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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賢第三

정관정요 貞觀政要 · 오긍(吳兢) · 8세기 초 · 단락 8 · 한자 4,224자 · 낭독 16.9분

「정관정요」 어진 이를 쓰다 「任賢第三」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당 태종이 신하들과 주고받은 말을 주제별로 모은 책. 임금의 길에서 시작해 간언을 받아들이는 법, 벼슬아치를 고르는 법, 형벌과 세금과 정벌을 거쳐 「끝을 삼감」으로 끝난다. 위징이 낯을 맞대고 꺾어 말하고 태종이 이를 받아들이는 장면이 책의 뼈대다. 고구려 안시성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며 성주에게 비단을 내린 일, 방현령이 죽어 가며 요동 정벌을 말린 상소도 여기에 있다.

1방현령

房玄齡,齊州臨淄人也。初仕隋,為隰城尉。坐事,除名徙上郡。太宗徇地渭北,玄齡杖策謁於軍門,太宗一見,便如舊識,署渭北道行軍記室參軍。玄齡既遇知己,遂罄竭心力。是時,賊寇每平,眾人競求金寶,玄齡獨先收人物,致之幕府,及有謀臣猛將,與之潛相申結,各致死力。累授秦王府記室,兼陜東道大行臺考功郎中。玄齡在秦府十餘年,恒典管記。隱太子、巢刺王以玄齡及杜如晦為太宗所親禮,甚惡之,譖之高祖,由是與如晦並遭驅斥。及隱太子將有變也,太宗召玄齡、如晦,令衣道士服,潛引入閤謀議。及事平,太宗入春宮,擢拜太子左庶子。貞觀元年,遷中書令。三年,拜尚書左僕射,監修國史,封梁國公,實封一千三百戶。既總任百司,虔恭夙夜,盡心竭節,不欲一物失所。聞人有善,若己有之。明達吏事,飾以文學,審定法令,意在寬平。不以求備取人,不以己長格物,隨能收敘,無隔疏賤。論者稱為良相焉。十三年,加太子少師,玄齡自以一居端揆十有五年,頻抗表辭位,優詔不許。十六年,進拜司空,仍總朝政,依舊監修國史。玄齡復以年老請致仕,太宗遣使謂曰:「國家久相任使,一朝忽無良相,如失兩手。公若筋力不衰,無煩此讓。自知衰謝,當更奏聞。」玄齡遂止。太宗又嘗追思王業之艱難,佐命之匡弼,乃作《威鳳賦》以自喻,因賜玄齡,其見稱類如此。

방현령은 제주 임치 사람이다. 처음에 수나라에 벼슬하여 습성위가 되었다가 일에 걸려 이름이 지워지고 상군으로 옮겨졌다. 태종이 위수 북쪽 땅을 돌 때 현령이 지팡이를 짚고 군문에 나아가 뵈니, 태종이 한 번 보고 곧 옛 벗처럼 여겨 위북도행군기실참군에 임명하였다. 현령은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만나매 마침내 마음과 힘을 다 쏟았다.

이때 도적을 평정할 때마다 뭇사람이 다투어 금과 보배를 구하였으나 현령만은 먼저 사람을 거두어 막부에 이르게 하였고, 꾀 있는 신하와 날랜 장수가 있으면 그들과 은근히 서로 맺어 저마다 죽을 힘을 다하게 하였다.

거듭 진왕부 기실을 맡고 섬동도대행대 고공낭중을 겸하였다. 현령이 진왕부에 십여 해 있으면서 늘 문서를 맡았다. 은태자와 소랄왕은 현령과 두여회가 태종에게 가까이 예우받는 것을 몹시 미워하여 고조에게 참소하니, 이로 말미암아 여회와 함께 내쫓겼다. 은태자가 변을 일으키려 할 때 태종이 현령과 여회를 불러 도사의 옷을 입히고 몰래 안으로 끌어들여 꾀를 의논하였다.

일이 진정되고 태종이 동궁에 들자 태자좌서자로 뽑아 삼았다. 정관 원년에 중서령으로 옮기고, 삼 년에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어 국사 편찬을 감독하였으며, 양국공에 봉해지고 실봉 천삼백 호를 받았다.

온갖 관사를 아울러 맡은 뒤로 새벽부터 밤까지 삼가고 공경하며 마음과 절개를 다하여, 한 가지 물건도 제자리를 잃지 않게 하려 하였다. 남에게 좋은 점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제게 있는 것처럼 여겼다. 관리의 일에 밝고 통달하였으며 문학으로 꾸미고, 법령을 살펴 정하되 뜻이 너그럽고 공평한 데 있었다. 갖추기를 구하여 사람을 뽑지 않고 제 장기로 남을 재지 않았으며, 능한 바를 따라 거두어 쓰고 멀고 천한 이를 막지 않았다. 논하는 이들이 어진 재상이라 일컬었다.

십삼 년에 태자소사를 더하였다. 현령은 스스로 재상의 자리에 십오 년 있었다 하여 자주 표를 올려 자리를 사양하였으나 너그러운 조서로 허락하지 않았다. 십육 년에 사공에 올랐으나 그대로 조정 정사를 아울러 맡고 예전대로 국사 편찬을 감독하였다. 현령이 다시 늙었다 하여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니 태종이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나라가 오래 재상으로 맡겨 부렸는데 하루아침에 문득 어진 재상이 없어지면 두 손을 잃은 것과 같다. 공이 만약 근력이 쇠하지 않았다면 이런 사양으로 번거롭게 하지 말라. 스스로 쇠하였음을 알거든 그때 다시 아뢰라.」

현령이 마침내 그만두었다. 태종이 또 일찍이 왕업의 어려움과 천명을 도운 이들의 바로잡음을 돌이켜 생각하여 「위봉부」를 지어 스스로를 견주고 현령에게 내렸으니, 그가 일컬어짐이 이와 같았다.

