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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忠義第十四

정관정요 貞觀政要 · 오긍(吳兢) · 8세기 초 · 단락 14 · 한자 2,425자 · 낭독 9.7분

「정관정요」 충의를 논하다 「論忠義第十四」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당 태종이 신하들과 주고받은 말을 주제별로 모은 책. 임금의 길에서 시작해 간언을 받아들이는 법, 벼슬아치를 고르는 법, 형벌과 세금과 정벌을 거쳐 「끝을 삼감」으로 끝난다. 위징이 낯을 맞대고 꺾어 말하고 태종이 이를 받아들이는 장면이 책의 뼈대다. 고구려 안시성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며 성주에게 비단을 내린 일, 방현령이 죽어 가며 요동 정벌을 말린 상소도 여기에 있다.

馮立,武德中為東宮率,甚被隱太子親遇。太子之死也,左右多逃散,立嘆曰:「豈有生受其恩,而死逃其難!」於是率兵犯玄武門,苦戰,殺屯營將軍敬君弘。謂其徒曰:「微以報太子矣。」遂解兵遁於野。俄而來請罪,太宗數之曰:「汝昨者出兵來戰,大殺傷吾兵,將何以逃死?」立飲泣而對曰:「立出身事主,期之效命,當戰之日,無所顧憚。」因歔欷悲不自勝,太宗慰勉之,授左屯衛中郎將。立謂所親曰:「逢莫大之恩幸而獲免,終當以此奉答。」未幾,突厥至便橋,率數百騎與虜戰於咸陽,殺獲甚眾,所向皆披靡,太宗聞而嘉嘆之。時有齊王元吉府左車騎謝叔方率府兵與立合軍拒戰,及殺敬君弘、中郎將呂衡,王師不振,秦府護軍尉尉遲敬德乃持元吉首以示之,叔方下馬號泣,拜辭而遁。明日出首,太宗曰:「義士也。」命釋之,授右翊衛郎將。

풍립은 무덕 연간에 동궁의 솔이 되어 은태자에게 몹시 가까운 대접을 받았다. 태자가 죽자 좌우가 흔히 달아나 흩어졌는데 풍립이 탄식하였다.

「어찌 살아서 그 은혜를 받고 죽어서 그 어려움을 피하겠는가.」

이에 군사를 이끌고 현무문을 쳐 모질게 싸워 둔영장군 경군홍을 죽였다. 그 무리에게 말하였다.

「조금이나마 태자께 갚았다.」

마침내 군사를 풀고 들로 달아났다. 이윽고 와서 죄를 청하니 태종이 꾸짖었다.

「너는 어제 군사를 내어 와서 싸워 내 군사를 크게 죽이고 다쳤으니 장차 무엇으로 죽음을 피하겠는가.」

풍립이 울음을 삼키며 대답하였다.

「저는 몸을 내어 주인을 섬겨 목숨을 바치기를 기약하였으니, 싸우던 날에 돌아보아 꺼릴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고는 흐느껴 울며 슬픔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다. 태종이 위로하고 힘쓰게 하여 좌둔위중랑장을 주었다. 풍립이 가까운 이에게 말하였다.

「더없이 큰 은혜를 만나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으니 끝내 마땅히 이로써 받들어 갚으리라.」

얼마 되지 않아 돌궐이 편교에 이르자 수백 기를 이끌고 함양에서 오랑캐와 싸워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몹시 많았으며, 향하는 곳마다 다 쓰러졌다. 태종이 듣고 아름답게 여겨 감탄하였다.

그때 제왕 이원길의 부에 좌거기 사숙방이 있어 부의 군사를 이끌고 풍립과 군사를 합쳐 막아 싸웠다. 경군홍과 중랑장 여형을 죽이는 데 이르러 왕의 군사가 떨치지 못하였는데, 진왕부 호군 울지경덕이 이에 원길의 머리를 들어 보이니 숙방이 말에서 내려 소리 내어 울고 절하여 하직하고 달아났다. 이튿날 나와 자수하니 태종이 말하였다.

