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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儉約第十八

정관정요 貞觀政要 · 오긍(吳兢) · 8세기 초 · 단락 9 · 한자 1,330자 · 낭독 5.3분

「정관정요」 검약을 논하다 「論儉約第十八」의 한문 원문과 우리말 번역을 단락마다 나란히 실었습니다. 당 태종이 신하들과 주고받은 말을 주제별로 모은 책. 임금의 길에서 시작해 간언을 받아들이는 법, 벼슬아치를 고르는 법, 형벌과 세금과 정벌을 거쳐 「끝을 삼감」으로 끝난다. 위징이 낯을 맞대고 꺾어 말하고 태종이 이를 받아들이는 장면이 책의 뼈대다. 고구려 안시성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며 성주에게 비단을 내린 일, 방현령이 죽어 가며 요동 정벌을 말린 상소도 여기에 있다.

貞觀元年,太宗謂侍臣曰:「自古帝王凡有興造,必須貴順物情。昔大禹鑿九山,通九江,用人力極廣,而無怨讟者,物情所欲,而眾所共有故也。秦始皇營建宮室,而人多謗議者,為徇其私欲,不與眾共故也。朕今欲造一殿,材木已具,遠想秦皇之事,遂不復作也。古人云:『不作無益害有益。』『不見可欲,使民心不亂。』固知見可欲,其心必亂矣。至如雕鏤器物,珠玉服玩,若恣其驕奢,則危亡之期可立待也。自王公以下,第宅、車服、婚嫁、喪葬,準品秩不合服用者,宜一切禁斷。」由是二十年間,風俗簡樸,衣無錦繡,財帛富饒,無饑寒之弊。

정관 원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예로부터 제왕이 무릇 일으켜 짓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사물의 정을 따르는 것을 귀히 여겨야 한다. 옛날 대우가 아홉 산을 뚫고 아홉 강을 통하게 하여 사람의 힘을 쓴 것이 지극히 넓었으나 원망하고 헐뜯는 이가 없었던 것은, 사물의 정이 바라는 바요 뭇사람이 함께 가지는 바였기 때문이다. 진 시황이 궁실을 지으매 사람들이 흔히 헐뜯어 의논한 것은 그 사사로운 욕심을 좇고 뭇사람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짐이 이제 전각 하나를 지으려고 재목이 이미 갖추어졌으나, 멀리 진 시황의 일을 생각하여 마침내 다시 짓지 않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보탬 없는 것을 지어 보탬 있는 것을 해치지 말라』 하였고, 『바랄 만한 것을 보이지 않아 백성의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한다』 하였다. 참으로 바랄 만한 것을 보면 그 마음이 반드시 어지러워짐을 안다. 그릇을 새기고 아로새기며 구슬과 옥으로 옷과 노리개를 삼는 데 이르러, 만약 그 교만과 사치를 마음껏 하면 곧 위태롭고 망하는 때를 서서 기다릴 만하다.

왕공 아래로 집과 수레와 옷과 혼인과 상장에서, 품계에 견주어 입고 쓰기에 맞지 않는 것은 마땅히 모두 금하여 끊으라.」

이로 말미암아 스무 해 사이에 풍속이 수수하고 질박하여 옷에 비단 수가 없고 재물과 비단이 넉넉하며 굶주림과 추위의 폐단이 없었다.

貞觀二年,公卿奏曰:「依《禮》,季夏之月,可以居臺榭。今夏暑未退,秋霖方始,宮中卑濕,請營一閣以居之。」太宗曰:「朕有氣疾,豈宜下濕?若遂來請,糜費良多。昔漢文將起露臺,而惜十家之產,朕德不逮於漢帝,而所費過之,豈為人父母之道也?」固請至於再三,竟不許。

정관 이 년에 공경이 아뢰었다.

「『예기』에 따르면 여름 끝 달에는 대와 정자에 거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여름 더위가 아직 물러가지 않았고 가을 장마가 바야흐로 시작되었는데 궁 안이 낮고 눅눅하니, 청컨대 누각 하나를 지어 거처하소서.」

태종이 말하였다.