2두여회

杜如晦,京兆萬年人也。武德初,為秦王府兵曹參軍,俄遷陜州總管府長史。時府中多英俊,被外遷者眾,太宗患之。記室房玄齡曰:「府僚去者雖多,蓋不足惜。杜如晦聰明識達,王佐才也。若大王守藩端拱,無所用之;必欲經營四方,非此人莫可。」太宗自此彌加禮重,寄以心腹,遂奏為府屬,常參謀帷幄。時軍國多事,剖斷如流,深為時輩所服。累除天策府從事中郎,兼文學館學士。隱太子之敗,如晦與玄齡功第一,遷拜太子右庶子。俄遷兵部尚書,進封蔡國公,實封一千三百戶。貞觀二年,以本官檢校侍中。三年,拜尚書右僕射,兼知吏部選事。仍與房玄齡共掌朝政。至於臺閣規模,典章文物,皆二人所定,甚獲當時之譽,時稱房、杜焉。

두여회는 경조 만년 사람이다. 무덕 초에 진왕부 병조참군이 되었다가 이윽고 섬주총관부 장사로 옮겼다. 그때 왕부 안에 뛰어난 이가 많았는데 밖으로 옮겨 가는 이가 많아 태종이 걱정하였다. 기실 방현령이 말하였다.

「왕부의 관료로 떠나는 이가 비록 많으나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두여회는 총명하고 아는 것이 통달하여 왕을 도울 재목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봉지를 지키며 팔짱만 끼신다면 쓸 데가 없겠으나, 반드시 사방을 경영하고자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태종이 이로부터 더욱 예우를 무겁게 하고 심복으로 맡겼으며, 마침내 아뢰어 왕부에 딸리게 하고 늘 장막 안에서 꾀를 함께하였다. 그때 군사와 나라의 일이 많았는데 갈라 결단하는 것이 물 흐르듯 하여 그때 사람들이 깊이 탄복하였다. 거듭 천책부 종사중랑을 맡고 문학관 학사를 겸하였다.

은태자가 무너질 때 여회와 현령의 공이 첫째였으므로 태자우서자로 옮겨 임명되었다. 이윽고 병부상서로 옮기고 채국공에 올려 봉해졌으며 실봉 천삼백 호를 받았다. 정관 이 년에 본관으로 시중을 검교하고, 삼 년에 상서우복야에 임명되어 이부의 인사를 아울러 맡았다. 그대로 방현령과 함께 조정 정사를 맡았다. 대각의 규모와 전장과 문물에 이르기까지 다 두 사람이 정한 것이라, 그때의 기림을 크게 얻어 「방·두」라 일컬어졌다.

3위징

魏徵,鉅鹿人也,近徙家相州之內黃。武德末,為太子洗馬。見太宗與隱太子陰相傾奪,每勸建成早為之謀。太宗既誅隱太子,召徵責之曰:「汝離間我兄弟,何也?」眾皆為之危懼。徵慷慨自若,從容對曰:「皇太子若從臣言,必無今日之禍。」太宗為之斂容,厚加禮異,擢拜諫議大夫。數引之臥內,訪以政術。徵雅有經國之才,性又抗直,無所屈撓。太宗每與之言,未嘗不悅。徵亦喜逢知己之主,竭其力用。又勞之曰:「卿所諫前後二百餘事,皆稱朕意,非卿忠誠奉國,何能若是?」三年,累遷秘書監,參預朝政,深謀遠算,多所弘益。太宗嘗謂曰:「卿罪重於中鉤,我任卿逾於管仲,近代君臣相得,寧有似我於卿者乎?」六年,太宗幸九成宮,宴近臣,長孫無忌曰:「王珪、魏徵,往事息隱,臣見之若讎,不謂今者又同此宴。」太宗曰:「魏徵往者實我所讎,但其盡心所事,有足嘉者。朕能擢而用之,何慚古烈?徵每犯顏切諫,不許我為非,我所以重之也。」徵再拜曰:「陛下導臣使言,臣所以敢言。若陛下不受臣言,臣亦何敢犯龍鱗,觸忌諱也。」太宗大悅,各賜錢十五萬。七年,代王珪為侍中,累封鄭國公。尋以疾乞辭所職,請為散官。太宗曰:「朕拔卿於讎虜之中,任卿以樞要之職,見朕之非,未嘗不諫。公獨不見金之在鑛,何足貴哉?良冶鍛而為器,便為人所寶。朕方自比於金,以卿為良工。雖有疾,未為衰老,豈得便爾耶?」徵乃止。後復固辭,聽解侍中,授以特進,仍知門下省事。十二年,太宗以誕皇孫,詔宴公卿,帝極歡,謂侍臣曰:「貞觀以前,從我平定天下,周旋艱險,玄齡之功無所與讓。貞觀之後,盡心於我,獻納忠讜,安國利人,成我今日功業,為天下所稱者,惟魏徵而已。古之名臣,何以加也。」於是親解佩刀以賜二人。庶人承乾在春宮,不修德業。魏王泰寵愛日隆,內外庶寮,咸有疑議。太宗聞而惡之,謂侍臣曰:「當今朝臣,忠謇無如魏徵,我遣傅皇太子,用絕天下之望。」十七年,遂授太子太師,知門下事如故。徵自陳有疾,太宗謂曰:「太子宗社之本,須有師傅,故選中正,以為輔弼。知公疹病,可臥護之。」徵乃就職。尋遇疾。徵宅內先無正堂,太宗時欲營小殿,乃輟其材為造,五日而就。遣中使賜以布被素褥,遂其所尚。後數日,薨。太宗親臨慟哭,贈司空,謚曰文貞。太宗親為制碑文,復自書於石。特賜其家食實封九百戶。太宗後嘗謂侍臣曰:「夫以銅為鏡,可以正衣冠;以古為鏡,可以知興替;以人為鏡,可以明得失。朕常保此三鏡,以防己過。今魏徵殂逝,遂亡一鏡矣!」因泣下久之。乃詔曰:「昔惟魏徵,每顯予過。自其逝也,雖過莫彰。朕豈獨有非於往時,而皆是於茲日?故亦庶僚茍順,難觸龍鱗者歟!所以虛己外求,披迷內省。言而不用,朕所甘心。用而不言,誰之責也?自斯已後,各悉乃誠。若有是非,直言無隱。」