「의로운 선비다.」

놓아주라 명하고 우익위낭장을 주었다.

貞觀元年,太宗嘗從容言及隋亡之事,慨然嘆曰:「姚思廉不懼兵刃,以明大節,求諸古人,亦何以加也!」思廉時在洛陽,因寄物三百段,並遺其書曰:「想卿忠節之風,故有斯贈。」初,大業末,思廉為隋代王侑侍讀,及義旗克京城時,代王府僚多駭散,惟思廉侍王,不離其側。兵士將升殿,思廉厲聲謂曰:「唐公舉義兵,本匡王室,卿等不宜無禮於王!」眾服其言,於是稍卻,布列階下。須臾,高祖至,聞而義之,許其扶代王侑至順陽閤下,思廉泣拜而去。見者咸嘆曰:「忠烈之士,仁者有勇,此之謂乎!」

정관 원년에 태종이 일찍이 조용히 수나라가 망한 일을 말하다가 개연히 탄식하였다.

「요사렴은 칼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큰 절개를 밝혔으니, 옛사람에게서 구하더라도 또한 무엇으로 더하겠는가.」

요사렴이 그때 낙양에 있었으므로 물건 삼백 단을 부치고 아울러 그 글을 보냈다.

「경의 충성된 절개의 풍모를 생각하여 이 선물이 있다.」

처음에 대업 끝 무렵 요사렴은 수나라 대왕 양유의 시독이었다. 의로운 깃발이 서울을 이겼을 때 대왕부의 벼슬아치가 흔히 놀라 흩어졌으나 오직 사렴만이 왕을 모시고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군사들이 전에 오르려 하자 사렴이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당공이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본디 왕실을 바로잡으려 함이니, 그대들은 왕께 무례해서는 안 된다.」

무리가 그 말에 복종하여 이에 조금 물러나 섬돌 아래에 벌여 섰다. 잠깐 뒤에 고조가 이르러 듣고 의롭게 여겨, 그가 대왕 양유를 부축하여 순양각 아래에 이르는 것을 허락하니 사렴이 울며 절하고 떠났다. 본 이들이 다 탄식하였다.

「충성되고 매운 선비요 어진 이에게 용기가 있다 함이 이를 이름인가.」

貞觀二年,將葬故息隱王建成、海陵王元吉,尚書右丞魏徵與黃門侍郎王珪,請預陪送。上表曰:「臣等昔受命太上,委質東宮,出入龍樓,垂將一紀。前宮結釁宗社,得罪人神,臣等不能死亡,甘從夷戮,負其罪戾,寘錄周行,徒竭生涯,將何上報?陛下德光四海,道冠前王,陟岡有感,追懷棠棣,明社稷之大義,申骨肉之深恩,卜葬二王,遠期有日。臣等永惟疇昔,忝曰舊臣,喪君有君,雖展事居之禮;宿草將列,未申送往之哀。瞻望九原,義深凡百,望於葬日,送至墓所。」太宗義而許之,於是宮府舊僚吏,盡令送葬。

정관 이 년에 옛 식은왕 이건성과 해릉왕 이원길을 장사 지내려 하자, 상서우승 위징과 황문시랑 왕규가 함께 모시고 보내는 데 참여하기를 청하였다. 표를 올려 말하였다.

「신들이 옛날 태상황의 명을 받고 동궁에 몸을 맡겨 용루를 드나든 지 거의 열두 해가 되어 갑니다. 앞 궁이 종묘와 사직에 틈을 맺고 사람과 신령에게 죄를 얻었을 때, 신들이 죽지 못하고 달게 베임을 좇지도 못하여 그 죄를 지고 벼슬아치 반열에 두어 적혔으니, 한갓 살아온 세월을 다한들 장차 무엇으로 위에 갚겠습니까.

폐하께서 덕이 사해에 빛나고 도가 앞선 왕에 으뜸이시어, 산등성이에 올라 느낌이 있고 『당체』의 정을 좇아 그리시며, 사직의 큰 의로움을 밝히고 골육의 깊은 은혜를 펴시어 두 왕의 장사를 점치니 먼 날이 잡혔습니다.

