有厚賜,不得保也。』遂辭不受。」太宗曰:「卿言是也。」
정관 팔 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수나라 때에는 백성이 비록 재물이 있어도 어찌 그것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짐이 천하를 가진 뒤로 마음을 두어 어루만져 기르고 함부로 물리는 일이 없으니, 사람마다 다 살길을 꾸리고 제 재물을 지킨다. 이것이 곧 짐이 준 것이다. 만약 짐이 물리고 부르기를 그치지 않았다면, 비록 자주 상을 내렸다 한들 또한 받지 않느니만 못하였을 것이다.」
위징이 대답하였다.
「요임금과 순임금이 위에 있을 때 백성 또한 『밭 갈아 먹고 우물 파서 마신다』 하며, 입에 음식을 머금고 배를 두드리며 『임금이 무슨 힘을 썼는가』 하였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이처럼 머금어 기르시니, 백성이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 할 만합니다.」
또 아뢰었다.
「진 문공이 사냥을 나가 탕에서 짐승을 쫓다가 큰 못에 들어가 길을 잃어 나갈 데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안에 고기 잡는 이가 있어 문공이 말하기를 『나는 그대의 임금이다. 길이 어디로 나 있는가? 내가 그대에게 후히 주겠다』 하였습니다. 어부가 말하기를 『신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니, 문공이 『못을 나가서 받겠다』 하였습니다. 이에 못 밖으로 내보내니 문공이 말하기를 『이제 그대가 과인에게 가르치려는 것이 무엇인가? 받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어부가 말하기를 『큰 기러기와 고니는 강과 바다에 몸을 지키다가, 싫증이 나 작은 못으로 옮기면 주살과 탄환의 근심이 있습니다. 자라와 악어는 깊은 못에 몸을 지키다가, 싫증이 나 얕은 물가로 나오면 반드시 낚시와 화살의 근심이 있습니다. 이제 임금께서 탕에서 짐승을 쫓아 여기까지 드셨으니 어찌 다니심이 너무 멀지 않습니까』 하였습니다.
문공이 『좋구나』 하고 따르는 이에게 어부의 이름을 적게 하였습니다. 어부가 말하기를 『임금께서 무엇하러 이름을 물으십니까. 임금께서 하늘을 높이고 땅을 섬기며 사직을 공경하고 사방의 나라를 지키며 만백성을 사랑하고 부세를 얇게 하고 세금을 가벼이 하시면, 신 또한 그 안에 있습니다. 임금께서 하늘을 높이지 않고 땅을 섬기지 않으며 사직을 공경하지 않고 사해를 굳게 하지 않아, 밖으로는 제후에게 예를 잃고 안으로는 백성의 마음을 거스르면, 온 나라가 흩어져 달아날 터이니 어부가 비록 후한 상을 받았다 한들 지킬 수 없습니다』 하고, 마침내 사양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경의 말이 옳다.」
貞觀九年,太宗謂侍臣曰:「往昔初平京師,宮中美女珍玩,無院不滿。煬帝意猶不足,征求無已,兼東西征討,窮兵黷武,百姓不堪,遂致亡滅。此皆朕所目見。故夙夜孜孜,惟欲清凈,使天下無事。遂得徭役不興,年穀豐稔,百姓安樂。夫治國猶如栽樹,本根不搖,則枝葉茂榮。君能清凈,百姓何得不安樂乎?」
정관 구 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지난날 서울을 처음 평정하였을 때 궁 안의 아름다운 여인과 진기한 노리개가 채워지지 않은 뜰이 없었다. 그런데도 양제의 뜻은 오히려 모자라 구하고 찾기를 그치지 않았고, 아울러 동서로 치고 다투어 군사를 다하고 무력을 함부로 하니, 백성이 견디지 못하여 마침내 멸망에 이르렀다. 이것은 다 짐이 눈으로 본 바다.