위징은 거록 사람인데 근래에 집을 상주의 내황으로 옮겼다. 무덕 말에 태자세마가 되었다. 태종과 은태자가 몰래 서로 기울여 빼앗으려 하는 것을 보고 늘 건성에게 일찍 꾀할 것을 권하였다. 태종이 은태자를 벤 뒤에 위징을 불러 꾸짖어 말하였다.

「너는 내 형제를 이간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뭇사람이 다 그를 위태롭게 여겨 두려워하였다. 위징은 강개하여 태연히 조용히 대답하였다.

「황태자가 만약 신의 말을 좇았더라면 반드시 오늘의 화가 없었을 것입니다.」

태종이 이에 낯빛을 고치고 두터이 예우하여 간의대부에 뽑아 임명하였다. 여러 번 침소 안으로 끌어들여 정사의 방책을 물었다. 위징은 본디 나라를 다스릴 재주가 있고 성품이 또 꼿꼿하고 곧아 굽히는 바가 없었다. 태종이 그와 말할 때마다 기뻐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위징 또한 자기를 알아주는 임금을 만난 것을 기뻐하여 그 힘을 다하였다. 태종이 또 그를 위로하여 말하였다.

「경이 앞뒤로 간한 것이 이백여 가지인데 다 짐의 뜻에 맞으니, 경이 충성으로 나라를 받들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삼 년에 거듭 옮겨 비서감이 되어 조정 정사에 참여하니, 깊은 꾀와 먼 헤아림으로 넓히고 보탠 바가 많았다. 태종이 일찍이 말하였다.

「경의 죄는 띠고리를 맞힌 것보다 무겁고, 내가 경을 맡긴 것은 관중보다 더하다. 가까운 시대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얻은 것에 어찌 나와 경 같은 이가 있겠는가.」

육 년에 태종이 구성궁에 거둥하여 가까운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 때 장손무기가 말하였다.

「왕규와 위징은 지난날 은태자를 섬겼으니 신은 그들 보기를 원수같이 하였는데, 오늘 또 이 잔치를 함께할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위징은 지난날 참으로 내 원수였다. 다만 그가 섬기는 바에 마음을 다한 것은 기릴 만하다. 짐이 뽑아 쓸 수 있으니 어찌 옛 열사들에게 부끄럽겠는가. 위징은 낯을 거스르며 간절히 간하여 내가 그르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내가 그를 무겁게 여기는 까닭이다.」

위징이 두 번 절하고 말하였다.

「폐하께서 신을 이끌어 말하게 하시니 신이 감히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신의 말을 받지 않으신다면 신 또한 어찌 감히 용의 비늘을 거스르고 꺼리는 바를 건드리겠습니까.」

태종이 크게 기뻐하여 저마다 돈 십오만을 내렸다.

칠 년에 왕규를 대신하여 시중이 되고 거듭 정국공에 봉해졌다. 이윽고 병으로 맡은 자리를 사양하고 산관이 되기를 청하였다. 태종이 말하였다.

「짐이 경을 원수와 사로잡힌 이들 가운데서 뽑아 기밀과 요체의 자리로 맡겼는데, 짐의 그름을 보면 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은 금이 광석 속에 있을 때 무엇이 귀한지 보지 못하였는가. 좋은 대장장이가 불려 그릇을 만들어야 곧 사람들이 보배로 여긴다. 짐이 바야흐로 스스로를 금에 견주고 경을 좋은 장인으로 삼는다. 비록 병이 있으나 아직 늙어 쇠하지 않았으니 어찌 곧 그러겠는가.」

위징이 이에 그만두었다. 뒤에 다시 굳이 사양하니 시중에서 풀어 주기를 들어주고 특진을 주었으며 그대로 문하성의 일을 맡게 하였다.

십이 년에 태종이 황손을 낳았다 하여 조서를 내려 공경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임금이 몹시 기뻐하여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정관 이전에 나를 따라 천하를 평정하며 어려움과 험함을 두루 돈 것은 현령의 공에 견줄 이가 없다. 정관 뒤에 나에게 마음을 다하여 충성되고 곧은 말을 바치고 나라를 편안케 하고 사람을 이롭게 하여 오늘의 공업을 이루어 천하가 일컫는 바가 된 것은 오직 위징뿐이다. 옛 이름난 신하인들 무엇을 더하겠는가.」

이에 몸소 찬 칼을 풀어 두 사람에게 내렸다.

서인 승건이 동궁에 있으면서 덕업을 닦지 않고 위왕 태가 총애를 날로 더 받으니, 안팎의 여러 관료가 다 의심하여 말이 있었다. 태종이 듣고 미워하여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조정 신하 가운데 충직하기가 위징만 한 이가 없으니, 내가 그를 보내어 황태자의 스승으로 삼아 천하의 바람을 끊겠다.」

십칠 년에 마침내 태자태사를 주고 문하성의 일은 예전대로 맡게 하였다. 위징이 스스로 병이 있다고 아뢰니 태종이 말하였다.