신들이 길이 지난날을 생각하매 욕되이 옛 신하라 일컫습니다. 임금을 잃었어도 임금이 있으니 비록 살아 계신 이를 섬기는 예는 폈으나, 묵은 풀이 장차 벌여 설 때 가시는 이를 보내는 슬픔은 아직 펴지 못하였습니다. 아홉 벌판을 바라보매 의로움이 온갖 것보다 깊으니, 바라건대 장사 지내는 날에 무덤까지 보내게 하소서.」

태종이 의롭게 여겨 허락하고, 이에 동궁과 왕부의 옛 벼슬아치를 다 장사에 보내게 하였다.

貞觀五年,太宗謂侍臣曰:「忠臣烈士,何代無之。公等知隋朝誰為忠貞?」王珪曰:「臣聞太常丞元善達在京留守,見群賊縱橫,遂轉騎遠詣江都,諫煬帝,令還京師。既不受其言,後更涕泣極諫,煬帝怒,乃遠使追兵,身死瘴癘之地。有虎賁郎中獨孤盛在江都宿衛,宇文化及起逆,盛惟一身,抗拒而死。」太宗曰:「屈突通為隋將,共國家戰於潼關,聞京城陷,乃引兵東走。義兵追及於桃林,朕遣其家人往招慰,遽殺其奴。又遣其子往,乃云:『我蒙隋家驅使,已事兩帝,今者吾死節之秋,汝舊於我家為父子,今則於我家為仇讎。』因射之,其子避走,所領士卒多潰散。通惟一身,向東南慟哭盡哀。曰:『臣荷國恩,任當將帥,智力俱盡,致此敗亡,非臣不竭誠於國。』言盡,追兵擒之。太上皇授其官,每讬疾固辭。此之忠節,足可嘉尚。」因敕所司,采訪大業中直諫被誅者子孫,聞奏。

정관 오 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충성된 신하와 매운 선비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겠는가. 공들은 수나라 조정에서 누가 충성되고 곧았는지 아는가?」

왕규가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태상승 원선달이 서울에 남아 지키다가 뭇 도적이 함부로 날뛰는 것을 보고, 마침내 말을 몰아 멀리 강도에 가서 양제에게 간하여 서울로 돌아가시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뒤에 다시 눈물을 흘리며 지극히 간하니, 양제가 노하여 이에 멀리 군사를 뒤쫓는 일에 보내 몸이 장기 서린 땅에서 죽었습니다. 또 호분낭중 독고성이 강도에서 숙위하였는데, 우문화급이 거스름을 일으키자 성은 오직 한 몸으로 맞서 막다가 죽었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굴돌통은 수나라 장수가 되어 나라와 더불어 동관에서 싸웠는데,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이에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의로운 군사가 도림에서 뒤쫓아 미치니 짐이 그 집사람을 보내 불러 위로하게 하였는데, 문득 그 종을 죽였다. 또 그 아들을 보내니 이에 이르기를 『내가 수나라 집안의 부림을 입어 이미 두 황제를 섬겼다. 이제는 내가 절개에 죽을 때다. 너는 예전에 내 집에서 아비와 아들이었으나 이제는 곧 내 집에서 원수다』 하고 이어 활을 쏘았다. 그 아들이 피해 달아났고 거느린 군사가 흔히 무너져 흩어졌다. 굴돌통은 오직 한 몸으로 동남쪽을 향해 통곡하여 슬픔을 다하고 말하였다. 『신이 나라의 은혜를 짊어지고 소임이 장수에 마땅하였으나 슬기와 힘이 다하여 이 무너져 망함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나라에 정성을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말이 끝나자 뒤쫓던 군사가 그를 사로잡았다. 태상황께서 그 벼슬을 주었으나 늘 병을 핑계로 굳이 사양하였다. 이런 충성된 절개는 아름답게 높일 만하다.」

이에 맡은 관사에 칙명하여 대업 연간에 곧게 간하다 베임을 당한 이들의 자손을 찾아 물어 아뢰게 하였다.