그러므로 밤낮으로 부지런히 오직 맑고 고요하기를 바라 천하에 일이 없게 하였다. 마침내 부역이 일어나지 않고 해마다 곡식이 잘 여물어 백성이 편안하고 즐겁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무를 심는 것과 같아, 뿌리가 흔들리지 않으면 가지와 잎이 무성하다. 임금이 맑고 고요할 수 있으면 백성이 어찌 편안하고 즐겁지 않겠는가.」
貞觀十六年,太宗謂侍臣曰:「或君亂於上,臣理於下;或臣亂於下,君治於上。二者茍逢,何者為甚?」特進魏徵對曰:「君心治,則照見下非。誅一勸百,誰敢不畏威盡力?若昏暴於上,忠諫不從,雖百里奚、伍子胥之在虞、吳,不救其禍,敗亡亦繼。」太宗曰:「必如此,齊文宣昏暴,楊遵彥以正道扶之得治,何也?」徵曰:「遵彥彌縫暴主,救理蒼生,才得免亂,亦甚危苦。與人主嚴明,臣下畏法,直言正諫,皆見信用,不可同年而語也。」
정관 십육 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혹 임금이 위에서 어지러운데 신하가 아래에서 다스리기도 하고, 혹 신하가 아래에서 어지러운데 임금이 위에서 다스리기도 한다. 두 가지를 만난다면 어느 쪽이 더 심한가?」
특진 위징이 대답하였다.
「임금의 마음이 다스려지면 아랫사람의 그름을 비추어 봅니다. 하나를 베어 백을 권하니 누가 감히 위엄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위에서 어둡고 사나워 충성된 간언을 좇지 않으면, 비록 백리해와 오자서가 우나라와 오나라에 있었다 한들 그 화를 구하지 못하였고 무너져 망함이 또한 이었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반드시 그러하다면 제나라 문선제가 어둡고 사나웠는데도 양준언이 바른 도로 붙들어 다스려짐을 얻은 것은 어찌된 일인가?」
위징이 말하였다.
「준언이 사나운 임금의 틈을 기워 백성을 건져 겨우 어지러움을 면하게 한 것이니 또한 몹시 위태롭고 괴로웠습니다. 임금이 엄하고 밝아 신하가 법을 두려워하고 곧은 말과 바른 간언이 다 믿어져 쓰이는 것과는 같은 해에 놓고 말할 수 없습니다.」
貞觀十九年,太宗謂侍臣曰:「朕觀古來帝王,驕矜而取敗者,不可勝數。不能遠述古昔,至如晉武平吳、隋文伐陳已後,心逾驕奢,自矜諸己,臣下不復敢言,政道因茲弛紊。朕自平定突厥、破高麗已後,兼並鐵勒,席卷沙漠以為州縣,夷狄遠服,聲教益廣。朕恐懷驕矜,恒自抑折,日旰而食,坐以待晨。每思臣下有讜言直諫,可以施於政教者,當拭目以師友待之。如此,庶幾於時康道泰爾。」
정관 십구 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예로부터의 제왕을 보건대 교만하여 무너진 이를 이루 다 셀 수 없다. 먼 옛날을 다 말할 것도 없이, 진 무제가 오나라를 평정하고 수 문제가 진나라를 친 뒤로 마음이 더욱 교만하고 사치해져 스스로를 자랑하니, 신하들이 다시는 감히 말하지 못하여 다스리는 도가 이로 말미암아 늘어지고 어지러워졌다.
짐이 돌궐을 평정하고 고구려를 깨뜨린 뒤로 철륵을 아울렀고 사막을 걷어 고을과 현으로 삼았으며, 오랑캐가 멀리서 복종하고 소리와 가르침이 더욱 넓어졌다. 짐은 교만함을 품을까 두려워 늘 스스로 누르고 꺾어, 해가 저물어서야 먹고 앉아서 새벽을 기다린다.