「태자는 종묘와 사직의 근본이라 스승이 있어야 하므로 바르고 곧은 이를 골라 돕게 하는 것이다. 공이 병든 줄 알거니와 누워서 지켜도 좋다.」

위징이 이에 자리에 나아갔다. 이윽고 병을 만났다. 위징의 집 안에 본디 정당이 없었는데, 태종이 그때 작은 전각을 지으려던 재목을 돌려 지어 주니 닷새에 이루어졌다. 중사를 보내 베 이불과 흰 요를 내려 그가 숭상하는 바를 이루게 하였다. 며칠 뒤에 죽었다.

태종이 몸소 나아가 통곡하고 사공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를 문정이라 하였다. 태종이 몸소 비문을 짓고 다시 손수 돌에 썼다. 특별히 그 집에 실봉 구백 호를 내렸다.

태종이 뒤에 일찍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무릇 구리로 거울을 삼으면 옷과 갓을 바르게 할 수 있고, 옛일로 거울을 삼으면 흥하고 바뀜을 알 수 있으며,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면 얻고 잃음을 밝힐 수 있다. 짐이 늘 이 세 거울을 지녀 제 허물을 막았는데, 이제 위징이 죽으니 마침내 거울 하나를 잃었구나.」

이에 눈물을 흘리며 오래 있었다. 곧 조서를 내렸다.

「지난날에는 오직 위징이 늘 나의 허물을 드러내었다. 그가 죽은 뒤로는 비록 허물이 있어도 드러나지 않는다. 짐이 어찌 지난날에만 그름이 있고 오늘에는 다 옳겠는가. 그러니 또한 여러 관료가 구차히 따르고 용의 비늘을 건드리기 어려워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몸을 비워 밖에서 구하고 미혹함을 헤쳐 안으로 살핀다. 말하였는데 쓰이지 않는 것은 짐이 달게 여기는 바이나, 쓰면서 말하지 않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 뒤로는 저마다 그 정성을 다하라. 옳고 그름이 있거든 곧게 말하고 숨기지 말라.」

4왕규

王珪,太原祁縣人也,武德中,為隱太子中允,甚為建成所禮。後以連其陰謀事,流於巂州。建成誅後,太宗即位,召拜諫議大夫。每推誠盡節,多所獻納。珪嘗上封事切諫,太宗謂曰:「卿所論皆中朕之失,自古人君莫不欲社稷永安,然而不得者,只為不聞己過,或聞而不能改故也。今朕有所失,卿能直言,朕復聞過能改,何慮社稷之不安乎?」太宗又嘗謂珪曰:「卿若常居諫官,朕必永無過失。」顧待益厚。貞觀元年,遷黃門侍郎,參預政事,兼太子右庶子。二年,進拜侍中。時房玄齡、魏徵、李靖、溫彥博、戴胄與珪同知國政,嘗因侍宴,太宗謂珪曰:「卿識鑒精通,尤善談論,自玄齡等,咸宜品藻。又可自量孰與諸子賢?」對曰:「孜孜奉國,知無不為,臣不如玄齡。每以諫諍為心,恥君不及堯、舜、臣不如魏徵。才兼文武,出將入相,臣不如李靖。敷奏詳明,出納惟允,臣不如溫彥博。處繁理劇,眾務必舉,臣不如戴胄。至如激濁揚清,嫉惡好善,臣於數子,亦有一日之長。」太宗深然其言,群公亦各以為盡己所懷,謂之確論。

왕규는 태원 기현 사람이다. 무덕 연간에 은태자 중윤이 되어 건성에게 몹시 예우받았다. 뒤에 그 음모에 연루된 일로 수주에 귀양 갔다. 건성이 베인 뒤 태종이 즉위하자 불러 간의대부에 임명하였다. 늘 정성을 다하고 절개를 다하여 바친 것이 많았다.

왕규가 일찍이 봉한 글을 올려 간절히 간하니 태종이 말하였다.

「경이 논한 바가 다 짐의 잘못에 맞는다. 예로부터 임금이 사직이 길이 편안하기를 바라지 않은 이가 없으나 얻지 못한 것은, 다만 제 허물을 듣지 못하거나 듣고도 고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짐에게 잘못이 있으면 경이 곧게 말할 수 있고 짐이 또 허물을 듣고 고칠 수 있으니, 어찌 사직이 편안하지 않을까 걱정하겠는가.」

태종이 또 일찍이 왕규에게 말하였다.

「경이 만약 늘 간관의 자리에 있다면 짐은 반드시 길이 허물이 없으리라.」

돌아보아 대하는 것이 더욱 두터웠다. 정관 원년에 황문시랑으로 옮겨 정사에 참여하고 태자우서자를 겸하였다. 이 년에 시중으로 올려 임명되었다.

그때 방현령·위징·이정·온언박·대주가 왕규와 함께 나라 정사를 맡았다. 일찍이 잔치를 모시는 자리에서 태종이 왕규에게 말하였다.

「경은 사람 보는 눈이 정통하고 더욱이 이야기를 잘한다. 현령 등으로부터 다 품평해 보라. 또 스스로 헤아려 여러 사람과 견주어 누가 어진가?」

대답하였다.

「부지런히 나라를 받들어 알면 하지 않는 것이 없기로는 신이 현령만 못합니다. 늘 간하여 다투는 것을 마음으로 삼아 임금이 요임금과 순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로는 신이 위징만 못합니다. 재주가 문무를 겸하여 나가면 장수요 들면 재상이 되기로는 신이 이정만 못합니다. 아뢰는 것이 자세하고 밝으며 내고 들이는 것이 오직 미쁘기로는 신이 온언박만 못합니다. 번거로운 것을 처리하고 어려운 것을 다스려 뭇 일을 반드시 들어 올리기로는 신이 대주만 못합니다. 흐린 것을 몰아내고 맑은 것을 드날리며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좋아하는 데 이르러서는, 신이 여러 사람에게 또한 하루의 나음이 있습니다.」

태종이 그 말을 깊이 옳게 여겼고, 뭇 공들도 저마다 제 품은 바를 다 말하였다 하여 확실한 논이라 일렀다.