「짐에게 숨이 차는 병이 있으니 어찌 낮고 눅눅한 데가 마땅하겠는가. 만약 마침내 청하는 대로 한다면 헛되이 쓰는 것이 참으로 많다. 옛날 한 문제가 이슬대를 지으려다가 열 집의 재산을 아꼈다. 짐은 덕이 한나라 황제에 미치지 못하는데 쓰는 것이 그보다 지나치다면 어찌 백성의 부모 된 도이겠는가.」

두 번 세 번 굳이 청하기에 이르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貞觀四年,太宗謂侍臣曰:「崇飾宮宇,遊賞池臺,帝王之所欲,百姓之所不欲。帝王所欲者放逸,百姓所不欲者勞弊。孔子云:『有一言可以終身行之者,其恕乎!已所不欲,勿施於人。』勞弊之事,誠不可施於百姓。朕尊為帝王,富有四海,每事由己,誠能自節,若百姓不欲,必能順其情也。」魏徵曰:「陛下本憐百姓,每節己以順人。臣聞『以欲從人者昌,以人樂己者亡。』隋煬帝志在無厭,惟好奢侈,所司每有供奉營造,小不稱意,則有峻罰嚴刑。上之所好,下必有甚,競為無限,遂至滅亡。此非書籍所傳,亦陛下目所親見。為其無道,故天命陛下代之。陛下若以為足,今日不啻足矣;若以為不足,更萬倍過此,亦不足。」太宗曰:「公所奏對甚善。非公,朕安得聞此言?」

정관 사 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궁궐을 높여 꾸미고 못과 대에서 노닐며 구경하는 것은 제왕이 바라는 바요 백성이 바라지 않는 바다. 제왕이 바라는 것은 마음껏 놀며 게으른 것이요 백성이 바라지 않는 것은 수고롭고 피폐한 것이다. 공자가 이르기를 『한마디로 몸이 다하도록 행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용서로다. 제가 바라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 하였다. 수고롭고 피폐한 일은 참으로 백성에게 베풀 수 없다. 짐이 높기로는 제왕이 되고 넉넉하기로는 사해를 가져 일마다 제게서 말미암으니, 참으로 스스로 마디를 지을 수 있다면 백성이 바라지 않는 일에는 반드시 그 정을 따를 수 있다.」

위징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본디 백성을 가엾이 여기시어 늘 제 몸을 아껴 사람을 따르십니다. 신이 듣건대 『욕심으로 남을 좇는 이는 창성하고 남으로 저를 즐겁게 하는 이는 망한다』 하였습니다. 수 양제는 뜻이 싫증 없는 데 있어 오직 사치만 좋아하여, 맡은 관사가 받들어 지을 때마다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곧 매운 벌과 엄한 형벌이 있었습니다. 위에서 좋아하는 바를 아래에서 반드시 더 심하게 하여, 다투어 끝없이 하다가 마침내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책에 전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폐하께서 눈으로 몸소 보신 것입니다. 그가 도가 없었으므로 하늘이 폐하께 명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만약 넉넉하다 여기시면 오늘도 넉넉할 뿐 아니라 남습니다. 만약 넉넉하지 않다 여기시면 다시 이보다 만 곱절이라도 또한 넉넉하지 않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공이 아뢰어 대답한 바가 몹시 좋다. 공이 아니면 짐이 어찌 이 말을 들었겠는가.」

貞觀十六年,太宗謂侍臣曰:「朕近讀《劉聰傳》,聰將為劉後起䳨儀殿,廷尉陳元達切諫,聰大怒,命斬之。劉後手疏啟請,辭情甚切,聰怒乃解,而甚愧之。人之讀書,欲廣聞見以自益耳,朕見此事,可以為深誡。比者欲造一殿,仍構重閣,今於藍田采木,並已備具,遠想聰事,斯作遂止。」