貞觀六年,授左光祿大夫陳叔達禮部尚書,因謂曰:「武德中,公曾進直言於太上皇,明朕有克定大功,不可黜退云。朕本性剛烈,若有抑挫,恐不勝憂憤,以致疾斃之危。今賞公忠謇,有此遷授。」叔達對曰:「臣以隋氏父子自相誅戮,以至滅亡,豈容目睹覆車,不改前轍?臣所以竭誠進諫。」太宗曰:「朕知公非獨為朕一人,實為社稷之計。」

정관 육 년에 좌광록대부 진숙달에게 예부상서를 주고 이어 말하였다.

「무덕 연간에 공이 일찍이 태상황께 곧은 말을 올려, 짐에게 이겨 평정한 큰 공이 있으니 물리쳐 내칠 수 없다고 밝혔다. 짐이 본디 성품이 굳세고 매워, 만약 눌리고 꺾임이 있었다면 걱정과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병들어 죽는 위태로움에 이르렀을까 두렵다. 이제 공의 충성되고 곧음을 상 주어 이 옮겨 줌이 있다.」

숙달이 대답하였다.

「신은 수나라 부자가 서로 베고 죽여 멸망에 이른 것을 보았으니, 어찌 눈으로 엎어진 수레를 보고도 앞 바퀴자국을 고치지 않기를 용납하겠습니까. 신이 그래서 정성을 다해 간하였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짐은 공이 홀로 짐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사직의 계책을 위한 것임을 안다.」

貞觀八年,先是桂州都督李弘節以清慎聞,及身歿後,其家賣珠。太宗聞之,乃宣於朝曰:「此人生平,宰相皆言其清,今日既然,所舉者豈得無罪?必當深理之,不可舍也。」侍中魏徵承間言曰:「陛下生平言此人濁,未見受財之所,今聞其賣珠,將罪舉者,臣不知所謂。自聖朝以來,為國盡忠,清貞慎守,終始不渝,屈突通、張道源而已。通子三人來選,有一匹羸馬,道源兒子不能存立,未見一言及之。今弘節為國立功,前後大蒙賞賚,居官歿後,不言貪殘,妻子賣珠,未為有罪。審其清者,無所存問,疑其濁者,旁責舉人,雖云疾惡不疑,是亦好善不篤。臣竊思度,未見其可,恐有識聞之,必生枉議。」太宗撫掌曰:「造次不思,遂聞此語,方知談不容易。並勿問之。其屈突通、張道源兒子,宜各與一官。」

정관 팔 년, 이보다 앞서 계주도독 이홍절이 맑고 삼가는 것으로 이름이 났는데 몸이 죽은 뒤에 그 집이 구슬을 팔았다. 태종이 듣고 이에 조정에서 널리 알렸다.

「이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재상들이 다 그가 맑다 말하였는데 오늘 이러하니, 천거한 이들이 어찌 죄가 없겠는가. 반드시 마땅히 깊이 다스릴 것이요 놓아둘 수 없다.」

시중 위징이 틈을 타 말하였다.

「폐하께서 평소에 이 사람이 흐리다 말씀하시고도 재물 받은 자리를 보지 못하셨는데, 이제 그가 구슬을 팔았다는 말을 듣고 천거한 이를 벌하려 하시니 신은 무슨 말씀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성스러운 조정이 선 뒤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맑고 곧게 삼가 지켜 처음부터 끝까지 바뀌지 않은 이는 굴돌통과 장도원뿐입니다. 굴돌통의 아들 셋이 뽑히러 왔는데 여윈 말 한 필이 있을 뿐이었고, 장도원의 아들은 살아 설 수도 없는데 한마디도 이에 미치는 말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홍절은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워 앞뒤로 크게 상과 내림을 입었고, 벼슬에 있다 죽은 뒤에 탐하고 모질었다는 말은 없으며 아내와 자식이 구슬을 판 것이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 맑음을 살핀 이는 물어보시는 바가 없고, 그 흐림을 의심하는 이는 곁으로 천거한 사람을 꾸짖으시니, 비록 모짊을 미워함에 의심이 없다 하겠으나 이 또한 착함을 좋아함이 도탑지 못한 것입니다. 신이 가만히 헤아려 보아도 그 옳음을 보지 못하겠으니, 아는 이가 들으면 반드시 그릇된 의논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태종이 손뼉을 치며 말하였다.