5이정

李靖,京兆三原人也。大業末,為馬邑郡丞。曾高祖為太原留守,靖觀察高祖,知有四方之誌,因自鎖上變,詣江都。至長安,道塞不通而止。高祖克京城,執靖,將斬之,靖大呼曰:「公起義兵除暴亂,不欲就大事,而以私怨斬壯士乎?」太宗亦加救靖,高祖遂舍之。武德中,以平蕭銑、輔公祏功,歷遷揚州大都督府長史。太宗嗣位,召拜刑部尚書。貞觀二年,以本官檢校中書令。三年,轉兵部尚書,為代州行軍總管,進擊突厥定襄城,破之。突厥諸部落俱走磧北。北擒隋齊王暕之子楊道政,及煬帝蕭後,送於長安,突利可汗來降,頡利可汗僅以身遁。太宗謂曰:「昔李陵提步卒五千,不免身降匈奴,尚得名書竹帛。卿以三千輕騎,深入虜庭,克復定襄,威振北狄,實古今未有,足報往年渭水之役矣。」以功進封代國公。此後,頡利可汗大懼,四年,退保鐵山,遣使入朝謝罪,請舉國內附。又以靖為定襄道行軍總管,往迎頡利。頡利雖外請降,而心懷疑貳。詔遣鴻臚卿唐儉、攝戶部尚書將軍安修仁慰諭之,靖謂副將張公謹曰:「詔使到彼,虜必自寬,乃選精騎賫二十日糧,引兵自白道襲之。」公謹曰:「既許其降,詔使在彼,未宜討擊。」靖曰:「此兵機也,時不可失。」遂督軍疾進。行至陰山,遇其斥候千餘帳,皆俘以隨軍。頡利見使者甚悅,不虞官兵至也。靖前鋒乘霧而行,去其牙帳七里,頡利始覺,列兵未及成陣,單馬輕走,虜眾因而潰散。斬萬餘級,殺其妻隋義成公主,俘男女十餘萬,斥土界自陰山至於大漠,遂滅其國。尋獲頡利可汗於別部落,餘眾悉降。太宗大悅,顧謂侍臣曰:「朕聞主憂臣辱,主辱臣死。往者國家草創,突厥強梁,太上皇以百姓之故,稱臣於頡利,朕未嘗不痛心疾首,誌滅匈奴,坐不安席,食不甘味。今者暫動偏師,無往不捷,單於稽顙,恥其雪乎!」群臣皆稱萬歲。尋拜靖光祿大夫、尚書右僕射,賜實封五百戶。又為西海道行軍大總管,征吐谷渾,大破其國。改封衛國公。及靖身亡,有詔許墳塋制度依漢衛、霍故事,築闕象突厥內燕然山、吐谷渾內積石二山,以旌殊績。

이정은 경조 삼원 사람이다. 대업 말에 마읍군승이 되었다. 그때 고조가 태원유수였는데, 이정이 고조를 살펴 사방을 도모할 뜻이 있음을 알고 스스로 몸을 묶어 변고를 아뢰려고 강도로 가려 하였다. 장안에 이르러 길이 막혀 통하지 못하고 그쳤다.

고조가 서울을 이기고 이정을 잡아 베려 하니 이정이 크게 외쳤다.

「공은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사납고 어지러운 것을 없애면서, 큰일을 이루려 하지 않고 사사로운 원한으로 장사를 베려 하십니까?」

태종 또한 이정을 구하니 고조가 마침내 놓아주었다. 무덕 연간에 소선과 보공석을 평정한 공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양주대도독부 장사가 되었다.

태종이 자리를 잇자 불러 형부상서에 임명하였다. 정관 이 년에 본관으로 중서령을 검교하고, 삼 년에 병부상서로 옮겨 대주행군총관이 되어 돌궐의 정양성을 나아가 쳐 깨뜨렸다. 돌궐의 여러 부락이 다 사막 북쪽으로 달아났다. 북쪽에서 수 제왕 양간의 아들 양도정과 양제의 소황후를 사로잡아 장안으로 보냈고, 돌리가한이 와서 항복하였으며 힐리가한은 겨우 제 몸만 달아났다. 태종이 말하였다.

「옛날 이릉은 보병 오천을 이끌고도 몸이 흉노에 항복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이름이 죽백에 적혔다. 경은 가벼운 기병 삼천으로 오랑캐의 뜰에 깊이 들어가 정양을 되찾고 위엄을 북쪽 오랑캐에 떨쳤으니, 참으로 예나 이제나 없던 일이며 지난해 위수의 싸움을 갚기에 넉넉하다.」

공으로 대국공에 올려 봉하였다.

이 뒤에 힐리가한이 크게 두려워하여 사 년에 철산으로 물러나 지키며, 사신을 보내 조정에 들어와 죄를 빌고 온 나라를 들어 안으로 붙기를 청하였다. 또 이정을 정양도행군총관으로 삼아 힐리를 맞으러 가게 하였다. 힐리는 비록 겉으로 항복을 청하였으나 마음에 두 뜻을 품었다. 조서로 홍려경 당검과 섭호부상서 장군 안수인을 보내 달래게 하였다. 이정이 부장 장공근에게 말하였다.

「조서를 가진 사신이 저기에 이르면 오랑캐가 반드시 스스로 느슨해질 것이니, 이에 날랜 기병을 골라 스무 날 양식을 지니고 군사를 이끌어 백도로부터 들이치겠다.」

공근이 말하였다.