정관 십육 년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짐이 요사이 「유총전」을 읽었다. 유총이 유황후를 위해 봉의전을 지으려 하자 정위 진원달이 간절히 간하니, 유총이 크게 노하여 베라 명하였다. 유황후가 손수 글을 올려 청하는데 말과 정이 몹시 간절하매 유총의 노여움이 이에 풀렸고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사람이 책을 읽는 것은 듣고 보는 것을 넓혀 스스로에게 보태려 함일 뿐이다. 짐이 이 일을 보고 깊은 경계로 삼을 만하다 여긴다. 요사이 전각 하나를 지어 이어 겹누각을 얽으려 하여 이제 남전에서 나무를 베어 아울러 이미 갖추었으나, 멀리 유총의 일을 생각하여 이 짓는 일을 마침내 그쳤다.」

貞觀十一年,詔曰:「朕聞死者終也,欲物之反真也;葬者藏也,欲令人之不得見也。上古垂風,未聞於封樹;後世貽則,乃備於棺槨。譏僭侈者,非愛其厚費;美儉薄者,實貴其無危。是以唐堯,聖帝也,谷林有通樹之說;秦穆,明君也,橐泉無丘隴之處。仲尼,孝子也,防墓不墳;延陵,慈父也,嬴、博可隱。斯皆懷無窮之慮,成獨決之明,乃便體於九泉,非徇名於百代也。洎乎闔閭違禮,珠玉為鳧雁;始皇無度,水銀為江海;季孫擅魯,斂以玙璠;桓魋專宋,葬以石槨,莫不因多藏以速禍,由有利而招辱。玄廬既發,致焚如於夜臺;黃腸再開,同暴骸於中野。詳思曩事,豈不悲哉?由此觀之,奢侈者可以為戒,節儉者可以為師矣。朕居四海之尊,承百王之弊,未明思化,中宵戰惕。雖送往之典詳諸儀制,失禮之禁著在刑書,而勛戚之家多流遁於習俗,閭閻之內或侈靡而傷風,以厚葬為奉終,以高墳為行孝,遂使衣衾棺槨極雕刻之華,靈輀冥器窮金玉之飾。富者越法度以相尚,貧者破資產而不逮,徒傷教義,無益泉壤,為害既深,宜為懲革。其王公以下,爰及黎庶,自今以後,送葬之具有不依令式者,仰州府縣官明加檢察,隨狀科罪。在京五品以上及勛戚家,仍錄奏聞。」

정관 십일 년에 조서를 내렸다.

「짐이 듣건대 죽음이란 마침이니 사물이 참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요, 장사란 감추는 것이니 사람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에 드리운 풍속에는 봉분을 하고 나무 심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뒷세상에 남긴 법에야 곧 널과 덧널을 갖추었다. 참람하고 사치함을 비웃는 것은 그 두터운 비용을 아껴서가 아니요, 검소하고 엷음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은 참으로 그 위태로움이 없음을 귀히 여겨서다.

그래서 요임금은 성스러운 황제였으나 곡림에는 나무를 뚫었다는 말이 있고, 진 목공은 밝은 임금이었으나 탁천에는 언덕과 무덤 자리가 없다. 중니는 효자였으나 방산의 무덤에 봉분을 하지 않았고, 연릉은 자애로운 아비였으나 영과 박 사이면 감출 만하다 하였다. 이는 다 끝없는 헤아림을 품고 홀로 결단하는 밝음을 이룬 것이니, 곧 아홉 샘 아래에서 몸을 편하게 한 것이요 백 대에 이름을 좇은 것이 아니다.