「갑작스레 생각하지 못하고 마침내 이런 말이 들리게 하였으니, 이제야 말하기가 쉽지 않음을 안다. 아울러 이를 묻지 말라. 그 굴돌통과 장도원의 아들에게는 마땅히 저마다 벼슬 하나씩 주라.」

貞觀八年,太宗將發諸道黜陟使,畿內道未有其人,太宗親定,問於房玄齡等曰:「此道事最重,誰可充使?」右仆射李靖曰:「畿內事大,非魏徵莫可。」太宗作色曰:「朕今欲向九成宮,亦非小,寧可遣魏徵出使?朕每行不欲與其相離者,適為其見朕是非得失。公等能正朕不?可因輒有所言,大非道理。」乃即令李靖充使。

정관 팔 년에 태종이 여러 길에 출척사를 보내려 하는데 기내도에 아직 그 사람이 없었다. 태종이 몸소 정하려고 방현령 등에게 물었다.

「이 길의 일이 가장 무거우니 누가 사신을 채울 만한가?」

우복야 이정이 말하였다.

「기내의 일이 크니 위징이 아니면 안 됩니다.」

태종이 낯빛을 바꾸며 말하였다.

「짐이 이제 구성궁으로 가려 하니 또한 작은 일이 아닌데 어찌 위징을 사신으로 내보낼 수 있겠는가. 짐이 갈 때마다 그와 서로 떨어지려 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가 짐의 옳고 그름과 얻고 잃음을 보기 때문이다. 공들이 짐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문득 말하는 바가 있으니 크게 도리가 아니다.」

이에 곧 이정으로 사신을 채우게 하였다.

貞觀九年,蕭瑀為尚書左仆射。嘗因宴集,太宗謂房玄齡曰:「武德六年已後,太上皇有廢立之心,我當此日,不為兄弟所容,實有功高不賞之懼。蕭瑀不可以厚利誘之,不可以刑戮懼之,真社稷臣也。」乃賜詩曰:「疾風知勁草,板蕩識誠臣。」瑀拜謝曰:「臣特蒙誡訓,許臣以忠諒,雖死之日,猶生之年。」

정관 구 년에 소우가 상서좌복야가 되었다. 일찍이 잔치가 있을 때 태종이 방현령에게 말하였다.

「무덕 육 년 뒤로 태상황께 폐하고 세우려는 마음이 있었다. 내가 그때를 당하여 형제에게 용납되지 못하여 참으로 공이 높으면 상을 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소우는 두터운 이로움으로 꾈 수 없고 형벌과 죽임으로 두렵게 할 수 없으니 참으로 사직의 신하다.」

이에 시를 내렸다.

「모진 바람에 굳센 풀을 알고 뒤집힌 세상에 정성된 신하를 안다.」

소우가 절하고 사례하였다.

「신이 특별히 경계의 가르침을 입고 충성과 미쁨으로 허락받았으니, 비록 죽는 날이라도 오히려 살아 있는 해와 같습니다.」

貞觀十一年,太宗行至漢太尉楊震墓,傷其以忠非命,親為文以祭之。房玄齡進曰:「楊震雖當年夭枉,數百年後方遇聖明,停輿駐蹕,親降神作,可謂雖死猶生,沒而不朽。不覺助伯起幸賴欣躍於九泉之下矣。伏讀天文,且感且慰,凡百君子,焉敢不勖勵名節,知為善之有效!」

정관 십일 년에 태종이 다니다가 한나라 태위 양진의 무덤에 이르러, 그가 충성으로 제 명에 죽지 못한 것을 아파하여 몸소 글을 지어 제사하였다. 방현령이 나아가 말하였다.