「이미 그 항복을 허락하였고 조서를 가진 사신이 저기에 있으니 아직 쳐서는 안 됩니다.」

이정이 말하였다.

「이것이 병가의 기틀이다. 때를 잃을 수 없다.」

마침내 군사를 몰아 빨리 나아갔다. 음산에 이르러 그 척후 천여 장막을 만나 다 사로잡아 군사를 따르게 하였다. 힐리는 사신을 보고 몹시 기뻐하여 관군이 이를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다. 이정의 앞선 군사가 안개를 타고 나아가 그 아장에서 칠 리 떨어졌을 때 힐리가 비로소 깨달았다. 군사를 벌였으나 진을 이루기 전에 홀로 말을 타고 가벼이 달아나니 오랑캐 무리가 이로 말미암아 흩어졌다. 만여 급을 베고 그 아내인 수나라 의성공주를 죽였으며 남녀 십여만을 사로잡았다. 땅의 경계를 음산에서 큰 사막까지 넓혀 마침내 그 나라를 멸하였다. 이윽고 힐리가한을 다른 부락에서 잡으니 남은 무리가 다 항복하였다.

태종이 크게 기뻐하여 돌아보며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듣건대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가 욕되고 임금이 욕되면 신하가 죽는다 하였다. 지난날 나라가 처음 세워질 때 돌궐이 강하고 사나워 태상황께서 백성을 위한 까닭에 힐리에게 신하라 일컬으셨으니, 짐이 마음 아프고 머리 아프지 않은 적이 없었다. 흉노를 멸하기로 뜻을 두어 앉아도 자리가 편하지 않고 먹어도 맛이 달지 않았다. 이제 잠깐 한쪽 군사를 움직였을 뿐인데 가는 곳마다 이기지 않은 데가 없고 선우가 이마를 조아리니 그 부끄러움이 씻겼구나.」

뭇 신하가 다 만세를 불렀다.

이윽고 이정을 광록대부·상서우복야에 임명하고 실봉 오백 호를 내렸다. 또 서해도행군대총관이 되어 토욕혼을 쳐서 그 나라를 크게 깨뜨렸다. 위국공으로 봉을 고쳤다. 이정이 죽자 조서로 무덤의 제도를 한나라 위청과 곽거병의 옛일에 따르게 하고, 궐을 쌓아 돌궐 안의 연연산과 토욕혼 안의 적석 두 산을 본떠 뛰어난 공을 드러내게 하였다.

6우세남

虞世南,會稽餘姚人也。貞觀初,太宗引為上客。因開文館,館中號為多士,咸推世南為文學之宗。授以記室,與房玄齡對掌文翰。嘗命寫《列女傳》以裝屏風,於時無本,世南暗書之,一無遺失。貞觀七年,累遷秘書監,太宗每機務之隙,引之談論,共觀經史。世南雖容貌懦弱,如不勝衣,而誌性抗烈,每論及古先帝王為政得失,必存規諷,多所補益。及高祖晏駕,太宗執喪過禮,哀容毀顇,久替萬機,文武百寮,計無所出,世南每入進諫,太宗甚嘉納之,益所親禮。嘗謂侍臣曰:「朕因暇日,每與虞世南商榷古今,朕有一言之善,世南未嘗不悅,有一言之失,未嘗不悵恨。其懇誠若此,朕用嘉焉。群臣皆若世南,天下何憂不治?」太宗嘗稱世南有五絕:一曰德行,二曰忠直,三曰博學,四曰詞藻,五曰書翰。及卒,太宗舉哀於別次,哭之甚慟。喪事官給,仍賜以東園秘器,贈禮部尚書,謚曰文懿。太宗手敕魏王泰曰:「虞世南於我,猶一體也。拾遺補闕,無日暫忘,實當代名臣,人倫準的。吾有小善,必將順而成之;吾有小失,必犯顏而諫之。今其云亡,石渠、東觀之中,無復人矣,痛惜豈可言耶!」未幾,太宗為詩一篇,追思往古理亂之道,既而嘆曰:「鍾子期死,伯牙不復鼓琴。朕之此篇,將何所示?」因令起居褚遂良詣其靈帳讀訖焚之,其悲悼也若此。又令與房玄齡、長孫無忌、杜如晦、李靖等二十四人,圖形於淩煙閣。

우세남은 회계 여요 사람이다. 정관 초에 태종이 끌어 윗손님으로 삼았다. 문관을 열자 관 안에 선비가 많다 하였는데, 다들 세남을 문학의 으뜸으로 밀었다. 기실을 주어 방현령과 마주하여 글을 맡게 하였다. 일찍이 「열녀전」을 베껴 병풍을 꾸미게 하였는데 그때 본이 없어 세남이 외워서 쓰니 하나도 빠뜨림이 없었다.

정관 칠 년에 거듭 옮겨 비서감이 되었다. 태종이 정무의 틈마다 그를 끌어 이야기하고 함께 경전과 사서를 보았다. 세남은 비록 얼굴이 유약하여 옷을 이기지 못할 듯하였으나 뜻과 성품이 꼿꼿하고 매서웠다. 옛 제왕이 정사한 잘잘못을 논할 때마다 반드시 바로잡고 풍자하는 뜻을 두어 보탬이 되는 바가 많았다.

고조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이 상을 지키는 것이 예에 지나쳐 슬픈 얼굴로 몸이 상하고 오래 만 가지 정사를 폐하니, 문무의 온갖 관료가 계책이 나올 데가 없었다. 세남이 들어가 간할 때마다 태종이 매우 기뻐 받아들이고 더욱 가까이 예우하였다. 일찍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짐이 한가한 날마다 우세남과 예와 이제를 헤아려 보는데, 짐에게 한마디 좋은 말이 있으면 세남이 기뻐하지 않은 적이 없고 한마디 잘못이 있으면 서운해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 간절한 정성이 이와 같으니 짐이 이를 기린다. 뭇 신하가 다 세남 같다면 천하에 다스려지지 않을까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태종이 일찍이 세남에게 다섯 가지 뛰어남이 있다 하였으니, 하나는 덕행이요 둘은 충직이요 셋은 박학이요 넷은 사조요 다섯은 서한이다.

