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仁惻第二十
貞觀初,太宗謂侍臣曰:「婦人幽閉深宮,情實可湣。隋氏末年,求采無已,至於離宮別館,非幸御之所,多聚宮人。此皆竭人財力,朕所不取。且灑掃之餘,更何所用?今將出之,任求伉儷,非獨以省費,兼以息人,亦各得遂其情性。」於是後宮及掖庭前後所出三千餘人。
정관 처음에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여자가 깊은 궁궐에 갇혀 있으니 정이 참으로 가엾다. 수나라 끝 무렵에 찾아 뽑기를 그침이 없어, 딴 궁궐과 딴 집으로 임금이 거둥하는 곳이 아닌 데까지 궁인을 많이 모아 두었다. 이는 다 사람의 재물과 힘을 다하는 것이라 짐이 취할 바가 아니다. 또 물 뿌리고 쓰는 일 밖에 다시 무엇에 쓰겠는가. 이제 내보내어 짝 구하기를 맡기려 하니, 홀로 비용을 덜 뿐 아니라 아울러 사람을 쉬게 하고 또한 저마다 그 정과 성품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이에 후궁과 액정에서 앞뒤로 내보낸 이가 삼천여 사람이었다.
貞觀二年,關中旱,大饑。太宗謂侍臣曰:「水旱不調,皆為人君失德。朕德之不修,天當責朕,百姓何罪,而多遭困窮!聞有鬻男女者,朕甚湣焉。」乃遣御史大夫杜淹巡檢,出御府金寶贖之,還其父母。
정관 이 년에 관중이 가물어 크게 굶주렸다. 태종이 곁에서 모시는 신하에게 말하였다.
「물과 가뭄이 고르지 않은 것은 다 임금이 덕을 잃은 탓이다. 짐이 덕을 닦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마땅히 짐을 꾸짖어야 할 터인데, 백성이 무슨 죄로 이토록 곤궁함을 만나야 하는가. 아들딸을 파는 이가 있다 하니 짐이 몹시 가엾이 여긴다.」
이에 어사대부 두엄을 보내 돌아보아 살피게 하고, 임금의 곳간에서 금과 보배를 내어 물러 사서 그 부모에게 돌려주었다.
貞觀七年,襄州都督張公謹卒。太宗聞而嗟悼,出次發哀。有司奏言:「《準陰陽書》云:『日在辰,不可哭泣。』此亦流俗所忌。」太宗曰:「君臣之義,同於父子,情發於中,安避辰日?」遂哭之。
정관 칠 년에 양주도독 장공근이 죽었다. 태종이 듣고 탄식하며 슬퍼하여 밖에 나가 자리를 잡고 애곡을 발하려 하였다. 맡은 관사가 아뢰었다.
「음양서에 견주면 이르기를 『해가 진에 있으면 곡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이는 또한 세속이 꺼리는 바입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임금과 신하의 의로움은 아비와 아들과 같다. 정이 속에서 나오는데 어찌 진일을 피하겠는가.」
마침내 곡하였다.
貞觀十九年,太宗征高麗,次定州,有兵士到者,帝御州城北門樓撫慰之。有從卒一人病,不能進。詔至床前,問其所苦,仍敕州縣醫療之。是以將士莫不欣然願從。及大軍回次柳城,詔集前後戰亡人骸骨,設太牢致祭,親臨,哭之盡哀,軍人無不灑泣。兵士觀祭者,歸家以言,其父母曰:「吾兒之喪,天子哭之,死無所恨。」太宗征遼東,攻白巖城,右衛大將軍李思摩為流矢所中,帝親為吮血,將士莫不感勵。
정관 십구 년에 태종이 고구려를 치러 정주에 머물렀는데, 이르는 군사가 있으면 황제가 주성 북문 다락에 나가 어루만져 위로하였다. 따라온 군졸 하나가 병들어 나아가지 못하였다. 조서로 평상 앞에 이르게 하여 그 괴로운 바를 묻고, 이어 주와 현에 칙명하여 치료하게 하였다. 그래서 장수와 군사가 기꺼이 따르기를 바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큰 군사가 돌아와 유성에 머물렀을 때 조서로 앞뒤로 싸우다 죽은 이들의 뼈를 모으고 태뢰를 갖추어 제사하게 하였다. 몸소 임하여 곡하며 슬픔을 다하니 군사들이 눈물을 뿌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제사를 본 군사가 집에 돌아가 말하니 그 부모가 말하였다.
「내 아들의 상에 천자가 곡해 주셨으니 죽어도 한스러울 바가 없다.」
태종이 요동을 칠 때 백암성을 공격하다가 우위대장군 이사마가 흐르는 화살에 맞으니 황제가 몸소 피를 빨아 주었다. 장수와 군사가 느껴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