신하 가운데 곧은 말과 바른 간언으로 정사와 가르침에 베풀 만한 것이 있으면, 마땅히 눈을 씻고 스승과 벗으로 대하리라 늘 생각한다. 이와 같이 하면 때가 편안하고 도가 태평해지는 데 가까울 것이다.」
太宗自即位之始,霜旱為災,米穀踴貴,突厥侵擾,州縣騷然。帝志在憂人,銳精為政,崇尚節儉,大布恩德。是時,自京師及河東、河南、隴右,饑饉尤甚,一匹絹才得一斗米。百姓雖東西逐食,未嘗嗟怨,莫不自安。至貞觀三年,關中豐熟,咸自歸鄉,竟無一人逃散,其得人心如此。加以從諫如流,雅好儒術,孜孜求士,務在擇官,改革舊弊,興復制度,每因一事,觸類為善。初,息隱、海陵之黨,同謀害太宗者數百千人,事寧,後引居左右近侍,心術豁然,不有疑阻。時論以為能斷決大事,得帝王之體。深惡官吏貪濁,有枉法受財者,必無赦免。在京流外有犯贓者,皆遣執奏,隨其所犯,寘以重法。由是官吏多自清謹。制馭王公、妃主之家,大姓豪猾之伍,皆畏威屏跡,無敢侵欺細人。商旅野次,無復盜賊,囹圄常空,馬牛布野,外戶不閉。又頻致豐稔,米斗三四錢,行旅自京師至於嶺表,自山東至於滄海,皆不賫糧,取給於路。入山東村落,行客經過者,必厚加供待,或發時有贈遺。此皆古昔未有也。
태종이 즉위한 처음부터 서리와 가뭄이 재앙이 되어 쌀값이 뛰어오르고 돌궐이 침노하여 고을과 현이 술렁였다. 임금은 뜻이 백성을 걱정하는 데 있어 정신을 가다듬어 정사를 하고, 절약과 검소함을 높이며 은덕을 크게 폈다.
이때 서울과 하동·하남·농우에 굶주림이 더욱 심하여 비단 한 필에 겨우 쌀 한 말을 얻었다. 백성이 비록 동서로 먹을 것을 좇아 다녔으나 일찍이 탄식하고 원망하지 않고 스스로 편안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정관 삼 년에 이르러 관중이 풍년들자 다들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가 끝내 한 사람도 달아나 흩어진 이가 없었으니, 사람의 마음을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게다가 간언을 물 흐르듯 좇고 유학을 자못 좋아하며 부지런히 선비를 구하고 벼슬아치 고르는 데 힘썼으며, 낡은 폐단을 고치고 제도를 다시 일으켜, 한 가지 일을 만날 때마다 비슷한 것에까지 미쳐 좋게 하였다.
처음에 식은과 해릉의 무리로 함께 꾀하여 태종을 해치려 한 이가 수백 수천 사람이었는데, 일이 진정된 뒤에 끌어다 곁에서 가까이 모시게 하고 마음이 활짝 트여 의심하고 막는 일이 없었다. 그때 여론이 큰일을 결단할 줄 알아 제왕의 체통을 얻었다고 여겼다.
벼슬아치가 탐하고 흐린 것을 몹시 미워하여, 법을 굽혀 재물을 받은 이가 있으면 반드시 용서하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유외의 벼슬아치로 뇌물을 범한 이가 있으면 다 잡아 아뢰게 하고 그 범한 바에 따라 무거운 법에 놓았다. 이로 말미암아 벼슬아치가 대개 스스로 맑고 삼갔다.
왕공과 왕비·공주의 집안과 큰 성씨의 세고 교활한 무리를 제어하니, 다 위엄을 두려워하여 자취를 감추고 감히 작은 사람을 침노하거나 속이지 못하였다. 장사꾼이 들에서 묵어도 다시는 도적이 없고 감옥이 늘 비었으며, 말과 소가 들에 널리고 바깥문을 닫지 않았다.
또 자주 풍년이 들어 쌀 한 말에 서너 푼이었다. 나그네가 서울에서 영남에 이르고 산동에서 창해에 이르기까지 다 양식을 지니지 않고 길에서 얻어먹었다. 산동의 마을에 들면 지나가는 나그네를 반드시 후히 대접하고, 더러 떠날 때 주는 것이 있었다. 이는 다 옛날에 없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