합려가 예를 어겨 구슬과 옥으로 오리와 기러기를 만들고, 시황이 헤아림이 없어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며, 계손이 노나라를 마음대로 하여 여번옥으로 염하고, 환퇴가 송나라를 오로지하여 돌 덧널로 장사한 데 이르러서는, 많이 감춘 까닭에 재앙을 부르고 이로움이 있는 까닭에 욕을 부르지 않은 이가 없다. 그윽한 무덤이 이미 파헤쳐져 밤의 대에서 불타는 데 이르렀고, 황장이 다시 열려 들 가운데 뼈를 드러내는 것과 같아졌다. 지난 일을 자세히 생각하면 어찌 슬프지 않은가. 이로 보건대 사치한 이는 경계로 삼을 만하고 검소한 이는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짐이 사해의 높은 자리에 있어 백 왕의 폐단을 이어받았으매, 날이 밝기 전부터 되어 감을 생각하고 한밤중에 떨며 두려워한다. 비록 가는 이를 보내는 법전이 여러 의례 제도에 자세하고 예를 잃음을 금하는 것이 형법 책에 적혀 있으나, 공훈 있고 인척 된 집이 흔히 익힌 풍속에 흘러 달아나고 마을 안에서도 더러 사치하여 풍속을 다친다. 두터운 장사를 마지막을 받드는 것이라 하고 높은 봉분을 효도를 행하는 것이라 하여, 마침내 옷과 이불과 널과 덧널이 새김의 화려함을 다하고 상여와 껴묻는 그릇이 금과 옥의 꾸밈을 다하게 되었다. 넉넉한 이는 법도를 넘어 서로 높이고 가난한 이는 재산을 무너뜨리고도 미치지 못하니, 한갓 가르침과 의로움을 다칠 뿐 저승에 보탬이 없다. 해로움이 이미 깊으니 마땅히 징계하여 고쳐야 한다.

그 왕공 이하로 뭇 백성에 이르기까지, 이제부터 뒤로 장사 보내는 도구에 법식을 따르지 않는 것이 있으면 주와 부와 현의 벼슬아치가 밝게 살펴 정상에 따라 죄를 매기게 하라. 서울에 있는 오품 이상과 공훈 있고 인척 된 집은 아울러 적어 아뢰게 하라.」

岑文本為中書令,宅卑濕,無帷帳之飾。有勸其營產業者,文本嘆曰:「吾本漢南一布衣耳,竟無汗馬之勞,徒以文墨致位中書令,斯亦極矣。荷俸祿之重,為懼已多,更得言產業乎?」言者嘆息而退。

잠문본이 중서령이 되었는데 집이 낮고 눅눅하며 휘장의 꾸밈이 없었다. 살림을 마련하기를 권하는 이가 있으니 문본이 탄식하였다.

「나는 본디 한수 남쪽의 한 베옷 입은 사람일 뿐이라 끝내 땀 흘린 말의 수고도 없었는데, 한갓 글과 먹으로 중서령 자리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지극하다. 녹의 무거움을 짊어져 두려움이 이미 많은데 다시 살림을 말하겠는가.」

말한 이가 탄식하며 물러갔다.

戶部尚書戴胄卒,太宗以其居宅弊陋,祭享無所,令有司特為之造廟。

호부상서 대주가 죽었는데 태종이 그 사는 집이 낡고 좁아 제사 지낼 데가 없다 하여, 맡은 관사에 명해 특별히 그를 위해 사당을 짓게 하였다.

溫彥博為尚書右仆射,家貧無正寢,及薨,殯於旁室。太宗聞而嗟嘆,遽命所司為造,當厚加賻贈。

온언박이 상서우복야가 되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정침이 없었다. 죽었을 때 곁방에 빈소를 차렸다. 태종이 듣고 탄식하여 곧 맡은 관사에 명해 지어 주게 하고 마땅히 부의를 두터이 더하게 하였다.

魏徵宅內,先無正堂。及遇疾,太宗時欲造小殿,而輟其材為徵營構,五日而就。遣中使齎素褥布被而賜之,以遂其所尚。

위징의 집 안에는 앞서 정당이 없었다. 병이 들자 태종이 그때 작은 전각을 지으려던 것을 그만두고 그 재목으로 위징을 위해 얽어 주니 닷새 만에 이루어졌다. 중사를 보내 흰 요와 베 이불을 가지고 가 내려 주어 그가 높이는 바를 이루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