「양진이 비록 그해에 일찍 억울하게 죽었으나 수백 년 뒤에 바야흐로 성스럽고 밝은 이를 만나, 수레를 멈추고 걸음을 머무르시어 몸소 신령한 글을 내리셨으니 비록 죽었어도 오히려 산 것이요 없어져도 썩지 않았다 이를 만합니다. 나도 모르게 양진이 다행히 힘입어 아홉 샘 아래에서 기뻐 뛰는 것을 돕게 되었습니다. 엎드려 하늘의 글을 읽으매 또한 느껍고 또한 위로됩니다. 무릇 온갖 군자가 어찌 감히 이름과 절개에 힘쓰지 않겠으며 착한 일을 하는 데 보람이 있음을 알지 않겠습니까.」

貞觀十一年,太宗謂侍臣曰:「狄人殺衛懿公,盡食其肉,獨留其肝。懿公之臣弘演呼天大哭,自出其肝,而內懿公之肝於其腹中。今覓此人,恐不可得。」特進魏徵對曰:「昔豫讓為智伯報讎,欲刺趙襄子,襄子執而獲之,謂之曰:『子昔事範、中行氏乎?智伯盡滅之,子乃委質智伯,不為報讎;今即為智伯報讎,何也?』讓答曰:『臣昔事範、中行,範、中行以眾人遇我,我以眾人報之。智伯以國士遇我,我以國士報之。』在君禮之而已,亦何謂無人焉?」

정관 십일 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적인이 위 의공을 죽여 그 살을 다 먹고 홀로 그 간만 남겼다. 의공의 신하 홍연이 하늘을 부르며 크게 울고 스스로 제 간을 꺼내어 의공의 간을 제 뱃속에 넣었다. 이제 이런 사람을 찾으면 아마 얻지 못하리라.」

특진 위징이 대답하였다.

「옛날 예양이 지백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고 조양자를 찌르려 하였는데, 양자가 잡아 얻고서 이르기를 『그대는 옛날 범씨와 중항씨를 섬기지 않았는가. 지백이 그들을 다 없앴는데 그대는 이에 지백에게 몸을 맡기고 원수를 갚지 않았다. 이제는 곧 지백을 위해 원수를 갚으려 하니 어찌된 일인가』 하였습니다. 예양이 대답하기를 『신이 옛날 범씨와 중항씨를 섬겼을 때는 범씨와 중항씨가 뭇사람으로 나를 대하였으므로 내가 뭇사람으로 갚았습니다. 지백은 나라의 선비로 나를 대하였으므로 내가 나라의 선비로 갚습니다』 하였습니다. 임금이 예로 대하는 데 있을 뿐이니 또한 어찌 사람이 없다 이르겠습니까.」

貞觀十二年,太宗幸蒲州,因詔曰:「隋故鷹擊郎將堯君素,往在大業,受任河東,固守忠義,克終臣節。雖桀犬吠堯,有乖倒戈之志,疾風勁草,實表歲寒之心。爰踐茲境,追懷往事,宜錫寵命,以申勸獎。可追贈蒲州刺史,仍訪其子孫以聞。」

정관 십이 년에 태종이 포주에 거둥하여 이에 조서를 내렸다.

「수나라의 옛 응격낭장 요군소는 지난 대업 연간에 하동에서 소임을 받아 충성과 의로움을 굳게 지키고 신하의 절개를 잘 마쳤다. 비록 걸의 개가 요임금을 보고 짖은 것이라 창을 거꾸로 드는 뜻과는 어긋남이 있으나, 모진 바람에 굳센 풀이라 참으로 추운 철의 마음을 드러냈다. 이 땅을 밟고서 지난 일을 좇아 생각하니, 마땅히 은총의 명을 내려 권하고 기림을 펴야 하겠다. 포주자사를 추증하고 아울러 그 자손을 찾아 아뢰게 하라.」