죽자 태종이 다른 처소에서 애도를 표하고 몹시 통곡하였다. 상사를 관에서 대고 동원의 관을 내렸으며 예부상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문의라 하였다. 태종이 손수 위왕 태에게 칙서를 내렸다.

「우세남은 나에게 한 몸과 같았다. 빠진 것을 줍고 모자란 것을 기워 하루도 잠시 잊은 적이 없으니, 참으로 그 시대의 이름난 신하요 인륜의 표준이다. 나에게 작은 좋음이 있으면 반드시 따라 이루게 하고, 나에게 작은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낯을 거스르며 간하였다. 이제 그가 죽었다 하니 석거각과 동관 안에 다시는 사람이 없구나. 아픔과 아까움을 어찌 말로 하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종이 시 한 편을 지어 옛날 다스림과 어지러움의 도를 돌이켜 생각하고는 탄식하였다.

「종자기가 죽으매 백아가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 짐의 이 시를 장차 누구에게 보이겠는가.」

이에 기거랑 저수량에게 그 영좌에 나아가 읽고 태우게 하였으니, 그 슬퍼함이 이와 같았다. 또 방현령·장손무기·두여회·이정 등 스물네 사람과 함께 능연각에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

7이적

李勣,曹州離狐人也。本姓徐,初仕李密,為左武侯大將軍。密後為王世充所破,擁眾歸國,勣猶據密舊境十郡之地。武德二年,謂長史郭孝恪曰:「魏公既歸大唐,今此人眾土地,魏公所有也。吾若上表獻之,則是利主之敗,自為己功,以邀富貴,是吾所恥。今宜具錄州縣及軍人戶口,總啟魏公,聽公自獻,此則魏公之功也,不亦可乎?」乃遣使啟密。使人初至,高祖聞無表,惟有啟與密,甚怪之。使者以勣意聞奏,高祖方大喜曰:「徐勣感德推功,實純臣也。」拜黎州總管,賜姓李氏,附屬籍於宗正。封其父蓋為濟陰王,固辭王爵,乃封舒國公,授散騎常侍。尋加勣右武侯大將軍。及李密反叛伏誅,勣發喪行服,備君臣之禮,表請收葬。高祖遂歸其屍。於是大具威儀,三軍縞素,葬於黎陽山。禮成,釋服而散,朝野義之。尋為竇建德所攻,陷於建德,又自拔歸京師。從太宗征王世充、竇建德,平之。貞觀元年,拜并州都督,令行禁止,號為稱職,突厥甚加畏憚。太宗謂侍臣曰:「隋煬帝不解精選賢良,鎮撫邊境,惟遠築長城,廣屯將士,以備突厥,而情識之惑,一至於此。朕今委任李勣於并州,遂得突厥畏威遠遁,塞垣安靜,豈不勝數千里長城耶?」其後并州改置大都督府,又以勣為長史,累封英國公。在并州凡十六年。召拜兵部尚書,兼知政事。勣時遇暴疾,驗方云須灰可以療之,太宗自剪須為其和藥。勣頓首見血,泣以陳謝。太宗曰:「吾為社稷計耳,不煩深謝。」十七年,高宗居春宮,轉太子詹事,加特進,仍知政事。太宗又嘗宴,顧勣曰:「朕將屬以孤幼,思之無越卿者。公往不遺於李密,今豈負於朕哉!」勣雪涕致辭,因噬指流血。俄沈醉,御服覆之,其見委信如此。勣每行軍,用師籌算,臨敵應變,動合事機。自貞觀以來,討擊突厥、頡利及薛延陀、高麗等,並大破之。太宗嘗曰:「李靖、李勣二人,古之韓、白,衛、霍豈能及也。」

이적은 조주 이호 사람이다. 본디 성이 서씨다. 처음에 이밀에게 벼슬하여 좌무후대장군이 되었다. 이밀이 뒤에 왕세충에게 깨뜨려지자 무리를 이끌고 나라에 돌아왔으나, 이적은 오히려 이밀의 옛 지경 열 고을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덕 이 년에 장사 곽효각에게 말하였다.

「위공이 이미 대당에 돌아갔으니 이제 이 사람과 땅은 위공의 것이다. 내가 만약 표를 올려 바친다면 이는 주인의 무너짐을 이롭게 여겨 스스로 제 공으로 삼아 부귀를 구하는 것이니 내가 부끄러워하는 바다. 이제 마땅히 고을과 현과 군사의 호구를 갖추어 적어 다 위공에게 아뢰고 공이 스스로 바치게 하면, 이는 곧 위공의 공이니 또한 옳지 않겠는가.」

이에 사신을 보내 이밀에게 아뢰었다. 사신이 처음 이르렀을 때 고조는 표가 없고 오직 이밀에게 아뢰는 글만 있는 것을 듣고 몹시 괴이하게 여겼다. 사신이 이적의 뜻을 아뢰니 고조가 그제야 크게 기뻐하여 말하였다.

「서적이 은덕에 감동하여 공을 미루니 참으로 순수한 신하다.」

여주총관에 임명하고 이씨 성을 내렸으며 종정에 호적을 붙였다. 그 아버지 서개를 제음왕에 봉하였으나 굳이 왕의 작위를 사양하니 서국공에 봉하고 산기상시를 주었다. 이윽고 이적에게 우무후대장군을 더하였다.