貞觀十二年,太宗謂中書侍郎岑文本曰:「梁、陳名臣,有誰可稱?復有子弟堪招引否?」文本奏言:「隋師入陳,百司奔散,莫有留者,惟尚書仆射袁憲獨在其主之傍。王世充將受隋禪,群僚表請勸進,憲子國子司業承家,讬疾獨不署名。此之父子,足稱忠烈。承家弟承序,今為建昌令。清貞雅操,實繼先風。」由是召拜晉王友,兼令侍讀,尋授弘文館學士。

정관 십이 년에 태종이 중서시랑 잠문본에게 말하였다.

「양나라와 진나라의 이름난 신하 가운데 누가 일컬을 만한가. 또 불러 이끌 만한 자제가 있는가?」

문본이 아뢰었다.

「수나라 군사가 진나라에 들어가자 온갖 관사가 달아나 흩어져 머무르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상서복야 원헌만이 홀로 그 임금 곁에 있었습니다. 왕세충이 수나라의 선양을 받으려 할 때 뭇 벼슬아치가 표를 올려 나아가기를 권하였는데, 원헌의 아들 국자사업 원승가는 병을 핑계로 홀로 이름을 적지 않았습니다. 이 아비와 아들은 충성되고 매웠다 일컫기에 넉넉합니다. 승가의 아우 승서는 이제 건창령입니다. 맑고 곧은 우아한 지조가 참으로 앞선 풍모를 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불러 진왕의 벗으로 삼고 겸하여 시독하게 하였으며, 이윽고 홍문관학사를 주었다.

貞觀十五年,詔曰:「朕聽朝之暇,觀前史,每覽前賢佐時,忠臣徇國,何嘗不想見其人,廢書欽嘆!至於近代以來,年歲非遠,然其胤緒,或當見存,縱未能顯加旌表,無容棄之遐裔。其周、隋二代名臣及忠節子孫,有貞觀已來犯罪配流者,宜令所司具錄奏聞。」於是多從矜宥。

정관 십오 년에 조서를 내렸다.

「짐이 조회를 듣는 겨를에 앞선 역사를 보매, 앞선 어진 이가 때를 돕고 충성된 신하가 나라에 목숨 바친 것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을 만나 보고 싶어 책을 놓고 우러러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다. 요사이 세상에 이르러서는 햇수가 멀지 않으니 그 후손이 더러 마땅히 살아 있을 것이다. 설사 드러나게 표창하지는 못하더라도 먼 변방에 버려두기를 용납할 수 없다. 그 주나라와 수나라 두 시대의 이름난 신하와 충성된 절개를 지킨 이의 자손 가운데 정관 이래로 죄를 지어 귀양 간 이가 있으면, 마땅히 맡은 관사로 하여금 갖추어 적어 아뢰게 하라.」

이에 흔히 가엾이 여겨 용서하였다.

貞觀十九年,太宗攻遼東安市城,高麗人眾皆死戰,詔令耨薩延壽、惠真等降,眾止其城下以招之,城中堅守不動。每見帝幡旗,必乘城鼓譟。帝怒甚,詔江夏王道宗築土山,以攻其城,竟不能克。太宗將旋師,嘉安市城主堅守臣節,賜絹三百匹,以勸勵事君者。

정관 십구 년에 태종이 요동의 안시성을 쳤는데 고구려 사람들이 다 죽기로 싸웠다. 조서로 욕살 연수와 혜진 등을 항복시켜 무리를 그 성 아래에 두고 부르게 하였으나, 성안에서는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황제의 깃발을 볼 때마다 반드시 성에 올라 북을 치고 소리를 질렀다. 황제가 몹시 노하여 강하왕 이도종에게 조서하여 흙산을 쌓아 그 성을 치게 하였으나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태종이 군사를 돌리려 하면서 안시성주가 신하의 절개를 굳게 지킨 것을 아름답게 여겨 비단 삼백 필을 내려, 임금을 섬기는 이들을 권하고 힘쓰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