이밀이 배반하여 죽임을 당하자 이적이 발상하고 상복을 입어 임금과 신하의 예를 갖추고 표를 올려 거두어 장사 지내기를 청하였다. 고조가 마침내 그 주검을 돌려주었다. 이에 위의를 크게 갖추고 삼군이 흰옷을 입어 여양산에 장사 지냈다. 예를 마치자 상복을 벗고 흩어지니 조정과 재야가 의롭게 여겼다.

이윽고 두건덕에게 공격당하여 건덕에게 사로잡혔다가 또 스스로 빠져나와 서울로 돌아왔다. 태종을 따라 왕세충과 두건덕을 쳐서 평정하였다.

정관 원년에 병주도독에 임명되었다. 명령하면 행해지고 금하면 그쳐 직분에 맞는다 일컬어졌고 돌궐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수 양제는 어질고 좋은 이를 정밀히 가려 변경을 진무할 줄 모르고, 오직 멀리 장성을 쌓고 장수와 군사를 널리 두어 돌궐에 대비하였으니, 뜻과 앎의 미혹함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짐이 이제 이적을 병주에 맡겨 마침내 돌궐이 위엄을 두려워하여 멀리 달아나고 변방이 고요하게 되었으니, 어찌 수천 리 장성보다 낫지 않겠는가.」

그 뒤 병주를 고쳐 대도독부를 두고 또 이적을 장사로 삼았으며 거듭 영국공에 봉하였다. 병주에 모두 열여섯 해 있었다. 불러 병부상서에 임명하고 정사를 아울러 맡게 하였다.

이적이 그때 갑작스러운 병을 만났는데 처방에 수염 재가 고칠 수 있다 하니, 태종이 몸소 수염을 잘라 약에 섞게 하였다. 이적이 머리를 조아려 피가 나도록 하고 울며 사례하니 태종이 말하였다.

「내가 사직을 위한 계책일 뿐이니 깊이 사례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라.」

십칠 년에 고종이 동궁에 있을 때 태자첨사로 옮기고 특진을 더하였으며 그대로 정사를 맡게 하였다. 태종이 또 일찍이 잔치할 때 이적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짐이 장차 어린 아이를 맡기려 하는데 생각해 보니 경보다 나은 이가 없다. 공이 지난날 이밀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이제 어찌 짐을 저버리겠는가.」

이적이 눈물을 씻고 말을 올리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렸다. 이윽고 몹시 취하니 임금의 옷으로 덮어 주었다. 그가 믿고 맡겨진 것이 이와 같았다.

이적은 군사를 낼 때마다 병법을 헤아려 쓰고 적을 만나 변화에 응하는 것이 움직임마다 기틀에 맞았다. 정관 뒤로 돌궐과 힐리와 설연타와 고구려 들을 쳐서 다 크게 깨뜨렸다. 태종이 일찍이 말하였다.

「이정과 이적 두 사람은 옛날의 한신과 백기이니 위청과 곽거병인들 어찌 미치겠는가.」

8마주

馬周,博州茌平人也。貞觀五年,至京師,舍於中郎將常何之家。時太宗令百官上書言得失,周為何陳便宜二十餘事,令奏之,事皆合旨。太宗怪其能,問何,何對曰:「此非臣所發意,乃臣家客馬周也。」太宗即日召之,未至間,凡四度遣使催促。及謁見,與語其悅。令直門下省,授監察御史,累除中書舍人。周有機辯,能敷奏,深識事端,故動無不中。太宗嘗曰:「我於馬周,暫時不見,則便思之。」十八年,歷遷中書令,兼太子左庶子。周既職兼兩宮,處事平允,甚獲當時之譽。又以本官攝吏部尚書。太宗嘗謂侍臣曰:「周見事敏速,性甚慎至。至於論量人物,直道而言,朕比任使之,多稱朕意。既寫忠誠,親附於朕,實藉此人,共康時政也。」

마주는 박주 치평 사람이다. 정관 오 년에 서울에 이르러 중랑장 상하의 집에 묵었다. 그때 태종이 온갖 벼슬아치에게 글을 올려 잘잘못을 말하게 하였는데, 마주가 상하를 위하여 편리한 일 스무 가지 남짓을 적어 아뢰게 하니 일마다 다 뜻에 맞았다. 태종이 그 능함을 괴이히 여겨 상하에게 물으니 상하가 대답하였다.

「이는 신이 낸 뜻이 아니라 신의 집 손인 마주가 한 것입니다.」

태종이 그날로 그를 불렀는데, 이르기 전에 모두 네 번이나 사신을 보내 재촉하였다. 뵙게 되어 말을 나누고는 기뻐하였다. 문하성에 숙직하게 하고 감찰어사를 주었으며 거듭 중서사인을 맡겼다. 마주는 기지 있는 말솜씨가 있고 아뢰기를 잘하며 일의 실마리를 깊이 아는 까닭에 움직이면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태종이 일찍이 말하였다.

「내가 마주를 잠시라도 보지 못하면 곧 그립다.」

십팔 년에 여러 벼슬을 거쳐 중서령이 되고 태자좌서자를 겸하였다. 마주가 두 궁의 직을 겸하고서도 일을 처리함이 공평하여 그때의 기림을 크게 얻었다. 또 본관으로 이부상서를 대신하였다. 태종이 일찍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마주는 일을 보는 것이 재빠르고 성품이 몹시 삼가고 지극하다. 사람을 논하여 헤아리는 데 이르러서는 곧은 도로 말한다. 짐이 근래 그를 맡겨 부리는데 짐의 뜻에 맞는 일이 많다. 이미 충성을 다 쏟아 짐에게 가까이 붙었으니, 참으로 이 사람에 힘입어 함께 이 시대의 정사를 편안케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